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민족 시인 윤동주의 이 시는 차라리 시라기보다 온몸을 바쳐 피로 쓴 비장하고도 맑은 양심 선언이다. 이 시의 경우, 자잘한 기교나 표현을 가지고 얘기한다는 것은 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무기교(無技巧)가 때로는 더 높은 차원의 기교일 수도 있다는 역설이, 이 시의 경우에 있어서는 아주 적절하다. 시는 한 마디로 사무사(思無邪)라고 한 공자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시는 일체의 삿된 생각이 말끔히 없어질 때 비로소 있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 '서시'에는 잡된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이 시인의 티 없이 맑은 마음이 그대로 내비치고 있다.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마음 속의 생각을 그대로 글로 옮겨 놓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식민지를 사는 한 젊은이 또는 지식인의 괴로움과 그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意志)가 이 짧은 시행 속에 유감 없이 나타나 있다. 일제하 민족 저항시의 귀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명편이다.
이 시는 8행과 1행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지만, 편의상 1∼4행, 5∼8행 및 9행의 3단락으로 나누어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제1단락. 죽을 때까지 부끄러운 짓을 결코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이 시인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에 있어 삶이란 온통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까닭이다. 식민지 하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 자체가 부끄러움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라 식민지적 제반 현실은 영달과 돈과 안일을 가지고 젊은이로 하여금 부끄러운 짓을 하게끔 유혹하고 강요한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괴로움이 없을 수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진술은 이 시인의 꾸밈 없는 마음이요, 그래서 이 구절이 주는 감동은 더욱 강렬하다. 이 단락은 지금까지의 이 시인이 살아온 과정(過程)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단락. 1단락이 지나온 삶의 고백임에 대하여 2단락은 의지(意志)를 노래한 것이다.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표현은 결코 패배주의적·체념주의적 발상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죽어가는 것일지라도 옳은 것이며 그것을 따르겠다는 피맺힌 절규이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에서 "죽어가는 것"의 뜻은 분명해진다. 이 단락은, 그 길이 비록 승리로 가는 탄탄대로가 아닐지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백으로 읽을 수가 있다.
제3단락. 단 행으로 독립되어 있는 연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서경(敍景)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한 행이야말로 앞 8행의 가파르고 옹쳐진 듯한 가락을 시적으로 승화하고 있다. 이 마지막 한 행이 아니었던들 이 시가 그토록 많은 독자들이 애송하는 시로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한 행은 시를 전체적으로 서정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이 시에 영롱한 밤의 이미지, 별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티 없이 맑은 별의 이미지야말로 윤동주 시의 본질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 내지 지식인의 고민,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일체의 잡된 생각이나 자잘한 기교까지를 뛰어넘어 표현된, 우리 시문학사상 가장 빛나는 민족 시의 하나이다.
2. '문학사상'(162호, 1986. 4월호)에서
삶의 시간과 기도의 공간
李起哲
▦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인가?
김윤식 교수가 <尹東柱論의 行方>(心像, 1975. 2)을 쓸 때까지 윤동주론은 30여 편에 불과한 것이 이건청 교수가 윤동주 평전 ≪나의 볕에도 봄이 오면≫(文學思想社)을 낸 1981년에 오면 윤동주에 관한 논의는 106편에 이른다. 이같은 윤동주론의 추세로 미루어 보아 현재까지 나온 대소의 논의들을 합치면 윤동주론은 이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 되리라 생각된다. 시인론 (혹은 작가론)을 쓸 때, 기왕의 논의가 많다는 것은 글을 쓰기에 편리할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다. 편리하다는 것은 먼저 씌어진 논의들을 수렴하고 조합하는 일에 있어 손쉬운 일임을 말하는 것이고, 불편하다는 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입론을 전개하기가 거북하거나 어렵다는 것이다. 윤동주론을 새롭게 써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 같은 선행 논의들이 때로 필요악이 되는 경우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대체로 보아 지금까지 씌어진 윤동주론의 갈래는 감상문이나 추억담, 윤동주의 전기문이라 할 인간과 삶의 면모, 그리고 작품론으로 대별되는 듯하다. 이같은 논의의 분류는 반드시 윤동주에게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20∼30년대 시인이나 작가의 논의에는 거의 공통적으로 따르는 분류이지만, 더욱이 짧은 생애를 살다간 시인의 경우, 예를 들면 이장희, 김소월, 윤동주 등의 경우는 작품론 이상으로 추억담, 전기문들이 많은 것임은 그 예를 찾기가 어렵지 않다.
