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후 1백년간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나주초등학교 주변 이야기
목 차
☐ 발간사
1. 별책부록을 집필을 하면서
2. 애향(愛鄕)의 시사점을 던져주는 숨겨진 이야기들
3. 병인년 박해(迫害)와 나주 무학당(武學堂) 이야기
4. 구한말(1896년) 최초의 나주 항일 의거
5. 동학과 나주 무학당(武學堂) 이야기
6. 나주초등학교 일본인교장 반대운동과 퇴학사건
7. 나주초등학교와 호남비료공장의 숨은 역사 이야기
8. 나주지역 인재육성에 헌신해온 금하 서상록 이야기
9. 개교백주년 기념사업 숨은 이야기
1. 별책부록을 집필을 하면서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는 과거의 역사가 미래의 방향을 찾아가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망망대해에서, 깊은 산속에서 나침반이 없다면 어찌 길을 찾겠는가.
그러므로 역사의 집필에 있어서도 과거의 기록을 통해 미래의 방향을 찾을 수 있어야 그것은 살아있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대학수험에서나, 취업시험에서 역사과목이 없어진 것은 곧 역사 냉대이며, 역사가치관을 잃은 국민은 항상 혼돈과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작금의 한일 역사왜곡을 하는 일본이나, 한중 역사왜곡을 하는 중국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고 있지만, 우려만 가지고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을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없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이나, 과거 고구려 땅이었고, 발해의 영토였던 그 땅이 중국의 소수민족 변방 국가라고 억지 부리는 중국을 보고 분개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변국가의 역사왜곡은 우리 내부의 역사왜곡을 바르게 잡지 않고 있는데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이 구한말 우리나라 전국토를 측량할 때 명당마다 쇠말뚝 박고, 지명을 왜곡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왜곡된 지명을 우리는 지금도 지도에 표기하고 또 교과서에 쓰여 지고 있지 않은가. 서울의 지명 1/3은 일본이 만든 지명이라고 한다. 그 유명한 인사동도 일본이 만든 동명이란다.
우리는 몰라도 일본은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조선의 땅에서 쫓겨나왔어도 지명으로 보면 한국의 많은 땅은 일본 지명이기에 일본 땅이라고 볼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역사왜곡을 놓아두고 중국, 일본에게 역사왜곡 말라고 강력히 항의한들 먹혀들어 가겠는가.
역사를 바로 잡는 것, 역사를 바로 아는 것, 그것은 곧 애국이요, 애향의 출발인 것이다.
나주초등학교는 나주 발전의 역사 축이었다.
1907년 나주초등학교 입지를 무학당의 위치로 잡은 것도 학당으로서 무술연마의 운동장과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주초등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무학당의 역사를 알아야 미래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무학당에서의 역사 피 흘림을 모르고, 또는 외면해 버리고 어찌 미래의 역사방향을 찾겠는가.
이와 같이 나주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과 슬픔의 역사가 점철 되었지만, 이를 사관의 눈으로 보려거나, 일제 식민사관을 탈피하는 우리의 정체성으로 역사를 기록 한바가 없어서 금반 나주초등 백년사 집필에 즈음하여 최초로 “반성의 눈”으로 보는 우리 역사를 집필하였다.
자료 수집의 어려움, 증언해줄 만한 어르신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흘러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주워 모아(拾遺) 역사에 접목하였기에 혹여 불충분한 부분은 더욱 발굴하여 제2의 부록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2. 애향(愛鄕)의 시사점을 던져주는 숨겨진 이야기들
<글/나천수>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주 애국 애향이라는 말을 하고, 또 애국 애향을 하자고 호소를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애국이고 애향이겠는가.
산업화 사회로 진전 되면서 농촌인구의 대도시 유출로 농어촌은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경기마저 침체해 가고 있는 실정에서 지방의 수장들은 인구증대가 지역발전의 관건인 것을 알고 인구 늘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심지어는 특별권력관계에 있는 관공서 직원들의 근무지로 주소지 변경이나 실제 이사를 오도록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시민이 찾아오는 농어촌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함평군은 나비 프로젝트로, 무안군은 연꽃 프로젝트로, 보성은 녹차 프로젝트로, 영광은 굴비 프로젝트로 단기적 이벤트성 축제를 통해 지역마케팅(place-marketing)을 하고 있는데,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예산의 낭비라고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지역을 팔기 위해서 하는 궁여지책의 몸부림이라고 하면 오히려 박수를 쳐야할 일이다.
이렇듯 애국, 애향이라는 말을 입으로 내뱉기는 쉬워도 도대체 어떤 행동이 애국, 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문제의식을 갖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가는 편이 많다.
1593년 임진왜란 진주성 제2차 혈전 때에 영남의병장 곽재우와 영남의병들은 중과부적을 이유로 성을 지키지 않고 성을 떠나 버렸을 때 나주인 김천일 선생을 주축으로 하는 호남의 의병 장졸들은 진주성과 호남곡창은 마치 순치(脣齒)의 관계 즉 입술과 이빨과의 관계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곡창이 무너지고, 호남곡창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역설하면서 호남의병 제장졸들 모두 목숨을 던져 싸웠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호남 땅이 아닌 영남 땅에서 100여전의 전투를 하다 성이 붕괴되어 함락됨으로서 김천일 선생과 큰아들 상건, 화순인 최경회 선생과 그의 부인 논개, 고경명 선생의 큰아들 고종후 등 호남 의병들 모두 순절하였는데, 후세에 이들에게 패잔병이라 평가한다면 누가 국가 위기에 목숨을 던져 싸우려 할 것인가.
해방이후 건국이 되면서 일제청산이 과제였으나, 이승만 정권 때 다시 친일했던 사람들이 권력의 핵심 부서에 있어서, 조국 광복 운동을 했던 그들이나 후손들은 오히려 사회적 냉대를 받았는데, 그러한 풍토에서 무슨 애국, 애향을 부르짖겠는가.
금반 나주초등 백주년에 즈음하여 기념책자와 기념비 건립을 위해 애국, 애향이라는 교육적 차원에서 나주인에게 시사점을 던져주는 가슴 아픈 사건들이 발굴되었다.
이것을 덮어 놓으면 그저 흙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지만, 미래의 나주 발전을 위해서, 아니면 미래의 나주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많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본다.
지방의 수장이든지, 지방의 엘리트 지도자층이든지, 나주지역 여론 형성층이라면 이 문제를 들춰내어 시민공감대의 해결점을 찾기를 기대한다.
나주초등학교는 원래 무학당으로서 천주교가 이 나라에 들어올 때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요, 1894년경의 동학 농민군들도 무학당에서 피를 흘린 곳이며, 1896년 나주도청을 광주로 이설케 하는 사건의 진원이 되는 단발령 의거 주모자들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이들 모두 사리사욕으로 그리했던 것인가.
1800년 말경 신문화가 들어오는 경로가 천주교였던바, 신문화에 굶주린 머리가 깨인 그분들의 피 흘림을 역사의 눈으로 보면 애국의 모습이다. 1894년의 동학 농민 운동도 민주화의 씨앗인 애국의 모습인 것이다. 1896년 단발령 의거도 1910년 한일병탄 이전에 있었던 이 지역 최초의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의 모습이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하신 분들을 모른 체 하는 것은 애국, 애향이 아니라고 본다.
또 하나의 발견은 남산 공원에 방치된 호남비료공장 김윤근 사장 공덕비와 금하 서상록 기념비, 남산공원 정화 기념비, 그리고 다보사 골짜기 그늘에 가려진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독일인 호만의 추모비이다.
도대체 이들 비는 본인이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닌 나주시민의 이름으로 만들어져 건립된 듯한데 왜 훼손되고 방치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민선 지방수장들은 나름대로 애향의 철학을 가지고 행정을 펼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애향은 나주에 살거나, 나주를 고향으로 하는 시민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다. 애향은 나주에 잠시 머물며 살다가는 외래객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들이 업적으로 남겨놓은 애향의 흔적을 더욱 빛나게 해줌으로서 장차 더 많은 애향의 고향인사, 출향인사, 외래인사가 배출될 것이니 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누구에게 나주를 위해 애향활동을 해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애향의 의미를 시사점으로 제기하고자 한다.
3. 병인년 박해(迫害)와 나주 무학당(武學堂) 이야기
<글/김충호>
"무학당" 이란 이름은 고려시대 국학에 설치되어 무예를 가르치던 것이 "무학재"였는데 그 이름을 빌려 "무학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1907년 5월20일 나주초등학교가 설립된 장소가 원래는 무학당 터라고 한다. 무술을 가르치는 학교였던 관계로 나주초등학교를 그곳에서 개교한지도 모른다.
어떻든 무학(武學)의 장소였기 때문에 조선조 말에 천주교 탄압에 따른 교인의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그 위치조차 희미한 나주 무학당은 광주 대교구 내에서는 유일하게 순교 터가 있었던 곳이다.
무학당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 나주 초등학교 안의 한쪽 화단이 박해 당시 사형 터로 쓰였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그나마 주춧돌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무상한 세월과 함께 후손들의 못난 신앙을 돌이켜보게 한다.
나주(羅州)는 전라남도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크게 번창한 고장이었다. 여기에 정식으로 본당이 설정된 것은 1935년 5월의 일이다. 하지만 나주 본당의 뿌리는 1866년 병인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주는 천년의 고도로서 긴 역사를 지닌 목사 고을로 동시에 교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도에 대해서 내린 병인대박해(1866년)의 와중인 1872년 나주 무학당 앞에서 세분의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 하다 피를 흘리며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무학당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 나주초등학교 안의 한쪽 화단이 박해 당시 사형 터로 쓰였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무학당에서 얼마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는지 그 정확한 수나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치명(致命) 일기」에 이곳에서 치명한 세 분 순교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그 세분 순교자 중 한 분인 강영원(바오로)은 전북 용담 사람인데 정읍에서 1871년 11월23일에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 백지 사형으로 1872년 51세의 나이에 치명하였고, 두 번째 순교자 유치성(안드레아)은 본래 경상도가 고향이나 전북으로 이사와 무장 암치에서 살다가 같은 해에 체포되어 30여대의 태형과 돌로 침을 받는 형벌을 받아 강영원과 함께 같은 날 48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그는 강영원과는 달리 쏟아지는 돌더미 속에서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마지막 순교자 유문보(안드레아)는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 1872년에 잡혀 감옥에 끌려와 갖은 고문과 질병의 휴유증으로 고생하다 1872년 정월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위의 세 순교자에 대한 기록은 조선교구 제 8대 교구장인 뮈텔 민 대주교(Mutel : 民德孝)가 1891년부터 4년 동안 병인년 박해 희생자 877명의 행적을 엄밀히 조사하고 지역적으로 정리하여 1891년부터 발간한 <치명일기>라는 문헌에 나온다.(여기에는 877명의 순교자 기록이 있고 이중 24명이 1968년에 시복이 되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대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다.)
