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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후기 스크랩 2014.09.08일 월요일 한가위추석 명절 이모저모
재휘애비 추천 0 조회 73 14.09.12 04: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가위 추석명절날, 오전에 일이있어 고향을 못가고 서울에서 명절을 대신한다.

새벽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면서, 조상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하늘은 가을하늘 답게 높고 푸르다.

 

오후에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을 들러서,

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한가위한마당 국악실내악단 "아름"의 국악공연을 관람했다.

 

 

우리집에서 나서면 실개천이 흐른다, 위로는 차들이 흐른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눈길을 끄는 전시물, 정도전선생의 한양설계에 대한 설명이다.

 

 

 

금척의 산하 일만 리가 / 金尺山河一萬里
한양 서울 황도 속에 번성하네 / 漢京翼翼黃圖裏
황도 한 문안에 큰 도회지 / 黃圖一案大都會
역력히 펼쳐 있어 손금을 보는 듯 / 歷歷鋪敍掌紋視
글 맡은 신하 그림에 쓰는 시 지을 줄 알아 / 詞臣解撰題?詩
성한 일에 왕명을 받았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 盛事何幸承恩旨
동월(董越)이 부(賦)를 지은 것4) 조금 뜻에 맞고 / 董越作賦差强意
서긍(徐兢)이 그림을 만든 것5) 어찌 혼자 아름다우랴 / 徐兢爲圖豈專美
조선 만세의 꺾이지 않는 기초 / 朝鮮萬世不拔基
문물 번화한 것이 모두 여기에 있네 / 文物繁華盡在此
 
육조와 백사는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 六曹百司領大小
팔문과 사교는 멀고 가까운 곳을 통하네 / 八門四郊通遐邇
팔만여 민가는 오부가 통할하고 / 八萬餘家統五部
사십구방은 세 저자를 끼고 있네 / 四十九坊控三市
빙 둘러 돌로 쌓은 성 금구와 같으니 / 週遭石城似金?
이것이 왕경의 대략이로다 / 此是王京大略耳

 

북쪽 산은 백악처럼 좋은 것 없고 / 北山無如白岳好
우편으로 인왕산을 끼었으니 백중과 같네 / 右把仁王伯仲似
영특한 기운 모여 돌빛이 푸르르니 / 英靈所鍾石氣靑
그 아래 기이한 선비가 많이 난다네 / 其下往往生奇士
남쪽 산은 자각처럼 수려한 것 없어 / 南山無如紫閣秀
푸른 기운 하늘에 솟았으니 하늘도 지척이라 / 翠眉浮天天尺咫
이것이 달아나는 말이 안장을 벗는 형국인데 / 云是奔馬脫鞍形
평안도의 봉홧불을 남쪽 변방에 알린다 / 平安火擧通南鄙
동쪽 산은 낙봉처럼 묘한 것이 없어 / 東山無如駱峯妙
공자의 사당이 그 기슭에 자리하고 있네6) / 玄聖門墻枕其趾

 

청계천 한 줄기 북영을 관통하고 / 淸溪一道貫北營
응암의 왜송(倭松) 푸르러 시들지 않네 / 鷹岫倭松靑不死
홍정은 세검천을 둘렀으니 / 紅亭繞以洗劍川
백추지 다듬는 방망이 소리 빈 골짝 울리고7) / 空谷砧鳴白?紙

외로운 정자 홀로 대명(大明) 하늘을 이니 / 孤亭獨戴大明天
백대의 청풍 밝고도 깨끗하다8) / 百代淸風皎不滓
세심대 꽃이 필운에 비치니 / 洗心臺花弼雲映
영광의 빛 천송이 만송이로다 / 寵光千?與萬?

원각사에 우뚝한 백탑은9) / 亭亭白塔大圓覺
열네 층을 공중에 포개었네 / 層給遙空十四累
운종가에 있는 흥천사의 큰 종은 / 興天大鐘雲從街
커다란 집 가운데에 날 듯하여라 / 傑閣堂中翼斯?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갔다 또 오는 사람들 / 來來去去去又來
인해가 망망하여 끝이 보이지 않네 / 人海茫茫不見?

거리 좌우에 늘어서 있는 천간 집에 / 沿街左右千步廊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 / 百貨山積計倍?
비단 가게에 울긋불긋 벌여 있는 건 / 錦肆紅綠班陸離
모두 능라(綾羅)와 금수(綿繡)요 / 紗羅練絹綾?綺
어물 가게에 싱싱한 생선 도탑게 살쪘으니 / 魚肆新鱗足珍?
갈치ㆍ노어ㆍ준치ㆍ쏘가리ㆍ숭어ㆍ붕어ㆍ잉어이네 / ??????鯉
쌀가게에 쌓인 쌀 반과산 같으니 / 米肆隣近飯顆山
운자 같은 흰밥에 기름이 흐른다 / 白粲雲子滑流匕
주점은 본래 인간 세상이나 / 酒肆本自人間世
웅백성홍(熊白猩紅)10)의 술빛 잔에 가득하네 / 熊白猩紅滿滿?
행상과 좌고 셀 수 없이 많아 / 行商坐賈指難?
자질구레한 물건도 갖추지 않은 것 없네 / 細???無不?

 

조선의 경제가 이전시기에 비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던 18세기 무렵인 1792년 4월. 여러 신하들과 시를 주고받는 것을 즐긴 정조는 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그림을 바탕으로 박제가,이덕무 등 여러명의 신하들에게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를 지어 바치라 명합니다. 정조의 명을 받은 관리들은 각각 200구 1400자가 넘는 7언 백운(百韻)의 장편시를 창작해서 제출합니다.

 

이때 정조는 답안을 직접 평가한 뒤 등수를 발표합니다. 1등은 병조정랑 신광하(申光河)였고, 2등은 검서관 박제가(朴齊家).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李晩秀), 4등은 승지 윤필병(尹弼秉), 5등은 겸검서관 이덕무(李德懋)와 유득공(柳得恭)이었습니다. 정조는 이들 6명의 시에 직접 어평(御評)까지 남깁니다. 위 내용의 성시전도시는 이중 이덕무가 쓴 성시전도시의 내용입니다. 

 

정조는 관리들이 제출한 시중 박제가의 시를 가장 높이 형가했지만, 이상하게도 인터넷에서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는 원문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편적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들만이 있을뿐인데 그중에는 비늘처럼 빽빽이 들어선 기와집 4만호라는 대목도 있어 더욱 흥미를 끕니다.

 

누가 썼는지를 막론하고 현존하는 성시전도시는 모두 번영하는 한양의 모습을 예찬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성(城)에서 나오는 분뇨를 다 수거하지 못해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며, 냇가 다리 옆 석축에는 인분이 달라붙어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라고 한양을 설명한 장본인입니다.

 

 

 

서울전체를 입체적으로 볼수있는 지도도 볼수가 있다.

역사박물관 앞에서는 많은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캘리그래픽이라고 했다.

"실패없는 성공없다."라는 글로 서혜진씨라는 예술가가 예쁜 글 한줄 써준다.

 

공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어서, 경희궁을 한번 더 둘러본다.