작품론으로서의 윤동주론은 작품의 실증적 자료가 완비되었다 해도 언제나 새로운 각도에서 씌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며 실지로 대학의 문과에서 지금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윤동주의 작품론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윤동주를 저항 시인으로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 성찰과 인간적 고뇌의 시로 보는 견해이다. 윤동주를 저항 시인으로 보는 경우는 주로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상 불온, 독립 운동'이라는 죄목으로 일경에 체포, 수감되어 옥사했다는 그의 생애와, 그가 시를 쓰고 발표하던 30년대 말과 40년대 초가 일제의 최후의 탄압이 가중되던 시기라는, 시대·사회적 배경을 고려한 견해이고, 내면 성찰과 인간적 고뇌의 시로 보는 경우는 그의 성격과 인간됨, 그리고 작품에 보이는 참회와 경건성, 온건함과 겸허성을 두고 말하는 것인 듯하다. 통념에 따른다면 윤동주는 일제에의 저항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문익환·김흥규 제씨의 글들에서 이러한 통념은 조금씩 수정되기 시작했고, 오세영 교수의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인가?>(≪文學思想≫ 1976. 4)에서 이는 어느 정도 본격적인 수정이 가해진 느낌이며 필자의 생각 역시 전자보다는 후자에 믿음을 두고 있다.
▦ 시는 그의 짧은 생애의 지순한 반려자
여타의 시를 제외하고 윤동주의 <序詩>를 논의할 때는 <서시>의 구조 분석을 하기 전에 <서시>가 가즌 성격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서시란 대체로 시집이나 장시의 머리 부분에 실려서 후속시들의 성격을 예시해 주는 기능을 가진다. 서시는 또한 여타의 시작(詩作)과는 달리 시인 자신의 특별한 배려와 의도에서 씌어진다. 시인에 있어서 서시가 씌어지는 선후의 순서는 서시가 먼저 씌어질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다른 시들이 먼저 씌어질 경우가 많다. 윤동주의 <서시>가 씌어진 연대는 1941년 11월로,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시집을 내려고 모았던 19편의 시의 맨 마지막에 씌어진 점과, 서시를 쓰고자 했던 시인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을 것임을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序詩>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라는 시집의 서시이다. 이것은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하늘, 바람, 별과 같은 자연물을 주요 대상으로 노래한 시들이라는 뜻인 바, 이같은 자연물을 노래한 시편들의 서시라는 뜻인 것이다. 시집 속에 있는 시행들에서 이같은 자연물을 노래한 시행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이 펼치고 파아란 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自畵像> 2연
단풍잎이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 가지 우에 이 펼쳐져 있다. 가만히 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아란 물감이 든다.