나주는 조선시대에 목사 고을로 병영과 감옥이 있었고 형이 집행되던 곳이었기에 천주교 박해시대에 더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을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에 기록으로 남은 분들은 이 세 분뿐이며, 현재 순교자들의 후손을 찾을 길이 없고 여러 설이 있으나 그들의 시신은 나주 산야(나주초등학교 남쪽 편 옛 공동묘지 터/현재는 LG 나주공장) 어느 곳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어느 한 사람 소중하지 않다 할 수 없는 이들 순교자들이 흘린 피 위에 나주 지역의 천주교는 그 터를 닦았다 하겠다. 비록 그 순교 터의 위치는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억하는 이도 없이 잊혀졌다 할지라도 그곳 땅과 하늘에 서려 있는 확고한 믿음은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터를 닦은 나주에는 1933년에 와서 임시 공소가 서고 이듬해에는 대지 3천 평을 확보,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준공했으며 1935년에 들어서 비로소 본당이 설정된다.
나주 본당은 광주대교구에서 긴 역사를 지닌 본당 중의 하나이다. 2004년 5월 5일 나주 본당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감사미사를 봉헌하였다.
■ 순교자
◆ 강영원 바오로 (? -1872)
전북 용담 사람으로 1871년 11월 23일 정읍에서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하옥되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포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통경으로 기도를 바쳤다. 당시 함께 갇힌 유치성과 유문보에게 유감에 빠지지 말자고 격려하며 굳굳이 참아 견디었다. 마침내 나주 무학당 앞마당에서 영장의 지휘아래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얼굴에다 물에 적신 창호지를 여러 겹으로 덧씌워 질식시키는 백지(白紙)사형을 받아 1872년 3월 9일에 치명(致命)하셨는데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 유치성 안드레아 (? -1872)
본래 경상도 사람으로 전북 무장 암치에서 살다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갇혔다. 그는 신문을 받으며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자 영장은 유치성의 발등에 불을 지지도록 하고 나아가 돌무더기에 묻혀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다 동료 강영원과 함께 같은 날 백지사형으로 치명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 유문보 안드레아 (? -1871)
전남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 나주 포교 김용운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에다가 염병에 걸려 1871년 11월쯤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니,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 분의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순창 묵상 사람 최성화(안드레아)와 장성 수도사람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무학당에서 얼마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는지 그 정확한 수나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치명 일기」에 이곳에서 치명한 세 분 순교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4. 구한말(1896년) 최초의 나주 항일 의거
<글/나천수>
역사를 보는 눈을 사관(史觀)이라 한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볼 견(見)자를 써서 사견(史見)이라 하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볼 관(觀)자를 써서 사관(史觀)이라 한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역사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 일본 등 서구 열강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려고 다가올 때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더욱이 일본이 신식무기로 무장하면서 1910년 한일병탄이 되기까지 일제의 악랄한 야욕은 급기야 황후를 살해하고, 고종은 무서워 러시아 공관으로 자리를 피하는 등 무너지는 구한말의 정세는 그야말로 풍전 등화였다. 일제는 개화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주권과 권력을 하나씩 잠식해 들어 왔지만 국가의 녹을 먹는 위정자는 일제 항거에 앞장서지 못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을 치른 민족, 또다시 일본의 보이지 않은 침략적 행위를 차마 볼 수 없는 민초들, 유림들이 봉기한 것이 1896년의 나주 단발령 의거이다.
일본 식민사관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나주의 민란인 것이다.
민이 관을 습격하여 개화파 앞잡이 등을 죽였으니 사건치고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1세기가 지난 후에 사관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이 몸부림을 구한말 그 당시는 개화파 집권 세력에 반대한 것이니 그들 눈에는 민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종과 태자는 궁궐 내에서 일본 자객에 의한 민 황후와 시해 사건을 보고, 일본 무력이 너무 무서워 1896년 2월11일부터 약1년 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국무를 볼 수 없던 상태였다. 이를 역사는 아관 파천이라 한다.
고종은 러시아공관에 거의 연금 상태로 국무를 볼 수 없던 시기에 이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항일 나주민중봉기를 일제와 개화파 앞잡이들이 이를 민란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민족자존(民族自尊)이라는 말, 민족자결(民族自決)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존중하며, 긍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면서,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만약에 자기 일을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면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이러한 자존이나 자결의 명분을 국가단위나 개인 단위에서 잃었을 때 어찌될까,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만들어 지는 것이다.
자기 역사를 자신들이 만들어 간다면 별문제이지만 만약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면 민족자결을 표방할 수 있었겠는가.
섬나라 일본은 대륙진출을 위해 끊임없이 조선 땅으로 진출을 시도 하였다.
고려 때의 왜구침략이나, 조선조 때 임진왜란, 구한말의 일본 침략 등 일본의 우리나라 침략의 야욕은 그치지 않았다.
오늘날도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땅 뺏기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3사람이 있단다. 백제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였던 쇼도쿠다이찌(聖德太子), 조선을 침략하였던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모두 우리나라와 관계된 역사 인물들이다. 성덕태자는 백제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의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꽃 피우게 한 자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조선 침략자의 우두머리이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충신이라면 고려 때 정지 장군, 조선 조 때 이순신 장군, 일제하에 김구 선생을 들 수 있다.
모두 항일 전쟁이나 항일 운동을 하신 분이다.
한일간에는 무슨 악연으로 이렇게 역사상에 조선침략과 항일 운동을 한 인물이 상반되게 존경받는 것인가.
19세기말 일제의 조선 침략은 1875년부터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1875년 일본이 조선의 문호를 열기 위해 일으킨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도에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것이다. 이를 빌미로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을 강요에 의해 체결하였는데 최초의 근대적 문호 개방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의 침략적 의도가 조약문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후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고 1884년 갑신정변으로 한성조약(1884년)과 천진조약(1885년) 체결, 1889년 방곡령사건, 1894년 1월 동학농민운동으로 일본군 신식무기 대 동학농민군 구식 무기의 싸움으로 결국 혁명이 좌절되는 역사가 전개되었고, 1894년 7월 갑오개혁으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포위하는 사건,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고, 민 황후 시해의 만행을 본 고종은 두려운 나머지 1896년 2월 러시아공관으로 몸을 피하는 소위 아관파천의 사건이 터졌다.
1904년 2월 러일전쟁까지 승리로 이끈 일본은 힘의 지배논리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통신망, 항해권, 어업권을 일본이 차지하였으니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일본의 조선 침략은 주도면밀하게 힘의 논리로 강압에 의해 단계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개화를 빙자하여 서서히, 음모를 가지고 조선을 옥죄어 들어 왔다.
그리고 안하무인의 힘의 논리로 정부를 강압하였으니, 이를 본 선비들은 개화를 빙자하여 조선을 침략해오는 일본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정부를 원망하면서, 임진왜란 때 그랬듯이 각 지역마다 의병을 봉기할 조짐이 나타났다.
그리고 실제 나주에서 민(民)이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일제 앞잡이를 죽이는 사건이 터지자, 역사적으로 볼 때 항일의 정신이 뚜렷한 나주에 도청을 두어서는 조선 침략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일본은 힘의 논리로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도청을 허허벌판 광주로 옮겨버린 것이다.
2005년 10월 전남 도청의 남악 신도시 개청을 앞두고, 일제의 사주에 의해 광주로 이전된 도청을 다시 전라남도민의 뜻으로 신도시로 이전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에서 보면 일제식민사관 탈피라는 한 획이라고 보아야 한다.
원래 이 지역의 도청은 천년 나주목(羅州牧)인 이곳에 있었다. 903년 왕건의 나주 진출이 인연이 되어 2대왕 혜종을 낳고 1018년부터 나주 목으로서 1천여 년 간 남도의 거점역할을 하였다.
전라도라는 명칭이 전주부(全州府)의 전(全)자와 나주부(羅州府)의 나(羅)자를 합성한 것이란 것을 알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중심지에 있었던 나주 도청이 1896년에 광주로 이전된 것은 전술한바와 같이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압력에 굴복한 사건에 의해서 되었다는 점에서 도청 이전은 일제 식민사관의 탈피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세기말은 항상 불안한 사건이 많이 터진다는 말처럼 19세기말 우리나라에도 조용하지는 않았다.
나주 도청의 광주 이전은 동학 농민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조병갑 고부군수의 학정에 시달려 온 농민의 반발이 기폭제가 되어 동학 농민 운동이 시작되었으니, 호남지역의 전 지역이 관의 횡포에 시달려온 터라 동학운동은 삽시간에 힘을 가지고 전파되었다.
거의 전 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되었으며, 유일하게 나주와 운봉만 동학군의 점령이 되지 않았다.
동학군이 전주까지 점령해 버리자, 1894년 5월5일 조선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청국군이 아산만으로 상륙한다.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이 한양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5월6일 인천항에 군대를 상륙 시키고, 일본은 1885년 4월에 체결한 천진(天津)조약의 위반이라며 청에 항의를 한다.
천진(天津)조약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대해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장래 출병 할 때는 서로 통고 한다는 약정이다.
우리나라 영토 내에서 청일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 때문에 어느 나라든지 조선에서의 선점을 허락지 않은 것이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2년에 걸쳐 청일 간에 해전과 육전을 하여 일본이 청국을 격파함으로서 전쟁은 일본 승리로 끝났다. 1895년 3월3일 청나라 이홍장이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강화조약에 조인한 것이다.
이후에 발발한 노일전쟁은 1904년에서 1905년에 걸친 전쟁인데,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일본의 반발로 국교단절과 선전포고로 압록강 연안 전투, 만주 전투, 대한해협 해전으로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함으로서 일본의 조선 침략은 노골화 된 것이다.
이 두개의 전투에 승리하였으니, 조선정부에 대해 강압적 행사는 너무 쉬웠을 것이다.
강압에 의해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의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통신망을 접수하고, 경부선, 경의선 부설권을 갖고, 연해 어업권을 갖고, 전국의 개간권까지 획득한 것이다. 이는 힘의 논리로 빼앗아 간 것이라 하겠으니 이미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화로 굳히기였다.
1895년 7월5일 김홍집(총리대신) 친일 내각이 들어서면서 친일파가 국정을 완전 장악하였다. 1895년 8월20일 민 황후가 시해되고, 1895년 11월17일 칙령으로 양력사용과 단발령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해오는 침략행위에서 추진되고 있지만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 전국의 선비, 유림들의 항일 감정을 극도에 달한 것이다.
1896년 1월부터 2월 사이에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 관아를 습격하여 개화파 관리와 하수인을 죽이는 사건으로 25명 정도의 살상자가 나왔으며,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동안은 무정부 상태였다.
나주 도청이 광주로 이전하게 된 것도 바로 나주 의거(당시는 민란으로 간주)에서 출발한다.
