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21일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서울 6.21~6.24)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21일 서울 워커
힐호텔에서 3박4일간의 일정으로 시작
됐다.
회담 첫 공식일정으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주최한 환영만찬이 오후 8시부터 두 시간 가량 진행됐다. 북측이 착석하자 현악단이 ‘통일 6·15’라는 곡을 연주했다.
사회자는 “북한이 6·15 남북정상회담 5주년을 기념해 만든 노래”라고 소개했다. 행사에는 남북 대표단과, 열린우리당 배기선·한명숙·최성,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 등 여야 의원 10여명과 학계·재계·사회단체 대표 등 90여명이 참석했다.
북측 대표단은 이날 워커힐호텔에 35분
쯤 늦게 도착했다. 인천공항 출발 후 올림
픽대교 부근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비난
하는 플래카드를 든 시위대 때문이었다.
북측은 시위대를 보고 차를 세운 뒤 항의했
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오후 7시로 잡혀 있던 만찬도 1시간 가량 지연됐다.
22일 15차 남북 장관급회담 첫날 전체
회의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기조발언
을 통해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생사·주소 확인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7월 중 개최하고, 8·15를 계기로 11차 이산가족 상봉을 하되 6월 중 ‘화상(畵像) 상봉 준비기획
단’ 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정 장관은 또 “7월 중 남북 장성급회담을 열어 이를 정례화하며 국방장관회담도 갖자”고 제안했다.
북측 권호웅 단장은 이런 제안에 대해 이
날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장성급 회담은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약속했고, 국군포로·납북자의 생사·주소 확인은 2002년 9월 4차 적십자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이다. 권 단장은 8·15 이산가족 상봉과 화상 상봉만 응했다. 그는 상호 비방방송을 중지하자고도 했다.
권 단장은 또 “식량 사정이 어렵다”며 구체적인 양까지 요청했다. 이와 관련, 회담 관계자는 “예년 수준 규모”라고 했고, 정부 당국자는 “쌀 40만t 정도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예년처럼 우리측이 40만t을 국내산 10만t과 동남아산 30만t으로 충당해 지원할 경우 140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핵문제와 관련, 북측은 “미국이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한다면 단 한 개의 핵무기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 위원장의 발언을 반복했다. 북측은 그러나 ‘7월 중 6자회담 개최’ ‘장관급회담에서 핵문제도 협의’라는 우리측 제안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23일 청와대에서 북측 대표단 일행을 접견했다. 청와대측은 북측 대표단이 김 위원장의 특사자격은 아니라고 밝혔다.
북측 인사가 청와대에 들어간 것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5차 장관급회담 때 이후 4년 만이다. 이들의 청와대 면담은 청와대측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6·17 면담‘에서 정리한 큰 가닥을 거의 벗어나
지 못했다. 그만큼 합의도 쉬웠지만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북핵문제는 비핵화원칙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고, 많은 현안을 장성급회담·경제협력추진위 등 하위 회담으로 넘겼다.
그래서 이번 회담을 ‘6·17 면담’ 구체화를 위한 실무 협의라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또한 우리측이 요구했던 회담 정례화도 완전하게 이뤄내지 못했다.
▶2014년강원도 고성군 군부대 총기난사 사건
👉🏿 21일 오후 강원도 동부전선 내 고성 22사단 GOP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병사 5명이 숨지고 7명이 다쳤다.
이날 GOP 소초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임모 병장은 동료병사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한 뒤 실탄60여발과 수류탄, K-2 소총을 소지한 채 탈영했다.
이후 고성군 금강산콘도 500m 서쪽에서 군 병력과 대치했으며, 군 병력은 이날 오전 7시쯤부터 임 병장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아버지와 형이 임 병장과 7~8m 떨어진
거리에서 투항을 권유했지만 임 병장은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데
돌아가면 사형 아니냐? 나갈 수 없다”고 버텼다.
