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04. 24
한강 정구선생 신도비명 병서
(寒岡 鄭逑先生 神道碑銘 幷序)
[생졸년] 1543년(성종 21)~ 1620년(광해군 12) / 壽78歲
상촌 신흠 찬(象村 申欽 撰)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17년에 재주가 뛰어난 자를 친애하고 어진이에게 몸을 굽혀 태평성대의 치화를 이루어 보려고 시도하였는데, 이 당시에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이 나와서 초빙의 명을 받자, 거기에 쏠린 중외의 흠모와 기대는 경성(景星)과 경운(慶雲)이 세상에 상서를 보인 정도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벼슬을 계속하지 않고 초야에 많이 있었으므로 자신의 재주를 다 펴보지 못했으며, 폐조(廢朝)의 초년에 이르러 동기간을 주륙하며 자전(慈殿)을 폐위할 것을 꾀하고 간신 이이첨(李爾瞻)과 정조(鄭造) 등이 그 일을 부추겨 온 세상이 금수의 지역으로 빠져들자, 선생은 봉사(封事)를 수차 올렸다.
그 말씀이야 먹혀들지 않았지만 천도와 인륜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것은 사실 그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선생은 별세하였다. 그 뒤 4년이 지난 계해년에 우리 주상전하께서 하늘과 사람의 뜻에 순응하여 난세를 밀어내고 정상으로 회복시키고서는 맨 먼저 세상에 보기 드문 전례(典禮)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예관에게는 치사(致祀)할 것을, 태사(太師)에게는 증직을 의논할 것을, 태상(太常)에게는 시호를 의논할 것을 명하여, 선생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고 문목공(文穆公)의 시호를 내림으로써 유자(儒者)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이 차례대로 다 거행되었고, 선생의 언행에 나타나고 사업에 드러난 깊은 학문과 독실한 행실이 드디어 보다 더 크게 밝혀졌다.
선생의 문인 학사(學士) 이윤우(李潤雨) 씨가 여헌『旅軒 : 장현광(張顯光)의 호』 장공(張公)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흠에게 신도비문을 청하기에 흠은 행장을 읽고 말하기를 “이는 돈사(焞史 : 덕행이 있는 자의 언행의 기록)로서 충분히 고명한 도덕을 그려냈다고 하겠습니다.
불초한 흠이 비록 문인 제자의 열에는 끼이지 못했으나 그 규범을 흠모한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니니, 또 어찌 감히 문장이 대단치 못하다 하여 사양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살펴보건대 선생의 이름은 구(逑), 자는 도가(道可)이고 한강(寒岡)은 그 호이다.
정씨는 본관이 청주(淸州)에서 나와 대성(大姓)이 되었다.
휘 의(顗)는 고려를 섬겨 공적이 드러나고 벼슬은 대장군이 되었는데 선생의 12대조이며, 그 후 대대로 유명한 사람이 나왔다.
증조 윤증(胤曾)은 철산 군수(鐵山郡守) 증 이조 판서이고, 조부 응상(應祥)은 사헌부감찰 증 승정원좌승지이다.
승지공은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의 호) 김 선생에게 글을 배웠는데 김 선생이 그 지행(志行)을 사랑하여 딸을 시집보냈으며, 승지공은 한훤의 규범을 준수하고 능히 가정의 교훈을 세워 김을 매고 북돋았다.
선고 사중(思中)은 증 이조 판서이고 선비 이씨(李氏)는 증 정부인(贈貞夫人)으로 성주(星州)의 명문인데 선대의 빛을 배태하여 옹골차게 길상(吉祥)을 열어 가정(嘉靖) 계묘년(1543, 중종 38)에 성주 사월리(沙月里)에서 선생을 낳았다.
판서공이 오행(五行)을 잘하여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틀림없이 명현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남다른 자질을 지녀 영명하고 준수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신동이라고 불렀다. 7, 8세 때 《대학》ㆍ《논어》를 배워 대체적인 뜻을 알았으며 9세 때에는 판서공의 상을 만나 깊이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고자(孤子)가 된 뒤에는 판서공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더욱 독실히 학문에 몸을 맡겼으며 벽에다가 공자의 화상을 손수 그려놓고 매일 빠짐없이 절을 하여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뜻을 표했다. 조금 장성해서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집지(執贄)하여 《주역》의 건곤(乾坤) 두 괘를 배우고 곧 그 나머지를 유추해서 통하여 예전에 익힌 것이나 다름없이 하였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혔으나 회시(會試)에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옛 성현을 목표로 삼아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강독하길 그치지 않았다.
세상의 예교(禮敎)가 무너져 관혼상제(冠婚喪祭)가 대부분 예법에 맞지 않은 것을 보고 개연히 고례를 복구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널리 경전을 상고하여 사의(四儀 관혼상제의 의절)를 뽑아 정했으며, 또 심의(深衣)ㆍ난삼(襴衫)ㆍ야복(野服)ㆍ변두(籩豆)ㆍ비작(篚爵) 등의 옛 제도를 상고하여 가정에서 사용하자, 이웃 마을이 따라 변하고 원근 지방이 취하여 법으로 삼았다.