1895년 고종 32년 윤 5월1일 전국8도가 23개 관찰부로 개편되면서 나주 관찰부에는 채규상 관찰사, 안종수 참서관이 부임한다.
나주군수에는 민종열이 부임하였다.
8월20일 민 황후 시해의 사건도 정부가 이를 발표치도 못하고 있다가 10월15일에서야 국상발표를 하게 된다. 나주군수는 금성관에 빈소를 마련하고 군민들로 하여금 참배를 하도록 배려하였다.
1895년 11월 민종열 군수가 담양 군수로 전임되어 참서관 안종수가 군수 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1월15일 단발령, 양력사용이 선포되자 공명심에서 먼저 자신이 상투를 자르고, 군청 관리들의 머리를 자르도록 하고, 길거리에서 보이는 사람마다 무조건 군도로 상투를 강제로 잘랐다.
이러한 안종수의 행위에 대해, 일제의 사주에 대해, 군민들은 울분을 금치 못하고, 일촉즉발의 반발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896년 2월 27일 나주 향교 제일(祭日)에 장성의 기우만(奇宇萬)이 나주 선비들에게 통문을 전달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진란 때 우리 국토를 더럽힌 일인들이 다시 들어와 국모를 시해하고, 삭발을 강요하며, 고종임금은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이런 못된 짓을 자행하는 왜인들을 우리나라에서 쫓아내자는 것이다.
1896년 3월 17일 나주지역에서 의거에 동참하고자 하는 100여인이 연기(連記)서명한 통문(通文)을 장성 창의소(倡義所)에 보내졌다.
1896년 3월18일 동학군 진압에 공이 많았던 나주 관찰부 주사(主事) 정석진(鄭錫珍)이 해남군수로 승진 발령 되어, 나주 향교에 가서 유림들에게 의거가 너무 늦었으니 마땅히 다른 고을에 앞장서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격려하자 이에 동조 하였다.
1896년 3월 21일 참서관 안종수의 열 가지 죄상을 성토한 통문이 나주인에게 전달되었다.
1896년 3월 22일 정석진의 해남군수로 부임하는 환송이 있었으며, 영산포 나루까지 전송을 마친 김창곤과 정석진의 동료인 군교(軍校)들이 돌아와 곧바로 관찰부 정청에 들어가 안종수 등을 죽이고 단발에 앞장선 자들을 구타하는 등 사건이 발발하였다.
1896년 3월23일 나주에 창의소가 설치되고 의거를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인적 구성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관군을 이기랴,
1896년 4월17일 전주의 진위대장 김병욱이 나주를 입성하자, 관군은 삼엄한 경비 하에 수색, 추적, 체포 하는 과정에서 주모자 김창곤과 그 외 연루자가 속속 검거되었으며, 나주 고을은 발칵 뒤집혀 전전긍긍 하였다. 그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이유로 해남군수로 갔던 정석진이 압송되었고 담양군수로 간 민종열도 잡아들였다.
이 사건의 계기가 정석진 군수가 사주한 것으로 되어 4월22일 사형이 집행되고, 사건을 주도했던 김창곤과 그의 장남 김종석까지 무학당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김해김씨 참의공휘치권4세손휘용지파(參議公諱致權4世孫諱容址派) 족보에 의하면 김창곤의 아들 김철과 손자 김재호는 3대에 걸쳐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김창곤의 다섯째아들 김철(김종원)은 아버지와 큰형 종석이 나주감영에서 순절하실 때 8세였다.
김철은 1919년 3.1운동 때에 전남지방 총책임을 맡고 거사를 진두지휘하다 외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김철의 장자 김재호는 1933년 상해로 탈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담 활약하였으며, 1938년 중국 산서성 항일전투에 공을 세우고 임시정부 사회과장, 의정원 전남도의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또한 김재호는 국회의장 신익희의 사위이었다.
항일운동에 주모자급으로 참가한 그의 가족과 후손들은 재산을 몰수당해 연명하기 급급하였지만 일제의 최후발악으로 창씨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1896년 5월 28일 민심이 수습되자 윤헌 관찰사와 이우규 나주 군수가 부임하였다.
1896년 8월4일 칙령 제36호 지방제도 관제개정에 의해 전국 23부를 13도로 개편하면서 나주부, 제주부를 통합하여 전라남도, 전주부, 남원부를 통합하여 전라북도가 되었으며, 이때 민란을 야기 시킨 나주 관찰부만 광주로 이설한 것이다.
조선조 시대의 왕의 교첩(敎牒)은 주로 교지(敎旨)나 왕지(王旨)로 내렸는데, 일제가 침략해 오면서 천황의 명을 받든다는 칙령(勅令)으로 바뀌어 사용되었으니 구한말 왕권의 힘을 잃은 하나의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요즈음도 일본은 독도를 일본 땅이라 우기고 있다.
또한 우리정부는 일제를 청산하자는 법을 만들고 있다.
식민사관 탈피의 청산을 인적 청산부터 접근하자, 여기에 해당된 후손들은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식민사관 탈피의 정부차원의 접근 방법을 지명 찾기나, 일제에 의해 허물어진 유물 유적 복원, 건물 복원, 지맥 복원, 지적부에 나타나는 일본식 이름 청산,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 바로 세우기를 먼저하여야한다.
구한말 이후 항일운동을 하다가 순절하신 그 분들을 일본식민사관으로 보면 민란의 주동자였지만 오늘의 사관으로 보면 애국의 거사였으므로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고, 보훈의 훈장을 추서 하고, 아울러 누대에 걸쳐 움츠려 살고, 궁핍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그 후손들에게 따뜻한 보살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제청산을 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면 인적 청산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위기로 전환될 것이다.
5. 동학과 나주 무학당(武學堂) 이야기
<글/나천수>
역사적으로 보면 세기말에는 세기가 바뀌는 몸부림인지는 몰라도 큰 혼란의 격동기를 겪는다.
1894년경의 동학은 농민이 중앙정부에 대한 항거의 몸부림이었던바 이를 민란이니, 운동이니, 항거니 하는 저마다의 표현을 하여왔다.
분명 동학이 일어나는 그 당시에는 민중 폭동 또는 민란이었음에 분명하지만 1세기가 지난 지금은 동학운동 또는 동학 의거라는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사관(史觀)으로 보는 역사는 민족 주체의식에서 평가되는 만큼 당시의 민란이 1세기가 지나서야 동학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가혹한 농민 수탈에 대한 농민의 몸부림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조선 침략의 빌미로 삼고자 신식무기를 앞세워 동학을 진압하였으니 말이다.
19세기 말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은 이중삼중으로 증가하였다.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은 전라도에 집중되었는데, 그것은 농경사회에서의 농토가 만은 전라도가 비교적 물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전라도의 농민들은 일본과의 교역과정에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 까닭에 호남의 농민들은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반침략적 민족의식과 반봉건적 평등사상, 그리고 유무상자사상 등을 표방함으로써 농민들로부터 크게 환영 받았다.
정부의 탄압으로 위축된 적도 있었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여러 난관을 극복하면서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등지에서 세력을 넓혀갔다. 부패한 양반들과 외세의 침탈을 증오하는 농민들이 동학에 다투어 가입하였기 때문이다.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는 동학을 합법화하여 동학교도에게 집중되는 정부의 탄압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당시 각 고을의 수령과 몰지각한 아전들은 불법적인 동학을 믿는다며 교인들의 재산을 공공하게 빼앗았다.
1893년 3월의 충청도 보은집회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 각지에서 약3만 명의 교인과 농민들이 참가하였는데, 교조신원뿐 만 아니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깃발을 내걸어 반외세를 표방하였다.
전남의 경우 함평, 영광, 나주, 무안, 순천, 광양, 장흥, 진도, 고흥, 강진 지역의 교도들이 대거 참여 하였다.
1984년 음력 1월에 고부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폭정에 시달려 전봉준을 중심으로 관아를 공격하는 농민항쟁을 시작으로 음력 3월25일에 전라도 각지에서 1만여 명이 백산에 집결하였다.
백산에 모인 농민군에 대하여 사람들은 ‘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 표현하였으니, 죽창을 들고 참여한 농민들의 흰옷 때문에 서면 흰옷만 보여 백산이 되고 앉으면 죽창이 돋보여 죽산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894년 음력 4월 초군, 농민군은 전라도 감영을 격파하고, 서남해안에 위치한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거쳐 영광을 점령하였고 함평을 거쳐 장성 황룡에서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 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음력4월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위기감에 휩싸인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파견을 요청하자,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청나라와 일본이 즉각 군대를 파견 하였다.
외세의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 지도부는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과 전주화약(和約)을 체결하고서 자진 해산하였다.
농민군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1894년 후반, 전봉준은 2차 보이를 준비하고, 음력 10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전라도 장흥 농민군, 해남 농민군 등 전라도 전 지역의 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 연합 부대에 의해 수백,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 나갔다.
특히 일본군은 농민군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처럼 각 지역에서 폐정개혁을 추진하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을 받아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이로써 1894년 봄에 불붙기 시작한 동학농민전쟁은 1895년 음력 1월경 종식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곳이 나주였다.
전봉준은 단신으로 나주읍성으로 들어와 당시 나주목사 민종열과의 담판을 통해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담판에 대해 금성정의록과 동학사의 기록이 서로 상반된다. 금성정의록은 관의 입장에서 동학을 기술하였고, 동학사는 농민군 입장에서 썼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주성을 지켜낸 이유로 나주는 동학군 토벌의 총본산이 되었다.
일본군도 나주로 들어와 본영을 두었으며, 뒤이어 관군도 들어왔다.
일본군은 1895년 음력1월5일 나주성에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군수물자를 공급하였고, 동학군 토벌을 위한 병력을 지휘하였다.
토벌을 마친 일본군은 각지에서 체포된 동학군을 나주로 압송하여 무학당에서 대부분 학살하였다.
필자가 나주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들었던 바는 무학당에 토굴 감옥과 사형 집행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형 집행장이 지금의 나주 백년사 건물 뒤편 구석지고 낮은 지역이었다. 지금은 경지정리를 하여 그 당시 구석지고 움푹 파인 그 부분을 알 수 없도록 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면 무학당 남쪽 편에 있었던 옛 공동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그곳은 나주초등학교 남쪽 편 건너 야산으로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호남비료 나주공장이 들어와 공사를 하면서 공동묘지의 작은 산은 헐리고 평탄 작업하면서, 그 과정에서 무연고 묘 등으로 모두 이장처리 되어 오늘날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초등학교 운동회 등 나주 초등학교 대규모 행사 때마다 비가 내렸던 것이 그 당시 억울하게 돌아가셨던 동학농민군의 원혼들이 아니면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하신 원혼들이 비를 내리게 한다고 들었다.
