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 |
남자 |
여자 |
부곡리 |
부곡리 |
40 |
101 |
52 |
49 |
1987년 |
부곡리 |
38 |
179 |
87 |
92 |
2) 경지면적
(기준 2005.12.31, 단위: ha)
농가 |
계 |
전 |
답 |
과수 |
임야 |
비고 |
32세대 |
54.9 |
25 |
27.9 |
2 |
|
|
3) 성씨분포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전주이씨 |
23 |
해주최씨 |
1 |
원주이씨 |
1 |
김해김씨 |
7 |
우주황씨 |
1 |
제주양씨 |
1 |
광산김씨 |
3 |
밀양박씨 |
1 |
남평문씨 |
1 |
여흥민씨 |
3 |
평산신씨 |
1 |
기타 |
1 |
경주정씨 |
1 |
광주이씨 |
1 |
|
|
4) 마을회관
▶ 위치- 부곡리 136-2, 설립일- 1998. 05. 15
2.역사
1) 마을 입향과 형성
마을은 1600년경 밀양박씨가 최초 입향하였으나, 차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고 이후
전주이씨 영양군파의 후손인 이갑운이 영암에서 입거하였다고 한다.
2) 지명유래
마을은 간척공사 전 바닷물이 들어올 때 연화부수(蓮花浮水)형국과 같다고 하여 ‘부수’,‘부실’, ‘부옥촌’, ‘부뜰’ 등으로 불리었는데, 1789년 호구총수에는 부곡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부옥촌(富玉村)이라고도 불리면서 차츰 부곡촌으로 변하였다.
3) 마을에 전해 오는 옛 지명
▶ 부실 부곡(마을)- 부곡마을의 옛 이름으로 마을의 풍수지리설인 연화부수에서 따온 이름이다.
▶ 생깃골- 생잇골이라고도 하며 위쪽으로는 양사재가 자리했는데, 양사재에 젊은 학동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항상 생기가 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제삼옥지(저수지)-부곡에 있는 저수지로 중부원장의 젖줄이다.
▶ 중부원장(들)- 부곡마을 앞에 있는 드넓은 들녘이다.
▶ 장배미(논)- 중부원장 안에 있는 논배미로 회관 앞쪽으로 김춘심의 논이 가로로 약 100m 정도 길게 놓여 있어 부르게 된 이름이다.
▶ 서당골(골)- 부곡~춘정 마을사이의 양사재가 있던 골짜기로 서당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아릿가매(들)- 양사재(서당골)를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들녘을 말한다.
▶ 장구배미- 마을 회관 앞쪽의 우측에 있는 논배미로 논의 형태가 장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인데, 약 600여 평의 면적이다.
▶ 돛대배미- 마을 회관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논으로, 옛날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올 때 멀리서 보면 배의 돛대가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암논골과 뒷논골- 마을 회관에서 오른쪽이 암논골이고, 회관의 뒤편 동네가 뒷논골인데, 과거 이곳에서는 2동네로 편을 갈라 축구대회를 열어 친선을 도모하였다.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근동의 20개 마을들이 참가한 호남축구대회를 열었다고 하며, 구경꾼들만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축구경기의 명맥은 1970~1980년대까지 이어졌고, 암논골 대표는 이원채와 이원강이 주축이 되었으며 뒷논골의 대표는 이호, 이원풍, 이윤철이 주축이 되어 친선경기를 가졌다.
4)풍수지리설
과거 간척공사를 하기 이전 동남쪽 언덕 위에 마을을 바라 볼 때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면 마을은 물위에 떠있는 연꽃처럼 보인다하여 연화부수(蓮花浮水)형국이라 한다.
3.생활환경
1)주민생활상
본래 마을은 간척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마을 인근에까지 드나들었다.
하지만 예로부터 양반동네라고 하여 갯가에서 어류를 채취하는 어업의 형태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소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주민들의 생활은 쌀농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곳은 초대 황산면장 이종목의 출신지로 일본침략기에는 박해와 큰 사고가 없었다.
광복을 전후로 주민들의 대부분은 양잠과 쌀농사를 병행 하였고, 6․25 전쟁 시에는 주민 이씨가 리당 위원장이 되어 귀향하였는데, 마을 유지들이 나서 간곡히 그를 설득해 특별한 인명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식수원은 마을의 앞뒤로 공동 샘이 있어 이를 사용하였고, 연탄보일러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부아산에서 땔감을 조달하여 연료로 썼다.
정미소를 운영하던 김계옥은 발동기를 갖고 보리탈곡을 하였고, 마을에서 초창기 김종현이 주막집을 열어 운영하였다.
1970년경에 전기가 들어왔으며 전화는 1980년경 이원기의 집에 최초로 행정전화가 가설되었다.
2)교육
현재 부곡리 579번지에 해남의 관급서당 중 하나인 양사재가 조선 영조 때 설립되어 황산을 비롯한 문내 화원 마산 산이 해남일부에서까지 학동들이 찾아와 학문을 소양하였다. 조선말에 혁파된 후 이곳은 황원면사무소가 자리했으며, 1914년 황원면과 산일면이 병합될 때 따로 부지가 마련되지 않아 이곳에 황산면사무소가 들어서게 되었다.
마을 야학은 일본침략말기 문맹퇴치와 함께 시작되어 이후 몇 년간 존속되다 사라졌으며, 옥동초교 25회생들은 황산서교가 개교한 후 1회 졸업생이 되었다.
3) 놀이문화
이 마을만의 특별한 세시풍속이나 전통놀이는 전해오는 것이 없고 여느 마을처럼 복합적으로 전승되는 놀이가 대부분이며, 윷놀이나 연날리기 그네뛰기가 1990년대 초반까지 오락으로 존속되어왔다. 아이들의 공기놀이, 재기차기, 구슬치기, 케스마질, 자치기 등의 놀이도 1990년대 중반이후 자취를 감췄다.
4. 마을개발
마을개발은 이곳의 입향조인 이갑운이 1720년경 약 8만 평 정도의 간척사업을 실시해 많은 농토가 생겨났다.
1970년경 새마을운동 시 마을길을 확․포장했고, 1975년에 초가지붕은 대부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되었다. 1989년에는 경지정리를 시작하여 현재는 대부분 이루어진 상태이다. 옛날부터 이곳은 논이 많아 멸구를 잡을 때 폐유를 복개뚜껑에 담아 뿌려 병충해를 방제하였다.
