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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입니다. 잠간씩 추웠던 겨울이 조금씩 물러가겠지요. 추위보다도 미세먼지로 괴로웠던 겨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극의 차가운 공기가 수시로 쳐들어왔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도 기후변화의 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추운 겨울이 견디기 힘들어도 어쩌면 우리 생활에 매우 유익한 계절입니다. 피해가 겁나지만 태풍도 필요하듯 강추위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해로운 해충들이나 세균들이 좀 정리될 것입니다. 구태여 엄청난 방역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따뜻한 겨울을 지내고 나면 날씨 풀릴 때 뭔 일이 생길지 걱정됩니다. 코로나는 진작 다시 기세를 부리고 있고 신종 코로나도 덩달아 생길 듯한데 금년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설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가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는데 그럼에도 기다려집니다. 여하튼 빚을 내서라도 즐겁고 행복한 명절을 꾸며야지요. 요즘이야 가족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요란스러운 모임도 그다지 없습니다. 모여 봐야 몇 시간이 고작입니다. 옛날에는 친척들 모이고 아이들은 하루 이틀 그 집에서 자고 놀다 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쩌면 모이지 않아도 재밌는 일이 많은 모양입니다. 지금 어른들이 지니고 있는 추억은 말 그대로 먼 옛날이야기입니다. 생각하노라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다시는 못 올 시간들입니다. 아무튼 그래도 아직은 하나 둘 만날 자식이 있으니 천만다행인데 다음 세대는 어찌 될지 지레 겁납니다. 그 때는 그 때의 문화가 있겠지요.
하루 짧은 한 달이지만 빨리 가겠지요? 건강하게 즐겁게 복된 한 달을 빕니다. ^)^ 2024년 2월 3일 김종우 목사 드림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19 : 33 - 34)
<나의 올드 오크>
타국에서의 삶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 나라에서 받아준 것만도 감사하며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난민이 되어 고국을 떠나 사는 경우입니다. 단순히 고향을 떠나는 것과 나라를 떠나는 것은 차이가 매우 큽니다. 일단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선 말이 통해야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덜할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그 답답함을 어떻게 해소하겠습니까? 일 처리도 안 되고 마음도 상하고 그만큼 상처도 오래 간직될 것입니다. 사춘기 때 당해야 한다면 그 아픔은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낯선 사람들 그것도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동네로 들어온다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요? 나라마다 민족마다 대하는 태도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나라에서 들어왔다면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기 쉽습니다. 한 나라에서도 지방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적 차원이라면 그 차이는 훨씬 커집니다. 경계부터 하리라 짐작합니다. 인종, 나라, 종교 등의 차이는 편견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더구나 주민들 중에는 타지에서 들어온 사람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잠간 들러 간다면 문제 될 것도 없지만 들어와 산다면 상대하기 매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원주민은 기득권자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사람의 따뜻한 사랑도 겸하여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런 사람도 있고 적대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울리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쟁광이 있는가 하면 평화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세상은 어쩌면 부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적대적이고 쌈질이나 하려는 사람도 그만한 동기를 숨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약점이나 아픔을 이겨내 보려는 반작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끼리끼리 모입니다. 욕지거리 주고받으며 푸는 것입니다. 그래봐야 물론 덕 될 것도 없고 유익한 일도 나오지 않습니다. 도태될 것입니다.
폐광촌,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의 마을에 한 무리의 시리아 난민이 들어옵니다. 마침 지나가던 주민들이 도끼눈을 하고 쳐다봅니다. 영 달갑지 않은 표정에 시비까지 걸어옵니다. 시작부터 삶이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 때 한 어른이 그들 편에서 도와줍니다. 이주민 가운데 현지어를 사용할 줄 아는 젊은 여자가 있습니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을 카메라에 담고 있습니다. 모여서 시비를 걸던 주민이 카메라를 빼앗습니다. 왜 자기네를 찍느냐고 막무가내로 빼앗아 찍힌 것을 지우려 합니다. 여자가 도로 달라고 하며 옥신각신 카메라를 땅에 떨어뜨립니다. 남자들은 사라집니다. 카메라를 살피던 ‘라야’가 울상이 됩니다.
현장에서 도우려던 ‘TJ'와 라야가 인연을 갖게 된 시작입니다. 마을의 유일한 펍(선술집 정도 되는 곳)을 운영하고 있는 티제이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며 펍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래 중년 남자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합니다. 동네 온갖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난민 이주민이 들어온 것에 대한 불만이 대단합니다. 티제이는 들으면서 동조하지 않습니다. 가게 옆에 딸린 큰 창고가 있습니다. 자기네 모임과 회의를 위해 빌려달라고 청하지만 안전을 핑계로 거절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자원봉사자 ’타니‘와 난민 라야가 한 마음으로 뭉쳐 난민 이주민과 마을 어려운 주민 및 청소년들을 위하여 무료 급식을 시행합니다.
