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평 】
환상의 문을 열다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창작과 비평, 2009 -
고 영 진*
1. 소년, 집의 문을 열고 나오다.
소년이 말을 더듬기 시작한 것은 4년 전, 몸속의 어느 통로가 고장 나거나 감염된 것이 아니라 머릿속의 생각이 입이라는 기관을 통해 시원하게 나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글자라는 여과기가 불편할 뿐이다. 소년에게 있어 글자는 무기력에 빠져 게으르게 허우적대는 시냅스를 자극하는 신경전달물질이었다. 하지만 그게 없이는 소년의 생각도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년이 여섯 살 때 친엄마 손에 의해 한번 청량리역에 버려진 적 있고 일주일 뒤에 발견된 때문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소년은 그때부터 정신 치료가 요망되는 적당히 불쌍한 아이로 남들이 “진짜” 이유를 안다고 해서 상황이 달리질 일도 아니고, 남은 거라곤 원인이나 치유에의 희망이 아니라 현상뿐이다. 동화 속 전형적 계모 배 선생이 집으로 들어온 뒤에, 그리고 배 선생이 소년의 집에서 영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뒤에 언제가 됐든 떠나기 위한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는 소년에게 집은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더 먹먹한 곳이다. 배 선생과 소년은 있지도 않은 개암나무가지1) 때문에 치열한 전처소생과 계모의 지루한 공방전을 답습한다. 여기에서 소년의 유일한 잘못은 “단지 거기 존재했을 뿐”이다. 이러한 순간에 소년은 이상과 철저히 거리를 둔 현실을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 주는 무게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또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조금은 감수해야 할 여러 유형의 폭력이 있다는 체념적인 단정을 전제로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이복 여동생의 성추행의 혐의를 쓰고 도망쳐 나오기 전까지는... 배 선생이 저놈 잡으라고 악을 쓰고 아버지가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들이 쫓아온다.
2.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다.
나 좀 숨겨줘.
중불에 달구어진 설탕 냄새가 거리를 채우면 골목을 돌아 나오는 화사한 불빛의 베이커리는 나름 따뜻해 보이는 분홍과 노랑이 교직되어 연속적인 네모 무늬를 이룬 벽지와 빵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인 진열대의 유리문은 손자국 하나 없이 투명하게 잘 닦여 있었고 그 문을 열기 위한 손잡이 고리는 가게 조명에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입만 열지 않으면 모종의 신비감과 함께 수수하면서도 전문가나 장인다운 지성미가 넘쳐 보이는 사람. 조금 우스꽝스러운 종이 모자와 그 아래로 어깨에 살짝 드리워진 꽁지머리, 곱게 걸러진 베이킹파우더 색의 얼굴과 빈틈없고 우아하며 집약적인 몸짓, 프랜차이즈 체인점을 얻지 않더라도 입소문만으로 먹고살 만한 솜씨 좋은 제빵사가 있다. 물론 소년이 빵을 가리켜 물으면 갓난아기의 간을 말려서 빻은 가루. 밀가루와 3대 7 정도 비율로 섞는다거나 고양이 혓바닥 3종 세트야. 페르시안, 샴, 아비시니안라는 묘한 말들로 사람을 섬뜩하게 하지만 말이다.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들어간 소년은 더듬지도 않고 말한다. 아파트 단지에서 100미터쯤 내려오면 마을버스 정류장 근처에 24시간 영업하는 베이커리로 숨었을 것이라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점장은 오븐을 가리킨다. 그는 좀 더 큰 쪽 문을 열고 트레이를 끄집어낸 고개짓을 하자, 산 채로 통구이가 되는 그림책의 마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도 소년은 신발을 신은 채 약한 훈김이 남아 있는 오븐 안으로 한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문을 연 오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 앞으로 포복 선전을 하는 대신 그 자리에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해도 저절로 어둠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정말 그대로 깊이 들어가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소년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그저 나아갔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는 소년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소년은 빵이라면 지긋지긋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그 베이커리의 문을 여는 것은 야식 본능이 출몰하는 새벽 한두 시에, 얇게 썬 햄을 돌돌 말아 넣은 크루아상이나 담백하다 못해 밋밋한 허브 향 베이글 같은 걸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소년이 베이커리 문을 여는 것은 다른 문을 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베이커리를 열 때만 그와 함께 다른 모든 것들이 감각의 뒤편에서 들고일어난다. 빵을 먹고 싶어서도, 제빵사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지만 매일 여는 그 베이커리 문을 닫고 나오면 아이에게 순간 이 보잘것없는 동네 빵집을 둘러싼 곳이 음울한 숲으로 느껴졌다. 