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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관//사진//약력//대표작품
◉ 약력
*출생(학력)/1934년 경남 마산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졸업.
*등단/현대문학지에 벽(1955), 거울(1958), 밤(1962) 박두진 추천으로 등단.
동아일보신춘문예 평론당선(1975),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 입선(1975)
*저서/칼럼집『그래도 우리는』(1979)
*수상/제1회 마산시문화상
*문단활동/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경남아동문학회 회원, <흙과 바람> 동인
*기타/ 국립마산대학 부교수, 경남매일 수석논설위원. 1986년 작고
♣대표작 평론 1편
정재관 / 老子의 言語觀考
老子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정확한 傳記的 事實이나 原典의 정확한 考證 등이 必要하리라. 그러나 筆者의 努力不足으로 말미암는 것이겠지만, 老子에 관한 硏究物들이 入手되지 않아 그를 정확하게 다룬다는 것은 筆者로서는 거의 不可能한 일에 속한다. 더구나 哲學을 전공한 일도 없거니와 일개 국문학도에 지나지 않는 筆者로서는 그를 다룬다는 것이 語不成說임에 틀림없다. 筆者의 변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몰아부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실제로 노자는 實存的인 人物이 아니라는 說까지도 있고, 그의 原典도 정확한 것인지 어떤지조차 규명되어 있지 않고 보면, 老子를 正確하게 다룬다는 것은 누구나 不可能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老子는 계속 논의되고 있다. 톨스토이도, 現代에는 「K.야스퍼스」도 老子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말은 西洋人들이 老子를 다루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 東洋人들은 물론이지만 西洋人들까지도 그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가치 있는 것만이 살아남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生命力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불과하다. 老子는 생애나 그의 原典의 정확성 여부가 규명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말은 계속적으로 싱싱한 生命力을 가지고 우리를 감동시킨다.
論語, 法華經, 기독교의 소위 聖書 등이 늘 살아있듯이 老子도 함께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의 「말」이 살아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말을 연구한다는 것은 실상 言語學이 아닌가 한다.
解釋學(Hermeneutik)이 「文字的으로 固定된 삶의 표현들을 理解하는 技術學」이라고 「딜타이」가 말했을 때 E. 푸크스(Fuchs)도 그의 「해석학」(1958년)에서 「해석학은 神學의 領域에서 信仰의 言語學이다.」(Hermeneutik ist im Bereich der Theologie Sprachlehre des Glaubens)라고 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宗敎的인 經典들을 言語學的으로 다룰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筆者로서는 哲學的인 面이나 宗敎的인 面을 다룰 能力이 없을 뿐만 아니라, 筆者의 관심 밖이므로 이런 面들은 專門家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다만 노자를 言語的인 面에서 言及해 보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더 局限시켜 文學的인 側面만을 취급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실상 老子는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있어 言語의 否定者로서 알려져 있고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現實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老子를 文學的인 面에서 다룬다고 하면 모두들 筆者를 精神異常者로 취급할지 모른다.
「노자는 言語에 대한 상당히 깊은 이해를 가진 것 같으면서도 역시 言語 敵對關係의 경향은 뚜렷하다」①라고 言及한 것을 볼 수 있는데, 筆者는 老子가 사실은 文學言語의 原理를 그의 哲學을 통해서 論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面을 本稿에서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신비스러운 암컷이라 한다. 신비스러운 암컷의 문, 이를 일러 天地의 뿌리라 한다.)…( 谷神不死章 )
여기에서 谷, 牝, 門, 根 등은 모두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谷은 골짜기이지만 口字의 위를 덮은「*」은 水字를 變形한 것이니까 이 變形과 口를 합해서 이루어진 글자이므로 뜻은「水口」가 된다. 기른다(養)의 뜻도 있지만, 물이 女性을 상징하고 生命力의 상징인 것은 꼭「프로이트」나 神話學을 들추지 않아도 될 것이다. 門, 根은 女性과 男性象徵이지만 이 文脈에서의 根은 女性이다. 따라서 牝 , 門, 根은 모두 女性象徵이고 谷과 연결된다.
