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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라도 승리했더라면 이 설날이 한결 화창하게 다가왔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 말 그대로 죽도록 수고한 우리 선수들 생각하면 그만하여 끝냈으니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혹사(酷使) 당했습니다. 더 이상 뛸 기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7 : 0 또는 5 : 0으로 패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생각합니다. 그나마 골키퍼의 선방이 큰 힘이 되었지요. 너무 일부 선수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제 나름의 반성과 대책이 나오겠지요. 아쉽고 한편 화도 나지만 지나간 일입니다. 모두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서 빛을 발하기 바랍니다. 그만한 재능과 실력이 있는 선수들이니까요. 아무튼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음식은 만드는 자의 솜씨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정도이지 않을까요? 사과 하나에 ‘1만원’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 특별한 사과가 아니더라도 동네 마트에서 사려고 해도 웬만한 것은 한 개 3,4천 원 합니다. 여태 살아왔지만 이런 적이 없습니다. 사과 3개를 들고 밥 한 끼 값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 안 먹고 말지, 해도 마음이 슬퍼집니다. 사과도 맘껏 먹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나 싶기도 하고요. 그깟 귤 하나에도 돈 천원입니다. 이거야 원! 좀 싼 것을 들고는 ‘이거 중국산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 갈등합니다. 먹어, 말어? 거참! 풍성한 명절이 마음을 어둡게 만듭니다. 차라리 화폐개혁 해서라도 낮추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지요. 살아있으니까. 물가가 나아지든 내가 나아지든 뭐가 나아지든 희망을 가져봅니다. 설날은 설날, 건강하고 행복한 날이 되기를 빕니다. ^)^ 2024년 설날에 김종우 목사 드림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느헤미야 2 : 17)
<건국전쟁>
일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자주 앞 사람의 치적을 무시하고 짓밟고 왜곡하고 지우려고 합니다. 현재의 자기를 부각시키고 자랑하고 싶어서 일까요? 그렇다고 될 일도 아닐 것이요, 그래봤자 좋을 것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조금 후에는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서는 일이 아닐까요? 오히려 잘못보다는 잘 한 일에 대하여 드러내주고 칭찬한다면 그 쪽 편의 사람들로부터도 존경과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생각하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서로 잘 살면 좋겠습니다. 협상도 타협도 없이 혼자서만 옳고 일방통행을 한다는 것은 적을 만드는 일밖에 안 됩니다. 어차피 세상에는 양지와 그늘이 함께 있는 법이고 공존해야 합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분명하게 극악한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벌도 주고 합당한 처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객관적으로 올바른 평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일방적인 몰아치기는 삼가야 합니다. 많은 자료들이 있다면 면밀하게 조사하고 연구도 하고 토론도 하고 해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도출해서 합의를 만들어야 합니다. 가능한 대로 잘잘못을 구분하여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가려서 밝히고 가르치고 인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개인적인 분노나 원한을 가지고 편 가르기 단언을 만들어 퍼뜨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소위 우리 안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지요.
짧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속에는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하기야 남들 2,3백년에 이룬 업적을 우리는 그 몇 분의 일 정도로 이루어냈으니 대단하기는 합니다. 대신 그만한 희생이 뒤따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현장 경험을 간직하고 사는 백성이 많으니까요. 여전히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도 꽤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결하며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하나하나 사건들이나 사람들에 관해서 진실한 모습을 찾아내서 올바르게 전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왜곡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잘못 전해진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좋았던 것은 본받고 잘못된 것은 고쳐가야 합니다.
오래 전 대학입시 때 면접 담당 교수님이 존경하는 인물에 대하여 물었을 때 했던 대답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동감을 해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의외의 답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 자신 그런 대답을 한 근거는 몇 가지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일본이 우리 해역을 결코 넘볼 수 없도록 독도를 포함하여 접근금지 구역을 확실하게 설정했다는 것(유감스럽게 당시의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없네요)과 6.25 전쟁 중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 조치였습니다. 비록 약체 국가였지만 강대국을 상대로 우리나라 자존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가슴 뿌듯한 사건들입니다.
