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터넷에 항일투쟁을 했던
북한의 최현장군(현, 최용해 부친)에 대해 소개한 전기 내용이 있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한번에 다 번역하지 못하고 10차례 나눠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최현장군에 관한 전기는 중국작가 해경청(海??)이
<전쟁의 예술>이란 중국 군사관련 사이트에 연재한 글입니다.
1. 소년 영웅호걸
최현(崔?)의 본명은 최득권(崔得?)이며
그의 부친은 최화심(崔化心)으로 조선의 유명한 의병장인 홍범도 장군의 부장이다.
그의 부친의 원적은 함경북도 혜산군으로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간도시이다.
일본군대의 진압으로 각지의 의병은 연속 패배했기 때문에 의병 잔여세력은 소련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1907년 6월 8일 최현은 중국동북 연길지구 훈춘현에서 출생했다.
1907년은 조선민족에 있어서 비통의 한 해였다.
이조 국왕 고종은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이준(李俊 1859?1907,함경북도 북청군 출신)을 파견했다.
이준은 조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일본의 위협하에 퇴위하고 조선군대의 해산을 선포했으며,
조선과 일본은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차관정치”를 강행했다
최현은 어려서 군영에서 자랐다.
홍범도(洪范? 1868-1943,평안북도 자성군 출신)、
임병국(任秉?) 등 독립군 장군들은 그의 스승이었다.
그에게 총검술과 기마술을 전수해 주고
그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 의지를 심어줬다.
그의 나이 겨우 11세때 대한독립군(1919-1921,홍범도 장군 휘하의 200여 의병이
주동적으로 설립한 항일독립군 부대,
백두산 밑자락 왕청현 봉오동을 근거지로 함)에 참가하여
통신연락병 임무를 맡으면서 반일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1920년 10월-1921년 5월 기간 일본군의 대’토벌’로
대략 1만명의 조선 혁명가와 주민들이 살해되었다.
최현의 모친도 이때 희생됐다.
최현과 그의 부친은 임병국 부대를 따라 소련 연해주로 철수했다.
연해주에는 약 20여만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소련정부의 암묵적 지원하에 독립군은 휴식 및 정비를 취하면서 계속적으로
연해주와 조소국경을 근거지로 하면서 항일투쟁을 진행했다.
최현은 독립군 한 지대의 통신병으로 임명되었다.
어려서부터 배워서 능숙한 기마술로 인해 최현에게는 통신병은 매우 적합한 직무였다.
이해 겨우 13세의 키 작은 소년은 광야에서 말고삐를 놓고 질주하였는데
평생을 말위에서 생활한 러시아인들도 경탄했다.
첫번째 전투에서 소속 지대가 일본군에 포위되자 최현과 다른 3명의 통신병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 본부에 구원을 요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말을 타고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향해 돌진했다.
적의 총탄에 의해 3명의 동료들은 모두 희생되었으며 최현도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총상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제시간에 본부에 도착했다.
임병국은 친히 그의 부상 부위에 붕대를 감아주면서
장차 독립군 장군감이라고 거듭 칭찬했다.
이것은 아마도 선배가 용맹한 전사에게 격려와 위로의 말이었다.
그러나, 비록 최현은 독립군 장군은 못되었지만 오히려 종국에는 조선의 명장이 되었다.
독립군 실패 후,
최현은 간도로 돌아와서
윤창범(尹昌范, 후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 독립연대장 역임,
1933년 “민생단” 간첩 누명으로 피살됨)의 소개로 동만청(???)총조직에 가입했다.
동만청 총조직 시기는 그가 민족주의 운동에서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 전환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방향 전환은 그가 7년여의 감옥 생활중에 더욱 촉진되었다.
1925년 봉천군벌당국은 “경제모금사건혐의자”로 그를 체포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길림 제4감옥(연길감옥)에 수감했다.
그가 감방에 수감되었을 때 별명이 “꼴통”인 강도살인범이 있었다.
그는 매번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올 때마다 그들의 물건들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만약 누구의 친구나 친척이 사식을 넣어주면 그 “꼴통”이 빼앗아 자기 배를 채웠다.
최현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를 교육시키기로 했다.