그 숲에는 한 마법사가 살면서 매일같이 다른 재료로 과자를 만들어내어 바람 한 점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의 살을 비비며 숲 속의 냄새를 밖으로 밖으로 내보내곤 했답니다. - 와 같은 말로 시작될 법한, 민담 속에 나오는 그런 숲.. 아이가 이대로 돌아가 집 현관문을 연다는 건, 그곳에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소년이 베이커리에 머무는 대신 하는 일은 인터넷으로 받은 주문을 정리해서 점장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마법사가 일상적으로 파는 물건이 어떤 것인지 좀 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그 정체불명의 빵들, 가게에서 파는 것과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성분은 좀 달랐다. 예를 들어 악마의 시나몬 쿠키 같은 경우엔 “반드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먹이세요. 평균 2 시간 동안 뇌신경세로를 교란시켜 그가 무슨 일을 해도 실수를 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중요한 발표나 발언을 할 때도 주어 서술어가 하나도 맞지 않고 주제에도 벗어나 누가 보아도 맛이 간 사람처럼 보일 것이며 포만 상태라면 괄약근을 조절하지 못하고 옷에 실례할 수도 있답니다.” 등의 설명이 곁들어진다. 그 밖에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부적이 될 수 있는 마인드 커스터드 푸딩, 사과하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 실연의 상처를 빨리 잊게 도와주는 브로큰 하트 파인애플 마들렌, 정말 사귀고 싶지 않은 사람을 거절할 때 노 땡큐 사브레 쇼콜라, 멀리 떠나는 사람에게 절대 잊혀지고 싶지 않을 때 주는 에버 앤 에버 모카 만주 등.. 그리고 각 물품의 맨 마지막 줄에는 인상적인 경고문이 곁들어져 있었다. ‘긍정이나 부정, 자기가 바라던 어느 쪽의 변화든 간에 이것은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계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법의 이용 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이 빵들이 속속들이 효과가 만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이쯤이 되면 점장도, 밤이면 파랑새로 변하는 소녀도 이 베이커리도 이미 현실의 법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전지전능해 보이는 달콤한 과자를 구워내는 점장의 표정은 조금도 달콤하지 않았고, 맛이나 향기로 치자면 오히려 스파이스 향신료의 매운맛에 가까워 보였다. 사실 소년에게 빵이란 진절머리 나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초강력 아이템이긴 하다. 그러나 이곳의 마법사가 만드는 빵이라면 좋아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빵에는 잘못 사용하면 조금은 위험한 향신료일지 몰라도 과거와 현재 대신 미래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윤리적이다.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충동.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중력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과 늘 싸워내는 그는 몽마의 습격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늘 냉정하리만큼 자세하게 덧붙이는 “주의사항”만큼은 윤리적이다.
그런 그가 소년이 베이커리를 나설 때 챙겨준 타임 리와인더 머랭 쿠키는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아이러니다.
3. 집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오다.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
소년의 불행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불행의 조짐이 보이는 곳으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이 묻는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 아이가 집을 나오고 기인적인 스승을 만나 성장하는 방식이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결말을 독자의 몫으로 돌리되 무책임하거나 식상하지 않은 것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이번의 선택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과거를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그 방법이 “옳거나, 아름답거나, 쉬울 수”도 있다는 것은 누가 보장해 줄 것인가?
집 앞 베이커리 오븐 속에서 상처를 발효시켜 향긋하게 구워낼 만큼 성장하는 주인공을 소년이라 부르는 이유는 학생이나, 화자, 또는 주인공이라 부르기에 그는 보기 드물게 선량하기 때문이다. 여섯 살 때 이미 동화를 잃었지만, 그래서 애당초 가져본 적이 없거나 너무 일찍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품지 않는 법을 알고 있지만, 계모보다 나을 것도 없는 친엄마나 그만도 못한 아버지가 있지만 그는 선량하다. 때문에 그가 선택한(할 수도 있었던) 두 가지의 결론이 모두 이롭다. 집을 나온 소년은 그동안 묶여 있던 주술에서 조금씩 풀려나는 듯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음절이 어절이 되고 어절이 구를 이루는 것을 한 해 한 해 깨달을 수 있었다.
