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추석명절날, 오전에 일이있어 고향을 못가고 서울에서 명절을 대신한다. 새벽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면서, 조상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하늘은 가을하늘 답게 높고 푸르다.
오후에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을 들러서, 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한가위한마당 국악실내악단 "아름"의 국악공연을 관람했다.
우리집에서 나서면 실개천이 흐른다, 위로는 차들이 흐른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눈길을 끄는 전시물, 정도전선생의 한양설계에 대한 설명이다.
금척의 산하 일만 리가 / 金尺山河一萬里 … 북쪽 산은 백악처럼 좋은 것 없고 / 北山無如白岳好
청계천 한 줄기 북영을 관통하고 / 淸溪一道貫北營
조선의 경제가 이전시기에 비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던 18세기 무렵인 1792년 4월. 여러 신하들과 시를 주고받는 것을 즐긴 정조는 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그림을 바탕으로 박제가,이덕무 등 여러명의 신하들에게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를 지어 바치라 명합니다. 정조의 명을 받은 관리들은 각각 200구 1400자가 넘는 7언 백운(百韻)의 장편시를 창작해서 제출합니다.
이때 정조는 답안을 직접 평가한 뒤 등수를 발표합니다. 1등은 병조정랑 신광하(申光河)였고, 2등은 검서관 박제가(朴齊家).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李晩秀), 4등은 승지 윤필병(尹弼秉), 5등은 겸검서관 이덕무(李德懋)와 유득공(柳得恭)이었습니다. 정조는 이들 6명의 시에 직접 어평(御評)까지 남깁니다. 위 내용의 성시전도시는 이중 이덕무가 쓴 성시전도시의 내용입니다.
정조는 관리들이 제출한 시중 박제가의 시를 가장 높이 형가했지만, 이상하게도 인터넷에서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는 원문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편적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들만이 있을뿐인데 그중에는 비늘처럼 빽빽이 들어선 기와집 4만호라는 대목도 있어 더욱 흥미를 끕니다.
누가 썼는지를 막론하고 현존하는 성시전도시는 모두 번영하는 한양의 모습을 예찬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성(城)에서 나오는 분뇨를 다 수거하지 못해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며, 냇가 다리 옆 석축에는 인분이 달라붙어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라고 한양을 설명한 장본인입니다.
서울전체를 입체적으로 볼수있는 지도도 볼수가 있다. 역사박물관 앞에서는 많은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캘리그래픽이라고 했다. "실패없는 성공없다."라는 글로 서혜진씨라는 예술가가 예쁜 글 한줄 써준다.
공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어서, 경희궁을 한번 더 둘러본다.
1617년(광해군 9) 인경궁(仁慶宮)·자수궁(慈壽宮)과 함께 건축을 시작하여 1623년 (광해군 15)에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 자리는 원래 인조(仁祖)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뒤에 元宗으로 추존)의 잠저(潛邸)였는데, 여기에 왕기(王氣)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光海君)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희궁 [慶熙宮] (두산백과)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경희궁지에 소재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이다. 일반적으로 궁궐의 정문은 2층으로 지어지는데, 그 정문인 흥화문도 간소하게 1층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붕마루에는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 등이 갖추어져 있고, 천장은 연등천장, 우물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방(昌枋), 평방(平枋)을 둔 기둥 위에는 외2출목(外二出目), 내2출목(內二出目)의 공포(? 包)를 구성하였다. 경희궁에 있던 1백여 채의 건물 가운데 숭정전(崇政殿)·황학정(黃鶴亭)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 문뿐이어서, 경희궁의 건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희궁 흥화문 [慶熙宮 興化門] (두산백과)
2시부터 국악 실내악단 "아름"의 공연인데, 30분 전에 갔더니, 자리가 꽉찼다. 그리고, 15시부터 공연하는 북한민속공연 "평양예술단" 공연의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국악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우리민족의 특성 때문일것이다.