최현은 고급 담배를 꺼내 자기가 하나 물고 다른 수감자에게도 하나씩 돌렸으나
일부러 “꼴통”에게는 주지 않았다.
“꼴통”은 최현을 한대 갈기려고 했으나 오히려 최현의 수갑 채워진 주먹 한방에 쓰러졌다.
이때부터 그는 감히 다른 수감자들을 괴롭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최현이 “꼴통”을 꼼짝 못하게 하자
다른 수감자들은 그를 은인으로 여기며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최현 또한 순조롭게 모두를 단결시킬 수 있었으며 자기의 영향력을 다른 감방까지
확대하게 되었다.
최현이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지 얼마 안되어 군벌당국은 빈번하게 용정시(?井市)의
대성중학, 영신중학, 은진중학 등 다수의 학생들을 조직하여 감옥을 참관케했다.
이것은 용정에서 계속해서 각종 반일 반군벌 단체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반동파들은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청년학생들의 혁명사상을 말살시키고
그들의 투쟁의지를 압살하려 기도했다.
최현은 적들의 음모를 분쇄하려고 결심하고
각 감방에 좋은 물총을 사전에 준비하라고 통보했다.
학생들이 감방 참관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인솔한 반동교사들과 간수들을 향해
변기통의 오물을 쏴대었다.
놀란 그들은 학생들을 데리고 감옥에서 도망쳤다.
감옥당국은 주모자를 찾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짜냈으나
모든 수감자들이 자기가 주모자라고 말한 통에 찾아낼 수가 없었다.
길고 긴 감옥생활에서 최현은 감옥 신발제조창의 제조공,
석판인쇄창의 문자배열공, 복장제조창의 양복 재봉사,
목공제조창의 목공 및 이발사가 되었다.
그는 어디에서 일하든 그를 학대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철저하게 보복했다.
어느날 그가 탁의자를 제조하고 남은 나무 조각으로 장기 알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감시공이 이 상황을 목격했다.
감시공은 수감자들을 밥 먹듯이 때렸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감시공이 최현을 때리려고 하자 최현은 의자다리로 후려 갈겼다.
감옥당국은 최현에게 일주일의 독방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그 이후 감시공은 감히 다시는 수감자들게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했다.
2. 항일의 선봉에서
1930년 연변지역의 오주(五?)폭동 및 추수봉기, 춘황투쟁이 진압된 후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최현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에 붙잡혀 왔다.
이렇게 형성된 감옥안의 환경은 최현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해 준 학교이자 용광로였다.
그는 감옥의 지하조직인 반제동맹 및 적위대에 가입했다.
반동군벌의 감옥에서 마침내 독립군 시절의 통신병인 한 민족주의자가
완전히 공산주의자로 개조되었다.
최현은 윤창범 등과 같이 협조하여
독립군 시절의 노선배인 임병국 등 몇 명의 혁명가들을 탈옥시켰다.
1932년에 최현 자신도 탈옥에 성공하였으며
연길현 적위대에 가입하여 책임자중 한 명이 되었다.
동시에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했다.
1933년 1월에는 연길 반일유격대 제1중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9월 7일 김일성이 정치위원으로 있는
왕청유격대와 훈춘유격대는 구국군(救??) 오의성(??成)부대와 연합하여
동녕현(???)의 만주군 1개 연대와 석전(石田) 수비대를 공격하였으며,
만주군 200여명을 살상하고 대량의 전리품을 노획했다.
통신병의 연락이 늦게 도착한 바람에 최현의 부대는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고
낙심한 채로 유격대 근거지인 소왕청 마촌에 도착하여 김일성 부대와 합류했다.
이튿날 적들이 보복하려고 추격해 왔으나 감히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고
단지 마을밖에 쌓아놓은 곡식을 불태우는 것으로 분풀이를 대신 했다.
유격대는 대원도 소수이고 보총도 적었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방화하는 적들을 저격하는 전술로 대응했다.
최현은 5백미터 밖에서도 백발백중으로 곡식을 불태우는 많은 적들을 사살했다.
그의 사격 솜씨에 김일성도 탄복했다.
적들을 격퇴한 후 최현과 김일성은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눴으며
헤어질 때 김일성이 동녕 전투때 노획한 전리품 중에 보총 4자루와 호박으로 만든
담배파이프를 기념으로 최현에게 주었다.