 

1617년(광해군 9) 인경궁(仁慶宮)·자수궁(慈壽宮)과 함께 건축을 시작하여

1623년 (광해군 15)에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 자리는 원래 인조(仁祖)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뒤에 元宗으로 추존)의 잠저(潛邸)였는데, 여기에 왕기(王氣)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光海君)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숭정전(崇政殿)·융복전(隆福殿)·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회상전(會祥殿)·흥화문(興化門)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829년(
순조 29)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燒失)되었으나, 1831년에 중건하였다. 그후 국권피탈 때에는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황학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숭정전은 1926년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되고,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흥화문은 1832년에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되었다가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은 1922년 사직단(社稷壇) 뒤 등과정(登科亭) 터로 이건하였다.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하고,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희궁 [慶熙宮] (두산백과)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경희궁지에 소재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이다.

일반적으로 궁궐의 정문은 2층으로 지어지는데,

경희궁은 임금이 가끔 머무르는 별궁인 까닭에

그 정문인 흥화문도 간소하게 1층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건평은 약 88㎡이다. 1617(광해군 9)~1620년(광해군 12)
경희궁을 창건할 때 동향(東向)으로 세워졌으며, 1915년 경희궁 남쪽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는 일제의 사찰인 박문사(博文寺)의 절문으로 사용되었고, 박문사가 있었던 그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호텔의 정문으로 이용하였으나, 1994년 원래 경희궁지로 가져와 다시 복원되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 등이 갖추어져 있고, 천장은 연등천장, 우물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방(昌枋), 평방(平枋)을 둔 기둥 위에는 외2출목(外二出目), 내2출목(內二出目)의 공포(?  包)를 구성하였다. 경희궁에 있던 1백여 채의 건물 가운데 숭정전(崇政殿)·황학정(黃鶴亭)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 문뿐이어서, 경희궁의 건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희궁 흥화문 [慶熙宮 興化門] (두산백과)

 

2시부터 국악 실내악단 "아름"의 공연인데, 30분 전에 갔더니, 자리가 꽉찼다.

그리고, 15시부터 공연하는 북한민속공연 "평양예술단" 공연의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국악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우리민족의 특성 때문일것이다.

 

거문고, 가야금, 대금, 소금, 아쟁, 해금, 북, 꽹과리, 장구가 다른 소리들이 화합하는

하나의 소리로 들려주는 우리가락, 추임새, 신나는 한판이였다.

춘향가 쑥대머리를 함께 하는 마당에서는 춘향의 처절한 마음이 전해오는 듯하다.

 

평양예술단은 탈북자들로 구성한 예술단이라고 한다.

아쉽지만, 다음기회에 보기로 하고...

 

거문고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재상 왕산악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현악기이다.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악기가 4세기 경의 안악3호분(고구려 古墳) 벽화(壁畵) 중 주악도(奏樂圖)에서 발견되었다. 이 거문고는 7C 말경 신라에 전해져 나라의 보물 창고(天尊庫)에 보존되어 오다가, 신라인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거문고는 오동나무 몸체 뒤에 단단한 나무로 뒷판을 댄 울림통을 갖고 있다. 몸체에는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가로 10cm 정도, 높이는 아주 낮은 것부터 6cm까지 되는 16개의 괘가 있다. 해죽(海竹)으로 만든 술대를 오른손 식지와 장지 사이에 끼고 엄지로 버티어 내려치거나 뜯어 연주한다. 이때 술대가 부딪치는 부분에 부드러운 가죽을 입혀 잡음을 줄인다. 오른손을 들어 위에서 내려치는 것을 대점(大点)이라 하고 오른손을 몸체에 댄 채로 뜯거나 치는 것을 소점(小点)이라고 한다.

거문고는 명주실로 된 여섯 개의 줄이 있는데 그 줄마다 이름이 있다. 연주자 쪽의 줄에서부터 첫째 줄을 문현(文絃)이라하고, 둘째 줄은 유현(遊絃), 셋째 줄은 대현(大絃), 넷째 줄은 괘상청, 다섯째 줄은 괘하청. 여섯째 줄은 무현(武絃)이라 일컫는다. 둘째, 셋째, 넷째줄은 제일 높은 괘(제1괘) 위에 버텨져 모든 괘 위를 지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괘 위를 줄과 함께 살짝 눌러 밀면 음정이 높아진다. 또한 농현(弄絃)은 누른 손가락의 전진 후퇴로 이루어진다. 제일 많이 사용하는 줄은 유현(遊絃)이라고 해서 가늘고, 셋째 줄은 대현(大絃)이라고 해서 상당히 굵고 낮은 소리가 나 유현과 대칭되는 음색을 이룬다.

거문고는 예부터 학문을 닦는 선비들이 즐겨 타는 것으로 악기 중에 으뜸으로 쳤다. 현악 위주의 악곡에서는 거문고가 합주를 이끌어 간다. 거문고는 음역도 넓어 세 옥타브를 낼 수 있으며 전조(轉調)하기가 관악기는 물론, 가야금보다도 수월하다. 한국 악기는 모두가 구음(口音)이라고 해서 입으로 그 고유의 소리를 흉내 내는 법이 있는데 음에 따라 당, 둥, 동, 징, 등, 덩, 흥, 청 하고 내는 거문고 구음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노래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문고 [玄琴] (국악기정보, 2010.7, 국립국악원)

 

옛 사람들은 거문고를 모든 음악의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백악지장(白樂之丈)’이라고 불렀다. 음색이 깊고 웅혼해 다른 악기들을 능히 거느릴 만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로부터 거문고는 남성의 악기요, 식자층의 악기였다.

거문고를 만들었다고 전하는 왕산악은 고구려의 제2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고, 거문고를 즐겨 연주한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 등도 문ㆍ사ㆍ철을 두루 갖춘 선비들이었다.

오늘날에도 거문고는 우리 음악 연주 전반에 걸쳐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거문고를 전공한 사람들이 우리 음악계를 이끌고 있다. 정악거문고의 대가 장사훈 선생의, 문현을 치고 그 여음을 다음 유현 소리가 나기 직전에 왼손바닥으로 막으며 타는 거문고 소리는 가히 신선의 소리 그 자체였다. 유현의 영롱한 소리도 일품이려니와 대현의 육중한 소리는 깊은 바다에 산다는 잠룡의 꿈틀거림을 묘사하고 있었다.

필자도 한적한 마을에서 벽에 거문고를 걸어놓고 거문고정악을 타며 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느짓한 상영산이나 여창 가곡 이수대엽을 타고, 지그시 눈을 감고 속소리로 거문고 구음(口音)을 하며 음악을 감상하는 낭만과 즐거움을 친구들과 나누고 싶다.

