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尹東柱) 시(詩)는 이렇게 해서
14억 전 중국인에게 알려졌다.
金政吾
한민족역사문화원장 중국연변대학교 객원교수
역사의 기록은 신성하다.
역사의 기록은 신성하다 .그것은 지난날에 있었던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을 변증적으로 깊이 품고, 변화하며, 진보 발전하는 진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두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거나 변질 왜곡 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사학자 E.H 카아도 ‘역사 속에서의 과거는 사라져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역사적인 인물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 지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알려져야 할 일이거나 그 어떤 인물의 행적이 사람들의 잘못으로 영원히 묻혀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도 1941년 연희 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77부 한정판 자선 시집을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은사 이양하교수가 일제 관헌의 출판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충고와 또 출판 경비의 조달이 어려워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었다. 대신 친필로 쓴 시작 노트 세 권을 만들어 그 중에 한 권은 이양하 교수에게 또 한 권은 정병욱 교수,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은 본인이 소장했었다. 그러나 두 권은 끝내 사라져 버렸고, 다행히 정병욱 교수가 소장했던, 그 한 권만 남게 되었다.
그 악랄하던 일제 치하에서 사상범으로 몰려 후쿠오카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의 위대한 시인의 존재와 그의 명시들이 하마터면 문학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번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병욱교수의 공로야말로 우리의 문학사에서 실로 크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 윤동주의 시가 해방 후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친구 강처증의 역할이 컸다 연전의 동창인 강처증은 당시 경향신문사의 기자로 있으면서 19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 한국에서 최초로 윤동주의 <쉽게 씌어 진 시>를 실었다. 그것도 ,윤동주가 생전에 가장 존경하던 당대 최고의 시인이며 경향신문사의 편집국장이던 정지용의 해설까지 붙여서 실린 것이다. 윤동주는 학창시절에 정지용의 많은 시들을 줄줄 외우기까지 하면서 그의 시를 애송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 압천(押川)은 밑줄까지 그어 놓고 걸작(傑作)이라 써 넣기까지 했다.
鴨川 十里 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어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어짜라. 바시어라. 시원치도 않아라.
역구 풀 우거진 보금자리 / 뜸북이 홀 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 ㅅ 다./ 비 맞아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오랜지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 ㅅ 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정지용의 시 鴨川 전문)
그런데 그렇게 존경하던 정지용 시인의 해설까지 받았으니 비록 사후(死後)의 일이기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분명 화려한 등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48년 1월10일 윤동주의 시집 초간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지용 서문과 강처증 발문으로 세상에 첫 얼굴을 내놓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정병욱과 강처증 그리고 정지용과 그의 친동생 윤일주 교수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성과인 것이다. 그만큼 역사의 기록은 소중하고 신성하다. 기록으로 남겨 두고 증거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묻히어지고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1년 후인 1979년 8월20일 다시 정음사에서 동생 윤일주 교수가 엮은 중판을 발간하면서 평론가 백철교수의 “암흑기(暗黑期) 하늘의 별”이라는 글과 시인 박두진 교수의 “윤동주의 시”, 그리고 만주 용정에서 같이 동문수학했던 문익환 목사의 “동주형의 추억”, 장덕순 교수의 “인간 윤동주”, 그리고 친동생 윤일주 교수의 “선백(先伯)의 생애(生涯)”라는 글이 실린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중판 시집이 정병욱(鄭炳昱)교수의 후기로 엮어져 나왔다. 그 밖에도 수많은 출판사에 서 수도 없이 많은 시집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변에 윤동주 시인을 처음 알린 오무라 마쓰오 교수
그러나 안타깝게도 윤동주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중국의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윤동주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연변의 조선 민족문학 연구를 전공하고 있는 학자들조차 윤동주에 대한 아무런 자료를 확보하지 못 했었다. 그것은 너무 오랫동안 폐쇄적이던 중국과 한국의 왕래나 문화교류가 막혀 버렸던 사회 정치적 여건 등이 원인이었다.