이 담배파이프는 최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애장품이 되었으며,
지금은 김, 최 두 혁명가의 우의의 상징으로 조선혁명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1934년 3월에 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동만(??) 각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최현이 소속된 연길 유격대는 독립사단 제1연대(연대장 김순덕, 정치위원 최학철)로
개편되었고, 최현은 제1중대 정치지도원에 임명되었다.
적들의 “토벌작전”을 분쇄하기 위해 독립사단은 1개연대를 적을 견제하기 위해
기존 지역에 잔류시키고 주력을 각각 안도(安?), 액목(?穆), 녕안(?安)으로 진군시켜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했다.
최현은 명령에 따라 돈화(敦化) 및 화전(?甸) 경계의 대황구(大荒?) 지역에 도착하여
유격대 확대 활동을 진행했다.
당시 대황구 산골마을에는 각각 80명과 100여명의 두 산림무장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자는 지하공작원들이 반일선전 교육을 깊게 진행했기 때문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자위단을 친일에서 반일로 전향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후자는 민간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약탈을 일삼고,
유수촌(柳?村)의 적 군경과 결탁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집단으로 투항할 준비를 했다.
한쪽은 항일을, 다른 한쪽은 투항을 주장하면서 두 산림무장대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전면적인 유혈충돌의 위험이 있었다.
최현은 거중 조정한다는 명분으로 두 산림무장대 두령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당시 투항을 기도하고 있는 산림무장대의 두목들이 연회장소에 도착했을 때 최현은
신속히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다른 산림무장대에 대해서는 굳지 손을 쓸 필요가 없었는데
그들은 자위단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항일통일전선에서 출발한 전략은
오히려 독립사단 지도층의 좌경인물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자위단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적에게 투항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최현은 정치지도원의 직무에서 해임되었으며 또한 “민생단”의 첩자로 몰렸다.
그 당시 이것은 언제든지 처형당할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1933년 반”민생단” 투쟁에서 2,000여명의 조선인 공산당원과 유격대원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다행이 최현은 사단 정치위원 왕덕태 (王德泰, 1908-1936 산동 출신)의
헌신적인 변호를 받았다.
“만약 최현 동지가 민생단이라면 우리 2군에서 민생단이 아닌 사람은 누가 있는가?”
이렇게 해서 단지 전사로만 강등되었다.
왕덕태는 최현이 암살당할 것을 걱정하여 그를 1년동안 군수처장에 임명하여
자기 신변에 있기 했다.
1935년말에 최현은 다시 제1중대장에 복직 되었다.
1936년 2월 9일, 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고,
부대 편제를 확대하였는데 한편으로 간부층이 부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간부들이 “민생단” 꼬리표가 붙어있어 임명되지 못했다.
왕덕태, 김일성 등은 반”민생단” 투쟁의 지도층에 단호히 반대하며,
대담하게 신임하고 대담하게 발탁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수많은 “민생단” 덫에 걸린
간부들은 해방시켜주고, 그들은 각 부대 간부에 복직시켜 주었다.
최현도 중대장에서 1사단(동년 7월 4사단로 변경) 제1연대장으로 승진했다
1938년 7월,최현은 항련제1로군 제3방면군 제13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최현은 기지가 넘치고 용감하며, 대담하면서도 세심하며, 위급한 상황에도 냉정했다.
1930년대 후반기 최현은
소탕하 전투(1936년 11월 하순, 만주군 7기병연대 및 교도대와 교전),
사문구 전투(1936년 12월,만주군 8연대 매복습격),
간봉산 전투(1937년 6월 30일 ,일본군 19여단 74중대 및 만주군 장조국대대 매복습격)
동청구 전투(1936년 10월 10일,만주군 7여단 10연대 매복습격),
목기하 전투(1939년 3월 11일, 이해산 산림경찰대 섬멸), 대사하 전투 (1937년 4월 24일,
이도선 치안대 섬멸), 대양차 전투(1936년 11월 4일,만주군 교도대 2개 중대 투항)、
한총구 전투(1936년 4월 7일, 돈화현 일본군 수비대 및 만주군 경찰대 매복습격)등
300여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탁월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재능과 비할데 없는
용감한 정신을 충분히 발휘했다.