퇴도(退陶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 대곡(大谷 성운(成運)) 세 선생을 찾아 뵙고 학업을 물으니 세 선생은 다 진정으로 허여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에 모친상을 만났는데 예문보다 지나치게 거상하여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가 되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판서공의 무덤을 옮겨 이 부인과 한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소방상(小方床) 제도를 연구하여 상여가 험한 산길을 무리없이 운행하였고 광중에 관을 내리는 일에도 정성과 조심을 다하였으므로 장례에 모인 자들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복하였다. 복을 벗은 뒤에는 항상 시냇가의 정사(精舍)에 처해 있으면서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으니,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6)에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과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무인년에는 전조(銓曹)가 6품으로 서용할 것을 계청하여 사포서 사포, 종부시 주부, 삼가 현감(三嘉縣監)ㆍ의흥 현감(義興縣監)ㆍ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잇달아 제수하였으나 다 사양하였다.
경진년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자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는데 선묘께서 친히 만나보고 묻기를
“그대의 스승은 이황과 조식인가?”
하고, 아울러 두 사람의 기상과 학문은 어떠하냐고 물으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이황은 덕량이 심후하고 조행이 독실하며 조식은 기국이 엄정하고 재기가 늠름합니다.” 하였다. 이어 《대학》의 공정(工程)을 논하고 진언하기를
“삼강령 팔조목은 모두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이지만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근독(謹獨)에 있습니다.”
하니, 선묘가 가납하였다.
임지에 부임해서는 선왕의 경전으로 학풍을 일으키되, 가숙(家塾)의 제도를 모방하여 마을마다 서재를 설치해 훈장을 두고서 글을 가르치고 읽는 것을 일과로 하게 하였다. 그리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망궐례를 행하고 향교에 나아가 알성한 뒤에 명륜당에 앉아 제생(諸生)을 불러 글을 토론하였다.
봄가을 석전(釋奠)에서부터 사직단(社稷壇)ㆍ서낭당(城隍堂)ㆍ여단(厲壇)의 제사에까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학사(學舍)와 제단들을 시원하게 일신시켰다. 그리고 향음주례(鄕飮酒禮)ㆍ향사례(鄕射禮)ㆍ양로례(養老禮)를 행하여 온 고을이 감화되어 노력함으로써 서리들은 경외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고, 치적이 멀리 소문나자 관찰사는 그 정사가 으뜸이라고 보고하였다.
신사년에 조정에서 지평(持平)으로 불러가자 창녕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를 세우고 참배하여 떠난 뒤의 사모하는 정을 표했다.
겨울에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사직서 여(社稷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였고, 임오년 봄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제수되었다가 병을 이유로 조정을 떠났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회연(檜淵)에 초당(草堂)을 짓고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하고서 향우(鄕友)와 문도들을 모아 매월 초하룻날 강회를 갖는 계를 만들었는데, 약조와 규칙을 세우고 가 조목별로 첩자(帖子)를 만들었다.
아울러 글을 지어 그들을 일깨웠는데 모두가 글을 읽고 행실을 닦는 요결이었으므로 격려와 권장을 받아 성취된자가 많았다.
충청ㆍ강원 두 도의 도사(都事)와 형조ㆍ공조ㆍ호조의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였다.
갑신년에 선묘께서 특지로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제수하고 고을을 다스릴 방도에 대해 물은 뒤에 돈유(敦諭)하여 보냈는데, 그곳에서 시행한 것도 창산(昌山)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였다. 을유년에 선묘께서 유신(儒臣)을 모아 경전을 교감하면서 그 명칭을 교정청이라 하였는데 선생이 거기에 참여되었다.
공조 정랑, 장악원 첨정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공조에 제수되자, 선생은 재차 상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 교정하여 올리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정원이 유임시킬 것을 청하였고 가을에 마침내 해직되어 돌아갔다. 군자감 첨정, 고부 군수(古阜郡守),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19)에 함안 군수(咸安郡守)가 되어 교화를 세워 기강을 확립하고 선현ㆍ정녀(貞女)ㆍ효자의 무덤과 정려문(旌閭門)을 수리하여 그것을 보고 본받아 법을 삼게 하였다.
그리고 홍수와 가뭄을 만나면 반드시 몸소 기도하여 그때마다 효험이 있었다. 창령(昌寧)에서 부자(父子)간에 송사가 벌어졌는데추관(推官)이 그 옥사로 인해 뇌물을 받아 판결이 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관찰사가 그 송사를 선생에게 넘겨 다스리게 하니, 송사를 건 자가 선생의 위엄에 눌려 승복하여 부자의 관계가 마침내 올바로 정해졌다.
무자년 가을에 백매원(百梅園)으로 돌아가 몇 년 동안 학문을 강론하며 한가롭게 지내다가 신묘년 겨울에 통천 군수(通川郡守)가 되었다.임진년에 왜구가 서울을 범하여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자 선생은 의분에 겨워 일어나 적을 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정예병을 소집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관북(關北)의 토병(土兵)이 왜적에게 붙어 혼란을 선동하고 선묘의 친형 하릉군(河陵君)이 깊은 산속에서 궁지에 몰려 목을 매어 죽자,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통분한 나머지 기지를 써서 적을 사로잡고 하릉군의 시신을 찾아 손수 직접 빈염(殯殮)한 뒤에 행재소에 보고하니, 선묘는 깊이 애절하게 느끼고 통정대부로 올려줄 것을 명하였다.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승진되어서는 무기를 제조하고 둔전(屯田)을 넓히고 군사 훈련을 엄하게 하고 굶주린 자들을 구제하여 혼란한 속에서도 여러 가지 정사를 완전하게 거행하였다.