얼마나 많은 동학 농민군이 무학당(武學堂)에서 억울하게 죽어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민족혼을 일깨운 그들의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는 제(祭)를 시 차원에서 시민의 이름으로 지내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 탈피요,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본다.
6. 나주초등학교 일본인교장 반대운동과 퇴학사건
<글/나천수>
1907년 5월20일 공립나주보통학교로 인가되어 개교된 나주초등학교는 1대, 2대에 걸쳐 조선인이 교장을 역임하였으나, 조선인을 교장으로 두어서는 일제식민지화가 되지 않아 상기 제2절에서 언급한바 3대 네모토(根本貞吉) 교장부터 해방 전까지 12명의 일본인 교장을 발령하였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1910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 편입된 소위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해 이다.
이를 한일합방이라고 표현했는데, 식민사관 탈피의 시각에서 한일병탄(韓日倂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제의 한국 침략은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본격화했다. 일제는 강압적인 무력을 앞세워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그해 8월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차례로 체결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그 외에도 군대해산과 신문지법·보안법 등을 제정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또한 1909년 7월 한국의 사법·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내용의 기유각서(己酉覺書)를 체결해 한국민의 저항을 제도적으로 막고자 했으며, 극비리에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을 각의에서 통과시켜 조만간 한국이 식민지화가 될 것임을 예시했다.
같은 해 9월 남한대토벌을 감행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의 항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편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근대화란 미명하에 한국토지의 약탈을 준비했다.
1910년 5월 30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가 3대 통감(統監)에 취임하면서 한일합병은 급속도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30일 한국경찰제의 폐지를 결정하고, 일본헌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헌병경찰제를 수립했다. 7월 12일 일본정부 각의에서 한국에서는 일본헌법이 아닌 초법적인 조치에 의해 통치할 것이며, 총독이 천황직속으로 전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7월부터 한국 내에서 모든 옥내외 집회가 금지되었으며, 신문·잡지가 엄중한 검열을 받는 등, 한국은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갔다. 8월 16일 데라우치 통감은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합병조약안을 통보하고 밀모를 거듭했다.
그 결과 8월 18일 한국정부 각의에서는 합병조약안이 통과되었고,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은 전문 8조로 구성되었는데, 조약문에서는 우선 한국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천황에게 양도한다는 것을 명백히 규정했다. 일제는 합병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을 우려하여 조약조인 후에도 그 사실을 한동안 비밀에 붙였으며, 29일에 이르러서야 조인사실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대치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에 부임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 건국 27대 519년 만에,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합병의 형식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간에 체결하는 조약이라 함은 국가간의 귄리와 의무가 상호 협의에 따라 법적 구속을 받도록 규정하는 행위 또는 조문, 협약, 규약, 성업, 각서, 의정서 따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1905년 11월17일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자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를 일명 한일협상조약, 제2차 한일협약, 을사5조약, 을사조약으로 불림)은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을사늑약(勒約)으로 본다.
‘늑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한자 ‘륵(勒)’은 <굴레>, <재갈>의 의미를 가진 글자이며, 여기에서 <강제로 하다>의 의미가 파생되기도 한다. 그래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는 절대로 조약이 될 수 없고 ‘늑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권 침탈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하여,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일제가 사용한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 기록이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 속에서 우리 스스로 우리역사를 깎아내리는 표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당시 개화를 빙자한 개화파 위정자 등 정부 관료는 일본의 힘에 눌려 일본식민지화에 앞을 섰으나, 오히려 학교나 민간인 측에서는 과거 임진왜란과 명성황후 시해 등을 상기하면서 항일의 의지가 불타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항일의 불씨가 1917년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의 일본인 교장 반대운동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접근한 것은 개교100주년 기념책자 집필과정에서 1917년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할 학생들의 학적부가 나주초등학교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의 학생들이 만약 살아 있다면 100세 이상을 넘긴 분들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분으로부터 직접 과거사를 들을 수는 없었으나, 나주초등학교 백년관에 전시 비치된 역사자료, 그리고 나주초등학교 총동문회 김대현 회장님의 증언과 나주 원로들의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주어모아〔拾遺〕 역사에 접목하고자 한다.
더더욱 백주년 기념사업 재원 조달관계로 금호그룹 측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금호그룹 창설자이시며 이미 고인이 되신 박인천 전회장이 나주초등학교를 다녔고 일본인 교장 부임 반대운동을 하다가 퇴학을 맞았다는 것을 들었다.
박인천 회장께서 살아 계셨을 때에 회사 내에서 자주 “나주 초등학교 다닐 때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을 하다가 퇴학 맞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하고, 그 당시 박 회장의 자가용 운전자 김양(현 광주시 거주, 70세)씨의 말에 의하면 출장 중에 나주초등학교 옆을 지날 적에는 회장께서 “나 저기 나주초등학교 다녔다”라고 자주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금호고속의 김성산 사장(나주초등 48회)에 의하면 박인천 전회장은 1917년 나이17살에 나주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약 1년6개월 만에 퇴학을 당하였다고 전해 준다.
박회장은 1901년 7월5일 태어나 1984년 6월16일 돌아가셨다.
그러니 1917년은 정확히 박인천 전회장이 17세 되는 해이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박회장은 이미 서당에서 한학(漢學) 수학을 마무리하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만학의 나이인 17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니, 피 끓는 청년의 눈에 비친 일본의 야욕에 대해 어찌 역사를 보는 눈이 없었겠는가.
광무11년(1907년) 4월24일 수요일자 관보 제3748호에 학부대신 이완용이 발령한 학부령 제4호에 의거 전국 27개의 공립 보통학교 설립이 인가되었는데, 전남 지역은 유일하게 목포와 나주 2개교뿐이었다.
개교 당시 수업연한은 4년제이었으며, 4차에 걸쳐 학제 개편을 하였던 기록이 나온다. 1911년 제1차에는 보통학교 3-4년제였으며, 1922년 제2차에는 보통학교6년제였으며, 1938년 제3차에는 심상소학교 6년제와 고등학교2년제로 개편되었으며, 1943년 제4차에는 오늘날과 같은 국민학교 6년제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학교라는 말은 일본식 표현이 되므로 1996년 3월1일자로 초등학교로 명칭을 개칭한 것이다.
1911년 3월31일 제1회 졸업생 31명을 배출하였으며, 그 후 매년 25-35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나타났다가 1921년도에만 졸업생이 전무하였다.
이것은 나주지역 원로들이 증언한데로 3.1운동 참여 주모자급 학생들을 전원 퇴학시켰거나, 아니면 당시 한인학생들이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에 대한 처벌의 일환으로 전원 퇴학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나주초등학교 1대 2대 조선인 교장은 1907년부터 1911년 3/4분기까지 근무하다가 4/4분기에 제3대 일본인 교장 네모토(根本貞吉)가 부임해 온 것을 시작으로 해방 전까지 12명의 일본인 교장이 이 학교를 일본 식민지교육을 한 것이다.
네모토 교장이 새로 외부에서 부임해온 것이 아니라 1908년1월27일에 교감으로 부임해와 실질적인 권한을 쥐고 있다가 1911년 11월1일자로 교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나주초등학교 역사 자료에 의하면 그때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교감을 배치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곧 일본인 교장 책임 하에 일제 식민지교육을 시키겠다는 의도라고 본다.
1910년 한일 병탄 이전부터 조선침략의 정책은 무력이었으니 힘을 잃은 조선은 처음부터 일본인 교장 반대운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교장이 오면서부터 식민지 교육의 강화와 조선인 차별 대우 등으로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이 점점 곪아서 전체 학생들로부터 서서히 교장 반대의 싹이 트고, 자랐을 것이다.
박인천 학생이 1917년 나이 17살에 입학하였다고 하였으니, 제7대 카게이(影井市藏)교장 때인 것 같다.
이듬해 제8대 교장 오오쓰카(大塚啓次郞)가 부임해와 1919년 3.1 운동 그 시기를 근무한 것으로 보아 7대 교장에서부터 반대운동을 하다가 8대 교장 때에 퇴학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의 학생 항일 운동의 표출은 주로 동맹휴학이나 격문 살포, 또는 계몽운동으로 나타났으나, 나주초등학교의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은 맹휴나 격문살포 뿐만 아니라 좀더 격한 시위가 있었는데, 이 시위가 이듬해 3.1 만세운동처럼 이어짐으로서 전원 퇴학을 당한 것 같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발발하여, 이 당시 3.1 만세운동에 참가한 각급학교의 지도자급(급장, 반장 등)은 모두 퇴학 내지는 제적이 되었기 때문에, 박인천 학생과 그 급우 전체가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을 하다가 이어서 3.1 운동까지 이어져 퇴학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주초등학교 역사관 벽면에 붙은 개교이후 연도별 소개 자료에 의하면 1921년 졸업생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는 이듬해인 1922년 졸업생이 17명, 1923년 19명, 1924년 14명으로 갑자기 줄었다가 1925년도 졸업생이 74명으로 불어나 그 후 지속적으로 1백여 명 내외가 졸업을 한 것으로 보면, 1917년을 전후한 상당수의 선후배들이 주모자급으로 가담하였기 때문에 그 처벌로 퇴학이 되어 졸업생 수가 급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또 하나의 졸업 사진 자료에 의하면 나주초등 10회가 대정8년도였으며, 11회가 대정10년도인 것을 보면 대정 9년도 졸업생이 없는 것이 아예 졸업사진으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11년이 대정1년인바 이들이 졸업한다면 1912년 봄에 한다.
그러므로 1920년인 대정9학년도 학생들은 1921년 봄에 졸업하므로 1921년에 졸업이 없는 것으로도 판단된다.
과거 역사의 년도와 학년도간의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분명 대정9년도 졸업생 자체가 없다는 것이 사진 판독으로 확인되었다 할 수 있다.
나주보통학교에서 학교 내부적으로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 내지는 소요사태가 있었다고 하여도 전학생을 퇴학시키기에는 처벌의 수위가 높았을 것이나, 1919년 3.1 운동에 까지 참여한 박인천 학생과 그 급우들을 일본 정부가 지시한데로 “주모자급 퇴학”이라는 명분으로 전학생에게 퇴학처분을 내린 듯 하다.
더더욱 일본은 이러한 일본인 교장 반대운동과 연이어 3.1 운동으로 파급된 조선인 학생의 항일 사태를 전원 퇴학이라는 강경책으로 마무리 하였는바 이와 관련한 일련의 학적부 서류를 후세에 남겼을 것인가에 반문해보면 그러한 증거 서류를 없앴을 것으로 판단된다.