제2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구병모의 위저드 베이커리는 기존 청소년소설의 도식을 뒤흔드는, 현실로부터의 과감한 탈주를 전제하면서 시작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집에서 뛰쳐나온 소년이 우연히 몸을 피한 빵집에서 겪게 되는 온갖 사건들은 판타지인 동시에 절망적인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며, 일반문학과 장르소설의 묘미를 적확한 비율로 반죽한 이 작품만의 특별한 미감은 헨젤과 그레텔에서 집에서 버림받고 마녀의 과자 집으로 들어간 헨젤을 주인공 삼아 썼다는 ‘잔혹동화’의 바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이들의 문법을 절묘하게 전복시킨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빵집인 것만 같은 ‘위저드 베이커리’는 인간들의 주문에 따라 마법의 빵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소년은 이곳에 머물며 자신의 욕망에 따라 마법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행태를 목격한다. 마법사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비틀린 욕망은 무시무시하고,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숨기고 있는 비밀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이 소설의 결론 또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둔다. 소년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선택 앞에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를 모두 보여준다. 세상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또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언제쯤 알아야 적당한 것일까. 그래서 작가가 강조한 “견딤”과 함께 “선택”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축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언뜻 쉽고 간단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합리화는 차치하고 우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기성을 뒤집고, 정도를 전복하는 것이다. 그 농도에 따라 새로운 트랜드를 창조할 수도, 막장이나 억지의 길로 어긋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언제나 그 갈림길에 놓여 있다.
성장, 환상, 미스터리, 사회 등의 여러 키워드를 동시에 한 입 베어 물은 채 시작하는 이 작품은 우리가 “빵”, 또는 “베이커리”에 가지고 있는 기대함을 환기하면서 시작한다. 비슷한 형태로 형상화되는 밥의 일반성에 비해 다양한 형태로 “손”으로 집어 먹는 빵은 우리 문화에는 없는 낯선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소년에게 빵은 밥 대신, 가족 대신, 집 대신 어쩔 수 없이 선택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소년이 빵을 산다는 건 집 현관문을 열면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빵 한입에 우유 한 모금 물고서 건조하지도 눅눅하지도 않은 오늘분의 감정을 꼭꼭 씹어, 마음속 깊숙이 담아둔 밀폐 용기에 가두기 위해서 이다. 때문에 소년에게 빵의 종류는 상관없다. 그저 냄새 없이 조리 없이 계모가 차지하고 있는 주방과 거실을 빌리지 않고 간단하게 허기를 매워줄 수 있으면 그만이다. 친엄마가 청량리역에 여섯 살에 버려졌을 때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마지막 식량도 빵이었고, 그렇게 잃은 엄마와 유년과 제대로 말하는 법을 채워준 것도 빵이었다. 소년에게 빵은 상처이자 위안이다. 하지만 베이커리의 문을 연 뒤, 모든 만남과 먹거리를 나누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상처받은 소년이 먹은 빵과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던 점장이 만든 빵을 나눈 사이에 둘 다 위안 받고 “문을 열고 나올 용기와 회복”이 그 둘에게 가능해진 것이다. 이 작품의 결론이 하나이면서 둘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소년은 달린다. “추억은 그대로 상자 속에 박제된 채 남겨두는 편이 좋아. 그 상자는 곰팡이나 먼지와 함께 습기를 가득 머금고서 뚜껑도 열지 않은 채 언젠가는 버려져야만 하지.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치 있는 법이야. 한 때의 상처를 의탁했던 장소를 되짚어가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아직도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를 믿는 녀석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소년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더욱 빨리 달린다. 추억이라니, 환상이라니, 그 모든 것은 내게 있어서는 줄곧 현재였으며 현실이었다. 마법이라는 것 또한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을 뿐 꿈속의 망중한이 아니었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간판이 멀리서부터 보인다.
* 대전 출생, 충남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silra77@naver.com
1)생전의 엄마가 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남겨진 아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 때에만 그 신비한 힘이 발휘된다는 저주의 가지
기억을 통한 오늘의 일상
- 정이현, 『오늘의 거짓말』, 문학과 지성사, 2007 -
서 혜 지*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 『달콤한 나의 도시』등 초기작의 관심사였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2000년대 이삼십대 여성들의 삶에서 벗어나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에서 ‘오늘의 일상성’을 포착해 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80․90년대의 기억을 ‘오늘의 일상’으로 끄집어내고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산업화가 빚은 물질주의 풍조의 확산으로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는 인간소외1) 현상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오늘의 거짓말』에 구성된 단편들을 살펴보면 우선 「비밀과외」에서는 80․90년대의 사건을 기억하고 그 사건들이 현재의 삶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지나가는 시간이나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삶에서 현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영원한 현재’로 인식2)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상기시켜준다.