그 기나긴 침묵을 깨뜨린 분이 있었다. 1985년 5월 중국의 개방개혁의 물결을 타고 연변대학의 객원교수로 부임했던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 마쓰오 교수 부부가 그 주인공이었다. 윤동주의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의 자세한 설명도를 가지고 온 그는 연변을 찾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1984년 여름 ,나는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윤일주씨를 만나 도꾜 히비야(日比野)의 한 다방에서 약 2 시간가량 그의 형에 관해 많은 사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중략)
그때 나는 윤동주의 묘소와 그가 살던 고향을 찾고 싶은 강열한 충동적 욕구를 느꼈다. 그것은 윤동주를 요절케 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죄책감 같은 착잡한 심경에 그를 훌륭한 시인으로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의 한(恨)을 위무하며 그를 더욱 진실하고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가 고향에 남겨 놓고 간 흔적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윤일주씨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지만 윤동주의 고향을 찾고 싶은 마음은 내 스스로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一大村益夫<나는 왜 윤동주의 고향을 찾았는가!> 권영민 엮음<윤동주연구>에 수록 문학사상사1995,<권철 교수 논문 재 참조>1997.)
그리하여 1985년5월14일 연변대학교 정판용 부총장과 권철 교수 등 여러분들과 함께 윤일주교수가 직접 그려준 설명도를 들고 용정의 동산(東山) 중앙교회 묘지에 가서 40년간이나 잡초에 묻혀 있던 윤동주 시인의 묘지를 찾아 낸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일후 1985년 5월19일 연변대 부총장 정판용 교수 외 5명의 교수와 연변 민속 박물관장과 오오무라 마쓰오 교수 등 9명이 시인의 묘소를 다시 찾아 추모 행사를 거행하였다.
당시 중앙일보 허의도 기자는 윤동주 묘소를 처음 발견 했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해 5월 오무라 마쓰오 교수와 권철 (연변대 어문학)교수 일행이 룡정 동산 교회 묘지에서 윤동주의 묘소를 쳐음 발견했다 .잡초 더미에 싸인 채 버려져 있던 그 모습 ,모두 눈물을 흘리며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낭송했다. 한국말로 아니 조선말로 시인의 직관은 자신의 죽음 이후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시인의 묘비와 비문이 발견되고 나서 용정 광명 중학교 때 학적부가 나왔고 ,시인의 옛 집 터와 가정에서 사용하던 유물들이 발견 되었다<윤동주사적에 대하여: 1989년10월“조선학보제121집”오무라 마쓰오교수의 조사보고>. 이때부터 연변은 일약 윤동주의 시 세계 이야기로 바뀌어 지면서 그 열기는 참으로 뜨겁고도 장엄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1988년 12월30일 윤동주 시인 탄생 71주년을 맞았다. 그때 그의 모교에서는 국내외의 희사금으로 <윤동주 문학상>과 <윤동주 장학회>가 세워졌으며 1992년에는 동아일보“와 한국 해외 한민족연구소의 협력으로 모교의 정원에 윤동주의 명시 ”서시“를 새긴 이 불멸의 민족 시인을 기리는 <윤동주 시비>를 세워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1993년 2월 25일 언변대학의 민족연구원을 중심으로 중국 작가협회 연변 분회와 용정시 문학예술계 연합회와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그의 친척들과 함께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明東村)의 옛 집터에 생가 복원 촉진을 위한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동국(東國)을 밝게(明)해주는 명동촌(明東村) 마을 복원
일제가 조선에 대한 침략을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을 때 간도지역은 애국지사들에 의해 반일 계몽 운동과 반일 독립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뿌리 내리고 있었다. 그때 용정(龍井)을 비롯하여 그 주위지역 특히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明東村)은 중국 조선족 초기 이민들의 반일 문화 교육의 중심지였다. 시인의 큰 외삼촌 김약연 선생은 1899년 2월에 회령 종성으로부터 온 가족을 거느리고 간도 땅으로 이민 와서 기울어지는 조선의 국운을 돌려세우기 위하여 명동촌 마을과 명동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의 중임을 담당할 수 있는 동량지재(棟樑之材)들을 양성하였다. 명동촌(明東村)이라는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로서 동국(東國)을 밝게(明)할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런 마을과 시인의 생가를 복원한다는 것은 얼마나 뜻 깊은 일인가? 그리하여 1993년 6월 30일에 윤동주의 생가 복원과 그 정원에 표식 비를 세우기 위한 모임을 정식으로 구성하였다 .그때 정판룡 연변대 부총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연변대 민족연구원장 권철 교수를 주관으로 하여 <시인 윤동주 생가 복원 촉진회>를 발족 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94년 8월 마침내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그의 옛집과 그가 다니던 명동교회가 옛 모습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때 한국의 이윤기 선생을 위시한 국내외 저명한 인사들과 문화계 인사들의 시인에 대한 사랑과 동경의 정이 깃들어 있었기에 이 일은 이루어 질 수 있었다고 권철 교수와 최문식 교수가 귀 뜸해 주고 있었다.
