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柳得恭, 류득공, 1748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 1807년 10월 1일(음력 9월 1일))은 조선 경기도 포천군 군수 직책을 지낸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문신, 시인이며 조선 정조 치세 시대 당시의 실학자, .
자(字)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거사 (古芸居士), 고운당(古芸堂), 은휘당(恩暉堂)이다.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 제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풍천부사에 이르렀다. 규장각 검서 당시 다양한 서적을 읽으면서 신라사 위주의 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이후 발해고와 사군지 등을 출간하였다.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를 겸임하여 이덕무·박제가·서이수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서얼 출신 학자로 실학 사상가이면서 역사가로, 발해고의 저자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한 학자이다(인용 나무위키)
곰나루〔古音兒津〕[DCI]ITKC_BT_1550A_0010_000_0040_2021_001_XML DCI복사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공주(公州)는 산이 ‘공(公)’ 자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그것으로 고을을 이름하였다.” 하였다. 나는 여러 차례 공주에 갔지만 이른바 공 자 산은 볼 수 없었다.
공주에 웅진(熊津)이 있기 때문에 웅주(熊州)라고도 부른다. 웅진은 속칭 곰아진[古音兒津]인데, ‘곰[古音]’이란 우리말 곰[熊]이다. 당나라가 여기에 웅진도독부를 두었다. 《북사》에 “백제는 고마성(固麻城)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고마’와 ‘곰아’는 소리가 비슷하니, 웅성(熊城)을 말한 것이다.
생각건대 백제 때 이 고을은 곰아주[古音兒州]라고 불렸을 텐데, 고(古)와 공(公)은 첫소리가 서로 비슷해서 공주가 되었을 것이다.
계묘년(1783, 정조7) 9월 9일, 곰나루를 건너다 배 안에서 이 글을 쓰다
당혜와 운혜〔唐鞋雲鞋〕[DCI]ITKC_BT_1550A_0010_000_0220_2021_001_XML DCI복사
망건이 명나라 복제인 줄은 다 알면서 당혜와 운혜가 어느 시대의 복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살펴보건대 고정림(顧亭林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 《내구현지(內丘縣志)》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만력 초에 서민들은 가죽신을, 유생은 쌍검혜(雙臉鞋)를 신었고, 시골 선생 중 머리에 충정관을 쓰는 자가 아니면 상변 운두리(廂邊雲頭履)를 신을 수 없었다. 요즘에는 문쾌(門快)와 여졸(輿卒)에 이르기까지 운리(雲履)를 신지 않는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쌍검혜는 당혜와, 운두리는 운혜와 비슷한 듯하다. 다만 가죽신의 제도는 상세하지 않다. 아마도 지금 서민들이 신는 고비혜(孤鼻鞋)일까? 그렇다면 당혜와 운혜도 명나라 복제다.
함경도 풍속〔北俗〕[DCI]ITKC_BT_1550A_0010_000_0270_2021_001_XML DCI복사
북에서 온 어떤 사람이 그들 풍속의 예(禮)를 말해 주었다.
“삼년상이 끝나 갈 무렵이면 개를 잡아먹어 몸을 아주 튼실하게 해 둡니다. 탈상하는 날 친척들이 일제히 모여서 길복(吉服)을 가지고 상주한테 입히려고 해요. 그러면 재빨리 내달려 피하는데, 30리 못 미쳐 쫓는 자에게 잡히면 고장 사람들이 불효라고 수군댄답니다.”
하양 현감을 지낸 임희택이 해준 말이다. 그가 하양을 다스릴 때 산골에 살던 어떤 자가 여인을 세 토막으로 자른 일이 있었다. 군교들이 결박해 와 보고하기에 당장 달려가서 검시하였다. 피가 흥건하고 살점이 문드러졌는데, 주척(周尺)으로 창자를 재었더니 42자였다. 형을 가하며 신문하였더니 흉악한 짓을 한 사람은 바로 북관 사람이었다. 그가 공초에서 말하였다.
“아내를 이끌고 떠돌이로 지냈는데 불행히도 병으로 죽었습니다. 살을 버리고 뼈만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 지내려고 했습니다. 북쪽 풍속이 예로부터 이러한데, 큰 죄가 되는 줄 진작 알았다면 어찌 꼭 이렇게 했겠습니까.”
복검 때의 공초도 전과 같았으며, 결국 형장을 맞다 죽었다.
북쪽 풍속이 이토록 놀라우니, 이는 바로 부여, 옥저의 유풍이다. 《삼국지》 〈부여전〉의 주에 “그 풍속은 다섯 달 만에 상복을 벗는데, 상복을 오래 입는 것을 영예롭게 여긴다. 상주는 탈상을 빨리 하려고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강요해서 항상 밀치락달치락 다투는데, 이것을 예절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또 《후한서》 〈동옥저전〉에 “그들은 장사 지낼 때 큰 나무관을 만들어 두고 죽은 자를 우선 임시로 매장해서, 피부와 살이 다 없어진 뒤에야 유골을 수습해 관 속에 넣는다. 가족이 모두 하나의 관을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함경도는 옛 옥저 땅이고,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해 있었다.
조선 초기 함경도 개척〔北關沿革〕[DCI]ITKC_BT_1550A_0020_000_0160_2021_001_XML DCI복사
함경도는 옛날 옥저 땅이다. 《삼국지》에 “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으며 큰 바다를 끼고 자리 잡고 있다. 그 지형이 동북쪽은 좁고 서남쪽으로는 길어서 1000리쯤 된다. 북쪽으로는 읍루(揖婁), 부여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예맥(穢貊)과 접해 있다.”라고 하였다. 한 무제가 현도의 치소(治所)를 옥저의 도성에 두었는데, 뒤에 이맥(夷貊)에게 침략당해 현도의 치소를 구려현(句驪縣) - 지금의 흥경(興京)이다. - 으로 옮겼고, 옥저 땅은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에 소속시켰다. 광무제 6년(30)에 도위(都尉)를 없애고 그 수장을 봉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으나 얼마 안 되어서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위(魏)나라 현도 태수 왕기(王頎)는 고구려 왕 궁을 뒤쫓다가 옥저 땅 천여 리를 지나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뒤로는 중국이 이 땅을 엿본 적이 없었다.
발해의 대씨(大氏)는 책성(柵城)과 남해(南海) 등의 부(府)를 두었는데, 여진이 차지해서 갈라전 - 지금의 함흥, 단천, 길주 등지이다. - 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북쪽 경계는 천정군 - 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 에 이르렀고, 고려의 북쪽 경계 역시 도린포를 넘지 못하였다. 원나라는 땅을 넓히기를 좋아해서 개원(開元) -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다. - 휼품(恤品) - 지금의 갑산, 삼수 등지이다. - 에서부터 뻗어가 갈라의 옛 땅에 합란부(合蘭府) - 지금의 함흥부이다. - 를 두고 쌍성(雙城) -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 을 지켜 경계로 삼았다. 원나라가 쇠퇴해서 망할 때 쌍성이 먼저 격파되었다. 그리고 우리 조선이 북방에서 일어나 태조 강헌대왕이 하늘이 내신 신무(神武)의 재능으로 영토를 넓혔고, 세종 장헌대왕이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야인을 정벌하고 육진을 설치한 뒤에야 두만강 이남이 모두 우리 영토로 편입되었다. 나라를 위한 큰 계책과 아름다운 업적이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훨씬 뛰어났으니 매우 성대하다.
이때 명나라는 갓 천하를 차지하여 염려하는 것은 달단(韃靼)뿐이고 동북쪽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비록 건주위(建州衛), 모린위(毛隣衛) 등을 두기는 했지만 다만 견제를 하는 것일 뿐이었고, 한 차례 쌍성 지역을 요구한 적은 있으나 후에 결국 불문에 부쳤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가 군비를 갖추어 북벌을 해서 날마다 백 리씩 영토를 넓히고 성읍(城邑)을 둘 수 있었으니, 이는 정말로 천하의 일대 기회였다. 육진 땅은 동북쪽으로 쑥 들어가 두만강을 경계로 삼고 있어서 백두산이 서남쪽에 있는 것과 견주어 보면 서북쪽으로 영고탑과의 거리가 600리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갈라를 지나면 호리개 땅이고, 옥저를 지나면 읍루 땅인 것이다.
금나라 세종이 말하기를 “속빈(速頻)과 호리개 사람은 모두 용맹하다.” 하였다. 내가 육진에서 수령을 지낸 사람들에게 들으니, 그곳 사람은 눈 속에서 홑베옷만 입고도 춥다고 하지 않고, 기장밥 한 덩이를 옷깃에 싸서 하루에 백여 리를 달려도 배고프다고 하지 않으며, 심한 곤장 수십 대를 맞아도 아프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질박해서 딴마음을 먹지 않아 은혜를 입으면 그를 위해 죽고,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는다 하니 아마 그 옛 풍속이 그러했을 것이다. 남녘 사람들과 크게 다르니, 잘 보살펴 기른다면 어찌 그들이 만주의 건아만 못하겠는가.
러시아〔車漢〕[DCI]ITKC_BT_1550A_0020_000_0180_2021_001_XML DCI복사
북우후(北虞候) 신류의 《차한기략》에 말하였다.
“차한(車漢)은 나선(羅禪)이다. 이전에 왈개(曰介), 개부락(介夫落), 퍅개(愎介) 세 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청나라가 죄를 물으려 하니 세 나라가 ‘차한의 침략을 받아 난리를 구제하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청나라가 이에 해마다 군대를 내어 차한을 토벌하였으나 번번이 패하였다.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청나라가 우리나라에 군사를 요구하였다. 우리나라는 북우후 변급에게 총수(銃手) 100명과 기수(旗手)와 고수(鼓手) 48명을 거느리고 후통강에 나아가 싸우게 했는데, 적 중 많은 수가 총탄에 맞아 죽었으나 변급은 군대를 보전하여 돌아왔다. 효종 9년 무술년(1658)에 청이 또 군사를 요구하자, 신류가 혜산 첨사(惠山僉使)에서 북우후로 옮겨 임명되어 북쪽 변경의 총수 200명과 표하(標下), 기수(旗手), 고수(鼓手), 화정(火丁) 60명을 뽑아 3개월의 군량을 가지고 갔다. 이해 3월 1일에 두만강을 건너 19일에 영고탑에 도달하고 6월 10일에 흑룡강에 이르렀다. 강은 너비가 20여 리나 되는 데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강물 색깔이 칠흑 같았는데, 물고기와 강가의 짐승들도 모두 검은색이었다. 적은 흑룡강 하류에서 왔는데 그들의 배는 모두 자작나무 껍질을 겹씌운 것이었다. 우리나라 부장(部將) 배시황(裵是鎤)과 유응천(劉應天) 등이 적선에 불화살을 쏘아 붙이자 일시에 불이 번져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적은 키가 10척이나 되고 깊숙한 눈에 머리카락이 붉었으며 드리운 수염이 어깨를 덮었다. 그들의 화포는 도화선을 쓰지 않고 산호석(珊瑚石)을 화문(火門)에 붙여 놓고, 또 용두(龍頭)의 위에 금수를 달아 놓아서 용두를 떨구면 불이 일어나 탄환이 발사되었다. 그 배의 쇠닻은 열 명이서도 들어 올릴 수 없었는데, 포로로 잡은 적은 마치 지푸라기를 집듯 한 번에 들어 올렸다. 우리 군대는 전사자가 8명이고 부상자도 몇 명 있었다.