갑오년에 조정으로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어 경연을 모셨는데, 선묘께서 때마침 《역전(易傳)》을 강하시다가 주회암(朱晦菴)이 돈괘(遯卦)를 만나 상소 초고를 불태워버린 일에 대해 묻기를 “탁주(侂胄)가 권력을 농단하고 조여우(趙汝愚)가 유배되자 주자가 스스로 침묵을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봉사(封事)를 준비하였으니, 그 소장이 만약 들어갔더라면 송 나라의 판도가 혹시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나 도리어 돈괘를 만난 것으로 보면 복서(卜筮)의 도리는 천하에서 극히 신묘하다 말할 수 없는데 주자는 반드시 복서에다 그 판단을 맡긴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만약 송 영종(宋寧宗)이 봉사를 한번 보고 기꺼이 탁주를 내쫓을 판국이었다면 그 복서는 필시 돈괘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복서가 극히 신묘하다는 증거입니다.”
하였다.
선묘가 다시 묻기를
“정전(程傳)과 본의(本義) 가운데 어느 쪽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가?”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역(易)의 도는 소식(消息) 영허(盈虛)의 이치와 진퇴(進退) 어묵(語胄)의 낌새에 밝아 시중(時中)을 잃지 않는 것이고, 복서는 역의 말단이니, 정전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하였다.
판결사와 승지를 역임하고 병신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영원산성(鴒原山城)을 쌓아 관동의 방어벽으로 삼았다.
겨울에 호군(護軍)으로 체직되고 승지, 형조 참의, 오위장(五衛將), 판결사로 전임되었다.
정유년 여름에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었는데 가을에 왜구가 재차 창궐하여 궁빈(宮嬪)과 왕자들이 다 성천으로 모이자, 선생은 존경과 예를 다하여 각기 법도가 있게 그 뒷바라지를 하였다.
무인년 겨울에 특지에 의해 가선(嘉善)으로 오르고 경자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가을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자 선생은 분상(奔喪)하고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어서는 상소하여 산릉(山陵)의 일을 논하였다.
형조 참판, 관상감 제조에 제수된 뒤에 사직(司直)으로 체직되었으며,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교정청(校正廳) 관원이 된 뒤에 곧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가 또다시 교정청으로 불려갔고 다시 호군이 되었다.
선생의 중형(仲兄) 서천공(西川公)이 병세가 위독하자 선생은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몸소 약물을 조제해 드렸으며 별세한 뒤에는 초종(初終)에서부터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반드시 스스로 관리하여 조금도 유감이 없게 하였다.
계묘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해주 목사(海州牧使)ㆍ광주 목사(光州牧使)ㆍ홍주 목사(洪州牧使),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향중(鄕中)의 자제와 어울려 학문을 가르치고 절차탁마하자 찾아와 배우는 자들이 차츰 많아졌다.
병오년 겨울에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자, 65세가 된 자는 수령이 될 수 없다는 국법을 인용하여 사양하였으나 선묘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임해 보니 어떤 사노(寺奴)가 권세 있는 재상 집에 의탁하여 함부로 불법을 자행하므로 선생이 그 죄를 국문하여 다스리고 굽히지 않으니, 온 경내가 경하하였다. 겨울에 체직되었다.
무신년 봄에 선묘께서 승하하고 광해가 즉위하였는데 선생의 명망을 듣고 특지로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보양관을 제수하였다.
앞서 선묘께서 1년이 넘게 질병을 앓아 국정을 살피지 못하므로 간신배가 혼란을 조장하며 앞잡이를 내세워 상대방을 모함하고 위협을 가하였으며 정인홍(鄭仁弘)의 밀봉 상소가 계속 들어가 임해군(臨海君)을 그 표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대행왕(大行王)이 빈소에 계시는데 체포하는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삼사(三司)가 임해를 국법에 처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계속 소장을 올려 구원하였는데 자세하고 치밀한 말이 수백 자에 달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선왕께서 그를 잊지 못해 하신 임종시의 유명(遺命)이 전하의 궛전에 아직도 생생할 것입니다.
전하의 동기 가운데 탯줄이 같은 자는 임해 한 사람뿐으로 선빈『先嬪 : 공빈(恭嬪) 김씨를 말함』은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형제 두 사람이 외롭게 함께 자랐으므로 전하의 애절한 마음은 차마 못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옥사를 굳이 다 살필 것이 없고 사람을 굳이 다 따져 물을 것이 없고 죄를 굳이 다 조사할 것이 없고 법을 굳이 다 시행할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정당하게 하지 못한 잘못을 범할지라도 임해가 죽지 아니하는 용서를 입는다면 문제(文帝)를 비난하는 척포 두속(尺布斗粟)과 같은 노래가 오늘날에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네 차례나 면직해 줄 것을 청하자 마침내 체직하였다. 예부가 국상(國喪)의 의절(儀節)에 대해 와서 묻자, 선생은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으로 대답하였다.
