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리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송촌동, 남쪽은 오정동, 서쪽은 대화동, 북쪽으로는 법동과 인접하고 있다. 중리동은 계족산 동남쪽에 있는 제2봉인 응봉산의 서쪽의 구릉성 야산에 형성된 촌락들이 있었던 마을이었다. 응봉산 계곡 뒤에서 발원한 샘은 윗중리 뒤로 흘러 법동천을 이루었고, 응봉산 계곡 앞에서 발원한 오정천은 윗중리를 지나 오정동 양지말에서 유등천과 합수하였다. 이처럼 중리동 지역은 과거 1970년대까지도 응봉산 서쪽의 구릉성 야산지역은 대부분 밭으로 이루어졌고, 그 아래 오정천을 따라 발달한 넓은 지역은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구봉산 지역은 현재 노인정·어린이 놀이터·약수터·기타의 주민 휴식시설 등이 갖추어진 근린생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과거의 농경지이었던 평지지역은 현재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해 도시화되어 오정동과 함께 대덕구의 중심이 되었다.
현재 중리는 도시화되어 동대전고등학교·용전중학교·중리중학교·중원초등학교 등의 학교가 있다. 특히 인근 송촌동과 법동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된 것과는 반대로 중리는 영진로얄아파트 단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단독주택단지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도시개발로 현재의 중리동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불가능하다.
중리동의 옛 모습의 일단은 조선 효종 때 문신 송애 김경여의 별당인 송애당과 세종 때 학자 쌍청당 송유의 별당인 쌍청당이 있다. 쌍청당은 수 차례 걸쳐 중수되었으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로서 대전지역에서 남아있는 목조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외에도 열부 고흥류씨 정려각·비와 삼강려 암각 등이 있다. 이처럼 유적과 유물들에서 중리동의 전통문화를 찾아 볼 수 있다.
현재의 토지 이용은 총 1,515,789㎡ 전(田)이 14,765㎡로 1%, 답(畓)이 6,707㎡로 0.4%, 임야가 63,546㎡로 4%, 대지가 764,003㎡로 50%, 도로가 393,971㎡로 26%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리동 완전 도시화한 지역으로 토지의 대부분이 대지와 도로로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중리동의 연혁
중리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에 군·현의 개편시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초기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 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의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현재의 중리동은 회덕현 내남면에 속하여 있었음을 볼 때 조선중기에 이미 중리(中里)라는 행정구역과 지명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실시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에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중리동도 회덕군 내남면 중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중리동은 봉동·중리·오정리·상오리·법동 각 일부를 합하여 대전군 내남면 중리로 개편되었다. 1931년에는 대전군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대전군 1읍 11개 면으로 되었고, 1935년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는데, 이때 중리동은 대덕군 내남면 중리가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대전시의 영역확대에 따라 중리동은 대전시 동구에 소속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중리동은 대덕구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중리동은 행정동이면서 법정동이다.
◎ 중리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건넌말(건너마을) : 중리취수장에서 북서쪽으로 바로 앞에 있는 마을이다. 아랫송촌과 건넛말 사이에는 들이 있고, 이 들 가운데는 두 마을을 경계하는 개울이 있는데 아랫송촌에서 보면 남쪽으로 개울건너에 마을이 있어 이를 건너마을 또는 건넌말이라고 부른다.
○ 뒷말(됨말, 낡은터, 상오리) : 한남대와 한촌 사이로, 현재 한남대 뒤편의 한밭대로 부근에 있던 마을이다. 한남대 북쪽에 있는 산 뒤에 마을이 있다해서 이를 뒷말 또는 됨말, 돔말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곳에서 중국사람이 살았다하여 이를 날근터라고도 부르며, 또한 풍수지리상으로 지세가 세한 터라 낡은터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행정구역이 오정리의 상부에 위치한다 하여 상오리(上梧里)라 부르기도 한다.
○ 아랫송촌(윗중리, 하송촌, 상중리) : 윗송촌에서 서쪽, 그린타운아파트와 취수장 사이에 있다. 윗송촌에서 서쪽 아래에 마을이 있어 이를 아랫송촌이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하송촌(下宋村)이 된다. 중리에서는 이 마을이 위쪽에 있어 윗중리, 상중리(上中里)라고 한다. 또 이 마을이 백달산 아래에 위치하여 백달촌이라 한다. 이 마을은 쌍청당 송유의 후손들이 계속 살아오고 있다.
아랫송촌이 도시구획정리로 인하여 택지로 개발되기 이전에는 약 60여 호가 거주하였는데 그 가운데 은진송씨가 대성으로 많았으며, 경주김씨도 7∼8호 거주하였다.