이와 같이 老子의 哲學은 물의 哲學이라 할만한데 그의 물에 관한 비유는 人間生命의 本質에 연결되고 있다.「골짜기가 차지 않았던들 아마 고갈했을 것이다」(谷無 以盈將恐竭將) (昔之得一章) 또는「道는 홍수와 같아서 좌우 어느 쪽으로라도 번져 간다.」(大道 汎兮章) (※이후 原文省略),「최상의 善은 물과 같다」(上善若水章),「이 세상에서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있어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은 물의 부드럽고 약함을 이길 것이 없는 까닭」(天下莫柔弱章) 등등으로 그의 言語는 거의가 물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筆者는 바실라르처럼 물의 이미지를 다룰 생각은 없다. 제목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그의 言語觀을 다루고자 하며, 이 言語觀은 실상 文學의 言語임을 밝혀 보고자 하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니까.
老子는 第一章에서부터「道를 道라고 하는 것은 常道가 아니다. 이름(名)을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常名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름 없는 것(無名)은 天地의 비롯됨(始)이며, 이름 있는 것(有名)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無欲으로써 그 妙함을 보며 항상 有欲으로써 그 차이(徼)를 본다. 이 兩者 (妙와徼)는 같은데서 나왔으나 이름만 다르므로 함께 유현(幽玄)한 것이라 한다. 이 유현하고 또 유현한 것은 모든 妙함이 나오는 門이라 한다」라고 시작한다.
이것을 흔히는 老子가 言語를 否定한 것이라고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것이 老子의 진정한 意圖였다고 하면, 그의 소위 「道德經」이라고 하는 五千言을 남겼을 리가 없다. 그의 이 도덕경에 있는 말이야 말로 보다 진실을 담고 있는 言語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보다 거짓된 말들을 否定하기 위해서 남겼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言語 그 자체를 否定하고는 佛敎의 眞理도, 聖經의 진리도 결코 存在할 수 없는 것이며 佛陀나 예수가 진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는 이름과 수를 이용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획득한다. 한 수학의 記號語와 한 言語의 문법은 요컨대 동일 구조이다. 논리학은 언제나 일종의 수학이고, 수학도 역시 일종의 논리학이다. 따라서 수학적인 수와 관계있는 인간이해의 모든 행위-측정하는, 헤아리는, 스케치하는, 저울질하는, 배열하는, 나누는 것-에는 확대된 것을 言語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②고 시펭글러는 말했지만, 言語로 표현되기 이전의 세계는 잡히지 않는 虛無 그 자체이고, 어둠이다.
「말에 의해서 표현된 것만이 현상들의 꿈같은 흐름 속에서 드러나 스스로를 나타낸다. 말은 마술이다. 이름으로 불리워진 사물이 갑자기 존재하게 된다. 이름 없이 존재하고 이름 없이 일어나는 것은 끝없는 흐름 속에 몽롱하게 사라진다」③고 했다. 뿐만 아니라 헤르데르도 言語를「理性의 標識記號」라고 하면서「모든 感官들에 의해서 넘쳐 흐르는 知覺들의 大海속에서 人間의 영혼은 하나의 파도를 구분해서 그것을 붙들고 그것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그것을 주의한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다」④고 하는 것이다.
헤르데르, 시펭글러, 야스퍼스 등이 말하고 있는 공통점은 言語以前의 世界가 無 또는 虛無 그 자체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老子도「無名」은 天地의 비롯됨, 즉 根源이라고 하면서도 有名은 萬物의 母라고 한다. 물론 이 때의「名」은 名詞로의 이름이 아니고 言語를 말하는데, 無名인 無 또는 虛無가 言語에 의해서 捕捉되고 把握됨으로써 구분이 생기게 되고, 차이가 드러나게 됨으로써 萬物, 즉 이건 사람이다, 이건 짐승이다…와 같이 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의 第一章에서 同義語들을 보면(文章의 構造에서 보면)「常道」,「常 名」,「無名」,「無欲」,「玄」등이다. 이 同義語들은 전부 言語以前의 상태라고 의미가 규정되어질 수 있다.「常道」란 不變의 眞理 ,「常名」도 같이 不變의 完全한 言語,「無名」도 물론 言語以前의 世界, 「無欲」은 「有欲」이 欲때문에 利와 害의 차별이 생기는 言語의 世界이므로 역시 言語以前의 世界가 되며,「玄」도 그 뜻대로「검고」「아득」하여 구분이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言語以前의 世界이다.