여름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어 국장(國葬)에 회곡(會哭)하였으며 시세를 붙따르는 사람이 선생을 지목하여 역적을 비호한다고 하자, 그 전말을 갖추어 말하고 파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계축년 여름에 간인(奸人) 박응서(朴應犀)가 간신의 지시를 받고 상변하여 대옥(大獄)을 일으킴으로써 초사가 영창대군(永昌大君)에 연루되고 위로 자전에게까지 파급되자, 선생은 상소하여 그 부당함을 극구 진달하면서 주 경왕(周景王) 때 영부(佞夫)의 사건을 들고 《춘추》 삼전(三傳)을 근거로 삼아 변증하여 대군을 감쌌으며, 또 말하기를
“부자간의 큰 은혜는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고 모자간의 지극한 정은 마땅히 그 도리를 다하여야 합니다.
옛 성인의 순후한 의리를 깊이 생각하고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고 생각하여 전일에 섬기던 자세를 변치 마소서. 어찌 반드시 이궁(異宮)에 따로 거처하시게 하여 서로 간격이 없지 않은 것처럼 하십니까.” 하는 등 말이 매우 절실하고 강직하였다.
그 소장이 대궐에 올라가려 할 때 선생의 아들 장(樟)이 도성에 있으면서 선생이 죄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중간에서 올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봉사(封事)를 만들어 앞서의 소장과 함께 올렸다.
무오년에 조정이 자전을 폐위하는 의논을 결정하자 선생은 다시 소장을 초했다가 때마침 광해가 “정구(鄭逑)가 은의(恩義)를 온전히 하라는 설을 선창하여 명예스런 이름을 빼앗아 갔다.”는 말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올리지 않았다.
경신년(1620, 광해군 12) 정월에 병으로 자리에 누워 사수(泗水) 가의 지경재(持敬齋)에서 별세하니, 향년(享年) 78세였다.
그 지난해에는 가야산(伽倻山)이 무너지고 별세한 날 아침에는 사수 가의 나뭇가지에 고드름이 맺혔으므로 사람들은 선생이 별세할 징조였다고 말하였다.
4월 무신일에 성주(星州) 남쪽 창평산(蒼平山) 간좌(艮坐)에 장사지냈는데 선영(先塋)의 동쪽이었다.
장례에 모인 자는 460여 인이었다. 가을에 성주의 선비들이 관찰사에게 청해 조정에 계문하게 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종사하였는데, 천곡은 곧 퇴계가 논정하여 정주(程朱)를 향사하는 곳이자 선생이 일찍이 원장(院長)으로 있으면서 백록동규(白鹿洞規)처럼 규약을 만들어 문생들과 강독한 곳이다.
선생의 배필은 광주이씨(光州李氏)로 선고의 휘는 수(樹)인데 훈련 봉사(訓鍊奉事)를 지냈으며 의정부 사인 이우(李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그 몸을 삼가 내조를 잘 하였는데, 선생보다 11년 먼저 별세하였다.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장(樟)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지냈고 선생보다 먼저 죽었으며, 장녀는 교리(校理) 강린(姜麟), 다음은 봉사(奉事) 노승(盧勝), 다음은 부사(府使) 홍찬(洪澯)에게 시집갔다.
도사는 도사 조광익(曺光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유희(惟熙)로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친 대신 선생의 상을 치르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요절하였고, 다음은 유숙(惟熟)과 유도(惟濤)이며, 딸은 노준(盧埈)에게 시집갔다.
강씨는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은 유징(有徵)으로 생원이고, 노씨는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은 형우(亨遇 )이고, 홍씨는 1녀를 두었다.
선생의 문벌 세계(世系)는 한훤(寒暄)으로부터 나왔는데 일찍이 퇴도(退陶)의 문정에 올라 연원이 있는 학문을 들어 알았고 또 남명(南冥)과 대곡(大谷) 사이에 유학하여 그 지기(志氣)를 갈고 닦았다.
속학(俗學)이 사람의 재주와 성품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알고 기필코 고명 광대한 영역의 고지를 획득하려고 마음먹었으며, 마음을 제어하고 몸을 다스리며 가정살이 벼슬살이 및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등의 일을 회암(晦庵)과 퇴계로 모범을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의 질서와 법도는 예의(禮儀)와 위의(威儀) 가운데에 있고 옛사람의 바른 행실은 모두 서책에 들어 있으니, 상고하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기가 확고히 서며 지키고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예를 위주로 하였다.
《심경(心經)》을 매우 좋아하여 선유(先儒)의 말을 주워 모아 거기다가 더 추가하고 숨은 뜻을 밝히면서 깊이 연구하였으며 후진을 일깨우고 인도하는 것도 반드시 이 책으로 하였다. 어릴 적에 부친을 여의고 모부인을 섬기면서 뜻을 잘 받들어 효도를 하였으며, 백씨는 일찍 작고하고 중씨는 다른 곳으로 출계(出繼)하자, 임시 변통으로 종가(宗家)의 일을 맡아 관장하면서 성심 성의를 다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홀로 된 형수를 집에서 받들어 어버이를 섬기는 예로 섬기고 내외의 조카와 생질들을 자신의 자식이나 다름없이 대하는 등 친족이나 외족간에 화목하고 친구 사이에 신의가 있으며, 형편이 어렵고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있는 정의(情意)를 다하였으므로 먼 지방의 벗들과 향리의 대중으로부터 다 환심을 얻었는데, 이는 모두 자연적인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억지로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청장년 시절에는 포부가 매우 커서 우주간의 모든 일을 모두 자신의 책무로 삼고 각 방면에 손을 대어 두루 관통하여 산수(算數)ㆍ병법ㆍ의약ㆍ풍수 등에 대해 그 실체를 다 알았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강론하고 저술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문장을 구사할 때도 회암(晦庵)을 따라 겉으로 꾸미고 아름답게 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평소에 산수를 좋아하여 혹시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기우단(祈雨壇)에서 바람을 쏘이고 읊조리며 돌아오는 흥취가 있어 서성거리며 떠나지 않는가 하면 혹은 불시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땅 주인과 문생 가운데 선생을 사모하는 자가 정자를 지어 영접하였으므로 소강절(邵康節)의 행와(行窩)와 같은 풍치가 있었다.