윤동주의 기념비 건립을 위한 발걸음
1994년 8월11일부터 8월19일까지 8박9일 동안 필자 일행은 연변과 연변대학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이상보(李相寶:한국 문학 비 건립 동호회회장) 박사님을 인솔 단장으로 모시고 조병춘 서경대 교수(부단장) 그리고 필자가 총무로서, 전 단국대 부총장 황패강 교수와 조선대 구창환, 김성기 두 교수와 경북대 김시황(金時晃)교수, 영남대 김주한 교수를 비롯해서 한국의 마지막 한학자 변시연(邊時淵)선생님 등 전국의 대학교수 20 여명과 한학자, 교육자 등이 상해 북경을 거처 장춘에서 기차로 연길시에 도착했다. 우리는 연변대학교에 들려 정판용 부총장의 안내로 연변대학교 민족 교육원의 준공식에 참석했다. 민족교육원 건립 위원장이신 유달영 박사와 추진위원장이던 박종오목사의 일행과 우리는 현장에서 합류했다. 준공식이 끝난 뒤 윤동주의 유적지(복원된 생가와 그가 다니던 교회와 모교)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묘지를 찾아 참배하였다. 또 그와는 동갑이면서 함께 공부했고, 문학까지 함께 했으며 같은 감옥에서 10여일 사이에 죽음까지 함께 했던 그의 고종 사촌 송몽규의 무덤도 함께 찾아 참배하였다. 윤동주 묘소의 정경은 청하 성기조 박사의 “윤동주 묘소를 찾아서” 라는 글을 통해 묘지의 생생한 모습을 그려보기로 한다.
“윤동주의 무덤을 찾는 일은 꽤 어려웠다. 용정에서 자동차로 십 분쯤 남서쪽으로 달리다가 ,기와공장이 떡 버티고 서있는 높지 않은 언덕에서 오른 쪽으로 난 길을 비집고 들어가면, 콩밭을 양 옆에 끼고 있는 공동묘지를 만나게 된다. 윤동주의 무덤은 여기 공동묘지에 있었다. 공동묘지에는 여러 무덤이 있었는데,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잘 다듬어지지 않았고, 억새풀들이 웃자라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차라리 잘 간수하지 못할 바엔 무덤을 쓰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될 만큼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들은 엉성했다.
원래는 목비가 세워진 초라하기 짝이 없던 무덤이었는데, 그의 모교인 용정중학교에서 봉분둘레를 시멘트로 바르고 비석도 세웠다고 한다. 비문은 윤동주의 스승이었던 김석관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비문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명동 소학교를 나오고, 용정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문과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다가 하늘도 놀랄 만한 참변을 당했다고 되어있다.