이번 기록영화를 통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젊은 시절 어떻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가지고 있던 미래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누구나 알아야 한다, 배워야 한다는 의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게다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 바로 그 모든 일에 여성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남들보다 아니 당시 그 어느 문명국가들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인식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과연 참 민주주의를 꿈꾸고 있던 지도자 감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지만 우리는 너무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복 받은 나라입니다.
나라의 독립이 우리만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배움과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던 나라의 지도자들을 만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 외교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총을 들고 싸워서만 나라를 찾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대처했다는 말입니다. 그만한 성과를 낸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의 해방이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방 후에 더 큰 혼란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우리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혼란을 헤쳐나감에 지도자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의 마지막이 너무 초라해서 마음이 아프고 매우 슬펐습니다. 그 어려운 때 나라의 초석을 세우느라 얼마나 노심초사 애쓰고 노구를 이끌며 쫓아 다니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6.25전쟁 때 혼자 도망갔다느니 하와이 망명에 돈다발 가지고 갔다느니 전혀 말도 안 되는 비난을 하는 것에 분노마저 일어납니다. 아마도 전직 대통령들 가운데 가장 가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안락한 생활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 부인이셨던 프란체스카 여사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올바른 평가와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 ‘건국전쟁’The Birth of Korea)을 보았습니다.
차라리 죽여주소서
우리는 대부분 일간신문을 보고 아니면 TV나 라디오를 통하여 거의 매일 뉴스를 접하고 삽니다. 하루라도 사건 사고가 없이 지나가는 날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 나라 안에서 그러할진대 이 세상 그 많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뉴스란 그 가운데서 유별난 것들을 취사선택하여 세상에 알려주는 것입니다. 자연으로 인한 재앙도 있고 사람들끼리 저지르는 사고나 사건도 많습니다. 뉴스라고 전하여지는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즐겁고 기쁜 소식이 많을까요, 아니면 슬프고 안타까운 소식이 많을까요? 한 가지 특징은 이겁니다. 태어났다는 소식보다는 죽었다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는 것이지요. 참 이상합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그리고 행복보다는 불행이 뉴스 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꼭 슬픔이고 불행이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야 생각하기 나름이고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이 세상과 다른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일단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슬프고 아픈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튼 가깝게 혹은 멀리서 우리는 많은 사건들 그리고 사고들을 전해 들으며 삽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크고 작은 일들을 당하며 삽니다. 역시 기쁘고 즐거운 일들은 쉽게 그리고 빨리 잊어지고 어렵고 아픈 일들은 오래 남습니다. 오래 남는 정도가 아니라 오래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남은 사람의 아픔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을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평생 불구가 된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그 고통을 함께 평생을 짊어져야 합니다. 요즘 사회적 아니 국가적인 문제가 되어있는 청년 실업 문제는 어떠합니까? 기나긴 과정을 어렵게 지나와 최고학부까지 나오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청년들의 아픔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마냥 행복해서 룰루랄라하며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우리 한국 직장인 스트레스 보유율이 95%로 세계 최고랍니다. 결코 쉽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한 마디로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든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없어서 힘들고 있어도 힘들고,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인물 가운데 어쩌면 가장 뛰어난 사람을 만납니다. 역사 이래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흠모하는 영웅 모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여 이야기했던 사람입니다. 그 잘못이 뻔한데도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이 친히 두호해준 인물입니다. 민 12 : 7 - 8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그런 모세였지만 그도 세상 어려움 앞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고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나옵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손길을 체험하며 그 많은 백성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한 땅으로 행진합니다. 문제는 애굽을 떠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시내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떨어졌으니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까? 어디 열매가 풍성합니까? 아무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재배할 수 없는 광야(사막)입니다. 더구나 한가히 머물러있기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언제 떨어질지 모릅니다. 항상 떠날 준비 상태로 사는 인생들입니다. 어쨌든 매일 먹을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올 곳이 없습니다. 당연히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올 수밖에요.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하여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어림없다고 아우성입니다. 봅시다. 민 11 : 4 - 6절 말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자 이제 어찌 합니까? 이 많은 백성을 어떻게 만족시켜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도 두 손을 들었습니다.