1921년 졸업생 전무의 사건이 있는 이듬해인 1922년 졸업생이 17명, 1923년 19명, 1924년 14명으로 갑자기 줄었다가 1925년도 졸업생이 74명으로 불어나 그 후 지속적으로 1백여 명 내외가 졸업을 한 것으로 보면, 1917년을 전후한 상당수의 선후배들이 주모자급으로 가담하였기 때문에 그 처벌로 퇴학이 되어 졸업생 수가 급감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이 반일운동을 하였다고 서류로 작성하여 비치하기보다는 전원 퇴학을 시켰으므로 그러한 기록을 후세에 찾을 수 없도록 아예 학적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주초등학교 과거 학적부 속에 유일하게 1921년도 졸업학적부 일체가 없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1917년 나주초등학생 입학생 수가 대략 30명 내외로 추정되며 이들 모두가 항일운동 때문에 졸업장을 받지 못했으니, 그 당시 항일운동으로 퇴학을 당하신 분들의 후손이 발굴되면 후손에게라도 명예졸업장을 주어 이미 고인이 되신 원혼들을 위로 하는 것이 후손, 후배들의 일이라고 본다.
1910년 한일병탄 된 8년 후인 1918년 학생 반일운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초등학교 차원의 반일운동은 나주가 최초인 듯 하다.
1910년 이후의 3대 항일운동은 3.1운동과 6.10만세운동, 광주학생 독립운동을 든다.
3.1운동은 1919년 2월에 고종왕이 돌아가시자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반일감정을 고조시켜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 되었던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에 순종왕이 돌아가시자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여 6.10만세운동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이다.
이화학당을 다니던 유관순 열사도 1919년 3.1운동 때에 항일운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기록을 보면 일제36년 기간 중에 1919년 기미년 3.1운동이 항일운동의 첫 시작으로 보고 있는데, 나주에서는 1917년에 나주초등학교를 입학한 선배님들이 1918년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으로 전원이 퇴학당하여 1921년도 졸업생이 전무한 것은 커다란 사건인 것이며 이 사건을 최초 반일 내지는 항일 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인 교장반대로 주모자 한두 명 퇴학 시켰다면 사건이라 할 수 없겠지만 전원 퇴학 시키고 그 근거 서류인 학적부마저 없애버렸다면 항일운동사에 공식적으로 추가할 사항이라고 본다.
항일 운동사나 학생 항일운동 역사를 다시 써야한다고 본다.
7. 나주초등학교와 호남비료공장의 숨은 역사이야기
<글/나천수>
1. 역사의 흔적을 묻어둔 터 이야기
나주초등학교는 1907년에 신학문의 배움의 터로 시작을 했고, 호남비료공장(호비)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사의 시작이란 점에서 양 지역의 터는 명당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학교란 인재를 배출하는 곳이라면 공장은 부를 창출하는 곳이다.
1960년대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공업화 기틀로서 시작한 호비가 오늘날의 무역대국으로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모태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특히 나주지역 발전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 지역의 터는 그야말로 명당 중에 명당이라 할 수 있다.
흔히들 지관들이 말하는 사람이 살만한 좋은 터를 양택이라 하고 죽어서 누울만한 좋은 땅을 음택이라 하여 살아서도 죽어서도 명당을 차지하려 한다.
혹여 산에 올라가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면서 이 산속에 내가 집짓고 살만한 위치를 찾아보면 대체로 그곳에는 묘가 있다.
글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햇볕 있는 곳이 양택이고, 햇볕 없는 곳이 음택이 라는 뜻이다. 그러나 어느 묘지에 햇볕 들지 않은 묘가 있는가. 모두 다 양지바른 곳에 집짓고 사람이 살만한 양지바른 땅에 묘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양택과 음택은 같은 것이다.
과거 나주초등학교의 위치는 무학당으로서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양지바른 땅에 묻었으니, 나주초등 건너편 야산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터이니 이 같은 명당 터가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영혼들이 모여든 곳이니 이 같은 명당 터가 어디 있겠는가.
명당 터는 반드시 명당바람이 불어 사람이라면 귀인이 되고 땅이라면 큰집이 들어서든지 돈을 불러 모우는 것이 된다.
나주초등학교 명당 터는 명당바람 때문인지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지 셀 수 없다. 개교100주년인 2007년까지 2만여 명이 이 학교를 졸업하여, 정계, 경제계, 법조계 등 사회각계각층에 포진되어 국가와 지역발전에 힘쓰고 있다.
공동묘지라고 불렀던 명당 터는 해방 후 1960년대 가난한 나라를 부자나라로 만들어 21세기 무역대국 세계12위, 1인당 GNP 2만불을 달리도록 한 땅이 되었다.
그 땅이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차관으로 세운 공장, 나주호남비료공장이 들어서 80년대 기적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국가발전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2. 한국 공업화의 시발점 호남비료공장 건설배경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5년 10월8일 UN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대표 메논(Menon)은 한국경제를 보고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라고 혹평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취재한 영국 런던 타임즈의 사이몬즈 기자도 똑같은 말을 신문 헤드라인으로 썼다.
1960년 말 우리는 1인당 GNP 단돈 87달러였고, 외환보유고는 2,300만 달러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한국 땅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혹평한 것이다.
1960년 4월19일 학생의거로 이승만 정권은 물러났으나, 사회 경제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필자는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평가에 있어서 정치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부분에서 경제사적인 부분만을 접근하고자 한다.
혁명정부가 혁명공약에서 밝힌바와 같이 누대로 내려오는 가난을 물리치는 것인데, 국가경제발전의 자본력이 미약한 그 당시로서는 차관만이 방법이었다. 미국에 건너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손을 벌렸지만 차관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차관을 줄만한 나라를 선정한 것이 분단의 아픔을 같이하면서 2차 대전의 패전을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정부에 호소해 볼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독 측에서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투자나 경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도대체 우리나라 미래 경제에 희망을 찾아볼 수없었던 상황을 서독 정부는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과 특별보좌관 백영훈(현 한국산업경제연구원 원장, 독일에서 경제학박사학위 받음) 등이 급조한 우리나라 국가개발 사업계획을 만들었던 바, (1) 나주비료공장 건설, (2) 인천 한국기계공장 확장, (3) 석탄공사 관산중장비, (4) 인천제철확장, (5)삼척 동양시멘트공장,(6)중소기업 기계공장 프로젝트였다.
여기에 소요되는 차관자금은 1억5천만 마르크였다.
서독 기업들은 그때서야 우리 측이 제시한 정부적 개발사업계획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 당시 서독 경제성 장관은 에르하르트 였다. 우리 정부의 경제사절단과 서독 경제성과의 마라톤 협상을 통해 우리 측에 제시한 사업계획을 서독정부가 모두 인정하고 1억5천만 마르크(약3,500만 달러)의 차관 승인을 받아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독측은 차관을 주되 담보방안에 대해서 물었으나 그 당시 한국에 차관을 담보해줄 어느 세계은행도 없었다.
그래서 양국 경제 전문가들이 착안해 낸 것이 광부와 간호부의 인력 파견으로 발생하는 인건비 3년치를 모두 서독은행에 예금한다는 조건으로 1억5천만 마르크를 차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광부 5천명, 간호부 2천명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못살고 있다는 것을 반증 하듯 광부 5천명 모집에 약4만 명이 응시하여 경쟁률 8대1을 넘었으며, 그나마 대졸자들이 학력을 속이고 대거 파견되었으며, 간호사도 2천명 모집에 근 2만 명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서독 루르 지방의 탄광 막장에는 우리나라 학사출신이 많았다. 그들이 받는 한달 보수는 4백마르크(1백달러)에서 7백마르크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외 근무를 자청하였고, 틈틈이 독일어를 배우고, 첨단기계 기술을 익히는데 노력하였다.
서독에서의 광부 간호사 직업은 3D업종으로 취급되어 독일인 인력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저개발국가의 값싼 인력을 불러다 쓰는 것이었다.
한국의 간호사는 환자들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하여 독일 국민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심어 나갔다.
이들 광부, 간호사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그 후에도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협을 얻어 낸 것이다.
상업차관이 결정되자 서독기업들은 자사제품을 수출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나섰다. 너도 나도 한국시장 진출을 위한 각축전을 벌인 것이다.
이름 있는 서독기업들은 한국을 방문하여 새로운 기업 파트너를 찾게 되는데, 최초 사업은 독일 지멘스와 금성사가 합작한 전화 사업이다.
다음으로 한국을 찾아온 기업이 루루기(Lurugi)회사였다. 이 회사는 나주에 건설 중인 호남비료공장을 건설하는 자재공급 회사로 참여 했다.
아이젠버그사라는 유태계의 서독 중간상인(오퍼상)의 잘못된 상술에 의해 많은 문제점이 있었으나, 농촌 소득 향상에 요소비료 공장으로서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 후 많은 서독 기업들이 한국에 들어와 한독 경제협력의 발판을 만들어 나갔다.
1964년 한국인의 근면 성실성에 감동 받은 독일 정부는 동방의 작은 나라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서독의 선진지 현장연수와 파독 광부, 간호부 위로 격려차 서독을 방문하여 뤼브케 대통령,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하였다. 에르하르트는 경제성장관이었는데, 그 후 수상으로 당선되어 일하고 있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한국 같은 후진국이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고속도로 건설하라, 둘째, 철강산업 육성하라, 셋째, 석유산업 육성하라,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에서 이룩하라고 조언하였다.
그 결과 차관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착공, 포항제철 착공, 여천 석유화학공단을 착공하였으니 초창기에는 이러한 사업들의 무용론으로 반대 시위도 많았으나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SOC가 된 것은 사실이다.
독일인처럼 근검, 절약하는 정신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자는 결심이 새마을 운동을 태동시킨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반만년 긴 세월동안 가난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인당 소득 100$달성에 무려 4600여년이 걸린 것이다. 1960년대 1인당 소득이 76$선이니 그 당시 필리핀은 170$, 태국은 220$과 대비하여 못사는 정도가 상상할 만하다.
우리나라 해방 후의 경제 변화의 모습을 보면
- 해방 후 : 76$소득/1인
- 1959년 : 87$소득/1인, 외환보유고 2,300만$
- 1964년 100$/1인 소득 → 단군 이래 4600년 걸려 100$달성
- 1965년 : 국가적으로 1억$ 수출 달성
- 1971년 : 10억$ 수출
- 1977년 : 100억$ 수출, 1000$/1인 달성
- 1980년대 기적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져
- 1990년대 1인당 소득 1만$시대 진입하였으니,
과거 6.25 참전 해외 용사들의 말을 빌리면 한국의 경제성장은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전후 50여 년 만에 세계무역 12권 국가로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그 원동력 내지는 씨앗이 무엇인가 돌이켜 보면,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 간호사의 피눈물 나는 봉급이 담보되어 얻어온 최초의 독일 차관이라고 본다.
3. 호남비료공장 건설 기술자로 온 독일인 호만(Hohmann) 이야기
우리나라와 독일이 국교를 여는 것은 1883년 11월26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백년 한독교류사 가운데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사람은 호남비료공장 건설 기술자로 온 프리츠 호만(Fritz Hohmann, 1909-1982)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서독 카셀시에서 태어나 슈투트 가르트 공대를 졸업하고 여러 공장에서 기사로서 일했으며, 독일정부의 기술감독, 기술고문을 역임했다.
