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루 뒤편으로는 산능선에 자리잡은 기념탑이 마주 쳐다보였습니다. 화강암 조형물로
1994년에 제작하였다는 작가의 표기가 겉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옥포해전의 형상을 담은
장엄한 모습이 매우 우람하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첫 연합해전의 승전탑이란 의미로 다가온다기
보다는 중앙의 인물조형을 보면 이 또한 충무공의 해전을 기리는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제호가 뒤편에 있었습니다. 아마 뒤편이 참배단이어서 그렇게 했나 싶었습니다.
참배단의 구조물은 우리 격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였고, 아마도 서양의 조형을 본뜬
것이라 보였습니다. 중앙의 추상화시킨 형상도 쉽게 다가오지 않는 조형물이었고, 뒤편 오석판
에는 충무공의 사적을 적은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걸어 내려와 모이자 해설사분이 간단히 거제사람, 거제의 인물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옥포해전이야 이미 다 둘러보았으니 말입니다. 먼저 '법동'의 왜놈 이야기를 하면서는 거제
사람의 혼혈 이야기를 하였고, 외포의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 이야기는 그 모친 이야기로 이어
졌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멸치잡이를 하던 부친이 엄청난 재산을 모으게 되었는데, 월급을 관리하던
모친이 강도의 흉탄을 맞고 뱃길 때문에 치료를 못하고 타계하신 한스러움이 있었고 그게
거가대로의 건설에도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청마 유치환 시인도 통영에
살았지만 원래 태생은 거제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인원을 상대하는 문화재해설이라선지
만만찮은 경력이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온 이유이기도 한 한백록 장군은 왜 이곳에서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느냐는 질문에는 거제시에다 말하라고 자신은 답변을
피하였습니다. 이 옥포대첩 공원은 전반적으로 옥포라는 작은 마을이 전시설명문의 표현처럼
'구국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만 치중한 나머지 옥포해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하기엔 많은 부족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사당에서 '22공신'을 기렸다면 기념관
에서는 당연히 그 22사람의 면면을 충실히 보여주어야 맞겠지요. 사실 전시물 구성도 전라
좌수영 인물이나 충무공 위주로 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이 옥포해전은 경상도 수군 측이 전력이 적기는 했어도 경상도와 전라도 수군의 연합전
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선열들을 기리는 관점이라면 적어도 편중됨이나 누락됨이 없이 현창
하는 것이 바른 도리가 아닐까 하는 깊은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도 어려운
과거를 지나오며 누적된 왜곡된 문화현상의 한 가지는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사실, 여기까지가 옥포 당지에서 느낀 생각들이었습니다. 돌아와 옥포 이야기를 인터넷으로
찾아 읽다 보니, 이 공원을 중심으로 성역화사업을 추진했던 분들과 현재 거제시의 생각엔
다른 점도 없지는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제올레길' 길가에 있다는
다음 사진 때문입니다!
이 안내판을 만든 사람들은 분명히 원균을 포함한 이 '옥포대전의 장군들'을 거제땅에서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여겼음에 틀림이 없어보였습니다.
더구나 이 설명은 옥포해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함께 싸운 장수 이름과
왜선 5척을 분멸시켰다고 적고 있는 한편으로, 또 이미 조정에서 부산첨사(첨절제사, 종3품)에
제수된 상태에서 옥포전을 치렀다는 설명의 말은 <행장>에서 옥포대전 등 첫 출전 이후에
원균이 그 공을 인정함으로써 나중에 제수되었다고 한 말과 상치됩니다. 앞으로 자세히 확인
해볼 사항이라 여겨집니다.
(2) 거제도 지세포
옥포와 작은 구릉 하나 너머 남쪽인 지세포에 당도하니 오후 3시가 다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선 관심은 지세포 산성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유적으로 알려진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지요.
거제도는 전국에서도 열 몇 개인가로 산성이 많기로 유명한 섬이라고 하였습니다. 항공지도로
보면 성곽 흔적이 여실히 보였습니다.
마을 사이 선창길을 걸어 성곽으로 올라갔습니다.
