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씨성이 태어난 원인과 시기 姜氏의 최초 성(姓)을 가진분은 지금으로부터 5200여년전 중국 섬서성(陜西省)에서 출생한 염제신농(炎帝神農)씨가 강수(姜水)라는 고장에서 성장하시어 제위(帝位)에 오르게 되었으며 성장한 고장의 이름을 따라 인류최초롤 성을 강씨(姜氏)라 하였다. 강수(姜水)는 현재 기서성 (岐西省)을 말한다. 2. 염제신농(炎帝神農)씨는 어떠한 분이신가? 인신우수(人身牛首) 몸체는 사람이며 머리는 소모양으로 뿔이 나셨다. 인류 최초로 쟁기를 발명하여 농사짓는법을 만들었고 백초를 입으로 맛보아 병을 고치는 의술을 가르쳤으며 시전을 설치하여 물물교환하는 장사법을 만드셨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매년 음력 4.26일을 ‘신농선제천추제사일’로 정하고 각 성(省)마다 사당을 모시고 성대하게 제사를 모시고 있다.
3.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의 후손들 염제신농씨의 후손들은 5200여년에 이르는 기간에 우리 강씨성 뿐만아니라 각 성(性)으로 분성(分性)되여 파생된 성씨만도 무려 270여 성씨에 달하고 있으며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의 강씨만이 유일하게 5200여년간을 강씨로서의 역사를 간직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곧은 낚시로 유명한 강태공(姜太公)은 어떠한 인물인가? 강태공은 염제신농씨의 후손으로 여상(呂尙) 또는 자아(子牙)라 하며 염제신농씨와의 연대 차이는 2007년으로 중국 강소성(江蘇省) 동해 바닷가에서 중국의 고대 폭군 은나라 주왕을 피하여 각처로 은둔생활을 하는 기간에 바늘도 없는 낚시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사색의 세월로 어진 임금이 나타날때만 기다렸다. 태공의 나이 72세 되던해 주나라 무왕을 만나 폭군 주왕를 쳐서 멸망시키고 통일중국을 성취시키니 주나라 무왕이 개국공신으로 산동성에 봉군(封君)하고 나라이름을 제(齊)나라라하였으며 태공으로부터 20대 강공(康公)까지 왕위를 계승하였다. 태공은 사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어 3남1녀를 두고 1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매년 음력 8.3일을 “강태공 천추제사일“로 정하고 성대하게 제사를 모시고 있다. 자녀중에 따님은 주나라 무왕의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강(姜)를 제비(帝妃:임금의 부인)가 된 성씨라하여 ‘제비 강’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날아다니는 제비란 뜻이 아니고 “왕비가 탄생한 성씨"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다.
5. 우리나라 강씨시조님은 누구이시며 어떠한 인물인가? 시조(始祖) 강이식(姜以式)은 540년경 중국인 예부랑(禮部郞) 문성(文星)의 아들이다. 수(隋)나라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을 때 정적의 모함으로 고구려에 귀화하여,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문제가 침략할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왕은 군신을 모아 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 할 때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이에 수긍하고 싸울것을 명하자 군사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할 때 중신회의에서 요동성 일부를 떼어주고 강화할것을 논의 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싸울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대파하는 등 공을 많이 세웠다. 이로 인하여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 되었다. 강장군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瀋陽縣) 원수림에 있으며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이란 큰비가 서 있다. 음력 4월 10일에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6. 우리 강씨가 언제 진주(晋州)로 관향(貫鄕)을 갖게 되었으며 족보는 언제부터 발간되기 시작하였나 우리나라 270여 성씨가 각각 본관이 없는 성씨는 하나도 없다. 