거문고, 가야금, 대금, 소금, 아쟁, 해금, 북, 꽹과리, 장구가 다른 소리들이 화합하는 하나의 소리로 들려주는 우리가락, 추임새, 신나는 한판이였다. 춘향가 쑥대머리를 함께 하는 마당에서는 춘향의 처절한 마음이 전해오는 듯하다.
평양예술단은 탈북자들로 구성한 예술단이라고 한다. 아쉽지만, 다음기회에 보기로 하고...
거문고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재상 왕산악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현악기이다.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악기가 4세기 경의 안악3호분(고구려 古墳) 벽화(壁畵) 중 주악도(奏樂圖)에서 발견되었다. 이 거문고는 7C 말경 신라에 전해져 나라의 보물 창고(天尊庫)에 보존되어 오다가, 신라인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거문고는 오동나무 몸체 뒤에 단단한 나무로 뒷판을 댄 울림통을 갖고 있다. 몸체에는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가로 10cm 정도, 높이는 아주 낮은 것부터 6cm까지 되는 16개의 괘가 있다. 해죽(海竹)으로 만든 술대를 오른손 식지와 장지 사이에 끼고 엄지로 버티어 내려치거나 뜯어 연주한다. 이때 술대가 부딪치는 부분에 부드러운 가죽을 입혀 잡음을 줄인다. 오른손을 들어 위에서 내려치는 것을 대점(大点)이라 하고 오른손을 몸체에 댄 채로 뜯거나 치는 것을 소점(小点)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문고 [玄琴] (국악기정보, 2010.7, 국립국악원)
옛 사람들은 거문고를 모든 음악의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백악지장(白樂之丈)’이라고 불렀다. 음색이 깊고 웅혼해 다른 악기들을 능히 거느릴 만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로부터 거문고는 남성의 악기요, 식자층의 악기였다. 모든 악기의 우두머리, 거문고거문고는 백악지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 음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세의 우리 음악계를 이끌었던 함재운, 함화진이나 현재 우리 음악계의 원로인 성경린, 1991년에 타계한 장사훈은 모두 거문고 전공이었다. 고악보도 거의 다 거문고 악보여서 우리 음악 이론을 공부하려면 거문고를 연주해야만 했다.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에서도 학과 공부를 잘하는 순서대로 거문고 전공자를 정하였다 하니 거문고 연주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현악 연주자가 관악 연주자에 비해 음악계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것은 동ㆍ서양이 같다. 서양의 오케스트라에서도 악장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맡고, 고대 그리스에서도 관악기인 아울로스(aulos)보다 리라(lyra)의 음악을 격이 높다고 여겼다. 아마도 몸 안에 기운을 직접 불어넣어 터뜨리는 관악기의 직접성보다 손이나 매개 도구를 이용해 연주하는 현악기의 간접성이 더 순화되고 절제된 음악을 만들기 때문인 듯하다. 거문고로 연주하는 아정한 음악정악(正樂)이라 하면, 말 그대로 아정(雅正)하고 고상하며 바르고 큰 음악이다. 궁중 음악의 일부를 포함하여 민간 상류층에서 즐겨 연주하던 모든 음악을 지칭한다. 특히 선비들이 풍류방에서 즐기던 가곡 연주에서는 다른 악기가 없더라도 거문고는 반드시 갖춰야 했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일제 강점기만 해도 거문고로는 민요나 무용 반주 등을 하지 않았다.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악기 편성으로 연주하는 대표적인 정악곡은 여민락과 영산회상이다. 거문고는 가야고와 달리 각 줄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연주자 쪽에서부터 첫째 줄은 문현(文絃), 둘째 줄은 유현(遊絃) 또는 자현(子絃), 셋째 줄은 대현(大絃), 넷째 줄은 괘상청[?上淸], 다섯째 줄은 괘하청[?下淸]ㆍ기괘청[??淸], 여섯째 줄은 무현(武絃)이라 일컫는다. 줄을 버티어 놓은 괘는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되어 있고, 가장 높은 괘는 6cm를 넘는다. 여섯 줄 가운데 둘째ㆍ셋째ㆍ 넷째 줄은 제일 높은 괘(제1괘) 위에 버텨져 모든 괘 위를, 나머지 세 줄은 안족(雁足) 위를 지난다.1) 검은 학이 춤추다거문고는 어디서, 언제 나타난 악기일까? 김부식(1075~1151년)이 펴낸 『삼국사기』에는 거문고의 유래가 자세하게 전한다. 진(晋)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보내 왔다.