지세포는 전적지로서가 아니라 임진왜란 때 충장공께서 근무하던 곳이었기에 답사에 포함되었
습니다. 원래 충장공의 선대는 무관직이 아니라 유업(儒業)의 가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영오한
자질에 장성해서도 "지기출륜 담략과인(志氣出倫 膽略過人:뜻과 기상이 남다르게 뛰어나고
담대함과 지략이 보통사람들을 넘어섬)"하여 병법서들을 몹시 좋아하며 무인의 길을 걷겠다는
뜻을 세웠다고 합니다.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실로 마땅히 마주치는 바에 따라서 세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大丈夫生斯世 固當隨所遇而有所立)"
이것이 <행장>에서 전하는 무인으로서의 포부였습니다.
그러다 진잠(鎭岑:대전 유성구)현감으로 재직시 "잠업과 병기를 수리보완하면서 군졸 훈련"을
시켰던 점을 조정에서는 높이 평가하였고, 부임시기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왜란의 기미가 임박했다고 여겨질 즈음 "재간과 굳센 힘"이 있다는 조정 신하들의 평판에 따라
'남방 요충'인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종4품)에 제수된 것이었습니다. <행장>에서는 이때,
"공은 임소에 당도하자 조석으로 병사들을 조련하며 미처 생각지 못한 사태들에 대비하였다."
고 전합니다.
이곳 지세포라는 곳은 대마도로부터 가장 지근거리라고 여겨지던 조선땅이었다는 점을 생각
한다면 당시 상황에서 지세포만호라는 직책은 바로 왜군의 내침을 직접 맞받을 기개나 지략이
없다면 함부로 맡기려 하지 못할 자리였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4월 13일 조선 앞바다로
쳐들어온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들이 부산진 성을 포위하고 14일 임진왜란의 첫
침공을 시작하였습니다. 4시간의 사투 끝에 부산첨사 정발 장군은 전사하고 성 안의 3천여
군사와 백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학살되었다고 전하고, 이어서 15일에는 동래성 전투
에서 부사 송상현이 순사합니다. 그러는 동안 경상우수영 등 조선 수군은 대부분 도주하거나
흩어져 궤멸상태에 있었고, 원균 경상우수사의 요청으로 전라도 수영과 연합함대가 이루어져
출전하기까지가 20여일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앞에서 옥포해전을 살펴본 바와 같이, 만약에 연합전의 출전이 없었더라면 충장공은 이 지세포
임소에서 단독으로 왜군의 침략을 당해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을까요? 지세포 땅을
밟고 거닐며 일행은 이런 공의 결기어린 담대함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경상우수영이나 옥포대전의 연합전에서도 당시 해전을 거듭해갈수록 공의 위상은 결코 적잖이
높아져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공께서는 오히려 선봉대로서 분발하여 힘써 싸움으로써
"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려 대승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답사설명문 속의 행장 소개문)를 마련
하였다는 평가의 말이 있게 된 것이겠지요. 앞서도 말했지만 옥포해전 이후의 <행장>기록은
출전사실을 다소 모호하게 전하고 있어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부산첨사로 직급이 높아
지자 공께서 패졸 1천여 명을 수습하고,
"다만 충(忠)과 의(義)로써 사람들을 격동시켜 사력을 다하도록 하여 세 번 싸워 세 번 승리를
거두었으니, 군진의 성예가 크게 진작되어 우뚝한 남주(南州)의 보루·요새가 되었다.(지以忠義
激人 得其死力 三戰三捷 軍聲大振 屹然爲南州之堡障)"
라고 한 다음, 바로 7월 17일의 마지막 미조항(彌助項) 전투 이야기로 넘어가니 말입니다.