각 성씨중에 글자가 같은 성씨일지라도 본관이 다르고 시조가 다른 성씨가 많이 있다.(예를들어 김해김씨, 경주김씨, 안동김씨 등) 우리 강씨는 단일본으로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님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본관은 진주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일부 후손들이 남하하여 진주 일대에 세거하였으며, 우리가 진주를 본관으로 쓰기 시작한 연대는 통일신라 시대 헌강왕 서기 870년대에 이르러 정순공 휘 진(晋) 선조께서 진양후(晋陽侯)로 봉해짐으로 인하여 본관이 진주로 통일된 것이다. 족보가 처음으로 발간된 것은 조선 숙종11년 서기 1685년에 이르러 박사공파에서 남한보(南漢譜)가 간행되었으며 다음으로 은열공파에서 그뒤를 이어 43년후인 조선 영조3년 서기 1727년에 정미보가 간행되었다. 박사공파에서 최초로 간행된 ‘남한보기사’에 보면 진주남강을 사이에 두고 강안쪽과 강밖으로 양파가 사는데 그한파는 박사공파요 한파는 은열공파라 기록되어 있고 은열공파에서 그다음으로 간행된 정미보에 백각이 쓴 서문을 보면 진주강씨가 2개파가 있으니 하나는 은열공파요 또하나는 박사공파란 기록이 나와있다. 우리 강씨 5개파(인헌, 은열, 관서, 박사, 소감)중에서 인헌공 강감찬파만이 본관을 금천으로 사용하고 있을뿐 그나머지 4개파는 진주로 본관을 통일사용하고 있다. ※ 이러한 강씨[姜氏]는 영남의 고도[古都] 진주[진양]지방에서 하씨[河氏] 정씨[鄭氏]와 더불어 진양 3성으로 일컬어 왔으며 전통적인 영남의 명문임을 자랑한다 7. 봉란대(鳳卵臺) 유래 강문의 구(舊)기택지가 있던 비봉산(원래는 大鳳山)이 이곳에 있으며 이 산밑에 봉곡촌이 있어 강씨 일족이 살았다. 이곳이 현재의 진주시 상봉서동이다. 진주의 별호(別號)는 청천, 진양, 진산, 진강이 있다. 고려 초기 정절공 강구만(姜九萬)이 대봉산 밑 봉곡촌에 살았는데 집뒤에 큰바위가 하나있고 그 바위위에 작은 바위가 마치 봉황새 모양같은 봉바위가 이었다. 강남도사가 지나다가 이것을 보고 ‘강씨가 대성(大盛)하는 것은 이 바위때문이라 했다.’ 그후 상서 홍의 형제가 모두 11명이 있는데 모두 경상의 자리에 있어 나라의 정권이 이 집안에 쏠리니 합문지후 이지원이 그세력을 꺼려 몰래 사람을 시켜 봉바위를 깨트리니 그 속에 박처럼 생긴 흰돌 4개가 있었고 철퇴로 이 흰돌을 깨트리니 피가 나왔다. 이런 일이 있은후 적신 척준경참소로 인해 홍(洪)의 형제를 포함하여 20여명이 화를 입게 되었고 간악한 무리들은 대봉산 정기로 강씨 집안이 다시 득세할 것을 두려워하여 대봉산을 비봉산(飛鳳山:봉이 날아갔다는 뜻)으로 고쳐 부르게 했고 또 봉지를 부지(釜池:봉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그러나 지나가던 도승이 ‘날아가는 봉황새는 알자리가 있으면 찾아온다’고 하여 봉의 알자리를 만들었는데 이곳이 봉란대이며 지금의 진주시 상봉서동이고 그후 후손이 이곳에 시조의 유허비를 세웠다.
8. 시조 원수공 이후로 5개파로 나누어진 내역 우리나라 어느 성씨를 막론하고 제각기 관향을 갖고 있으며 다같은 글자의 성씨이면서도 관향과 시조가 제각기 틀리는 성씨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김씨가 280여본, 이씨가 240여본, 박씨가 130여본 등 관향을 달리하여 쓰고 있으며 우리 강씨만은 강이식장군의 혈맥을 이어받아 단일본의 강씨로서 우리 대종찬(大宗贊)에 명시된 바와 같이 '천파일본(千派一本)이요. 만지동근(萬之同根)'인 자랑스런 강씨로 5천2백여년간 단일조상의 혈통을 이어내려온 후손들이다. 다음은 우리 강씨가 어느 년대에 각파로 분파 되었나를 알아보자 (가)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파 강감찬 장군을 인헌공 이라 호칭하며 강감찬 장군은 역사에도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인물로 고려(高麗)정종3년 서기 948년 금천(衿川)땅 (지금의 서울 관악구 신림동)낙성대에서 태어 나시었다. 강감찬 장군과 시조님과의 차이는 약 400년 이며 4백년 기간에 세계(世系)가 단절되어 시조님으로부터 몇대 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강감찬 장군의 후손들은 관향을 진주강씨로 쓰지 않고 금천강씨로 쓰고 있는데 이는 강감찬 장군과 5대조 강여청(姜餘淸)이 신라땅에서 살다가 북으로 올라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이후로 고려 태조로부터 관향을 별도로 하사(下賜)받아 금천강씨로 쓰게한 이후로 지금에도 강감찬 장군의 후손들은 시조 원수공의 후손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관향만은 금천강씨로 사용하고 있다. 시조님 이하 세수(世數)중절로 인하여 각파간의 소목(昭穆)을 댈 수 없으므로 만나면 서로 일가로 호칭하고 있다.