그가 몇 사람의 독일인 기술자들과 함께 나주비료공장 건설의 기술자로 1959년에 한국으로 온 것이다. 부인과 자녀를 독일에 두고 왔기 때문에 루루기(Lurugi) 회사 직원으로서 비료공장을 건설 해주고 받은 봉급을 가족에게 보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독일 기술자중에서 가장 마음이 깊었던 것인지 처음 한국 땅에 들어와 한국의 기술수준을 간파하고, 단순히 사회간접자본시설인 비료공장 건설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한국발전이 뒤진 것은 기술자 부족이라고 갈파하여 스스로 기술자를 양성해 내는 “인간 개발”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호만의 의무나 책무도 아니다. 호만의 인생관이나 생활철학이 그를 한국의 청소년 지원 사업 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가 한국에서 받는 봉급은 1백만원 정도였는데, 모든 수익을 불우한 한국 소년, 소녀를 위해 썼다.
오히려 독일에 있는 의사, 교사를 하던 자녀(2남3녀)들이 돈을 보내왔다.
필자가 올해 60살이다. 필자의 연령대층에서는 잘 알려진 호만과 김현도(당시 나주중2년) 학생과의 만남이다. 등산을 좋아했던 호만이 금성산 등산길에 나무를 하면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던 가난한 김현도를 만난 것이다.
호만이 “Can you speak English?"라고 영어로 묻자 김현도가 ”Yes, I can speak English."라고 답하여 이것이 인연이 되어 호만의 도움으로 후일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뉘른베르크, 에르랑겐 대학에서 수학박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호만은 직접 자기 집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청소년을 가르쳤다. 그리고 가르친 제자가 독일의 기술학교로 유학을 떠나자 이때부터 나주 유지들 내지는 교육계에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1964년 9월 나주사람들이 호만을 돕자고 나섰다. 나주향교 일부를 무상으로 2년간 교육의 장소로 빌려 주었고 호만은 사재를 털어 강의실과 기숙사를 만들어 20여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이 기술학원이 호만애암(好萬愛菴)이다. 이 뜻은 사랑의 암자인 것이다.
호만은 목사의 아들로서 기독교를 믿었으나 나주에 오면서 그 당시 나주 다보사 주지 우화(雨華, 일명 천진도인)스님과 절친한 우정이 싹터 불교를 좋아하게 되었고 불교와의 인연 때문에 애암이라 한 것 같다.
교육비는 일체 무료이며 기숙사비만 형편에 따라 5백원에서 2천원까지 내었으나 부족액은 호만이 충당하였다.
향교건물이나 호남비료 공작실을 이용하여 기술자 양성의 소식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주향교의 호만애암 학교를 찾아와 호만을 위로 격려 한 것이다. 그리고 1964년 11월에 호만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면서 무엇을 더 도와 줄 것인가 물었다고 한다. 대답은 향교 건물을 좀더 오래 빌려 쓰도록 도와달라는 소박한 것이었다.
그 후 더욱 많은 청소년들이 호만애암 학교에 입학하여 향교시설로는 수용할 수 없자, 호만은 서독정부에 원조신청을 하여 경제협력성으로부터 재정과 공작 실습 자재 지원을 받게 된다.
당시 수행했던 문교부장관이나 도교육감은 호만애암을 단순히 호만의 일로 방치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은 깨닫고 1965년에 정규고등기술학교로 문교부 인가를 받아 나주 산정동(현 나주공고 위치) 금성산 산록에 한독고등기술학교를 열게 된다.
그리고 나주를 중심으로 하여 여수, 마산, 광주, 해남, 안동 등 5개 지역에 호만애암 분교를 설립하였다. 호만은 혼자 호만애암을 모두 가르치고 인도할 수가 없어 1966년도에 사위 삿세(Sasse)를 한국으로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장인과 사위가 힘을 합하여 호만애암 기술교육에 열을 쏟아내는 것이다.
1965년 3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나주의 한독고등기술학교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967년 루루기 본사로부터 귀국명령을 받았으나 학교를 인수받아 운영할 한국인 후계자를 찾지 못해 회사 사표를 내고 한국에 귀화한 것이다.
1967년 11월 한국 국적을 얻을 때 신원 보증인으로 서명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신분에 대하여 공란으로 둔 것을 당시 법무부장관이 직접 “교육자”라고 써넣었다고 한다. 호만의 한국 이름은 호만영부(好萬寧富)가 되었다.
그리고 나주의 학교가 자리를 잡아가고 학교인수의 뜻을 밝힌 김혜자 여사에게 1968년도에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필자는 이때 이 학교 재단이 병설로 세운 버드실중학교 수학교사로 ‘72년도부터 2년간 재직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후 여수 등 타 지역 호만애암을 돌보며 1973년까지 국립경기공전, 영남대 공대 교수로 일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를 독일로 보냈다.
1982년 그의 나이 73세의 노쇠한 몸을 가누기 힘들어 호만애암 제1회 졸업생 김규철에게 호만애암 학교를 맡기고 독일로 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 하여서인지 죽기 전에 부인의 묘소라도 가보고 싶어서인지 귀국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에 간지 얼마 안 되어 1982년 3월17일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죽기 전에 나주의 땅에 묻어 달라고 사위 삿세에게 유언하였다고 한다.
1982년 9월에 호만의 사위 삿세에 의해서 화장된 호만의 혼이 다시 한국에 온 것이다.
호만의 제자 500여 명 중에 200명은 외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300명은 국내에서 활동 중이라며, 그 중 많은 사람이 박사학위를 받았을 것이라고 호만의 제자였던 성남길(나주초등48회, 현 서울 한독교역상사 대표)이 증언하고 있다.
호만의 업적을 널리 기리고자 제자들이 모금하여 추모 기념비를 만들어 당초는 한독고등기술학교였던 그 위치에 건립하려고 하였으나, 김혜자 여사가 인수했던 학교가 나주공업고등학교로 개칭되고 재단 이사장이 바뀌면서 학교 내 기념비 건립은 학교 측의 반대로 난항 겪게 된다.
그래서 호만과 다보사와의 옛정을 기반으로 다보사 내에 세우게 된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은 자료와 증언을 해준 호만의 제자였던 남기봉(베르린대학 공학박사, 동신대 교수)씨의 말에 의하면 호만의 업적이 모두 그늘에 가려 빛을 못보고 있다고 한다. 지역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이 나라를 위해 일생을 마감하신 분들을 예우하는 것이 또 다른 훌륭한 봉사자를 낳을 수 있는 풍토가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또한 독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제자가 15명이라고
말하였다.
1970년 귀국한 사위 삿세는 한국학 전공의 대학을 다녔다. 1975년 그가 대학에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의 제목은 “계림유사에 나타난 고려방언”이니 이 정도면 한국사람 보다 더한 한국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2006년 9월 말까지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며 유럽 한국학협회장을 역임하다가 함부르크 대학에서 정년퇴임식을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 왔으니 제2의 호만애암 일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호만의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모두 좋은 일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는 것이다.
호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문화가 다른 한국생활에서 오점이 없었을 것인가.
그러나 후진국 우리나라 사람에게 기술이 무엇인지를 몸소 가르쳐준 분이다.
가난했던 한국 청소년들에게 사재를 털어 교육 시키고 독일 유학을 보내어 “하면 된 다”(can do sprit)는 꿈을 심어 주었다.
60년대 후진국의 늪에서 빠져 나오도록 불 을 밝혀주신 그분의 업적을 햇빛 아래로 옮 겨 놓은 것이 후세를 위한 교육이 아닌가.
아무도 오지 않은 금성산 기슭 음지에 서 있는 그분의 추모기념비를 나주시민 모두가 칭송할 수 있는 곳으로 이설하여야 한다.
예수님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했을 때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듯이 남의 크고 작은 오점은 덮어주고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여야 좋은 세상 아닌가.
4. 호남비료공장 숨은 이야기
1955년 12월 호남비료주식회사(호비)를 창립하여 연산 8만5천톤 규모로 1958년 1월 서독 루루기 회사를 비롯한 5개회사의 콘소시엄(공동체)으로 건설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당시 이승만 정권은 호비 건설 전에 충주비료공장을 지을 때 미국회사에게 골탕을 먹었기 때문에 호비는 서독기술을 도입키로 하였고 민간업체로 하여금 건설토록 하였다. 경험이 없었던 민간업체 사장 이문환은 1960년 민간 주주(株主)간 의견대립, 민간주주의 자금 조달 등 주식공모에 차질이 생겨 공사가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5.16후에 혁명정부는 “호남비료주식회사 정부인수에 관한 입법”조치를 완료하고 정부에서 직접 건설토록 하였다. 이 법이 혁명정부의 산업에 관한 입법 제1호가 되었다.
그리고 김재규 육군준장이 사장으로 내려왔다.
문제는 우리 측에 비료공장 건설의 전문 지식을 가진 자가 없어 건설자재 중간상인(오퍼상)인 아이젠버그사의 농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요소비료가 나오는 높은 조립탑을 콘크리트로 짓는 것도 문제였지만, 콘크리트 강도가 부족하여 부수고 다시 쌓는 등 건설 중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진짜 문제는 공장을 다지어 가동해 보니 비료가 잘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그 때 듣기로는 유태인이 헌 기계 가져다 팔아먹었다는 말이 돌았었다.
제일 문제는 원료탄인데, 화순탄광에서 나오는 무연탄은 탄의 강도도 나쁘고 원료가 되는 일산화탄소(CO)가 규격대로 안 나오는 것이다.
루루기사 쪽에서는 시험했을 때 탄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는바, 알고 보니 이문환 사장이 서독에 시험용으로 보낸 것은 화순탄이 아니고 삼척탄이었던 것이다. 루루기사와 호비 측과 싸움이 붙었다. 그러나 호비 측이 강력하게 화순탄만을 고집하자 우리 측 의견대로 진행되었고 1962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호비가 한국 측에 인도 된 것이다.
그러나 화순 무연탄으로는 제 용량을 생산하지 못해 충주비료공장과 같은 기름을 쓰는 장치로 다시 건설했지만, 투자와 산출이 항상 마이너스가 되어 1970년대 말 문을 닫는 운명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LG측에서 호비 공장 부지를 인수한 것이다.
4. 나주발전에 헌신한 인물 기념비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적 차원에서는 국난극복사 과정에서 수많은 충신,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했거나, 지역적 차원에서는 사재를 털어 지역발전에 앞장서거나, 평생을 헌신한 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죽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리면 후손, 후배들은 아무도 그 역사를 들 추워보려 하지 않고, 그냥 모르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고려시대 왜구 소탕의 공이 큰 나주인 정지장군이나,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이 연전연승 할 수 있도록 한 호남출신 제장졸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것이다.
