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사가 오래전 제주의 고문칠전우님의 아드님결혼식에 참여한 바 있는데 말이 나온김에 한번 올려보았다.
인터넷전우회 해병의 최종상회장님이신걸 보니 오래된듯 하다. 참고로 홍하사 큰아들 결혼식때는 김주황님이셨다.
홍하사가 항상 존경하고 남달리 우리전우님들을 사랑하시는 제주의 고두승 부회장님께 언젠가 우리 인터넷 전우회장직을 좀 맡아주십사 건의한 바 있다. 항상 겸손으로 언제나 고사하신 전우님은 제주도의 유지이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은퇴전엔 농협지점장과 박물관장직을 오래동안 맡은 훌륭한 분이기도 하지만 사모님께서는 내조는 물론 대학시절 "행정과" 출신이지만 특히 '퀼트' 계통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시어 전시회를 갖은바 있다. 이번에 2차로 전시회를 갖으신단다. (아래글은 퍼온 글입니다) 2016년 3월 일 이수(怡樹) 고두승 드림 (고두승전우 사모님이 전우옥여사님이시며 "전우가 좋아"---(115) (전우옥 여사)참조 다 음 세심재갤러리 기획전 "제2회 전우옥 생활퀼트전" 일시 : 2016년 3월 19일(토) 오후 3시 장소 : 세심재 갤러리( 시외버스터미널 북쪽 200m지점) |
오래전 친목회에서 단체로 제주 여행가기로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않아 (淑도 손님과 약속때문에) 혼자서 다녀온 바 있다.
인증 샷을 해줄 사람이 근처에 없어 오랜시간끝에 겨우 남긴 사진이며 노래 44곡을 부르며 혼자 내려오니 '상판악'이었다.
인터넷 전우회장이셨던 이현태선배(파월최초 훈장받으신 전우)님과 동해시의 정교진전우 모친상에 다녀왔는데~
홍하사(분대장 - 좌측 모자)의 분대원(2번 소총수)으로 우측 서있는 전우이며 검은 팬티는 양부모(父母)맺은 분의 작품이다.
홍석진선배(백마 1진)님의 양아들 결혼식(우즈베키스탄)에 참석하여 결혼당사자(ASSA부부)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홍하사가 대리 "부모노릇" 하며 그들의 풍습대로 옷을 입고 친척들과 사진찍으며 우측(붉은 상의)가 선배님의 부인이시다.
"우리가족 이야기"---(1) (공부보다 인성교육이 먼저다)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난 가족들을 인솔하여 잠실 야구장을 찾곤한다. 때론 김밥을 싸가기도 하고 가끔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를 준비하기도 한다. 처음에 집사람은 별로 내키지않아 했지만 차츰 야구에 묘미를 붙이곤 이젠 시즌만 되면 먼저 말을 꺼내기도 한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더 야구에 대해 상식이 많다. 메이저리그가 어떻고 박찬호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야구뿐만이 아니라 한창 입시시절에서도 난 꼭 어딜 데리고 다녔다. 누군 입시를 앞둔 고3 이면 온가족이 숨도 제대로 못 쉰다고 하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한다. 될 놈은 하루쯤 공불 안 해도 되고 떨어질 넘은 제사도 안 지내고 입시준비해도 떨어진다는게 나의 지론이다. "조 용필 콘서트"---걔네들에겐 한마디로 바늘방석에 앉은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정도는 기성세대들의 음악을 알아야하고, 난 또 그들의 세계도 알려고 언제한번 젊은 프로(?)