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69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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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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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uO7O9Ucp8 (기호배 맛세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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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극단적 청빈의 삶과 지상 것들로부터의 완벽한 이탈과 초월의 삶!>
엄청난 강풍이 불어 애지중지하던 그림 액자가 와장창 깨져버렸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노발대발, 안절부절, 난리였을 텐데,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그림 액자 수명이 다됐나 보네. 종종 그림 액자도, 도예품도, 장식품도 깨져야 그 분야 종사자들이나 거래하는 사람들도 먹고 살겠지.’하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누군가가 제 옷이나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 눈치가 보이면 두 말 않고 그 자리에서 줘버립니다. 무엇 하나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니, 더 이상 지상 것들에 대한 애착이 사라졌습니다.
아마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아가셨으리라 확신합니다. 그 어떤 대상, 그 어떤 가치에도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그런 대 자유인이셨던 예수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던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복음 8장 20절)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삶의 노선이 있었는데, 그것은 극단적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재물이나 명예, 자리와 같은 지상 것들로부터의 완벽한 이탈과 초월, 그것이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취하셨던 삶의 자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던 제자들을 향해 기회 닿는 대로 부단히 강조하셨습니다. 끊임없이 건너가라고!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거듭거듭 건너가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처럼,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만왕의 왕인 분이셨지만, 수수한 옷차림에 평범한 삶을 추구하셨습니다. 엄청난 권한과 권위의 소유자셨지만,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 어떤 강요나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추종하려면, 우리가 지금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다른 모든 대상에 앞서 하느님을 위에 두어야 합니다. 부단히 사소한 것에서 보다 중요한 것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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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원한다면 절실하게 원하라 >
어제 어떤 분의 소개로 유투브에서 그리스도인 연애 코칭강사로 알려진 김지윤 소장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예들을 들어가며 재치 있는 말솜씨를 곁들여 강의를 함으로써 노총각, 노처녀뿐만 아니라 누가 들어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작고 통통한 몸매에 평범한 얼굴을 한 김지윤 소장은 지금은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가지고 있지만, 20대에는 교회 활동을 하며 29살까지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사귀어보자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신앙만으로 충만한 자매였습니다.
그러다가 노처녀가 되면서 주위에서 “너는 눈이 너무 높아!”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지 자신은 결코 눈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까지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친구가 결혼하게 되었고, 그 친구에게 절실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방 구들장이 파일 때까지 기도 해 봤어?” 사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또 눈도 높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눈도 높았고 기도를 해도 구들장이 파이도록 절실히 원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생각을 바꾸어 먹었다고 합니다. 방 구들장이 파이도록 절실히 기도하며, ‘나는 눈이 높을 처지가 아니다.’라고 되뇌며, 조건은 아무래도 괜찮고 그저 남자면 되니 빨리 짝을 만나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적 동네 친구를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에게 적극 유혹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먼저 그 사람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옷을 잘 입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가지고 있는 옷을 다 버리고 지금까지는 입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몇 벌 사서 입고 그 남자의 주위를 서성였고, 결국에는 그 남자가 이 여자에게 반하여 사귀자는 소리를 꺼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뜸들이지 않고 바로 “그래!”라고 대답했고, 그렇게 처음 사귀게 된 남자와 결혼해서 지금도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귀면서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지금까지 잘 살면서 또 결혼을 장려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처음 사귀어 본 남자와 성공한 결혼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인이 절실히 원했던 결혼이었기에, 그만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뭐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하고, 아니면 ... 아닌 거지!’라는 식으로 생각했다면, 결혼을 해서도 많은 어려움들이 닥치면 ‘이 남자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결단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어떤 것을 원하든 원한다면 ‘절실히’ 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어떤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이 원하기는 하지만 아주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보십니다. 조금만 힘들면 포기할 듯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시며, 이런 고생을 감수할 결심을 먼저 가지라고 청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 동네에서는 못된 아들로 낙인이 찍힐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세상의 평판도 중요시 여겨서 80% 정도만 따르겠고 20%는 세상의 평판도 중요시하겠다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시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는 행위는 죽은 사람들의 행위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절체절명의 선택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아직 가족의 정을 끊지 못해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청합니다. 세상의 애정 때문에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며 인간적인 애정에 미련을 두어서도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어느 정도만 따르지 말고 온 의지와 생명을 바쳐서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당신을 따르는 길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애착들이 결국 끝까지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장애로 차후에 더 크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롯의 아내가 소돔을 탈출하다가 도시가 유황불에 재가 되어버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서 더는 롯을 따를 수 없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번 길을 떠났으면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을 마음으로 떠나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절실히 주님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세상에 포기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일단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가기 위해서라도 절체절명의 마음으로 결심하고 앞만 보며 나아갑시다.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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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18-22 : 제자 됨의 본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신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배움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더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이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에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신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끝없는 탈출이다.