(나)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파 은열공은 강감찬 장군과 거의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강감찬 장군보다 15년후인 고려 광종(光宗)14년, 서기963년 진주시 옥봉(지금의 은렬사 자리)에서 태어 났으며 역사에 밝혀진 바와 같이 고려 현종(顯宗)때 북방 거란족이 40만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쳐들어 올 때 강감찬 장군이 상원수가 되고 姜民瞻 장군이 부원수가 되어 거란의 오랑캐를 격멸시킨 구주대첩(龜州大捷)의 주인공들이다. 세수 중절로 인하여 각파간에 소목(昭穆)을 댈 수 없는 것은 인헌공파와 마찬가지 이다.
(다) 박사공(博士公, 강계용(姜啓庸) 파 박사공 강계용(姜啓庸)은 고려 원종(元宗)때 인물로서 생졸(生卒)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고려 원종15년 1274년에 통신사(通信使) 서장관(書壯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기록이 족보에 명시되어 있고 시조 원수공과의 연대 차이는 약600여년간 세계(世系)가 중절되어 몇대가 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시조 원수공 이하로 박사공에 이르는600여년의 기간에 윗대 조상의 휘함(諱啣)을 족보에 기록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우리 강씨가 처음으로 진주강씨(晉州姜氏) 관향을 갖게 된 정순공(正順公) 강진(姜縉)선조도 박사공파가 선조로 모시고 있는 한 분이시다. 역시 세계(世系)중절 관계로 인하여 각파간에 소목을 댈 수 없으므로 계촌을 못하나 유일하게 소감공파 와는 계촌도 하고 수보(修譜)도 함께하는 동족간 이기도 하다.
(라 ) 소감공(少監公,강위용(姜渭庸)파 소감공 강위용은 역시 원수공의 후손으로서 박사공 강계용과는 형제지간이나 족보에 기록이 없어 친형제 간이나 또는 4촌, 6촌 간이 되는 지는 분명치 않고 먼일가가 아니고 가까운 형제지간 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소감공파 역시 세계중절로 인하여 다른파 자손들과 소목을 댈 수 없으며 박사공파 후손들과는 계촌도 하고 족보편수도 함께한다.
(마) 시중공(강원용(姜遠庸) 또는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 강원로姜元老)파 관서공(關西公)의 정확한 연대는 참고할 길이 없으나 관서공의 현손 문숙공(文肅公) 강득주(姜得珠)께서 고려 충열왕 서기1294년에 과거에 합격 했다는 족보의 기록을 살펴본다면 관서공은 서기 1200년대 인물이란 것을 대략 알 수 있다. 관서공파 역시 족보기록에 세수(世數)가 중절되어 다른파와 마찬가지로 소목을 댈 수 없다. ※ 박사공, 소감공, 시중공은 소목이 같아 계촌할 수 있어 형제항렬이고, 나머지 은열공, 인헌공은 박사공과 소감공과 같은 항렬이라도 계촌할 수 없고 먼친척도 아님 강이식 시조님과 고려 초 인헌공(감찬), 은열공(민첨) 사이에는 약 380여 년, 박사공(계용), 소감공(위용), 관서공(원로)과는 약 700여 년의 시대 차가 있다. 그러므로 위의 5개 파조가 강이식 시조님의 후손임은 틀림없지만 서로 계촌(系寸)을 될 수는 없기에 지금까지 족보를 각기 따로 발간하고 있다. 대표적 파는 박사공 삼형제파, 은열공파, 인헌공파인데, 각 파는 도시조 강이식으로부터 각 중시조(파시조)까지의 계보가 확실하지 않아 족보를 같이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중 박사공 삼형제파는 다시 박사공파, 소감공파, 시중공파로 구분되고, 최근에는 족보도 같이 만들고 있다. 3형제파가 진주강씨의 3대산맥으로 그 후손이 번성하여 1백만명을 헤아린다. 5개파가 파별로 형성 된 것을 대종회라 함.