거북선을 만드신 나대용 장군이나, 1593년 진주성 제2차 혈전 때에 3난(三難)의 공을 세우신 김천일 선생과 제장졸들을 어느 누가 자세히 알고 있는가.
먼 역사로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1960년대 한국사람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독일인 호만이라는 사람, 나주가 고향이라는 인연 때문에 나주지역발전과 교육발전에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해주신 금하 서상록 선생이 그냥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는 것이다.
나주지역 발전을 위해 목숨을 던져 역사의 수범을 보이신 그분들과 평생을 지역사회발전에 몸을 불태우신 그분들을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래야만 후세에 또 다른 애향, 애국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는가.
나주를 빛낸 인물 기념비 거리든, 공원이든 전국 최초로 조성해 간다면 새로운 볼거리, 명물로 탄생할 것 같다.
그것이 바로 후세를 위한 충효와 애향의 현장학습 장이 될 것 같다.
<참고자료>
〇 문헌 책자
1. 백영훈, 「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 KID출판사업국, 2001.
2. 백영훈, 「대한민국에 고함」, 씨앗 뿌리는 사람, 2005.
3. 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동아경제연구소,
4. 선데이서울,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한 독일인”, P22-25, 1983. 5월호
〇 옛자료 수집
5. 호만애암 잡지,베르너 삿세 주필, 분도출판사 인쇄 외 다수, 1966.
8. 나주지역 인재육성에 헌신해온 금하 서상록 선생 이야기
<글/나천수>
돈을 어떻게 버느냐 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돈 버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인가. 더욱이 일제치하에 있었을 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나주초등 백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재원 조달에 있어서도 십시일반의 작은 돈을 모금해 보려 했지만 이 작은 액수의 모금도 매우 어려웠던 것은 돈의 액수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대가(代價)없이 흔쾌히 기부해주는 행위는 어려운 것이다.
재난이 발생하면 의연금품을 모집하거나, 적십자 회비를 모집하거나 간에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작은 액수도 대가없는 기부이기 때문에 선뜻 쾌척하기는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기부에 응하지 않았다고 욕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대가없이 기부에 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찬양할 일 아닌가.
필자가 금하 서상록 전 이천그룹 회장의 애국, 애향의 인생 이야기를 집필하면서 호칭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미 고인이 되신 그분을 선생으로 부르는게 가장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선생이란 먼저 태어났다는 뜻이지만 한편으로는 먼저 깨우쳤다는 뜻이 숨어져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주 봉황 출신 서상록 선생이 1925년 16세의 청소년기에 일본에 건너가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은 하나의 전설이 된 것은 사실이다.
‘각고의 노력’이라는 글자 몇 마디로 표현했지만 이국땅 일본에서의 자수성가를 하기 위해서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차별대우와 멸시, 그리고 생활고를 이겨낸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을 것이다.
선생이 일제하에 억압받던 시기에 홀홀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얼마나 어려운 여건에서 자수성가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지역을 위해 애써 왔는지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언급하고자 하니 그분의 인품, 인생관, 애향심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철야(鐵冶)에서 태어나 평생 철(鐵)과 함께 철인(鐵人)처럼 산 사람
선생은 1910년 음력12월8일 나주 봉황의 철야마을에서 태어났다.
1910년은 경술국치의 해로 일제36년의 치하가 시작되는 해이니 만큼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거의 모두가 어려웠다.
선생이 일본에서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원인이 철(鐵)이었는데, 이는 선생의 생가 마을 이름이 철야(鐵冶) 즉 철을 다루는 곳이라는 뜻이어서 그 정기를 받은 듯 하다.
물론 철야마을의 인근에 덕룡산이 오랜 옛날에 철광이 있었고, 이웃 마동(馬洞 )부락에 대장간이 있어서 철야라는 이름이 생겼는지 모른다.
어떻든 철(steel)로써 시작된 인생이 평생 동안 철강업(steel works)으로 자수성가한 것은 지명과의 어떤 인연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그리고 선생은 죽어서도 철야에 묻혔으니, 채굴된 철광석이 용광로에 녹여지고, 쇠로 달구어지고, 세상사 여러 곳을 지탱하는 철골로 사용되다가 다시 철강석 마을 땅속에 묻혔다니 윤회의 인생사를 본 것 같다.
2) 향학열에 불타는 시골 어린이
1907년 나주초등학교가 개교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봉황에서 나주 시내까지 통학할 수는 없는 거리이다.
그러니 시골에서의 배움의 터는 서당뿐이었다. 그러나 서당을 통해 한자와 한문을 익힌 사람은 어떠한 학문을 접해도 다 소화해 내는 힘이 있다. 이것이 한자의 마력이다.
선생은 7살 때부터 16살까지 10년간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웃 세지에 사시는 이성국이라는 훈장님 밑에서 천자문을 익히고 이어서
한자, 한문을 익혔다. 훈장님이 가르쳐주는 글자 하나하나의 뜻풀이가 오묘하여 종이가 흔하지 않던 그 시절은 땅바닥에서, 그냥 허공에 손가락으로, 나무판 습자판으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학문이 다른 선배나 동기생보다 일취월장하였기 때문에 훈장 선생이 병중이거나 출타 중에는 훈장선생님 대신에 가르치기까지 하였고, 선발시험을 거쳐 향교에서 공부할 자격도 얻었던 것이다.
나주향교, 남평 향교에서 강(講)을 들었는데, 주로 남평 향교를 많이 이용했다.
선생이 17살 될 때이다. 가끔 외가댁이 있는 무안을 다니고, 무안을 가는 길에 목포를 구경하게 되면서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그때부터 느꼈다.
서당과 향교의 한학교육만으로는 변화되는 신문화에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아 고민 고민하다가 시야가 좀 더 넓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꿈을 꾼 것이다.
왜 우리는 가난한가? 그 이유를 신식학문과 기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 순간 선생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신문명이 들어오는 일본으로 가기를 원한 것이다.
선생의 뜻을 부모님께 아뢰자, 부모로서는 날벼락의 소리였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반드시 그 쓰일 용도가 있다(天生我才必有用)는 것으로 부모를 설득하자, 결국 부모도 허락한 것이다.
1926년 7월, 우여곡절 끝에 밭을 팔아 장만한 여비로 영산포역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 시모노세끼로 건너간 것이다.
3) 탄광의 노동자로 들어가다.
시모노세끼에서 야마구치현의 우베(宇部)탄광촌으로, 그리고 탄광촌 입소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일본에 정착하는 첫 관문이었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1928년 말 현재 홋까이도 지방의 미쓰비시가 운영하는 한 탄광의 남자 종업원 수 1,100명중에 한국인이 44%에 달했다.
말이 광부이지, 일본인 광부보다 1/3정도의 임금을 받으면서 더 위험하고 환경 나쁜 막장에서 일했으니, 수시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하루 일환팔십전의 임금은 너무 적었다. 탄광에서 7개월을 일하고 이듬해 3월에 오오사까로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봉제공장에 들어갔다. 하루 14시간 작업시간을 반복해야하고, 조금만 방심해도 주문받은 제품과 다르게 나오면 월급으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봉제공장에서도 주경야독의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먹고 살기위해 아무 일이나 하게 되는 것은 미래가 없다고 보아, 철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어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것은 판금을 다루는 프레스 기술을 말하며, 프레스 조작을 통해 여러 형태의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자, 기술자 대우를 받았으며 오후5시만 되면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생활의 여유가 생겨 잠시 귀국할 수 있었고, 이때에 그리고 철야 토박이인 부인 정봉금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결혼 1주일 만에 부인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건너온 선생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4세 되던 해에 부인을 일본으로 데려온 것이다.
기술자 대우를 받아 봉급은 좀 나아졌지만 신문도 가가호호 배달하면서 국민학교 6년 과정을 2년 만에 마칠 수 있는바 그 당시 월반(越班)을 인정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23세의 나이였다.
이어서 관서(關西)상업학교에 입학하여 각종부기와 회계 등 실제사회생활에 필요한 과목을 배운 것이다. 26세 때인 1933년 3월에 졸업하였는데 성적은 전체 5백 명 중에 항상 5등 이내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별세 전보를 듣고 귀국 하였다.
4) 이천 금속 공작소 창업
일본에 건너 간지 12년 만인 28세에 이천 금속공작소라는 공장을 설립하였다. 이 업종은 각종 프레스 가공 및 성형이었다.
명색이 회사이나 사장도, 직공도 자신이었고, 규모 또한 3평 남짓한 것이다.
이 작은 규모의 공장이 기술과 신용을 바탕으로 일본인 속에서 커 나온 것인데,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공장에서 불이 난 것이다. 화상 1/3이상 입고 의사가 소생하기 힘들다고 하였는데 새살이 돋고 살아난 것이다.
입원 한 달 만에 공장으로 돌아와 공장을 복구하였으니, 주위에서 불사신이라 놀라워했단다.
돈을 번다거나 출세를 한다거나 할 때는 시운이 따라주어야 한다.
1930년대 일본의 대동아 전쟁기간 중에 얼마나 많은 기계부품이 필요했겠는가. 게다가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화학 공업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천 금속공작소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어서 공장은 날로 번창하였다.
그래서 이천공업 주식회사로 탈바꿈 시켰고, 이천회사의 기술력과 신용, 회사경영을 신뢰한 일본 측 회사에서 오히려 무릎을 꿇고 들어온 경우도 많았다. 원가 70원 정도의 기차 부속품을 1,700엔에 납품하기도 하였다. 무려 20배 남는 장사를 한 것이다. 이것도 한 두 개가 아닌 1만7천여 개 했다면 단순한 계산으로도 2,445만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이 들어온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정부와 군은 경제를 완전 장악했고, 1940년에 이르자 그 조치는 극에 달했다.
1941년 6월 미국은 일본의 만주군 증강을 적대적 행위로 받아들이고, 경제적 조치로 일본으로의 석유수출을 중단했다. 그때까지 일본 석유 사용량의 90%를 미국산에 의존했었다. 더불어 미국내 일본인 자산을 동결하였으니, 일본은 크게 영향을 받아 고노 내각이 사임을 하고 도죠오 히데끼 대장이 이끄는 내각이 이어 받았다.
일본 내의 주전파 여론이 미국에 대해 응징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어 1941년 12월 8일 드디어 하와이 진주만을 대대적인 공습을 시도한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 전쟁에서 세계전쟁으로 돌변하자 전시물품 생산에 혈안이 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천 공업 측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3년 여름 해군장교가 찾아와 피스톨 총 제작을 주문하였으나, 사람을 죽이는 무기는 만들 수없다고 거절하였지만, 2차, 3차 협박하며 조여들어왔다.
