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가을
정 유 준
가을이 끝난 들판은 잠에 빠져 있다
아버지는 잠을 깨우려는 듯
덤불을 쇠스랑으로 끌어 산더미를 쌓는다
가을걷이를 위한 의식이라도 하는가
성냥을 그어 불을 지른다
시커먼 연기가 울컥울컥 피어오르고
우두커니 덤불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불 속에 구두 한 짝이 움찔 몸서리를 친다
오래 전에 버려진 신발은 아닐까
고단함이 흘러내리는 구두끈에
문득 가을들판의 냉기가 흐른다
신음 소리에 나도 잠에서 깬다
맨발에 얇은 옷차림인 채
어릴 적 들판을 걷고 있다
내 방의 열쇠는 어디에 버린 것일까
내 목 언저리의 냉기는 무엇일까
기억은 불빛 앞에 똑바로 서서
연기에 흩날리는 검불을 손으로 휘저으며
힘없이 흔들리고 있다
시커먼 검댕이 뒹구는 소리
휘릭 아쉬움의 소리였을까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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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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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15:49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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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운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