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濫觴)'이란 고사가 있다. 양자강 같은 큰 강도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술
잔을 겨우 띄울 만한 세류(細流)라는, 즉 사물 발생의 첫출발, 기원(起源)을 뜻하는
말이다.
오늘의 부천문학이 있게 된 남상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일찍이 우리의 선조들이 이 땅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면서 학문을 닦고 시문(詩文)을
읊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는데 그 정확한 시기를 상고(詳考)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
이라 편의상 현대문학의 출발부터 보기로 한다.
이 경우 단연 첫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수주 변영로(1898
~1961)이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은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
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로 잘 알려진 수주는 1898년 5월 9일 아버지 변정상과 어머니 강재경과의 사이
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기본교육을 마친 후 1920년「폐허」동인으로 문단에 데뷰한
이래 시집 「조선의 마음」과 수필집 「명정 40년」등을 남긴 문인으로, 두주불사(斗
酒不辭) 호방한 기품을 지녔던 풍류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한 절망적인 시대상황 속
에서도 대쪽과 같은 절개와 지조를 지녔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약전(略傳)첫머리를 보면, "…서울재동·계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의 마찰로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
가 같은 해 평창이씨 흥순과 결혼하였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
학하여 3년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산호세대학
에서 수학하였다.…'로 되어 있다. 한편 부천 오정구청의 호적기록을 보면 수주의 부
친이 1915년 1월 경기도 부천시 오정면 고강리 313번지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으며, 3
남인 수주(그의 본 이름은 영복(榮福)임는 1958년 6월 10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51번
지의 2로 분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기한 두 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수주는 부천에서 낳아 교육받고 활동한 엄밀한 의미
의 '부천 사람'으로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주를 굳이 우리 고장 사람으로 칭송하는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
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으 아호를 부천의 옛이름인 수주(樹州)로 삼고 있다는 점, 두번째는 부모님
이 계신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다는 점, 그의 한 수필을 보면, "…때는 이러
구려 십유사오년이 흘러갔다. 내가 부평(富平-현 부천) 향제(鄕第 고향에 있는 집-필
자 주)에 있을 때였다."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이곳에서 조부모, 부모, 형제들과 함께 잠들어 있
으며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문학과 호방한 기질, 그리고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선비적 삶의 자세를 지닌 큰 사람의 일깨움으로 영원한 우리 마음의 고향이 되고 있다
는 사실이다.
부천시 고강본동 산63번지에 변(卞)씨 문중 소유의 산이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
이 작은 민가의 마당을 가로질러 나 있다. 여기에는 조선 시대의 무신인 변종인의 묘
와 신도비, 그리고 유적지 정석이 있다. 이 유적지정석 뒷면에 수주의 '논개'가 새겨
져 있다. 또한 신도비의 비문은 '용재총화(용齋叢話)'를 지은 성종 때의 문신 성현(成
俔 1439∼1504)이 찬했다. 변종인의 신도비는 비좌가 옥갑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옥개
는 투구형인데 글씨는 거의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 바로 옆에 변영로 일가 -변영로, 변영태, 변영만 등 유명한 3형제와 그
의 부모 그리고 조부모의 묘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둘레에는 외부인의 출입
을 통제하기 위해서 철망이 쳐져 있고 그 철망 안쪽에 수주의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전면에는 '생시에 못뵈올님'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변영로 시인의 약력과
비문을 세운 동기가 쓰여 있다.
한편 1996년 12월 부천 중당공원에 문인협회 부천지부가 주관하여 또다른 그의 시비
를 세웠는데 비의 전면에는 '논개'가 새겨져 있다.
다음으로 지적할 인물은 시인 정지용(1903∼?)이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현대시사에 남을 천재시인'으로 극찬되는 정지용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그가 우리 고장과 특별한 연(緣)을 맺게 된 것은 2차대전 중 일제가
미국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서울 사람들은 소개(疏開)시켰을 때 지용은 복사꽃 아름
다운 '소사'를 선택하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
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참하 꿈엔들 잊힐
수 없는 그리운 고향 이곳 산하에서 보았던 것이다.