1944년 기차 부품 제작 중에 군함에 탑재하여 잠수함을 침몰시키는 어뢰를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 왔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소위 ‘전쟁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1944년 미군 폭격기가 군수공장지대만 골라 폭격을 퍼부었다.
1945년에는 공습이 마치 비 오듯 하였으니, 1945년 3월13일 이천 공장도 공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장이 없어지자 거래처인 대기업에서 자신들의 공장으로 와서 일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며, 주방용품 제조업체인 요시다 제철에서도 러브 콜을 한 것이다.
결국 나고야로 나오는 동기가 된 것이다.
선생을 초청한 요시다 제철은 흥업은행에서 120만엔을 융자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어 나고야 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1945년 8월9일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무조건 항복을 결의했으며, 그리고 8월15일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5) 재벌로의 입신
전쟁이 종료되자 연합군이 진주하면서 더 이상 군수품 만들라는 협박성 요청을 없어졌지만, 인플레는 하늘로 치솟고, 파업이 쇄도하였으며, 심각한 식량 부족과 민수용품 부족이었다.
이천 공업은 꾸준히 민수용인 기차의 부속품이나 농기구, 가정 생활용품 등을 생산해 냈다.
그러나 전후 생필품 중에 당장에 몸을 가릴 옷이 부족하였다.
이때부터 방직공장에 대해 관심을 둔 것이다.
나고야 고소리에 세운 공장은 원해 소학교 터였다. 전쟁이 끝나자 고소리 읍장이 찾아와 학교터를 되돌려 줄 수 없느냐고 정중히 물어 오자, 선생께서는 흔쾌히 답변하면서 교실도 신축하여 주겠다고 말하니, 읍장이 오히려 놀라워했다. 일본인도 아닌 조선 사람이 그리 말을 한다는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리고 약속대로 교실을 신축하여 ‘제2의 개교식’을 하는 자리에서 선생의 공적이 새겨진 공적비 제막식을 하였다.
고소리에서 공장 부지를 학교로 반환해 주고, 요시다 제철과의 정리를 한 다음 나고야 시내로 들어와 재 창업을 선언한 것이다.
전후에 은행업무가 마비 상태에서 요시다 제철 소개로 융자받은 120만엔을 갚으려 흥업은행을 찾아가자 오히려 은행 측에서 깜짝 놀란다. 이러한 선생의 신용을 확인한 은행은 언제나 담보 없이도 1백만엔 이하의 금액은 무담보로 주겠다고 하였다.
전후에 돈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1백만엔을 무담보로 빌려 준다는 것은 기막힌 특전인 것이다.
그리하여 95만엔을 융자받아 이천공업 복구와 이천방직의 신규설비에 투자하였다. 1948년 1월에 이천방직공업주식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종업원 300명에 방직기 5백대를 갖춘 대형 공장이었다.
6) 조국의 부르심
1945년 8월15일은 해방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상록 사장에게 특사를 보내어 애국심에 호소하여 조국 재건을 위한 주요산업시설의 복구를 요청해 왔던 것이다.
젊었던 청춘의 시절을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일본 땅에서 기계기술자로 성장해온 선생이 어찌 고국, 고향을 잊었을 것인가.
일본의 차별대우와 멸시 속에서도 꿈을 위해 의지를 불태웠던 청년 서상록 님은 그래서 더욱 애국, 애향심이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전후(戰後)의 전재민을 위한 원면 20만 필도 보내주었다.
전후의 고국은 특히 전력사정이 매우 나빴다. 더욱이 북한에서 1948년 5월14일 12시를 기해 전기를 끊어버린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1949년 12월에 인천의 구 도시바 공장을 인수하여 ‘이천전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 발족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왠 날벼락인가. 시설을 갖추고 시운전 4개월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선생은 6.25를 서울 을지로 집에서 맞은 것이다.
걸어서 고향 쪽으로 피신하는 동안 당진 내무서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죽을 고비를 맞이하였다. 스스로 숨김없이 과거 선생의 경력을 이야기하자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그들 스스로 남한 통일하면 선생 같은 기술자가 필요할 것이니 살려준다는 것이다.
고향으로의 피난을 포기하고 6.25를 서울 집 마루 밑 움 구멍에서 피신을 하였다. 이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6.25를 치렀던 것이다.
1950년대 초반의 일본은 한국동란의 반사이익을 얻어 일본경기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세를 보였다.
4년 만에 들어간 일본의 이천방직은 일본 간부급들의 농간으로 회사운영이 침체되어 있었다.
1954년 전남도지지사가 찾아와 전후 건설 및 복구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한다는 것이다.
이천방직을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방직공장의 옆 넓은 공터에 이천제강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업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이르러 ‘이천’은 여러 자회사를 거느린 소규모 기업군(企業群)을 갖추었다.
1973년 고국의 기간산업 육성방침을 세우고 경기도 부천에 ‘이천중기주식회사’를 설립 하였다.
1974년 봄, 내각수반 송효찬씨가 이천중기를 방문한 일이 있다.
공장을 들러 보고난 후 전 간부 직원들에게 “나라가 어수선해지면 저마다 돈을 해외로 빼돌리려하는 판에 선생은 외국에서 번 돈을 조국에 투자하고 있으니 애국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 여든이 되는 해인 1990년 봄에 고국으로 영구 귀국 하였다.
고국 떠난 지 63년만의 일이다.
7) 고향을 위하여
선생의 호는 금하(錦下)인데 이는 금성산하(錦城山下)에서 태어나 그 정기를 받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선생이 고향사업을 한 것은 1965년 10월 철천리에 전기 가설부터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소위 “객지에 나가 출세하여 부자 된 사람”에게 고향발전 사업을 요구하면 거의 모두 선생이 재정적 지원을 해준 것이다.
당시 산포면, 봉황면, 다도면 등 소재지에만 전기가설 공사 중으로 철천리 같은 변두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 판에 선생은 총사업비 160만원을 내놓아 마을 전체에 전깃불을 밝혀준 것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전화가설 사업, 도로 개설 사업 등 주민들 요구 사항을 받아준 것이다. 처음에는 사업비가 300만원 든다하였는데, 추가로 500만원이 더 든 일도 있었다.
마을 개발사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 지원 사업도 나섰으니, 1971년 4월16일 나주 포대기지에 25평형 포대장 관사 1동을 지어주었으며, 1973년에는 봉황지서 사무용비품 8조, 노안지서에 사무용 비품 5조, 나주경찰서에 사무용비품 1조, 다도 지서에 업무용 싸이카 1대, 노안면 사무소에 사무용비품 5조를 지원하였다.
1973년에는 봉황향우회에 장학기금20만원을, 철야주민에게 향리개발 기금으로 쓸 밭 1천 평을 희사했다. 1974년 나주 남산공원의 정자도 건립하였고, 남산공원의 종합적인 개발이 1976년 12월에 끝나 나주군수, 나주경찰서장 등 지역유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77년에 착수한 금하회관이 1978년4월에 완공되어 부지 947평을 구입하여 나주군에 기증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지역발전 사업은 마을이나 관공서 측에서 먼저 선생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애향의 마음으로 받아 준 것이다.
그리고 금하회관은 나주군에서 사용하다가 금성시가 개청되자 시청사로 활용되었다.
1980년 나주시 김흥래 시장께서 남산공원 안에 주민들이 용할 테니장을 만들고 싶은데 부지 구입비 지원을 요청한 바 있다. 이때에 필자는 나주시 새마을 계장으로서 체육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의 지원으로 테니스장을 직접 만든 장본인이다.
1992년 2월에는 봉황면에 복지회관을 준공하여 기증하였다.
이 건물도 우여곡절이었다. 땅값이 계속 오르고, 도시계획 접도구역이니, 구거가 있느니, 건축비가 당초보다 훨씬 넘게 준공 된 것이다.
지금까지 선생의 애향, 애국의 모습에 1985년 국민교육헌장 선포 제16주년 기념일에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한 것이다.
8) 금하 장학회를 통한 인재육성 지원
앞서 언급 한바와 같이 선생의 향학열은 매우 깊었다. 깊었음에도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비록 적국 일본에서도 나고야의 고도리 이천 공장이 원래 소학교 터라는 것을 알고 고도리 읍장이 반환을 요구해 오자 반환은 물론 학교교실을 신축해 주었다.
고국에서의 장학사업도 선생이 가난 때문에 못 배운 한을 푸는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1952년 나주고등학교 교사 신축을 현 나주시 교동으로 하고자 하나 재정이 빈약한 상태에서 선생에게 재정지원을 요구한 것이다. 선생은 선뜻 500만원을 흔쾌히 지원해 주었고, 그 재정으로 1955년도에 완공을 본 것이다.
1952년은 전방의 포성이 멈추지 않은 시기에 이같이 거금 500만원을 대가없이 흔쾌히 지원한다는 것은 선생의 높은 교육관이나 애향심을 엿볼 수 잇다.
봉황 초등학교 교사 신축비에도 거금 200만환을 내놓아 1953년 3월에 5개 교실을 준공하였다.
건축비가 남아돌아 별도의 장학사업까지도 했다고 한다.
일본 다녀올 때는 꼭 학용품을 사다 나누어 주었고, 장학금 3년치를 지원해준 3사람과 재학생 60명을 선발하여 1,2만원씩 꾸준히 지원해 주었다.
1974년 봄에 지금까지 산발적인 장학 사업에 대해 반성을 하고 어떻게 하면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장학사업을 운영할 것 인가 고민하게 된다.
물론 선생은 거금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을 심산이었지만 그 기금을 빼먹듯이 써버리면 장학기금은 고갈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께서 창안해 낸 것이 장학농지(논)이었다. 그리하여 장학농지 20마지기를 구입하여 소작농으로 얻은 소득을 장학금을 매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철야 장학회’이다.
1975년 나주 유지들이 서울의 선생을 찾아가 ‘철야 장학회’를 치하하면서 나주읍내를 중심으로 한 장학회를 만들라고 의견을 내놓았다.
더군다나 지역 유지들이 후원해주고 있어, ‘금하지덕회(錦下知德會)’라는 장학재단을 만든 것이다.
‘금하지덕회’에서도 철야장학회처럼 각 면에 장학농지 10마지기씩을 사서 그 소출로 장학회를 운영하였다.
2년여를 성공적으로 운영한 후 지역장학회에서 전국 장학회로 키워나가고자 1977년 2월 ‘금하지덕회’를 해체하고 현재의 금하장학회가 설립된 것이다.
1981년 1월 위의 장학농지와 함께 5천만원을 출연하였으며, 3월에 ‘재단법인 금하장학회’가 발족된 것이다.
표에서 본바와 같이 1975년부터 2007년 현재까지 장학 수혜자는 총3,841명에 지급 장학금은 35억2천만원에 달한다.
1975년도부터의 화폐가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0억도 넘을 액수이다.
<표: 금하장학생 배출 및 장학금 지급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