여기서 '3전3첩'이란 말이 1차출전의 옥포·합포·적진포인지 1차 이후의 여러 해전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에 소개돼 있는 <임진왜란 해전 목록>에도 사천해전
이나 7월 8일의 한산도대첩에까지 참전장수로 이름이 올라 있음을 보건대, 충장공께서는
5월 29일의 2차 연합함대출전은 물론이고 그 뒤로 한산도대첩에도 출전한 기록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아래 댓글 내용 참조!] 이 점 역시 검증작업을 거쳐 차후에 <충장공연보>로
새로이 작성되어야 할 사항이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공이 돌아가신 뒤 승첩 장계의 보고가 이루어지는데, 선조25년 8월 24일자의
<선조실록>에 비변사의 보고로 단 한 번 공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호 한백록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萬戶韓百祿前後之功最多, 而至於中九之後進戰, 戰罷不久, 竟至於死。 極爲慘惻,
亦堂上追賜。)"
정말이지 위의 말처럼,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호, 통재!
지세포의 수군 진영은 그 지형이 포구의 정면이 아니라 안쪽으로 휘어굽은 남단의 안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포구 바깥 쪽에서는 또 그리 머지 않은 거리에서 지심도가 가로놓여 포구를
가려주는 형세이기도 합니다. 산성은 산능선이 흘러내리는 자그마한 구릉 아래로 펼쳐진
골짜기를 에둘러 성곽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원군 집권기인 1872년에 그려진 <지세진도>라는 고지도에 보이는 산성 모습은 아래와
같습니다. 상단 쪽 테두리 안에 대마도를 그려넣고 그 아래 480리라고 적은 것이 지세포의
상황을 잘 말해주는 듯합니다(<새거제신문> 사진임).
배가 정박해 있는 뒤부터 관아 건물들이 민가들과 함께 축성 모습이 역연한 석성 안에 자리잡은
모습이며, 골짜기 위로도 외성처럼 성곽 흔적이 남아 보이네요.
오밀조밀한 어촌마을 집들 골목길을 조금 올라가니 복원해놓은 성곽석축이 있었습니다.
둘레가 300m나 되었던 성인데 1545년에 대대적인 증축이 있었다니 충장공이 부임했을 때는
온전히 성의 역할을 잘 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란 중에 강지욱이 있을 때는 가등청정에게
패해 함락당한 수모를 당하기도 했던 곳이라니 감회가 깊었습니다. 안내판을 읽어봐도 복원한
이 석축이 성곽의 어느 부분인지, 곧 앞의 정면 부분인지 뒤쪽의 성곽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위의 고지도로 봐서는 뒷쪽 벽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보기만 해도 매우 견고한 석성
이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마침 최남용 소설가님이 이미 이곳을 답사하며 산성을 올라가 본
적이 있다고 해서 일행은 모두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사이 한희민 님은 안내판 끝에서 말한
'만호진 비석'을 수소문하러 내려갔지요.
산길이 험해 몇 분만 최소설가님을 따라 올라가보기로 하고 나머지 분들은 돌아내려왔습니다.
아래는 더 올라갔던 엄대종 님이 사업회 밴드에 올린 산성 사진입니다.
산성 위에서 내려다 본 지세포 모습입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새거제신문>에 아래와 같은 지세포산성 사진이 보여 참고 삼아 올려둡니다.
내려오다 보니 마을회관 곁에 엄청나게 수령이 높은 노거수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400-500
년은 되어 보였으니 어쩌면 임진왜란 때에도 있었던 나무일 가능성도 있어 보였습니다. 속은
텅 빈 고목이었는데, 밑둥 화단에 상사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마침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되어
직접 촬영을 못했고, 아래 사진은 한희민 님이 밴드에 올린 그 사진입니다. 충장공의 시대를
살았을지도 모르는 이 느티나무가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손으로 어루만져 보았습니다. 이
정도의 노거수라면 등록되어 보호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조처가 없어 보였습니다.
한희민 님은 만호진비를 모두 모른다고 해서 찾아보지는 못했으나 신관호 선정비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선창가로 나와 얼른 대기중인 버스에 올라 배터리를 바꾼 다음 선정비를 찾아가
사진에 담고 살펴보았습니다. 신관호는 바로 신헌으로, 그의 묘가 춘천 용산리에 있는 분이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무관이었으나 뛰어난 유장(儒將)으로서 병자수호조약부터 조미조약 등
조선의 대외교섭을 전담하다시피 했던 분입니다.