―<少年>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이 일고
―<새로운 길> 3연
손들어 표할 도 없는 나를
―<무서운 時間>3연
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바람이 불어> 1, 2연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눈 감고 간다> 1연
하나에 追憶과
하나에 사랑과
하나에 쓸쓸함과
하나에 憧憬과
하나에 詩와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 헤는 밤> 5연
이런 점에서 윤동주의 시는 늘 자연과 인사(人事)가 교직되어 나타나며, 자연은 전경(前景)이 되고 인사는 주지(主旨)가 되는 것이다. 늘 그를 옥죄고 있는 현실이 그의 감수성을 인사와 멀리 있지 못하게 했으면서도 현실이나 인사가 그를 옥죄는 만큼 그는 자연을 찾고 구가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개나리, 진달래, 앉은뱅이, 라일락, 민들레, 찔레, 복사, 들장미, 해당화, 모란, 릴리, 창포, 튜울립, 카네이션, 봉선화, 백일홍, 채송화, 다알리아, 해바라기, 코스모스―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여기에 푸른 하늘이 높아지고 빨간, 노란 단풍이 꽃에 못지 않게 가지마다 물들었다가 귀또리 울음이 끊어짐과 함께 단풍의 세계가 무너지고 그 위에 하룻밤 사시에 소복이 흰 눈이 내려 쌓이고(쌓이고)……
<花園에 꽃이 핀다>
몇 편 안 되는 윤동주의 산물 가운데의 하나인 이같은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현실적인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자연을 찾고 그것에서 위안을 받았던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런 만큼 하늘, 바람, 별, 시는 그의 짧은 생애의 지순한 반려가 되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서시>에 나타나 있는 '죽는 날까지 우러른 하늘', '잎새에 이는 바람', '바람에 스치우는 별' 들은 그러므로 먼저 씌어진 시들의 정신과 소재들을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자아성찰·대타의식·자아성찰·현식의식적 구조
윤동주 시의 전반적인 논의가 많았던 만큼 <서시>에 대한 논의도 적지 않다. <서시>에 대한 논의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홍희표·최동호·이동순·노대규·이승훈 제씨의 글이다.
이 가운데서도 홍희표·최동호·이동순 씨의 글은 사회적 배경과 관련한 의미론적 측면에서 <서시>의 성격을 규명하려 한 것이고 노대규의 글은 통사적 문맥과 언어의 기능 및 시의 의미론적 해명에 힘을 기울인 것이며 이승훈씨의 글은 구조적 측면에서 이 시를 분석한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선행의 논의들을 수요하면서 <서시>의 구조적 분석을 시도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전문
형식상 이 시는 전 2연 9행의 단형시이다. 2연 9행의 시는 자유시의 형식 가운데서는 지극히 짧은 것이다. 그만큼 이 시는 내용과 정신이 압축된 형식이다. 각 행을 이루는 음절 수도 많은 행은 14, 적은 행은 6음절 구성이다. 문장을 이루는 필요 불가결한 조사나 어미 외에는 불필요한 수식어나 용언들을 극도로 생략해서 어떤 어휘의 가감참삭도 이 시에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우리 시가에 있어 가장 단형(短形)인 평시조의 한 행(한 章)이 14음절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보면 이 시의 각 행들은 모두 시조의 음절 수보다 더욱 짧고 압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윤동주의 다른 시들도 대체로 짧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 시는 그런 점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것이고, 또한 그것은 윤동주의 생애나 성격 만큼 연결성에 이바지한 시이기도 하다.
이 시는 표기상으로 보면 1연이 8행, 2연이 1행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의미상으로 보면 몇 개의 연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기왕의 글들이 그러한 구부을 시도한 바 있는데, 홍희표는 1·2행을 1단락으로, 3·4행을 2단락으로, 5·6·7행을 3단락으로, 9행을 4단락으로 나누었고, 이동순은 1·2·3·4행을 1단락으로, 5·6·7행을 2단락으로, 9행을 3단락으로 나누었으며, 노대규는 1·2행을 1단락으로, 3·4행을 2단락으로, 5·6을 3단락으로, 7·8행을 4단락으로, 9행을 5단락으로 나누었고, 이승훈은 1·2·3·4행을 1단락으로, 5·6·7·8행을 2단락으로, 9행을 3단락으로 나누었다.