가 오면 언제던 함께 가자고도 했지만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는걸로 봐서 별로인가 보다. 아마도 여자애들이였다면 틀림없이 실행 했을 것이다. 하여간 난 그들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일요일이면 단골 만화방에 데리고 가서 자장면도 시켜 먹어가면서 책과 친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나쁜 책이래도 보질않는것 보담은 나으니까-그러던게 사오년전부턴 두넘들이 각기 군대를 가게되면서 조금씩 기회가 전원이란 말이 힘들어졌다. 많지도 않은 식구가 꼭 한두사람이 빠지게된다. 한집 살면서도 함께 아침같이 먹은지도 언젠지 기억이 나질않는다. 무슨 놈의 약속이 그리도 많은지? 쓸데없이 전화와서 방핼하는 친군 또 왜 그리도 많은지? 하는 수 없이 엊그젠 "보성행" 이 "맨데토리"라 했다. 난 언제부터인지 "북괴의 4대 군사노선" 을 내 생활에 대입시켜 실행해오고 있었다. 양놈이던, 왜놈이던, 뙤놈이던 또한 빨갱이 놈들이던 좋은 점이 있다면 본 받아야 한다고 난 늘 생각했고 실행해왔다. "전 장비 현대화" 를 "전가족 H.P 현대화"로 바꾸어 해마다 12월이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꼭 한사람씩 내 돈으로 교체 해준다. "전 국토 요새화"는 "전 방(房) TV 시청화" 로 시행으니 서로 리모콘 쟁탈전이 없어 좋았고 "전인민 간부화"는 "전가족 간부화"로 시키기 위해 가끔씩 가족회의로 준빌(?)한다. (살아가는-#864, 03년 6월 2일-- "흑백 TV 시절이 그리워"-숙이님 글 참조) 마지막 "전인민 무장화"는 "전가족 드라이버화"로 바꿔서 일찌감치 면허를 따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사실상 W.는 두 아이들 보다 경력이 많이 앞서지만 실력은 뒤떨어진다. 따라서 이번 "보성차밭행"은 실로 오랫만의 가족 나들이가 아닐수 없다. 더우기 앞으로 큰넘의 직장생활이나 작은넘의 복학이 되면 더더욱 어려울것이다. 집사람과의 행차는 수시로 생각날때면 언제나 이뤄진다. 밤 열두시고 새벽 두시고 내키는대로 떠나면 된다. 그러나 네식구가 함께 장거릴 동행한건 '01년말 만리장성을 다녀온후 처음인것 같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집사람의 운전기피증도 좀 해소하고(언젠가 후진하다 크게 혼난적이 있었으며 그 후론 안한다고 함) 작은넘의 고속통행연습도 좀 시킬겸, 겸사겸사해서 아예 출발시부터 운전댈 맡겨 버렸다. 그러나 출발시 부터 삐꺽대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일을 저질르고 말았다. 큰넘의 말대로 처음부터 잘아는 퇴계원으로 해서 중부 고속도로를 가면 될터인데 굳이 서해안 고속도롤 고집하다가 어디서부터 잘못된지 눈을 떠보니 신림동이 나오고 과천간판이 보이고,서울대학교 팻말이 나오질 않은가? 나도 한동안 서울에서 남의 자가용 기사로 근무한적도 있었지만 워낙 오래된 터이라 아물아물 잘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행주대굘 탄것까진 잘 됐으나 시흥으로 죽 뻗은 도롤 잘 못 들어선 모양이다. 하루 전 미리 테스크를 줘서 알아볼 시간을 줬는데도 사전 준빌 안한듯 하니 스스로 반성하겠지 했다. 