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던 날
전선현
1. 눈이 내렸다. 눈도 토요일인 걸 아는지 맘 놓고 푹푹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눈송이가 소리없이 쌓여갔다. 소나무 가지에 내려앉으려던 눈송이가 먼저 내려앉은 눈을 붙들고 툭 떨어지기도 했다. 새들도 잠잠했다.
2. 어릴 때는 이런 눈 내리는 아침을 꿈꿨다. 눈으로 현관문이 막혀, 창문으로 빠져 나와 눈썰매를 타고 마을로 내려가던 만화 속 하이디를 얼마나 부러워 했던지... 내 고향의 겨울은 어지간해선 영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눈송이를 얼굴에 맞으며 가끔 혀를 내밀어 보는 것,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보는 것, 눈덩이를 굴려 나보다 큰 눈사람을 만들어 보는 것, 마을 아이들끼리 편을 나누어 눈 싸움을 하는 것, 우리 동네 언덕을 비료 포대를 타고 내려가 보는 것. 이 모든 것이 따뜻한 부산에선 꿈이었다.
3. 거실로 나온 두 아들이 이내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며칠 전 마트에서 사 둔 눈썰매를 가지고 왔다. 판은 펭귄 모양이고, 도톰한 두께에 약간 폭신하기까지 한 보드가 예뻐서 흰색, 검은색 두 개를 사뒀는데 때마침 눈이 내렸다.
4. 네 식구는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꼈다. 아들들의 펭귄 눈썰매 보드를 우리 부부가 들어주려고 했는데 아들들은 자기 것은 자기들이 들어야 한다며 옆구리에 보드를 끼려고 했다. 여섯 살짜리 옆구리에 매달린 펭귄의 발은 바닥에 닿아 있었다. 여덟 살짜리의 보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5. 순백의 세상이었다. 빛나는 흰색의 눈이 길에 양탄자를 깔고, 나무에 장식을 얹으며 세상을 꾸며 놓았다. 나는 장갑을 벗고 눈을 한 움큼 쥐어보았다. 내 손의 힘에 놀랐는지 눈 알갱이들이 서로를 의지해 꼭 끌어안는 듯 붙었다. 포근하게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에 번지자 정신이 번쩍 났다. 나는 눈을 내려놓고 다시 장갑을 끼고 눈뭉치를 몇 개 만들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던졌다. 현관 앞마당에서 눈싸움이 벌어졌다. 아이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우리의 웃음소리가 잔뜩 묻은 눈 뭉치들이 마당에 떨어졌다.
6. 눈썰매 탈 곳을 찾아 남편이 앞장을 섰다. 남편의 정강이 중간까지 눈 속에 빠졌다. 눈길에 발자국이 패이고, 아들들은 그 발자국 속에 발을 넣어 가며 쉼 없이 깔깔댔다. 아파트 단지는 평지밖에 없다. 단지를 벗어 나 도로에 들어섰다. 차들이 없었다. 차로에도 흰 털 양탄자만 깔려 있었다. 눈 나라 앞에 서자 내 심장은 둥둥 북을 쳤다. 어린 시절의 소원이 풀렸다는 듯.
7. 단지 정문 마다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손에 종이 박스나 포대, 혹은 플라스틱 썰매를 들었다. 경사가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포대를 깔고 미끄럼을 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눈 사이사이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우리 가족은 조금 더 걸었다. 근처 산 초입까지 올라갔다. 그곳에 썰매 타기 좋은 곳이 있었다. 첫째의 친구가 알려줬다고 했다. 산자락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의 담장 주위였다. 3~4 미터 공간에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는데 약간의 경사가 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썰매를 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했다.
8. 첫째 친구 둘이 벌써 썰매를 타고 있었다. 두 아들은 얼른 그 틈에 끼었다. 우리 부부는 조금 떨어져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한 아이는 염화칼슘 포대를 이용해 탔고, 한 아이는 종이 사과 상자 속에 들어가서 탔다. 모두들 썰매가 내려가기 시작하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웬일로 따뜻한 부산에 눈이 다 왔을까 하며, 동네 언덕에서 비료 포대를 타고 내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렁거렸다. 만화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9. 남편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여보, 나도 저 사과 상자 한 번 빌려서 타보고 싶다. 주책일까?"
"뭐 어때. 한 번만 빌려 달라고 해봐.“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10. 남편의 웃음에 용기를 내어, 아들 친구에게 한 번 타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 아이는 흔쾌히 빌려주며 진짜 재밌을 거라고 말했다. 사과 상자에 엉덩이를 넣고 경사면 끝에 앉았다.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이자 상자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 악! 악!"
5초나 되었을까. 상자가 바닥까지 내려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짧은 사이 심장은 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들어 왔고, 몸 속 전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나는 종이상자가 내 열기로 타진 않았을까 싶었다. 온 몸의 세포들이 모두 썰매를 탔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놀이에 누구든 끼워주었다. 온 몸으로 노는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 다시 살아난 어린 시절의 나는 아이들과 함께 눈밭을 뒹굴고 있었다. 내 꿈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12. 다시 겨울이 왔고 눈발이 흩날린다.
"엄마, 아들이 스무 살 되면 엄마 곁에 있으면 안 된다 거 아시죠?"
둘째 녀석은 언젠가부터 이렇게 말하며 곁에 안 오고, 첫째는 집을 떠나 자취한 지 이년 째다. 그래도 눈 내리는 날이면 썰매 타던 여섯 살 여덟 살 두 아들을 불러 낸다. 사과 상자 썰매 속 나는 언제나 여덟 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