서정시의 형식을 이같이 나눌 때에는 때로 통사 관계와 의미적인 문맥 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통사론적·의미론적 양면에서 가장 문난한 처리를 하기 위해서 이 시는 1·2·3·4행을 1단락으로, 5·6·7·8행을 2단락으로, 9행을 3단락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이 시는 [1·2·3·4] [5·6·7·8] [9] 단락으로 3분된 가지런한 형식을 갖춘 서정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 시의 원래의 표기상 마침표(.)의 자리로 헤아려 보아도 마찬가지여서, 이 시의 마침표는 4행 말, 8행말, 9행 말에 와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지향하는 시인 자신의 의도는(앞에서 필자는, 서시란 시인의 특별한 의도와 배려에서 씌어질 수 잇는 것이라 했다) 의미론적 측면에서 도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므로 의미의 흐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의 흐름을 보면 1·2·3·4행은 동일한 흐름을 유지한다. 다만 2행의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음에 일상 담화의 형식으로 '바랐기 때문에'라는 설명이 첨가되어야 하지만, 시의 정제와 압축을 위해서 이것을 빠진 것이다. 다음에는 5·6행이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고, 7·8행은 5·6행과는 구별되어 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의미상으로는 5·6행과 7·8행이 구별되어야 한다. 9행은 표기상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으므로 논외의 것이 되어 이 시는 의미상으로 1·2·3·4행 1단락, 5·6행 2단락, 7·8행 3단락, 9행 4단락의 시가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1단락에서는 도덕적 완성에 도달하려는 시인의 의지와 결백성, 2단락에서는 박애와 순수한 사랑, 3단락에서는 분수에 맞는 삶과 책임 및 실천 의지, 4단락에서는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과 희망 및 염원의 정신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승훈 교수의 말대로 1·2·3·4행이 시제상으로 과거를 나타내고, 5·6·7·8행이 미래를 나타내며, 9행이 현재를 나타낸다 할 때 5·6행과 7·8행을 별도의 단락으로 구분한다 해도 시제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도입 부분이 과거에의 성찰로 이루어지고 전개 부분이 미래에의 염원과 시인의 의지를 천명하여 결말 부분이 현실의 인식과 희망을 포괄시킨다 함은 논리적으로도 파탄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의 흐름은 시인의 내적 성찰에 있어서는 갈등과 화해의 2중구조를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시제에서 보여준 흐름의 논리성이 여기서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1·2·3·4행의 1단락이 주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갈등을 노래하는가 하면, 5·6행의 2단락은 주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화해를 노래하고, 7·8행의 3단락에서 또한 화해를 노래하다가 9행의 4단락에서 다시 갈등을 노래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갈등:화해, 화해:갈등의 내적 성찰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시대적 현실의 위협과 평안과 안정과 순수를 지향하고자 하는 내적 정서와 욕구의 뒤채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 양자가 서로 위화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작품을 볼 때는 언제나 등호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어야 하며 이 두 가지의 등호가 갈등과 화해를 함께 보이고 상충과 합일을 함께 지닌다. 앨런 던데스에 의하면, 결핍 청산(Lack Liquidate)은 결비(Lack) 때문에 있는 것이며, 위반(violence)은 금지(Interdict)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소쉬르에 있어서도, 구조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언어는 다른 사물과의 대립성을 전제로 획득된다. 따라서 윤동주의 <서시>가 갈등과 화해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시인의 의식이 충족과 안정 속에 파묻혀 버림이 아니라 대상이나 현실과 내적 희원과 소망이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화해와 갈등 구조는 자아 의식과 대타 의식의 대립 구조로도 나타난다. 1·2·3·4행의 1단락은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희원하는 자아 의식과 성찰을 보여 주는 것이고, 5·6행의 2단락은 시인을 둘러싼 주위의 모든 죽어가는 것, 소멸되어 가는 것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대타 의식을 보여 주는 곳이며, 7·8행의 3단락은, 다시 시인 스스로의 걸어가야 할 길을 묻고 확인하는 자아성찰을 보여 주고, 9행인 4단락은 더욱 확대된 우주 공간과 자연 그리고 현실의 불안정함을 암시하고 있어 대타 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된다.