7월 10일에 승전보를 올리고 회군하여 9월 27일에 영고탑에 이르렀다. 청나라 장수가 배시황을 초청해 자기 집으로 가서 세 아내를 보였는데, 세 아내는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을 내려 예를 하고서 나아와 얼굴을 마주하고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 11월 18일에 영고탑을 떠나 12월 15일에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다음 해 청나라는 전사자의 집에는 은 30냥씩, 부상자 25인에게는 은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조선으로 돌아오는 사신 편에 부쳐 보냈다.”
《청일통지》에 말하였다.
“흑룡강에는 국초에 색륜과 타호이(打虎爾) 두 부족이 있었는데 결국 태종 문황제에게 복속했다. 악라사(鄂羅斯 러시아) 사람 나찰(羅刹)이 아극살 지역에 성을 쌓고 색륜과 타호이를 침략하였으므로, 강희 22년(1683)에 장군과 부도통(副都統)을 두어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 25년에 나찰을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고, 28년에 격이필제하에 대신을 보내 강가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신류가 기록한 “차한은 나선이다.”라고 한 것은 나찰을 가리킨 듯하고, 왈개, 개부락, 퍅개 부류는 색륜과 타호이인 듯하다. 우리 효종 9년(1658)은 청나라 순치 15년이다. 생각건대 그 당시 나찰이 흑룡강 지역을 침범하여 괴롭히자 청의 요청으로 군대를 징발하여 토벌한 사건이 있었고, 강희 연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평정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흑룡강까지 가서 악라사와 싸운 것 또한 초유의 일이었다.
서북 지방의 목재〔西北之材〕[DCI]ITKC_BT_1550A_0040_000_0080_2021_001_XML DCI복사
어떤 객이 장진부에서 돌아온 뒤에 말하였다.
“장진부에서 새로 짓는 고을 청사가 매우 웅장하여 여러 도의 선화당(宣化堂)이 미칠 바가 아니니, 큰 재목이 많기 때문입니다. 온 산에 몇 아름이나 되는 소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한데 수백 년 동안 도끼질을 당하지 않아 선 채로 저절로 마르기도 하고 땅에 쓰러져 썩기도 합니다. 만일 장진강에서 재목을 띄워 압록강으로 나와서 뗏목으로 엮은 다음 물길 따라 바다를 내려오면 얼마 안 되어 강화도 입구에 도착할 것이고, 경강으로 끌어온다면 재목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였다.
“단지 장진강뿐만이 아닙니다. 갑산의 허천강, 강계의 독로강도 모두 압록강으로 흘러드니 이러한 수로가 있을 텐데 서북 지방의 재목이 다 썩은 채로 내버려지니 매우 탄식할 만합니다. 또 듣기로 창성(昌城)과 삭주(朔州) 지방 사람들이 ‘만주인들이 압록강 상류에서 벌목해서 밤낮으로 뗏목을 타고 물길 따라 내려간다.’라고 한답니다. 압록강 일대는 저들과 우리가 함께 쓰는 지역으로 저들은 압록강을 이용해서 재목을 운송하는데 우리는 하지 못하니 이런 일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북어〔北魚〕[DCI]ITKC_BT_1550A_0040_000_0110_2021_001_XML DCI복사
한 곳에서 생산된 뒤에 팔도로 두루 퍼지는 것은 바로 북해(北海)의 명태(明太)이다. 이 물고기는 수가 매우 많은데 북어(北魚)라 불린다. 몸은 길고 비늘은 가늘며 색은 조금 검다. 얼린 것이 맛이 좋고 반(半)건조된 것도 좋은데 오래 건조된 것은 맛이 점점 싱거워진다. 알은 젓갈을 담글 수 있는데 명란(明卵)이라고 한다. 생선 장수들이 덕원(德源)의 원산에 모여들었다가 짐바리를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데, 철령 이남 산골짝 안에 재갈들이 나란하고 방울이 울리며 끊임없이 죽 이어지니 모두 이 물고기다. 팔도 점방의 반찬과 술안주로나 황량한 마을에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푸닥거리할 때 이 물고기를 쓰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그 쓰임새가 넓다. 이 물고기는 함흥 이북에서 나니 고려인들은 그 맛을 보지 못한 듯한데 여진이 독점한 탓이다. 성조(聖朝 태조)에 이르러 함경도를 개척하면서부터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살펴보건대 《설문해자》에 “사(魦), 노(䲐), 패(䰽), 역(鱳), 국(䱡), 첩(鯜) 등은 낙랑(樂浪)에서 나오고, 우어(鰅魚)는 낙랑의 동이(東暆)에서 나오고, 분(魵), 면(鮸)은 예(薉)의 야두국(邪頭國)에서 나온다.” 하였다. 예(薉)는 예(濊)이고, 야두국은 낙랑의 속현인 야두매(邪頭昧)인 듯하다. 아홉 가지 물고기가 모두 우리나라의 물고기이지만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민어(民魚)가 면(鮸)이라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알 수 없다. 북어는 어떤 물고기인지 모르겠다. 《이아(爾雅)》에 조예가 깊은 자를 기다려 볼 뿐이다.
내가 포천을 다스릴 때 내각 동료에게 부친 시에 “담뱃갑에 서초 없어 부끄럽지만, 밥상에 북어 올라 기쁘네.[縱羞盒裏無西草 且喜盤中有北魚]”라고 하였다. 포천은 북로(北路 함경도)의 첫 역참이기 때문에 이 물고기를 많이 매매한다. 담배는 바로 관서의 금사연(金絲煙)인데, 현달한 관리가 아니면 계속 피울 수 없다. - 뒤에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살펴보니 북어는 처음에 조(鮡)라는 글자로 되어 있었다. 또 들으니 북쪽 지방 사람들이 명태라고 하는 것은 여진 말이라고 한다. -
여덟 종류의 비둘기〔鵓鴿八目〕[DCI]ITKC_BT_1550A_0040_000_0160_2021_001_XML DCI복사
서울에는 비둘기를 기르는 풍속이 있는데, 여덟 종을 귀하게 친다. 첫째는 온몸이 다 흰 것인데 전백(全白)이라고 한다. 둘째는 몸은 희고 꼬리는 검으며 머리 위에 검은 점을 띠고 있는 것인데 점오(點烏)라고 한다. 셋째는 몸은 붉고 꼬리는 흰 것인데 자단(紫丹)이라고 한다. 넷째는 몸은 희고 머리와 목은 검은 것인데 흑허두(黑虛頭)라고 한다. 다섯째는 몸은 희고 머리와 목은 자줏빛 나는 것인데 자허두(紫虛頭)라고 한다. 여섯째는 몸은 희고 목은 붉으면서 깃 끝에 두 층으로 붉은 점이 있는 것인데 천앙백(天仰白)이라고 한다. 일곱째는 몸은 검고 꼬리는 흰 것인데 흑층(黑層)이라고 한다. 여덟째는 털의 색깔은 발구(鵓鳩) 같으면서 깃 끝에 두 층으로 금빛 점이 있는 것인데 승(僧)이라고 한다.
검은 국화〔黑菊〕[DCI]ITKC_BT_1550A_0040_000_0170_2021_001_XML DCI복사
서울에서 이름난 국화의 종류로는 황학령(黃鶴翎), 백학령(白鶴翎), 홍학령(紅鶴翎) 그리고 금원황(禁苑黃), 취양비(醉楊妃)가 있는데 이를 ‘삼학 금취(三鶴禁醉)’라 한다. 이 밖에 또 오홍(烏紅), 대설백(大雪白), 소설백(小雪白), 통주홍(通州紅) 등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
황해도 사람이 이르기를 “장연(長淵)의 대청도(大靑島)에 검은 국화가 있는데 원나라 태자 타환첩목이가 귀양살이할 때 남긴 종류라고 한다.” 하였다.
세 가지 해초〔三種海草〕[DCI]ITKC_BT_1550A_0040_000_0190_2021_001_XML DCI복사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세 가지 해초가 실려 있다. 첫째는 곤포(昆布)이다. 도홍경(陶弘景)은 “고려에서 난다.” 하였고, 《당서》 〈발해열전〉에 “남해의 곤포”라고 하였는데, 지금 함경도 바다에서 난다. 둘째는 해대(海帶)이다. 장우석이 “동해 수중의 돌에서 난다.” 하였는데, 지금 다시마[多士麻]라고 부른다. 셋째는 해조(海藻)이다. 진장기는 “신라에서는 바닷가 어민들이 허리에 줄을 매고 잠수하여 채취한다. 5월 이후로는 사람을 해치는 거대한 물고기가 다녀서 채취할 수 없다.” 하였는데, 지금 미역[藿]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아》에서 “곤(綸)은 허리띠[綸] 같고 조(組)는 끈목[組] 같은데 동해에서 난다.”라고 했으니, 아마도 이를 가리킨 듯하다.
세 가지 해초는 모두 반찬거리로 쓸 수 있고, 그중에서도 해조국(미역국)은 산후에 반드시 처방으로 써야 한다. 부인이 해산할 달이 되면 우선 이것부터 마련해 두었다가 해산을 하고 나서 국을 끓여 쌀밥을 말아 계속 이어서 먹는데 청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곤포(昆布)는 곤포(綸布)라고도 하고, 해조는 해라(海蘿)라고도 하고 심( )이라고도 한다.
또 한 가지 바다에서 나는 이끼가 있는데, 시속에서 해의(海衣 김)라고 부른다. 바다에서 건져 볕에 말려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서 불에 구워 먹는데 맛이 매우 좋다. 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나며 풀 종류지만 물고기나 소금에 견줄 만한 것이다. 또 하나 바다에서 나는 이끼가 있어 녹색이 되면 측리지를 만들며 말려서 먹을 수도 있으니, 구종석이 말한 태포(苔脯)이다. 지금 세속에서 파래[叵羅]라고 하는데 파래는 우리말로 푸르다는 말이다.