정인홍은 처음에 선생과 함께 남명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으나 늘그막에 선현을 비난하고 도덕을 배반하므로 선생이 그와 관계를 끊자, 그의 문인이 그 기회를 틈타 불칙한 말을 날조하여 선생을 모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홍이 이첨과 함께 악을 저지르다가 벌을 받아 주륙되니, 당시 사람들이 비로소 선생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선생은 축적한 식견이 넓고 배양한 지기 또한 깊었으므로 거의 자신을 완성하고 나아가 남을 완성하여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었으나 말단 관직과 고을 수령으로서야 어찌 크게 베풀 수 있었겠는가. 무신년 이후로는 세상이 극도로 혼암하였으니 죄에 걸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황도(黃道)가 다시 밝아져 태양이 제 빛을 되찾은 뒤로 오늘에 와서는 선생의 한 장 상소가 강상을 천백 년 후세에 세우고 국맥을 끝없는 장래에 이어가게 했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선생과 같은 분은 또한 세운(世運)의 성쇠에 관계된 이가 아니겠는가.
세상의 이른바 유자(儒者)란, 높은 자는 한 가지에 치우치고 낮은 자는 비근한 데에 빠지고 마니, 능히 전체 대용(全體大用)과 진지 실천(眞知實踐)에 힘을 써서 도를 보위한 공이 있는 자는 오직 선생뿐이다. 후세 사람으로서 퇴도의 학문을 알고 싶을 때는 선생의 성취한 것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글로는 심경발휘(心經發揮)ㆍ관의(冠儀)ㆍ혼의(婚儀)ㆍ장의(葬儀)ㆍ계의(禊儀)ㆍ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ㆍ갱장록(羹墻錄)ㆍ성현풍범(聖賢風範)ㆍ고금충모(古今忠謨)ㆍ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ㆍ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ㆍ심의제도(深衣制度)ㆍ무이지(武夷志)ㆍ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ㆍ와룡지(臥龍志)ㆍ역대기년(歷代紀年)ㆍ고문회수(古文會粹)ㆍ경현속록(景賢續錄)이 있는데,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상제께서 내린 선을 / 惟帝降衷
사람들이 중도 받아 / 民受其中
본성이야 모두 선해 / 性無不善
성인 범인 한가진데 / 聖凡攸同
오직 저들 소인들은 / 繄彼夸毗
사리 사욕 묶였다네 / 欲昏利梏
거룩할사 우리 선생 / 曰惟先生
남쪽 땅에 태어나서 / 挺生南服
한훤당의 세계 잇고 / 寒暄家世
퇴계선생 영원 받아 / 退陶淵源
지닌 명덕 밝히면서 / 明我明德
산림 속에 숨었는데 / 肥遯山樊
정백으로 후히 불러 / 旌帛厚招
좋은 대우 빈번했네 / 異數便蕃
임금 앞에 나아가서 / 延登前席
천인 도리 토론했고 / 討論天人
밖에 나가 수령되니 / 出宰百里
온 고을이 봄날일레 / 化洽陽春
도를 거둬 지니고서 / 卷而懷之
의리 깊이 탐구하고 / 深潛理窟
예의로써 후생 교육 / 以禮爲敎
하늘 질서 법도였네 / 天敍天秩
큰띠에다 심의 차림 / 大帶深衣
안회 증점 금슬로써 / 回琴點瑟
뜬구름의 만변 속에 / 浮雲萬變
그 즐거움 무한했네 / 其樂囂囂
늘그막에 시사 험해 / 晩際時屯
조정에다 말 다하니 / 盡言危朝
천길 높은 태산처럼 / 岳立千仞
우뚝할사 높고 높아 / 卓哉嶢嶢
사람 도리 부지하여 / 扶持人紀
어두운 길 비추더니 / 日星冥途
목가에다 산붕 재앙 / 木稼山崩
외로워진 오도 신세 / 吾道其孤
성군 새로 나오시어 / 聖作物覩
시호 주고 치제하여 / 節惠崇終
사문 아직 남았지만 / 文不墜地
어느 누가 이을건가 / 孰躡高蹤
후세 사람 공경하리 / 有來式之
높다라한 이 무덤을 / 若堂之封
<끝>
[註解]
[주-01]부자(父子)간에---벌어졌는데 : 적형(嫡兄)이 얼제(孼弟 : 서아우)의 아들을 자기가 낳았다고 주장하며 자기의 적자(嫡子)로 삼기
위해 송사를 걸었던 일을 말함. 《寒岡先生年譜 卷2 行狀》
[주-02]시중(時中) : 입신(立身)과 처사를 시의(時宜)에 맞게 하여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것을 말함. 《易 蒙卦》에 “몽이 형통하다는 것
은 형통한 형세가 있음으로 인해 움직이는 것이니, 곧 시중이다. 〔蒙亨 以亨行 時中也〕” 하였음.