마을에서 자전거 이원석, TV 이원유, 오토바이 이원건, 경운기 이향호, 트랙터 이원웅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5. 마을조직
현재까지 상포계가 운영되고 있고, 상포계의 책임을 맡은 사람을 계주라고 부른다. 계주 외에 특별히 따로 부고를 돌리거나 심부름을 하는 직책은 없다. 옛날에는 구장이 상포계에서 할당량의 쌀을 가져온 사람의 이름을 적고 그것을 초상집에 주었으며, 현재 마을에는 4개의 상포계가 유지되고 있다.
마을 부녀회는 1970년대에 창립되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현재까지 마을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고 있으며, 대동계는 매년 한 차례 12월 말경에 마을주민이 어우러져 한 해의 노고를 서로 격려한다.
▶ 마을임원
이장 |
개발위원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부녀회장 |
청년회장 |
이항열 |
박성동 |
이신호 |
이윤철 |
김춘심 |
이원민 |
6. 역대 이장
1960년대 |
양형선 |
이진호 |
이원기 |
이현호 |
1970년대 |
이현호 |
이원기 |
|
|
1980년대 |
이원기 |
이현호 |
박성동 |
|
1990년대 |
박성규 |
이항열 |
이현호 |
이원기 |
2000년 |
이희성 |
이항열 |
|
|
원래는 복수추천을 받아 무기명투표에 의해 이장을 선출하는데, 마을 연말총회에서 추천에 의해 추대한다. 이장의 급여는 하곡 보리 640kg 추곡 나락 640kg 정도를 지불하다가 2005년도부터 이장의 급여는 폐지하였다.
▣ 자료제공
▶ 구전- 이병열, 이원기, 이신호, 박성동
▶ 감수- 이항열, 이윤철, 김춘심 ▶ 담당공무원- 정재팔
신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위치하며, 소정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약 100m 쯤 가다보면 좌측에 형성된 마을이다.
동쪽으로는 연당마을과 경계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옥동리와 접하여 가우생골, 벗잠골이 있다. 남쪽으로는 부곡마을과 이웃하고 옥동제가, 북쪽으로는 소정마을과 인접하며 초등골이 자리한다.
1946년 부곡마을에서 새로이 분리되어 마을 이름을 신곡으로 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마을은 작고 아담하지만 주민들의 근면과 협동이 뛰어난 마을로 정평이 나있다.
1) 기본현황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명)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 |
남자 |
여자 |
부곡리 |
신곡리 |
22 |
45 |
22 |
23 |
1987년 |
신곡리 |
25 |
108 |
58 |
50 |
2) 경지면적
(기준 2005.12.31, 단위: ha)
농가 |
계 |
전 |
답 |
과수 |
비고 |
22세대 |
41 |
24 |
16.8 |
|
|
3) 성씨분포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김해김씨 |
4 |
경주최씨 |
1 |
장흥위씨 |
1 |
원주이씨 |
3 |
동래정씨 |
1 |
경주정씨 |
1 |
서흥김씨 |
2 |
전주최씨 |
1 |
기타 |
6 |
밀양박씨 |
1 |
해남윤씨 |
1 |
|
|
4) 마을회관
▶ 위치- 부곡리 100-4, 설립일-2000. 08. 27
2. 역사
1) 마을 입향과 형성
마을 최초입향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 문화유씨와 서흥김씨라고 전해온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혼성되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2) 지명유래
마을은 본래 부곡과 한 지역으로 상(上)리라 불렸으며, 1946년경 부곡리에서 분리되면서,
부곡에서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신곡(新谷)이라 칭하게 되었다.
3) 마을에 전해 오는 옛 지명
▶ 동산(산)- 마을 뒤편에 자리한 산이다.
▶ 뒷방죽걸(들)-마을에서 서쪽에 있는 들녘으로, 19번 도로를 타고 성산마을 우측에 있는 작은 저수지가 뒷방죽이다. 뒷방죽 아래로는 옥동들이 펼쳐져 있으며, 바닷물이 들어올 당시 인근 주민들은 곡식을 외부로 팔려고 이곳에 목선을 대고 곡물을 수송하였다고 한다.
▶ 목냉기(들)- 마을 동남쪽에 있는 들녘으로 이곳은 연당마을에서 외입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 펼쳐진 들녘이다.
▶ 산숫동(들)- 마을 앞에 있는 들녘으로 예부터 불려온 이름이다.
▶ 신제(못)- 마을 동남쪽에 있는 들녘의 옛 지명이다.
▶ 웃부곡(마을)-신곡 마을주민들이 부곡마을을 이르는 지명이다.
▶ 잠실(밭)-잠실은 현재 마을 뒤편의 밭으로, 1930~1940년경 뽕나무밭이 약 3,000여 평 정도 조성되어 불리게 된 지명이다.
3. 생활환경
1) 주민생활상
마을의 연혁은 광복 후에 분리되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은 정과 사랑이 넘치며 단합과 화합이 돋보이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쌀농사와 월동배추, 마늘을 주업으로 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주키니 호박과 수박, 참외 등의 각종 씨앗을 채종하여 소득을 올렸다.
당시 마을의 10호 정도가 서울종묘사와 계약을 맺고 300평당 240만원의 고수익을 올렸다.
채종은 과실이나 채소의 씨앗을 수집하는 것으로, 호박씨를 채종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수정할 수꽃을 하루 전에 딴다. 그리고 수꽃을 물에 띄워 방안에 들여놓은 다음 이튿날 암꽃이 벌어질 때 이른 새벽부터 수정에 들어가는데, 수꽃의 화분을 붓에 묻혀 암꽃에다 수정을 시킨 후 꿀벌이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봉지를 씌우면 인공수정이 끝난다.
주민들은 다른 마을보다 농지가 적어 현재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다.