아빠가 한참 담배를사랑하던 시절---(하루 네 갑을 피울적도 있었다)--- 큰넘이 이불을 좍 깔고 두다리를 쭉 뻣고 담밸 꼬나물은채 허공에 대고 후후 품는 시늉을 하다가 내게 걸렸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성냥불을 켜서 한모금 깊이 빨고 오장육보를 한바퀴 돌게 만들어 흰연기 품게 만들었다. "콜록콜록!" 온통 울며 불며 난리가 났다. 제 어미가 더 지랄(?)을 했다. 그 후론 담배를 만지는것 조차 꺼려했다. 물론 작은넘도 안 피운다. 지금은 비록 한,두어 시간을 손핼 봐서 타격이 심하겠지만 나중엔 크게 깨우치리라. 난 사실 며칠째부터 오랜 고질인 허리가 도진것이며 사실 약속만 아니었더라도 포기하고 싶었다. 어쨋거나 끝까지 해낼수 있다는 자신감과 책임을 지워야 된다. 아홉시 반에 출발하여 보성에 도착하니 아침 여섯시가 조금 넘었다. 실로 두 세시간은 더 걸린 셈이지만 안전하게 도착시켜준 막내에게 고맙다구 해야겠다. 밤 새워 운전한 덕분으로 거의 모두가 율포 해수욕장 해수-녹차탕에서 샤워를 한다. 주차장엔 먼저온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창 밖을 내다보니 그 유명한 율포 해수욕장이 보인다. 이게 숙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녹차잎이야.(난 아직 단둘이 있을땐 淑이라고 부른다.) 제가 가끔 전우님들과 대화를 할려고 방에서 안나오면 저희들끼리 깔깔대고 웃는다. 뭐냐고 물으면---벌써 왕따를 시킨다. 허지만 때론 유일한 나의 고우-스톱 파트너 들이다. 작은 아들-이번 여행에서 많은 경험과 실력을 쌓아라. (내일 부터 보름 정도 국내 여행을, 끝나면 구라파를 배낭여행으로 혼자 갈것입니다. 장래 관광업계를 뒤흔들(?)-홍 연일) "형제는 용감하였다." ---이넘들이 서로 잘못 가는듯 해요. 음악을 좋아하고 차분한 성격의 그리고 몇번의 시련을 겪은바 있는 대기만성형인 둘째는 활동적인 "관광경영과" 이고 (오히려 성적으로 장학금도 탐) 반대로 혼자 알아서 한번도 신경 안쓰게 만든 활동적인 큰애는 가만히 책상에 들어박혀 앉아일하는 "임상병리과" 랍니다. 이놈은 차라리 제에미 의류장사하는데서 '알바' 하는것이 더 적성에 맞는듯 함. (아 글쎄 재학시절엔 엉뚱하게도 축구감독을 맡아 오히려 장학금을 타드라구요) 둘이 서로 주특기를 맞바꾸었으면 하지만 세상사 뜻대로 안되는 거드라구요. 엊그제도 제에미가 모처럼 식구외식 한번하자고 시외 변두리에 "초계탕" 을 먹여주려고 가는중에 자꾸 시계를 보면서 불안해 하는겁니다. 교통은 막히고 시작 시각은 닥아오지 안절 부절을 못하는겁니다. 자꾸 중간에서 채근을 하는겁니다. 그냥 간단한 옛날 짜장이나 먹자고---실은 제가 할소리였지요. 얼마나 빨리 집에와 경기를 보고팠으면 식사가 덜 끝났는데도 일어나더니 지가 계산도 하고, 시동걸고 야단 법석이었으요. 박 주영이가 종반에 넣어 1:1 로 겨우 비긴 월드컵최종 예선전이 결과였지만--- "얌마! 아직은 아빠가 계산할수 있어" (알나 자지에 밥풀을 따 먹지)--- 그날은 큰넘이 학생복 알바를 이십여일간 하고 겨우 몇 십만원 돈을 만진 날이였답니다. 어때? 가게 하루 문 닫길 잘 했지?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꾸나! "이봐! 마눌-뭘 그리 골똘히 생각는게야. 대충 사는게지." "그때가 좋았으요." "어느때?" "내가 백화점 의류 판매원으로 있을때 말이야요." (또 그얘기) ---얘기인즉슨---97년도 일이었다. 최씨집(처갓댁 형제,자매) 네식구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우리가) 친정엄마 모시고 제주도를 3박 4일 놀러다녀 왔다는 사실이 온 친목회내에서 몇날 몇일을 두고 화제에 올랐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네 골목친목회는 모두가 장사를 하는 지독한 무리들의 계모임이었다. 