[주-03]문제(文帝)를---노래 : 형제간에 이해로 인해 충돌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한 것을 비유한 것임. 한 문제(漢文帝)의 아우 회남여왕(淮
南厲王) 유장(劉長)이 모반하였다가 실패하여 촉군(蜀郡)으로 귀양가던 길에 식음을 폐하고 죽자, 민간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한 자 베도 옷을 꿰매고 한 말 곡식도 절구질할 수 있는데 형제 두사람이 서로 포용 못했네.” 하였음. 《史記 卷128 淮南厲王傳》
[주-04]주 경왕(周景王) 때---사건 : 주 경왕 30년에 담괄(儋括)이 모반하여 왕자 영부를 용립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도망가고 영부는 자
신이 옹립될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으나 혐의를 받고 윤언다(尹言多)ㆍ유의(劉毅) 등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일을 말하는데, 춘추에
서는 경왕이 아우를 죽인 것이라고 기록하여 천륜을 저버린 경왕을 책망하였음. 《春秋左傳 襄公 30年》
[주-05]기우단(祈雨壇)에서---돌아오는 흥취 :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즐기는 멋을 말함. 공자가 자로(子路)ㆍ증점(曾點)ㆍ염유
(冉有)ㆍ공서화(公西華)에게 각자 품고 있는 뜻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이 한 말로서 공자의 동의를 얻었음. 《論語 先進》
[주-06]소 강절(邵康節)의 행와(行窩) : 송 나라 소옹(邵雍)이 작은 수레를 타고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는데, 그를 사모하는 자들이 특
별히 소옹이 사는 안락와(安樂窩)와 똑같은 모양으로 집을 지어놓고 찾아주기를 기다렸으며 집 이름을 행와라 하였음.《宋史 427
邵雍傳》
[주-07]정백 : 조정에서 민간에 있는 인재를 초빙할 때 그 훌륭함을 표창하는 뜻으로 보내는 비단. 곧 예물.
[주-08]목가에다---재앙 : 정 한강이 죽은 것을 뜻함. 목가는 나뭇가지에 고드름이 맺히고 산붕은 산이 무너진 것으로 현인이 죽을 때의 조
짐으로 흔히 이해되는데 한강이 죽을 때 실제 있었던 일로 전해짐.
상촌선생집 제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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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鄭寒岡神道碑銘 幷序
宣祖大王卽位之十七年。體遠就賢。思致鴻豫庬碩之化。時則有寒岡鄭先生出膺聘命。中外傾嚮。蓋不啻㬌星慶雲之瑞世也。顧先生不常仕。多在丘園。未能究其用。而逮廢朝初載。夷滅同氣。謀廢慈殿。姦臣李爾瞻,鄭造等縱臾之。擧一世淪於禽獸之域 。先生進封事。先後相繼。言雖未售。而天彝人紀之已絶而復續者。實賴焉。未幾而先生卒。越四年癸亥。惟我主上殿下應天順人。撥亂世而反之正。首揭曠典。命禮官致祀。太師議贈。太常議諡。贈吏曹判書諡文穆公。崇儒重道之義。長第俱稱。而先生之邃學敦行。見於言爲。發於事業者。於是乎大彰明較著矣。先生之門人李學士潤雨氏。持旅軒張公狀。徼欽以神道之文。欽讀而曰。是惇史也。是足以侔高狀明矣。不佞如欽。雖未獲齒於函丈之列。而景仰軌躅非一日之積也。則又安敢以短於觚墨。辭而不爲之闡揚乎。按先生名逑。字道可。寒岡其號也。鄭氏自出淸州爲大姓。有諱顗。事麗著勳烈。官至大將軍。先生十二世祖也 。代有聞人。曾祖曰胤曾。鐵山郡守。贈吏曹判書。祖曰應祥。