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것은 알았으나 그 악기의 연주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때 임금이 이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후히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제2상이었던 왕산악이 그 모양은 그대로 두고 그 제도를 많이 고쳐서 1백여 곡을 지어 연주하니 검은 학이 날아들어 춤추었다. 그래서 이를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는데 뒤에 현금(玄琴) 즉 검은고(거문고)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면 거문고와 ‘검다’는 말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국문학자인 양주동 박사는 ‘검다’라는 말은 감(玄), 검(墨)이고 이는 우리 나라 옛 말에서 신(神)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검, 곰 등은 모두 신 또는 하늘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천자문』의 첫 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도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고 한다. 하늘의 색깔이 검다는 것은 밤하늘을 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따라서 ‘검’이라는 말은 하늘을 나타내는 말이다. 가야고가 가야국의 악기라는 뜻이듯 거문고도 고구려의 악기라는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검은 학이 춤을 추었기 때문에 거문고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거문고를 미화하기 위해 만든 일화인 듯하다. 그만큼 거문고가 비범하고 소리가 아름다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농현, 마음을 담은 연주법우리 나라 현악기의 독특한 연주 기교인 농현은 그 기법이 아주 발달되어 있고 종류도 많다. 그래서 현악기뿐 아니라 현이 없는 피리나 대금 등에서도 다양하게 사용한다. 음악을 사랑한 선비들선비 사회에서 거문고를 귀중하게 여기다 보니 거문고에 대한 일화나 거문고를 남달리 사랑한 선비의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이 가운데 『악학궤범』을 쓴 성현의 수필집인 『용재총화(?齋叢話)』에 실린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권 아무개라는 선비가 자기가 음악을 배운 이야기를 하였다. “어렸을 때 밤중에 친구 집으로 가는데 마침 길가에 있는 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창 밖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남자와 여자가 이불을 끼고 앉아 있었다. 남자는 나이가 젊고 준수하게 생겼으며 여자는 아름답기가 비길 데 없었다. 여자가 일어나 시렁 위에서 작은 광주리를 가져 왔다. 그리고 광주리를 열더니 육포와 밤을 벌여 놓고는 은그릇에 술을 데워서 각각 서너 잔씩 마셨다. 남자가 거문고를 당겨 줄을 고르니 여자가 ‘풍입송(風入松) 곡을 타세요’ 하고 청하였다. 남자가 줄을 고르고 천천히 타니 소리가 매우 오묘하였다. 여자도 또한 거문고 음악에 맞추어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가 구슬을 굴리는 듯하였다. 나는 아름다운 광경에 부러운 생각이 그칠 줄 몰랐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들은 신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풍입송부터 먼저 배우고 여러 곡을 배웠다. 그러고는 첩을 얻어서 늙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들은 신선일 것’이라는 감상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신선 같던 남녀가 연주하고 노래하던 ‘풍입송’은 어떤 곡일까. 고려속요 가운데 하나였던 풍입송은 사실 왕덕(王德)을 송축하는 내용의 중국계 음악이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 궁중 연회 음악으로 연주되기도 했는데, 선비들이 즐기는 격조 높은 예술 음악 가운데 하나였다. 선비들이 이 곡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여러 문헌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선조 때의 문인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년)은 친구 김성원(金成遠)을 위하여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거문고를 노래하였다.
거문고 시옭 언져 / 풍입송 이야고야 (거문고에 시를 얹으니 풍입송이로구나
『해동가요』를 편찬한 조선 후기의 가객 노가재 김수장(老歌齋 金壽長, 1690~?) 역시 다음과 같은 시에서 풍입송을 노래했다.