일본군은 최현을 “흉악한 대장부”라고 불렀다.
최현은 자기 휘하의 연대를 이끌고 능숙하게 싸움을 잘하였으며 용감하게 공격하여
그 명성이 자자했다.
최현은 군사작전의 명수였으며 또한 노련한 정치공작원이자 선동가였다.
그는 다른 군사세력에 대한 군사외교 및 통일전선 조직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적군 와해공작에도 능숙했다.
그는 만주군속에 자기의 조직을 심어놓고 유격대로 무기탄약을 빼돌렸을 뿐만 아니라
자주 군사정보를 제공받았다
적배후의 생활은 매우 고생스러웠다.
장기간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유격전을 벌이던 중 최현은 장티푸스에 걸려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 되었다.
밀영으로 후송되어 요양을 받았으나 밀영내 의약품이나 식량사정이 매우 열악했다.
죽 한끼 먹기도 어려워서 겨우 곰팡이 낀 옥수수 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으나
이마저도 금방 떨어지곤 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최현은 부상병을 이끌고 돈화 부근의 친일 지주를 습격하여
많은 양식과 고기를 노획했다.
이 덕분에 환자와 부상병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어보게 되었다.
최현의 아내 김철호(金哲?)는 금방 출산할 시점에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다른 대원들과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아기를 받아줄 조산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눈 속에서 아기를 낳고
스스로 아기 탯줄을 끊었다.
그리고 나서 계속 추격해 오는 적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다행이 유격대 증원군이 도착하여 그녀와 갓난 아기 모두 구조되었다.
김철호는 동북의 전투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해방후 조국에 귀국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자녀들에게 매월 두번씩 옥수수 찌꺼기로 만든 죽을 만들어 먹였다
1940년대 초,
적군의 “중점토벌” 때문에 제3방면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활동했다.
최현은 13연대를 이끌고 주력부대를 떠나 연길현 사방대, 화전현 대포시하,
교하현 관지 등 적의 거점을 연속해서 공격했다.
이후 왕청현으로 돌아와 계관립자와 노모주하 등 집단 부락을 공격하였으며,
5월 5일에는 천교령, 대전자 거점을 습격했다.
그리고 나서 포위망을 돌파하여 동녕현으로 이동했다.
제3방면군 주력부대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고 오상현(五常?)으로 안전하게 이동했다.
항일련군은 1940년말까지 유지되었으나, 전체 제1로군은 이미 거의 붕괴되었다.
제1방면군의 총사령 조아범(曹?范, 1911-1940,북경 출신)은 이미 희생되었으며,
각 부대도 전멸당했다. 경위여단과 제2방면군의 잔여부대는 연속해서 소련으로 들어갔다.
제3방면군 총사령 진한장 (?翰章, 1913-1940,길림 돈화 출신)과
제15연대장 이용운(李?云)도 연달아 희생되었다.
제1로군 본부와 이미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제3방면군 참모장 안길(安吉, 조선인,
?-1947)이 통솔하는 13연대, 14연대가 훈춘 일대에서 월경하여 소련으로 퇴각했으며,
1941년 1월 중순 하바롭스크 근방의 남야영에 도착했다.
2월 25일,항련 지도자 주보중(周保中)과
김책(金策)이 남야영 시찰을 나와 간부회의 소집했다.
간부회의에서는 부대 개편과 중공당 도남특위 조직을 결정하고 최현을 후보위원에 임명했다.
8월 11일 저녁 계청(季?, 흑룡강 출신), 최현이 인솔하는 1지대 16명은 중소 국경을 월경하여 녕안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1941년 8월 1일,소련으로 퇴각한 각 항련부대는 소련적군 편제에 따라
항일연군 교도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소련 적군소속이 되었다.
제1로군 출신들은 제1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최현은 이때 대위로 제1중대장에 임명되었다.
3. 승 과 패
1945년 8월,
최현은 조선 공작단의 신분으로 김일성의 인솔하에 소련군과 함께 조국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규군의 군사조직을 창설할 수 없어
일단 인민보안대의 이름으로 군대를 창설했다.