필자 미상, 「후원유연」

필자 미상, 「후원유연」18세기, 견본담채, 52.8x33.1cm, 국립중앙박물관

모든 악기의 우두머리, 거문고

거문고는 백악지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 음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세의 우리 음악계를 이끌었던 함재운, 함화진이나 현재 우리 음악계의 원로인 성경린, 1991년에 타계한 장사훈은 모두 거문고 전공이었다. 고악보도 거의 다 거문고 악보여서 우리 음악 이론을 공부하려면 거문고를 연주해야만 했다.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에서도 학과 공부를 잘하는 순서대로 거문고 전공자를 정하였다 하니 거문고 연주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무용총 벽화에 묘사된 거문고 연주 그림

중국 길림성 집안현 무용총 벽화에 묘사된 거문고 연주 그림

현악 연주자가 관악 연주자에 비해 음악계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것은 동ㆍ서양이 같다. 서양의 오케스트라에서도 악장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맡고, 고대 그리스에서도 관악기인 아울로스(aulos)보다 리라(lyra)의 음악을 격이 높다고 여겼다. 아마도 몸 안에 기운을 직접 불어넣어 터뜨리는 관악기의 직접성보다 손이나 매개 도구를 이용해 연주하는 현악기의 간접성이 더 순화되고 절제된 음악을 만들기 때문인 듯하다.

이러한 까닭에서인지 마음가짐이 음악에 나타난다고 생각한 조선의 사대부는 손으로 직접 뜯는 가야고보다 술대라는 도구로 타는 거문고를 더 사랑하였다. 음악을 통한 정신 수양을 중요하게 여기고 나아가 거문고를 그 도구로 사용했기에 겉모양부터 여러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거문고는 오동나무로 만드는데, 고이 자란 나무보다는 풍상을 겪으며 어렵게 자라다 말라죽은 나무, 곧 ‘석상자고동(石上自枯桐)’을 최고로 친다. 무른 재질의 오동나무는 음으로, 어렵게 자라 나이테가 촘촘한 것은 양으로 치므로, 우선 재료에서 음양이 조화를 이룬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거문고는 길이를 3자 6치 6푼으로 잡는데 이는 1년 366일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거문고의 앞면은 둥글게 만들어 하늘[天]을 나타내고, 뒷면은 편편하게 만들어 땅[地]을 가리킨다. 거문고에서 흘러나오는 다섯 음인 궁, 상, 각, 치, 우는 천지조화를 이루는 오행과 관련이 있다. 오동나무의 음양과 어울려 동양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음양오행을 완성하는 셈이다. 거문고는 이처럼 애초부터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어서 특히 선비가 사랑하는 악기가 되었다.

거문고로 연주하는 아정한 음악

정악(正樂)이라 하면, 말 그대로 아정(雅正)하고 고상하며 바르고 큰 음악이다. 궁중 음악의 일부를 포함하여 민간 상류층에서 즐겨 연주하던 모든 음악을 지칭한다. 특히 선비들이 풍류방에서 즐기던 가곡 연주에서는 다른 악기가 없더라도 거문고는 반드시 갖춰야 했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일제 강점기만 해도 거문고로는 민요나 무용 반주 등을 하지 않았다.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악기 편성으로 연주하는 대표적인 정악곡은 여민락영산회상이다.

거문고는 처음에는 경안법(輕按法)으로 연주했다. 경안법은 손가락으로 줄을 밀거나 당기지 않고 가볍게 연주하는 것으로 소리가 담백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조선 후기부터 줄을 밀어 짚는 역안법(力按法)을 사용하여 윤기 있는 음악으로 바뀌었다.

오른손의 검지와 장지 사이에 술대를 끼고 엄지로 버텨 쥔 다음 줄을 내려치거나 뜯고, 때로는 줄을 가볍게 밀어 타며,
산조에서는 괘상청ㆍ괘하청ㆍ무현 세 개의 줄을 아래위로 훑어 타기도 한다. 현을 내리칠 때는 공명통에 부딪히기 때문에 술대가 부딪히는 부분[玳瑁:대모]에 부드러운 가죽을 입혀 잡음을 줄였다. 이 부분을 대모라고 하는 이유는 예전에 거북[瑁] 등 껍데기를 말려 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실제 거북 등 껍데기를 붙인 거문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술대로 위에서 내려치는 것을 대점(大点)이라고 하고, 오른손을 몸체에 댄 채로 뜯는 것을 소점(小点)이라고 한다. 특히 대점은 거문고 소리를 대표하는데, 현의 떨림과 공명통의 울림이 어우러져 둔한 듯하면서 웅장한 소리가 난다. 거문고는 여섯 줄 가운데 유현ㆍ대현이라 불리는 두 줄만 선율을 연주하고 나머지 네 줄은 ‘두루룽’ 하는 지속음(drone)을 내는 구조를 가진 점이 특이하다.

『악학웨범』에 실린 거문고

『악학웨범』에 실린 거문고

거문고의 구조와 세부 명칭(출처: 송혜진, 『한국악기』, 열화당)

거문고의 구조와 세부 명칭(출처: 송혜진, 『한국악기』, 열화당)

거문고는 가야고와 달리 각 줄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연주자 쪽에서부터 첫째 줄은 문현(文絃), 둘째 줄은 유현(遊絃) 또는 자현(子絃), 셋째 줄은 대현(大絃), 넷째 줄은 괘상청[?上淸], 다섯째 줄은 괘하청[?下淸]ㆍ기괘청[??淸], 여섯째 줄은 무현(武絃)이라 일컫는다. 줄을 버티어 놓은 괘는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되어 있고, 가장 높은 괘는 6cm를 넘는다. 여섯 줄 가운데 둘째ㆍ셋째ㆍ 넷째 줄은 제일 높은 괘(제1괘) 위에 버텨져 모든 괘 위를, 나머지 세 줄은 안족(雁足) 위를 지난다.1)

이 괘 위를 지나는 세 개의 줄을 살짝 눌러서 밀거나 당겨서 음정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또 누른 손가락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농현을 표현한다. 세 줄 가운데서도 유현(둘째 줄)과 대현(셋째 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대현은 여섯 줄 가운데 가장 굵은 줄로 소리가 낮고 굵으며, 유현은 가장 가는 줄로 높고 가는 소리를 낸다. 나머지 네 줄은 손가락을 대지 않고 한 음만을 내는 개방현이다.

검은 학이 춤추다

거문고는 어디서, 언제 나타난 악기일까? 김부식(1075~1151년)이 펴낸 『삼국사기』에는 거문고의 유래가 자세하게 전한다.

진(晋)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보내 왔다.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것은 알았으나 그 악기의 연주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때 임금이 이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후히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제2상이었던 왕산악이 그 모양은 그대로 두고 그 제도를 많이 고쳐서 1백여 곡을 지어 연주하니 검은 학이 날아들어 춤추었다. 그래서 이를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는데 뒤에 현금(玄琴) 즉 검은고(거문고)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면 거문고와 ‘검다’는 말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국문학자인 양주동 박사는 ‘검다’라는 말은 감(玄), 검(墨)이고 이는 우리 나라 옛 말에서 신(神)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검, 곰 등은 모두 신 또는 하늘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천자문』의 첫 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도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고 한다. 하늘의 색깔이 검다는 것은 밤하늘을 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따라서 ‘검’이라는 말은 하늘을 나타내는 말이다. 가야고가 가야국의 악기라는 뜻이듯 거문고도 고구려의 악기라는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검은 학이 춤을 추었기 때문에 거문고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거문고를 미화하기 위해 만든 일화인 듯하다. 그만큼 거문고가 비범하고 소리가 아름다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요즘에는 거문고의 줄을 밀어서 연주한다. 이 연주 기법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음악의 독특한 시김새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서양의 현악기는 줄을 고른 다음에 현을 그대로 둔 채 지판을 짚어 소리를 낸다. 그러나 거문고는 밀어서 음을 높인 다음에 연주하므로 밀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오게 하면 장2도 이상 음이 내려온다. 이 같은 음정 차이 때문에 빠르게 줄을 밀고 당기는 것만으로 깊은 바이브레이션을 낼 수 있다. 이것을 우리 음악에서는 농현(弄絃)이라고 한다. 고도의 기교를 부리기 위해서 빠르고 정확하게 음계를 오르내리는 연습을 하는 서양 음악과 달리, 우리 음악에서는 농현의 농담(濃淡)으로 음악을 만들어 간다.