임 병장은 23일 오후 군 병력에 포위된 상태에서 자신의 K-2 소총으로 자해를 시도한 뒤 생포됐다. 임 병장은 자해 시도 직전 “선임(先任)과 후임(後任)들로부터 인정을
못 받고 따돌림을 당해 부대 생활이 힘들었다. (희생자)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전선 22사단은 예전에도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15명이 숨졌고, 지난
2012년 ‘노크귀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사건사고가 잇따랐다.
▶2009년터키서 살인진드기 ‘케네’ 공포
▶2004년사상 첫 민간 유인우주선 ‘스페이스십원’ 대기권 밖 비행 성공
▶2002년김대중 대통령 2남 김홍업씨 22억 수수혐의로 구속
👉🏿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가 청와대·검찰·국세청·예금보험공사·신용보증기금 등 국가기관의 업무와 관련해 기업체의 청탁과 함께 22억8000만원을 받은 혐의
(특가법상 알선수재, 변호사법 위반)로 2002년 6월 21일 구속됐다.
검찰에 따르면 홍업씨는 2000년 2월 삼보판지 유종규 부사장으로부터 모범납세자로 선정되게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국세청 간부에게 청탁해주겠다며 1억원이 든
통장을 받았고, 같은 해 9월∼2002년 2월 성원건설 전윤수 회장으로부터
화의 인가와 관련한 청탁조 및 사례비조로 4차례에 걸쳐 1억
4000만원을 받았다. 홍업씨는 또 2000년 6월 당시 대한주택공사
오시덕 사장에 대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내사종결 사례비로 오 사장으로부터 2000만원을 받는 등 총 2억6000만원을 직접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홍업씨가 직접 받은 1억4000만원과 별개로, 김성환·이거성씨 등이 성원건설에서 10억원을 받는 과정에서 예금보험공사 이형택 당시 전무에게 “화의안을 신속하게
동의해달라”고 청탁했고, 2001년 평창종건의 신용보증서 취득과정에서
당시 신용보증기금의 모 전무와 이 회사 간부의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공범혐의를 적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3남 김홍걸씨에 이어 차남 김홍업씨도 구속되자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으로 국민여러분 앞에 섰다”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1999년경북 성주서 발견한 수륜광산, 국내 최대 금광맥으로 확인
👉🏿 대한광업진흥공사가 1999년 2월말부터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광산, 전남 진도군 가사도광산, 충북 음성군 금풍광산 등 3개 광산을 대상으로 시추탐사를 벌인 결과
1999년 6월 21일 수륜광산이 국내 최대의 금광맥으로 확인됐다.
수륜광산의 금광석 가채매장량은 184만4000t으로, 당시 국내 총 금광석가채매장량(400만t)의 절반에 가까웠다. 순금으로 환산하면 9˙9t이며, 당시의 국제금값으로 계산하면 943억원에 이른다고 산자부는 추정했다. 당시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최대 금광은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광산으로 가채매장량은 78만t에 불과했다.
수륜광산의 품위(금광석 1t당 금함유량)는 442˙4∼530˙4g/t으로,
무극광산(10g/t)의 50배 수준에 달했다.
국내에서는 무극광산에서 연간 1t 안팎의 금을 생산했으나 매장량이 고갈되면서 1997년 말부터 금생산이 중단돼 필요한 금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국내 최고품위의 최대 금광맥을 발견함으로써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금의 상당 부분을 국내에서 공급할 수 있게 됐다.
▶1998년콜롬비아 대통령에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당선
▶1998년시인 윤동주, 육필원고 150점 공개
👉🏿 '별헤는 밤’과 ‘서시’의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작품 중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동시 육필원고 8편이 새로 공개됐다. 이와 함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유명한 ‘서시’를 비롯, 그가 생전에 남긴 육필원고 1백50점, 소장 도서와 메모, 신문 스크랩 등이 처음으로 일괄 공개돼 일제 암흑기 비운의 요절 시인 윤동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미공개 시들은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윤동주 동생 일주씨 장남·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씨가 윤동주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컬러사진으로 담아 학계에 자료집으로 내놓기로 결심함에 따라 21일 공개됐다.