복더위 훈증한 날에 청계를 찾아가서 (복더위로 찌는 날씨에 맑은 계곡을 찾아가서
조선 시대 선비는 누구인가? 선비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임금도 꾸짖는 대쪽 같은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시대를 잘 만나 눈 밝은 임금에게 발탁되면 기개와 식견을 펴 천하를 경영하였으나, 어지러운 시대에는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벼슬길에 오른 뒤 유배지에서 더 오래 지내야만 했던 선비 가운데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년)가 있다. 그 역시 음악과 거문고를 즐긴 대표적인 선비 가운데 하나였다.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윤선도의 종가에 보관되어 있는 거문고는 윤선도가 직접 연주했던 것이다.
일기가 청화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학관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하고 기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 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ㆍ서 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은 계담 속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또 칠암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 양도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야 무민당에 들어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 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여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비는 학문을 닦을 때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도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한 것이다. 그를 통해 비판자의 안목을 키우고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이면, 그 대상이 국왕이라도 결단코 주저하지 않고 서릿발 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 냈던 것이다. 거문고와 비슷한 동남 아시아의 악기들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보면 거문고는 ‘중국에서 보내 온 일곱 줄 악기[七絃琴]를 왕산악이 고쳐서’ 우리 음악에 알맞도록 만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악기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거문고는 외래 악기인 셈이다. 의아한 것은 중국에는 거문고와 비슷한 악기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중국에 전해져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정착하지 못하고 사라진 악기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거문고의 원형은 무엇일까? 1930년대 국학자 안확(安廓)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현금은 고구려 제2상 왕산악이 진의 칠현금을 변작(變作)한 것이라 하는지라. 연(然)이나 여(余)의 사고(思考)로 미루어 보면, 인도의 부이나(비나)라는 것이 유입되어 그것을 변작한 듯하다. -『조선(朝鮮)』, 「조선음악사」(안확, 1931년)
인도의 비나(veena)는 긴 판에 울림통을 단 것으로 한눈에 보기에는 거문고와 아주 다르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비나는 ‘거문고의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둘은 음의 높이를 조정하는 방법이 같다. 비나는 나무판을 세워 붙박이로 만든 기타의 지판 같은 것으로 음 높이를 조정한다. 이것을 프렛(fret)이라고 한다. 거문고에도 음 높이를 조정하는 프렛 역할을 하는 괘가 있다. 다른 현악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문고 정악 - 절제의 선비 음악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악, 2007.6.20, 현암사)
울림통에 명주실로 꼰 줄을 얹어 만든 사부(絲部)에 속하는 악기로 ‘가얏고’라고도 한다. 12줄로 되어 있으며, 술대를 이용하는 거문고와 달리 맨 손가락으로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낸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 현악기 가운데 하나로 소리가 부드럽고 아름다워 다양한 전통 악기와의 합주뿐 아니라,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 등에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 음악에 맞추어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15현, 17현, 18현, 22현, 25현으로 줄의 수를 늘린 개량가야금도 나타나고 있다.
기원과 역사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가야금은 가야국(伽倻國)의 가실왕(嘉悉王)이 중국의 쟁(箏)을 참고해 만들었으며, 12달을 음률로 표현하기 위해 12현으로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의 진흥왕(眞興王) 조(條)에는 “가야국의 가실왕이 12현금(十二弦琴)을 만들어 열두 달의 음률을 나타냈으며,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곡을 만들도록 명했다. 하지만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투항해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흥왕이 551년(진흥왕 12) 순행 중에 낭성(娘城)에 머물다가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궁으로 불러서 연주하게 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진흥왕은 이듬해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주지(注知)라고도 한다], 만덕(萬德) 3인에게 명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는데,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고 한다.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
《삼국사기》의 ‘악지’에는 “신라의 음악은 3죽(三竹)과 3현(三絃), 박판(拍板), 대고(大鼓), 그리고 가무(歌舞)로 구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현금(玄琴, 거문고), 가야금, 비파(琵琶)가 3현, 대금(大?), 중금(中?), 소금(小?)이 3죽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가야금은 신라시대부터 관악기ㆍ타악기들과 함께 편성되어 다양한 음악을 표현해왔으며, 조선시대에는 현악기 중심의 악기 편성인 ‘줄풍류(絲風流)’에서 대금ㆍ해금ㆍ거문고ㆍ장구 등과 함께 합주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장구 반주에 맞추어 가야금을 독주 형태로 연주하는 가야금산조와 가야금을 타면서 직접 노래를 부르는 가야금병창이 발달했다.