※ 박사공파 아래 대장군공파, 봉성군파, 문경공파, 양희공파, 통정공파, 통계공파, 재신공파, 군수공파 등 8개의 소파가 있음 9. 진주연혁(晉州沿革) 진주는 본시 백제 거열성(居列城)이고 일명 거타(居陀)라 불렀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서기662년(신라 문무왕2년) 이곳에 주(州)를 두고 만흥산성(萬興山城)을 쌓고 진주라 불렀다. 그뒤 668년(신라문왕4년) 이곳에 청주총관(靑州總管)을 두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강주(康州)로 이름을 고쳤다가 경공왕때 다시 청주(靑州)라 불렀다. 고려 태조때 다시 강주(康州)로 고치고 983년(성종2년) 진주(晉州)로 개명하고 이곳에 목사(牧使)를 두었고 995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주정해군(晉州定海軍)이라 부르고 산남도(山南道)에 예속 시켰다. 1012년(현종3년) 안무사를 두었다가 다시 목사를 두어 고려 8목(八牧)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태조 때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고 태종때 다시 진주 로 고치고 세종때 진(鎭)을 설치하여 수백년 내려오다가 임진왜란후 1604년(선조37년) 병영을 이곳에 옮겨 절도사 겸 목사를 두고 1895년(고종32)관찰사영(觀察使營)을 두었다가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옮겨 가고 읍이 되었다가 1939년 부로 승격하여 현재의 진주시가 되었다.
10. 봉산사 연혁(鳳山祠 沿革) 봉산사는 시조 고구려병마도원수(高句麗兵馬都元師) 이식(以式)의 사당(祠堂)이다. 서기950년경 고려 광종때 이미 시조의 사당이 건립되었다는 구전(口傳)이 있었다. 연대별 봉산사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 1570년(선조3년) : 진주 봉곡촌에 사당을 건립 봉산사라 불렀다. ▲ 1593년(선조36년) :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 ▲ 1714년(숙종40년) : 대봉산밑 전역과 대봉산의 임야와 샘골 일대의 토 지를 종중재산으로 매입, 다시 대봉산 밑에 봉산사를 중건 ▲ 1802년(순조2년) : 화재로 손실 . ▲ 1911년(융희5년) : 봉서동(지금의 상봉서동 부근)에 대지를 마련하여 다시 봉산사를 중건하였으나 왜정의 탄압으로 사당이 퇴폐하였다. ▲ 1920년 : 사당터가 국유화되고 개인에게 넘어간 것을 다시 매입하여 1921년 새로 사당을 지었다. ▲ 1940년 : 왜정 말 토지수용령에 의해 사당을 봉지옆 옛날 봉암이 있던 자리로 이전. ▲ 1975년 : 전 종회장(宗會長) 계중(桂重)이 거액의 사업비를 희사하고 후손들이 힘을 모으고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정부의 지원을 받아 1983 년 12월 준공되어 오늘에 이름
강씨는 진주를 중심한 경남, 부산 지방에 가장 많이 살며, 그 다음이 전남, 경북, 전북 지방에서 많이 살고 있다. 진주시 비봉산 아래에 있는 봉곡부락에는 강씨의 번영의 설화를 담은 봉(鳳)바위가 있다. 대봉산 산중턱에 시조의 위업을 기리고 영정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봉산사(鳳山祠)가 있다.
참판공(위 안복) 직계 중 장남 이찬의 후손 거주 분포 현황(우리의 직계) - 경기도(광주, 의정부, 김포, 부천, 양평), 인천, 강원(양양, 홍천), 충남(청양 서천, 금산, 부여), 충북(진천, 영동), 전북(익산, 순창), 경북(칠곡), 황해(해주),경남(고성, 산청, 진양, 사천, 하동) ※ 참판공 파조님 안복(安福)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산551번지 에 안장되어 있다.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114본이 전하나, 조선씨족통보에는 시조가분명한 것이 진주[晋州], 금천[衿川], 안동[安東], 배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7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씨[姜氏]는 모두가 대종인 진주강씨에서 분적한 것이 확실하므로 진주강씨로 단일화 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강씨의 본관과 인구는 다음과 같다. 강릉(3,998가구 11,974명), 경주(2,927가구 9,120명), 곡성(1,134가구 3,418명), 광주(464가구 1,459명), 금천(668가구 2,064명), 김해(770가구 2,418명), 나주(1,336가구 3,935명), 남양(215가구 691명), 대전(153가구 478명), 동래(185가구 592 명), 밀양(533가구 1,925명), 백천(176가구 554명), 보주(57가구 194명), 보천(75가구 207명), 부산(126가구 324명), 불갑(72가구 222명), 성주(256가구 881명), 수산(55가구 159명), 수원(214가구 688명), 순흥(437가구 1,370명), 시흥(149가구 426명), 안동(392가구 1257명), 여천(153가구 452명), 연일(203가구 609명), 원주(271가구 824명), 인동(245가구 789명), 전주(5,383가구 17,579명), 제주(1,468가구 4,798명), 진주(300,724가구 966,710명), 충주(372가구 1,192명), 평양(1,972가구 5,953명), 해미(62가구 223명)로 강씨는 전국 성씨 중 6번째로 총 32개의 본관과 325,288가구 1,044,386명이 있다.(2000년 통계청 자료) 본관을 따지는 단일본으로는 4대성에 속한다. 현재 진주강씨의 80%는 강창서(姜彰瑞)의 후손으로 그 가운데서는 어사공 강사첨(姜師瞻)의 자손이 가장 많다