새로 공개된 작품은 시 ‘가슴 2’와 ‘울적’ ‘야행’ ‘비삥뒤’ ‘어머니’ ‘가로수’, 동시 ‘개’, 동요 ‘창구멍’ 등 8편이다. 1934∼1939년(18∼23세), 간도 은진-광명학교와 평양숭실중학교 연희전문 등을 다니며 시인의 꿈을 키우던 문학 습작기를 반영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윤동주의 제1습작시집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와 제2습작시집 ‘창’에
각각 실렸으나 그가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낼 때 빠졌으며, 광복 후 윤동주 시집을 내는 과정에서도 후손들이 공개하지 않아 실리지 못했다.
“새로 공개된 작품들은 윤동주 자신이 마음에 들지않아 ×표를 한 것들이지만, 이중 ‘비삥뒤’나 ‘어머니’ 같은 좋은 작품에 그가 왜 ×표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검토한 오오무라(와세다대·한국문학)교수는 말했다.
윤동주의 육필원고가 이렇듯 온전하게 남아있는 데는 윤동주 집안과 고(故) 정병욱 서울대 국문과 교수 집안 간의 운명적 인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며 자필 시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의 육필원고를 연희전문 1년 후배이자 룸메이트였던 정병욱에게 맡겼고, 정병욱은 일제 말 징병돼 떠나면서 “일제에 발각되지 않도록 마루 밑에 잘 보관하고 혹시 내가 전장에서 죽더라도 해방되거든 발간하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이후 윤동주의 남동생(일주)과 정병욱의 막내 여동생(덕희)이 후에 결혼, 50년 동안 자료들을 목숨처럼 지키고 관리해 온 것이다.
윤인석씨는 “50년 넘게 집안에서 보관해 왔으나 분실 훼손의 염려가 항상 있어 더 늦기 전에 모든 자료를 컬러사진 판으로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자료집은 ‘사진판 윤동주 육필 시고 전집’이란 제목으로 광복절인 8월 15일에 맞춰 민음사에서 발간됐다.
▶1995년오영선 선생 등 독립유공자 7위(位) 유해 환국
👉🏿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외무부장을 역임한 오영선 선생(1886~1939) 등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유공자 7위의 유해가 21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환국했다.
중국, 미국 및 일본에서 이날 봉환된 7위는 오영선 선생을 비롯, 광복군사령부 선전부장과 정보국장을 지낸 양기하(1878~1 932)선생, 임정 임시의정원 재무위원장이었던 윤현진(1892~192 1)선생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 7위의 유해는 김포공항에 도착한뒤 황창평 국가보훈처장, 김승곤 광복회장, 유족과 친지 등 2백여명의 영접을 받았으며 국군의장대 소속 지프편으로 김포공항에서 동작동 국립묘지로 봉송돼 국립묘지 내 영현봉안관에 임시로 안치됐다.
정부는 이홍구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오영선-양기하선생의 유해를 22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윤현진 선생 등 5위를 23일 대전국립묘지에 각각 안장할 계획이다.
▶1995년일본 전일공(ANA) 857편 여객기 피랍
▶1993년네이디르 사건 발생1992년중국 원로 이선념 사망
▶1990년이란 라쉬트 대지진 발생. 5만여명 사망-20여만명 부상
▶1989년유네스코 문맹퇴치 공로상인 `세종대왕상` 창설
▶1988년소설가 전광용 별세
👉🏿 호는 백사(白史). 1919년 3월 1일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1943년 일본에 건너갔으나 전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귀국하였다. 1951년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이후 국어국문학회 대표, 한국현대문학연구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88년 6월 20일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1939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당선었으며,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흑산도'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인활동을 시작하였다. '흑산도'는 서해의 고도 흑산도에 대한 학술 조사 기행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 섬에 운명적으로 매달려 있는 어민들의 생태를 그린 작품이다. 이후 1968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꺼삐딴 리>, <충매화> 등 30여 편의 단편과 <나신>, <창과 벽> 등 4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대표작 <사수>는 친구 사이에 운명적으로 내재해 있는 승부의식과 대결의식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집으로 <흑산도>, <꺼삐딴 리>, <동혈인간> 등을 발간하였다.