지용은 '소사'에 내려와서 우리말로 우리글을 짓는 일조차 범죄시되는 암울한 시대
라 시심(詩心)은 가슴에 깊이 묻어둔 채 신앙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교도로 이곳에 교당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인천교구를 찾아다니며 물질직인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손수 벽돌을 쌓아 오늘의 소사성당을 있게 하였다.
1930년대 우리 소설을 대표했던 상허 이태준(1904∼?)의 단편소설 「무연(無緣)」에
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다음으로 가본 데가 소래저수지다. 경인선으로 가 소새(素砂)서 내려 마침 버스가있
으면 대야리(大也里)까지 타고 없으면 장찬 십리길을 걸어야 하는 데다, 얕은 줄밭이
많고 깊은 데는 돌로 쌓은 둔덕에 앉게됨으로 바닥도 좋지 못하고 사람도 너 뜨거워진
다. 그러나 가끔 손아귀가 번 붕어를 낚을 수 있는 맛에 공일날 같은 때는 무려 삼사
십명은 모이는 데다."
평소 낚시질을 즐겨했던 상허에게 있어 이곳 부천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고 단지
소래저수지를 가기 위해 거쳤던 한미한 시골 마을로 간단히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지용의 집이 '대야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다는
것이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지용과 상허는 휘문학교 선후배이자 가람선생의 애제자
들이고 문학활동에서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각별한 사이이다. 시와 소설 부문에서
당대를 대표했던 두 사람은 이곳에서 함께 만나 우울한 시대를 한탄했던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yville.net%2Fbch%2Fhistory%2Fimg%2F218.jpg)
부천 남부역에서 서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소사 삼거리 못미쳐 길가로 화공약품을 파
는 상점들이 나온다. 소사본 2동 89-14소재 지금 '세건 윤활유'가 들어선 곳이 바로
정지용이 1943~46년간에 살았던 옛집 자리이다.
지난 1993년 5월 복사골문학회에서는 이 사실을 오래동안 기리기 위해서 그 집 벽면
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푯돌을 붙였다.
-여기는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정지용선생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약 3년동안 은거
하면서 詩心을 키우던 곳입니다.
세번째로 소향(素鄕) 이상로(李相魯:1916~1973)를 들 수 있다.
그는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문학부를 중퇴하고 귀국 후 언론계에 종사했던 문인으로,
『귀로』 『불온서정』 등의 시집과 수필집으로 『옥석혼화』『어느 나비가 주는 기억
만치도』등을 남겼다.
예전에 부천군이라 하면 지금의 부천시와 서울 온수동에서 고척동까지 서울 편입 전
구 소사읍 지역, 현재 시흥시의 구 소래읍지역, 그리고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면 지
역과 용유면 등 6개면이 포함된 방대한 지역이었다.
그런 관계로 '부천군'에 근거하여 여러 사람들을 부천 문인(『한국문학지도』(계몽
사,1996)를 보면 소설가 정구창, 시인 이흥우, 평론가 백승철 등을 부천출신의 문인으
로 적고 있다.) 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잘못이다.
소향도 여기에 예외일 수는 없다. 그는 온수동 사람이고『한국문예사전』(어문
각,1991)에서도 서울 출생으로 적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새삼 그를 거
론하는 이유는 아호를 '소사가 고향이다'는 뜻을 담고 있고 평소 부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박두진이 소향에게 띄운 글의 일부를 보자.
소향 형! 그간 어떠하십니까?
형은 무엇을 생각하며 지내십니까?
흰구름 둥둥 구름은 가고…
이제 다시 저는 잠자는 시혼, 나의 잠자는 시혼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또는 멀리
나들이간 시혼! 복사골 피는 마을을 찾아 혼자 나들이간 나의 시혼을 나는 어서 불러
야겠습니다.
이 벌을 지나면 저기 /남향받이 산기슭 / 그 다소곳한 마을에 / 복사골 오오 화안한
그 / 복사꽃 피리니
형!
나는 이제 복사꽃, 복사를 피는 마을을 향하여 가오리까?
수주와 지용 그리고 소향은 지금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들의 그윽한 문향(文香)
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오늘의 부천문학을 싹 틔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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