일년 내내 하루도 쉬질않는 오로지 돈만 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임이 언제나 밤 열두시가 되어야 겨우 소집될 정도였다. 서로가 다른 업종이어도 장사를 하면 모두가 경쟁의식이 생기는가 부다.) 사람들 틈에 나만 홍일점으로 봉급쟁이였다. W.도 마찬가지였고---그들로선 부러울만하지. "회장님이 너무 부러워요" 한 마디씩 한다. 다만 돈을 못벌어서 그렇지! 게다가 형제 둘 다 기명색 상의의 (갈색 계통의 상의) 議高가 아닌가! ---난 비록 백화점 점원에 불과하지만 아들 둘다 한수 이북의 최고 학교에 다니고---긍지를 가졌다고 했었다. 그러면 뭣해? 지금은--- 둘다 "S전문대" 출신의 빈둥빈둥과의 "이태백" 인걸--- 야! 큰 애야. "아이스 크림" 먹고 속 차려라. 되지도 않을 발표 기다리지 말고 장사나 하지! 암 장사가 최고야! --- 올해 초순에 시험친 "국립암센터"(일산) 1차 합격 발표가 아직도 미련이 남는지 떨쳐버리질 못하고 있다. 뭐 저 말로는 팔백명이 응시해서 이십명이 1차 합격하고 나머지 2차 면접을 기다리는데---세명을 뽑는다나-여태 발표가 안났다나, 싹수가 노란대두 철이 없는지? "아빠 우리선배는 8개월만에 합격 발표를 받았데요." 이모 아들이 전문의를 하면서 (대전)개인 병원에 임상병리사로 취직을 시켜주겠단대도 큰 병원만 찾는다.(작은병원은 경력에도 들어가질않는다고---) 나라가 망할려니 별 거지 않은것도---하여간 의고 선배겸 이종사촌형과 전화 통화 몇 마딜 하드니 진로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러게 애시당초에 너완 노선과 방향이 틀리다니까---짜~식, 아직 배가 부르구면. 그럴줄 알았으면 주영이 처럼 축구나 시킬걸 그랬나? 인천 공항 근처에 외국계통의 병원이 생기면 그곳서 세계최고의 임상병리사가 되는게 꿈이라고 한다. " 미친 넘"---그럴려면 우선 영어를 해야만 하는데 겨우 그 점수갖고 뭘해! 고생좀 하게 캐나다나 뉴질랜드로 유학(?) 좀 보내줄까해도 겁이 많은건지? 자신이 없는건지? 마다한다. 애초 정신 자세가 틀린 넘이다. 제 친구들은 사우디니 쿠웨이트니 일본이니 잘두 가드만---이넘 때문에 흰 머리가 는다. CF와 드라마 촬영지인 삼나무 가로수길과 차밭 풍경등 경치가 무척 예쁜곳이지만 ! 아이구 허리야! 잠은 나 혼자만 잤는데도 왜 이리도 힘들어, 나무 기(氣)나 좀 넣어야겠다. 그 옛날 가족을 인솔해서 만화방에도 가고 (거기서 군만두도 시켜먹고, 그 때가 좋았는데---) 그 유명한 보성차밭(대한다원)에 다녀오면서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
19년전 큰아들이 일본가기 직전 가족이 "보성 녹차밭을 다녀오면서" 올린 글이라 한번 올려 보았으며 그는 무작정 일본갔지요.
"금발의 제니"(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는 미국의 포스터가 작곡한 곡으로 홍하사부부가 아들 결혼식서 '축가'로 불렀다.
첫댓글 참으로 인생사 "새옹지마" 인듯 합니다.당시 지엄마에게 아르바이트도 하고~ '일산암센터' 에 2차까지
합격하고 그냥 암센터에 다녔드라면~ 오히려 더 잘된건지 모르겠네요.무작정 일본가서 2년동안 주경야독하며
학원다녀 일본어를 마스터한후 '요코하마대 경제학'과 나와 현지취직, 지금은 '토오쿄오' 서 세계적인 회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