농현, 마음을 담은 연주법

우리 나라 현악기의 독특한 연주 기교인 농현은 그 기법이 아주 발달되어 있고 종류도 많다. 그래서 현악기뿐 아니라 현이 없는 피리나 대금 등에서도 다양하게 사용한다.

거문고는 줄을 밀고 당겨서 이런 기교를 내는데, 아쟁이나 가야고는 줄을 왼손으로 누르거나 들어서, 피리는 서[簧]를 깊이 또는 얕게 물거나, 혀 또는 목젖으로 조절한다. 그리고 대금은 악기 자체를 엎었다 젖혔다 하거나 공기를 강하게 혹은 약하게 불어넣어서 표현한다.

이러한 시김새는 손끝의 기교라기보다는 마음속에 담긴 음악을 표현하는 것이다. 같은 선생을 사사해도 음악이 전혀 다르게 나오는 것은 바로 연주자 마음마다 다르게 자리 잡은 이 시김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거문고 음악도 역시 정신적인 마음가짐이 음악에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기교 연습보다 연주자의 정신적인 수양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선비가 거문고를 각별히 사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서양에서도 음악은 단지 즐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한평생 봉사했다는 슈바이처 박사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기도를 하고 오르간으로 바흐의 「푸가」와 「프렐루드」를 연주했다고 한다. 이것이 즐거움을 얻기 위해, 혹은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연주한 음악이었을까? 아마도 바로크 음악의 순수함과 정갈함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고 했던, 음악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하나님께 봉사하려고 평생 음악을 붙잡았던 바흐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몸을 바쳐 일하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갈등을 음악을 통해 해소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슈바이처 박사가 즐겨 연주했던 바흐의 음악은 마음을 맑게 닦기 위한 자기 수양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거문고 음악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음악을 자기 수양의 수단으로, 교육적인 목적으로 생각하고 음악을 배우거나 즐기기에는 세상이 너무 바빠지고 각박해졌다. 매일 기계처럼 살아가느라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혼돈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정갈한 거문고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 지금보다는 좀더 바르고 살 만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신윤복, 『거문고 줄 고르기』

신윤복, 『거문고 줄 고르기』『여속도첩』중, 견본채색, 29.6x31.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음악을 사랑한 선비들

선비 사회에서 거문고를 귀중하게 여기다 보니 거문고에 대한 일화나 거문고를 남달리 사랑한 선비의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이 가운데 『악학궤범』을 쓴 성현의 수필집인 『용재총화(?齋叢話)』에 실린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권 아무개라는 선비가 자기가 음악을 배운 이야기를 하였다. “어렸을 때 밤중에 친구 집으로 가는데 마침 길가에 있는 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창 밖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남자와 여자가 이불을 끼고 앉아 있었다. 남자는 나이가 젊고 준수하게 생겼으며 여자는 아름답기가 비길 데 없었다. 여자가 일어나 시렁 위에서 작은 광주리를 가져 왔다. 그리고 광주리를 열더니 육포와 밤을 벌여 놓고는 은그릇에 술을 데워서 각각 서너 잔씩 마셨다. 남자가 거문고를 당겨 줄을 고르니 여자가 ‘풍입송(風入松) 곡을 타세요’ 하고 청하였다. 남자가 줄을 고르고 천천히 타니 소리가 매우 오묘하였다. 여자도 또한 거문고 음악에 맞추어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가 구슬을 굴리는 듯하였다. 나는 아름다운 광경에 부러운 생각이 그칠 줄 몰랐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들은 신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풍입송부터 먼저 배우고 여러 곡을 배웠다. 그러고는 첩을 얻어서 늙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들은 신선일 것’이라는 감상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신선 같던 남녀가 연주하고 노래하던 ‘풍입송’은 어떤 곡일까. 고려속요 가운데 하나였던 풍입송은 사실 왕덕(王德)을 송축하는 내용의 중국계 음악이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 궁중 연회 음악으로 연주되기도 했는데, 선비들이 즐기는 격조 높은 예술 음악 가운데 하나였다. 선비들이 이 곡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여러 문헌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선조 때의 문인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년)은 친구 김성원(金成遠)을 위하여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거문고를 노래하였다.

 

거문고 시옭 언져 / 풍입송 이야고야
손인동 주인인동 / 다니져 버려세라
장공(長空)에 나난 학이 / 이 골의 진선(眞仙)이라

(거문고에 시를 얹으니 풍입송이로구나
누가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 버릴 지경이로다
이 골짜기에서 하늘 높이 나는 학처럼 신선이 되었구나)

 

『해동가요』를 편찬한 조선 후기의 가객 노가재 김수장(老歌齋 金壽長, 1690~?) 역시 다음과 같은 시에서 풍입송을 노래했다.

 

복더위 훈증한 날에 청계를 찾아가서
옷 벗어 ?에 걸고 풍입송 노래하며
옥수에 일신 진구를 방척함이 어떠리

(복더위로 찌는 날씨에 맑은 계곡을 찾아가서
옷 벗어 나무에 걸고 풍입송을 노래하며
옥같이 맑은 물에 세상의 먼지와 때를 씻음이 어떠리)

 

조선 시대 선비는 누구인가? 선비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임금도 꾸짖는 대쪽 같은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시대를 잘 만나 눈 밝은 임금에게 발탁되면 기개와 식견을 펴 천하를 경영하였으나, 어지러운 시대에는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벼슬길에 오른 뒤 유배지에서 더 오래 지내야만 했던 선비 가운데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년)가 있다. 그 역시 음악과 거문고를 즐긴 대표적인 선비 가운데 하나였다.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윤선도의 종가에 보관되어 있는 거문고는 윤선도가 직접 연주했던 것이다.

윤위(尹褘, 1725~1756년)가 지은 『보길도지(甫吉島識)』에서 윤선도가 음악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일기가 청화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학관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하고 기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 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ㆍ서 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은 계담 속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또 칠암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 양도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야 무민당에 들어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 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여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비는 학문을 닦을 때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도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한 것이다. 그를 통해 비판자의 안목을 키우고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이면, 그 대상이 국왕이라도 결단코 주저하지 않고 서릿발 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 냈던 것이다.

거문고와 비슷한 동남 아시아의 악기들

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보면 거문고는 ‘중국에서 보내 온 일곱 줄 악기[七絃琴]를 왕산악이 고쳐서’ 우리 음악에 알맞도록 만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악기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거문고는 외래 악기인 셈이다. 의아한 것은 중국에는 거문고와 비슷한 악기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중국에 전해져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정착하지 못하고 사라진 악기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거문고의 원형은 무엇일까? 1930년대 국학자 안확(安廓)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현금은 고구려 제2상 왕산악이 진의 칠현금을 변작(變作)한 것이라 하는지라. 연(然)이나 여(余)의 사고(思考)로 미루어 보면, 인도의 부이나(비나)라는 것이 유입되어 그것을 변작한 듯하다.