박사공파는 조선 시대에만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5명, 대제학 1명, 문과급제자 152명을 배출하였다. 박사공파는 고려 국자박사(國子博士 지금의 국립대학교 교수) 강계용(姜啓庸) 선조님을 파조(派祖)로 모신다. 박사공은 1274년(고려 원종 15년) 통신사 도독 김방경(金方慶)의 서장관으로 여몽(麗蒙)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일본을 다녀왔다. 아버지 박사공을 따라 함께 일본에 갔던 내급사공 인문(引文) 선조님은 그 뒤에 또 한 차례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합류하였으나 풍랑을 맞아 생사의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 돌아와 후손들에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라고 훈계하고 인문(引文) 선조님도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아 관직이 내급사에 그쳤다. 조선 초 하연(河演) 선생이 지은 진양 하씨(河氏) 경태보 발문에 하복야(복야는 정승급 관직)와 교우한 기록이 있는 걸 보아 고향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한 듯하다. 박사공 손자 사첨(師瞻) 선조님은 감찰어사를 지냈기 때문에 후손들을 어사공파라 불렀으나 지금은 박사공파에 흡수되어 박사공파라 부른다. 1994년 박사공파대동보가 나온 후로는 편의상 박사공파를 기준해서 계촌(세대수 계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 박사공파 중흥(中興)의 기틀을 이룩한 문경공(휘 군보)] 박사공의 5세손 문경공 군보(君寶) 선조님이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좌시중을 역임하면서 박사공파 중흥(中興)의 기틀을 이룩하였다. 문경공의 두 아들 모두 재상급에 올랐다. (1) 박사공의 장남 시(蓍) 선조님은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공목(恭穆)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① 특히 공목공(강 시)의 다섯 아들 중 첫째 회백(淮伯) 선조님은 고려에서 정당문학,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 (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후손들은 공의 호를 따서 통정공파(通亭公派)라 부르며, 통정공의 넷째 아들 석덕(碩德) 선조님은 세종대왕의 동서로서 개성유수,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시호는 대민이고 시와 글씨에 능했다. 대민공의 아들 희안(希顔), 희맹(希孟) 형제 선조님은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데, 희안 선조님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 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으며 공의 호를 따서 인재공이라 부른다. 인재공은 시서화삼절 (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동생 희맹 선조님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량이다.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맹경(孟卿) 선조님은 인재공의 4촌 형이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귀손(龜孫) 선조님은 문량공 희맹 선조님의 아들이며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혼(渾) 선조님은 영의정 강맹경 선조님의 종손자이다. 간양록의 저자로 잘 알려진 선조 때의 석학인 항(沆)은 공조좌랑․형조좌랑 등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왜군의 포로로일본으로 잡혀가 일본 학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적의 군사정보 등을 고국에 전했는데,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② 둘째 아들 회중(淮仲)(우리의 직계) 선조님은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고 역시 후손들이 공의 호를 따서 통계공파(通溪公派)로 부르는데, 이 분들의 후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계공 맏증손 자평(子平) 선조님은 예종 때 대사간을 지냈으며 공의 현손 사상(士尙) 선조님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공의 둘째 아들 진흥군(晉興君) 신(紳) 선조님은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사를 지냈다. 셋째 아들 인(絪) 선조님은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다. 진흥군 신(紳) 선조님의 둘째 아들 홍립(弘立) 선조님은 5도 도원수로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나라의 위기를 막았다. 특히 인(絪) 선조님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준흠(浚欽), 시영(時永), 문형(文馨), 난형(蘭馨), 우형(友馨), 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하고 도승지를 지낸 홍중(弘重) 선조님은 우의정을 지낸 사상(士尙) 선조님의 종손자이다.