바로 도로변에 있었고 앞면에 "자헌대부행삼도통제사신공관호영세불망비(資憲大夫行三道
統制使申公觀浩永世不忘碑)"라고 적혔고 좌우로 시구를 새겼습니다. 건립연대는 우측면에
"을축(1865년) 5월 립(立)"이라고만 적었으며 뒷면엔 글자가 없습니다. 신헌은 일찌기
금위대장까지 지내다가 헌종의 의약치료 건으로 8년 정도 유배를 살다가 철종 때 다시 복직
되어 1861년에 통제사를 지냈으니, 양요(洋擾)가 일어나던 시기에 통영에서 통제사로 있으
면서 이곳 지세포에 무슨 선정을 베풀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행은 벌써
버스에 승차하며 얼른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가면서 지세포를 떠났고, 오늘 답사일정은 이제부터 해금강테마박물관 측과의
연계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바로 해금강으로 내려가지 않고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에 내려서
박물관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일정에는 없었지만 잠시 거제어촌민속전시관과 조선해양문화관을
둘러보는 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읍내는 바로 포구를 정면으로 내다보는 해안가 도로변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람이 전적지답사를 온 일행에게 딱히 적절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내륙도시인 춘천과는
다른 어촌마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필자에게
해양문화는 관심이 많아서 연전에 <바다를 통한 시간여행>이란 독일 책을 번역한 적도 있었
지요. 아직 전통적인 어업분야나 해양문화 부문의 현대적인 연구도 전반적으로 부족한 마당에
이런 전시관의 체제나 내용이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는 상태라 하겠지만 우선은 반가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민속관의 전시물은 어패류나 어업, 어구들 등을 시각화하여 전시한 것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점심으로 먹은 이 지역 특산해물 멍게의 양식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바로 곁에 위치한 해양문화관으로 갔습니다. 말이 해양문화관이지 그냥 조선소에서
만든 조선업 홍보관 정도로 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입구 공원에 지역에서 80억이나 들여 건조했다는 거북선 모형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국내산 나무를 쓴다고 하고 수입목을 썼다 했고 바다에 띄우자 가라앉아서 제작자가 감옥에
갔다고 나중에 해금강테마박물관장님이 말해주셨습니다.
사실 조선업에 우리나라가 세계1위를 차지하면서 스페인이나 유럽 등지에서 실업자가 양산
됐다고 한때 난리였지요. 주로 해운과 관련된 조선업에 치중한 결과, 이제는 사양산업이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해운에 등록된 배들이 현재 세계적으로 넘쳐나므로 인터넷으로 최저가의
운임으로 계속 해운가격이 다운되었고, 우리가 칠레산 포도를 싸게 먹는 것처럼 아일랜드
더블린의 시골 까페에서도 창밖으로 골목에 양떼가 지나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뉴질랜드산
양고기를 더 싸게 먹는다고 하니까요. 그런 지경이니 해양환경은 이제 오염되었고 해류가
멈추게 될지도 모르느니 하는 말들이 나오게 된 거지요. 어패류나 조류의 양식업도 마찬가지
지만 특히 세월호사건처럼 우리나라에 특수한 조류나 해저에 대한 탐구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보였습니다.
(3) 해금강테마박물관
잠시 지세포만 밖의 포구도 바라보며 바람을 쏘이는데, 5시가 되었고 다시 승차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해금강 옆의 해금강테마박물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비가 한차례 호되게 내리더니 정작 하차시에는 또 빗발이 약해지며 멎었습니다. 모두
우산을 챙겨온 마당에 비를 맞지 안은 답사는 한장군님의 보살핌 같다고 뇌기도 하였습니다.