-『조선(朝鮮)』, 「조선음악사」(안확, 1931년)

 

인도의 비나(veena)는 긴 판에 울림통을 단 것으로 한눈에 보기에는 거문고와 아주 다르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비나는 ‘거문고의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둘은 음의 높이를 조정하는 방법이 같다. 비나는 나무판을 세워 붙박이로 만든 기타의 지판 같은 것으로 음 높이를 조정한다. 이것을 프렛(fret)이라고 한다. 거문고에도 음 높이를 조정하는 프렛 역할을 하는 괘가 있다. 다른 현악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다.

또한 거문고는 줄이 여섯이다. 그런데 선율을 연주할 때는 여섯 줄을 모두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유현(둘째 줄)과 대현(셋째 줄)을 주로 사용한다. 나머지 네 줄은 ‘두르릉 두르릉’ 하는 울림을 지속하는 데만 사용한다. 인도의 비나는 일곱 줄이지만 제1, 2현 두 줄만 선율을 연주하는 데 사용한다. 나머지 다섯 줄은 역시 ‘두르릉 두르릉’ 하는 지속음 연주에 사용한다. 이 지속음을 ‘드론(drone)’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거문고와 비나는 여러 줄 중에 단 두 줄만 선율 연주에 사용하고 나머지 줄은 지속음 연주에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주로 연주하는 두 줄의 조율이 완전 5도로 같다. 즉 한 줄이 도면 다른 줄은 솔로 조율한다.

악기의 상징 동물을 살펴보면, 거문고는 검은 학[玄鶴]과 연관이 있다. 왕산악이 처음 칠현금을 고쳐 연주했을 때 검은 학이 날아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고, 악기의 이름도 이 일화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비나는 상징 동물이 봉황(鳳凰)이다. 중국 진양(陳陽) 『악서(樂書)』에는 비나를 ‘봉수공후’라고 하였는데, 악기의 머리에 봉황 머리[鳳首]가 새겨져 있어서다. 인도의 나라 새는 공작이다. 봉황는 상상 속의 새였으니 아마 비나에 새겨져 있는 공작를 중국 사람들이 봉황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비나와 유사한 타이 악기인 자케(jakhe)의 옛 이름은 ‘마유리 비나’이다. 마유리는 공작을 뜻하는 말이므로 같은 악기를 타이에서는 공작 비나로, 중국에서는 봉황 비나로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검은 학은 인도의 공작, 중국의 봉황처럼 새라는 점에서 연관이 있다.

자케와 거문고는 세 줄이 괘 위에 얹혀 있으며 비나는 괘 위에 네 줄이 얹혀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 길림성 무용총 고구려 벽화의 거문고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무용총 거문고는 4현 거문고인데 4현 모두가 괘 위에 얹혀 있기 때문이다.

연주할 때 두 악기 모두 도구를 이용한다는 점도 같다. 거문고는 20cm 정도의 술대로, 비나는 쇠로 된 삼각형 모양의 고리를 검지에 끼고 현을 퉁긴다.

대강의 비교이긴 하지만 이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봤을 때, 우리 나라 거문고는 인도에서 기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인도의 비나가 타이의 자케로, 중국의 봉수공후(鳳首??)로, 다시 우리 나라에 와서 거문고가 된 것이다. 거문고의 전래와 정착 과정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 조상이 외래 음악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그것을 한국적으로 변용하는 데도 뛰어난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문고 정악 - 절제의 선비 음악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악, 2007.6.20, 현암사)

 

울림통에 명주로 꼰 줄을 얹어 만든 사부(絲部)에 속하는 악기로 ‘가얏고’라고도 한다. 12줄로 되어 있으며, 술대를 이용하는 거문고와 달리 맨 손가락으로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낸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 현악기 가운데 하나로 소리가 부드럽고 아름다워 다양한 전통 악기와의 합주뿐 아니라,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 등에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 음악에 맞추어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15현, 17현, 18현, 22현, 25현으로 줄의 수를 늘린 개량가야금도 나타나고 있다.

기원과 역사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가야금은 가야국(伽倻國)의 가왕(嘉悉王)이 중국의 쟁(箏)을 참고해 만들었으며, 12달을 음률로 표현하기 위해 12현으로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의 진흥왕(眞興王) 조(條)에는 “가야국의 가왕이 12현금(十二弦琴)을 만들어 열두 달의 음률을 나타냈으며,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곡을 만들도록 명했다. 하지만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투항해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흥왕이 551년(진흥왕 12) 순행 중에 낭성(娘城)에 머물다가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궁으로 불러서 연주하게 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진흥왕은 이듬해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주지(注知)라고도 한다], 만덕(萬德) 3인에게 명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는데,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악지(樂志)’에는 “가야금도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다(加耶琴亦法中國樂部箏而爲之)”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가
왕이 모든 나라와 지방의 말은 각기 성음(聲音)이 다른데, 어찌 하나같겠느냐며 성열현(省熱縣)의 악사인 우륵에게 명해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 등 12곡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뒷날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오자 진흥왕은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에 머무르게 했다. 그리고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운 3인이 12곡을 줄여 5곡으로 만들자 진흥왕은 이를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가야금에는 ‘하림조(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라는 2개의 악조(樂調)가 있었으며, 모두 185개의 악곡(樂曲)이 있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하지만 1975년 경주 황남동(皇南洞) 계림로 30호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국보 제195호)에는 가야금과 유사한 형태의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의 모습을 묘사한 토우(土偶)가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5~6세기 신라 토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6세기 이전에 이미 신라에서 가야금이 제작ㆍ연주되었을 가능성도 학계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한편, 가야금은 8세기 일본의 나라시대[奈良時代]에 신라금(新羅琴)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으며,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 그 연주가 귀족사회에서 크게 성행했다. 일본의 왕
유물소장고인 쇼소인[正倉院]에는 이 시대의 신라금이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어서 고대의 가야금의 형태를 오늘날의 것과 비교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

《삼국사기》의 ‘악지’에는 “신라의 음악은 3죽(三竹)과 3현(三絃), 박판(拍板), 대고(大鼓), 그리고 가무(歌舞)로 구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현금(玄琴, 거문고), 가야금, 비파(琵琶)가 3현, 대금(大?), 중금(中?), 소금(小?)이 3죽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가야금은 신라시대부터 관악기ㆍ타악기들과 함께 편성되어 다양한 음악을 표현해왔으며, 조선시대에는 현악기 중심의 악기 편성인 ‘줄풍류(絲風流)’에서 대금ㆍ해금ㆍ거문고ㆍ장구 등과 함께 합주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장구 반주에 맞추어 가야금을 독주 형태로 연주하는 가야금산조와 가야금을 타면서 직접 노래를 부르는 가야금병창이 발달했다.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는 장단에 따라 3∼6개의 악장으로 나뉘며, 느린 장단에서 시작해 빠른 장단으로 바뀌면서 긴장과 흥겨움을 끌어올린다. 가야금산조는 다른 악기의 산조보다 가장 먼저 나타났으며, 다양한 연주 기법을 표현하기 쉬운 악기의 특성에 따라 여러 유파가 형성되었다. 특히 김창조(金昌祖, 1856~1919)는 판
소리의 장단 특성과 결합시켜 가야금산조의 틀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밖에 이차수(李且守)와 심창래(沈昌來) 등도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가야금산조의 양식을 발달시켰다. 이들을 계승한 성금련류, 강태홍류, 김죽파류, 최옥삼류, 김병호류, 김윤덕류, 서공철류, 황병기류 등이 오늘날 가야금산조의 대표적인 유파들로 꼽힌다.