그 때에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학자는 그분이 가시는 곳을 알지 못했다. 막연한 짐작뿐이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수난과 저승에 내려가심과 하늘로 올라가심을 향해 가고 계셨다. 율법학자나 베드로나 같은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요한 13,36)고 하신다. 베드로는 하녀의 물음 하나에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낮은 신분으로 겸손하게 사셨다. 그분께는 정해진 집이 없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20절)고 하셨다. 그분은 차림새도 수수했다.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 나라에 대해 알고 계셨지만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셨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21절) 이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려면,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카인처럼 둘째가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이들을 위하여“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가족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22절) 이 말씀은 죽은 것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콜로 3,5) 이런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던져버려야 한다. 몸 전체에 병이 옮지 않도록 베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신 분이다. 당신이 하느님이심까지도 모두 버리시고 당신을 낮추신 분이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거기에 즉 아버지의 뜻 안에 당신의 거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도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철저히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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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때에 한 율법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19-20)
여기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율법학자는 힘든 일을 겪어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그는 예수님이 어떤 생활을 하시는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는 말씀의 뜻은, “나의 생활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달프고 힘든 생활이다.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그냥 떠나버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뒷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냥 떠났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짐작합니다.) 신앙생활은, 즉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막연하게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글자 그대로 ‘신앙’과 ‘생활’이(삶이) 하나로 일치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의 16장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은 피하고 쉽고 편한 길만 찾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과 안드레아 사도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8-39) 여기서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말은,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와서 보아라.”라는 말씀은, “나의 삶을 먼저 보아라.”라는 뜻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삶을(생활을) 본 다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었고(요한 1,41),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이 언제나 항상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레위(마태오)는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루카 5,29) 또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습니다.(루카 8,3)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루카 10,38)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지내실 때에는 베타니아에 있는 마르타의 집을 숙소로 삼으셨던 것 같습니다.(마르 11,11)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주 가끔 있었던 일들이고, 예수님의 삶과 생활을 전체적으로 보면, 여우들이나 새들보다 못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삶이었고,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그런 생활을 함께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다가 바리사이들과 시비가 붙은 일은(마태 12,1-2) 예수님과 제자들의 고달픈 생활을 잘 나타냅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8,21-22)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라는 말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 라고 전해집니다.(사도 6,5)>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큰 슬픔에 빠져서 신앙이 흔들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가지 마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는 일을 중단하지 마라.”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 때문에 신앙에 회의를 품는 것은 잘못하는 일입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몹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요한 11장)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 부활 신앙으로 사별의 슬픔을 극복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씀은, 장례식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만 생각하는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장례식은 인생을 끝내는 예식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예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장례 미사는 ‘죽은 이들의 장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살아 있는 이들의 예식”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셨던 말씀,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 말씀은, 세속 일만 신경 쓰다가 복음 선포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신앙인들도 세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속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속 생활도 ‘신앙인으로서’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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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구에 있을 때는 1년에 한번은 피정을 갔습니다. 교구에서 피정 프로그램을 준비하였고, 사제들은 시간과 마음에 맞는 프로그램을 신청하였습니다. 주제와 강사가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개인 침묵 피정이 있었습니다. 성서공부를 하는 신부님들은 그룹으로 강사를 모시고 피정을 했습니다. 영신수련을 하는 신부님들도 그룹으로 강사를 모시고 피정을 했습니다. 피정을 하면서 영적인 힘을 충전하였습니다. 피정을 하면서 신부님들과 대화하였습니다. 모처럼 예전 신학교의 생활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미국에 온지 3년이 되었습니다. 2020년 2월에 뉴멕시코에 있는 피정의 집에서 머물며 피정을 하였습니다.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팬데믹이 왔고 지난 2년 동안 개인 피정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활동이 중단되면서 팬데믹은 저 자신을 돌아보는 피정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살면서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은 잘 때 충전해야 다음 날 사용할 수 있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도 충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도이고, 그것이 피정입니다. 북미주 파견 수녀님들의 피정에 초대받았습니다. 오늘부터 7월 7일까지 수녀님들과 피정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혼자서는 어려우니 수녀님들과 함께 피정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수녀님들께서도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먼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일 것입니다. 2년 전에 피정이 기획되었지만 팬데믹으로 미루어졌다가 올해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 수녀님들이 피정이라는 밭에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보물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세속의 깃발을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모이면 좋겠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모두 버리고 용기와 담대함을 채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이번 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넘치도록 느끼면 좋겠습니다. 영신수련 23항에서 말하듯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한 것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한 것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피정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좋은 시간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저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려고 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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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말씀과 행동으로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께 배우기를 바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표현은, 온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던 예수님의 일상을 떠오르게 합니다.(마태 4,23; 9,35 참조)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미 ‘주님’이십니다. 그런 그에게 당장 해야 할 중대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라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인륜대사의 중요한 의무마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집’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구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주님이시며 또한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죽음과 삶은 오직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알고 믿으며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스승’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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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는 나를 따라라.”>
율법학자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에 감동하여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마태오 복음 8장 19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복음 8장 20절)
주님의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8장 21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오 복음 8장 22절)
이 대목은 우리에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우리에게 이해가 되기 쉬운 것은 가상이지만, ‘너는 나를 따르고 남은 식구들이 장례를 지내도록 하라.’라면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기준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서 하느님께 청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 좁은 마음이 되고 신랄한 비판을 앞세우는 세상에 살다 보면 비판을 멈추고 부모님처럼 너그럽게 대해 주시는 큰 사랑의 마음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웃의 잘못을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지만 나 자신을 살필 때에는 엄한 기준으로 비판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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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기적을 보고 당신께 밀려든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이 우쭐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셨을까요? 그때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목격한 그는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굴이나 보금자리를 가지는 짐승과 달리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불확실한 유랑 생활에 몸을 맡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세상의 인정과 행복을 뒤로하고 스스로 불확실한 세계 속으로 들어선 이들로, 하느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당신을 따라나서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당신을 따르라 권고하십니다.