통계공의 증손자 참판공 징 선조님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록에 오르고 강원도관찰사, 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지중추부사를 역임했으며 특히 후손 중 33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7대손 흡(恰) 선조님은 그 유명한 태백오현 중에 한 분이며 11대손 유(游) 선조님은 기로소에 들어 가는 영예를 얻었다. 일부 후손들이 경북 지방에 정착하며 문벌을 떨쳤는데, 통계공의 14대손 하규(夏奎), 진규(晉奎) 형제 선조님은 나란히 대사간을 지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 문중에서 대법관 신욱(信旭) 등 사법고시 합격자가 많아 사회 중추적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③ 막내 아들 회계(淮季) 선조님은 공양왕 사위였다. (2) 박사공의 둘째 아들 서(筮) 선조님은 좌의정에 올라 양희(良僖)란 시호를 받았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왕조 실록에도 실려있다.
세(世)는 대체로 씨족에서 많이 사용되며, 시조로부터 혈통의 흐름에 따라 차례로 탄생하는 인물에 대한 순번을 정하는 단위이다. 시조 또는 중시조를 1세로 하여 아래로 내려오는 계대를 말하며, 대(代)는 자기로부터 시조 또는 중시조에 이르기까지 위로 올라가는 계대를 말한다. 다시말하면, 세(世)는 자기가 포함된 숫자를 말하고, 대(代)는 자기가 포함되지 않은 숫자를 말한다. 예> 세(世) : 아들 2세, 손자 3세, 증손 4세 ․․․․․․․ 대(代) : 아버지 1대, 할아버지 2대, 증조 할아버지 3대, 고조 할아버지 4대․․․․․
아명(兒名)과 관명(冠名) 옛날에는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을 아명(兒名)이라 했고, 남자가 20세가 되면 관례를 올리면서 짓게 되는 관명(冠名)이 있었다. 관명을 흔히들 자(字)라고 했고, 자는 집안 어른이나 스승, 선배 등이 성인이 된 것을 대견해 하는 뜻으로 지어 주었다. 호(號) 옛날에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과 존장의 앞에서만 쓰이고 다른 사람들은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동년배, 친구 그 외 사람들은 자(字)로써 불렀다. 한편 어린 사람이나 격이 낮은 사람, 또는 허물없이 부르기 위해서 호(號)를 지어 불렀다. 호는 남이 지어 줄 수도 있고, 스스로 짓기도 했었다. 호는 요즘도 쓰인다. 시호(諡號) 신하가 죽은 뒤에 임금이 내려 주는 호를 시호(諡號)라 하였다. 시호를 내려 주는 것을 증시(贈諡)라고 하였으며, 죽은 뒤 장례 전에 증시하지 못하고 훨씬 뒤에 증시하게 되면 그것을 추증시(追贈諡)라고 하였다. 함(啣)과 휘(諱)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서 함(啣)이나 명함(名啣)이라 하고, 더 높여서 존함(尊啣)이 라고도 한다. 반면 돌아가신 분의 이름은 휘(諱)라 한다.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血族) 안에서 상하관계(上下關係)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만든 서열로, 1세조로부터의 세수(世數)를 나타낸 것이며, 정해진 글자로 각 항렬을 나타내는 것을 항렬자라 한다.