이 박물관은 그야말로 기막힌 입지조건을 가졌습니다. 바로 곁에 해금강의 시원하고 수려한
풍경이 펼쳐져 있으니까 말입니다. 원래 학교건물이었던 것을 리모델링한 것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여기는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유물들을 전시한 것이 아닙니다. 테마박물관이란 명칭에서도
그 의미가 드러나지만 여기서 중시하는 것은 테마, 즉 주제 그 자체인 것이지요. 유물 그 자체
보다는 그 유물들의 주제를 전시하며 보여주는 것이지요. 진품인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복제된 가품이라도 주제를 잘 구성해서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주제를 얼마나
잘 구성해서 표현하느냐를 중시하는, 말하자면 일종의 박물관의 박물관 같은 역할을 자임하는
박물관인 셈입니다. 원래의 박물관 뜻으로 보자면 가짜박물관이라 하겠는데, 요즘의 대중문화
에는 분명 그런 욕구나 필요가 없지 않은 거지요. 말하자면 일종의 키치문화, 모방문화와 같은
욕구라 하겠지만, 그 효용성이 높을 때는 얼마든지 상승효과를 볼 수가 있어도 그 가치가
대중들로부터 사라지면 그 수요 또한 급격히 사라지게 된다는 위험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대중문화의 쓰레기가 양산되는 이유가 바로 그런 데 있는 거지요. 더구나 역사 주제일 경우는
당장에 보여주기 위한 구성도 중요하겠지만 면밀한 고증과 연구가 밑받침되지 않는다면 한번
웃고 마는 해프닝 거리에 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버스에서 하차하자 바로 바다경치가 궁금하여 먼저 구경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오늘 밤을 보낼 숙소도 바로 곁에 잡는다고 위 사진의 가운데 흰 콘크리트건물이 숙소라고 하였
습니다. 낼 아침 물가로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고, 또 반대편의 '바람의 언덕'에서 일출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해금강테마박물관은 크게 전시관과 갤러리로 구성되었습니다. 전시관은 근현대사를 주제로 하고
있었고, 미술전시도 열리고 있었습니다. 근현대사 주제란 바로 근현대사의 생활문화를 떠올려
주는 과거 근현대의 풍경이나 유물들을 종류별로 모아 전시하거나 재현해서 보여주는 방식
입니다.
입구에 설립의 취지문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과거 60, 70년대의 국민학교 교실 풍경~!
각종 영화포스터나 옛 사진들.
가까운 과거의 선거포스터도.
둘만 낳거나 하나도 많다는 새마을운동 당시의 '가족계획' 표어들 모습. 반공표어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과거 구미의 해양시대에 대양을 달렸던 범선들 모형과 유럽의 고지도들 콜렉션도
보였습니다. 미술전시까지 둘러보고 나오자 교육장소 같은 곳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의
한백록 장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조언을 해주셨던 관장님의 한말씀 시간이었습니다.
다과까지 책상마다 준비해주시고 요지는 화면에 보이는 것처럼 '선양사업의 제안'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거제도에 근무하셨던 장군이란 점과 득충의 충성스러운 희생정신이
보여줬던 거제와 춘천을 잇는 도정이 박물관 기획사업이란 면에서 그에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음에 틀림이 없어 보였습니다. 한백록 장군 역사박물관이 충분히 가능하므로 앞으로도
성의껏 돕겠다는 말씀이셨지요. 신대수 님은 이제껏 4번이나 왕래하며 친분을 쌓아왔다고 하였고,
사업회의 민대표님도 친지의 미술전시를 여기서 열었던 기회에 오게 되어 관장님으로부터 이
사업의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답사여행 길에 숙소나 식당을 알선해주셨음도
물론이었지요. 사업회가 시작된 데에도 그런 인연이 중첩되어 숨겨져 있음에 다소 놀랍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유관장님의 일관된 관심과 배려가 큰 힘이 된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고
또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박물관 옆에는 전망대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흐린 날씨에 바다에는 어둠이 깃들어 왔고 시장기도 느껴졌습니다.