이는 부모가 죽어도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거나,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당신을 따라나서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 피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충 쉽게 가르치심으로써 되도록 많은 이들을 제자로 만들려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들만 참제자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조 이래로 세상 종말 때까지 하느님께 철저히 의탁한 의인으로, 우리를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시는 분이 한 분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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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금자리>
마태오 8,18-22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보금자리>
너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나의 보금자리를
기꺼이 내주는
보금자리 같은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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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의 삶에 어중간은 없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느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그만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의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나 편안했을 것인데....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녀의 결혼, 출산 문제, 재물이나 교육문제, 공동체의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어중간이나 양다리 걸치기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분명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미사와 함께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변하고 있습니다. 자녀 출산과 교육에 관한 관심 또한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 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너감’ 곧 새로운 파스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죽은 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언제나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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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주인이 자기 종에게 감자 수확할 시기이니 밭에서 감자를 다 캐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종은 아주 일을 잘하고 주인의 말에 철저하게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자를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캐서 쌓아놓은 뒤 주인에게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일 잘하고 순명하는 종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구덩이 두 개를 파고 네가 판단해서 큰 감자와 작은 감자를 구분해서 넣어라.”
그런데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해졌는데도 종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감자밭에 나가보니, 종이 구덩이 두 개를 파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이유를 물으니, 큰 감자와 작은 감자 구분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시킨 일은 하겠는데,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는 것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삶입니다. 종종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를 순명이라고 겸손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종의 삶의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 뜻과 의지를 세워 행동하면서 그 자리에 하느님을 초대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도 종의 삶입니다. 어렵고 힘들어서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 삶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삶입니다. 포기가 아닌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는 굳은 의지가 필요합니다. 친구이신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친구이신 주님을 모시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나의 의지를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한 율법 학자의 말에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사람이 종을 거느릴 수 있을까요? 종이 아닌 친구만이 함께할 수 있는 여건임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길 원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까지도 뒤로 미룰 수 있어야 한다고도 하지요. 주님을 따르는 일이 그 어떤 것보다 먼저라는 것입니다.
친구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세우면서 계속 변화되는 삶을 통해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종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들면 포기하고 좌절하는 종의 삶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친구이신 주님과의 진정한 우정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가장 제대로 따르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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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마태8,19)
한 율법 학자의 고백처럼, 이렇게 고백한(약속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안에 모습을 보면 이유와 핑계가 너무 많아 보입니다.
돈이 없다는 핑계!
바쁘다는 핑계!
아프다는 핑계!
마음이 불편하다는 핑계!