▦ 신앙적 경건성, 기도하는 자세를 표현한 시
시에 있어서의 구조의 논의는 항상 표면적인 얼개만 살핌으로써 조밀하고 섬세한 시의 맛을 놓쳐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시가 그러한 통사적 문맥 안에서 그러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어도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우며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평가와 수용의 문제에 있어서는 늘 헛점을 남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의 구조 논의의 전형이 되고 있는 야콥슨과 레비스트로스의 <보들레르의 '고양이' Charesl Baudelaires 'Les Chats'>라는 논문은 나중에 미셀 리파테르로부터 원시(原詩)와는 관계 없는 야콥슨, 레비스트로스식의 자의적 해설과 원시에 상응하는 몇 개의 조직을 대치시켰을 뿐, 원시의 이해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기는 하지만, 그 시의 구조 논의에다 섬세한 언, 음성학적 의미와 자질을 규명한 것은 야콥슨의 덕택인 것이다. 그러니까 시의 논의는 구조의 논의에다 부가적으로 언어학적 의미론적 논의가 병행되어야만 서정시의 디테일의 면모와 아름다움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서시>가 구조적으로 위와 같은 것이라 해도 이 시의 아름다움과 시인의 결이 고운 정서는 다 이해되지 못했다. 이 시의 아름다움과 정서의 결을 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지면이 필요해지겠지만, 필자는 이 시의 의취(意趣)를 요약해서 삶의 시간과 기도의 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시의 첫 행 '죽는 날까지'는 죽은 후의 명부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부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 한 그것은 삶의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행의 '잎새에 이는 바람' 역시 살아 있음의 시간 혹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죽음의 세계는 움직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7·8행의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걷는다'는 것도 삶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기 때문에 주어진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며 마지막 행의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것 역시 살아 움직임의 다른 표현이다. 별이 반짝이는 것도 바람이 사물을 스치며 지나가는 것도 모두 살아 있음의 표출이며 심상으로는 동적인 심상인 것이다.
또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르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것은 깊은 믿음을 가진 신앙적 경건성, 혹은 기도하는 자세를 표현한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함은 무엇인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모든 혼탁함을 씻어낸 맑고 고운 마음을 뜻하는 것일 터이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함은 그러한 정결한 마음으로 볼행한 것, 억압 받는 것, 사라져 가는 대상들을 사랑해야겠다는 스스로의 다짐과 기도인 것이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것은 분수에 맞는 삶과 고행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것이 분수에 맞는 삶과 고행 의지의 천명인 만큼 그것은 신앙적 자세이고 기도하는 자세일 수밖에 없다. 윤동주의 시는 늘 고행이나 괴로움에서 나온 것임은 그가 쓴 다음의 산문이 말해주는 것이며, 기도하는 자세는 <十字架>라는 시의 다음과 같은 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해 동안을 두뇌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일일이 헤아려 세포 사이마다 간직해 두어서야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글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봄바람의 고민에 짜들고, 녹음의 권태에 시들고, 가을 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의 사색에 졸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나의 일년은 이루어집니다. -<花園에 꽃이 핀다>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스물아홉 해라는 짧은 생애를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간 그의 시는 우리에게 영원한 향수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고 '윤동주'라고 부르기조차 애절한 못다 핀 한 송이 꽃으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오래오래 피어 있을 것이다.
3. '한국 현대시 작품론'(1990, 책임 편집 김용직·박철희, 도서출판 문장)에서
尹東柱의 '序詩' - 별과 죽음의 변용
홍희표(洪禧杓)
(중략)
윤동주의 '序詩'는 그가 연희 전문 졸업을 1개월 앞두고(1941년)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시인 만큼 윤동주의 시 세계를 가장 단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욕됨과 미움, 부끄럼과 사랑, 죽음과 삶을 신비적으로 교접시키면서 삶 속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또한 민족의 아픈 자화상을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끌어 내어 그것을 홀로 들여다 보고 있다.
이 '序詩'는 2연의 시이나 다음과 같이 의미를 4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연 1행∼2행은 결백하고자 하는 진실의 선언이며, 3행∼4행은 욕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적 고뇌, 5행∼8행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찾아 떠나고 싶은 갈구, 2연은 아픈 자기 성찰로 발전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던"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한 결백한 양심의 선언이, 이 '序詩'의 주제로 부각된다.
특히 '序詩'에서 별과 부끄럼과 죽음이 주요 모티브가 된다. 이런 죽음의 변용이 사랑으로 표명되어 이루어진다. 윤동주의 시에서 별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序詩'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序詩'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헤는 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 '별 헤는 밤'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 '눈 감고 산다'
별의 이미지는 몇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별처럼 멀리 있는 육신의 고향, 북간도의 이국 정서와 단풍잎 같은 동심적 정서가 결합되어 별로 나타난다. 이런 자연 묘사의 수법을 통해 과거의 자아를 회상하는 매개체로서의 별이다. 둘째로 신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나타난다. 이 때 별은 '순수한 마음'을 뜻하고, 또한 영혼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혼의 표상으로 제시된다.
