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9. 【예연서원】
임란 영웅 곽재우, 곽준을 제향하는 사액서원
글·송은석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앞서 연속 2회에 걸쳐 대구시 달성군에 산재한 현풍곽씨 문중의 서원을 살펴보았다. 먼저 현풍곽씨 영남파의 맏집인 원동 목사공파의 「암곡서원」을 살펴보았고, 그 다음으로 셋째 집인 솔례 청백리공파의 「이양서원」을 살펴보았다.
본래 현풍권역에는 속칭 현풍곽씨 3대 서원이 있었다. ‘이양서원, 남계서원, 예연서원’인데 모두 흥선대원군시절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이양서원과 예연서원은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남계서원은 남계서당으로만 복원되어 있는 실정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현풍곽씨 3대 서원 중 하나인 유가면 가태리(구례)에 있는 「예연서원」이다. 참고로 예연서원은 임난 영웅인 곽재우와 그의 재종숙이자 역시 임난 영웅이었던 곽준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천강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함은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으로 임난 당시 불렸던 곽재우 장군의 별칭이다. 곽재우는 자가 계수(季綏)요,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시호는 충익(忠翼·事君盡節曰忠 思慮深遠曰翼)이다. 부친인 황해도 관찰사 정암(定庵) 곽월(郭越)의 3남으로 1552년(명종7) 8월 28일 외가인 의령에서 출생했다.
세살 때에 어머니 강씨를 여의었으나 타고난 기상이 남달랐다. 8세에 용연정(龍淵亭)에서 글을 읽었으며 10세 때 춘추를 읽었다. 16세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녀인 상산김씨(商山金氏)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조식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글 읽는 여가에 무예와 함께 병서·천문 등의 학문을 두루 익혔다.
34세에 문과 정시(庭試)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지은 글이 선조(宣祖)의 뜻에 거슬려 그만 파방(罷榜·급제가 취소됨) 되었다.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낙동강 가에 정자를 지어 위기지학에 힘썼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때 관군은 연전연패하고 또 변방의 장수와 수령(守令)·방백(方伯)들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으며, 백성들은 모두 산 속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그는 포의서생(布衣書生)으로서 의병창의를 결심, 의령(宜寧)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이때가 1592년 4월 22일이었는데 조선 최초의 의병 창의였다.
창의 당시 그는 전일에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명나라 천자로부터 선물로 받은 운금(雲錦)과 은(銀)으로 된 말안장으로 군장(軍裝)을 갖췄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그를 일러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렀다. 정암진 등에서 왜적을 물리치니 휘하의 의병수가 무려 천 명에 달하였다. 이에 초유사 김성일의 추천으로 유곡찰방(幽谷察訪), 형조정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전란중이라 모두 부임치 않았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당시 방어사였던 장군은 창령의 화왕산성으로 백성과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성을 굳건히 지켰다. 당시 산성에 모인 인물들의 이름이 화왕산성 동고록(同苦錄)에 전하고 있다. 난이 평정되고 난 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찰리사(察理使)·한성우윤·경상좌병사에 제수되었고, 광해군으로부터 「당세명장유일인(當世名將唯一人)」이라는 교서가 내렸다.
이후 삼도수군 통제사·오위도총부부총관·한성좌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함경감사·함경병사·함흥부윤에 제수되었으나 곧 물러났다. 1617년(광해9) 낙동강의 「망우정(忘憂亭)」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66세였다.
사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달성군 유가면의 예연서원, 의령의 충익사, 대구 망우공원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 등에 제향 되었다.
일문삼강의 벼리, 존재 곽준
곽준(郭䞭)의 자는 양정(養靜)이요, 호는 존재(存齋)이며, 시호(諡號)는 충열(忠烈)이다. 청백리공 곽안방의 현손이며, 곽지완의 차자이다. 1551년(명종6)에 출생하고 1597년(선조30)에 졸하였다.
일찍이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문하에서 대암(大庵) 박성(朴惶),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등과 같이 수학하고 뒤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에 사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소 친교가 돈독했던 의병대장 송암(松庵) 김면(金沔)의 참모로 거창 등에서 활략이 컸다.
1594년(선조27)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고, 둔전차사(屯田差使)를 겸하였는데 이때 둔전을 잘 관장해서 부족한 군량을 보급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 안의현감이 되어 왜적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하여 황석산성을 사수하는 중책을 맡았다. 1597년(선조30) 체찰사 이원익의 추천으로 삼읍군(三邑軍)의 수령이 되었다. 그해 8월 정유재란을 맞아 황석산성에서 전 함양군수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가등청정의 대군과 맞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이때 그의 두 아들과 큰 며느리 그리고 출가한 딸이 각각 효(孝)와 열(烈)을 지켜 일시에 죽음을 맞았다. 이에 조정으로부터 아비는 충을, 아들은 효를, 며느리와 딸은 열을 지켰다하여 「1문3강(一門三綱)」의 정려(旌閭)가 내렸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현풍의 예연서원과 안의의 황암사에 제향하였다.