가야금의 종류
가야금에는 정악을 연주하기 위한 정악가야금(正樂伽倻琴)과 산조와 병창을 위해 폭이 좁고 작게 만들어진 산조가야금(散調伽倻琴)이 있다.
가야금의 구조
가야금은 좁고 긴 장방형의 몸통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12개의 줄을 양쪽에 묶어 팽팽하게 당기고, 줄마다 기러기발 모양의 나무기둥으로 받쳐서 음정을 조절한다. 이 기러기발 모양의 나무기둥을 ‘안족(雁足)’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위치를 옮겨 음을 조율한다.
가야금의 연주법
가야금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현침이 있는 부분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꼬리 부분을 왼쪽 무릎 약 30° 정도로 비스듬히 놓고 연주한다. 오른손은 손가락으로 줄을 뜯거나 퉁겨서 소리를 내고, 왼손은 안족의 왼쪽으로 약 10∼15cm 떨어진 곳에서 줄을 눌렀다 놓았다 흔들면서 소리를 다양하게 장식한다. 그러한 가야금의 연주방법은 줄을 흔들어주는 농현(弄絃), 소리를 흘려 내려주는 퇴성(退聲), 줄을 굴러주는 전성(轉聲) 등으로 구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금 [伽倻琴] (두산백과)
대금은 본래 신라 삼죽(三竹)의 하나로, 젓대라고도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횡적이다. 대나무관에 취구(입김을 불어 놓는 구멍) 1개, 청공(얇은 갈대 속막을 붙이는 구멍) 1개, 지공(손가락으로 막고 여는 구멍) 6개가 있으며 지공 아래에는 음높이를 조절하기 위한 칠성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공에는 갈대 속에서 채취한 청(淸)을 붙인다. 청의 울림은 다이내믹, 음색깔의 변화와 관련이 있으며, 대금의 유연하면서도 장쾌한 음색에 더욱 강한 호소력과 흥을 부여한다. 대금에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이 있는데, 정악대금은 글자 그대로 궁중음악과 정악에 사용되고 산조대금은 대금 산조나 민속무용 반주 등에 사용된다. 편종이나 편경처럼 고정음을 가진 악기가 편성되지 않은 합주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악기들이 대금에 음을 맞춘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금 [大?] (국악기정보, 2010.7, 국립국악원)
소금은 가로로 부는 횡적류의 악기이다. 관악기 중 가장 높은 음역을 가졌으며 음색이 맑고 투명하다. 소금과 당적은 악기의 형태와 연주법, 쓰임새 등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유사하다. 연주자들 사이에는 아직도 두 가지 명칭이 혼용되지만, 1950년대부터는 당적 대신 소금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소금은 관현악 색채를 화려하게 하는 데 주로 쓰이는데 특히 수제천이나 해령등의 연주곡에서 연음형식의 악구를 연주할 때 높고 깨끗한 소리를 자랑한다. 현대에 와서는 명상과 휴식을 표현하는 창작음악에 즐겨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금 [小芩] (전라북도 국악기이미지, 전라북도) 원래는 7현(七絃)이었으나 음을 보강해 9현(九絃)으로 만들기도 한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악기로 조선 성종 무렵부터는 향악에까지 쓰게 되었다. 앞면은 오동나무, 뒷면은 밤나무로 거문고와 같이 운두가 얕은 상자 모양으로 짜서 만든다. 현악기 중에서는 가장 좁은 음역을 지닌 저음악기이며, 개나리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진을 칠한 활로 힘차게 줄을 문질러 소리낸다. 약간 거칠기는 하나 장대한 지속음(持續音)을 지녔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쟁 [牙箏] (두산백과) 해금은 2줄로 된 찰 현악기이다. 작은 울림통에 세로로 대를 세우고 울림통과 대 사이에 2개의 줄을 연결하고, 그 사이에 말총으로 만든 활대로 문질러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오른손은 활대로 줄을 마찰시키고, 왼손은 두 줄을 한꺼번에 감아 잡고 쥐거나 떼면서 음높이를 조절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해금 (전라북도 국악기이미지, 전라북도)