다른 시점에서 김현은 윤동주 미학의 주축으로 '부끄러움'을 본질로 파악한다. 그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기 혼자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아픈 자각의 표현이라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여성 이미지인 부끄러움은 조국에 대한 역사적 민족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송구스러움·죄책감 등으로 또한 심화되기도 한다.
윤동주의 시 세계를 저항과 항거의 격전장으로 파악하는 주장(백철, 김현승, 홍기삼)과 좌절당한 젊은 지성인의 유희 공간(이유식, 김열규)로 이해하려는 주장으로 크게 양분되어 왔다.
그러나 비극적 상황에서 릴케적 사유로 삶과 죽음을 변용, 삶 속의 죽음을 황홀하게 노래한 윤동주의 시적 노력에 앞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序詩'에서 노래한, 겸손한 의지와 신념으로 현실적 자아를 떠나 이상적 자아를 찾기 위한 결백한 양심 선언은 불안과 고독에서 헤매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것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宇宙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世界가 있고―履霜而堅氷至―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임을 각오하라가 아니라, 우리는 서리발에 끼친 落葉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윤동주의 산문 '花園에 꽃이 핀다'의 한 부분이다. 낙엽을 밟으면서 봄이 올 것을 굳게 믿듯 그는 비극적 상황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속죄양 의식으로 자기 희생을 별처럼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4. '한국 대표시 평설'(1993, 정한모·김재홍 편저, 문학세계사)에서
창조적 진화의 꿈과 삶의 정직성
이동순(李東洵)
윤동주의 '序詩'는 그의 많지 않은 시편들 중에서 가히 절창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해방 후에 출판된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맨 첫 작품인 이 시는 1941년 11월 20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1941년은 윤동주가 연희 전문의 졸업을 앞두고 확실한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해로서, 이 때 그의 나이는 만 24세였다. '별 헤는 밤', '肝' 등이 이 무렵의 작품으로서 敵地에서 옥사당한 45년 2월과는 약 3년 3개월 간의 相距가 있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유독 '序詩'를 절창으로 떠올리는 것은 자아와 세계와의 격렬한 고투 속에서 이 시가 생겨났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윤동주의 정신적 지반을 형성하고 있었던 생철학적 세계관이 철저하게 형상화됨으로써 삶의 일상적 한계성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상적 한계성의 극복은 2연 9행에 불과한 '序詩'가 영원한 '序詩'로서 자격을 갖추기에 충분한 여건을 제공해 준다.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최대의 힘은 '序詩'가 '시점(始點)의 정신'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에 관한 단 한 줄의 아포리즘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의 시를 통하여 선험적 시관을 확고하게 보여준다. '序詩'에서 그가 짓는 표정의 엄숙함은 삶의 도덕적 진보, 혹은 그것의 완성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중에게 있어서의 삶이란 존재의 물질적 삶이 아니라 창조적 진화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한 삶은 영원의 삶이며, 生과 死의 명확한 구분을 혀용하지 않는 삶이다. 또한 이 삶은 시인적 삶의 절대적인 지향이기도 했다. 일제 하의 식민지를 살아 가던 윤동주의 상황 의식은 처절하고 암담한 어둠의 빛깔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어둠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胚胎)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 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위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焦點인 듯 憔悴하다.
― 산문 '별똥 떨어진 데'에서
이 어둠의 인식은 시인 윤동주가 개인의 창조적 진화를 꿈꾸는 기반이 된다. 윤동주는 어둠을 현상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며 멀리 봄이 올 것'을 분명한 진실의 약속으로 믿고 있다. 봄의 도래를 확신할 때 세속적인 삶은 시인에게 있어서 하등의 의의를 지니지 않게 된다. 곧 육신의 종말이라는 물리적인 두려움에도 전혀 개의하지 않으며 시인에게 주어진 진정한 길인 영원한 정신의 출범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둠에서의 일탈이라는 강력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항상 모든 행위의 발단과 詩作의 의미를 '始點의 정신'에다 두고 있을 때만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終點이 始點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 나는 종점을 시저으로 바꾼다. 내가 내린 곳이 나의 종점이요, 내가 타는 곳이 나의 시점이 되는 까닭이다. ……이제 나는 곧 終始를 바꿔 타야 한다.