홍기포 정탐〔紅旗浦偵探〕[DCI]ITKC_BT_1550A_0040_000_0280_2021_001_XML DCI복사
일찍이 내각의 서고(西庫)에서 책을 열람했는데 《정탐일기(偵探日記)》 한 권이 있었다. 관북의 장교(將校)가 - 그의 이름은 잊었다. - 두만강을 몰래 건너 등등기(登登磯)의 사정을 정탐한 것인데 책이 너덜너덜해서 읽을 수 없었다. 근래 서 직각(서영보)의 서재에서 《홍기포 정탐기(紅旗浦偵探記)》 한 권을 보았는데 이는 경흥부(慶興府)의 장교 김만빈(金萬彬)이 지은 것이었다. 후춘(後春)의 동북쪽 바다 가운데 홍기포(紅旗浦)가 있고 이를 홍도(紅島)라고도 한다. 홍기포 북쪽에 또 등등기가 있으며 역시 섬이다. 영고탑(寧古塔) 등지의 군민과 객지에서 떠도는 한인(漢人)들이 섬 안에 숨어 살며 삼을 캐고 담비를 잡았다. 우리 북방의 백성 중에도 숨어든 자가 있었다. 마침내 세력이 점점 불어나 험한 지형을 믿고 부과한 세금을 보내지 않자 청나라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서 수색하여 토벌하였다. 우리나라도 첩자를 보내어 국경의 정세와 관련된 것을 정탐하게 하였다.
김만빈은 무사라서 글이 엉성함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중국말을 몰라서 장군을 ‘장준(將俊)’이라 하고, 우록장경을 ‘유루장계(劉累將季)’라고 하며, 발십고를 ‘보질이(甫叱耳)’라고 하였다. 산 이름과 물 이름은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다. 그 대략을 베껴 둔다.
“건륭 11년(1746, 영조22) 병인 6월 11일, 어사 군관(御史軍官), 병영 비장, 경흥 부사(慶興府使)가 서수라(西水羅)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배 두 척을 마련해 양식을 싣고 장교 김만빈ㆍ박형만(朴亨萬)ㆍ남제극(南濟極)ㆍ한시휘(韓始輝)ㆍ김명중(金鳴重), 역관 김세강(金世江)ㆍ이제익(李齊益), 뱃사공 사노(私奴) 우란(牛蘭)과 내노(內奴) 김파 - 중국 음이다. - 회(金巴回) 등이 어둠을 틈타 배를 띄워 오갈암(烏喝巖)에 정박하였다.
12일, 두만강 어귀를 지나면서 밥을 지어 신에게 기도하였고 장자도(醬子島)에 정박하였다.
13일, 호라산(胡羅山)을 지나 슬항도(瑟項島)에 정박하였다.
14일 이후의 일이다. 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기도 하였고, 상륙해서 정탐하다가 후춘 지방의 장경(章京) - 이름은 덕을세(德乙世)이다. - 과 발십고, - 이름은 족간리(足干里), 또 아이리(阿伊利)라고도 한다. - 영고탑의 우록장경 등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병사를 거느리고 양식을 운반하여 홍기포로 가는 자들이었다. 자주 힐문을 당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나라 백성 30여 명이 달아나 홍기포로 들어갔기 때문에 관령을 받들어 정탐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저들은 그다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종이, 붓, 먹, 부채, 벼룻집, 놋숟가락, 백미(白米), 염장(鹽漿) 등의 물건을 저들에게 나누어 주자 저들 또한 사슴 가죽과 포막(布幕 베로 만든 장막)을 답례품으로 주었다.
또 그들은 자피선(者皮船) - 나무속을 파내어 만든 작은 배다. - 으로 양식을 운반하는데 배의 속도가 너무 느렸다. 우리가 섬 안의 사정을 살피고자 우리 큰 배에 나누어 타자고 청하니 저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마침내 장경 1인, 발십고 3인과 함께 우리 배를 타고 홍기포에 이르러 배를 댄 후 양식 부대를 풀어서 내렸다.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산들이 첩첩이었고, 섬의 한쪽 자락은 동북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바닷속으로 들어가 마치 학의 날개와 같았다. 도망친 백성의 촌락이 있던 곳을 불태워 없앴는데, 도망친 백성이 처음에는 1만여 명이었고 지금은 자수한 사람이 반을 넘으며 붙잡힌 사람은 4백여 명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깊은 산으로 달아나 숨었기에 머물러 방비하며 수색해 잡는다고 하였다. 홍기포 밖에 또 4개의 섬이 있는데, 자당이(者唐伊), 강거우자(江居于子), 야라(野羅), 수저(愁齟) 등이 모두 도망친 백성들의 소굴이다. 홍기포 뒤쪽 봉우리는 고고등자(高高登子)이고, 홍기포 남쪽에는 또 청도(靑島)가 있으며, 홍기포 동쪽에 목사도(木蛇島)가 있다. 영고탑에서 홍기포까지는 20일 거리라고 한다.
7월 8일, 저들과 서로 이별하며 뒷날 우리나라에서 도망친 백성을 사로잡으면 후춘으로 포박하여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국경에서 서로 헤어지고 드디어 배를 출발시켰다.
13일, 두만강 입구로 돌아왔다. 횃불을 들고 포를 쏘자 서수라 진장이 횃불을 들고 응사하였다.”
화호유창〔花戶油窓〕[DCI]ITKC_BT_1550A_0040_000_0320_2021_001_XML DCI복사
전방표의 《순어사화》에 말하였다.
“북경에서는 겨울이면 창호지를 창살에 붙이는데 그 사이에 화초와 인물을 그린 유리 조각을 끼운다. 방 안에서 밖을 보면 환하게 다 보이지만 밖에서 방 안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구양 초공의 《십이월어가오사(十二月漁家傲詞)》에 나오는 ‘화호유창’이다. 대개 원나라 습속이 이미 그러했던 것이다.”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종이는 희고 깨끗하고 질겨서 창을 바르기에 알맞다. 기름과 밀랍을 먹이면 그 빛이 흡사 이은의 색을 띠는데 원나라 때도 아마 이 방법을 쓴 듯하다. 지금 우리 풍속은 방문 안쪽에 반드시 만(卍) 자 모양의 겹창을 두어서 마음대로 움직여 열고 닫으며 거기에 유리를 끼워서 밖을 내다보니, 풍속이 서로 전해져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이와 같다.
결〔結〕[DCI]ITKC_BT_1550A_0040_000_0360_2021_001_XML DCI복사
《대전통편》 〈호전〉에 “전지(田地)를 측량하는 자의 길이는 주척(周尺)의 4자 7치 7푼 5리에 준하니, 실제 면적은 1척이 1파(把), 10파가 1속(束), 10속이 1부(負), 100부가 1결(結)이고 14부가 중국의 전(田) 1묘(畝)에 준한다.” 하였다.
이는 대개 세금 징수 제도를 말한 것이다. ‘파’란 곡식 줄기가 한 손에 차는 것이고, ‘속’이란 묶는 것이고, ‘부’란 짊어지는 것이다. 다만 ‘결’ 자의 의미는 알 수 없다. 신라 희양산(曦陽山)의 〈봉암사 지증대사 탑명(鳳巖寺智證大師塔銘)〉은 최고운(崔孤雲)이 지었는데, 거기에 “전 500결을 희사하다.”라는 말이 있으니 결이란 신라 방언이다. 지금 아전들은 묵(墨) 자처럼 발음한다.
맹금의 이름〔鷙鳥名〕[DCI]ITKC_BT_1550A_0040_000_0340_2021_001_XML DCI복사
“맹금의 종류는 매우 많다. 매 중에 그해에 태어나 길들여진 것을 ‘보라매[甫羅鷹]’라고 하는데, 보라는 담홍색(淡紅色)의 우리말인즉 보라매의 깃털 색이 옅기 때문이다. 산에서 여러 해를 산 것을 ‘산지니[山陳]’라고 하고, 집에서 여러 해 기른 것을 ‘수지니[手陳]’라고 한다. 매 중에 가장 뛰어나고 털이 흰 것을 ‘송골(松鶻)’이라고 하고, 푸른 것을 ‘해동청(海東靑)’이라고 한다. 수리 중에 몸집이 작으면서 매와 흡사한 것을 ‘독수리[獨戍伊]’라고 하고, 수리 중에 몸집이 크면서 노루와 사슴을 잡을 수 있는 것을 ‘가막수리[伽漠戍伊]’라고 하는데 가막은 우리말로 검다는 뜻이다. 수리와 비슷하면서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것을 ‘육덕위(肉德威)’라고 하며 모습이 웅대해서 사람을 태우고 날아간다. 호랑이를 보면 날아서 그 머리에 앉아 눈을 쪼아 댄다.
매와 흡사하지만 두 날개가 길고 날카로운 것을 ‘난춘(蘭春)’이라고 하는데, 날개로 쳐서 거위와 기러기를 베고 또 매도 죽인다. 매와 흡사하면서 눈동자가 검은 것을 ‘조골(鵰鶻)’이라고 하며, 매를 잡을 수 있다. 매와 흡사하면서 붉은 가슴과 흰 등에 눈동자가 검은 것은 ‘방달이(方達伊)’라고 하고, 매를 죽일 수 있다. 매와 흡사하면서 몸집이 작은데 날개가 날카롭고 다리가 긴 것은 ‘결의(決義)’라고 한다. 메추라기를 잡을 수 있으니, 바로 이른바 ‘새매’다. 결의와 흡사하면서도 비둘기와 비슷하고 눈동자가 검은 것을 ‘도령태(盜鈴馱)’라고 하고, 메추라기를 잡을 수 있다. 도령태와 흡사하면서 참새를 잡을 수 있는 것은 ‘구진의(句陳義)’라고 하고 ‘발남갑(孛南甲)’이라고도 하는데, 바람이 불려고 하면 곧장 공중으로 날아올라 유유자적하며 내려오지 않는다. 발남은 우리말로 바람이니, 곧 이른바 ‘신풍(晨風 쏙독새)’이다. 결의와 흡사하면서 부리 옆이 칼로 새긴 듯 쪼개진 것은 ‘작응(雀鷹)’이라고 하고, 참새를 잡을 수 있다. 매와 흡사하면서 꼬리 끝에 흰 깃털이 있는 것은 ‘마분략(馬糞掠)’이라고 하는데, 참새를 잡을 수 있다.”
이상은 작고한 벗 이무관(李懋官 이덕무(李德懋))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 실려 있다. 《한청문감》을 살펴보면 보라매를 ‘추황(秋黃)’이라고 하고, 수지니를 ‘농응(籠鷹)’이라고 하고, 산지니를 ‘산롱(山籠)’이라고 하였다.
산호와 수정〔珊瑚水晶〕[DCI]ITKC_BT_1550A_0040_000_0380_2021_001_XML DCI복사
《고려사》 현종 18년(1027)에 “영광군에서 산호수(珊瑚樹)를 바쳤는데 높이가 8자, 가지는 81개였다.”라고 하고, 현종 20년에 “문희현(聞喜縣)에서 수정 원석 4만여 매가 나왔다.”라고 하였다. 문희는 바로 문경(聞慶)의 옛 이름이다. 지금 두 곳에 산호와 수정이 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다만 경주에서 검은색, 흰색, 자색의 세 가지 수정이 생산되는데, 이것으로 우립(羽笠)의 갓끈과 도장, 안경을 만든다.