등등
우리는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따르기를 주저합니다. 기분에 따라 우리의 믿음도 흔들거립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시편 저자는 외칩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시편50,22)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8)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모스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나는, 곡식 단으로 가득 차 짓눌리는 수레처럼,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아모2,13)
먹고 살기에 바쁜 우리들이기에, 이유와 핑계가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유와 핑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 안에 진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을 믿고, 너를 사랑한다는 마음 안에 진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으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의 엄마 성모님께서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라는 걸정적인 신앙고백이후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으면서 끝까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길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과 연약함이 많았던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성령의 내림을 받은 이후 완전히 변화되어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으면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온 세상에 전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한번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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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안식처安息處인 주님>
- 순례여정 -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90,1)
오늘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구절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는 바로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인간입니다. 바로 몸담아 살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가 고향이면서도 고향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래서 순례여정의 도상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바로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安息處이자 정주처定住處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어느 곳이든 주님과 함께 할 때 안식처의 고향임을 깨닫게 되고 저절로 장소에 초연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체험했던 진리이기도 합니다. 배낭에 미사도구를 준비하여 순례 여정 곳곳에서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니 바로 어디나 주님 계신 안식처이자 고향이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 날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우선 미사드릴 제대를 눈여겨 보았다가 다음날 일어나 아침미사를 봉헌한후 하루의 순례여정에 올랐습니다. 지금도 생생했던 체험은 날마다의 떠날 때의 기쁨입니다. 주님의 집을 향한 ‘떠남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루만 지체해도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2014년 순례후 8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흡사 하루하루 계속되는 순례여정중의 삶처럼 느껴집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 122,1)
정말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걸으며 가장 많이 바쳤던 화살기도였습니다. 그러니 순례여정중의 삶중에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근원적 향수homesick를 많이 해소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 주님과 우정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주님과의 날로 깊어져 가는 우정의 사랑을 희구希求하며 쓴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날로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무려 25년 전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의 고백이었지만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소망所望의 고백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와 흡사합니다. 어제는 루가복음이었지만 오늘은 마태복음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추종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으로 어제의 셋째 예화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율사와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을 목격하면서 율사는 흥분했음이 분명합니다. 풋열심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정처없는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가 묻습니다. 새삼 예수님의 안식처이자 정주처는 세상의 가시적可視的 일정한 장소가 아닌 주님이신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역설적으로 머무는 어디나 하느님과 함께 하는 안식처이자 정주처였음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과 우정의 사랑만이 장소로 부터의 이탈을 가능하게 함을 봅니다. 앞서 장소부터의 이탈을 말했다면 두 번째 제자와의 문답은 인간관계에서 이탈을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직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각성케 하는 충격요법의 과장된 표현입니다. 죽은 자들의 장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요구를 모르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주님의 절박한 요구를 절절히 깨달은 제자라면 주님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도록 묵인默認할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모든 인간관계들의 집착에서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인정머리 없는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라 항상 제자직의 사명의 엄중함을 깊이 자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과의 우정이 날로 깊어지면서 이런 장소로부터, 사람들로부터의 이탈이 가능하겠습니다. 이런 이들은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마음 깊이에서는 이들을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께로 안내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하느님을 잊은 자들을 회개로 이끄는 천둥같은 화답송 시편 주님 말씀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과 깊은 우정관계중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됩니다. 주님과의 날로 깊어가는 우정이 참나의 참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거칠고 삭막한 광야여정중 주님이신 하느님을,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을 잊을 때, 이런 주님과 무관無關한 삶일 때의 인간은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섭고 두렵기로하면 사람보다 더한 동물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무지에 눈멀어 본능의 욕망대로 살 때, 사람은 괴물도, 악마도 될 수 있고, 급기야는 세상맛에 중독되어 폐인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아모스서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나 망가져 악하게 될 수 있는지 정말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참사람은 예언자 아모스 하나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안에 정주하기에 이런 분별력의 지혜와 용기일 것입니다. 새삼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고독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에 이어지는 참으로 거론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악행을 공공연히 자행恣行하는 악마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망각했을 때의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때로는 정말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끈 다음, 아모리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아모2.10)
영원한 인도자이자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을 상기해야,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이런 악순환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삼 ‘기억의 훈련’이 얼마나 절실한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이래서 평생 매일 끊임없이 분투의 노력을 다해 바치는 우리 수도자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인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입니다.
좌우간 오늘 제1독서 아모스 예언자는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영원한 인도자이자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깊이함이 무지無知의 악惡에 대한 근본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사랑과 더불어 이탈의 사랑, 이탈의 순수, 이탈의 지혜, 이탈의 자유요, 세상 사람들과 피조물에 대한 한없이 깊은 연민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순례여정중의 우리와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다음 오늘 미사중 본기도, 마음 깊이 새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천상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속에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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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5My5VH8j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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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 20)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행복이 진짜
행복이다.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아픔을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대신
채워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은
머리 기댈 곳을
두지않는
따름이다.
절대고독 속으로
먼저 들어가
하느님을
만나신다.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을 통해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고독을 즐기시는
예수님 내면의
여정이다.
고독함으로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된다.
하느님과
가까워
진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독하신
주님과 함께
살고 있다.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는
고독이다.
삶을
더럽히거나
우롱하지
않게하는
고독이다.
고독으로
다시 보게 되는
예수님 십자가의
뜨거운 상처이다.
뜨거운 고독이
뜨거운
기도임을
믿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뜨거운 눈물
고독이다.
곁가지를
쳐내는 방식
고독이며
더 깊어지는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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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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