1. 우리의 현실을 봅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은 즐거운 일보다는 힘든 일이 많습니다. 물론 좋은 일은 신경도 쓰지 않고 힘든 일이 신경 쓰게 만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9 가지 좋은 일은 기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픈 일은 오래도록 남아 몸을 괴롭히고 마음을 찌릅니다.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그래서 더 힘든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시 90 : 10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네 인생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만만치 않고 인생이 결코 수월하지 않습니다. 우습게 봤다가는 정말 코 깨질 것입니다.
속된 말로 울며 왔다가 울음소리 들으며 떠납니다. 누군가 그럽디다. 밥줄 끊어져서 울고 밥줄 떠났다고 운다고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남기는 것 없이 가는 사람은 울어주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죄가 들어오고 나서 가시와 엉겅퀴로 덮인 세상입니다.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니까 근심 걱정 없겠다,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생활의 기본적인 필요로 인하여 근심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리학자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욕구 5 단계를 보면 바로 각 단계로 인하여 인생이 힘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물론 생존의 욕구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 문제는 기본입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청년들이 왜 그렇게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습니까? 안전 때문이지요. 누가 불안한 것을 원하겠습니까?
다음으로는 소속감 문제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죽음을 당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실제 그로 인하여 삶을 마감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무엇인가 이루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구들은 그 성취를 위해 모두 어려움을 겪어내야 하는 과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거저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있다 해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영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Easy come, easy go.' 무슨 말입니까? 쉽게 들어오면 쉽게 나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돈이 그렇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한 단계 한 단계 그 욕구를 이루기 위하여 스트레스를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가지 욕구가 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거룩한 욕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보다 어쩌면 스트레스 요인이 하나 더 추가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소위 은혜가 아니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스트레스입니다. 왜요?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 : 41) 그렇습니다. 마음처럼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울이 뭐라 합니까? 롬 7 : 22 - 2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한두 번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까? 어렵고 힘들지요. 그것이 구원의 길로 가는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풀무불과 같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 해방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쫓아오던 원수 애굽 군사들이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본 환희, 정말 대단했지요. 모세와 온 백성이 기쁨에 넘쳐 노래하였습니다. 출 15 : 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할! 그러나 그 후 그들을 기다린 것은 먹을 것 없는 광야였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만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기쁨 그 감격 얼마나 오래 지속됩디까? 우리 모두 기억합니까? 어쩌면 그 후에 닥친 어려움들로 말미암아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스스로 질문해봅니다. 나는 행복한가? 여러분 지금 행복하십니까? 우리의 현실이 행복과 얼마나 가깝습니까?
2. 차라리 죽여주소서
그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백성들의 아우성에 두 손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입장과도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처지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통한다는 것이지요. 한번 되새겨봅시다. 민 11 : 11 - 12절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아니 이 백성을 제가 낳았습니까? 왜 제가 다 책임지고 이들을 이끌고 가야 합니까? 제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이들을 다 먹이며 데리고 가야합니까? 결론은 그겁니다. 15절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한 마디로 쉽게 말하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여주소서’ 그 말입니다. 주여-! 이 말 조금 세게 하면 어떻게 되지요? 죽여-!
그 후 이 모세를 따라한 선지자들이 둘이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에 의해서 우상천국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3년 기근으로 징벌하셨습니다.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었지요. 이유는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당신의 능력을 행할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모든 우상숭배자들을 모으라고 청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왕비 이세벨의 강력한 후원과 지지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850명 우상숭배자들이 갈멜산에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과연 누가 진짜 하나님이냐 판가름하는 대결을 합니다. 소위 1 : 850의 대결입니다. 왕과 백성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이 대결이 하루 종일 치러집니다. 먼저 850명 우상숭배자들이 자신들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하루 종일 발버둥 쳤습니다. 아무런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자들을 모두 처단해버립니다.