심양일기〔瀋陽日記〕[DCI]ITKC_BT_1550A_0030_000_0120_2021_001_XML DCI복사
임자년(1792, 정조16) 봄, 내각의 서고(西庫)에 있던 서적을 분류하여 서가에 꽂았다. 내가 그 일을 감독했는데, 《초본 심양일기(抄本瀋陽日記)》 아홉 권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심양관에 있을 때 궁관이 기록한 것이다. 이역의 외로운 심양관에서의 일이 승후와 진강(進講)을 제외하면 대부분 참혹하였지만 이는 또한 명ㆍ청 사이의 사료이기도 하다. 이미 비본(秘本)이 되었으므로 본 사람이 세상에 드물 터이기에 열람하는 대로 베껴서 57조목을 얻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 30일
왕세자가 대가(大駕)를 따라서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망원정(望遠亭)의 청나라 구왕 군영에 머물렀다.
2월 8일
서울을 떠나 심양으로 향하였다.
무인년(1638) 1월 1일
청나라 여러 왕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위해 별관에서 잔치를 열고 백희(百戲)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잡혀온 기녀와 광대 들이 앞에서 연기하였는데, 눈길 닿는 대로 마음이 아팠다. 기녀 무리 중에도 눈물을 훔치며 노래하는 자가 있었다.
5월 26일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수가 서관에 들어와서 우리 일행이 지니고 있던 남초(南草 담배)를 찾아내 뜰에서 모두 불태웠다. 청나라는 남초를 금지하는 것이 극히 엄하여 남초 반입 금지령을 어겼다가 참수당한 자가 있기까지 하다.
6월 30일
청나라 황제가 세자와 대군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잠시 뒤에 한 부인이 여인들의 옹위를 받으며 곧장 황제의 자리로 올라가 포옹의 예를 행하고, 내려와 여러 왕과 차례로 서로 포옹하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이 여인은 청나라 황제의 딸로 차흘라(遮迄羅) 왕자의 처인데, 이날 남편과 함께 귀녕(歸寧) 온 것이라고 한다.
8월 21일
우리나라의 내관 백대규(白大圭)가 시녀 10명을 데리고 와서 청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평양의 장옥(張玉), 용강의 영이(英伊), 삼화의 업생(業生), 청주의 막춘(莫春) 네 사람은 황제의 궁궐에 남겼다. 문천의 문옥(文玉)은 대왕(大王)의 집으로 보냈다. 북청의 향일(香一)은 질가왕의 집에 보냈다. 안악의 생이(生伊)는 구왕의 집에 보냈다. 당진의 모란(牧丹), 양양의 영개(英介), 창원의 귀절(歸節)은 다른 곳에 두었다.
기묘년(1639) 1월 4일
소현세자의 탄신일이다. 회은군의 딸이 와서 세자를 배알하였다. 이보다 앞서 회은군의 딸이 청나라 황제의 후궁에 들어갔는데, 1년 남짓 만에 피파박씨(皮破博氏)에게 하가되었다.
3월 17일
팔문에서 북을 쳤다. 청나라 병사들이 서쪽 명나라를 침범하여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4월 14일
청나라 황제가 회군하였다. 세자가 가서 만났는데 청나라 황제는 참담해하며 즐거워하지 않고 마루에 누워 있었다. 요토와 마저가 서쪽 출정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요토와 마저는 귀영개의 아들이다.
7월 4일
호구왕이 청나라 임금에게 술을 바쳤는데, 첨과연(甜瓜宴)이라고 한다. 세자와 대군이 모임에 갔다.
경진년(1640) 3월 8일
세자가 자신을 호위하는 청나라 장수 오목도(烏木都)를 위해 모화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오목도가 말하였다.
“저는 젓가락질이 서툴러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으니 행여나 비웃지 마십시오.”
그러자 세자가 말하였다.
“무슨 문제가 있겠소.”
신사년(1641) 1월 8일
청나라 황제가 박씨(博氏)를 시켜 세자를 형부(刑部)로 불렀다. 재신(宰臣)과 강관(講官)이 모시고 가니, 용골대, 비파(比巴), 가린, 범문정 등이 일제히 모여 있었다. 김상헌(金尙憲), 신득연(申得淵), 조한영(曺漢英), 채이항(蔡以恒) 등 네 사람이 북관(北館)에서 압송되어 왔다. 잠시 뒤에 질가왕이 아문(衙門)에 앉아 김상헌에게 남한산성이 함락된 뒤 영남으로 내려간 일, 관교(官敎)를 받지 않은 일 등 대여섯 가지에 대해서 힐문했다. 김상헌은 말투가 늠름하여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질가왕이 여러 사람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김상헌은 과연 망가(望哥)에 망가로다.”라고 하였다. 청나라 말로 망가는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2월 29일
청나라 아문에서 아리강(阿里江) 가에 있는 한 달 갈이[一月耕] 정도의 채소밭을 주고서 우리에게 채소를 기르고 과일나무를 심고 정자를 짓게 하였다. 또 가축을 기르는 곳을 만들도록 했는데, ‘야판(野坂)’이라고 하였다.
3월 23일
용골대와 정명수가 요동으로 가서 우리나라 장군 유림의 군대를 음식과 상금으로 위로한 뒤에 의주로 보냈다.
8월 14일
청나라 황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금주로 나아갔다. 작년부터 청나라 사람들이 이미 금주를 포위하였다. 금주와 송산의 사이에 산이 있고 산 위에 성이 있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차지하고서 송산과 금주를 내려다보았다. 명나라의 군문(軍門) 홍승주가 보병과 기병 10여만 명과 참장(參將)과 유격(遊擊) 이하 200여 명을 거느리고 송산에 이르러서 군사를 나누어 산을 올라 산성을 다투며 금주의 포위를 풀려고 하였다. 청나라 병사가 여러 번 패하였기에 청나라 황제가 청나라 병사와 몽고 병사를 모두 일으켜 구원하러 갔다.
8월 15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원역(員役) 111명과 말 88필, 낙타 11마리를 이끌고 심양 북문을 나가서 뒤늦게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 나아갔다.
8월 19일
의주성(義州城) 북문으로 들어가서 남문으로 나왔다.
8월 20일
가로로 뻗은 한 언덕을 올라가서 멀리 금주성(錦州城)을 바라보았다. 세자를 호위하던 청나라 사람이 말하였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성을 견고하게 지키고, 자성 밖에 화포를 많이 묻어 두어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청나라 병사들은 성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협성을 쌓아 포위하고 있고, 유림의 군대는 그 동쪽 모퉁이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협성 서남쪽을 지나서 두 개의 내를 건너자 청나라 사람과 몽고 병사들이 산 위에 줄지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10여 리나 뻗어 있었다. 세자를 호위하던 박씨가 청나라 황제에게 들어가서 말하자, 청나라 황제가 세자 일행에게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뒤편 언덕에서 대기하라고 하였다.
8월 21일
명나라 군사가 송산에서 청나라 진지로 진격하여 교전을 하다가 곧장 달아났다. 청나라 기병이 이들을 추격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가다가 복병을 만나 물러났다. 갑자기 명나라 기병 수천이 산 뒤편에서 행산으로 치달렸다. 청나라 병사들이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8월 22일
청나라 황제가 진지를 옮겨 송산으로 접근하자, 세자 역시 송산 서남쪽 5리 지점으로 막사를 옮겼다. 초경(初更)에 명나라 군사가 청나라 진지를 습격하고는 행산으로 달아났다. 청나라 사람들이 추격하여 서로 살상이 있었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막사 밖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 새벽까지 소란스러웠다.
8월 25일
명나라 군사들이 밤마다 나와서 행산과 탑산(塔山)으로 가려고 하였다. 청나라 병사들이 이들을 기다렸다가 공격하여 보병과 기병 수만을 해구(海口)로 몰아넣었다. 밀물이 들어 수위가 높아지자 명나라 군사들이 그들의 장수를 옹위한 채 물속에 서서 팔을 뻗어 화살을 막았는데,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명나라 군사 중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 자들은 청나라 사람들이 사흘 내내 찾아내 죽였다. 마침내 청군이 송산을 포위하고 구덩이를 파서 지켰다. 밖으로 나간 병사들이 영원에 이르러 나무꾼과 양치기를 사로잡고 말과 가축을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청군이 간혹 송산, 행산, 탑산 등의 여러 성을 향해 대포를 쏘아 댔고, 성 안에서도 응수하여 대포를 쏘아 대니 소리가 우레와 벼락 같았다. 송산에서 쏜 포탄은 거위 알보다 컸는데 자주 막사 밖에 떨어져, 두께 한 길에 높이 두 길인 흙 담장을 쌓아서 막았다. 여러 주둔지에서 낙타와 말을 무리 지어 방목했는데, 며칠 안 되어서 반나절 거리의 땅이 모두 벌거숭이가 되었다. 몽고인들이 간혹 먼 지역에서 풀을 베어 낙타로 실어 와서 팔았는데, 풀잎 하나가 금싸라기였다.
9월 13일
청나라 황제가 돌연 심양으로 돌아갔다. 둘째 부지(夫支) - 부지는 황후이다. - 의 병환이 위중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자 역시 심양관으로 돌아갔다.
9월 18일
부지가 죽어서 상화지(霜華紙) 100권, 백면지(白綿紙) 1000권, 백지(白紙) 2000권, 단목(丹木) 200근을 부의하였다.
9월 29일
청나라 황제가 북문 밖 부지의 빈소에 갔는데, 세자와 대군도 함께 갔다. 들판 가운데 장막을 설치하고, 대자리를 둘러쳐 담을 만들었으며 종이 집과 종이 탑을 만들었다. 또 오색지(五色紙)로 깃발, 술통, 돈, 꽃을 만들었는데, 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승려와 무당이 시끌벅적하게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청나라 황제가 비통해하여 돌아오는 길에 끊임없이 소리 내어 슬피 울었다.
10월 13일
청나라 황제가 300여 기(騎)와 매사냥하는 군사 10여 기를 거느리고 심양성 북문 밖으로 나가서 이로(伊魯)의 땅에서 사냥을 하였다. 세자와 대군도 따라갔다. 부지 두 사람이 누런 장막을 두른 수레를 한 필의 말에 채워 타고 청나라 황제 뒤에 있는 것이 보였다. 또 두 명의 젊은 여인이 말을 타고 이들을 따르고 있었다. 부지는 간혹 수레를 두고 말을 타기도 하였다. 또 겨우 10여 세가량의 어린 여자아이 둘이 담비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었는데, 청나라 황제의 딸이라고 하였다. 5일 만에 돌아왔다.
12월 2일
청나라 황제가 아진어(阿眞魚) 두 마리와 아랑주(阿郞酒) 두 병을 우리나라에 보냈다. - 아진어는 큰 물고기이고, 아랑주는 낙소주이다. -
12월 12일
아문에서 정명수를 보내 청나라 황제의 뜻을 심양관에 이렇게 전하였다.