그 장소로 티제이가 방치해두었던 창고를 택합니다. 그곳을 원했던 펍의 단골손님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화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 몰래 보복조치를 행합니다. 얼마 못하고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을 알게 된 티제이는 배신감을 누르며 꾸짖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자신보다도 약한 난민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며 푸는 졸장부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여전히 그 날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냥 서운해 합니다. 그마저 고깝게 보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없었던 일로 하는 거지요. 방법을 찾으려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과 기관들을 찾아다니며 사정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라야에게 함께 하기를 소망하며 기다렸던 아버지에 대한 소식이 들어옵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옥중생활 중에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라야에게 티제이가 찾아와 위로를 전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뒤를 이어 무료급식소에서 잠시라도 함께 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찾아옵니다. 손에는 조문 꽃다발을 들고서 말입니다. 서로 안아주며 위로를 합니다.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있습니다. ‘희망 때문에 괴로워요.’ 그 희망이 이루지기까지 힘들지요. 더구나 이뤄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용기가 있어야 희망이 생겨요.’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진다는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를 보았습니다. 그 펍의 상호입니다.
빛의 아들이 됩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3 가지만 뽑는다면 공기와 물과 빛입니다. 때문에 이 세 가지는 값을 받지 않습니다. 요즘은 하도 오염이 되어서 물을 사먹는 세상이 되었지만 본래 사먹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다가도 아무 데서나 떠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자랄 때만도 그랬습니다. 아무 집이나 하다못해 어느 가게를 들어가서라도 물 한 그릇만 주세요, 하면 군소리 없이 내주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 없습니다. 가게 들어가서 500원 주고 물이 담겨 있는 패트병 하나 사서 먹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신선한 공기라고 통조림해서 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면 빛도 담아서 팔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등불이나 가스불이야 물론 돈 주고 사서 쓰고 있지만 저 무한정한 햇빛을 사서 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모든 생물에게 빛 또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빛은 또한 어둠을 밝혀줍니다. 그럼으로써 사물을 분별하게 해줍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길 때 우리는 이런 비유를 곧잘 사용합니다. ‘나라를 빛낸 사람,’ ‘역사에 길이 빛날 사람’ 등등입니다. 그리고 빛은 낮을 상징하고 어둠은 밤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또한 사람의 지식을 빗대어 쓰이기도 합니다. ‘컴퓨터라면 깜깜해.’ 무슨 뜻입니까? 컴퓨터가 까맣게 칠해져 있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고 내가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뜻이지요. 컴퓨터를 다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는데 그 답을 모른다면 뭐라고 말합니까? 앞이 캄캄하다고 합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문제 해결을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찬송가 259장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그러면 이 사자들은 천사들처럼 몸에서 빛이 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는 빛을 비추려고 나타난 사자들이라는 말입니까? 그런 게 아니지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오실까요? 낮에? 아니면 밤에? 도적 같이 온다고 하셨으니 밤에 오실까요? 그러면 대한민국에 밤에 오시면 그 시간 저 반대쪽 미국은 낮인데 어쩌지요? 거기는 하루 기다렸다 오셔야 합니까? 그런 게 아닌 줄 압니다. 이게 다 비유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낮이나 밤 또는 빛이나 어두움 등 이것이 다 육적인 의미가 아니라 때로는 영적인 비유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말하는 빛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살전 5 :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낮에만 다니고 밤에는 안 다닌다 그런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아니면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나타나는 연예인들만 빛의 아들인가? 그런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우리는 태양이 하늘에 있음으로 해서 이 땅에 밤과 낮이 생기고 춘하추동 4 계절이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가 측정이 되고 시간과 날짜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해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습니다. 밤이 있고 낮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창 1 :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된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 19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예, 넷째 날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빛이 창조된 첫째 날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렇습니다. 이미 낮과 밤이 있고 빛과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여기서 말씀하는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육적인 빛이나 어두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 1 : 1 - 5절을 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보십시오.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또한 빛입니다. 시 119 :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면 그 말씀이 곧 빛이 되고 등불이 되어준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그 반대 되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즉 마귀 사단입니다. 하나님 말씀 밖에 있으면 곧 사단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이며 빛이 아니라 어두움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빛이지요.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 밖으로 나오면 어두움이고 사망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요 8 :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 자신이 곧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빛의 영적인 의미는 첫째 생명의 말씀이고 둘째 그 말씀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빛의 자녀들과 어두움의 자녀들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빛의 자녀들은 예수 믿는 자들 즉 성도들이고 어두움의 자녀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1 :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랬지요?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이 어두움이 인격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빛이 세상에 오기는 왔는데 어디입니까? “자기 땅”입니다. 바로 뒤에 해석이 나옵니다. “자기 백성”이지요. 그리고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두움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자기 백성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예수님 당시로서는 유대인들입니다. 자기네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알고 있었겠지만 하나님 앞에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빛은 예수님이고 어두움은 하나님 백성이었단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깐 돌아봅니다. 그 전체를 요약해본다면 이 한 마디로 족하리라 봅니다. 삿 6 :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것은 비단 사사기 때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늘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신 9 :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즉 이스라엘 너는 내 백성이라고 하지만 고집불통 말 안 듣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려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밀고 나갑니다. 그래서 그 벌을 받아 나라가 반쪽으로 나뉘었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다 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 말씀을 전하는 목자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담 때부터 그랬습니다. 최초로 택함 받은 아담부터 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생명나무가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택하였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배도로 점철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로 다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당연히 육적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백성이 아니지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요 1 : 11 - 13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 약속, 이 말씀 덕분에 택함 받은 줄 믿습니다. 물론 육적 이스라엘 백성도 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빛으로 오신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우리와 똑같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깨달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였지만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빛을 비추었지만 거부하였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어두움이라 칭하였습니다.