왔던 길을 되올라가 학동리라는 해변마을로 갔습니다. 해수욕장으로 학동흑진주몽돌해변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래밭이 아닌 동글동글한 조약돌 해변이지요. 검은 돌이 드문드문 섞인 모오리돌
(몽돌)이 파도에 떠밀려 제방처럼 쌓여져 물가가 더 높아져 있었습니다. 주민 아저씨에게 여쭈었
더니, 파도가 세면 저렇게 높아졌다가도 또 쓸려내려가 낮아지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녘은 한씨종친회에서 회로 대접하였습니다. 술도 들면서 환담 자리로 이어졌지요. 테마박물관
관장님도 오셨으나 자리가 멀었고 문중 어르신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열정적인
최남용 소설가님의 이야기를 주로 들었습니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왔더니 비오는 바깥엔 마침
이무상 시인님이 나와 계셨습니다. 필자보다 훨씬 연배가 위이신데도 스스럼 없이 담배를 주시며
불까지 붙여주셨습니다. 이런 배려는 또 흔치 않은 일로서, 예전에 일본유학을 하셨던 독일문학
스승님이 몇 명 되지 않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까지 맞담배를 허용하셨던 경우가 거의 유일한
사례였습니다. 소슬뫼에 대한 책을 보고 지난번 고유제 때 인사를 드린 뒤로 두 번째의 만남
이었는데, 시인님의 선대에 한시를 잘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조부께서 소양시사나 정악회의
핵심멤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초 무렵에 춘천에도 문학인 모임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경험도 없지 않았던 필자였으므로 이런 말씀을 이제야 듣게 된 것이 무척이나 안타까왔습니다.
진작 이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그 뒤로 숱한 뜨내기 문학예술인들의 한심함에 실망할 일도
별로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자리로 들어오니 이미 취기가 약간씩들 오른 모습이었습니다.
8시경 자리를 파하고 다시 버스로 해금강 곁의 숙소에 들어갔습니다. 방 배정에 따라 어르신들과
함께 4호라는 203호실에 들어와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곧 202호실의 술자리 환담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사실 서로 무슨 일을 하고 또 해온 분들인지도 잘 모르면서 많이들 서먹하였으나
이처럼 가까이서 나누는 이야기들로 조금씩 상대를 알아가며 친밀감이 더해갔습니다.
사업회의 일과 각자가 가지는 관심과 할 수 있는 일 등을 들려주며 들었습니다. 필자는 한백록
장군과 같은 지역의 유명 선현을 그 지역 사람들이 잘 알고 선양하는 일이 자기 지역의 역사문화를
올바로 사랑하는 일이므로 곁에서 늘 도우며 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볼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진지 모드에서 즐기는 모드로 바뀌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대금을 불거나(김남덕님)
이무상 님처럼 취기에나 보여주시는 곱사춤도 연출하셨습니다.
이렇게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밖에는 바람불고 비가 내렸습니다. 확실히 남녘이라 가뭄이
심한 북녘보다 비가 많다고 느껴졌습니다. 필자는 부진한 몸 상태로 더는 술을 하기가 불가능
하다 싶어 방으로 돌아와 씻고 바닥에 잠자리를 폈습니다.
첫댓글 여러 상황을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저는 산성 중턱까지 밖에 올라가지 못해 전체는 못봤지만 나름 풀도 깎고 정비는 했더군요.
그런데 산성을 올라가는 길안내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선생님이 신관호(신헌)의 영세불망비를 발견하신데 놀랐습니다.
거제와 춘천의 인연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기록을 스크랩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거 아직 덜 쓴 건데요~! 고치기까지 하고 나서 제목에 '작성중'이란 말 지우면 다 쓴 거예요~^
@一宅(정재경) ㅎㅎㅎ 연재로 읽으니 더 생생합니다. 생각지 못한것 까지 올려주시니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위 파란 색으로 바꾼 곳의 내용에 대하여 해군사관학교 해전사 전공인 제장명 교수께서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란 다움카페에 올린 이 글을 보시고 지적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못 들었던 중요한 설명이라 옮겨둡니다.
"3전3첩이란 조선수군의 3차례 싸움 즉 1차(옥포,합포,적진포), 2차(사천,당포,당항포,율포), 3차(한산도,안골포) 모두에 참가했음을 말합니다"
11월에 한백록기념사업회에서 학술포럼을 할 때 제교수님을 초빙한다고 하니, 이때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잘 봤습니다....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짚으셨습니다...
춘천은 잘 가셨는지요??저녁대접도 해드려야 하는데....제가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서...하여간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고..예천을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창에서나마 가끔 들르겠습니다....꾸벅
제 까페로 스크렙해갑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