“내년 봄부터 팔고산의 농토 1000일 갈이[日耕]를 줄 것이오. 여러 신하와 질자(質子 볼모) 이하는 사람 수를 헤아려 농사를 짓되 농부는 본국에서 징발해서 데려오시오. 가을 추수부터는 심양관에 급료 지급을 중지할 것이오.”
뒤에 심양 동남쪽 교외의 땅, 이름하여 노가새(老家塞)와 철령위 등지에서 농토를 받았다.
임오년(1642) 2월 3일
청나라 황제가 사냥을 나갔다. 세자와 대군이 따라갔다.
2월 5일
의로성에 도착하였다. 성 북쪽에 대명(大明) 태조의 칙명으로 세운 태안신묘(泰安神廟)가 있었고, 또 범하성(汎河城)이라는 성도 있었다. 성 남쪽 물 건너에 성남보(城南堡)라는 성이 하나 더 있었다. 북쪽으로 30리를 가 철령위에 다다랐다. 동서 두 개의 성이 합해져 하나의 구역을 이루었다. 성 안에는 영원백 (이성량 철령위지휘첨사를세습 조선인이영의후손/이여송과이여백의아버지)집의 옛터가 있었고, 성 북쪽에는 신묘(神廟)가 있는데 신묘 아래에 이씨 집안 누대의 유허가 있었다.
2월 7일
북쪽으로 가자 장성(長城)이 있었다. 성 밖은 여허(汝許) 지방이다.
2월 8일
장성을 나가 북쪽으로 가자 들판에 동서의 성이 각각 있었다. 동쪽은 벽돌 성으로 김타실(金他實)이 예전에 살던 집이고, 서쪽은 나무 성으로 백양고가 예전에 살던 집이다. 지금은 무너져 사람이 없고, 성 밖엔 쑥대가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2월 13일
사냥하러 서남쪽 큰 들판을 향했다. 서북쪽은 끝없이 트였으니, 바로 대막(大漠)이다. 종일 세찬 바람이 불어 대고 모래가 날리며 돌이 나뒹굴었다.
2월 16일
동남쪽으로 가서 장성(長城)으로 들어갔다.
2월 17일
개원성 남문 밖에서 잤다. 성과 해자가 요양(遼陽)보다 장엄했지만, 무너진 성벽과 부서진 성가퀴는 사람을 참담하게 하였다. 백탑사와 현제묘(玄帝廟)가 있고, 거주하는 사람은 수십 호에 불과하였다.
2월 22일
심양관으로 돌아왔다. 청나라 황제가 여러 곳의 연대에서 천연두가 크게 번졌다는 말을 듣고 직로(直路)로 오지 않고 서남쪽으로 둘러서 돌아왔다.
4월 1일
범문정이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와서 왜국의 군신, 부자, 상하의 구분과 남녀의 의복, 음식, 토지, 생산물 등을 묻고 갔다.
10월 24일
청나라 황제의 궁궐에서 깃발을 펼쳐 두었다. 기마병 200여 명이 어떤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어떤 사람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서 몽고의 승려와 서로 뒤섞여 북을 두드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불경을 외우고 돌아다녔다. 안장을 얹은 청나라 황제의 말로 앞에서 그들을 인도했는데, 동문 밖에 이르러서야 파했다. 대개 청나라 황제를 위하여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계미년(1643) 8월 10일
밤에 청나라 황제(청태종 숭덕제)가 갑자기 죽었다.
8월 26일
새로운 황제(순치제)가 즉위하였다.
갑신년(1644) 4월 9일
구왕(九王 도르곤)이 대군을 이끌고 서쪽 명나라를 쳤는데, 세자도 따라 갔다. 강원(講院)과 약방(藥房)을 제외하고 배종(陪從)한 원역(員役)이 70인, 쇄마 구인(刷馬驅人)이 111명, 쇄마(刷馬)가 208필, 사마(私馬)가 22필이었다. 수레와 말이 죽 이어지고 바람과 모래가 자욱하였다. 철기병(鐵騎兵)이 넓은 들을 마음껏 내달리다가 꿩 한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보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니, 날고 뛰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4월 14일
책문을 나갔다.
4월 15일
구왕이 병력을 주둔한 채 나아가지 않았다. 명나라 사람을 사로잡았다는 말을 듣고 역관 서상현(徐尙賢)에게 탐문하도록 했더니, 범문정이 은밀히 이렇게 말하였다.
“산해관 총병(山海關摠兵) 오삼계가 유적에게 핍박을 받자, 총병 한 사람과 유격 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하면서 관문을 열어 청나라 군사를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구왕은 허실을 알 수 없어서 처남 배연(拜然)에게 명나라 장수 한 명과 함께 산해관으로 달려가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 장수 한 명은 군중에 남겨두었다고 한다. 저녁에 아역(衙譯 청나라 통역관)이 와서 구왕의 말을 전하였다.
“내일부터 하루에 이틀 길을 갈 테니, 세자 일행은 잘 달릴 수 있는 인마(人馬)를 선발해서 기다리도록 하라.”
4월 19일
금주성에 입성했다.
4월 20일
연산역에 도착했다. 오삼계가 또 장관(將官)을 파견해서 병사를 보내 줄 것을 독촉하였다. 구왕이 즉시 출발하였고, 세자는 날랜 기병만을 데리고 뒤따라갔다. 일행이 허겁지겁 달려가자 누런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밤에 영원성 아래를 지날 때 성가퀴가 구분되지 않았는데, 허공의 불빛을 보고서야 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4월 21일
산해관의 관문 밖 15리 지점에 이르러 병사를 주둔시켰다. 하루 밤낮으로 200리를 행군한 것이다. 청나라 병사들은 갑옷을 입고 엄중히 경계하다가 한밤중에 주둔지를 옮겼는데, 갑옷 입은 기병들끼리 부대끼는 쇳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산해관 문 위에서 대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4월 22일
청나라 병사들이 산해관 문밖 5리쯤 접근하자, 연기와 먼지 속에서 쏘아 대는 대포 소리가 크게 진동하였다. 잠시 뒤에 오삼계가 장수 십수 명과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구왕이 배례를 받고 병사를 이끌고 성 아래로 나아가 말에서 내려와 앉았다. 명나라 사람과 청나라 사람이 빈번히 왕래하였다. 좌익과 우익의 청나라 병사들이 한꺼번에 관문으로 달려 들어가서 성 위에 백기를 꽂자, 구왕이 이에 관문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이때 오삼계가 한창 유적(流賊이자성의난)과 교전을 벌이다가 성을 나온 듯하다. 청과 유적이 성안 몇 리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묘당 앞에서 성문으로 탄환을 어지럽게 쏘아 댔다. 세자는 성 밑에 있는 채소밭에서 담벼락에 의지한 채 앉아 있었는데, 구왕이 주둔한 곳과 서로 가까웠다. 구왕이 세자에게 함께 전장으로 가자고 청하는 바람에 세자가 갑옷을 입고 따라갔다. 청나라 병사들이 호각을 세 번 불고 고함을 세 번 내지르고서 일제히 적진으로 돌격하여 화살을 세 발 쏜 뒤에 칼날의 빛이 번쩍이고,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한바탕 누런 먼지가 가까웠다가 멀어지니 적이 패퇴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식경이 지나자 전장은 텅 비고 널브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 패주하는 적의 기병을 추격하여 성 동쪽 해구(海口)에 이르러 모조리 참살하였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부지기수였다. 초경(初更)에 구왕이 산해관의 문 안에서 환진(還陣)하였고, 세자도 뒤따라 진중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 포수 130명이 영원(寧遠)에서 왔는데,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쓰지 않았다.
4월 23일
구왕은 섭정왕(攝政王)이라 칭하고 명을 내려 군민(軍民)에게 유고(諭告)하였다. 오삼계 이하 여러 장수가 모두 청나라식으로 머리를 깎았다. 오삼계가 수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청나라 병사와 함께 적을 추격하였다. 세자는 구왕을 따라 행군하였다.
5월 2일
황성(皇城) 30리 지점에 도착하자 대포 소리가 원근에서 들려왔다. 대개 청나라 병사들이 이미 황성에 들어가서 성 위의 대포를 소리만 나도록 쏘는 것이었다. 도성의 백성들은 곳곳에 모여 있었는데, 어떤 이는 명첩을 들고 와서 바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대문 밖에 꽃병을 설치하고 향을 피워 맞이하기도 하였다. 구왕은 조양문(朝陽門)으로 들어가 연(輦)을 타고 무영전(武英殿) 어탑(御榻)에 가 앉아서 명나라 대소 신료들의 하례를 받았다. 세자는 태자궁 앞 성문(星門) 밖의 문연각 동쪽 관아에 거처하였다.
5월 11일
청나라 사람들이 세자의 숙소를 광인가(廣仁街) 서쪽 명나라 신종(神宗)의 부마 만위(萬煒)의 아들 집으로 옮겼다.
5월 13일
다시 세자의 숙소를 명나라 목종(穆宗)의 부마 후씨가(侯氏家) 사람의 집으로 옮겼는데, 역시 광인가 서쪽에 있었다.
5월 18일
세자를 모시고 호위한 포수 134명과 영장(領將)이 거느린 600명에게 구왕이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영장에게는 채단(綵緞) 100필, 편장(褊將)에게는 40필, 군병에게는 각각 20필이 주어졌고, 또 각각에게 돈 6꿰미가 주어졌다.
5월 24일
세자가 연경을 출발하였다.
5월 28일
준화현에 이르러 산둔영(山屯營)에서 잤으니, 바로 희봉구로 가는 빠른 길이다.
5월 29일
난하의 상류를 건넜다.
6월 1일
건창성을 지나 냉구를 나갔는데, 동쪽으로 산해관과의 거리가 180리라고 하였다. 큰 내가 있는데, 몽고 지방에서부터 남쪽으로 흐른다. 산의 모습은 가파르게 치솟다가 가운데가 갈라져 문과 같았다. 동쪽과 서쪽에는 연대(煙臺)와 포루(砲樓)가 있는데, 서쪽을 최승대(最勝臺)라고 한다.
6월 9일
대릉하 상류를 건넜다.
6월 14일
비로소 의주와 금주의 큰길로 나갔다.
6월 18일
심양관으로 돌아왔다.