최현은 백전노장으로서 당연히 창군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소련군 철수 이후에는 인민보안대장으로 38선의 경계 임무를 맡았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은 내무성 산하에 조선인민경비대를 설립했으며
최현은 38선 경비여단장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38선상에는 쌍방의 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한국군이 군사력으로 북측을 압도한 후 (한국군은 7개사단 보유 및 1개 수도사단 창설중,
인민군은 단지 4개사단 보유) 충돌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어 갔다.
당시 조선의 고도 개성은 38선 이남에 속했는데
개성 북쪽의 송악산(해발488m)은 오히려 38선 이북에 위치해 있었다.
송악산 고지 위의 인민군은 유리한 위치에서 조선중부의 교통간선을 감시할 수 있었다.
이는 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관계로
한국군은 눈엣가시 같은 것으로 여겨 밤낮으로 제거해 버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
1949년 5월 4일,
포병의 지원 사격하에 4,100여명의 한국군 1사단은
사단장 김석원(주1) 준장의 지휘하에 38선을 넘어 송악산을 공격했다.
김석원은 원래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최현의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두 사람은 일찍이 동북의 전장에서 대결한 바 있는데 결과는 김석원의 대패였으며
그는 부상당한 채 도주한 바 있었다.
이번 대결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틀간의 주야 격전 끝에 김석원은
또다시 최현에게 패배했으며, 한국군은 1,000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최현이 지휘하는 경비여단은 계속해서 개성의 남문을 공격하여 단번에 점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작전준비가 아직 충분치 않고
또한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최현의 개성 점령을 중지시켰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예상외의 패배로 충격을 받았으며 물러설 수 없다고 결심하고
다시 대규모 “북벌”을 계획했다.
계획에 의하면 7월 15일 김석원 부대는 옹진방면에서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는 것이며,
이와 함께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인민유격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후방을 위협하자 7월 공격 계획을 축소하여
송악산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소규모 계획으로 축소하였다.
7월 25일,김석원이 지휘하는 한국군 5,100여명은 재차 송악산을 공격하였다.
이번 공격에 한국군은 대규모 포병지원과 처음으로 항공기 폭격지원을 받았다.
최현은 5일간의 주야 공방속에 송악산 고지를 굳건하고 사수하였다.
한국군은 또다시 700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고 공격을 중지했다.
수 차례에 걸친 전공으로 최현은 인민군 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
조선전쟁 발발 직전 최현은 소장으로 인민군 2사단장에 임명되었다.
2사단은 1947년에 창설되었는데 지휘관 대부분이 동북항련의 노전사 출신들이어서
인민군에서 가장 선임 사단으로 여겨졌다.
2사단은 잘 훈련되어 있고 장비도 소련무기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최현의 혁혁한 공훈이 더해지자 인민군 내부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는 사단이 되었다.
총참모부의 남하 작전계획에 따라 2사단은 2군단에 귀속되어 동부전선 작전에 배치되었다. 군단장 김광협(金光?) 소장은
“춘천 공격, 6월 25일 오전 중 점령”의 주공 임무를 최현에게 명령했다.
춘천은 아름다운 도시로 일본통치 시기 일본인들은 춘천을 “조선의 교토”로 불렀다.
춘천은 강원도청 소재지로 원주로 통하는 중앙도로의 관문이었다.
춘천은 북한강과 소양강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남북 8km, 동서 4km의 초승달 분지의
동남단에 위치에 있으며,
38선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지점으로 도로망의 중추도시였다.
인민군은 일단 춘천을 점령한 후
서울의 동남방 방향으로 전진하면서 원주를 거쳐 대구방향으로 남하하여
38선의 한국군 퇴로를 차단하고 서부전선 인민군 주력부대와 협력하여
한국군을 섬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격시 이용할 도로들이 모두 협곡을 통과하거나
태백산맥 지맥들을 가로지르는 등 도로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춘천 방어는 한국군 6사단으로 한국군중 가장 불안정한 사단이었다.
1949년 2개 대대가 조선으로 투항했으며,
1950년 3월에는 송연암(宋?岩) 소령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 체포되었다.
신임 사단장 김종오는 대령으로 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일본중앙대학 법학과 졸업한 수재로 2차세계대전에 일본군 학도병으로 참전하였으며
전공을 세워 일본군 소위가 되었다.
그는 무사도정신을 이용하여 부대를 통솔하고 강화시켰다.
