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등을 복권시키겠다는 김안로의 주장을 듣고 선비들의 가슴은 뭉클했다. 그들의 성원에 힘입어 김안로는 요직을 차지했다. 하지만 조정의 인사권을 거머쥐자 본색을 드러냈다. 나라의 중대사를 제멋대로 처리하면서도 늘 공론을 핑계댔다. 그는 아부꾼들로만 조정을 가득 채웠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오명을 씌워 내몰았다. 이를테면 낙하산 인사와 보복 인사의 선구자였다. 언젠가 이조좌랑 홍섬은 취중에 사석에서 김안로를 비난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김안로는 즉시 홍섬을 잡아다 곤장을 마구 치며 역모로 옭아 넣으려 했다. 홍섬이 끝내 무죄를 주장하자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홍섬의 아버지 홍언필도 조정 대신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김안로는 정적을 무자비하게 살해했고, 심지어 문정왕후까지도 폐위시키려 했다. 온나라 사람들은 그가 두려워 숨을 죽였다.김안로는 명분과 공론을 내세우는 데 탁월했다. 조정의 물갈이도 나라를 위해서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역사를 속이지는 못했다. 물갈이가 필요한 때도 있기야 하겠지만 속도와 국가관이 해임 사유라면 곤란하다. 권세란 생각보다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전횡을 일삼던 김안로는 결국 사약을 마셨고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심언광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51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그 뒤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임금의 특명으로 독서를 하던 곳)에 들어가 사가독서하면서 문명을 날려, 지평(持平)·정언(正言)·장령(掌令)·홍문관교리·집의(執義) 등의 청요직을 두루 지냈다.
언관을 역임하면서 국방문제의 중요성을 제기하였고,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하여 심정(沈貞)을 비롯한 권간들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1530년 대사간이 되어서는 형 심언경과 함께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적극 주장, 실현시켰다. 그러나 김안로가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붕당을 조직하고 대옥(大獄)을 일으켜 사림들을 모함하자, 비로소 지난 날 자신의 추천행위를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안로가 자신의 외손녀를 동궁비로 삼으려 하자 이를 질책하였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겼다. 1536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공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김안로의 비행을 비판하자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김안로와 그 일당이 축출되자, 우참찬에 올랐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일파가 집권하면서 향배가 바르지 않다고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심언광. 문정황후 의 불교에 대항하는 성리학https://blog.daum.net/altairkimk/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