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7일
말씀 : 롬6:10-11
제목 : 십자가에 뿌리내리는 삶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이 간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부활 없이 설명될 수 없고 부활은 십자가 없이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십자가 복음에 대해 설교했다면 부활에 대한 언급은 당연히 따라와야 하고 부활의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하나입니다. 죽음과 부활, 이 양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실질적인 영적 삶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집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긍정적인 면에서의 영적인 생명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의 부정적인 진리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오히려 부활의 영광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부활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회개와 악한 본성적 생명을 처리할 수 있는 중요한 상황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처리될 때만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갈보리 십자가와 생명의 부활은 같이 강조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있고 부활이 있어야 십자가가 있다는 양면적이지만 하나인 진리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을 강조하는데 그 죽음으로 생명과 부활이 설명되는 경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밀알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땅에 썩어 죽을 때 생명이 소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렸기 때문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양면적인 부분이 하나로 설명되는 오묘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 같은 경우도 죄에 너무 몰입되어 ‘혹시 기억나지 않는 죄를 회개하지 못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의 삶을 살다보니 끊임없이 회개해도 기쁨과 평안이 없었습니다. 침례요한 시대의 경건주의자들은 광야에서 그룹을 지어 계속 물로 씻어내는 일만 했습니다. 죄에 너무 갇혀 자신을 정죄하거나 부정적인 면에 치우쳐 영적인 죽음에 몰입함으로써 삶의 역동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 죄에 대해 너무 경솔히 여기고 구원에만 도취되어 거룩한 삶에서 멀리 떨어져 인본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을 억압하며 죄인으로만 봄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 긍휼, 감사, 은혜에 소홀할 수 있고, 그 다음은 너무 긍정적인 면만 부각함으로 인해 본성적인 옛 자아가 남아서 그것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균형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을 진정으로 부여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영적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살펴보면서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생활이 참 어렵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영적인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적으로 독단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을 늘 견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겸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도 말씀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동시에 성도들도 자기가 생각하는 교리와 비교해 문제가 좀 있다고 느껴도 정통교단에서 주장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단 교리는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중요한 것은 교리와 해석이 천국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면 예를 들어 야곱의 얍복강 사건을 기도로 설교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도라기보다 고집을 내려놓는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아말렉 전쟁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전쟁에서 이기고 내리면 패하는 것으로 인해 아론과 홀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도로 해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전쟁을 온전히 맡기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기도로 설교하는 목사님이 계시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은혜를 받으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해석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할뿐더러 이 부분이 혹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믿는다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균형 잡힌 성도들은 그런 차원에서 성숙한 성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롬6:10-11로 가서 십자가의 죽음의 측면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주어진 생명의 측면에서 주님과의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봅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 속에는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는 생명의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축복인 까닭은, 그리고 못 박혀야 할 분명한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부활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논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가 무슨 뜻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가서’는 다른 성경(스코필드)에서는 ‘결혼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죽임을 당하셨다’는 십자가를 의미하며,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된 십자가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분명히 십자가와 부활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떠나서는 부활의 생명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과의 연합은 고전6:17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 즉, 혼적인 결합이 아니라 영적인 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십자가의 죽음의 부정적인 측면은 우리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되지 않는 교리나 신학이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체험적인 결과는 영의 자유함을 가져옵니다. 원래 영은 혼과 육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육과 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은 히4:12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에는 비물질적이거나 만질 수 없는 것들도 쪼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적인 무기로서 물질세계에서 칼로 물건을 쪼개는 역할을 하는 말씀은 바로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곧 십자가의 말씀이 혼을 영으로부터 쪼개어 갈라놓는 사역을 하는데, 먼저는 성도 안에서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분별하게 하고 이어서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십자가의 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영과 혼을 쪼개어 분리시키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또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하는데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이 구절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우리를 상관하는 자’ 곧 주님 자신이 날 선 검을 들고 우리의 옛 생명을 잘라 버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좌우에 날 선 성령의 검을 다루시며 우리의 영을 혼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사실 혼과 영과 육으로 구분하는 신학자들이 있고 영과 육으로 분리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앤드류 머리 박사는 3분법을 통해 영적인 존재로 영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육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린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을, 혼은 자아를, 육은 감각을 인식하는 기관인데 그렇다면 혼의 자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계속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혼적인 신앙, 즉 자아를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혼적인 신앙생활을 영적인 신앙생활로 착각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영적인 지식을 자아가 방해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생명의 측면에서 십자가를 실질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죽는 것뿐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혼과 영이 쪼개어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적인 부분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살리는 영’이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육체와 혼 안에 부활의 영으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혼이 인격으로 그리스도 성품으로 다듬어지고 영의 지배를 받게 되어 우리의 육체와 혼적인 자아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배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야 우리의 혼과 육이 거룩함으로 쓰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율법에서 한 번 찾아봅시다. 율법은 양면적인 부분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원래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비춰줍니다. 율법의 역할은 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율법 때문에 신앙의 균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롬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있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율법이 지시하고 요구하는 것을 인간이 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까? 인간은 스스로 의로운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기 능력과 자아로 율법의 흔적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으로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지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킨다고 착각하고 오해해서 자랑으로 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혼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즉, 자기 힘과 능력으로 열심히 하면 영적인 영역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선한 것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율법의 등장은 심판 아래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는 확인과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부정적 효과만 남기게 됩니다.
혼적인 신앙생활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자랑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자랑과 교만이라는 열매만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적 행위나 혼적인 행위는 자신의 열심을 통해 내가 종교심이 깊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 받고 싶어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내가 내 문제를 홀로 해결하지 못해서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우리의 구원과 복과 운명이 외부,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어떻게 옵니까?
갈5:16-18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의 삶과 영적인 삶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옛사람, 옛 자아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서 우리를 어디로 이끈다고 했습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도 안 될뿐더러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부정적인 죄를 보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우리는 그 죽음으로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싸움을 해야 하는지만 내 안에 있는 것으로는 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룩한 싸움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영광을 받은 자들은 매 순간 성령께 맡기는 선택을 해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자, 부활의 믿음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에 동참한 믿음의 삶은 드디어 내 성질대로 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십자가 밑에 나를 파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든지 나를 쫓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밑에 있을 때 나의 혼적인 부분, 자아에 대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라고 고백하며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드디어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면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믿음과 구원의 출발 이후, 즉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는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주님 안에서 행하고 주님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부활의 측면에서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라고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지 않습니까? 나무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나무를 보존합니다. 골2:7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그러니까 십자가가 뿌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뿌리를 깊게 박자’는 것은 십자가가 흔들릴 수 없는 뿌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떠나서는 생명으로 나갈 수 없고 어떤 영적 목표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하나님을 향해서는 산 자’로 여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간다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나라를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뿌리가 내려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날마다 뿌리를 깊이 내려 왕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나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하며, 부활의 기쁨의 삶, 죽음마저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