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새 회상 경전 결집의 대 성업을 이뤄 불멸의 금자탑을 세우며, 고결한 지조로 공도에 헌신한 일생. 후진들은 범산 이공전 종사(凡山 李空田 宗師)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영광 신흥마을에서 태어난 범산종사는 이재철·이동안 대봉도, 이운권 종사 등 대대로 집안 어른들에서부터 새 회상과 뿌리 깊은 인연의 환경에서 자라 전무출신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의 조모는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 된 어린아이인 범산종사를 등에 업고 소태산 대종사를 뵈었고, 그때 소태산 대종사는 순행(順行)이란 법명을 지어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범산종사는 7세 때 마을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외워 주위를 놀라게 했고, 신심 깊었던 조모는 그런 범산종사에게 “보통학교만 마치면 솜리 본관에 가서 전무출신해야 한다”고 수없이 당부했다.
원기25년(1940) 8월, 범산종사는 당시 영산지부장이던 정산종사와 신흥교당 교무였던 형산 김홍철 종사를 따라 중앙총부에 와 소태산 대종사를 만났다. 소태산 대종사가 “너 몇 살이냐? 무엇하러 왔는고?”하고 물으니 범산종사는 “열네 살입니다. 전무출신 하고 싶어서 전수학원 다니러 왔습니다”고 대답했고,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허어! 애기도 낳기 전에 포대기 챙긴다더니 학원 허가는 날지 말지 한데 학생부터 먼저 왔구만. 아무튼 잘 해보거라”고 말씀했다. 그 인연 그대로 출가로 이어졌다.
스승님의 당부 총부에 있는 동안 형산종사를 따라 전주에 가서 근시 안경을 맞춰 썼다. 범산종사는 새 세상을 보는 듯한 광명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면서 조실 청소 조력을 맡아 조석으로 소태산 대종사를 뵙게 됐다. 당시 범산종사는 조실 출입이 조심스러워 안경을 벗어 들고 다녔다고 한다. 이를 본 소태산 대종사는 “안경은 어디 두었냐? 폼으로 쓰는 것 아닌데 어서 내어서 쓰고 다녀라. 세계사업 할 눈인데, 안력을 잘 아껴라”고 당부했다.
범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는 때로는 엄엄하신 사부님이었고, 때론 인자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이후 원기26년(1941) 범산종사는 유일학림 전수학원이 시작돼 전문공부를 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공부에 대한 희망이 좌절됐다가, 다음 해 원기27년(1942) 4월 총무부의 첫 서기가 됐다. 당시 16살이던 범산종사는 박장식 부장을 도와 소태산 대종사 <정전> 편찬에 필경(筆耕)하는 일을 맡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범산종사의 법명을 공전(空田)으로 고쳐 주며 “이름값 잘해라”고 부촉했다.
교서 편수에 혼신을 다한 생애 범산종사는 당시 많은 독서량과 출중한 문장력으로 주목받았다. 그러한 범산종사의 재능은 교단 경전 결집에 큰 역량으로 발휘된다.
원기43년(1958) 5월 정산종사는 특별교시를 내려 새 회상 경전 결집을 위해 ‘정화사’를 설립할 것을 교시했다. 범산종사는 정산종사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며 정화사의 사무 책임을 맡아 경전 결집의 대불사에 혼신을 다해 수행했다. 정산종사의 뜻을 받들어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모으고, 교단의 원로 스승을 모시며 일천 정성을 다하는 결집작업이었다.
원기47년(1962) 9월 마침내 새 회상의 만대본경인 《원불교 교전》이 완정돼 발간됐다. <정전>과 <대종경>으로 엮은 《원불교 교전》의 완정 발간은 정산종사의 4대 경륜 중 ‘교재정비’의 실현인 동시 교단의 만대 법보(法寶)가 만천하에 선포되면서 새 회상의 신앙체계가 완전하게 자리 잡는 역사적 의미였다.
원기50년(1965) 12월에는 <불조요경>이, 원기53년(1968) 3월에는 새 회상의 신정예법인 <원불교예전>과 <원불교성가>가 발간됐고, 원기57년(1972) 1월에는 <정산종사법어>가 발간됐다. 원기60년(1975) 9월에는 <원불교교사>와 <원불교교헌>이 발간돼 이로써 모든 교서의 결집이 완성됐다.
이어 범산종사는 부대사업으로 <원불교교고총간> 전6권을 집대성함으로써 교단 초창기의 모든 기록유산을 보존 전승케 하는 세심한 주의까지 기울였다. 또한 7대 교서를 종합한 <원불교전서>를 발행해 전국은 물론 해외 곳곳에까지 기념 배포했다.
범산종사는 정화사가 개설되면서 약관으로 사무장의 중임을 맡아 법신불 사은의 가호 아래 천력을 빌리는 전일한 정성으로 만대에 한량없는 대중이 봉대하게 될 교서결집의 위엄을 이뤄냄으로써 새 회상에 불멸의 공덕을 쌓아 올린 장한 생애였다.
범산종사는 경전 결집 이외에도 정산종사를 직접 시봉하는 책임을 맡아 병환 중에 계시던 정산종사를 알뜰히 보필했으며, 틈틈이 신보사(현 원불교신문사) 주필, 감찰원 부원장 등을 맡아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중앙문화원장에 재직하면서 갖가지 문화사업과 사적지보호사업에도 정성을 다했다. 봉래정사 석두암터의 일원대도비와 연화봉 삼매지비, 화해제우지비, 만덕산 초선지비, 성주 소성리 구도지비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명문장으로 유명했던 범산종사는 다수의 시문과 논설도 남겼다. <동방의 새 불토>와 <운수의 정> 등 격조 높은 수십 편의 시가는 물론 <새 회상론 서설>과 <교사 서장> 등은 교례와 회상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