가야금병창(伽倻琴竝唱)은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민요나 단가, 판
소리의 한 대목을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조선 순조 때에 이른바 ‘판소리 8명창’으로 꼽히던 신만엽(申萬葉)ㆍ김제철(金濟哲)이 판소리를 가야금의 선율에 맞춘 ‘석화제’를 창안하면서 발달했으며, 김창조 등 가야금산조의 명인들에 의해 그 틀이 다듬어졌다. 예전에는 가야금산조 연주자들이 가야금병창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의 연주자가 구분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판소리 《춘향가》 중의 〈사랑가〉나 《흥보가》 중의 〈제비노정기〉, 그리고 〈새타령〉, 〈남원산성〉과 같은 민요와 〈호남가〉, 〈죽장망혜〉, 〈녹음방초〉, 〈공명가〉와 같은 단가 등이 가야금병창으로 자주 연주된다.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은 모두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야금의 종류

가야금에는 정악을 연주하기 위한 정악가야금(正樂伽倻琴)과 산조와 병창을 위해 폭이 좁고 작게 만들어진 산조가야금(散調伽倻琴)이 있다.

법금(法琴)이나 풍류가야금(風流伽倻琴)이라고도 불리는 정악가야금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형태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비교적 몸체가 크고, 줄과 줄 사이의 간격도 넓다. 산조가야금은 산조와 민속악의 연주를 위해 조선 후기에 개량된 가야금으로 빠른 곡조를 연주하기 위해 정악가야금보다 크기도 작고 줄과 줄 사이의 간격도 좁다. 정악가야금은 길이 165?170cm, 너비 30?36cm, 현의 길이 140cm 가량이며, 산조가야금은 길이 145?150cm, 너비 21cm, 현의 길이 120cm 정도이다.

정악가야금과 산조가야금은 크기가 다른 만큼 음색도 다르다. 합주에 많이 쓰이는 정악가야금은
소리의 울림이 커서 음색이 깊고 담백하다. 산조가야금은 소리는 작으나 줄 간격이 좁아 다양한 연주 기법을 사용하기 편하며, 소리도 높고 맑다.

한편, 최근에는 전통적인 12현 가야금이 아니라, 15현ㆍ17현ㆍ18현ㆍ22현ㆍ25현으로 줄의 수를 늘린 개량가야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줄도
명주이 아니라 철이나 나일론을 사용한 가야금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개량가야금은 가야금이 표현할 수 있는 음역을 넓히고 음량을 확대해 전통음악만이 아니라 현대음악에서도 가야금이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개발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25현 가야금의 사용이 늘고 있으며, 이를 이용한 작품도 많이 창작되고 있다.

가야금의 구조

가야금은 좁고 긴 장방형의 몸통 위에 명주을 꼬아 만든 12개의 줄을 양쪽에 묶어 팽팽하게 당기고, 줄마다 기러기발 모양의 나무기둥으로 받쳐서 음정을 조절한다. 이 기러기발 모양의 나무기둥을 ‘안족(雁足)’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위치를 옮겨 음을 조율한다.

소리의 울림통으로 쓰이는 몸통의 제작방법은 정악가야금과 산조가야금이 다르다. 정악가야금은 큰 오동나무를 통으로 사용해 그 속을 파서 울림통을 만들지만, 산조가야금은 앞판과 뒤판을 붙이고 뒤판에 울림구멍을 파서 만든다.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밤나무가 사용된다. 가야금은 무릎 위에 길게 눕혀서 연주하는데, 연주자의 오른손 쪽에 위치한 가야금의 머리 부분을 ‘좌단(坐團)’이나 ‘용두(龍頭)’라고 한다. 그리고 반대쪽 몸통 끝을 정악가야금은 ‘양이두(羊耳頭)’, 산조가야금은 ‘봉미(鳳尾)’라고 한다. 정악가야금은 양의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산조가야금은 마치 봉새의 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각각 그러한 이름들이 붙여졌다.

줄은
명주을 여러 겹으로 꼬아 만드는데, 연주자의 바깥쪽부터 낮은 음을 내는 굵은 줄을 사용하며 안쪽으로 올수록 음이 높아지고 줄의 굵기는 점차 가늘어진다. 좌단 쪽으로는 ‘현침(絃枕)’으로 받쳐 줄과 몸통 사이에 간격을 두고, 그 옆의 구멍으로 넣어 뒤판의 ‘돌괘’에 매어 줄의 한쪽 끝을 고정시킨다. 그리고 반대쪽으로는 무명로 만든 ‘부들’이라는 굵은 줄에 이어 고정시키는데, 부들의 고리에 색이 감겨진 부분을 ‘학슬’이라고 한다. 부들은 ‘양이두’와 ‘봉미’에 뚫린 12개의 구멍에 고정되어 있으며, 묶고 난 나머지는 양이두에 감거나 서로 얽어매어 둔다.

가야금의 연주법

가야금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현침이 있는 부분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꼬리 부분을 왼쪽 무릎 약 30° 정도로 비스듬히 놓고 연주한다. 오른손은 손가락으로 줄을 뜯거나 퉁겨서 소리를 내고, 왼손은 안족의 왼쪽으로 약 10∼15cm 떨어진 곳에서 줄을 눌렀다 놓았다 흔들면서 소리를 다양하게 장식한다. 그러한 가야금의 연주방법은 줄을 흔들어주는 농현(弄絃), 소리를 흘려 내려주는 퇴성(退聲), 줄을 굴러주는 전성(轉聲) 등으로 구분된다.

가야금은
안족의 위치를 좌우로 움직여 조율을 하는데, 정악식(正樂式)과 산조식(散調式)으로 구분된다. 정악식에는 평조(平調), 계면조(界面調), 우조(羽調)의 3가지 조율법이 있다. 산조식에는 한 가지의 조율법만 있으나 연주자에 따라서 음높이를 다르게 맞추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금 [伽倻琴] (두산백과)

 

대금은 본래 신라 삼죽(三竹)의 하나로, 젓대라고도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횡적이다. 대나무관에 취구(입김을 불어 놓는 구멍) 1개, 청공(얇은 갈대 속막을 붙이는 구멍) 1개, 지공(손가락으로 막고 여는 구멍) 6개가 있으며 지공 아래에는 음높이를 조절하기 위한 칠성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공에는 갈대 속에서 채취한 청(淸)을 붙인다. 청의 울림은 다이내믹, 음색깔의 변화와 관련이 있으며, 대금의 유연하면서도 장쾌한 음색에 더욱 강한 호소력과 흥을 부여한다. 대금에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이 있는데, 정악대금은 글자 그대로 궁중음악과 정악에 사용되고 산조대금은 대금 산조나 민속무용 반주 등에 사용된다. 편종이나 편경처럼 고정음을 가진 악기가 편성되지 않은 합주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악기들이 대금에 음을 맞춘다.