2) 공동제사
해마다 마을회관에서는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 할머니의 넋을 기리는 특별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제사의 주인공은 1980년대 초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조점련 할머니로, 주민들과 할머니의 인연은 6·25 전쟁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당시 1·4후퇴 때 황해도에서 피난 내려와 이곳 신곡마을에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꾸려온 할머니는 평소 친자매 이상으로 주민들과 두터운 정을 쌓아왔고, 할머니가 암(癌)으로 조선대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주민들은 삼삼오오 간호 팀을 짜서 6개월간 병상을 지켰다. 자식이 없던 할머니는 향수병과 우울증이 겹쳐 점점 쇠약해져 갔고 결국 고향을 그리워하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당시 주민들과 할머니의 애틋한 정이 알려지자 병원 측에서도 1,000만 원이 넘는 병원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할머니와의 옛정을 잊지 못하는 주민들은 음력 3월 5일 마을회관에 제상(祭床)을 차리고 먼저 간 할머니의 넋을 달래고 있다. (조점련 할머니의 유산이 마을 공동명의로 이전이 되지 않아 논 555.525평을 정애자, 강옥녀, 서명순 3인의 명의로 이전하여 여기서 소출되는 돈으로 제사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4. 마을개발
본격적인 마을개발은 농어촌의 환경정비를 목적으로 1970년대 이후 일어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부터이다.
그 당시 김귀동, 김상빈, 김옥동 등이 주축이 되어 마을 초입에서 회관에 이르는 300m의 안길을 확장하였다.
그런데 사업진행을 보러 왔던 면직원 중 한 명이 흙담이 가로막혀 안길을 넓힐 수 없자, 곡괭이로 담벼락을 무너뜨려 버렸고, 성산광산과 성산바닷가에서 돌과 흙을 경운기에 실어와 다시 쌓았다고 한다. 이때 전 농가가 지붕개량을 하였고 농로개설·마을 도로확충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동(洞)·리(里)에 시멘트를 무상 지급함으로써 각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때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대체하였으며, 담장보수와 마을 진입로 정비 등을 효과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리고 1972년부터 주민지도자를 발굴하여 훈련시킴으로써 낙후된 주민의 정신을 계도시켜 나가는 한편 농어가의 소득증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1997년 옥동 들녘을 경지 정리하여 흑암제와 옥동제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농업용수로 쓰고 있다.
자전거는 김상빈, 오토바이는 박병주, 경운기는 김성태, TV는 김영희, 트랙터는 김정환이 마을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5. 마을조직
1977년도 창립 된 신곡 상포계는 마을에 초상이 날 때 집집마다 형편대로 광목이나 베 쌀을 가져와 초상집에 부조하던 마을 공동체 조직이었다. 특히 초상집에 오는 마을사람은 반드시 쌀 2되를 가지고 와야 했다. 그 외에 술이나 광목 등도 준비해 가져왔다. 그리고 초상이 난 집에 돈이나 필요한 현물을 걷어 주기도 하였다. 마을에서는 계원들이 상여 운상은 물론 입관에 이르기까지 조직화 되었는데 2005년도 노령화와 인구감소로 해산하였으며, 현재는 부녀회가 마을 대소사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마을임원
이장 |
개발위원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부녀회장 |
청년회장 |
어촌계장 |
박병주 |
이병길 |
윤종하 |
김기영 |
이숙희 |
박병주 |
|
6. 역대이장
1960년대 |
이창호 |
정복현 |
이종옥 |
|
|
|
1970년대 |
김상빈 |
정해진 |
최정운 |
정복현 |
이용종 |
김사천 |
1980년대 |
정복현 |
김사천 |
조인행 |
|
|
|
1990년대 |
최종규 |
박병주 |
|
|
|
|
2000년 |
최종규 |
박병주 |
|
|
|
|
신곡마을 총회에서는 지난 1년 동안 마을예산에 대한 집행결과와 새로 이사 온 사람들에 대해 소개하며, 이장선출과 내년도 마을 현안 사업에 대해 진지한 대화의 장이 펼쳐진다.
이장선출은 구두로 추천한 후 주민들의 동의를 묻고 또 다른 후보의 추천이 없으면 만장일치로 추대한다. 이장의 급여는 본래 하곡에 보리 5섬 추곡에 쌀 5섬을 지급하였으나 2005년도부터는 총회에서 정부수매가 없어져 무보수 봉사직으로 임명한다고 규약을 바꾸었다.
▣ 자료제공
▶ 구전- 김사천
▶ 감수- 박병주, 이병길, 윤종하, 김기영, 이숙희 ▶ 담당공무원- 정재팔
1. 개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8번 국도를 따라 4km 정도에 이르면 소정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 주변으로 형성 된 마을이 소정마을이다.
동쪽으로는 연당마을과 경계하고 초등골 남쪽으로는 신곡마을과 접하며 가우생골이 있다. 서쪽으로는 옥연마을과 이웃하며 신흥뫼산, 관춘제가, 북쪽으로는 관춘마을과 인접하고 있다.
마을은 회관주변의 쇠쟁이, 공동뫼의 연우, 관춘 저수지 쪽의 원두골, 소정삼거리에서 관춘저수지 쪽을 남동, 구 회관주변인 신흥리로 나뉘어 있다.
조선시대 우수영 수사가 쉬어갔다는 정자가 있어 주민들은 아름다운 정자를 잊지 않고 소정(小亭)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마을의 특산품은 월동배추와 도라지이다.
1) 기본현황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명)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 |
남자 |
여자 |
부곡리 |
소정리 |
69 |
173 |
83 |
90 |
1987년 |
소정리 |
65 |
334 |
174 |
160 |
2) 경지면적
(기준 2005.12.31, 단위: ha)
농가 |
계 |
전 |
답 |
과수 |
비고 |
50세대 |
73.5 |
34 |
39.5 |
|
|
3) 성씨분포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문화유씨 |
6 |
도강김씨 |
2 |
풍향조씨 |
1 |
해남윤씨 |
5 |
남평문씨 |
2 |
함평이씨 |
1 |
원주이씨 |
4 |
문의박씨 |
2 |
제주고씨 |
1 |
경주정씨 |
4 |
수원백씨 |
2 |
진주강씨 |
1 |
김해김씨 |
4 |
한양조씨 |
2 |
선산임씨 |
1 |
전주이씨 |
4 |
경주김씨 |
2 |
신안정씨 |
1 |
청주한씨 |
4 |
광산김씨 |
2 |
평산신씨 |
1 |
밀양박씨 |
3 |
달성배씨 |
1 |
기타 |
17 |
4) 마을회관
▶ 위치-부곡리 695-4, 설립일-2001. 10.12
2. 역사
1) 마을 입향과 형성
본래 이 마을은 부곡마을과 한 마을로 광복 후에 분리되었고, 1900년경 삼덕농장과 옥동농장이 간척지화 될 때 몇 가구가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최초 입향조는 200년 전 문화유씨 유동로가 입주하였으며, 현재는 여러 성씨가 모여 혼성마을을 이루는 가운데 문화유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2) 지명유래
소정(小亭)은 부곡촌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1790년 문화유씨 유동로가 이곳에 작은 정자 소정을 지어 지역의 유림과 시객들이 자주 찾아와 시담을 나누고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그 당시 정자가 생기고 양반가에서 소정을 자주 찾아왔고, 소정은 후일 자연스럽게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
3) 마을에 전해 오는 옛 지명
▶ 가오생이(들)-현재 농협보관창고 뒤편 춘정쪽으로 펼쳐져 있는 들녘으로 일컫는 말이다.