오동나무로 만든 통을 두 개의 테에다가 하나는 말가죽을 메어 오른쪽 마구리에 대고, 다른 하나는 쇠가죽을 매어 왼쪽 마루기에 대어서 붉은 줄로 얽어 팽팽하게 켕겼다. 이 줄을 조종함으로써 소리가 높고 낮아진다. 혁부(革部) 또는 혁명악기(革鳴樂器, membranophone)에 드는 장고는 민간에서는 장구라고 부른다. 몸통의 허리가 잘록하게 생겼기 때문에 시간을 재는 도구인 hourglass drum으로 영역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고 [杖鼓]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이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전라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사설의 문학성이나 소리의 음악성으로 보아 가장 예술성이 높고 청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마당일 뿐만 아니라 사설의 길이도 가장 길어서 한마당을 모두 부르는데 짧은 바디는 5시간, 긴 바디는 8시간이 걸린다.
<춘향가>는 조선 중기에 이미 불렸을 것으로 짐작되나, 1754년(영조 30) 유진한(柳振漢)이 지은 ≪만화집 晩華集≫의 <춘향가>가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꼽힌다.
그 밖에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 觀優戱>, 장지완(張之琬)의 <광한루시 廣寒樓詩>, 신위(申緯)의 <관극시 觀劇詩>,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 廣寒樓樂府>, 이유원(李裕元)의 <관극팔령 觀劇八令>등이 있다. 순조 때 명창 송흥록(宋興綠)이 <춘향가>에서 ‘옥중가(獄中歌)’를 잘 불렀고, 그의 ‘옥중가’ 더늠이 오늘날까지 전하여진다.
또 순조 때 명창 염계달(廉季達)의 더늠으로 ‘남원골 한량(閑良) 대목’·‘돈타령’·‘네그른 내력’, 고수관(高壽寬)의 더늠으로 ‘자진 사랑가’, 모흥갑(牟興甲)의 더늠으로 ‘이별가’·‘날 다려 가오’, 송광록(宋光綠)의 더늠 ‘긴 사랑가’가 전하여오고 있다.
철종 때 명창 박유전(朴裕全)·이석순(李錫順)·박만순(朴萬順)·이날치(李捺致)·김세종(金世宗)·장자백(張子伯) 등이 <춘향가>로 이름을 떨쳤고, 고종 때 명창 황호통(黃浩通)·박기홍(朴基洪)·정정렬(丁貞烈) 등이 <춘향가>를 잘 불렀다.
오늘날 전승되는 <춘향가> 바디에는 박봉술(朴奉述)이 보유하고 있는 송만갑 바디, 정권진(鄭權鎭)이 보유하고 있는 정응민(鄭應珉) 바디, 김여란(金如蘭)이 보유하고 있는 정정렬 바디, 정광수(丁珖秀)가 보유하고 있는 김창환(金昌煥) 바디, 오정숙(吳貞淑)이 보유하고 있는 김연수(金演洙) 바디가 있으며, 박동진(朴東鎭)도 <춘향가>를 짜서 전판 공연한 바 있다.
그 밖에 많은 바디는 전승이 이미 끊어졌거나 거의 끊어지고 있다. 지금 전승되고 있는 여러 <춘향가>바디 가운데 송만갑 바디, 정응민 바디, 김창환 바디가 다른 바디보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춘향가>는 바디마다 짜임새가 얼마쯤 다르게 되어 있으나 흔히 ‘초앞’·‘광한루 경치’·‘책방독서’·‘백년가약’·‘이별가’·‘신연(新延)맞이’·‘기생점고(妓生點考)’·‘십장가(十杖歌)’·‘옥중가’·‘과거장(科擧場)’·‘어사행장(御史行裝)’·‘춘향편지’·‘옥중상봉’·‘어사출도’·뒤풀이로 짜여진 경우가 많다.