다음으로 「無欲」으로써 보게 되는「妙」와 「有欲」으로써 볼 수 있게 되는「徼 」는 兩者가「같은 데서 나왔으나 이름만 다르다」고 하니까, 그「같은 데」란「玄」이다. 따라서 이「玄」은 「모든 妙함이 나오는 門」이라고 하니까 모든 妙함이 나오려면「門」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門」은「無名」이나 常道 , 常名, 無欲 등 言語以前의 世界와 言語的인 表現의 世界를 境界로 구분하는 차별과 차이의 언어를 두고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老子는「有欲」에 의한 次元이 낮은 世界의 언어를 「非常道」또는「非常名」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道可道」나「名可名」은 有 欲의 次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常道」나 「常名」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헤르데르, 야스퍼스, 시펭글러 등이 한 말이나 老子가 하고 있는 말은 言語가 虛無를 구분하고 갈라냄으로써 意味를 창조하는 言語의 眞理, 또는 그 本質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코 言語 그 자체를 否定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노자의 言語觀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다시 그의 道가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좀 더 그의 言語觀에 접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즉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 임시로 道라고 한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道에 대한 그의 說明을 有物混成章에서 들어보기로 하자.
「굳이 그(道) 이름을 붙이자면 大라고나 할까, 大는 가는 (逝)자라 한다. 가는 자는 먼 (遠)자라 한다. 이 먼 자는 돌아오는 (反)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眞理라고 하는 道는 그 작용이 멀리 가기도 하고 또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글자 그대로의 뜻 즉 「길」을 뜻하고 있다. 길이 가령 A의 地點 에서 B의 지점으로 옮겨 주는 기능이라면 실상 言語가 이런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言語의 比喩의 기능 그것이다. 가령 柳致環이 깃발을 두고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했을 때, 깃발의 영역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의 영역으로 장소를 옮겨간 것이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언어 自体가 比喩 또는 상징인데, 이것이 곧 길(道)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길은 地理上으로나 物理的 空間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人間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길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태라는 한 위치로부터 다른 상태의 위치로 옮겨간다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태어남은 곧 길이다.
진정한 意味에 있어서 人間이 道를 따라 간다는 것은 地理的이고 物理的인 空間의 길이 아니라 낡은 생명을 벗어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生命으로 태어나는 것, 그럼으로써 늘 싱싱한 삶을 향해 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人間에게 있어서의 이러한 삶의 原理를 文學의 言語가 그대로 실현하게 된다. 言語의 기능은 表示(denotation)와 含蓄(connotation)으로 나누어지고, 表示는 言語의 소위 辭典的 意味, 含蓄은 그런 辭典的인 意味와는 달리 그 言語가 풍기는 분위기라든지 暗示力 또는 聯想이나 象徵的인 意味 그리고 그 言語의 多義性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表示와 含蓄은 달리 外延과 內包라고도 한다는 것은 이미 周知의 사실이다. 表示나 外延의 意味는 日常生活에서 우리가 서로 오해 없이 정확한 意思를 주고받기 위해서 쓰는 言語나 科學用語에 해당되는 것이고, 含蓄, 또는 內包的인 意味는 文學의 言語이다.
그러면 왜 文學의 言語는 含蓄 또는 內包的인 意味를 드러내어야 하는가?
먼저 구체적인 데에서부터 이 문제를 이끌어 나가보자.
먼저 日常語는 말라르메가 지적한 것처럼 화폐와 같다. 화폐 1천원 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결코 변동될 수 없는 가치로 나와 너의 상호간에 통용된다. 즉 日常 語의 의미 내용은 이와 같은 화폐의 가치처럼 결코 변동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계와 같다. 이 기계에 변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고장이 생긴다는 뜻과 같다. 따라서 日常語의 고정된 의미 내용에 변동이 생긴다면 상호간에 오해가 생기고 사회생활에는 혼란이 일어난다. 이러한 혼란된 사태를 막기 위해서 日常語는 더욱 硬化된다.