『삼국사기』 악지에 "악기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바람과 파도가 잔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는 대금의 호국적 상징으로 전해진다. 대금은 황죽(黃竹)이나 양쪽에 골이 패인 쌍골죽으로 만드는데, 특히 쌍골죽은 야무진 소리를 내서 좋은 재료로 친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금 [大?] (국악기정보, 2010.7, 국립국악원)

 

소금은 가로로 부는 횡적류의 악기이다. 관악기 중 가장 높은 음역을 가졌으며 음색이 맑고 투명하다. 소금과 당적은 악기의 형태와 연주법, 쓰임새 등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유사하다. 연주자들 사이에는 아직도 두 가지 명칭이 혼용되지만, 1950년대부터는 당적 대신 소금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소금은 관현악 색채를 화려하게 하는 데 주로 쓰이는데 특히 수제천이나 해령등의 연주곡에서 연음형식의 악구를 연주할 때 높고 깨끗한 소리를 자랑한다. 현대에 와서는 명상과 휴식을 표현하는 창작음악에 즐겨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금 [小芩] (전라북도 국악기이미지, 전라북도)

원래는 7현(七絃)이었으나 음을 보강해 9현(九絃)으로 만들기도 한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악기로 조선 성종 무렵부터는 향악에까지 쓰게 되었다. 앞면은 오동나무, 뒷면은 밤나무로 거문고와 같이 운두가 얕은 상자 모양으로 짜서 만든다. 현악기 중에서는 가장 좁은 음역을 지닌 저음악기이며, 개나리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진을 칠한 활로 힘차게 줄을 문질러 소리낸다. 약간 거칠기는 하나 장대한 지속음(持續音)을 지녔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쟁 [牙箏] (두산백과)

해금은 2줄로 된 찰 현악기이다. 작은 울림통에 세로로 대를 세우고 울림통과 대 사이에 2개의 줄을 연결하고, 그 사이에 말총으로 만든 활대로 문질러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오른손은 활대로 줄을 마찰시키고, 왼손은 두 줄을 한꺼번에 감아 잡고 쥐거나 떼면서 음높이를 조절한다.

중국의 악서인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따르면 해금은 중국 본토인이 아니라 북방민족인 해족(奚族)의 악기로, 중국에서는 호부(胡部)악기로 분류되었다. 한국에서는 고려 고종 때의 〈한림별곡(翰林別曲)〉에 혜금(掛琴)이 보이고 〈고려사〉에도 혜금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해금은 혜금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악지에서는 당악과 향악에 함께 쓰였다고 하며, 악학궤범(조선조 성종 24년 : 1493년간)시절에는 향악에만 사용하였다. 해금은 정악과 산조 그리고 창작 음악 등 모든 분야에 사용되고 있는데, 오늘날 해금 음악의 발달과 그에 따른 표현력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 또한 개발 가능성의 잠재력이 있는 독주악기로서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울림통에 세로로 꽂혀 있는 입죽(立竹)은 해묵고 마디가 많은 오반죽(烏斑竹)을 쓰고, 주철(柱鐵)을 입죽 아래에 꽂아 울림통에 연결시키고 통 아랫부분에 고정시킨다. 입죽 윗부분에는 2개의 구멍을 뚫어 줄을 감은 주아(周兒)를 꽂는다. 주아에 연결된 2개의 줄인 중현(中絃)과 유현(遊絃)은 울림통을 지나 주철에 연결된다. 2개의 줄은 주아 아래에서 산성(散聲)이라는 줄에 의해 묶이고, 울림통과 줄 사이에는 원산(遠山)이 있어 줄을 지탱해준다. 활대는 오죽(烏竹)이나 해죽(海竹)으로 하고, 활시위는 말총으로 만든다.

활시위에 송진을 칠하여 유현과 중현 사이를 마찰하여 소리를 낸다. 연주법은 바닥에 앉은 자세에서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리고 그 위에 해금을 놓는다. 왼손으로는 줄을 짚고 오른손으로 활대를 쥔다. 〈악학궤범〉의 해금산형(奚琴散形)을 보면 조선 중기 이전에는 줄을 가볍게 짚어 연주하는 경안법(經按法)이 쓰였으나, 이후에는 줄을 눌러 짚는 역안법(力按法)이 쓰였다고 한다.

최근에는 연주법이 바뀌어 퇴성, 전성, 요성 등이 자유롭게 표현되고 있으며, 해금 산조가 가능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관현합주, 관악합주, 삼현육각 등의 궁중 음악에 널리 쓰였으며, 지금은 시나위, 산조, 무속음악, 민요, 춤, 음악에도 쓰인다. 음역이 넓고 이조(移調)가 쉬운 장점이 있으나, 정확한 음감을 요하는 까다로운 악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해금 (전라북도 국악기이미지, 전라북도)

오동나무로 만든 통을 두 개의 테에다가 하나는 말가죽을 메어 오른쪽 마구리에 대고, 다른 하나는 쇠가죽을 매어 왼쪽 마루기에 대어서 붉은 줄로 얽어 팽팽하게 켕겼다. 이 줄을 조종함으로써 소리가 높고 낮아진다. 혁부(革部) 또는 혁명악기(革鳴樂器, membranophone)에 드는 장고는 민간에서는 장구라고 부른다. 몸통의 허리가 잘록하게 생겼기 때문에 시간을 재는 도구인 hourglass drum으로 영역된다.

장고의 명칭은 『
고려사』 권80 「식화지」(食貨志)에 처음으로 나온다. 1076년(문종 30) 장고업사(杖鼓業師) 2명이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에 있었고, 그들의 급료는 1년에 쌀 8석(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고의 일종인 요고(腰鼓)가 고구려음악과 신라음악에서 연주됐음은 고구려의 고분벽화 및 신라 범종(梵鍾)에서 발견된다. 또한 당나라 십부기(十部伎) 중 고려기(高麗伎)에서 연주됐다고 『통전』(通典) 및 『신당서』(新唐書) 권21에 전한다.

오늘날 일본의 가가쿠(雅樂, Gagaku)의
고마가쿠(高麗樂, Komagaku)에서 연주되는 산노쓰즈미(三の鼓, sannotsuzumi)는 고구려의 요고처럼 생겼다. 그 북은 삼국시대 일본에 전해졌으리라고 추정되고 있다.