▶ 밭쇠쟁이(마을)-소정마을 밖에 있는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다.
▶ 쇠쟁이(마을)-쇠쟁이란 말의 연원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성산광산이 개발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광산 일을 하기 위해 찾아왔고, 이곳은 자연스럽게 주막이 들어서게 되었다. 주막이 들어서니 술과 도박이 성행했을 것이고 인근 주민들은 이곳에 가면 쇠도 녹아 난다는 말을 하게 되면서 소정마을의 이름을 빗대어 쇠쟁이라고 잠시 불렀다고 한다. (마을 유래지 1987)
▶ 초동골(들)-현재 부곡주유소 뒤편 골짜기로 사람이 죽으면 초분한 곳으로 이곳은 도깨비가 많이 출몰하였다고 한다.
▶ 새터(마을)- 관춘저수지가 만들어지고 아래에 위치한 홍동부근이 자주 침수가 되자 그곳의 주민들이 현재 남성축산 쪽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터전이 만들어졌다고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 원두골(마을)- 구회관에서 옥동쪽으로 돌아가는 곳으로 밭을 갈면 지금도 구운 기와가 나오는데, 주민들은 이곳에서 원님이 쉬어갔다고 한다.
4) 풍수지리설
마을 중심에서 서쪽으로 신흥산이 자리하고, 신흥산은 거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남쪽에 묘지가 하나 둘 들어서던 것이 현재는 큰 공동묘지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신흥산은 남쪽에 위치하여 아주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지리학상 명당으로 불리고 있다. 신흥산 상단에는 처녀 총각 바위가 있는데, 옛날 사랑하는 연인이 부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3. 생활환경
1) 주민생활상
이 마을은 조선시대 유동로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남하하여 둔적한 곳으로, 용옥천 위에 소정을 세우고 스스로 수양을 하며 공자의 도를 숭상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인구가 유입되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우수영수사가 우수영을 오갈 때 잠깐씩 쉬어갈 정도로 경치가 좋았다고 한다.
1900년경 우수영이 철수되자 인근 주민들의 생활이 궁핍해졌는데, 때마침 성산광산이 개발되어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소정은 잠시 활기를 찾았다.
하지만 광복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났고, 현재 주민들은 벼농사와 겨울배추를 주 소득원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옥동들녘 부근의 70%에 해당하는 논을 경작하면서 질이 좋은 쌀을 생산하며, 늦가을에 심는 겨울배추의 가격에 따라 인심이 변할 만큼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1960년대 박원천에 의해 설립 된 정미소는 지금도 하루 쌀 100가마정도를 도정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운영되고 있다. 주민 윤일수는 요시다라고 불리는 발동기를 처음 마을에 들여와 보리탈곡을 하였다.
또한 류재일은 1970년대 중반 새마을지도자로 연수를 다녀올 때 접했던 도라지를 지금까지 재배하고 있고, 생산되는 도라지는 친환경농산물로 목포나 광주지역의 단골에게 택배로 판매하고 있다.
현재 축산농가는 한우를 키우는 2농가가 있고, 남성축산에서는 약 500마리 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한편 마을의 식수는 부곡 일우너을 광역권으로 하는 상수도를 이용하고 있으며, 과거 보일러가 나오기 전에는 관춘마을과 신성마을까지 4~5km를 걸어서 땔감을 해왔다.
마을은 18번 도로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산발적으로 인가가 형성되어 언뜻 보기에 3~4개 마을로 착각을 하게 하지만, 현재 마을은 4개의 상가와 63농가가 오순도순 어우러져 친형제처럼 살아가고 있다.
2)교육
서당은 1960년대 중반 관춘저수지 상류부근인 남동에서 열렸으며, 학동들은 13명 내외로 명심보감과 사자소학 등 기초적인 한문을 학습하였다.
현재 유재욱의 집터는 야학당이 있던 자리로 일본침략기 때 위다복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3) 미담
유경철은 임오년 흉년에 본인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보리쌀을 풀어 생계가 어려운 전 주민에게 나누어 주었고, 유경태(유정주 父)는 1940년경 자전거 수리점을 하면서 황산국민학교에 자전거 1대를 기증하였다.
재경향우 유경록은 해남향교에 장학기금 2억 원을 기부하고, 마을에 소정의 금일봉과 TV를 보내왔으며, 제 1회 황산면민의 날 행사 때는 300만 원을 희사하였다.
4. 마을개발
1970년대 초 6평 면적으로 설립한 회관은 현재 창고로 쓰이며, 1972년도에 새마을 우수마을로 지정되어 대통령의 하사금을 받아 신축한 창고를 포함해 마을에는 총 3개의 공동창고가 있다.
새마을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1970년대 중반 성산광산 소장이었던 이선동은 모래와 자갈 등을 지원하여 마을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당시 마을일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이때 안길을 확장하기 위해 마을전체 약 600m의 담을 허물고 부지를 희사 받아 4m폭으로 확장하였으며, 지붕은 마을 전체가 기와와 슬레이트로 개량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 유경철은 개인사유지 약 100평을 마을에 사용 승낙을 해주어 주민들은 미꾸라지 양식장을 수작업으로 조성하여 마을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마을 공동 작업은 1970년대 작목반을 구성하여 마을 전 주민이 함께 모내기를 실시하였으나 이앙기가 등장하면서 사라졌다.
현재 수리시설은 마을이 보유한 논 70%가량이 되어 있으나, 항상 물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배수로 시설이 좋지 않아 30mm정도의 비에도 침수지역이 생기는 어려움이 있다.