이러한 日常語의 性格은 人間의 정신적인 면을 나타내는 언쟁의 경우, 특히 감정의 대립이나 言爭의 경우에 그 言語는 상대방을 포로로 만들려는 쇠사슬의 구실을 하거나, 아니면 바로 가두려는 감옥과 같은 구실을 하게 된다. 가령「이 사기꾼!」이라고 했을 때,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의 경우는 이 사람의 지극히 多樣한 삶의 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도려내어 못박은 것이다. 그는 실상 남편, 아버지, 친구, 직장동료, 형이나 아우, 오빠나 남동생, 삼촌 등등의 지극히 다양한 삶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꾼」이라는 言語를 던짐으로써 그 지극히 다양한 삶을 칼로 잘라내듯이 떼어버리고 사기꾼으로 쇠사슬에 묶어버리거나 사기꾼이라는 의미영역의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人間은 大海의 무수한 파도와 같다. 그 파도의 모습들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이러한 多樣性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肉眼에 비치는 것만을 보고 그 사람을 못박으려 한다. 그런데 이 못박는 행위를 무엇이 가능하게 하는가? 그것이 곧 言語이다.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어질 수 없는 무수한 파도 가운데 하나를 붙잡아 내어「사기꾼」하면서 사로 잡는다. 사로 잡힌 그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에 빠진다. 「소위 敎育者가 그럴 수 있느냐?」또는「학생이라는 놈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자 또는 학생이라는 言語의 의미영역을 그들이 인간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로 베듯 모조리 잘라내고,「가르친다」는 한 面,「배운다」는 한 面만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한 面의 行爲 以外에는 결코 다른 行 爲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인양 꼼짝하지 못하게 가두어 버린다. 얼마나 무서운 폭력이며, 金城鐵壁으로 된 감옥인가. 이는 現實속에 실제로 있는 감옥보다도 더 무서운 감옥이 아닌가.
日常語의 기능이 이런 것인 줄을 안다면 여기에서 유추하여 科學的인 用語가 어떤 것인지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므로 장황하게 다시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줄 안다. 수학의 용어나 科學의 용어는 日常語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文學의 言語는 이 감옥과 같은 日常的, 科學用語 등의 意味領域을 파괴하고 그 鐵壁같은 한계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갇혀 있는 人間을 解放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人間生命의 本質인 삶의 多樣性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文學은 言語를 부정한다. 즉 감옥과 같은 言語를 부정한다. 이러한 부정을 통해서 生命없는 감옥과 같은 상태를 脫出하여 새로운 意味의 영역으로 言語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곧 比喩이다.「내 마음은 湖水」라고 할 때,「마음」이라는 상태에서 「湖水」의 상태로 옮겨 감으로써 새로운 意味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즉 마음은 湖水와 같은, 불과 같은 태양과 같은, 草原과 같은, 하늘과 같은… 등등으로 다양한 세계인데 「마음」이라는 단순히 抽象的인 次元의 世界에만 묶어 두지 않고 해방시킨다. 한 장소에서부터 다른 장소로 옮겨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老子는 道가「만물의 날카롭게 모난 것을 부수며, 그 엉클어진 것을 풀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며, 티끌과 같이 한다.…」(道沖章) 모나고 엉클어지고 한 것은 구속된 것이며, 한정된 것이다. 「그 빛을 부드럽게 함」(和其光)도 光이 뛰어나고 날카롭고 재주 있음인 것을 안다면 극단으로 치우친 것, 한 쪽으로 限定된 것임을 알 수 있다.「나야말로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나는 無知하다. 俗人들은 명백한 소견을 갖고 있다. 나만 혼자 어둡다. 俗人들은 영리하지만 나만 혼자 요령이 없다. 나는 출렁이는 바다와 같고, 멈출 줄 모르는 바람과 같다….」(我愚人之心也戰,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若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忽兮若海, 寂兮以無成止… (絶學無憂章)이라 한다. 지나치게 한계를 지우지 않는 구속 없는 自由와 解放이라는 의미를 얻을 수 있으면 足하다.
