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목판문화 연구소"가 정식 이름입니다.
화백의 작업장과 숙소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넓은 호수가 정원의 중심입니다.
연구소장인 제가 1995년 기본 계획을 하여 1996년부터 현재까지 시공 중이지요 처음 건축사인 제가 직접 설계하고 모형도 만들고 관계기관에 허가 받아 감리도 하였지만 실상 화가선생님이 구석구석직접 시공한 화가선생님의 손때뭍은 작품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중주연'식구들의 연수원 겸 쉼터입니다.
저수지 호반옆에 생태환경건축이론에따라...
흙 과 나무로된 건축, 자연친화적이고 사용자 참여디자인의 정신으로 꾸며진
쉬고 싶은 곳이지요...
우리 회원 누구나의 방문을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물론 무료(면비)입니다
충북 진천 백곡 저수지 호반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나무에 세상을 새기다. 그 ‘소리 없는 되새김’이 있는 자리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칩거, 은둔, 혹은 침묵이라는 단어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좀더 여유 를 갖고 지켜보면 그게 아니다. 작업실, 주거채, 전시실 등으로 큼직큼직하게, 그러나 짜임새 있는 집안에서 그는 혼자 늘 분주하다. 그곳을 ‘한국목판문화연구소’라고 불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곳을 유심히 기웃거린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 애완견 노마와 함께 추수가 끝난 들녘에서 쉬고 있다. 노마도 가끔 집을 비우는 주인 때문인지 김 준권씨에게 정 붙이기에 바쁜 모양이다. 둘이서 산책했던 기간이 뜸해지면 잘 삐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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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역꾸역 아궁이에서 연기가 오른다. 집은 세 채로 나뉘어진다. 지금 보는 위치에서 왼쪽 끝채가 작업실이고 가운데 채는 주거용이다. 오른쪽 채는 전시공간. 널찍한 테크가 달린 곳이 중간채이다.
그를 만났을 때 다짜고짜로 “참 갑갑하 세상”이라고 했다. 이렇다 할 부연 설명이 없으니 그 까닭 을 알 수 없는 일.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수첩을 펴들고 ‘왜냐고’ 따지듯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 다. 몇 달 전에 한번 낭패를 당한 뼈저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개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그가 썩 괜찮은 집을 지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갔었다.
그것도 건축사인 동생과의 합작품이라 하니 오죽하겠나 싶었다. 억지춘향식으로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의외로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작업장이 ‘미완’이라는 것이었다. ‘작가가 작업장보다 더 소중 한 공간이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갑갑함’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여유를 가질 수밖에. 요즘 들어 더욱 세상이 갑갑 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일 수도 있었고, 예 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작금의 문화계, 좁게는 미술계의 현실에 대한 자조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 다. 갑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했더니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 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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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화작업. 참으로 일손이 많이 간다. 그림과 붓과 칼을 다 어루 만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가는 일이다. 그래서 그 일 을 하려는 ‘후배’들이 많지 않다 고 한다.
반대편에 서서 거꾸로, 그러나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
그는 자신을 돈이나 권력은 없지 만 시간은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한가한 사람이라 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사는 사람처럼 보이질 않았다.
82년 대학(홍익대 미술교육과 서 양화 전공)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해온 과정을 훑어보 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수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홍 콩 등지에서 개인전이나 단체전 을 열었다. 올해 들어서만 일곱 차례의 크고 작은 전시회를 가졌다. 한 장의 목판화를 완성하기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결코 한가할 수도, 또 그래서도 안될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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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 뒤쪽에 나무판이 많다. 그는 목판화가이다 보니 나무를 다듬는 일, 그것이 첫 번째 일이 다. 그후로도 길고 짧은 과정이 계속된다.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한국목판문화연구소를 운영할 뿐 아니라 중국노신미술학원 부교수직도 겸임하고 있다. 한가하다는 말 은 단지 일한 만큼 가시적인 어떤 게 잡히질 않으니, 그걸 안타까워하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는 또 자신을 가리켜 거꾸로 가는 사람, 반대편에 선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반골 성향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해내기 힘든 작업이다. 남들은 ‘판화를 하니 한번에 여 러 장 찍어서 좋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똑같은 대입(代入)을 싫어한다고 했다.
‘정확하다, 반복적이다’라는 말은 진정한 예술작업을 함에 있어서 통용될 수 없다고. 그래서 이런 작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없다.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다. 어차피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노라면 그 럴 수밖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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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실’ 개념으로 마련된 공간이다. 그의 작품은 이 나라, 이 땅 사람들을 안고 있다. 그 가운 데 사람 모습이 보인다. 어느 사진작가가 알아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오륙년 전쯤에 찍힌 사진 일걸요.’ 그 이유는 머리숱에 차이가 많다는 것이다. 신경 많이 쓰면서 세상을 살아왔던 모양이다.