마을에서 자전거는 유경태, TV 김손순, 오토바이 윤영종, 경운기 윤영종, 트랙터 윤영종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5. 마을조직
마을의 자랑거리는 모든 가정을 대상으로 조직된 상포계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상포계는 매년 7가구를 유사로 선정하여 그 해에 일어나는 모든 애경사를 주관하였는데, 혼성마을의 특성상 일어나기 쉬운 소외감을 극복하는데 주효하였다.
과거 마을에서는 결혼식에 꽃가마를 빌려주어 나온 수익금으로 명절 때 돼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다. 2005년까지 3개의 상포계가 있어 마을 애사 시 호당 쌀 1되와 소주 1되를 전달하며 위로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대동계로 통합하여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고, 부녀회는 현재 행정기관과 농협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마을임원
이장 |
개발위원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부녀회장 |
한현산 |
조성민 |
배귀동 |
이승재 |
강원자 |
6. 역대이장
소정마을 이장은 주민의 뜻에 따라 선출되고, 선출 된 이장은 마을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 자료제공
▶ 구전- 한화준, 유재옥
▶ 감수- 한현산, 조성민, 배귀동, 이승재, 강원자 ▶ 담당공무원- 정재팔
◇ 춘정(春井)마을
춘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소정 삼거리에서 좌측 편 19번 군도를 타고 약 2km 정도에 이르면 우측 편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외입마을과 경계하고 부아산, 남쪽으로는 성산마을와 접하며 소류지, 지심골, 춘정제, 쪽박산, 원두령골, 소리산이 자리한다. 서쪽으로는 만호바다를 바라보며 제각산, 노루목산, 북쪽으로는 부곡마을과 인접하며 부곡제, 옥동제가 있다.
마을은 입구에서 회관주위까지가 1반, 마을 중앙이 2반, 중앙에서 아랫마을이 3반, 마을표지석에서 성산방향으로 500m 가면 신당리와 장안리가 4반으로, 총 4개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오면서 마을에 화(禍)가 전혀 미치지 않았던 것은 돌멩이 하나에도 살기(殺氣)가 없어 재앙이 스스로 이곳을 피해갔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마을 명물로는 위장병과 신경통에 특효였던 춘정(春井) 샘물이다.
1) 기본현황
(2005.12.31기준, 단위: 세대, 명)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 |
남자 |
여자 |
춘정리 |
춘정리 |
49 |
125 |
59 |
66 |
1987년 |
춘정리 |
64 |
263 |
130 |
133 |
2) 경지면적
(2005.12.31, 단위: ha)
농가 |
계 |
전 |
답 |
과수 |
비고 |
41세대 |
85 |
46 |
39.4 |
|
|
3) 성씨분포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김해김씨 |
7 |
남원윤씨 |
1 |
밀양박씨 |
1 |
순천김씨 |
6 |
무안박씨 |
1 |
남평문씨 |
1 |
이천서씨 |
5 |
경주정씨 |
1 |
정선전씨 |
1 |
전주이씨 |
3 |
장흥임씨 |
1 |
도강김씨 |
1 |
여흥민씨 |
3 |
신안주씨 |
1 |
제주양씨 |
1 |
달성서씨 |
2 |
해주최씨 |
1 |
기타 |
6 |
동복오씨 |
2 |
분성배씨 |
1 |
|
|
원주이씨 |
2 |
경주최씨 |
1 |
|
|
4) 마을회관
▶ 부곡리 492-5, 설립일 2001. 11. 15
2. 역사
1) 마을 입향과 형성
마을의 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원포장시가 춘정 앞바다부근에 성행하여 장보고 장군의 군대가 병참을 마련하기 위해 자주 왔다고 한다.
마을 최초의 성씨 입향은 1500년경에 함평 월야면에서 이천서씨 서진걸이 입주하였다고 한다. 1630년대에 순천김씨 김관이 입향하였고, 이후 1780년에는 병마수군절도사였던 대구서씨 익수가 서울에서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하며, 남평문씨, 남원윤씨 순으로 들어와 현재는 혼성마을을 이루고 있다.
2) 지명유래
옛날 황산의 남서부지역인 부곡일원과 외입, 송청, 상하리를 합하여 입암(笠岩)리로 불려오다가 약 400년 전에 외립암과 내립암이라 분리되었다. 춘정은 내립암(內笠岩)에 속한 지역으로 본래는 2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마을 앞 조산에 있던 춘정(春亭) 정각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 어귀에 있는 춘정(春井) 샘물이다. 춘정(春井)은 조선 순조 때 우수영 수사가 이곳에 들러 물맛을 보고 이곳의 물맛이 금강산 춘천약수와 같이 좋다고 하여 부르면서 이후 행정개편이 이루어질 때 동리명이 되었는데, 원래 춘정(春亭)의 전각은 소실되고 춘정(春井)이라는 약수터만 남아 있어 한자음의 춘정(春井)이 마을이름으로 칭해졌다.
3) 마을에 전해 오는 옛 지명
▶ 가장골(골)-마을회관에서 춘정정자가 있던 안산 앞 골짜기로, 이곳은 장사를 지내도 좋을 만큼의 자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골짜기의 모습이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라서 가장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저수지로 조성 되어 있다.
▶ 감투나리(개)-마을 회관에서 서쪽에 있는 나루터로, 나리는 진(津)을 뜻하는 나루터이며 감투가 많이 나서 불린 이름이다. 또한 이곳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역공장이 2개나 있어 배들이 이곳으로 정박하고 미역을 사갔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때는 완도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장보고장군의 1만여 장졸들의 병참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 배를 이끌고 왔다고 한다.
▶ 건넷샘(우물)- 춘정 남쪽에 있는 샘으로 주민들은 본래 이곳이 춘정(春井) 샘이라고 한다. 이 샘물은 위장병에 특효가 있어 인근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물을 마시고 갔다. 그런데 객지사람들이 처음 이물을 마시면 설사를 할 정도로 물이 세었다고 한다.
▶ 고래미(마을)- 춘정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1~3반 사이의 골짜기 중에서 가장 크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많아 불리게 된 이름이다.
▶ 노릿목(마을)- 춘정마을 서남쪽에 있는 목으로 이곳은 현재 금광의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노루처럼 뛰어가 뚝 떨어진 섬이라고 한다.