「사람의 삶은 부드럽고 약하나 죽으면 굳고 강하다.(中略)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며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下略 ) (人之生章) 살아있는 生의 動的인 이미지와 죽음의 固定된 靜的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사실「이미지」란 말은 서양식 思想의 바탕에서 나온 말이므로 老子에 적용시키는 것부터가 모순일 것이다. (이런 점은 이미지 문제와 西洋의 思想的 背景과 관련된 것으로 東洋과는 전혀 다르다.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고자 한다.) 즉 老子는 固定을 거부한다. 日常語와 科學 用語의 固定的인 기능을 안다면 그가 否定한 것은 言語自体가 아니라 이 같은 固定化를 否定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老子의 이런 面을 다음 言語不美章에서 볼 수 있다. 「믿음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이 없다. 착한 자는 말에 능하지 않고, 말에 능한 사람은 착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어째서 이것이 言語自体를 부정하는 것으로만 해석되어 왔는가. 그가 보다 더 완전한 言語를 끊임없이 追求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天下莫柔弱章 에서「바른 말은 얼핏 보기에 반대인 것처럼 생각된다.」(正言若反)이라고 한 것이다. 그는 正言을 드러내기 위해 계속 逆說的으로 그의 言語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다음에 볼 수 있는 道常無名章은 그의 言語에 대한 깊은 思考를 확인하게 한다.
「道」의 不變性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다듬지 않은 (아직 손대지 않은) 나무등걸은 비록 작더라도 天下의 누구든 그것을 도구로서 부릴 수가 없다. 제왕이 이런 道를 지킬 수 있다면 萬物이 장차 스스로 그를 찾을 것이요 天地가 서로 화합하여서 단 이슬이 내릴 것이며 백성은 命令하지 않아도 절로 고르게 다스려질 것이다. 처음 人工的으로 만들게 됨으로써 이름이 생기고 이름이 또한 이미 생겼다면 그것 또한 장차 멈출 줄 (한계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이 멈출 줄을 안다는 것이 위태롭게 되지 않는 所以이다…」
진리인 道는 固定되어 있지 않는 動的인 것이므로 한계를 만들어 固定시키는 言語로 사로잡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대로 둔다면 그것은 곧 混沌이고 虛無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言語인 이름을 붙임으로서 비로소 事物은 存在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탄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위태로움을 가져오기 쉬우므로 그것을 적절하게 멈추도록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知止所以不殆 이것이야말로 道이며, 言語의 바른 인식인「正言」인 것이다. 따라서 老子는 言語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言語를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방법을 論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서 있는 위치는 無도 아니고 有의 世界도 아닌 그 兩便의 한가운데인 中立地帶에 서있다. 그것은 第一章의 道可道章의 마지막에서 言及하고 있는 衆妙之門이라고 한 門이다. 生命의 탄생인 門과 無 또는 虛無를 빚어 存在를 탄생시키는 言語는 無와 有의 境界線이기 때문이다.
文學의 言語는 감옥과 같은 日常語의 非生命的인 世界를 拒否하고 새로운 生命의 世界로 향해서 길(道)을 떠나야만 하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몸부림치면서 나부끼는 生命의 깃발이다.
詩人은 그러므로 이 깃발을 지키는 마지막 戰士이다. 그 싸움은 政治的인, 그리고 革命의 싸움도 아닌 人間의 가장 根源인 生命의 本質을 지키는 싸움이다.
너무 간략하게 다루었기에 論理的인 비약도 많았을 것이고 따라서 無理가 많았을 줄 안다. 그러나 筆者가 밝히려한 점이 老子는 결코 言語自体를 否定한 것이 아니라 言語의 바른 사용이야 말로 道이며, 그 道는 生命의 本質에 닿아 있음을 말하려 한 것임을 알았다면 다행으로 생각할 뿐이다.
앞으로 충분히 그리고 상세하게 다룰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려 본다.
註 ① 李奎浩 : 말의 힘. 제일출판사
② 시펭글러 : 西歐의 沒落
③ 야스퍼스 : 言語
④ 볼노브 : 言語와 敎育 (강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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