― 산문 '終始'에서
시점과 종점이 끝없이 교차와 순환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시인은 식민지인의 고뇌에 찬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의 내면적 갈등과 한계성을 향하여 과감한 결별을 선언한다. 비록 윤동주의 관심이 삶의 도덕적 완성에 기울어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염원하는 삶은 육신의 차원을 완성에 뛰어넘는 形而上의 세계로 열려진 것이었다. 이 始點의 정신에서 윤동주는 자신의 창조적 진화의 꿈을 가능하게 해 주는 동력소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인 삶의 비약을 목표로 하는 이 始點의 시학은 베르그송의 생철학적인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하다. 인간이 산다는 것,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변화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인간의 변화는 무질서와 맹목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일정한 방향에로의 성장과 성숙을 의미한다. 이 성장의 지속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를 부단히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은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 atrice)의 과정이며 또한 그것의 연속적인 진전이다. 윤동주에게 있어서의 자아의 지속은 사회적 자아에 있기보다 오로지 지속 그 자체만을 본질로 하는 근원적 자아에다 행위의 중심(un centre d'action)을 두고 있다. 그는 인간의 기본성에 충실하려 하였고, 그 충실의 방법을 시 정신의 확립에 두었다. 그러므로 그의 시법은 사물의 진상을 내적으로 직접 체험하고 단적인 파악을 시도하는 直觀(intuiotion)의 정신으로 통일된 것이었다. 그의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대부분 이러한 베르그송적인 직관의 정신에다 토대를 두고 있다면, '序詩'의 세계는 특히 직관의 강력한 긴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 진화의 지속을 꿈꾸는 윤동주의 근원적 자아는 표면적 사회적 자아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기독교의 가정에서 성장한 윤동주의 신에 의하여 신을 통하여 신적인 사랑을 가지고 전 인류를 사랑하는 인류에의 도덕, 즉 영원히 창조적인 사랑의 躍進力에 깊이 감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전통 세력을 뿌리조차 와해시키려는 외래 식민 세력의 정치적 폭력을 경험하면서, 공간 세계로 관심의 촉수를 가만히 내보내고 있는 그의 사회적 자아는 무력한 좌절감만 거듭 맛보게 된다. 그의 꿈은 戰意를 가지고 인간이 서로 대립하는 닫힌 사회가 하루 바삐 물러가고 서로 사랑하는 열린 사회가 도래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의 주권을 죽인 자리에 다른 하나의 부조리한 政體가 수립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마침내 윤동주의 근원적 자아의 꿈은 갈등하는 사회적 자아(식민지인)로 말미암아 화해로운 관계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두 자아의 불화는 그의 시 작품에서 '부끄러움'의 의식으로도 나타나고 정처 없는 지향 의식으로도 나타난다. 윤동주의 시 정신은 앞에서의 始點의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인간의 생활과 유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관을 암시하게 해 주는 중요한 산문 '終點'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 것은 한낱 오락이요, 오락임에 생활이 될 수 없고, 생활이 없음에 이 또한 죽음 공부가 아니랴. 공부도 생활화하여야 되리라 생각하고 불일 내에 문안으로 들어가기를 내심 단정해 버렸다.