▶ 도깨비방죽(못)- 마을 표지석이 서있는 초입부근의 작은 연못으로 본래 이곳은 도깨비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마을에 힘이 세기로 소문 난 서상석이 어느 날 만취 해 집으로 오던 중 도깨비를 만나 씨름을 하였다. 씨름에서 이긴 서상석은 도깨비를 나무에 묶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그곳에 가보았더니 빗자루가 그 나무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 바닥개웅(개)- 춘정마을 앞바다에 있는 개웅을 부르는 이름이다.
▶ 부엉바우(바위)- 마을뒷산인 호암산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어 하나는 남자들만이 노는 곳이고, 다른 한곳은 여자들만이 노는데 여자들이 노는 곳이 부엉바위라고 한다.
▶ 아릿몰(마을)- 춘정 서쪽에 있는 마을을 아릿몰이라 불렀다.
▶ 오장골(골)- 마을 안산에서 동남쪽 있는 골짜기로 과거 5명의 무과급제자가 나왔다고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이 부근에는 사장등이 있어 무예를 수련하였다고 한다.
▶ 조산(산)- 춘정 남쪽에 있는 작은 산의 이름이다.
▶ 짓봉재(고개)-현재 바닷가 서쪽에 위치한 3반의 뒤편에 있는 고개로, 이곳은 옛날부터 정월대보름날 마을 공동제사를 지낸 곳이었다.
▶ 해목(고개)-춘정에서 검덩굴 잔등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허한 목이라는 뜻이다.
▶ 비룡바위(바위)-춘정앞바다에 삼별초의 비룡호가 넘나들었다고 하여 불리게 된 지명유적이다.
4) 풍수지리설
마을 뒷산의 호암산은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하여 불리게 된 지명이며, 풍수가들은 이곳을 호랑이의 형국이라고 말한다.
5) 문화유적
가) 춘제이천서공승춘신도비(春齌利川徐氏神道碑)- 마을입구에 서있으며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서승춘과 그의 아버지 서진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84년에 세웠다.
나) 효열부정부인 전주이씨기적비(孝烈婦貞夫人全州李氏紀績碑) -춘정의 작은 마을인 신당마을 입구에 서있는 비로 윤병조의 부인인 전주이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982년 그의 후손들이 세웠다.
3. 생활환경
1) 주민생활상
본래 마을은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왔고, 그 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지세가 좋아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났으며, 이러한 인물들에 의해 마을의 역사와 전통이 잘 보존 되어 왔다.
진도나 제주도로 가는 입암포구(성산마을)가 있어 이 마을은 주요한 길목이었다. 1896년 정만조 승지가 진도 귀양길에 3개월간 이곳에 머무르면서 마을 학동들을 잠시 가르쳤는데, 주민들은 승지가 한양을 향해 가지 않고 반대로 간다하여 자순을 바꿔 그가 머물던 곳을 지승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을의 동쪽인 부곡마을사이에 학사를 양성하던 양사재가, 남쪽에는 무사를 양성했던 사장루와 사장터가 있어 인격 수양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했던 흔적이 있다.
마을의 서쪽에는 사람의 만복을 천신에게 빌던 제봉이 있으며, 북쪽에는 춘정정자가 있었다. 이곳은 많은 효자와 문사들이 나와 지역 내에서는 양반고을로 소문이 나 있다. 예부터 품앗이를 위주로 농사를 지었는데, 마을유지들은 흉년이든 풍년이든 쌀죽을 끓여 동네 주민을 구휼하였다.
주민들은 양반고을이라는 자부심이 강하여 어로생활보다는 농업을 주업으로 삼았다.
현재 주민 대부분은 쌀, 마늘, 월동배추를 주 소득원으로 하고 있다. 본래 양다래 농사를 짓는 농가가 10여 가구 있었는데, 태풍 ‘올가’ 이후 현재 서강의 1가구만 남아 있으며, 가축인공수정소를 겸한 양돈 농가 1가구와 민태홍으 느타리 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2) 교육
마을에는 춘정서재가 있었는데. 김찬익의 사위인 이영규가 훈장을 맡았고 이후 김진천이 동네 학동들의 공부를 가르쳤다. 1950년대 김예원이 당시 마을 공회당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30~40명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어 3년 정도 가르쳤다.
3) 민속
마을 앞 조산에서 들독을 들고 일꾼들의 새경을 정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당시 들독의 무게는 약 85kg정도로 이 돌을 든 사람끼리 서로 품앗이를 하였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 설과 추석 등 명절이 다가오면 마을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연극을 선보였다.
4. 마을개발
마을 개발의 최초의 기록은 조선 중엽 서승춘의 춘정들 간척공사이다. 이후 소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고 광복과 더불어 안길을 확장하게 되었는데 주민들은 말없이 지도자들의 뜻을 따라주며 길을 희사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에 안길을 확장하였으나 큰 차들의 진입이 어려워 1984년경에 2차로 확장하였다. 또한 새마을 사업이 진행될 때 슬레이트와 기와로 지붕을 개량하였다.
과거에는 각 반별로 공동우물이 따로 있어 이를 식수원으로 사용했으나, 1995년도부터는 부곡마을 광역상수도를 설치하여 지금은 집집마다 이 물을 사용하고 있다.
전기는 1977년 가설되었고 전화는 1978년 처음 들어왔으며, 1997년에 들어와서 마을 주요 들녘의 경지정리가 시작되었다.
마을에서 자전거는 김기문, TV 윤병진, 오토바이 민태홍, 경운기 김정남, 트랙터 민태홍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5. 마을조직
1977년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부인회가 창립 된 후 현재까지 회원들은 마을의 대소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4월에는 대동계를 벌여 마을의 중요한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또한 마을에는 상호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남·녀 30명으로 구성된 향원회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마을임원
이장 |
개발위원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부녀회장 |
어촌계장 |
김상남 |
최정운 |
김상묵 |
배천봉 |
김필녀 |
민태홍 |
6. 역대이장
1960년대 |
김상목 |
서호배 |
서덕수 |
김응원 |
서성백 |
서재영 |
김상수 |
김상만 |
1970년대 |
홍홍표 |
서정백 |
서창수 |
서호배 |
서영규 |
김주영 |
|
|
1980년대 |
서창수 |
김상대 |
민태홍 |
서남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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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
민태홍 |
김상남 |
임흥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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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민태홍 |
김상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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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마을에서 대립관계의 성씨들로 인해 경선을 통해 이장을 선출하였으나, 마을화합에 저해가 된다고 판단한 임원들이 주민합의를 통해 요즘은 마을 총회에서 추대형식을 빌어 선출한다.
