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문리(鹿門里)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8㎞거리에 위치하며 본래 상주군 산동면(山東面)의 지역으로서 서리기, 서록 또는 녹문․녹문동이라고 하였으며, 고종 32년(1895)에 문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산동(其山洞), 금천동(錦川洞), 송산동(松山洞), 대포리(大浦里), 연화동(蓮花洞) 일부를 병합하여 녹문리(鹿門里)라 해서 산양면에 편입되었다. 서리기, 서록리(棲鹿里) 옛날부터 산은 높지 않으나 빼어나게 아름답고 물은 깊지 않으나 맑게 흘러서 사슴이 많이 살아 서록리라 불러오다가 서리기로 변음이 되었다. 녹문(鹿門), 녹문동(鹿門洞) 1880년대에 유학자 진사(進士) 고성겸(高聖謙)의 호가 녹리(甪里) 또는 녹문(鹿門)이라고 하였으며 제자를 많이 양성하였는데 그 문하생들이 녹문선생이 계시던 곳이라 하여 녹문(鹿門)이라고 불렀다 한다. 개성고씨(開城高氏) 녹리(甪里) 고성겸(高聖謙)의 장수소(藏修所)인 녹리정(甪里亭)과 그의 제(弟) 북파(北坡) 고문겸(高文謙) 소구(所構)의 북파정(北坡亭)이 있다. 치골, 기산(箕山) 홍박천(洪博川)이란 사람이 삶의 터전을 마련코자 각지를 찾아 다니다가 잠시 몸을 쉬기 위해 이곳에 앉았는데 그 자리의 잔디가 너무나 아름다워 신발을 벗고 앉아 쉰 곳이라 하며,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게 되어 기산(箕山)이라 하였다고 하며 치골이라고 한다. 녹문보(鹿門洑) 녹문 서쪽에 있는 보(洑)인데 수세(水勢)가 좋아 녹문들 수리(水利)를 담당한다. 원고개 치골에서 연소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원고개라 부른다. 서낭당고개 서리기에서 과곡리 점마로 넘어가는 고개에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당고개라 부른다. 구뱀이(九夜谷) 구야산 동쪽에 있는 마을을 구뱀이, 구야곡이라 부른다. 현리(縣里) 면소재지에서 북쪽 약 4㎞거리에 위치하며 본래 신라때 근품현(近品縣)이라 하였으며 경덕왕 16년(757) 때 가유현(嘉猷縣), 고려 헌종 9년(1018)에 산양현(山陽縣)이라 개칭, 상주군에 병합되고, 조선시대때 산동면(山東面)이 되어 현리(縣里)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문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역리(新驛里), 봉저리(烽底里) 일부를 병합하여 현리(縣里)라 해서 산양면에 편입되었다. 지짐마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순천박씨(順天朴氏)가 현재의 마을 동쪽에 살면서 지짐마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직전에 인천채씨(仁川蔡氏)가 들어와서 마을 이름을 현리(縣里)라 하고부터 지짐마라는 마을이 없어졌다. 신역골(新驛谷) 현리 동쪽에 있는 마을 이름인데 역(驛)이 새로 생겼다 하여 신역 또는 신역골이라 한다. 창마(倉洞) 조선조때 오면창(五面倉)으로 산동(山東), 산서(山西), 산남(山南), 산북(山北), 산양(山陽)의 5개 면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이곳 창고에 보관하여 군량미, 이재민의 구호미 등으로 이용하던 큰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창마(倉洞)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봉당 옛날 빈민을 구호하던 곳이며 여행인이 숙식도 하고 집 없는 사람들이 살기도 하던 곳이다. 학실(學室) 마을의 서숙(書塾)이며 일제때에는 야학도 하던 곳이나 1946년 홍수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근품산(近品山), 근암성(近巖城) 근품산(近品山)은 현리 마을 뒷산으로 신라때 근암성이 있었다. 신라 경애왕 4년(927) 봄에 고려 태조가 점령했던 근품성을 같은 해 가을에 견훤이 탈환하고 고울부(高鬱府 : 현 영천지방)을 점령 신라의 서울(慶州)을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치마장(馳馬場) 근품산에서 내려오는 등성이에서 견훤이 말을 달렸다고 하여 치마장이라 불렀다. 사직봉(社稷峯) 신역곡(新驛谷) 동편에 있으며 과곡과의 경계에 있다. 옛날에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다 하여 사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부처모리 약석으로 가는 길 산 모퉁이에 부처모양의 돌이 서 있어 이렇게 부른다. 