여기에서 '道'와 '공부'를 문학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과 생활에서 유리된 문학은 올바른 문학이 아니며, 문학과 생활의 관계가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일체성의 파악임을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다. 생활에서 유리된 문학의 습작기를 벗어난 윤동주는 문학이 생활과의 끈끈한 교호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소산임을 자각하고, 아예 생활 속으로 온몸을 투척한다. 그러한 윤동주의 몰입은 삶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민중적 고뇌와의 연대감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서, 보다 철저하게 식민지인으로서의 괴로움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시인의 삶은 우선 정직성의 시험을 내면적으로 요구받게 되었고,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죄악의 결여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의 시의 도처에서 나타나는 괴로움의 표정은 바로 자아와 세계 간의 격력한 고투에서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비교적 소품으로 구성된 '序詩'의 도입부도 수치와 고뇌의 팽팽한 긴장으로 전개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序詩'를 구성상 모두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면, 첫째 단락은 4행까지가 된다. 2행까지의 仰天不愧하려는 심정은 도덕적 결백성을 지향하는 일상적 신념의 드러냄이다. '한 점'이라는 강조어를 '부끄럼' 앞에 놓아 둠으로써 최소한의 실수는 물론 사소한 흩어짐마저 스스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스토익한 정신적 결의의 표명이다. '한 점 부끄럼'은 3행에서의 '잎새에 이는 바람'과 이미지의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도덕률의 세계이다. 여기에서 하늘과 바람의 이미지는 절대자의 영역이고 부끄럼과 괴로움은 세속적 인간의 관습이다. 삶의 도덕적 완성(생의 비약)을 염원하며 지조를 지켜 가려는 시인의 의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5행부터 8행까지가 이 시의 둘째 단락이 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5행의 이미지를 '신앙적 경건함'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반드시 하나의 해석에만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왜냐 하면 '별'이라는 시어의 類語(synonym)로써 우선 가능한 보기만도 詩心, 순수, 용기, 영원, 희망, 빛, 유구한 정신, 불변의 가치 등등 워낙 다각적으로 추출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불변의 가치를 기리는 인간 감정의 恒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둘째 단락은 얼핏 7행의 '그리고'라는 병렬 부사를 앞뒤로 또다시 분리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심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려는 삶의 윤리적 자세와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도덕적 결의는 실상 동일한 것이다. 시인이 걸어가려는 길은 곧 사랑의 길이며, 민족적 아픔에의 동참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해야지'와 '―겠다'와 같은 확신과 의도를 나타내는 종결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단락으로 뭉쳐짐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단락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은 시인이 성취하고자 하는 창조적 진화의 연속성에 있을 것이다. 우주 안에서의 온갖 형태의 피조물, 즉 하늘, 바람, 별, 모든 죽어가는 것,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나'는 함께 지속해 가는 공동체인 것이다. 윤동주는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序詩'에서 자신이 염원하는 삶의 비약과 포부를 이처럼 우주적 교감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곧 철학적 직관과 단순성의 세계이며, 이러한 세계를 가능하게 하였던 사물 파악의 정직성은 그가 애독한 프랑시스 쟘의 우주적 경건과 진솔성에 힘입은 바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8행은 단일한 서술어(clause)를 하나의 행(line)으로 처리함으로써 놀라움의 共鳴을 느끼게 해 준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8행을 하나의 스탠자로 묶어 놓은 다음에 바로 한 행으로 이 시를 마무리짓고 있는데, 2연은 하나의 행이 하나의 독립된 聯(stanza)의 몫을 충분히 해 내고 있는 경우를 보여 준다. 윤동주는 진작 그의 시대를 어둠의 역사로 규정한 바 있었지만, '오늘 밤'은 바로 식민지 상황을 암시한 말일 수도 있다. 恒心이 어둠의 역사에서 괴로운 시련을 당하고 있지만 극복의 의지를 잃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욕의 역사는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지만, 주어진 시인의 사명을 엄숙하게 완수해 가면, 밝음도 있을 것이고, '모든 죽어 가는 것'들도 소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스스로 굳게 가진다. 이 시의 가장 핵심 부분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의 지속이다. 시집의 서문에서 老子 五千言을 비유하면서 윤동주의 기질이 일견 '허약해 보이지만 그 心氣는 오히려 강렬한 것(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이라 말한 芝溶의 지적은 적절하다. 윤동주가 지향했던 창조적 진화의 꿈은 근원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와의 갈등을 경험하면서도 현실에서의 조화로운 공감을 애타게 그리워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미리 알고 있던 윤동주는 그의 시 세계를 통하여 삶의 비약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삶은 육신의 삶을 포기했을 때만 이룩될 수 있는 뜨겁고 유구한 정신의 삶이었다. 이러한 윤동주의 '序詩'는 오늘날 한국인의 현대 시문학사에서 이제 '영원한 序詩'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