박사공파(博士公派)
축문이란 제사를 받드는 자손이 제사를 받는 조상에게 제사의 연유와 정성스러운 감회, 그리고 마련한 제수를 권하는 글이다. 특히, 기제사에서 지방을 붙이면 축문을 읽는 것이 원칙이다. 살아계신 어른에게 색다른 음식을 올릴 때 권하는 말씀을 올리는 것처럼 조상에게도 제수를 올리면서 그 연유를 고하는 축문을 작성한다. 축문의 내용은 그 제사를 지내게 된 연유를 ‘언제’, ‘누가‘, ’누구에게‘, ’무슨 일로‘, ’무엇을‘의 형식으로 고하고 제사를 받으시라는 줄거리로 이루어진다. 축문도 지방과 마찬가지로 한문과 한글로 모두 쓸 수 있다. 축문의 규격은 가로 24㎝, 세로 36㎝의 깨끗한 백지에 쓰며, 벼슬이 있을 때의 호칭은 지방을 쓸 때와 같다. “學生(학생)” 대신에 “관직명”으로, 그 부인은 “孺人(유인)”대신에 “貞敬夫人(정경부인)” 등을 쓴다. 명절에 지내는 차례에는 축문을 쓰지 않는다. ◐ 축문서식 중 알아두어야 할 점 ◑ ◈ 維(유) : 이어 내려온다는 뜻 ◈ 歲次(세차) : 해의 차례라는 뜻 ◈ 干支(간지) : 천간지의 육십갑자 중 그 해의 태세를 씁니다. ◈ 某月(모월) : 제사달이 정월이면 正月, 팔월이면 八月이라고 씁니다. ◈ 干支朔(간지삭) : 제사달의 초하루라는 뜻으로 제사달 초하루의 일진을 씁니다. 예를 들어 초하루의 일진이 丁亥(정해)이면 丁亥라고 씁니다. ◈ 干支(간지) : 제삿날의 일진을 씁니다. 예를 들어 제삿날이 9일이고, 9일의 일진이 甲戌(갑술)이면, 甲戌이라고 씁니다. ◈ 敢昭告于(감소고우) : 삼가 밝게 고한다는 뜻으로, 妻祭祀(아내 제사)에는 敢자를 버리고 昭告于라고만 쓰며, 아우 이하는 다만 告于라고만 씁니다. ◉ 축문 쓰는 실례 ■ 고조부무, 증조부모, 조부모 축문
① 玄孫(현손) : 고조부모 제사일 때 쓰며, 증조부모 제사에는 曾孫, 조부모 제사에는 孫이라고 쓴다. ② 제주의 이름을 쓴다. ③ 高祖(고조) : 증조부모 제사에는 曾祖로, 조부모 제사에는 그냥 祖라 쓴다. ④ 本貫(본관)과 성을 쓴다. ⑤ 考(고) : 고조부, 증보부, 조부 제사에는 考라 쓰며, 고조모, 증조모, 조모 제사에는 妣라 씁니다. ■ 부모 축문
■ 남편 축문 ■ 처 축문
[ 축문 쓰는법 ] 1. 축문 문장구성 축문의 서식을 보면 사백년전에 편찬된 것으로 지금에 와서는 그 문장이 현시대에는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일부 난해한 부분이 있고 문장해석상 착오가 있어 쉽게 풀어 해명코자 한다. 이 축문 서식 편찬에 대해서는 상편에서 설명하였거니와 당시 유학자들이 간편하면서도 내실있는 문장구성에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본문에는 예기(禮記)에 나온 문장을 많이 인용하고 또 사자(四字) 성어로 독축하기 좋게 문장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유자(維字) 상자(尙字)등의 외자는 현대에서는 단자(單字)로는 쓰지 않는 간결하게 축소하였고 문장의 상하위치 배열에 있어서도 천지인(天地人)의 위계(位階)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군주의 연호의 첫 자가 맨 윗칸이고 지(地)를 상징하는 고인의 현(顯)자가 둘째칸 아래에 배치되며 인(人)을 상징하는 제주의 고우(告牛)문은 아래 셋째칸에 배치됨을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옛날 주자가례서식이 아주 과학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첫째줄 끝에 효자(孝子)모모라 하고 둘째줄 셋째칸부터 감소고우라함이 원칙이나 예시와 같이 첫째줄 말미에 제주의 이름을 쓸 지면이 모자라면 다음줄로 넘어가되 인의 자리인 셋째칸부터 써야 한다는데 유념해야 한다. 2. 문장의 해석 축문의 첫 자인 유(維)자 해석을 일반적으로 "이어"서로 알고 있음. 심지어 인터넷 해석도 "이어" 서로 하고 있으나 현대사전에 유신(維新), 유지(維持), 발어사(發語辭), 오직, 이어등으로 해석하는데 그중 "이어"로 해석하고 있으니 이는 지금 이때를 이는 지금 이때를 말하며 이때는 곧 "오늘"이 된다. 또 첫줄 아래 또는 효손 등으로 표기하는데 자칭 효자 칭호는 현대적 표현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기(禮記)의 잡기상편(雜記上編)의 제(祭)에는 칭효자효손(稱孝子孝孫)하고 상(喪)에는 칭애자애손(稱哀子哀孫)하라고 명시됨을 볼 때 제례와 상례에는 이것이 예(禮)라 한다. 또 제사의 본질을 군자(君子)는 생칙경양(生則敬養)은 사종신불욕야(思終身不欲也)라 함은 군자는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 공경봉양하고 돌아가실 때는 공경하여 제사지낸다. 