○ 한촌(대촌) : 한남대에서 북쪽으로, 지금의 주공아파트 1단지 앞 부근의 일대가 한촌이다. 옛날에 청주한씨들이 이곳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하여 이를 한촌(韓村)이라 부르고, 마을이 크다고 해서 대촌(大村)이라고도 한다. 한촌에 세거한 청주한씨들은 한수성의 후손들로 한수성이 한촌에 입향하게 된 계기는 한수성의 처가 진주강씨로 회덕에 입향하였던 강문한의 딸로 처향을 따라 입향한 경우이다. 한촌은 청주한씨들의 집성촌으로 번창할 때는 약 100호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 한촌에는 한씨들의 99칸 집이 있었으나 동학란으로 소실되었고, 이때 한씨들도 인접지역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한다. 옛날의 한촌은 1982년도 택지개발로 현재는 단독주택단지로 변하여 더 이상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 중리동의 세거성씨
○ 경주김씨(慶州金氏) : 경주김씨는 김광유가 회덕 송촌동에 세거 성씨이었던 은진 송남수의 사위가 되어 백달촌(중리동)에 살게 되면서 중리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입향 시기는 김광유의 생년이 1571(선조4)이었고 몰년이 1596년(선조29)이었던 것으로 보아 16세기말이었다. 김광유의 아들 김경여는 문과에 급제하여 인조 때 부제학이었고, 김경여의 증손 김정운은 군수에 이르렀으며, 김성운은 감사를 지내는 등 자손이 번창하였다.
○ 청주한씨(淸州韓氏) : 청주한씨가 회덕의 중리지역에 입향한 것은 청주한씨 장도공의 후손이었던 16세 한수성에서 부터이다. 입향하게된 동기는 한수성의 처가 진주강씨 강문한의 딸로 처향을 따라 입향하게 되었다. 정확한 입향 년대는 알 수 없으나 강문한의 출생년이 1464년(세종 10)이고 몰년이 1547년(명종2)이었던 것으로 보아 15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회덕에 입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입향 전 세거지는 부친 위(偉)의 묘가 경기도 과천 선영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아닐까 한다. 입향 이후 족세가 번성하여 이들이 세거하였던 곳을 한촌(韓村)이라 하였고, 이 마을이 커서 대촌(大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동학난 이전에는 한씨들의 99칸 집이 있었으나 동학 난으로 소실되었고, 1982년 택지개발지구로 개발되기 이전에는 한촌에 약 100호 정도가 세거하였다. 회덕의 중리지역에서 분촌하여 옥천·영동·구즉·신탄진 등으로 분촌하였다.
◎ 중리동의 옛 지명
● 건넌말(건너마을) [마을] : 중리취수장에서 북서쪽으로, 바로 앞에 있는 마을이다. 아랫송촌과 건넛말 사이에는 들이 있고, 이 들 가운데는 두 마을을 경계하는 개울이 있었다. 따라서 아랫송촌에서 보면 남쪽 개울건너에 마을이 있으므로 이를 건넛마을, 또는 건넌말이라고 불렀다.
● 구렛논 [들] : 윗송촌(송촌)과 아랫송촌(중리) 사이에 있는 들을 말하는데, 지금은 토지구획정리로 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 구봉산(九峯山) [산] : 중원초등학교에서 남쪽, 중리동사무소에서 북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9개가 있어 이를 구봉산이라 부른다. 이 구봉산 부근이 옛날에는 들이었으나, 현재는 도시개발로 많은 주택이 들어서 있고 산등성에는 근린생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노인정, 약수터, 어린이 놀이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 구봉약수터 [약수] : 구봉산에 약수터가 있는데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약수가 아니고 지하수로서 인근주민들이 사용 할 수 있도록 시설해 놓았다.
● 뒷말(됨말, 날근터, 상오리) [마을] : 한남대 북쪽과 한촌사이에 있다. 한남대 북쪽으로 산이 있는데 산 뒤에 마을이 있다 하여 뒷말, 됨말, 돔말이라고 부르며, 옛날에 중국사람이 살던 곳이라 하여 날근터라고도 부른다, 또 오정리의 위쪽에 위치하여 상오리라 부르기도 한다.
● 삼강려바위 [바위] : 고흥유씨 정려각에서 남쪽, 버스종점에서 송촌입구 쪽에 있는 큰바위에 "상하송촌리 삼강려"란 글자를 크게 새겨 놓았다. 이는 송촌이 삼강려 마을로 충신, 효자, 열부 3개의 정려를 나라에서 내린 마을이라는 표식이다.
● 소리고개(솔고개, 소로고개, 성현) [고개] : 아랫송촌과 윗송촌 사이의 낮은 고개인데, 소나무가 많아서 솔고개라 하던 것이 변하여 소리고개, 소로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송촌에는 옛날에 벼슬 높은 문관과 학자들이 많이 살아서, 회덕현감이 부임하여 송촌을 찾아올 때, 이 고개에 이르면 소리를 그치고 조용히 왔다고 하여 소리고개라 하였다. 현재는 중리동, 법동의 경계인데, 이 고개에서 법동 쪽으로는 그린타운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중리동 쪽으로는 청소년수련관이 위치해 있다.
● 아랫송촌(윗중리, 하송촌, 상중리, 백달촌) [마을] : 윗송촌에서 서쪽, 양지초교와 중리취수장 사이로 윗송촌 아래에 마을이 있어 아랫송촌, 하송촌이라 불렀다. 중리에서는 이 마을이 위쪽에 있으므로 윗중리, 상중리라고 한다. 또 이 마을이 백달산 아래에 있어 백달촌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쌍청당, 송애당 부근이 된다.
● 한촌(韓村, 大村) [마을] : 지금의 한남대 북쪽, 주공아파트 1단지 앞쪽으로 영진로얄아파트 일대가 되며 옛날에 청주한씨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으므로 한촌이라 부른다. 또 100호 이상이 살던 큰 마을이라 해서 대촌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