8월 18일
세자가 여러 왕을 따라서 청나라의 이전 황제들의 무덤에 가서 절하고 돌아왔다. 이튿날 온 나라가 서쪽으로 떠나기 때문에 작별을 고한 것이라고 한다
.가삼〔家蔘〕[DCI]ITKC_BT_1550A_0030_000_0130_2021_001_XML DCI복사
근년 들어 약방에서 가삼(家蔘 인삼)을 많이 파는데, 영남 사람이 재배한 것이다. 산삼에 비해 효과가 조금 느리지만 값은 3분의 2나 싸서 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긴다. 충주의 심의(沈鐿)라는 노인이 와서 하는 말이 충주 사람들도 이를 배워서 재배한다고 한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곡우 무렵에 응달진 산골짝의 낙엽 썩은 검은 흙을 가져다가 체로 곱게 쳐서 분(盆) 속에 볼록하게 채우고 객수(客水)가 흘러들지 못하게 한다. 분의 크기에 따라 가삼 뿌리 서너 개를 심는데, 반드시 반은 눕히고 반은 세워야 싹이 잘 나온다. 분은 담 그늘이나 나무 밑 등 햇볕이 많이 들지 않는 곳에 두고, 흙에 반쯤 묻는다. 분의 옆구리에 구멍 두세 개를 뚫어 주면 더욱 좋은데, 흙 기운이 사방에서 모이기 때문이다.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것은 쥐가 삼을 알아채고 오는 일이다. 쥐는 삼을 극히 좋아해서 삼이 있는 곳을 알면 땅을 파고 와서 남김없이 먹어 치우므로 대와 나무를 엮어 촘촘하게 둘러쳐서 쥐를 막는다. 풍속에는 부녀자가 엿보는 것, 상가(喪家)에 다녀오는 것도 꺼리지만 이는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봄에 한 돈쭝짜리를 심으면 가을에 두세 돈쭝짜리를 얻는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면 그 씨를 받아 뿌려도 싹이 나는데, 한 해에 바늘만큼 자란다. 산삼에서 종자를 옮겨 온 것은 3년이 지난 뒤에야 자라는데, 이것도 ‘가삼’이라 부른다. 영남 사람들은 밭에다 씨를 뿌려 채소와 다름없이 키우니, 대개 토질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문이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다투어 따라 하기 마련이라 소 팔고 논밭 팔아 삼으로 바꾸어 재배하는데, 종종 부유해진 이도 있다. 이 풍조가 조령을 넘어 충주까지 이른 것이다.
삼은 외교에서 중요한 물품이어서, 강계(江界) 백성들은 삼을 캐어 바치느라 곤궁해져서 도망가 떠돌이가 되어 버린 자가 태반이다. 성상(정조)께서는 밤낮 관서 지방을 염려하여 누차 대신과 비국 당상에게 바로잡을 방책을 강구하라 분부하셨다. 그래서 세금을 감하고 삼의 가격을 올려 주니, 살뜰한 배려 덕분에 강계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대개 삼이 산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고 재배하여 얻을 수도 있으며 또 사람들이 즐겨 심는 것이니, 머지않아 전국에 퍼지지 않겠는가. 나라 안에 삼이 충분해지면 강계 백성들은 절로 곤란을 당하지 않을 터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그 재배법을 기록해 두니, 뜻이 있는 사람은 살펴보기 바란다.
길림 풍속〔吉林風俗〕[DCI]ITKC_BT_1550A_0030_000_0170_2021_001_XML DCI복사
《건륭어제시(乾隆御製詩)》 2집에 〈길림토풍잡영(吉林土風雜咏) 12수〉가 있다.
첫 수는 위호(威呼)를 읊은 것이다. 큰 통나무의 속을 파서 배를 만드는데, 큰 것은 5, 6명, 작은 것은 2, 3명이 탈 수 있다. 나무의 양쪽 끝을 깎아 상앗대를 만들어 한 사람이 잡고 좌우로 노를 젓는데 나는 듯이 빠르다. 와집 가운데에는 산과 계곡이 섞여 있으므로 산삼을 캐거나 담비를 잡는 자가 위호를 가지고 다니다 물을 만나면 타고 건넌다.
제2수는 호란(呼蘭)을 읊었다. 속이 빈 나무를 속을 깎아 곧게 통하게 한 다음 잘라서 외기둥 마냥 만들어 처마 바깥에 세워 구들의 연기를 빼내는데, 위에는 가시나무로 엮은 덮개를 덮는다.
제3수는 법라(法喇)를 읊었다. 수레 비슷하지만 바퀴가 없고, 의자 비슷하지만 다리가 없다. 자리를 덮어 감실처럼 해서 말 몰듯이 끈으로 잡아당기는데 얼음과 눈 위를 다니기 편리하다. 민간에서는 ‘배리(扒犁)’라 부른다.
제4수는 비란(斐蘭)을 읊었다. 아이들이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활을 비란이라 하고, 가시나무와 쑥대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 화살에 꿩이나 닭의 깃털을 잘라 깃을 붙인 것을 ‘유감(鈕勘)’이라 한다.
제5수는 새비(賽斐)를 읊었다. 나라의 풍속에 음식을 먹을 때 예전에는 나무 숟가락을 사용했는데, 길이가 4치가량으로 굽은 자루에 끝은 둥글넓적하고 크다.
제6수는 액림(額林)을 읊었다. 가로 판자를 문미와 마룻대 사이에 시렁처럼 얹고 경대, 병 등 여러 살림 도구를 얹어 둔다.
제7수는 시함(施函)을 읊었다. 나무를 깎아 통을 만들어서 물을 담거나 술을 빚는 데 두루 사용한다.
제8수는 납합(拉哈)을 읊었다. 흙벽이나 흙담을 쌓을 때 삼풀을 엮어 아래로 드리우고, 가장자리를 따라 흙손질을 한다.
제9수는 하붕(霞綳)을 읊었다. 쑥대와 가시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여기에 곡식의 겨를 찧어 기름과 반죽하여 붙여서 촛불을 대신하는데, 새파란 불빛이 형형하고 연기가 구름처럼 맺힌다.
제10수는 활산(豁山)을 읊었다. 늦여름부터 초가을 무렵에 낡은 모시와 닥나무의 솜을 찧어 물에 담가 불려서 부드러운 섬유질을 만든 다음 갈대발로 걸러 고르게 펼치고 볕에 말려 종이를 만드는데, 굳세고 질기기가 꼭 가죽 같다.
제11수는 나단(羅丹)을 읊었으니 나단이란 사슴의 발과 다리뼈다. 손 가는 대로 던져서 놀이를 하는데, 엎어지는지 뒤집어지는지 혹은 가로인지 세로인지를 보아 승부를 결정한다. 작은 것은 노루 뼈로 만들고 큰 것은 사슴 뼈로 만들며 옥처럼 반질반질하다.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모여 앉아 그것을 던지며 논다. 대개 다리뼈 하나에 네 면이 각각 다른 색이니 네 개를 잡고 던져 모두 같은 색이 나오면 사색전(四色全)이 되는데, 대략 이렇게 해서 승부를 가른다. 얇고 둥근 돌로 치는 것은 ‘파격(帕格)’이라 한다.
제12수는 주비(周斐)를 읊었다. 자작나무의 용도는 껍질에 있으니, 두께가 한 치가 되면 벗겨다가 집을 짓는다. 위에 덮으면 기와가 되고 옆에 쓰면 벽이나 문이 된다. 몸체가 가볍고 다루기 쉬어 짐승을 좇아 자주 옮긴다.
살펴보건대 만주는 우리나라 서북쪽 변경과 땅이 닿아 있으므로 열두 가지 풍속 가운데 서로 같은 것이 여덟 내지 아홉이다. 위호(威呼)란 자피(者皮)이고 법라(法喇)란 발고(撥庫)이고 액림(額林)이란 현판(懸版)이다. 호란(呼蘭), 비란(斐蘭), 유감(鈕勘), 시함(施函), 하붕(霞綳) 따위도 역시 모두 있다. 또 서울의 어린이들이 소 다리뼈를 던지며 노는 것을 ‘거독(去毒)’이라 하는데, 이것도 나단(羅丹)과 같은 종류다.
왜를 예라 부르다〔呼倭爲濊〕[DCI]ITKC_BT_1550A_0030_000_0220_2021_001_XML DCI복사
예(濊)란 동이의 옛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었다.”라고 하고, 《삼국지》에는 “부여의 국왕 도장에 ‘예왕의 도장[濊王之印]’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줄여서 발음하면 예가 되고 늘여서 발음하면 부여가 되는 것일 터이니, 그 실상은 같다. 뒷날 무릇 포여로(蒲與路)니 복여위(福餘衛)니 하는 것도 모두 부여에서 발음이 바뀐 것이다.
예의 옛 도읍은 우리나라 강릉부에 있고, 부여의 옛 도읍은 지금 개원현(開原縣)에 있으며, 포여로는 길림 이북에 있고, 복여위는 심양 동쪽에 있으며, 백제의 옛 도읍인 부여는 우리나라 호서에 있으니, 이 모두 예(濊)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倭)를 예(濊)라 부르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지 알 수 없다. 왜 역시 동이이므로 뒤섞어서 부르는 것일까?
폐지된 네 개의 군〔廢四郡〕[DCI]ITKC_BT_1550A_0030_000_0330_2021_001_XML DCI복사
첫째, 여연부(閭延府)이다. 본래 함경도 갑산부의 여연촌이었다. 태종 16년(1416)에 소훈두(小薰豆) 서쪽 땅을 분할해서 군을 설치하여 평안도에 예속시켰다. 세종 17년(1435)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세조 원년(1455)에 폐하였다.
둘째, 무창군(茂昌郡)이다. 본래 여연부의 상무로보(上無路堡)였다. 세종 22년(1440)에 출합(出哈), 손량(孫梁), 후주(厚州), 보산(甫山) 등의 땅을 아울러 현을 두고, 24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세조 원년에 폐하였다.
셋째, 우예군(虞芮郡)이다. 본래 여연부의 우예보(虞芮堡)였는데 세종 25년(1443)에 유파(楡坡), 조명간(趙明干), 소우예(小虞芮) 및 자성군(慈城郡)의 태일(泰日) 등의 땅을 아울러 군을 설치하였다. 세조 원년에 폐하였다.
넷째, 자성군이다. 본래 여연부 시번강(時番江) 자작리(慈作里)였다. 세종 14년(1432) 파저강(婆猪江)의 야인들이 시번강과 장항책(獐項柵)을 침략했는데 여연과 강계(江界) 두 부(府)가 거리가 멀어서 미처 구할 수 없었다. 15년에 두 부의 중간인 자작리에 성을 쌓고 군을 설치하였다. 세조조에 폐하였다.
사군(四郡) 지방은 지리적으로 무창은 갑산 서쪽에 있고 북으로 압록강과 2리 거리며, 여연은 무창 서쪽에 있고 북으로 압록강과 4리 거리며, 우예는 여연 서쪽에 있고 서쪽으로 압록강과 1리 거리며, 자성은 우예 남쪽에 있고 서쪽으로 강계와 접하여 구불구불 연이어 자리를 잡아 압록강 상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은 한(漢)나라 때는 현도군(玄菟郡) 서쪽 개마현(蓋馬縣)에 속하고, 발해에서는 압록부 신주(神州)에 속했을 것이다.
옛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한나라는 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하였고, 위(魏)나라 현도 태수 왕기(王頎)가 고구려 국왕 궁(宮)을 쫓아 옥저 땅 천여 리를 지나 숙신씨(肅愼氏) 남쪽까지 이르렀으며, 원나라는 갈라전(曷懶甸)에 합란부(合蘭府)를 설치하였으니, 모두 개원(開原)과 건주(建州) 지방으로부터 비스듬히 압록강을 건너 강계, 폐사군(廢四郡), 갑산 등지를 거쳐 남관과 북관으로 들어와 경략한 것이다. 사군이 함경도의 요충지가 됨이 이와 같으니, 이야말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땅이다.