이는 자기몸이 다하도록 어버이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일반적 현대해석은 대를 이어줄 장자 장손으로만 알고 있으나 예기에 효자가 되려면 기제날 언행을 규제하였고 제사에는 정성이 으뜸이라 제사를 지내는 그 자체가 효자라 한 그 깊은 뜻은 제사를 효행의 지표로 장려하려는데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장자 장손으로 보는 것도 제주는 장자장손이 원칙임을 감안한 것으로 본다. 축문에 부(父)를 고(考)라 하고 모(母)를 비(비)라 함도 예기곡례하편(禮記曲禮下編)에 생왈부모(生曰父母)요 사왕고비(死曰考비)라 한데 근거한 것이다. 그외 본문에는 난해한 것이 없어 생략하나 가령 탁주를 올리고도 근이청작(謹以淸酌)이라 함은 불효가 아니냐 하는 이의(異意)도 있으나 이 문제는 정성이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과거 보리고개때 일이고 생시에 밀밭 근처에도 못가든 고인에게 술을 올리는 것이나 왼손잡이에 유식때 "삽시반중서병(揷匙飯中西炳)"하는등은 생(生)자의 일상생활과는 상반된다. 혼신(魂神)을 모신 제례음식은 생자의 일반음식과는 다른점이라 하겠다. 신이 기피하는 과일중 복숭아라든지 칫자들은 생선은 쓰지 않는 것 등은 생자(生者)음식과 다른 점이다. 본문 말미에 상(尙)자로 단(單)자가 있는데 일반해석은 흠향(欽饗)을 높이는 것으로 고상(高尙)하다 할 때 상자로 알고 있으나 이 또한 잘못 해석하는 것으로 만일 높이는 뜻이라면 상자를 지계(地階)칸인 둘째칸으로 올림이 마땅하다. 그러나 본문이 끝난 아래칸으로 올림이 마땅하다. 그러나 본문이 끝난 아래칸에 둔 이유는 상금(尙今)의 상으로 봐 "이제"로 해석해야 한다. 또 상과 향을 붙여 읽지 않고 띠어 독축하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끝으로 마지막 향(饗)자는 글자 그대로 흠향향자로 흠짜를 생략하더라도 그 뜻이 흠향으로 통하기에 유(維) 상(尙 향(饗)자는 단자로 간소화한 것이다. 3. 맺음말 이상으로 기제축문중 부모의 축문만 단적으로 소개하였으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여 이해에 매우 미흡한 점이 있겠으나 옛 축문서식과 내용에 조금이나마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보화사회로 급변하는 현대에서는 걸맞지 않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유지 계승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각 문중의 제례행사에는 계속 전승보전할 일이나 요즘 일반가정에서는 지방대신 영정을 모셔놓고 강신절차에 이어 한문축문 대신 한글축문 또는 구두고우하는 예가 많은데 굳이 탓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부연할 것은 일부 문중에서 제사를 높인다고 제향(祭享), 시향(時享), 향사(享祀)라 호칭함은 과대표현이라 본다. 원래 제향(祭享)은 나라의 큰 제사를 뜻하는 것인데 각 문중에서 이를 수용 보편화됐다. 따라서 사가에서는 제사(祭祀), 시제(時祭), 기제(忌祭), 묘제(墓祭)등으로 표현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외 제사분방기에 축 또는 축관(祝官)을 대축(大祝)으로 표기함도 잘못이다. 대축이라 함은 나라의 종묘 또는 문묘 성균관 향교 대성전(大成殿)의 제향시 축관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끝으로 졸자(拙者)의 조그마한 소고에 지나지 않음으로 기탄없는 지적과 충고를 바랄 뿐이다.
敢昭告于 감소고우
顯考學生府君 현고학생부군
顯비儒人寬鄕姓氏 歲序遷易 현비유인관향성씨 세서천역
顯考 諱日復臨 追遠感時 昊天罔極 현고 휘일부림 추원감시 호천망극
謹以淸酌 庶羞 恭伸奠獻 尙 근이청작 서수 공신전헌 상
饗 향
주자가례서식(朱子家禮書式) 예(例) 모기일(母忌日) 維 유 西紀二千年歲次庚辰十月戊午朔初五日壬戌孝子 서기이천년세차경진시월무오삭초오일임술효자
모모敢昭告于 감소고우
顯考學生府君 현고학생부군
顯비儒人寬鄕姓氏 歲序遷易 현비유인관향성씨 세서천역
顯비 諱日復臨 追遠感時 昊天罔極 현비 휘일부임 추원감시 호천망극
謹以淸酌 庶首 恭伸奠獻 尙 근이청작 서수 공신전헌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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