자 여기까지는 잘 되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요. 흥, 그래? 내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고? 너도 죽어봐라 하며 엘리야를 쫓아옵니다. 엘리야가 황급히 광야로 도망가지요. 지칠 대로 지친 엘리야가 광야에서 부르짖은 소리가 그것입니다. 왕상 19 :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그렇지요? 죽기를 구했다고 합니다. 왜요? 하도 힘들어서. 역시 죽여-! 했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어쩌면 그 능력의 선지자도 한 여자의 권력에는 힘을 쓰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하기야 850명의 선지자를 상대하느라 자신의 힘을 다 소진하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완전 기진맥진했다는 말이지요.
또 한 사람 보겠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원수 된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진노를 알리라 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서지 아니하면 멸망시키겠다, 하는 경고였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입장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그 원수 놈들 그냥 확 쓸어버리시지 회개는 무슨 회개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정반대의 길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선지자를 물고기 뱃속에 넣어버리셨습니다. 할 수 없이 회개하고 하나님 명령을 따라 니느웨 성에 가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온 성이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두 회개하고 돌아섰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 잘 되는 것은 고사하고 원수가 잘 되었으니 맘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신경질을 냅니다. 욘 4 :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내 이 꼴 못 보겠습니다. 차라리 날 죽여주십시오 하는 말이지요.
한 사람은 힘들어서 더 못 살겠습니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신경질 나서 못 살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힘이 들든 짜증이 나든 어찌 됐든 살 맛 안 나는 일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할랍니까? 앞에서도 보았듯이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요? 죽지 못해서? 세상 사람들처럼 죽지 못해서 삽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몰랐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알고 예배하고 사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러자고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까지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 하라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 : 16) 하신 그 사랑이 그렇게 값싼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나 보겠습니다.
3.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요나도 하나님이 그들이 원한대로 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의 뒷이야기는 기록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모세도 엘리야도 계속 사용하셨습니다. 민 11 : 16 - 17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어떻게 조치를 취하셨나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모세의 짐을 덜어주셨습니다. 일꾼들을 더 세워서 짐을 나눠서 지게 하신 것이지요. 지금 힘듭니까? 어렵습니까? 속된 말로 죽겠습니까? 그래서 차라리 빨리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청하고 싶습니까? 혹 말은 그렇게 할지라도 아마 맘은 그렇지 아니할 것입니다. 다만 견디기 힘든 것뿐입니다.
사실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더 살고 싶은 것이 우리 피조물의 본능입니다. 또 구태여 서두르지 않아도 어차피 갈 사람은 갑니다. 그럴 바에는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죽겠다 해도 죽고 싶어서 그런 말 하는 것 아니고, 노인들이 어서 죽어야지 하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 죽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좀 힘들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진대 죽음에 관한 한 우리가 떠들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그 분이 그 뜻을 따라 부르실 때에 또한 데려가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아니면 짜증난다고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아무리 짜증나고 힘들어도 하나님 쓰실 일이 남아있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짐을 가볍게 해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또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십니다. 고전 10 :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아멘!
하루하루 사는 것 만만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죄로 물든 세상을 사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 속에서 우리가 빛 되기를, 소금으로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 빛이 필요한 세상이고 그 소금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는데 우리를 그리 쉽게 버리시겠습니까? 반드시 살게 하십니다. 그저 한 백년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생명의 값이 고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요 11 : 25 -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잘 아는 성구가 있습니다. 요 3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영생입니다.
그러나 영생이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 6 :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 곧 주 재림 때입니다. 영생을 가졌지만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지난 2천 년 동안 계속 죽었던 것입니다. 약속하신 영생은 마지막 때 즉 주님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 그 동안은 비록 짜증나고 힘든 세상이라 해도 주신 생명을 아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빌 2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다시 말하지만 그 구원은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히 9 :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러니 우리의 육신이 죽어서든 살아서든 구원의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에 우리는 분명 새로워집니다. 고전 15 : 51 - 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미 죽은 자는 다시 살 것이요, 산 자는 변화합니다. 이 약속을 믿는다면 구원을 소홀히 여길 것이 아닙니다.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까지 힘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24 : 11 - 12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중요한 것은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거짓말이 횡행하리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진리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고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나팔이 무엇이고 그 앞에 도대체 나팔이 몇 개나 불리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진리를 아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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