옻샘 근품산 뒤에 조그만 샘이 있어 물이 조금씩 나오는데 옻이 오르거나 땀띠가 나면 이 샘물에 씻으면 깨끗이 나았다 하여 옻샘이라 한다. 동샘 현리 지세가 배(舟)혈이라 하여 샘이 적었는데 마을 동편 박산재 넘어에 있는 샘이다. 부암리(富岩里)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4.6㎞거리에 위치하며 본래 상주군 산동면(山東面)의 지역으로 1895년에 문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경외리(京外里)와 형천리(兄川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부암리라 해서 산양면에 편입하였다. 봉우재 : 봉저(烽底) 부암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 마을 뒤에는 비조산(飛鳥山)이 있는데 옛날 봉화(烽火)를 올리던 곳으로 봉화를 올리던 산 밑의 마을이라 하여 봉우재 또는 봉저(烽底)라 불리우고 광해군때 인천채씨(仁川蔡氏)가 입향했다. 국부암(局富岩) 부암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부자바위가 있었다 해서 부암(富岩)이라 하였는데 1972년 새마을사업으로 도로를 확장할 때 없어졌다. 보밑(洑底) 마을이 형성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터인지 보밑 또는 비밑이라 불렸다. 마을 뒤쪽에는 현재는 경천댐 수로가 설치되었으니 그 옛날 수로가 생길 것을 예측이나 한 듯한 마을 명칭이다. 원터 일부는 형천지역이고 일부는 부암지역으로 임씨(林氏)가 터를 잡았으나 지금은 한 집도 살고있지 않으며 부암 본래의 터라 해서 원터라고 한다. 노양영각(魯陽影閣)과 충사재(忠思齋) 임진왜란때 명장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공을 세우고 귀화한 중국 영양인(穎陽人) 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의 영정을 모신 노양영각이 1890년에 창건되었으며, 1946년에 천만리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 충사재(忠思齋)라 한다. 숭효정(崇孝亭) 1985년 천효건(千孝建)을 위해 건립한 정자가 숭효정(崇孝亭)이다. 참새골 비조산(飛鳥山) 밑에 있는 골짜기에 찬샘이 있어 찬샘골이라 하였는데 변음이 되어 참새골이라 부른다. 고취봉(古鷲峰)과 고총(古塚) 노양영각(魯陽影閣) 뒤쪽에 봉우리를 고봉이라 하며 신라때 고총(古塚)이 있어 몇차례 도굴을 당하여 훼손된 것을 10여년전에 마을에서 보수를 하였다. 과곡리(果谷里) 갬실·개미실(蟻谷) 면소재지에서 동북쪽 약 4㎞거리에 위치하며 본래 상주군 산동면(山東面)의 지역으로서 과실 또는 과곡이라 하였는데 1895년에 문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과하리(果下里), 두계리(斗溪里), 점마(店村), 과상리(果上里), 우동(愚洞), 봉저리(烽底里) 일부를 병합하여 과곡리(果谷里라 해서 산양면에 편입되었다. 과상골(果上谷), 과곡(果谷), 과상동(果上洞) 옛날에는 거묵동(居默洞)이라 불렀다고 하나 고려시대에 과상동이라 자칭하게 되었던 바 그 유래는 과일나무가 많았으며 두 자연부락중 위쪽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과상동(果上洞)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통정(通政) 철성(哲成)이 살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세진정(洗塵亭)이 있다. 과하리(果下里), 과화리(果花里) 과곡 아래쪽에 있는 마을인데 원래 과곡, 거목동이 같은 마을로 자연부락중 위쪽에 위치하는 것을 과상, 아래쪽을 과하라 부른다. 예천임씨(醴泉林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임수량(林秀良)의 남고정(南皐亭)이 있다. 점마(店村) 과곡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1880년경에 옹기를 구워 생계를 이어가는 마을이라 하여 점마라 부르고 옹기점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말계, 말기, 두계(斗溪) 점마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계곡물이 흘러내려 여기서 계곡의 종점을 이루었다고 말계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또한 뒷보에서 흐르는 빗물의 끝이라 하여 말계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수시미 들 과곡 서쪽에 있는 들, 점마 앞들인데 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