옛날 잡다한 종족들이 침략해 올 때 군자는 백성을 기르는 토지를 지키느라 백성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또한 세조 때 사군을 포기한 뜻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압록강 일대에 전쟁의 위험이 없으니 자기 영토 안에 군을 두고 현을 두는 일이 왜 안 될 일이겠는가. 사군을 회복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지만, 어렵다고 여기는 자들의 이유는 “삼(蔘)이 나는 지역이라 경작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 고작이다. 삼과 토지 중에 어느 쪽이 중하고 어느 것이 하찮은가. 한마디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계축년(1793, 정조17) 1월 3일 전임 강계 부사 권엄(權𧟓)이 입시하여 아뢰었다.
“만포진(滿浦鎭) 옥동(玉洞)과 상토진(上土鎭) 마전령(麻田嶺) 사이는 땅이 비옥하여 경작을 원하는 백성이 많습니다. 옛날에 나무나 돌로 만든 출입 금지 푯말을 설치했는데, 폐군(廢郡)의 경계를 정했던 것입니다. 변경 지역은 경계가 엄중하므로 감영이나 고을에서 함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만일 옥동 북쪽 수십 리와 마전령 남쪽 7리에다 자성 경계까지로 한정해서 푯말을 설치하여 경작을 허락한다면 삼을 캐는 데도 방해되지 않고 곡식 생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상이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에게 물으니 그 또한 경작을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상이 마침내 관서에 공문을 보내 알리라고 명을 내리시어 올해부터 개간하여 토지를 넓히고 백성을 모으는 효과가 있게 하되 연한을 두어 절대로 세금을 거두지 말도록 했다. 또 관찰사에게 금년 겨울에 백성을 모은 실제 숫자와 경작을 권한 현황을 보고하게 하였다. 《시경》에 “날로 백 리씩 나라 땅을 넓힌다.[日闢國百里]” 하였으니, 훌륭하다! 《시경》에서 말한 뜻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화악산 기우제〔華岳祈雨〕[DCI]ITKC_BT_1550A_0050_000_0120_2021_001_XML DCI복사
양근 군수로 재직하던 기유년(1789, 정조13) 가을 군민 90명을 이끌고 가평군 북쪽에 위치한 화악산(華岳山) 광악촌(廣岳村)에서 느릅나무[楡]를 베었는데 이때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다. 갑인년(1794)에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재직하게 되었는데, 6월 18일부터 7월 26일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화악산에서 두 번 기우제를 지냈으니 예전 느릅나무를 베었던 곳이었다.
치소(治所)로부터 북으로 장항령(獐項嶺)까지 10리이고, 장항령에서 다시 북으로 물내리(勿乃里) 사당촌(射堂村)까지 30리이니, 대체로 모두 두 산의 사이에 해당한다. 사당촌에서부터 비로소 골짜기로 들어가는데 계곡이 매우 좁아 멀리 화악산을 바라보면 우뚝 솟았고 검게 보였다. 그 서북쪽은 춘천과 영평의 경계가 된다고 한다. 사당촌에서 광악촌까지가 또 10리이니 모두 통틀어 계산하면 50리인데, 비로소 화악산 기슭에 이르면 그곳에 기우단이 있다.
기우제를 지내러 가는 일행은 도포와 의대를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감히 일산을 펴지 않았다. 예리 1인은 어깨에 향축(香祝)을 메고 말을 탄 채 앞에 가고, 또 돼지를 짊어진 사람이며 채소와 과일, 벼ㆍ수수ㆍ쌀이며 술 단지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이 구불구불 앞으로 나아갔다. 가을볕이 뜨겁게 내리쬐어 길옆의 산전(山田)에 심은 기장과 피, 콩과 팥 따위가 거의 다 말라 죽어 있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참담해졌다. 산골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떼를 지어 내가 탄 말 앞에 무릎을 꿇고 “환곡은 어떻게 하며 군포는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소연을 하며 거의 응접을 하지 못하니 극히 번뇌가 일어나는 지경이라 할 만하였다.
사당곡(射堂谷)으로 들어가자 냇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장롱이나 궤짝 같은 큰 바윗돌이 사방에 널려 있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대개 계곡물에 떠밀려 내려와 서 있던 돌은 엎어지고 엎어진 돌은 다시 서 있었다. 말이 그 바윗돌 사이를 지나가느라 거꾸러졌다 일어났다 하였다. 때로 바위 위에 우뚝 서기도 하였는데 길이 뚝 끊어져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어서였다. 어떤 때는 가파른 절벽 옆을 지나갔는데 말 뒷굽이 허공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여 가슴이 덜덜 떨렸다.
광악촌에 도착하여 예전에 알던 주인옹의 안부를 물으니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띳집은 예전 그대로인데 닭들은 부산하고 개는 짖어 댔다. 덥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냇가의 그늘을 골라 자리를 옮겨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석벽의 여러 면이 새하얀 눈과 같았는데 모두 도자기를 구울 때 생기는 듯한 실금이 나 있었다. 냇물이 모여 맑은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피라미들이 그 안에서 헤엄을 치고 계곡의 새들은 그 위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붉은 술 몇 잔을 마시고 숲에서 새 여남은 마리를 잡아 그 고기를 씹어 먹으니 얼근히 취하여 곧 올 때의 괴로움을 잊었다.
이 산은 서울에서 거리가 200리도 안 되지만 궁벽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무슨 까닭으로 세 번이나 이곳에 온 것일까.
구리로 만든 관방인〔銅關防〕[DCI]ITKC_BT_1550A_0050_000_0330_2021_001_XML DCI복사
《명사》 〈여복지(輿服志)〉에 이렇게 되어 있다.
“문무 대신으로서 황제의 칙령을 받아 권위가 중한 사람에게는 혹 구리로 만든 관방인을 지급해 준다. 직뉴이며 너비가 1치 9푼 5리(厘)이고, 길이가 2치 9푼, 두께가 3푼이다. 9번 자획을 꺾어 중첩된 전서[九疊篆]로 되어 있다. 재상이 변경으로 순행할 때에도 각 관사의 장관과 다를 것이 없다. 오직 정덕 연간에 장영이 안화왕을 정벌할 때 금으로 주조한 인신을 사용하였으며, 가정 연간에 고정신이 서울을 지키고 있을 때 상아를 인신의 재료로 사용하여 관방을 새겼으니, 이는 모두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지금 통제영에 오래된 구리 도장 하나가 있다. 오늘날의 자로 재어 보면 너비가 1치 9푼이고, 길이가 3치 3푼이다. 황명 만력 연간에 충무공 이순신에게 황제가 내려 주신 것이다. 전서가 여러 번 꺾여 있어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이 도장을 도독인(都督印)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9번 자획을 꺾어 중첩된 전서로 쓰고 구리로 만든 관방인인 것이다. 이 충무공이 처음에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두었고 나중에는 고금도(古今島)에 두었는데, 이곳을 함락당한다면 왜가 천진(天津)으로 배를 몰고 쳐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천조(天朝)에서 관방인을 하사한 것이다. 배신(陪臣)으로서 이것을 받았으니 역시 영광스럽다 하겠다.
우리나라 여인의 신혼 단장〔東俗粧梳〕[DCI]ITKC_BT_1550A_0060_000_0180_2021_001_XML DCI복사
소대형의 《이속지(夷俗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부녀자들은 애초 태어날 때로부터 머리카락을 남겨 두는데 자라면 짧게 열 가닥으로 땋아 전후좌우로 늘어뜨려 놓았다가 반드시 결혼할 때를 기다려 시부모를 뵙고서야 둘로 나눈다. 땋아 내린 머리카락의 끝은 두 개의 상투 모양을 만들어 두 귀에 늘어뜨린다. 귀에도 작은 구멍을 뚫고 금 귀고리나 은 고리 등을 단다. 얼굴 또한 연지와 분으로 화장하는데, 다만 연지로 화장할 때는 매우 붉게 하고 분을 바를 때에는 지나치게 희게 해서 우리 중국에서 적당히 고르게 화장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우리나라 부녀자들이 신혼 때 화장하는 것이 대략 이와 같다. 이는 아마도 고려 때에 원나라 풍속을 배워 지금에 이르도록 고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예전에는 귀에 구멍을 뚫고 귀고리를 달았으나 지금은 점차 그런 풍속이 사라지고 있다.
노비〔奴婢〕[DCI]ITKC_BT_1550A_0060_000_0250_2021_001_XML DCI복사
도종의의 《철경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금 몽고 색목인(色目人)의 노비를 남자를 노(奴), 여자를 비(婢)라 하고 총괄해서 구구(驅口)라고 하는데, 대개 국초에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날마다 포로가 이르자 남녀를 짝지어 부부로 삼고 그들이 낳은 자손을 영원히 노비로 삼았다. 또 홍계매도(紅契買到)라는 말이 있는데, 원주인이 노비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길 때 세금을 내고 문서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양인을 사서 노비로 만드는 것은 금하는 것이다. 또 배송(倍送)이라는 것이 있는데 적절한 사람을 뽑아 출가하는 여자에게 딸려 보내는 것을 말한다. 노비의 딸과 아들은 다만 서로 간에 혼인할 수 있고 양갓집 남자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으레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양갓집에서 노비의 딸을 아내로 맞는다면 이는 허락한다. 노비가 혹 재산을 모았고 주인은 그 재물을 탐내는 경우 주인은 노비가 조금이라도 죄를 짓기를 기다려 매질하고 가두고는 재물을 모조리 가지고 가는데 이를 초고(抄估)라고 한다. 또한 노비가 스스로 자기 재물을 주인에게 헌납하고 노적(奴籍 노비 장부)에서 빠지기를 바랄 경우 주인이 서명하고 필집(筆執 문서 작성자)이 증인이 되어 문서를 만들어 주는데 이를 방량(放良)이라고 한다. 〈형률(刑律)〉에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면 장(杖) 100에 처하고 노비를 때려 죽이면 일반인에 비하여 사형에서 1등급을 감하여 장 107에 처하니, 노비를 소와 말과 다름없이 보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주례》에는 ‘노비의 아들은 조례(皁隷)로 들이고 딸은 용고로 들인다.’라고 하였고, 《설문》에는 ‘노비는 모두 옛날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노비는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애초에 아무 죄악도 없는데 대대로 도망가지 못하니 또한 애통할 따름이다.
그리고 노비가 낳은 자식을 또 ‘가생아해(家生兒孩)’라고 한다. 살펴보니 《한서》 〈진승전(陳勝傳)〉에 ‘진(秦)나라가 소부(少府) 장감(章邯)으로 하여금 여산(驪山)의 죄수와 노비가 낳은 자식을 방면하게 하였다.’라고 하였고, 안사고(顔師古)는 주에서 ‘노비가 낳은 자식[奴産子]이란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집안에서 낳은 노비[家生奴]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가생아(家生兒)’ 역시 근거가 있다.”