무덤에 서서 서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산 밑에 미루나무가 자라고, 그 옆으로 비포장 도로가 있다. 그 길은 명동으로 가는 길이다. 윤동주는 어려서 이 길을 수없이 왕래 했을 것이다.1) (이하생략)
우리는 그 옆으로 난 비포장 길을 따라 다시 윤동주의 생가로 갔다. 기념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때 우리는 윤동주의 생가에 기념비(문학비)를 세울 모든 준비를 다 갖추고 갔었다.
그러나 당국의 허가 없이는 비(碑)를 세울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그 곳의 문인들에게 모두 위임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연변의 문인들이 그의 생가에 분명히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국에서 다시 땅속으로 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남의 땅 기념비(記念碑)조차 마음대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14억 중국인에게 처음 알리게 된 윤동주 유고집
한편 1995년 윤동주 시인 서거 50 주년을 맞아 연변대학과 중국 작가협회 연변분회 연변사회 과학윈 문학예술 연구소 용정시 문학예술 연합회의 공동 발기로 민족시인 윤동주 서거 50주년을 맞는 학술 토론회가 열렸다. 그때 주목 받을 만한 논문이 10여 편이나 쏟아져 나왔다 이 논문들은 1996년에 간행된 <민족시인 윤동주 50주기 기념학술 토론회 논문집>에 수록 되었다. 그리고 연변에서 많이 알려진 작곡가 최삼명 선생은 윤동주의 시 50여 편을 작곡하여 지금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서거한지 50년이 넘도록 그의 시집이 중국에서 출판되지 못 하였다.그리하여 조선족 학자들과 독자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된 그의 시집을 몇 권씩 어렵게 구해서 돌려가며 읽고 있었다. 연변을 중심으로 960만 평방 키로미터나 되는 넓은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지식인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윤동주 시집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전 중국 56개 민족 14억 인구에게 널리 알려야겠다는 염원과, 고향에서 자기 시집을 출판하려다 좌절된 시인의 한을 풀어 드려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95년 여름 필자가 연변에 있을 때, 윤동주 유고시집 중문판 간행위원회의 첫 모임이 이루어 졌다. 정판룡 부총장을 중심으로 권철 김동훈 최문식 교수 등이 앞장서서 . 연변대학교 고적연구소에다 모임의 중심을 두고 “윤동주 유고시집”을 중문 판으로 번역 하되 양 국어를 함께 수록하여 발간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출판하는데 드는 출판경비가 문제였다 당시 중국의 경제 사정으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에 달하는 출판비의 조달은 그저 꿈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미룰 수만도 없는 그저 절박한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기적을 믿는 수밖에 없는 심정에서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우선 윤동주의 시집을 중문 판으로 번역하는 데 따른 몇 가지 거처야 할 일들을 해결해야 했다.
첫째, 윤동주 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인정
둘째, 중국어 번역 수준을 보증할 수 있어야 했으며,
세 번째는 가장 중요한 출판에 들어가는 돈을 마련하는 일이다.
우선 정판룡 부총장을 중심으로 윤동주의 생애와 사상경향 그리고 그의 시문학에 대한 내용과 예술적 성향에 대하여 시대적이고도 객관적인 학술적 조명에 의한 재평가를 내리게 되는 일이었다. 그 검증에 대한 결론은 <중국조선족 문학사>(조성일 권철 주필 1990년 7월 연변 인민출판사)의 논증으로 귀결되었다. 즉 “윤동주의 시문학은 해방 전 조선족 시문학의 최후를 아름답게 장식한 시문학이며, 시대의 문학적 사명감과 독자적인 예술적 추구로 조선족 시문학을 한결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시문학으로서 우리조선 문학사에 빛나는 한 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민족의 암흑기인 30-40년대에 중국 조선족의 가장 걸출한 반일 저항시인으로서, 그의 시문학은 당시 한민족의 반일 의지와 삶에 대한 정서를 함께 모아 나타낸 가장 우수한 민족문화 유산이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의 조선족을 비롯하여 전 중국인에게 시인의 업적과 그 문학을 알린다는 것은 민족문화를 알리는 깊고도 깊은 뜻이 담기는 일이라는 결론도 함께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시인의 작품을 원래 모습대로 중국인에게 알리는 데는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었다.