물론 그들도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뭐 하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까막눈이고 어두움의 자녀들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이 그랬고 내노라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역시 똑같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를 신자와 불신자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잘못 아는 것입니다. 똑같이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가르치고 배워도, 하나님 뜻과 전혀 다르게 나간다면 세상의 불신자와 똑같은 까막눈일 뿐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들을 어두움이라고 말씀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빛 된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사역은 이미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사 9 : 1 - 2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어딥니까? 이스라엘 땅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이방인에게 짓밟힌 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큰 빛이 옵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의 땅에 빛이 비칠 것입니다. 언제요? 예수님이 오신 때입니다. 마 4 : 12 - 13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왜 스불론과 납달리로 오셨다고요? 그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 14 - 16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렇지요? 앞에 이사야 9장에서의 예언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 어두움의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아멘!
예수님 오셨던 때 그곳 당신의 백성은 어두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즉 목자라는 사람들이 어두움에 처해 있으니 그 가르침을 받는 백성이 모두 어두움에 처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 때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요 3 : 18 - 21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빛이 왔는데 당신의 백성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빛은 예수님이고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두움은 누구이겠습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백성을 가르친다고 하나 깨닫지 못하고 자기 고집에 매여 있던 사람들입니다. 어두움에 속하여 사단 마귀 짓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질타하셨습니다. 마 15 :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장로들의 유전이 먼저였습니다. 이것도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또한 그 예언의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십니다. 7 - 9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니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가르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들은 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을까요? 답은 바로 그 말씀 속에 나와 있습니다. 요 3 :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예 그것입니다. 즉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으로 즉 말씀 가운데로 나오지 않고 무지 가운데 있기를 더 좋아했다는 말입니다. 잘 아는 대로 우리는 이미 익숙한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빛을 받고 빛이 되는데 그 앞으로 나온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는데 당신 백성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고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이러한 과거적 사실은 바로 오늘 우리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척하고 어두움을 사랑해서 멸망당한 것처럼 우리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아야 합니다. 고전 10 :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렇지요. 이런 사실을 알고 깨닫고 조상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은 분명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때를 기다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림 때 예수님을 맞이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우리의 거울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들의 실수를 거울삼아 우리가 재림하실 예수를 어떻게 준비하여 맞을 것인가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초림 때를 잘 이해하면 재림 때가 보이는 것입니다. 초림 때 이스라엘 백성이 몸담고 살던 유대교는 어두움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밤이었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참 뜻을 몰랐던 신앙의 밤이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밤이 아니라 신앙의 밤, 영적인 밤에 오신 것입니다. 무엇으로? 빛으로. 그리고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런데 그 백성은 깨닫지 못하고 어두움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빛을 싫어했습니다. 결국 핍박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밤’을 말씀할 때는 육적인 밤이 아니라 종교세계의 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여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백성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던 하나님 말씀, 구약성경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비밀이 무엇이었습니까? 골 2 : 2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의 백성이었지만 어두움에 처해 있었기에 성경을 가지고 읽고 배우고 가르치면서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대적한 셈이지요. 그러면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두렵고 떨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이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면 주 재림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이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도 지적하셨습니다. 눅 18 : 8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올 때’ 즉 재림 때 하나님 백성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빌 2 : 12)
신약의 비밀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로 감추어 두셨습니다.(마 13 : 11) 우리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그 언어 곧 천국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언어 자체는 땅의 언어이지만 뜻이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수가성 사마리안 여자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 자체는 ‘물’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가 말하는 ‘물’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이 같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말하는 말 그대로 우물에서 떠 먹는 육적인 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물’은 육적인 물이 아닙니다. 그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 4 : 13 -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 속에 들어오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답니다. 세상에 그런 물이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게 위해서는 바로 이 천국언어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 : 53) 세상에! 이 말씀대로 정말 예수님을 잡아먹겠습니까? 그게 아닌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인들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는 겁에 질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빛의 아들은 그냥 믿는 자가 아니라 바로 이 천국언어를 배워서 말씀을 알고 믿는 자입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알고 그 아는 말씀을 전하는 자, 곧 비추는 자가 빛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놀라운 짐승이 나옵니다. 머리는 일곱인데 뿔은 열입니다.(계 13 : 1, 17 : 1) 짝도 안 맞아요. 그런데 머리가 일곱이나 달린 짐승을 본 적이나 있습니까? 배우지 않으면 모릅니다. 모르면 어두움입니다. 천국과는 거리가 멀지요. 그래도 천국 간다고 희희낙락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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