또한 1980년 이전에는 등급별로 조정해서 각호마다 이정세를 부과하였으나, 이후로는 평균적으로 하반기에는 벼 9석, 보리 9석을 똑같이 분배하여 이정세를 부과하다가 2004년부터는 하반기 벼 9석만 이장에게 지급하였는데 최근 벼 가격이 하락하고 있어 2005년부터는 연 120만원으로 책정해 이장의 연봉으로 지급하고 있다
▣ 자료제공
▶ 구전-윤병진, 서정복
▶ 감수- 김상남, 최정운, 김상묵, 배천봉, 김필녀 ▶ 담당공무원- 이상석
1. 개관
성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에 위치하고, 소정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돌아 자동차로 5km 쯤 들어가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타난다.
동쪽으로는 바다건너 산소마을과 마주보고 소리산이, 남쪽으로는 만호바다를 바라보며 고절봉, 매장매가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우수영 울돌목이 지척이며 방죽안들, 장안제, 북쪽으로는 춘정마을과 인접하고 원두령골, 장안골이 있다.
마을은 마을입구에서 매장 매항까지가 1반, 마을회관 부근이 2반, 매부리를 3반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취락은 해안선을 끼고 분포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대부분은 김발과 해삼·전복 양식, 쌀농사와 겨울배추 등 반농반어의 생활로 부촌(富村)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공룡왕국 바다축제를 열어 지역의 농·수산물의 홍보장으로 활용하고,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우뚝 선 조선내화의 내화물 원료석이 생산되는 성산광산이 자리하며, 만호바다의 갯내음이 사철 마을 내에 진동하는 가운데 청년회와 부녀회, 어촌계가 마을 화합과 번영을 다지고 있다.
1) 기본현황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명)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 |
남자 |
여자 |
부곡리 |
성산리 |
117 |
302 |
163 |
139 |
1987년 |
성산리 |
115 |
579 |
326 |
253 |
2) 경지면적
(기준 2005.12.31, 단위: ha)
농가 |
계 |
전 |
답 |
과수 |
비고 |
52세대 |
66.4 |
40 |
26.4 |
|
|
3) 성씨분포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김해김씨 |
27 |
밀양박씨 |
5 |
창녕조씨 |
2 |
전주이씨 |
14 |
파평윤씨 |
5 |
남양홍씨 |
2 |
원주이씨 |
11 |
함양조씨 |
4 |
장흥마씨 |
1 |
경주정씨 |
9 |
경주이씨 |
4 |
기타 |
16 |
이천서씨 |
7 |
광산노씨 |
2 |
|
|
진주강씨 |
6 |
통천최씨 |
2 |
|
|
4) 마을회관
부곡리 136-2, 1998. 05. 15
2. 역사
1) 마을 입향과 형성
마을은 본래 춘정과 한 마을을 이루었던 곳으로 내암리에 속한 지역이다. 원래 입암포에 7호가 거주하며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하였는데, 1687년경 전주이씨 홍정이 이곳으로 입향하였다.
이후 1930~40년대 일본침략기에 광산이 개발되면서 김해김씨, 원주이씨, 전주이씨, 진주강씨가 입주하였는데, 광산인구가 2만이 넘어 작은 목포라 불리었다. 현재 마을은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가운데 김해김씨가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2) 지명유래
일본침략기를 거치며 지금의 소리산은 광산개발과 알루미늄의 원석인 명반석을 채취하기 위해 발파를 해 그 소리가 천지를 요동친다 하여 불리운 이름이다.
성산(聲山)은 현재 황산분체 뒤편에 자리한 소리산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성산이란 지명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1916년 동리명 변경 때에도 성산(聲山)이라는 기록은 볼 수 없는데 이곳 지명은 성산광산이 개발 된 이후 붙여졌다. 성산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후기 때 전주이씨 영양군파 세지에서 발견 되었다. 당시 이곳은 입암 성자동(笠巖 聖子洞)으로 나타나 있다.
3) 마을에 전해 오는 옛 지명
▶ 물래바위(바위)- 본래 입암도를 이르는 말로 성산 마을 앞바다에 자리한다.
▶ 매바위(바위)- 현재 입암포 영어법인이 자리한 입암포구의 좌측 편에 매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자리하는데, 이 바위를 매부리라고 하고 마을의 지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본래 암․수 바위가 있었지만, 수바위는 어느 해 벼락을 맞아 없어지고 현재 있는 것은 암바위이다
▶ 매장매-매의 심장의 형상이라 부르는 지명이다.
▶ 소리산(산)-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현재 한국분체의 뒷산이 소리산이다. 이곳은 광산이 개발되기 전부터 밤이 되면 윙윙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 아리랑고개(고개)-일본침략기 때 광산이 개발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광산근로자들의 한 많은 사연이 함께한 곳으로 이 고개에는 많은 주막이 있었다. 근로자들의 고달픈 삶의 소리가 아리랑이었고 이 고개를 지나는 15,000여 근로자의 아리랑 노랫소리 때문에 고개 이름이 지어졌으며, 지금은 두 곳의 가게만 남아있다.
▶ 삭구미(산)- 마을은 사금미, 안고장, 매장매, 매부리로 이루어졌으며 사금미 앞쪽에 있는 냇가에서는 장마로 많은 물이 내려올 때 얼검치(어레미) 등으로 물속에 내려오는 사금을 채취하였다고 한다. 현재 춘정 노루목산의 금광은 이곳 사금미의 사금이 기초를 이루었다고 한다.
▶ 부엉바위- 마을에 있는 바위로 흡사 남녀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고, 위에 있는 바위가 남근석, 아래쪽이 여근석이라고 한다.
▶ 물래섬- 엄마바위, 애기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 각시바위- 만조 시에는 물에 잠겨 바닷물이 많이 나갈 때만 볼 수 있다. 일본침략기에 일본인들이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박았던 쇠말뚝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 입암포- 일본침략기 군수물자를 나르던 주요포구로 목포나 제주를 왕래하던 여객선이 입·출항하였던 곳이다.
3) 풍수지리설
안고장의 뒷산은 어미 소가 송아지를 안고 있는 형상으로 안고장의 뒷산 어딘가에는 등잔봉의 불빛이 비추는 명당이 있다고 전해온다.