얼개는 건축사 동생이, 자신은 아직도 집을 다듬어 가는 중
김씨는 이곳에 집을 짓기 전에 근처의 폐교된 분교를 작업장으로 사용했다. 동생 김준봉 교수가 이론 뿐 아니라 실무에도 밝아 선뜻 집지을 용기를 냈다고 한다. 동생 김씨는 현재 연변과학기술대학 건축 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중국 동북지역 한인동포(연변족) 전통민가 평면의 분류와 특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 주거양식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한다. 김씨는 이 집 주인은 동생일 수 도 있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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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층으로 지어진 이 층의 책 읽는 자리. 미 술 관련 서적뿐만 아니 라 사회학적인 책도 눈 에 보였다.
터잡기나 얼개는 형제 가 세웠지만 토목공사 에서 마감에 이르기까 지 수십명의 ‘전문가’ 들이 동원되었다. 모 든 분야에 전문가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집은 나무, 흙, 유리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 큼 주된 재질을 이루 고 있다. 데크가 널찍 한 중간채는 복층으로 되어 있는데 내구력을 높이기 위해 침목을 사용했다. 그 양쪽 옆으로 전시공간과 작업장이 있는데 통나무, 흙조적식이라고 보면 된다.
특징 중의 하나라면 창문이 많고 널찍하다는 것. 김씨의 주된 생활 공간은 작업실이다. 작업 공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공정 순서대로 벨트 라인을 이룰 수 있도록 자리 배치를 해두었다. 작업실 측면에 사람 몸 하나 누일 정도로 쪽방을 달아 침실로 사용하고 있다. 나무를 짚이는 온돌 구들방이다.
작업실 안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그야말로 원스톱으로 모든 게 이뤄진다. 그렇다고 칩거하는 게 아 니다. 우리 산하 곳곳을 누비며 스케치 여행도 다니고 인근 몇몇 학교에 강의도 나간다. 그의 말을 빌자면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낮은 산세에 오목하게 둘러싸인 지형 때문인지 겨울 삭풍도 비껴가는 듯하다. 데크에서 내려다보면 길 옆으로 큰물이 흐른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좁고 시냇물이라고 보기엔 깊고 넓다. 겨울새들이 한가 로이 노니는 것을 보니 물고기도 제법 많을 것 같다.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아는 낚시터라고 했다. 그 의 집 앞마당에도 연못이 있었는데 조용히 세월을 낚기에는 그만이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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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씨가 주로 기거하는 쪽방에 불을 지 피고 있다. 구들방 안에서 하룻밤 자고 나 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고 한다.
차나 음식을 파는 게 더 실속있을 것 같은 집
집이 자리잡은 품새나 모양새를 보니 요즘 그 흔한 전원 카페로도 제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 자신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개탄한 다. 길 좋고 목 좋고 풍경 좋은 곳마다 먹 고 마시는 집들이 왜 그리 많냐는 것이다.
차라리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 캠프나 워크 숍을 할 수 있는 생산적인 공간으로 쓰인 다면 또 모를 일이라고. 흔히들 즐겨 말하 는 전원 속에서의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적 인 생활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도회지에서 텃밭을 일구는 일이라면 몰라 도 이런 곳에서, 농사에 프로인 사람들 틈 바구니에서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가는 비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 그만큼 지금 자신이 꾸려나가는 일만해도 벅차다는 얘기로 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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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실 외벽. 통나 무와 흙으로 벽을 세웠 다. 창틀은 김준권씨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작품인 모양이다. 그 안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 유리잔에 양파 나 마늘과 같은 흔한 씨를 뿌려 쉽게 자랄 수 있게 한 것들이다.
그림을 그리고 나무 를 파고 먹이나 색을 입힌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교한 작업이니만큼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니 애써 하려는 사람들도 없다고 한다. 나무와 칼, 붓을 다룰 줄 아는 장인 정신이 필요한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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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채 데크로 올라가는 계단. 나무를 사용한 주된 재료는 침목이다. 열차 받침 대인데 아주 견고하다.
미술평론을 하는 사람들은 김씨에게 한결 같이 아끼지 않는 말이 있다. 타고난 성실 성과 장인정신 내지는 프로정신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전교조 미복직 교사에서 들어선 전업작가 의 길을 어렵게 헤쳐가며 다색 목판화나 수묵목판(水墨 木版)의 경지를 이루기까지 그는 얼마나 ‘갑갑한’ 나날들을 보내야 만 했을까.
어쨌든 자신의 작품 세계에 꾸준히 천착해 온 그는 시기에 따라 풍경을 바라보는 시 각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고대 목판 역사 속에서 주로 사용되었다던 묵인(墨印) 기법의 맥을 이 어왔다.
‘그의 풍경은 자신이 칩거하여 작품 세계 에 몰입하였던 백곡(栢谷)의 풍경들과 고 향의 풍경들, 또는 오고가며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주변의 풍경이다. 그에게 이 풍경들은 현실이자 이상’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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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본 모습. 들 어가는 입구에 전시장 으로 쓰고 있는 집채 가 보인다.
돌아오는 길, 차창에 어리는 이 땅의 풍광 하나하나가 그의 목판 에 아로 새겨져 있는 듯했다. 올해 그의 ‘겨울나기’는 어떨 것이며 새 봄빛 푸른 그날에는 또 어 떤 싹을 틔울 것인지.... 그맘때면 ‘갑갑함’을 덜 수 있을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