司憲府監察。贈承政院左承旨。承旨公學於寒暄金先生。金先生愛其志行。歸以女。承旨公遵寒暄型範。克樹庭訓。乃穮乃蔉。考曰思中。贈吏曹判書。妣曰李氏。贈貞夫人。星州望閥也。脴胎前光。貯開休祥。嘉靖癸卯。生先生于星之沙月里。判書公善星曆。筮曰當爲名賢。果有異質。英睿秀拔。見者稱以神童。七八歲。受大學,論語。通大義。九歲。遭判書公憂。哀毀如成人。旣孤而服判書公遺訓益篤。委己於學。手摹宣尼畫像於壁。日必瞻拜。以寓依歸之意。稍長。執贄於吳德溪健。受易乾坤二卦。以類而通。無異夙慣。嘗選鄕解。不赴會擧。遂棄科業。以古聖賢自期待。晨興夜寐。講讀不輟。見世之禮敎壞夷。冠婚喪祭。率不如式。慨然有復古之志。博考經傳。抄定四儀。且稽深衣襕衫野服。籩豆篚爵古制。用之於家。鄕閭從化。遠近取法。往尋退陶,南冥,大谷三先生之門。問業焉。三先生俱心許之。戊辰。丁外艱。執制踰禮。幾危而起。移判書公宅兆。與李夫人同窆。創用小方床之規。取便丘陵。及營窀穸。誠愼畢至。會者悅服。服闋。恒處溪上精舍。爲藏修地。學日進。萬曆癸酉。薦拜禮賓寺參奉健元陵參奉。不就。戊寅。銓曹請敍六品。連授司圃署司圃宗簿寺主簿,三嘉,義興,知禮縣監。皆辭。庚辰。拜昌寧縣監。始赴召。宣廟親見。問曰。爾師李滉,曹植乎。且問二人氣象學問。先生對曰。李滉德器宏厚。踐履篤實。曹植器局峻整。才氣豪邁。因論大學工程。進言曰。三綱八條。無非修己治人之方。而天德王道在謹獨。宣廟嘉納之。下車。以正業興學。倣家塾之制。四境設書齋置訓長。日課敎讀。每以朔望行望闕禮 。就鄕校謁聖。坐明倫堂。引諸生。討論春秋釋奠。以至社稷城隍厲祭。無不躬莅。黌舍壇壝。噲然一新。行鄕飮鄕社養老禮。一邑風礪。吏畏民懷。治理流聞。觀察使報政最。辛巳。以持平徵。昌人立生祀俎豆之。以爲去後思。冬。拜宗親府典簿儀賓府都事,社稷署令。皆辭。壬午春。拜軍資監判官。移疾而去。癸未。卜築於檜淵。蒔梅竹。號百梅園。聚鄕友門徒。爲月朔講會之禊。有約有儀。條列爲帖。仍著文以啓發之。皆讀書修行之要。激勸奬進。成就者多。拜忠淸,江原兩道都事。刑,工,戶三曹正郞。皆辭。甲申。宣廟特授同福縣監。諮以治道。敦諭遣之。其所施設如昌山。乙酉。宣廟萃儒臣。勘校經傳。名曰校正廳 。先生與焉。拜工曹正郞,掌樂院僉正。旋拜工曹。先生再上章請解職歸家。撰定上之。政院請留之。秋。竟解歸。拜軍資監僉正,古阜郡守,慶尙都事。皆辭。丙戌。拜咸安郡守。立敎化而綱紀之。修往哲貞孝墓閭。視以傚法。凡遇水旱必躬禱。靡不驗應。昌寧有父子疑訟。推官貨獄。不決者久。觀察使移先生治之。訟者嚴先生首服。父子乃定。戊子秋。卽閑于百梅園。講學自適者數年。辛卯冬。拜通川郡守。壬辰。倭寇犯京師。大駕西狩。先生仗義討賊。傳檄列郡。召集精銳。堵截賊路。關北土兵附倭煽亂。宣廟母兄河陵君阨於窮山中縊死。先生聞而痛之。設機捕賊。尋河陵屍。手自殮之。聞于行在所。宣廟深加傷感。命陞通政。進拜江陵府使。造器械。廣屯田。嚴訓鍊。賑飢乏。雖丁搶攘。衆務畢擧。甲午。入爲同副承旨。侍經筵。宣廟方講易傳 。問朱晦菴遇遯焚稿曰侂胄擅權。趙汝愚被謫。朱子不能自默。乃具封事。此疏若入。宋其庶幾。而反遇遯卦。占筮之道不可謂天下之至神。而朱子之必決於卜筮何也。先生對曰。若使宋寧。一見封事。便黜侂胄。則其筮必不遇遯。此占筮之所以至神也。宣廟復問程傳本義何先。先生對曰。易之道。明乎消息盈虛之理。進退語默之機。不失乎時中也。占候。易之末也。程傳宜先。歷判決事承旨。丙申。拜江原道觀察使。築鴒原山城。爲關東保障。冬。遞拜護軍。轉承旨刑曹參議,五衛將判決事。丁酉夏。拜成川府使。秋。倭寇再逞。諸宮嬪王子咸聚于成。先生致敬盡禮。供接各有其道。戊寅冬。特陞嘉善。庚子瓜滿。拜護軍。秋 。懿仁王后薨。先生奔赴。除副摠管。上疏論山陵事。拜刑曹參判觀象監提調。遞拜司直。寧越郡守。未赴郡。留爲校正廳官 。俄拜忠州牧使。又被召於校正。除護軍。先生仲氏西川公病𠫷。先生不離側。親劑藥餌。及卒。自初終至卒哭。庶事必自經紀。不使少有虧憾。癸卯。退還故里。除海州,光州,洪州牧使。工曹參判。皆辭。與鄕中子弟訓誨切磨。從學者漸進。丙午冬 。拜安東府使。引國典六十五歲不得爲守令之法辭之。宣廟不許。至府。有一寺奴托權相家橫恣。先生鞫治不撓。一境稱賀。冬遞。戊申春。宣廟昇遐。光海踐阼。聞先生名。特拜司憲府大司憲兼世子輔養官。先是宣廟寢疾經年。姦孼釀亂。倡俑飛箝。