김종오의 대대적인 정비로 6사단의 면모는 크게 바뀌어 인민군의 강력한 적수가 되어있었다.
이와 반대로 최현 등 인민군 지휘관들은 전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최현이 직면한 상황은 정면의 한국군이 400-500고지의 절벽 같은 수리산 일대에
토치카 위주의 야전진지를 구축함으로써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한나절 내로 춘천을 점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적합한 포병진지가 부족했다.
한국군 6사단 주력 진지 북쪽으로 8km 거리의 토둔리 주변은 남북 3.5km,
동서 1km로 분지 지형으로 포병진지로 포병화력을 운용하는데 적합했다.
그러나, 이 분지의 남쪽에 470m 높이의 산이 가로막고 있어
포병주력의 고사포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정면방향으로 122mm 곡사포와 박격포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런 곡사포는 토치카를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최현은 4연대가 정면에서 공격하여 적을 견제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6연대가 북한강변에 연해 있는 도로로 잠입하여
비밀리에 진지 중앙을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이 공격 계획은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方虎山) 소장의 개성공격 계획과 유사했다.
계획상으론 대담하면서 상대 허를 찌르는 방안이었으나
마른 하천으로 엄폐가 어렵고 쉽게 적에 발각될 수 있는 단점이 있었다.
비밀 습격의 통로로는 매우 부적합했으며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김광협의 작전계획을 분석하면,
인민군 1개 사단이 수리산에 이미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대기하고 있는
한국군 1개 사단을 공격하는 것은 패배를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었다.
2군단은 당연히 병력의 뛰어난 기동성을 이용하여 1개 사단은 춘천에 대해
견제성 공격을 하게 하고, 다른 1개 사단은 춘천 방어선의 우측을 돌파한 후
우회 포위하는 작전을 구사했어야 했다.
따라서 춘천 전투 실패의 주요 책임은 김광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6월 25일 5시경,2사단은 공격개시 준비를 마친 후 예정된 작전계획에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6연대는 북한강변 도로(북한강은 폭 200m, 수심 1.8~2m米 의 수량이 풍부한
한강의 지류였다.
그러나 상류의 화천에 제방이 건설되면서 수량이 대폭 줄었다)로 진입했다.
그러나, 하천가로 전진하던 6연대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국군의 105m 곡사포 습격을 받았다.
하천 양쪽은 절벽으로 부대를 은폐 또는 전개할 수 없는 상황에서
6연대는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수리산 정상의 토치카 진지로 공격하던 4연대는 기습공격을 준비하던 중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던 한국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역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연대는 여러 번 국면 돌파를 시도했으나
한국군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상태여서 성공할 수 없었다.
북한강변 도로위의 6연대는 각종 방법으로 전진을 시도했으나
매번 한국군의 집중사격에 수많은 사상자만 내고 실패했다.
최현은 예비부대인 17연대를 우익 제1전선으로 투입했으나 역시 국면 전환에 실패했다.
춘천상황은 기습작전으로 완전히 성공한 개성 작전과는 완전히 상반된 결과였다.
그 원인은 김종오가 장병들의 외출 및 휴가를 금지시키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춘천 북쪽은 정찰과 잠입이 쉬운 산악지대로
한국군 6사단은 아마도 정확한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김종오는 자기 예감으로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어째든 한국군의 사전 방어준비는
인민군 2사단의 기습공격의 이점을 무력화시켰으며,
인민군의 진격은 진전되지 못했다.
인민군 2사단은 25일 종일 계속해서 공격했으나
한국군 6사단은 저녁때 이미 춘천 50km
이남 원주에 주둔해 있던 예비 19연대의 증원까지 이루어져
인민군의 공격은 전혀 성과가 없었다.
군단장 김광협은 2사단의 뜻밖의 실패에 당황하였으며 매우 조급해했다.
이에 따라 황급히 인민군 7사단을 우회시켜 한국군 6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2사단과 협조하에 춘천 공략을 명령했다.
27일,2군단의 지원하에 2개 사단은 총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산악이 험준하고
탱크 및 포병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 큰 손실만 입었다.
한국측 자료에 의하면 인민군 2사단 사상자는 40%이상으로
이미 공격능력을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병의 손실도 막대하여 모두 7문의 야전포, 16문의 76mm포, 2문의 45mm무반동총,
많은 박격포가 파괴되었다.