3. 생활환경
1)주민생활상
이곳은 전남 서남부지역에서 광복 전까지 목포 다음으로 전기가 빨리 들어온 마을이다. 그만큼 격동기를 맞아 가장 빠르게 변화한 마을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일본침략기에 성산광산이 개발되면서 점차 인구가 많이 유입되면서 마을은 발전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전국에서 마을단위로는 최초로 신사(紳士)가 세워지는 암울한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였다.
광복이후 대부분의 광산인부들은 흩어졌지만, 그 중 140호 정도는 정착하여 광산을 중심으로 흩어져 거주했고 상당수는 농업과 어업으로 직업을 전환하였다.
마을에는 1970년대까지 성산광산과 서울광산 등 2개의 광산이 있었으며, 그 당시에도 주민의 80%가 광업에 종사하였다.
이곳의 식수원은 귀한 편으로 1970년대까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옹달샘까지 포함하면 107 곳의 우물이 조성되었지만, 지금은 부곡광역 상수도를 식수원으로 공급받고 있다.
1970년 성산부대 무기고에 전화가 처음 가설되었고, 1973년부터 군내버스가 마을에 들어왔으며, 1977년 2월 전기가 들어왔다.
1970년 초 주민 이소례가 잠시 양잠을 하였다. 현대에 들어 주민들은 김, 미역, 다시마, 숭어, 갯장어, 낙지 등의 해산물을 생산하고 전복, 해삼, 왕새우 등을 양식하고 있다. 이밖에도 마을에는 절임배추 공장과 김 가공 공장이 들어서 있다.
1997년에는 이철승, 서종필, 홍정표가 주축이 되어 마을청년들과 역동적인 지역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공룡왕국 바다축제(구 성산가요제)를 창설하여 이후 마을청년회장들이 추진위원장을 맡아 바지락과 꼬막 캐기, 낙지잡이, 바다보물찾기, 성산부녀회의 사물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치고 있다.
또한 마을어촌계원들은 연 4회씩 성산 앞바다 주위를 청소 하면서, 만호바다를 청정해역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2) 교육
마을의 서당은 1972~74년까지 신안군에서 이거한 박복수가 훈장을 맡아 서당을 운영하였다.
3) 민속
1960년대~80년대 초까지 5월 단오가 찾아오면 마을 부녀자들은 김은성의 집 옆 놀이터에서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 등당이 타령을 부르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또한 정월 대보름날에는 걸궁을 치는데 주민들은 진시(辰時 오전 9시)에 회관에 모여 제를 지낸다. 그리고 우리소리보존회원들의 흥겨운 풍물놀이와 농자천하지대본과 풍어만선대길의 깃발을 앞세우고 어린 아이들로부터 연로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주민 모두가 동참하여 매부리에서 시작하여 집집마다 방문한다.
걸궁을 펼치는 일행은 선창에 메어놓은 선박에도 액운을 쫓고 행운과 풍어를 기원한다. 포수와 광대의 익살스러운 해학 속에 매장매를 끝으로 오징어 둔벙(마을 앞바다)에서 어촌계가 만든 모형 배에 돼지머리와 과일 등을 담아 촛불을 밝히고, 바다로 띄워 보낸다.
또한 밤에는 매장매항 광장에 마련된 달집을 태우는데, 청년회에서는 주민의 소원을 적은 종이를 달집 주위에 설치된 금줄에 매달고, 마을 임원들이 달집에 점화를 하면 주민들은 손에 손을 잡고 불길에 타오르는 달집을 돌며 신명나는 풍물가락에 맞추어 새로운 날을 기원하며 걸궁을 마친다.
4. 마을개발
일본침략기부터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마을은 1970년대 들어 마을버스 전용도로 3km 구간을 확장하였고, 2km에 이르는 안길을 확장하였다.
이후 마을 리더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주민들의 화합 속에서 발전을 거듭해왔다. 또한 2004년 입암포영어조합법인은 1,200여 평에 이르는 육상수조 전복양식장 준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전복생산에 들어갔다. 입암포영어조합법인은 2002년 8명의 마을 어촌계원들로 구성됐으며 법인설립 후 지난 2년여의 공사기간과 2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1,200여 평의 육상 전복양식장을 완공하였다.
2005년 5월에는 그동안 마을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어민회관 준공식을 리민의 날을 겸해 가졌다. 성산마을 어민회관은 총사업비 1억3700만 원과 조선내화 이훈동의 부지 기부체납으로 1층 수산물직판장(회센타)과 2층 어민회관을 신축하였다. 주민들은 어민회관 준공으로 청정해역의 다양한 수산물을 직거래하여 소득증대를 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자전거는 성산광산에서 처음, TV 이선동, 오토바이 성산광산(회사용), 경운기 서재국·이정식, 트랙터 이충호가 마을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5. 마을조직
이숙자, 이정순, 김귀순, 오영휘, 조성미, 이계수, 유옥수를 중심으로 한 부녀회의 활발한 마을 참여가 돋보이며, 60목계, 해우회, 만호회, 소리회, 고절봉 모임 등 각종 친목계가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노인회가 주축이 된 관광계와 상포계의 일종인 동신계가 현재까지 존재하고, 장미회가 한동안 운영되다 소멸되었으며, 2006년에 와서 비로소 마을 전 주민이 참여하는 대동계를 조직하여 마을의 화합과 우의를 다지고 있다.
▶ 마을임원
이장 |
개발위원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부녀회장 |
청년회장 |
어촌계장 |
이삼열 |
김오행 |
이영옥 |
박상근 |
유옥수 |
이남철 |
허인삼 |
6. 역대이장
1960년대 |
김용택 |
이정열 |
양회삼 |
김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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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
서재영 |
이양주 |
김영우 |
서재국 |
이권 |
1980년대 |
김성용 |
이영택 |
이충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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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
이권 |
허인삼 |
조재출 |
이철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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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김오행 |
조준표 |
이삼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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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의 선출은 추천에 의한 추대를 하나 복수추천이 될 때는 전형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이장의 연봉은 1960~80년대까지 벼 3섬씩을 지급하였는데, 각 호별로 급수를 정하여 거출하였지만 지금은 마을에서 일괄 지급한다.
▣ 자료제공
▶ 구전- 이철승, 이삼열, 김오행
▶ 감수- 이영옥, 박상근, 유옥수 ▶ 담당공무원- 이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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