중국의 시문학은 압운(押韻)이라는 독특한 음운 표현 체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나라 시문을 막론하고 중국어로 번역하는 경우 언어 형식에서 새로운 창작이 동반되어야 한다. 단어 선택과 문법적 표현을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연변의 여러 이름난 번역가들 중 북경대학교 조선어문학부 출신인 자형선생이 가장 적임자라고 인정하여 1996년 5월 그에게 중문 번역을 맡기게 되었다.
지금 출판된 번역본에 대해서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시인의 주체적 지향성을 옳게 파악하고 정확하게 옮기는데 애쓴 흔적이 역력하며, 시의 정감미 표현에서 단어 선택은 물론 문법과 수사학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원시와 똑같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중론을 얻고 있다. 윤동주 시집을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필자와 함께 주역의 한분으로 크게 활약했던 연변대 민족연구원장인 최문식 교수도
“단어 선택으로부터 문법과 수사학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시가의 함축성을 보장하였으며, 자유시의 내재적 음율을 살리고 매 시편 마다 수미일관(首尾一貫)한 압운(押韻)을 지킨 데서 음악성을 살렸으며, 시인의 미적 취향을 기본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미학적 수사학적 표현을 제대로 나타낸 수작”이라고 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재율에서 독특한 맥이 흐르고 조선 민족의 전통적인 가락에다가 일부 모더니즘적 표현방식을 도입하여 시어의 품격을 한껏 살아나게 한 것은 극찬을 받을 만한 번역”이라는 중론도 함께 받고 있다. 고 말하고 있다.
한민족 역사문화원의 창립과 윤동주 유고집 발간
.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출판 경비 문제였다 .연변대학교에서는 국내외 사방으로 출판 경비의 후원을 요청하였으나 거듭된 실망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필자는 연변대학교에서 중국의학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판룡 부총장과 최문식 교수를 거의 날마다 만났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윤동주 시집의 중문 판 발간에 대해 숙의하였다. 그때 최문식 교수는 필자를 연변대 객원교수로 추천하였다.
또한 우리는 윤동주시집의 중문 판 발간을 위해 “ 한민족역사문화원“을 창립하였다. 그것은 연변대학교 고적 연구소만으로는 이 큰일을 추진하는 데에는 너무 힘에 겨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책을 발간하는데 들어가는 돈은 한국에서 조달해야하는데 한국과 이어지는(連繫)그 어떤 조직적인 연구기관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민족역사문화원과 연변대학교의 고적연구소가 공동으로 책을 발간하는데 힘을 모으기로 하였다.. 연변대 박문일 총장을 상임고문으로 추대하고 정팡용 부총장을 고문으로 추대했으며, 필자가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최문식 연변대 고적 연구소장을 명예 원장으로 초빙함과 동시에 필자는 연변대 고적 연구소의 명예 소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그리고 연구위원과 임원들은 한국과 중국의 저명한 교수들을 초빙했다. 그리고 출판경비 전액을 책임지겠다는 독지가 한분을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윤동주 시집 중문판 발행은 가속도가 붙었다. 출판경비 일체를 한민족 역사문화연구원(원장 김정오)에서 책임지기로 했다 그리고 기획 편집은 연변대 고적 연구 소장 겸 민족 연구원장 최문식 교수와 연변대 출판사 김동훈 주필이 맡았으며, 번역은 베이징대 조선어학과 출신인 자형 선생이 맡았다. 그리고 연변대학 출판사 김경운 선생이 책임 편집을 맡았으며 ,정판룡 교수와 권철 교수가 서문을 썼다. 그리고 최문식 교수가 머리말을 썼으며, 이재현 시인이 축사를 썼다. 그렇게 해서 가슴 조이며, 기다리던 우리의 윤동주 시집 중문 판은 1997년 2월 드디어 세상에 그 첫 모습을 보였고, 낭랑한 시 읊음으로 첫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리게 되었다. 나는 가슴을 쓰러 내리면서 감격했다 아니 우리 모두가 다 그랬다.