주요 원인은 지형 제약으로 포진지가 부족했고,
지형에 익숙한 한국군은 인민군의 예상 포진지 지역에 대한 사전 포사격 준비를 마치고
계획사격을 함으로써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인민군은 한국군의 포병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직사포 화기를 전진 배치하여
근접 사격을 가했다.
동해안의 한국군 8사단이 패퇴함에 따라 27일 저녁 서울 방어선이 붕괴되고
춘천만 고립된 국면이 형성됐다.
따라서 한국군 6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당일 저녁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여
홍천 남쪽의 방어진지에 도착했다.
도착 후 강릉에서 원주방향으로 퇴각하는 8사단을 엄호했다.
춘천전투 이후 6사단은 ”춘천의 반석”이란 별칭을 얻었고 “혁혁의 6사단”으로 칭송되었다.
득의 양양한 김종오와 반대로 최현은 몇 배의 치욕감을 느꼈다.
형제부대들의 연전연승의 대세하에서 유독 자기만 미증유의 참패를 당했으며,
수많은 용감하고 애국적인 전사들을 희생시켰고 전군의 전진을 지체시겼다.
비록 김일성이 가장 신임하는 장군으로 그는 어떤 처분도 받지 않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불굴의 용장은 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주1) 김석원(金?源, 1893-1978)
1909년 한국 무관학교 학생으로 일본 육군유년학교 입학, 이후 일본육사 27기로 졸업,
중일전쟁 발발 후 김석원은 중국침략 일본군 20사단 소좌로 중국 산서성 침입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조선인 최초로 3급 금조훈장 수여 받음.
조선인으로 일본인 병사들을 통솔하여 중국군대를 격파하자
조선내 친일파들은 매우 감격해 함. 연일 신문지상에 최석원의 공적을 보도하면서
일조 “일체”를 선전하여 조선내에 대대적인 김석원 바람이 일어남.
조선에서 강압적인 조선인 창씨개명시기 그는 이름을 金山錫源으로 개명함.
김석원은 중국 침략 중 세운 수많은 공적으로 1944년 대좌로 승진함.
일본국 패잔 이후 귀국하여 1948년 대한 국방군이 창설되자 김석원은
준장 계급에 1사단장으로 임명됨.
최현의 부대에 연패당하자 예비역으로 예편됨.
그러나 그는 절치부심중에 남북간의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심화되자
대전에서 “의용군(?勇?)을 창설함.
예측대로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최석원은 복직되어 수도사단장, 이후 3사단장에 임명됨.
전공으로 충무무공훈장, 국민훈장 목련장 등을 수훈. 조선전쟁 휴전 후 귀향하여
성남중고등학교 이사장이 됨.
그는 “이순신 정신 계승”,”신라시대 화랑도 정신 부활” 등의 주창했는데
사실 모두 일본 무사도 정신의 내용임.
유도, 검도, 일본군가를 모두 정식 과목에 포함시킴.
1960년 국회의원 당선.
1961년 사학재산 연합회 이사. 1978년 병사. 김석원은 3명의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 김영수(金泳秀) 역시 일본육사 졸업 후 필리핀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함.
따라서 김석원은 여러 번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아들의 망혼에 대한 제사를 지냄.
그는 사석에서
“나의 큰아들은 전쟁중에 전사했다.
이는 군인의 숙원을 이룬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라고 말한 바 있음.
주2) 김종오(金?五,1920-1967)
한국 충청북도 청원 출신,
1944년 일본중앙대학 졸업 후 일본학도병에 가입. 전쟁중 세운 전공으로 소위로 승진.
1946년 미군정청군사영어학교 졸업. 한국국방경비대 소대장,중대장, 부연대장, 연대장 역임.
1948년 대령으로 제1연대장,1950년 6사단장, 9사단장, 3사단장 역임. 준장 승진.
1951년 육군본부 인사국장. 1952년 9사단장. 소장 승진. 7사단장, 육사교장. 1953년 3군단장.
1954년 1군단장. 중장 승진. 1959년 육군참모총장. 1960년 1군사령관, 합참의장. 1961년 육군참모총장 겸 게엄사령관. 1962년 대장 승진. 1964 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