「비밀과외」는 80년대적 경험을 서술하면서 1985년 중학생이었던 주인공을 내세운 이인칭 소설로 ‘너-중학생’의 시선3)으로 80년대의 경험을 포착하고 있다. 과외를 해야 “좋은 고등학교를 가고, 좋은 대학을 가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부모들이 “과외전면금지조치”가 내려진 상태에서도 쉬쉬거리며 과외를 시켰던 세태가 제시된다.
과외전면금지조치가 내려진 것은 1980년 7월 30일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길고 요상한 이름의 조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 오늘 과외 선생님 오시는 날인데 깜빡했네. 그냥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놀렴.
이것은 금지된 문장이었다. 네 입에서 저 비슷한 소리라도 새나오는 날에는 그야말로 결단 나는 거라면서, 엄마는 신신당부와 협박을 반복했다. 네가 괴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순간 엄마는 경찰서에 끌려가고, 아빠는 그나마 붙어 있던 회사에서도 단칼에 해고된다는 거였다. (「비밀과외」, 165쪽)
이때의 기억은 불법으로 돈이 돌고 도는 경로를 통해 그 시대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유지되었다는 것을 개인들의 일상사를 통해 보여주는데, ‘너’의 엄마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위험을 감수하고서” 공식경로를 거치지 않고 구해낸 미제 물건들을 판돈으로 공식적으로 금지된 ‘비밀과외’를 시킨다. 「비밀과외」에는 ‘사모님’들에게 불법적으로 번 돈으로 ‘비밀과외’를 시키는 ‘너’의 엄마가 있고, 과외를 하고 그 돈을 받아가는 대학생이 있다. 불법의 경로를 통해 번 돈을 과외 선생이 가져가고, 이 불법의 돈은 과외 선생에게는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학생운동의 자금이 된다. 이들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전혀 연관이 없고 서로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개인의 일상을 통해 ‘그 때’ 당시의 부모들이나 2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과외열풍을 몰고 다니는 지금의 부모들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며, 현재의 상황을 재고해 보게 한다.
「어금니」, 「위험한 독신녀」에서는 기억과 개인적인 정체성과의 맥락은 그 기억을 있는 그대로 살려내거나 살려내지 못하게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몸의 기억, 트라우마, 과거의 기억을 통해 그 기억들이 현재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으며, 현재와 미래를 사로잡을 기억에 대항하여 기억을 지우며 다른 것이 ‘되고’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능력이 생성되고 있는지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게 한다.
「어금니」는 잘못된 인간관계를 ‘나’의 어금니 통증만으로 상기시켜주고 있는데, 돈이 없는 피해자 가족을 상대로 이들의 음주교통사고를 오직 돈으로만 해결한 「어금니」의 ‘남편’의 행동들은 이 사회의 제도가 돈으로 어떠한 관계도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의 죽은 딸을 ‘돈’으로 바꾼 부모의 모습과 어려운 일을 잘 해결해 냈다는 자긍심이 가득한 ‘남편’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폐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잘못된 인간관계를 알면서도 바로 잡지 못하는 ‘나’는 아들을 위해 남편이 했었을 일들을 부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마음으로 이해하여 남편을 용서해주고 죄책감을 씻어 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들이 부정하게 처리 했던 사고의 기억은 영원히 그들의 현재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처럼 아픈 기억은 자신에게만 흔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남겨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오늘의 거짓말에서는 제시하고 있다. 이런 아픈 기억이 타인에게 남겨진다면 그 기억은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위험한 독신녀」는 ‘정신이상증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정신의 나이가 스물다섯에 멈춰버린 「위험한 독신녀」의 ‘양채린’은 견디기 힘든 어려운 내면의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기억하고 싶은 자신의 과거만 기억하고 그 기억을 현재로 생각하고 과거 안에서 살아간다. ‘양채린’은 자신이 간직한 기억대로 과거의 모습만을 지닌 채 현재 마흔살을 바라보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나 2004년의 거리를 활보한다. ‘나’는 20년 전과 똑같은 모습뿐 아니라 똑같은 말투와 생각을 가지고 ‘나’의 일상으로 들어온 ‘양채린’ 때문에 곤란을 겪지만 ‘양채린’의 병은 정상이라고 불리는 쪽에 속하기 위한 우리의 비루한 안간힘을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든다.4) 그러면서 개인과 개인사이의 관계에서 소외되거나 소외될 위험에 처한 인물들은 대다수의 개인들이 속한 곳에서 제외될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 남자의 리허설」에서 그것은 부부간의 소통불능의 모습으로 표출된다. ‘남자’는 아내와 한 집에 살기는 하지만 이 둘의 삶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만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 형식적인 대화이외에는 하지 않는 남과 다름없는 관계가 된지 오래이다. 「어두워지기 전에」의 주인공 또한 소통불능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섹스리스의 부부이다. 이들은 가장 가까운 사이어야 할 부부이지만 남과 다름없는 소통불능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또 작가는 오늘의 거짓말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고 안정된 가정을 이룰 수도 없으며, 결국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시대에 도래하면서 부터 직업적인 공백은 사회적인 공백으로 이어지고 실업, 가난, 주거지 박탈, 노숙자, 걸인 등으로 전락하게 되며 개인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다.