도종의의 의견을 상고해 보면, 지금의 노비 제도와 서로 비슷하지만 우리나라 풍속이 반드시 예부터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니, 대개 고려 때에 원나라 풍습을 따라 익혔을 따름이다. 지금 궁궐의 노비를 ‘구사(驅史)’라고 하고 관례(官隷)를 ‘구종(驅從)’이라 하니, 바로 ‘구구(驅口)’의 구(驅) 자를 쓴 것이다. 창기(娼妓)를 ‘간나해(干那孩)’라고 하는 것 역시 ‘가생아해’의 음이 변한 것이다. 창기는 본래 고려 때 ‘양수척(楊水尺)’의 후예로 대대로 관비가 되었기 때문에 ‘가생아해’라고 한 것이다.
온돌과 구들〔炕〕[DCI]ITKC_BT_1550A_0060_000_0280_2021_001_XML DCI복사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온돌이라고 하고, 연경 풍속에서는 항(炕)이라고 한다. 살펴보건대 《구당서》 〈고려열전〉에 “겨울에는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고 아래에서 숯불을 때어 따뜻하게 만든다.[冬月皆作長坑 下然熅火以取煖]”라고 하여, 항(炕) 자를 갱(坑) 자로 썼으니, 그렇다면 항은 본래 고구려의 제도인 것이다. 우리나라 구들은 돌로 만들고 연경의 구들은 벽돌로 만든다. 혹자는 돌이 벽돌만큼 따뜻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또 그렇지 않다.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토은현(土垠縣)에 관계사(觀鷄寺)가 있는데 절 안에 승려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매우 높고 넓은 법당이 있다. 법당 아래에 모두 돌을 얽어서 구들을 만들고 위에 진흙 칠을 더해서 기단 내부가 두루 잘 통하고 가닥가닥 길이 갈라져 분산되어 있으며, 기단 옆 실외에 사방으로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내었는데 불길이 안으로 흘러 들어가면 온 법당이 다 따뜻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돌로 만든 구들이 벽돌보다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남중(南中)의 절에서 더러 아(亞) 자 형태로 구들을 만들기도 하니 이것은 관계사의 유제(遺制)일 것이다.
고와 피리〔箍笒〕[DCI]ITKC_BT_1550A_0060_000_0500_2021_001_XML DCI복사
우리나라 풍속에 금(琴)을 고(箍)라고 하고 피리를 금(笒)이라고 하니, 거문고[玄箍], 가얏고(伽倻箍), 대금(大笒), 중금(中笒), 초금(草笒)과 같은 유가 이것이다. 대개 이는 방언으로 그 뜻을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예전에 《정리통고도설》을 지으면서 비로소 배웠으니, 고란 줄이란 뜻이고, 금은 분다는 의미이다. 또 《당서》 〈예악지〉를 살펴보면 “고려기(高麗伎)에 탄쟁(彈箏)과 추쟁(搊箏)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탄쟁은 거문고와 비슷한 것이고 추쟁은 가얏고와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금(琴)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갈소관의 위치〔曷蘇館〕[DCI]ITKC_BT_1550A_0060_000_0510_2021_001_XML DCI복사
《동국여지지》를 편찬할 적에 갈소관이란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근래에 비로소 중국어로 찾아보니, 당나라 때에는 박작구(泊汋口)라고 하고, 요나라 때에는 갈소관이라 하고, 금나라 때에는 파속로(波速路)라고 하고, 원나라 때에는 파사부(婆娑府)라고 하였다. 발음은 서로 비슷하지만 글자가 시대마다 바뀌었으니, 바로 압록강의 나루가 있는 여러 지역이다.
오국성〔五國城〕[DCI]ITKC_BT_1550A_0060_000_0550_2021_001_XML DCI복사
“《조야잡기(朝野雜記)》에는 ‘휘종을 처음엔 오국성(五國城)에 장사하였는데, 7년 뒤에 금나라 사람이 재궁(梓宮)을 행재소로 돌려보내니 용덕(龍德) 별궁에 임시로 안치되었다.……’라고 하였다.
《동도사략(東都事略)》에는 ‘정강 2년(1127) 3월 정사일에 도군황제가 북쪽으로 갔다. 소흥 5년(1135) 4월 을미일에 황제가 붕어하였다. 12년 8월 을축일에 고국으로 돌아와 용덕궁에 빈소를 차리고 10월 병인일에 영우릉(永祐陵)에 장사하였다.’라고 하였다.
《송사》 〈후비열전(后妃列傳)〉에는 ‘정 황후(鄭皇后)는 상황제를 따라 청성(靑城)으로 끌려가서 북쪽으로 옮겨져 5년을 머무르다가 오국성에서 붕어했으니 시호가 현숙(顯肅)이다. 재궁이 국내로 돌아오자 곽에다 모시고 황후의 옷을 그 안에 넣어서 휘종과 함께 회계(會稽) 영우릉에 합장하였다.’라고 하였다.
《철경록(輟耕錄)》의 ‘양련진가가 남송의 능묘를 도굴한 일’에서는 주밀(周密)의 《계신잡지(癸辛雜識)》를 인용해 ‘휘종과 흠종이 오국성에 묻힌 뒤에 송나라는 금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내어 간청하여서 재궁을 돌려받고자 하였는데 6, 7년이 지난 뒤에야 허락을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발굴되었는데 휘종과 흠종의 두 능에는 모두 물건이 한 점도 없었으니, 휘릉에는 썩은 나무토막 하나만 있고 흠릉에는 나무 등잔 한 개가 있을 뿐이었다. 대개 당시에 이미 그 진위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속임수라고 지레 의심하고자 하지 않았으니 또한 한때의 민심을 위로하였을 뿐이다. 두 황제의 유해는 사막 어딘가 떠돌고 있고 애초 돌아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독례통고(讀禮通考)》에 나오는데 의당 〈북관고적〉에 들어가야 한다.
건주의 연혁〔建州始末〕DCI]ITKC_BT_1550A_0060_000_0560_2021_001_XML DCI복사
《무비지》 〈여진고(女眞考)〉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진은 국조에 몇 종류로 나누어졌다. 해서에 사는 자들을 해서여진(海西女眞)이라 하고, 건주(建州)와 모린(毛隣) 등지에 사는 자들을 건주여진(建州女眞)이라 하고, 가장 먼 극동에 사는 이들을 야인여진(野人女眞)이라 한다. 또 소수 종족이 매우 많은데 모두 용감하고 날래며 활을 잘 쏘고 기갈을 잘 참으며 전투를 잘한다.
건주여진이 그들 중 우두머리가 되는데, 왕고와 아태(阿台)의 부족들이 가장 사나워서 때로는 공물을 바쳤다가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만력 초에 무순(撫順)을 지키던 장수를 그럴듯한 말로 유인해 나오게 해서 살해하였다. 이 당시는 신종이 막 즉위하고 장거정(張居正)이 재상이 되어서 법으로 변방의 관리를 단속하여 변방의 관리들이 벌벌 떨고 있던 시기였다. 일이 보고되어 순무사 장학안(張學顔)과 진신 이성량을 문책하니, 마침내 그해가 지나기 전에 그들의 소굴을 공격하여 대대적으로 참수하고 노획한 뒤 종묘에 승리를 고하고 포로를 바쳤다.
이때에 아태의 장인인 타실과 타실의 아버지 교장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성량이 아태를 엄습해 죽일 적에 실제 그들을 속이게 하였다가 이윽고 모조리 살해하였다. 아태의 성이 함락되었을 때 교장의 손자인 노아합적(奴兒哈赤 누르하치)이 16세였는데 죽여 주기를 청하였다. 이성량은 도리어 그를 불쌍하게 여기고 또 여러 부족 중 황제의 명을 맡길 데가 없음을 고려하여 마침내 그 지역을 모두 그에게 주고 조정에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봉해 주기를 청하였다. 용호장군이란 국가에서 오랑캐에게 내려 주는 높은 벼슬이다.
노추(奴酋 누르하치)는 마침내 그를 빌미로 동방을 호령하여 여러 부족의 땅을 다 차지하고 해마다 초피와 인삼을 무역하여 금전 10여 만을 얻었다. 그리고 강변의 오랑캐(생여진)를 회유해 병합하여 그들의 진주 산지를 얻어서 지붕 모서리에 진주를 달아 놓고 진귀한 보화를 나열하였다. 자녀들은 옥처럼 찬란하고 모시는 신하들은 엄숙하니 엄연한 왕자(王者)와 같은 기상이 있었다.
남관(南關)의 회팔(灰叭)이란 여러 부족과 북관(北關)의 금(金)과 백(白)이란 두 추장은 모두 해서여진의 일족이었다. 노추는 셋째 딸을 남관의 추장인 복태길(卜台吉)에게 주고 그 틈을 타서 그 지역을 습격해 취하였다. 복태길이 북관으로 도망가서 금태타(金台他)의 과년한 딸에게 장가들려 하자, 노추가 성을 내어 그를 공격하고자 하니 과년한 처녀가 감히 복태길에게 시집가지 못하였다. 금 추장에게 자못 미색이 있는 어린 두 딸이 있었는데 이윽고 하나는 복태길에게 시집보내고 하나는 복태길의 동생에게 시집보내니, 노추가 더욱 진노하였다.
금태길(金台吉)에게 또 서쪽 오랑캐인 재새에게 시집간 딸이 있었는데 얼마 뒤에 사이가 나빠져 친정으로 돌아왔다. 재새가 다시 금 추장의 과년한 딸에게 장가가고자 하여 금 추장이 허락하였는데 딸이 거절하니 재새가 화를 내었다. 노추가 이에 재물을 보내어 서쪽 오랑캐의 부족들에게 뇌물을 주고 또 한편으로는 재새와 혼인을 맺어서 함께 북관 지역을 유린하고 은밀히 요(遼) 땅을 소란스럽게 하였다. 명나라의 변방 관리가 그를 경계해 타일렀으나 노추가 듣지 않자, 이에 때때로 날랜 병사를 출동시켜서 북관을 보호하였다. 노추는 더욱 분노하여 말하기를 ‘북관이나 우리나 똑같은 오랑캐인데 중국은 어찌하여 한쪽만 보호하는가?’ 하였다. 이때 노추는 이미 부강하고 무리를 많이 모아서 성곽을 수축하고 군사를 훈련하느라 쉴 날이 전혀 없었으며, 망명한 자들을 초치하고 또 점성술을 강구하고 병법을 논하니 천하가 모두 그가 장차 대사를 일으키리란 것을 알았다.”
《무비지》의 〈여진고〉는 대체로 산삭된 내용이 많으니, 아마 그쪽 사람이 숨기려고 그렇게 한 듯하다. 상사(上舍) 한대연(韓大淵)이 소장하고 있는 본이 뛰어난 완본이기에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인용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