1983년체코 프라하 시민 300여명, 68년이후 처음으로 반정시위
▶1982년반 베트남,캄푸차 연합정권 구성 선언
▶1977년프랑스 화가 루시엔 쿠토 사망
▶1974년이슬람제국 외상회의 쿠알라룸프르서 개최, 38개국과 PLO참가
▶1972년주한태국군 철수 완료
▶1971년국제사법재판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미비아통치 위법판결
▶1970년미국, 앨버트 크루 원자분리 촬영
▶1970년브라질 제9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통산 3회 우승 달성
▶1970년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1949-66) 수카르노 사망
▶1968년플로리다에서 휴고 빌렌, 1.83m의 보트로 84일 간의 대서양 횡단 항해
▶1963년프랑스, 대서양함대 NATO철수를 통고
▶1962년대한무역진흥공사 설립
▶1961년혁명재판소 및 검찰부 조직법 의결
▶1960년사상초유의 경찰데모 발생
▶1957년휴전협정 제B조, D항 (무기반입금지) 폐기
▶1955년북한 공군장교 이운용. 이인선 야크기 타고 귀순
👉🏿 1955년 6월 21일 북한 조선항공사령부 직속 독립연대 858군부대 소속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 두명이 야크18 연습기를 타고 귀순했다.
평양출신이며 소련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운용 상위와 평남 강서군 출신이며 중국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인선 소위 두명은 이날 오전11시경 소속부대인 조선항공사령부 직속 독립연대 858군부대에서 무단으로 나와 야크18 연습기로 평양을 탈출, 오후1시30분경 서울상공에 도달해 수차례 선회하며 귀순의사를 밝힌 후 여의도 비행활주로에 착륙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북한의 신문지 및 연락서류를 진남포 앞바다에 있는 초도라는 섬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날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기내에서 탈출을 상의해 그대로 남으로 방향을 틀어 인천을 경유해 여의도공항에 착륙한 것으로 밝혀졌다.
8월 16일 공군본부는 귀순한 이운용, 이인선 장교를 공군으로 정식 편입해 각각 대위와 소위로 임명했다.
▶1949년농지개혁법 공포
👉🏿 1949년 6월 21일 남한에서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이로써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갔고, 수천년간 이어온 지주계급을 몰락했다. 북한이 1946년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토지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농민운동의 고양, 북한의 토지개혁에 자극받은 바가 컸다.
당초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유상분배’안이 집중 논의됐으나 좌익세력의 약화와 농민운동의 분열-쇠퇴에 따라
‘유상분배’ 토지개혁안이 거의 확정됐다.
국회는 농림부가 작성해 국회에 제출한 농지개혁법안과 국회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농지개혁법안을 비교 검토한 끝에 보상과 상환액은 각각 평년작의 15할 및 12할 5푼, 보상과 상환은 5년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을 1949년 4월 28일 통과시켰다.
재정상의 이유로 정부가 보상액을 일치시켜줄 것을 국회에 요구했으나 국회는 이를 거부하고 이날 공포했다.
그러나 지주층의 광범위한 소작지 방매행위로 불완전한 농지개혁이 돼버렸다. 그러나 이 농지개혁도 시행에 들어갈 즈음 발발한 6·25전쟁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더구나 관계서류가 없어진 탓에 대상농지가 축소됐다. 한편,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가게 한 농지개혁법은 남한에서 6·25 때 농민들의 적화를 막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8년미국 콜롬비아사 LP레코드 첫 공개
▶1947년국제올림픽위원회(IOC) 한국 참가 승인
▶1926년제2차 공산당 사건
▶1921년런던서 개최된 영제국회의서 `영연방`결성에 합의
▶1914년주트너 사망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로 최초의 여성 평화주의자의 한 사람이며1905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13년미국 죠지아 브로드윅,여성최초의 낙하산 강하 성공
▶1908년행크 허스트, 부인참정권을 요구하는 25만인 데모
▶1905년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출생
▶1904년서울에 공중변소 설치
▶1900년의화단 사건1893년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철도 건설자, 미국 상원의원 스탠퍼드 사망
https://youtu.be/2RoPnKqhuf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