1114년(예종 9)
송나라의 휘종(徽宗 1101~1125)이 고려사신 안직숭(安稷崇)에게 보낸 신악기(新樂器)의 하나가 장고였다. 고려 때 팔관노부(八關鹵簿)에 10명의 군인이 장고를 연주했다고 『고려사』 권72에 전한다. 1116년(예종 9) 송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이 들어올 때 장고 20벌이 포함됐으므로, 장고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왕조를 거쳐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다. 고려 때 당악기(唐樂器)의 하나인 장고는 교방고(敎坊鼓)·대쟁(大箏)·박(拍)·방향(方響)·비파(琵琶)·아쟁(牙箏)·적(笛)·퉁소(洞簫)·피리(??)와 함께 『고려사』 권71(「악지」)에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고 [杖鼓]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이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전라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사설의 문학성이나 소리의 음악성으로 보아 가장 예술성이 높고 청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마당일 뿐만 아니라 사설의 길이도 가장 길어서 한마당을 모두 부르는데 짧은 바디는 5시간, 긴 바디는 8시간이 걸린다.

 

<춘향가>는 조선 중기에 이미 불렸을 것으로 짐작되나, 1754년(영조 30) 유진한(柳振漢)이 지은 ≪만화집 晩華集≫의 <춘향가>가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꼽힌다.

 

그 밖에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 觀優戱>, 장지완(張之琬)의 <광한루시 廣寒樓詩>, 신위(申緯)의 <관극시 觀劇詩>,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 廣寒樓樂府>, 이유원(李裕元)의 <관극팔령 觀劇八令>등이 있다.

순조 때 명창 송흥록(宋興綠)이 <춘향가>에서 ‘옥중가(獄中歌)’를 잘 불렀고, 그의 ‘옥중가’ 더늠이 오늘날까지 전하여진다.

 

또 순조 때 명창 염계달(廉季達)의 더늠으로 ‘남원골 한량(閑良) 대목’·‘돈타령’·‘네그른 내력’, 고수관(高壽寬)의 더늠으로 ‘자진 사랑가’, 모흥갑(牟興甲)의 더늠으로 ‘이별가’·‘날 다려 가오’, 송광록(宋光綠)의 더늠 ‘긴 사랑가’가 전하여오고 있다.

 

철종 때 명창 박유전(朴裕全)·이석순(李錫順)·박만순(朴萬順)·이날치(李捺致)·김세종(金世宗)·장자백(張子伯) 등이 <춘향가>로 이름을 떨쳤고, 고종 때 명창 황호통(黃浩通)·박기홍(朴基洪)·정정렬(丁貞烈) 등이 <춘향가>를 잘 불렀다.

 

오늘날 전승되는 <춘향가> 바디에는 박봉술(朴奉述)이 보유하고 있는 송만갑 바디, 정권진(鄭權鎭)이 보유하고 있는 정응민(鄭應珉) 바디, 김여란(金如蘭)이 보유하고 있는 정정렬 바디, 정광수(丁珖秀)가 보유하고 있는 김창환(金昌煥) 바디, 오정숙(吳貞淑)이 보유하고 있는 김연수(金演洙) 바디가 있으며, 박동진(朴東鎭)도 <춘향가>를 짜서 전판 공연한 바 있다.

 

그 밖에 많은 바디는 전승이 이미 끊어졌거나 거의 끊어지고 있다. 지금 전승되고 있는 여러 <춘향가>바디 가운데 송만갑 바디, 정응민 바디, 김창환 바디가 다른 바디보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춘향가>는 바디마다 짜임새가 얼마쯤 다르게 되어 있으나 흔히 ‘초앞’·‘광한루 경치’·‘책방독서’·‘백년가약’·‘이별가’·‘신연(新延)맞이’·‘기생점고(妓生點考)’·‘십장가(十杖歌)’·‘옥중가’·‘과거장(科擧場)’·‘어사행장(御史行裝)’·‘춘향편지’·‘옥중상봉’·‘어사출도’·뒤풀이로 짜여진 경우가 많다.

 

특히 <춘향가>에서 이름난 소리대목은 ‘적성가(赤城歌, 진양―우조)’·‘천자(千字)뒤풀이(중중모리―평조)’·‘춘향방경치(중모리 또는 세마치―우조)’·‘긴 사랑가(진양―우조)’·‘자진 사랑가(중중모리―추천목)’·‘이별가(진양―계면조)’·‘신연맞이(자진모리―우조)’·‘기생점고(진양―우조·중중모리―평조)’·‘군노사령(軍奴使令, 중중모리―설렁제)’·‘옥중가(진양―계면조)’·‘과거장(자진모리―우조)’·‘농부가(중모리―계면조)’·‘박석틔(진양―우조)’·‘어사와 장모(중중모리―계면조·경드름)’·‘옥중상봉(중모리―계면조)’·‘어사출도(자진모리―우조·계면조)’를 꼽을 수 있다.

 

<춘향가>는 화평한 장면, 슬픈 장면, 위풍당당한 장면, 우스운 장면이 고루 나뉘어 있고 진지한 대목과 우스운 대목이 고루 짜여 있다. 음악 또한 이와 같은 사설의 극의 내용에 따라서 장단과 조가 변화 있고 고르게 짜여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명창들이 대목마다 이름난 더늠을 많이 남겨놓고 있어서 음악적으로도 잘 짜여진 마당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춘향가 [春香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피해자들의 농성,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너무 오래동안 질질 껄고 있는듯 하다.

 

 

 

 

걸어서 서대문에서 인사동까지 오면서, 그냥 지나쳤던 곳을 꼼꼼이 읽어본다.

사물놀이는 사물(四物), 꽹과리 · 장구 · 북 · 징의 네 가지 악기 놀이[연주]라는 의미이다. 사물놀이는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구성의 풍물놀이를 1978년 무대예술로 각색한 것이다. 풍물놀이가 대규모의 놀이를 동반하여 야외 공연의 활동성을 강조하였다면 사물놀이는 악기 연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강조한 공연형태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장단을 연주하며 긴장과 이완의 주기적인 흐름 속에서 기경결해(시작, 진행, 절정, 마무리)의 전개방식으로써 진행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물놀이 (국악정보, 2010.7, 국립국악원)

 

인사동에서도 국악 한마당이 신나게 펼쳐지고 있다.

사물놀이를 감상을 못했다.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찾아서 감상해본다.

http://blog.daum.net/spaceandtime/3492

 

 

린아이들 좋아하는 비누방울 놀이, 무료 공연인듯 하다. 

 

안내견도 힘드나 봅니다. 그늘에서 졸고 있네요.

복돼지도 울타리를 넘어서 한가위 추석을 즐기고 있는듯 합니다.

 

경복궁에 도착했더니, 온통 외국인들...

한복에 매료된듯 하다...

러시아에서 유학온 학생두명과 함께 다니기로 했는데, 공연보는 중 서로 헤어졌다.

충주대학에서 한국어를 6개월 공부했다는 러시아아줌마 한분과 같은방을 사용한다는 러시아처녀...

내가 경북궁을 가이드 해주기로 했는데,....사람이 많아서 서로 못찾겠다 꾀꼬리...

 

 

지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108&cid=42840&categoryId=42848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경복궁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경복궁

 

http://www.royalpalace.go.kr:8080/content/guide/guide4.asp#

경복궁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참조

 

안내 :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14교황 프란치스코 방한기념특별展

천상의 아름다운 美 "천국의 문" 전시중.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바티칸미술관 소장 진품 성화)

전시기간은 8/15일 ~

관람료 성인 12,000원,

연락처 02-780-8635 "천국의문"전시추진위원회 

 

돌아오는 길에 실계천에 백로 식구들이 추석맞이를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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