「삼풍백화점」에서 ‘나’는 대학의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취직을 하지 못해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무소속’의 인간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인물로 학교 졸업식에 갈 수 없다. 그럼에 주인공은 일주일이 지나면 소속이 없어짐을 두려워하고 한시라도 빨리 소속을 만들기 위해 도서관을 다니는 노력을 해보지만 무직자의 무기력함과 소외감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상황을 통해 이 작품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지 못하면 졸업식조차 갈 수 없는 90년대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시대 또한 무소속의 인간이 되는 것이 두려워 대학을 휴학하는 현실과 역시 졸업식은 취업한 자들의 축제라는 세태가 10년 전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들추어낸다. 또한 ‘나’를 통해서 어려운 취업 때문에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는 구직자의 모습과 직업이 없는 사람의 무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에 나와 직업을 갖는 다는 의미는 ‘사회공간’이라는 관계에서 ‘사회계급’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와 달리 직업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사회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는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남자의 리허설」에서의 주인공인 ‘그 남자’는 2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불안정한 직업마저 유지 할 수 없게 되고 소속이 없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남자에게도 한때는 꿈이 있었으나 지금은 꿈을 꿀 여력도 없다. 당장에 닥친 재계약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별 볼일 없는 직업으로 아내에게 소리 없는 무시를 당하지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소속이 없는 인간은 이 세상 어느 곳도 발붙일 틈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정을 받아야 나의 존재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모습은 「오늘을 거짓말」에서도 증명된다. 인터넷 사이트에 거짓 후기를 남기며 거짓말로 먹고 사는 「오늘의 거짓말」의 화자인 ‘나’ 역시 비정규직 사원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나’의 남자친구는 비정규직인 여자 친구를 창피해하며 안정적인 직장인 ‘9급 공무원 준비’를 하길 원한다. 나이가 들면 치루어야 할 결혼조차도 안정적인 직장이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것과 동시에 이는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안정된 경제생활을 할 수 있고,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으며 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개개는 바로 이러한 직업이나 물질을 통해 사회에 온전하게 자리매김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로부터 승인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우리 현실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준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권위와 능력은 돈이라는 경제적 기호로 표준화되고 수치화된다. 가장 자유롭고 인간적이어야 할 노동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그 본래의 인간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단순히 화폐를 벌기 위한 수단5) 또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가치로서만 평가된다는 것을 작가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통해 발견하고 있다.
개인은 사회라는 공간에서 항상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각 집단과 결속하면서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다. 사회에서 소속감과 정착성을 갖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직업 또는 자본인데 자격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작중인물들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기준에 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 대접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시간은 현재에 삶을 다시 이끌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왜곡된 사회에서 잘못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정이현은 작품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거짓말을 통해 그동안의 소설과는 달리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정이현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 충남대 박사과정 수료, 대전 출생, akoako0404@hanmail.net
1)장병호, 「산업사외의 소외와 극복」, <문학춘추>, 가을, 2008, 64쪽.
2)정덕준, 「소설에 있어서의 시간에 관한 연구」, 어문논문,1991.10, 200쪽
3)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 앞의 책, 93쪽
4)박혜경, 「당신은 파국으로부터 안전한가」, 『오늘의 거짓말』, 문학과 지성사, 2007, 335쪽.
5)정규희, 「카프 소설의 소외양상 고찰」, 동남어문논집 제12집, 2001.6, 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