鄭仁弘封疏繼入。以臨海君爲注。大行在殯。逮捕株連。三司請置臨海于法。先生連章救之。縷縷數百言。略曰。先王末命。耿耿在耳 。殿下同氣之中與之同胎者。秪有臨海。先嬪早世。兄弟二人零丁同長。殿下至懷有所不忍。獄不必盡究。人不必盡問。罪不必盡核。法不必盡施。寧有不經之失。而臨海蒙不死之貸。則文帝之尺布斗粟。無復謠於今日矣。乞免者四。乃遞禮部。以國喪儀節來問。先生以朱子定論答之。夏。拜刑曹參判。會哭國葬。時人目先生爲護逆。累辭乞罷。癸丑夏。朴豎應犀承姦臣風旨。上變起大獄。辭連永昌大君。上延慈殿。先生封疏極陳。擧周㬌王時佞夫事。據春秋三傳證之。以救大君。又曰。父子大恩。與天無極。母子至情。所當自盡。深思古聖人烝烝之義。謂天下無不是底。而無變於前日之所以事之者焉。何必異宮別處。有若不能無間者哉。言甚切直。疏將上。先生之子樟在都下。恐先生獲罪。從中止之。先生聞之。更爲封事。幷進前疏。曁戊午。朝廷決廢慈殿之議。先生復草疏。會聞光海有鄭某首倡全恩。掠取美名之言。不果進。庚申正月寢疾。終于泗上之持敬齋。享年七十八 。其前歲伽倻山崩。卒之朝。泗上木稼。人謂之徵。四月戊申。葬于星之南蒼平山艮坐之原。先塋之東也。會葬者四百六十餘人 。秋。州之士子請於觀察使聞于朝。從祀川谷書院。川谷乃退溪所定享程朱者。而先生曾爲院長。修白鹿洞規。與諸生講誦所也 。先生配曰光州李氏。考諱樹。訓鍊奉事。娶議政府舍人佑之女。生夫人。溫惠淑愼。克內相。先先生十一年卒。生一男三女。男曰樟。文科。全羅都事。先先生歿。女長校理姜麟。次奉事盧勝。次府使洪澯。都事娶都事曹光益女。生三男一女。長惟熙。性孝。代執先生喪。過哀夭。次惟熟,惟燾。女適盧埈。姜有一男。曰有徵。生員。盧有一男曰亨遇。洪有一女。先生家世之傳 。出於寒暄。而早登退陶之門。聞淵源之學。且遊於南冥,大谷間。淬礪其志氣。知俗學之汩人才性。而必欲致極乎高明廣大之域。制心律己。居家守官。事君臨民。以晦庵,退溪爲模範。嘗謂天敍天秩。在乎禮儀威儀之中古。人制行。俱存於方策。可考而行也。不然。何以有所立而持循乎哉。故敎人必以禮爲主。酷好心經。裒聚先儒之語。增益發揮。沈潛玩索。開導後進。亦必以是書。少喪所怙。事母夫人養志爲孝。伯氏早卒。仲氏出繼。權攝宗事。虔誠不怠。奉寡嫂于家。以事親之禮事之。內外姪甥 。無間己出。睦姻任恤。盡其情義。遠方賓朋。鄕閭黨屬。咸得其歡。皆出自然。不假勉強。當其盛年。抱負甚大。宇宙間事。無不以爲己責。旁通曲暢。淹貫殆遍。算數兵陣。醫藥風水。俱曉源委。及乎晩年。一意講述。爲文章亦宗晦庵。不事浮華藻麗爲也。雅好山水。遇會心處。有風雩詠歸之興。倘佯不去。或不時命駕。地主門徒之嚮往先生者。構舍以迎之。有康節行窩之風 。鄭仁弘初與先生同師南冥先生。其老也。詆訾先賢。反道敗德。先生絶之。其門人乘其機。造不測語。謀陷先生而不得。迺後仁弘與爾瞻同惡坐法誅。時人方服先生之見。先生蘊畜旣宏。充養又深。庶幾乎成已成物。挽回世道。而庶職州縣。揭得以大施哉。戊申以後。晦塞極矣。免於辜幸矣。黃道重明。白日宣朗。至于今日。皆知先生之一疏。扶樹綱常於千百載下。延國脈於無疆。若先生者。其亦關世運之盛衰者非耶。世之所謂儒者。高者偏於一節。下者淪於卑近。其克用力於全體大用。眞知實踐。能有衛道之功者。唯先生而已。後之人欲知退陶之學。其觀於先生所就哉。先生所著。有心經發揮,冠儀婚儀葬儀禊儀。五先生禮說,羹墻錄,聖賢風範,古今忠謨,洙泗言仁錄,五服沿革圖,深衣制度,武夷志,谷山洞庵志,臥龍志,歷代紀年,古文會粹 ,㬌賢續錄。藏于家。銘曰。
惟帝降衷。民受其中。性無不善。聖凡攸同。繄彼夸毗。欲昏利梏。曰惟先生。挺生南服。寒暄家世。退陶淵源。明我明德。肥遯山樊。旌帛厚招。異數便蕃。延登前席。討論天人。出宰百里。化洽陽春。卷而懷之。深潛理窟。以禮爲敎。天敍天秩。大帶深衣。回琴點瑟。浮雲萬變。其樂囂囂。晩際時屯。盡言危朝。岳立千仞。卓哉嶢嶢。扶持人紀。日星冥途。木稼山崩。吾道其孤。聖作物覩。節惠崇終。文不墜地。孰躡高蹤。有來式之。若堂之封。<끝>
象村稿卷之二十六 / 神道碑
▲한강 정구 신도비 /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수륜면 동한강로 9(신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