곽재우, 곽준 신도비(각)
‘충과 의’의 랜드마크, 예연서원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 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40호(존재선생실기책판)
▖소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구례길 123
「예연서원(禮淵書院)」은 임진·정유양란 의병장인 망우당 곽재우와 그의 재종숙이자 ‘1문3강(一門三綱)’으로 세상에 알려진 존재 곽준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최초 창건은 1618년(광해군10) 지금의 현풍면 대리(大里) 솔례(率禮)에 세운 「충현사」에 기원한다. 이후 1674년(현종15) 당시 현감이었던 류천지가 규모를 확장하였고, 1677년(숙종3) 「예연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1715년(숙종41) 비로소 유가면 가태리(구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나, 6·25사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977년과 1984년 두 번에 걸친 복원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예연서원 외삼문 숭의문
예연서원 강당 경의당
경의당 옆으로 전사청과 장판각이 보인다
건물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형으로 앞쪽에 강당이 있고 뒤쪽에 사당이 있다. 솟을 외삼문인 「숭의문(崇義門)」을 들어서면 동·서재 없이 정면에 강당이 있다. 강당인 「경의당(景義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 좌우 각각 1칸씩은 방이며 전면으로 반 칸 정도 퇴 칸을 두고 있다. 정면 처마아래에 예연서원 편액이 게시되어 있으며, 「경의당·집사분정판·중건기·존재망우양선생봉안문(存齋忘憂兩先生奉安文)·숙종사액제문(肅宗賜額祭文)·상량문·국기일판(國忌日板)」 등의 편액이 대청 사방 벽면에 게시되어 있다. 강당 뒤편 별도의 담장 안에는 단청을 입힌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사당 「충현사(忠賢祠)」가 있는데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앞쪽이 경의당 뒤쪽은 사당인 충현사
예연서원의 경우 건물의 당호를 잘 살펴보면 ‘의’·‘충’에 방점을 두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서원의 당호는 건물마다 붙이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이에 근거한다면 외삼문과 강당의 당호는 해당서원이 표방하는 핵심 ‘정신자세’와 ‘교학사상’을 담고 있다. 예연서원의 경우 외삼문은 ‘숭의문’이요, 강당은 ‘경의당’이다. 다시 말해 예연서원은 입원(入院) 유생들을 향해 ‘의’를 숭상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학문의 목적을 ‘의’에 두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연서원 내삼문 충의문
예연서원 충현사
망우당 위패(증판서 충익공 망우당 곽선생)
존재 위패(증판서 충렬공 존재 곽선생)
또한 사당의 당호는 제향된 선현으로부터 본받아야할 덕목을 담고 있다. 예연서원은 내삼문이 ‘충의문’이요, 사당은 ‘충현사’이다. 역시 충과 의를 표방하고 있다. 참고로 서원 동·서재의 당호는 학문을 하는 자세, 요즘으로 치면 교훈 아래 등급인 급훈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예연서원의 경우는 현재 동·서재가 없다. 예연서원 동·서재의 당호, 독자들께서 나름 추측해보기 바란다.
전사청과 장판각
강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우측으로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전사청(典祀廳)과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장판각에는 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존재선생실기책판(存齋先生實記冊板)」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판은 임진왜란 때 장렬히 싸우다가 전사한 존재 곽준에 대한 기록을 새긴 것이다. 본 실기는 1695년(숙종21)에 편찬되었고, 전해지는 책판은 1766년(영조42)에 판각되어 이곳에 보존된 것이다. 이 자료는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특히 경상도 지역의 활약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서원입구에는 ‘홍의장군 신도비’와 ‘충렬공 신도비’가 한 비각 안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홍의장군 신도비는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충렬공 곽준의 신도비는 홍의장군 신도비보다 빠른 1634년(인조12)에 현풍 대리 솔례에 세워졌다. 그 뒤 1761년(영조37)에 홍의장군 신도비가 이곳에 건립될 때, 충렬공 신도비를 옮겨 함께 세운 것이다. 현재의 신도비와 비각은 1984년 다시 세운 것이며, 이 비(碑)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이 흐른다고 하여 ‘땀나는 신도비’라고 암암리에 소문이 나 있기도 하다.
상부구조물만 남아 보존되고 있는 옛 비각 바깥문
예연서원 외삼문 밖 곽준 나무
그리고 서원입구에는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 한 그루와 수령 300년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각각 곽재우나무, 곽준나무로 일컬어지고 있다. 참고로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건물인데, 예연서원 바로 아래에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불천위 사당인 「경충재(景忠齋)」가 별도로 있다.
경충재 편액
경충재 외삼문
곽재우 불천위 사당의 제청인 경충재
경충재 뒤 곽재우 불천위 사당 내삼문
곽재우 불천위 사당
곽재우 불천위 사당 감실과 신주독
에필로그
옛말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한낱 식물도 이러할진대 만물 중에서 가장 신령한 기운과 형체를 부여받았다는 인간은 더 말해서 뭣 하겠는가?
옛 사람들은 또 이르기를 ‘효자 집에서 효자 나고 충신난다’고 했다. 충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효가 가정을 떠나 사회로 확장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가정이라야 ‘충·효·열’ 삼강(三綱)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현풍곽씨 500년 세거지 ‘솔례(率禮)’, 이는 예를 숭상하며 따른다는 의미이다. 솔례마을 앞에 세워진 충·효·열의 상징 「현풍곽씨 12정려」 그리고 조정에서 충과 의를 표창하여 사액서원으로 승격시킨 구례(具禮)의 예연서원. 이러한 현풍곽씨 문중의 인물들과 유적들을 돌아보노라면 문중에 있어 문풍(門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예연서원이 있는 동네는 본래 유가면 가태리이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은 가태리라 부르지 않고 굳이 구례라는 동명을 사용한다.
구례(具禮), 예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구례마을 초입의 신도비각과 곽재우 나무
2015.05.8
풍경산방에서 송은석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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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 드립니다
좋은 자료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곽문 홈페이지에 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야성 송씨이신지?
좋은 자료 대단히 감사합니다.
충렬공파 32대손 입니다.
좋은자료 잘보고갑니다 우리 선조님들의 나라사랑 본받아서 작금의 이 난국도 잘 해결 되었으면 합니다. 청은공파 32대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