그리하여 1997년 3월24일 오전 10시부터 연변의 녹원호텔에서 성대한 출판기념회와 학술대회를 가졌다. 그때 연변대학교의 전 손동식 총장(당시 부총장)과 김병민 현 총장(당시 사대학장) 외 많은 교수들과 함께 연변 작가협회를 비롯하여 연변 사회과학원 등 여러 부분의 저명인사들과 시인의 일가친척 등 많은 내외 귀빈들이 자리에 참석하여 대회를 빛내 주었다. 사회는 최문식 교수가 담당했고, 정판용 교수 외 몇 분이 축사를 했으며, 김정오 이해산 교수 외 5명의 학자들이 학술 발표회를 가졌다. 그리고 연변과 연길시의 텔레비전 방송은 물론 .연변일보와 연길석간 등 모든 언론이 나와 특집 방송과 기사로써 윤동주 시집의 중문 판 발간을 함께 축하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의 시를 작곡한 50여곡의 노래 중 6곡을 이름난 성악가들의 열창으로 힘께 감상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27일 오후 6시30분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동원 예식장에서 한민족역사문화원과(원장 김정오) 한국문인협회 무안지부(지부장 김정삼) 공동 주최로 윤동주 시집 중국어판 발간 출판 기념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특히 이 자리에는 멀리 중국의 연변대학교에서 정판용 부총장과 권철 ,최문식 교수가 자리를 함께 하여 이 역사적인 자리가 더욱 값진 자리로 빛났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윤동주 시집의 중국어판 발간에 대한 경위를 설명했고. 목포대 대학원장 허형만 교수와 국민대 문과 대학장 장백일 교수가 서평을 해 주었으며, 최일환 목포예총회장과 전남 문협 김학래 지회장 그리고 무안 문협 김정삼 지부장 외 많은 문인들이 시 낭송과 축하의 말씀을 해주었다. 특히 권철 교수와 최문식 교수가 “윤동주의 유고집 중문 판 출판경위“와 ”중국에서의 시인 윤동주 연구”라는 귀한 논문까지 발표해 주어서 더욱 알차고 값진 자료를 남기게 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필자는 연변대 박문일 총장과 최문식 민족 연구원장으로부터 공로패와 감사패를 받게 되었다.
윤동주 유고집(尹東柱遺稿集) 중국어판의 특징
윤동주 시집이 중국어판으로 발간되면서 몇 가지 설명해야할 사항이 있다.