특히 <춘향가>에서 이름난 소리대목은 ‘적성가(赤城歌, 진양―우조)’·‘천자(千字)뒤풀이(중중모리―평조)’·‘춘향방경치(중모리 또는 세마치―우조)’·‘긴 사랑가(진양―우조)’·‘자진 사랑가(중중모리―추천목)’·‘이별가(진양―계면조)’·‘신연맞이(자진모리―우조)’·‘기생점고(진양―우조·중중모리―평조)’·‘군노사령(軍奴使令, 중중모리―설렁제)’·‘옥중가(진양―계면조)’·‘과거장(자진모리―우조)’·‘농부가(중모리―계면조)’·‘박석틔(진양―우조)’·‘어사와 장모(중중모리―계면조·경드름)’·‘옥중상봉(중모리―계면조)’·‘어사출도(자진모리―우조·계면조)’를 꼽을 수 있다.
<춘향가>는 화평한 장면, 슬픈 장면, 위풍당당한 장면, 우스운 장면이 고루 나뉘어 있고 진지한 대목과 우스운 대목이 고루 짜여 있다. 음악 또한 이와 같은 사설의 극의 내용에 따라서 장단과 조가 변화 있고 고르게 짜여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명창들이 대목마다 이름난 더늠을 많이 남겨놓고 있어서 음악적으로도 잘 짜여진 마당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춘향가 [春香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피해자들의 농성,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너무 오래동안 질질 껄고 있는듯 하다.
걸어서 서대문에서 인사동까지 오면서, 그냥 지나쳤던 곳을 꼼꼼이 읽어본다. 사물놀이는 사물(四物), 꽹과리 · 장구 · 북 · 징의 네 가지 악기 놀이[연주]라는 의미이다. 사물놀이는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구성의 풍물놀이를 1978년 무대예술로 각색한 것이다. 풍물놀이가 대규모의 놀이를 동반하여 야외 공연의 활동성을 강조하였다면 사물놀이는 악기 연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강조한 공연형태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장단을 연주하며 긴장과 이완의 주기적인 흐름 속에서 기경결해(시작, 진행, 절정, 마무리)의 전개방식으로써 진행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물놀이 (국악정보, 2010.7, 국립국악원)
인사동에서도 국악 한마당이 신나게 펼쳐지고 있다. 사물놀이를 감상을 못했다.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찾아서 감상해본다. http://blog.daum.net/spaceandtime/3492
어린아이들 좋아하는 비누방울 놀이, 무료 공연인듯 하다.
안내견도 힘드나 봅니다. 그늘에서 졸고 있네요. 복돼지도 울타리를 넘어서 한가위 추석을 즐기고 있는듯 합니다.
경복궁에 도착했더니, 온통 외국인들... 한복에 매료된듯 하다... 러시아에서 유학온 학생두명과 함께 다니기로 했는데, 공연보는 중 서로 헤어졌다. 충주대학에서 한국어를 6개월 공부했다는 러시아아줌마 한분과 같은방을 사용한다는 러시아처녀... 내가 경북궁을 가이드 해주기로 했는데,....사람이 많아서 서로 못찾겠다 꾀꼬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108&cid=42840&categoryId=42848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경복궁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경복궁
http://www.royalpalace.go.kr:8080/content/guide/guide4.asp# 경복궁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참조
안내 :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14교황 프란치스코 방한기념특별展 천상의 아름다운 美 "천국의 문" 전시중.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바티칸미술관 소장 진품 성화) 전시기간은 8/15일 ~ 관람료 성인 12,000원, 연락처 02-780-8635 "천국의문"전시추진위원회
돌아오는 길에 실계천에 백로 식구들이 추석맞이를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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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간과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재휘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