우선 역사 이래 처음으로 발간된 윤동주 유고집이 <중국 조선족 고적 총서>에 수록되어 중국 조선 문학사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고전과 현대문학의 구분을 통상1885년 갑오경장 이전의 문학을 고전으로 하고 그 이후의 문학을 신문학과 현대문학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광수의 무정과 주요한의 불놀이를 기점으로 현대문학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윤동주의 문학도 우리의 잣대로 보면 현대문학에 속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1945년 광복을 깃 점으로 그 이전의 문학을 고전으로 치고 있다.(북한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윤동주의 작품은 1945년 이전에 씌어졌기에 당당히 고전으로 분류되어 대접 받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윤동주 유고시집>의 중문 판의 독자층이 중국의 독자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원시가 한글로 씌어졌고 시인 역시 우리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중시하여, 한글로 된 시를 앞부분에, 중문 번역시를 뒷부분에 놓고 각기 목차를 만들어 편집하였다. 그리고 원시에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고, 정장 본(精裝本)과 간장 본(簡裝本)으로 나누어 초판을 3천부 한정판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이 유고집의 편집은 이미 국내외에서 발간된 시집들의 배열 순서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였다. 다시 말해 시인이 생전에 시가를 수장한 과정과 시인의 출판 의도를 고려하여 시인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수를 첫 부분에 배열하였으며, 산문 부분은 시인의 원고지에 씌어진 대로 창작 연대순으로 배열하였고, 그중 대표 제목으로 <별 똥 떨어진 데>란 작품을 선정하였다. 이로서 시인의 사상 감정과 시 창작 발전 면모를 알아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 독자들의 낭독과 이해를 돕고자 시의 원문에 대한 철자와 문장부호 띄어쓰기는 모두 현행 중국 조선어 문법의 규범을 따랐으며 한자(漢字)도 간자체 (簡字體)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유고집에 수록된 작품 중 시인이 생전에 <카톨릭 소년>과 <조선일보>에 발표한 12수 외에 작품의 대부분은 시인이 생전에 발표하지 못 하였기에 이 중문판 시집을 윤동주 유고집 (尹東柱遺稿集)이라고 한 것이다. 연변대 민족 연구원장 최문식 교수는 윤동주 유고집 중문 판의 발간에 대해서
“시인의 서거 52년 만에 그의 고향에서 처음으로 유고집이 출판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로서 중국에서의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시원으로 발돋움 했으며, 우리 해 내외에서 발간된 여러 시집들의 판본들과 함께 윤동주 시인이야말로 우리 범민족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천만의 독자층에서 57개 민족 14억의 독자층으로 독자가 확대되었으며, 중국 조선족 문화문고에 또 하나의 문화 재보(財寶)가 입고(入庫)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이렇게 큰일을 끝내고 나서 14억 중국인들에게 우리의 윤동주 시와 시인을 알려 주었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가슴 벅찬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일이 있기까지 처음부터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헌신해 주셨던 정판용 전 연변대 부 총장과 최문식 연변대 민족연구원장 그리고 전 민족연구원장 권철 교수, 전 연변대 박문일 총장과 손동식 총장, 김병민 현 총장과 그 밖의 연변대 여러 교수들과 함께 협조해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 드린다.
끝으로 정판용 전 연변대 부총장님을 잊을 수 없다. 그는 1932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여 5살 때 가족을 따라 흑룡강성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전 중국의 최고 거물급 지도자들인 강택민 주석 이붕 총리 등 거물들과 함께 모스코바 대학교에 국비로 유학을 떠났다. 톨스토이 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후 북경 대학 등 세계적인 대학에서 초빙하여도 마다하고 모교에서 후진들을 양성하기 위해 교수와 부총장과 종신교수를 역임하면서 세계적인 인물들을 길러 냈다. 국내외에서 큰 인물로 추앙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윤동주 유고집의 중문 판 발행을 위해 절대적인 공로를 세우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01년 가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신 정판용 교수님에게 다시 한 번 존경의 뜻을 올리면서 이 글을 바친다.
김정오 약력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졸업,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숭실대학교 평생교육 HRD연구소 연구원)
경기대학교, 중국연변대학교 겸임교수, 미국 워싱턴 신학대학원 초빙교수, 러시아 국립극동대학교 교환교수를 거쳐, 현재 그 대학의 종신연구교수. 사단법인 한국 평생교육진흥원장, 한민족역사문화원장, 국가발전국민연대 역사문제 연구 상임위원장, 국제문화예술협회 최고위원, 하늬솔 문학연구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저서 수필집; 빈 가슴을 적시는 단비처럼 외 수필집, 논, 편, 저서 20여권
첫댓글 언제 읽어도 가슴이 뜁니다. 원장님이 아니셨다면 14억의 중국인들은 용정 명동촌에서 나고 자란 윤동주를 몰랐을 것입니다. 원장님이 자랑스럽습니다.
14억 중국인들이 윤동주 유고집을 읽고 행복해했을것 같습니다.~ 김정오 교수님 애쓰셨습니다.~*^^*
인정해 주시고 공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대단한 수고에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