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이 한(李 翰)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閥族)인 대성(大姓)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
그 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阿干)을,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 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린(璘)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였다.
호방(豪放)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살다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江陵道三陟縣)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강릉도의 안렴사(安廉使)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이어서 목조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咸吉道德源)에 정착하였다가 원(元)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 : 경흥부의 동쪽 30리에 있었다.) 땅으로 이주(移住)하여 원주민 5천 호(五天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벼슬 제도)가 되니 이 때가 고려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조(朝)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에게 쏠려 쫓으니 이씨 조선 왕업(李氏朝鮮王業)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목조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 이행리)는 원나라 세조(世祖)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그가 충렬왕(忠烈王)을 공손히 뵈오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 본국에서 벼슬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다.
익조가 부인 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 탁조(度祖)의 장자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차자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1315년(고려 충숙왕2)에 출생했던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彊)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시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 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倭寇)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던 환조의 장남 원계(元桂)가 1361년(공민왕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박주(博州)에서 승전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우왕(禑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를 토벌했으며, 요동(遼東) 정벌 때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수로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환조의 둘째 아들 화(和)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일등공신으로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으며, 두차례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義政)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1392년(태조1) 7월 16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王)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기초를 세웠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사공(司空) 이 한(李 翰)의 22세손이다.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채택하고,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를,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건국(建國) 이념으로 내세워 왕권을 중심의 권력구조를 확립하여 한국(韓國) 최대의 벌족(閥族)으로 발전해 온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대소 120여 파(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를 시대(時代)에 따라 세 갈래로 구분하면, 첫째 이태조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 안사(安社)의 상대(上代)에서 갈려진 파로는 시조 한(翰)의 14세손 궁진(宮進)의 둘째 아들 단신(端信)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시중공파(侍中公派)와 15세손 용부(勇夫)의 둘째 아들 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세손 양무(陽茂)의 셋째 아들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공파(主簿公派)가 있으며, 둘째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서 갈려진 파로는 안사의 아들 안천(安川)·안원(安原)·안풍(安豊)·안창(安昌)·안흥대군(安興大君) 파와 익조(翼祖) 행리(行里)의 아들 함녕(咸寧)·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대군(咸城大君) 등 12파가 있으며 탁조(度祖) 춘(椿)의 아들 완찬(完昌)·완원(完原)·완천(完川)·완성대군(完城大君) 등의 4파와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아들 완풍대군(完豊大君)과 의안대군(義安大君) 등을 포함하여 총 18개 파가 있다.
셋째 태조의 후대에서 갈려진 파로는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를 포함하여 99파(대군: 25, 군: 74)로 알려졌으나, 미취졸(未娶卒: 결혼전에 죽음)이거나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大君)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전주 이씨의 인맥(人脈)으로는 세종(世宗)의 아들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계통에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여 주목을 끌었고, 정종(定宗)의 아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계통에서는 영의정(領義政) 1명과 대제학 3명을 배출시켜, 정승 3명을 배출시킨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세종의 아들 여), 정승 2명의 선성군파(宣城君派 : 정종의 아들 무생),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文武官)을 배출해 낸 효령대군파(孝令大君派: 태종의 둘째아들 보)와 함께 화려한 명맥(名脈)을 이루었으며 정종의 막내아들인 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과 중종(中宗)의 7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의 계통은 무관(武官)의 집안으로 유명하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태조(太祖)가 <우리 가문의 백이숙제(伯夷淑齊)>라 칭했던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가 고려 말 우왕(禑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을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명(明)나라에 그 정변을 설명하러 갔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海州)에 은거(隱居)하였다.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의 후는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가 세종의 명을 받아 양자(養子)로 들어가 후계를 이었는데, 그의 아들 부(溥)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종실(宗實)의 현자(賢者)>로 불리웠고, 20세에 요절했으나 그 이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하여 계감(戒鑑)을 편수했으며, 효경(孝經)·소학(小學)·사서삼경(四書三經)·음율(音律)·산수(算數) 등에 모두 뛰어났었다.
부(溥)의 증손으로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역임했던 수한(守漢)의 아들 의건(義健)은 명종(明宗) 때 당시의 명현(名賢)들과 교유하며 시명(詩名)을 떨쳤고, 절(節)과 학(學)으로 선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다.
군수(郡守) 욱(郁)의 아들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후원(厚源)은 평생을 의롭게 생활하여 인간저울이란 뜻인 <의형(義衡)>으로 불리웠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강화(講和)가 진행되고 세자(世子)의 인질문제로 침통해 있는 인조(仁祖) 임금에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은 오직 나라를 위해 죽고, 신하들은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담한 발언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악신 김자점(金自點)의 축출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후원은 만년에 광주(廣州) 선형 곁에 집을 짓고 그 집이름을 <오재(五齋)>라 했다.
정종(定宗)의 인맥으로는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의 후손들이 명맥(名脈)을 끈다. 선성군 무생의 증손 학정(鶴丁)의 아들 양원(陽元)은 명종(明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종계변무사(宗系辯誣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광국 3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박학하였으며, 당쟁이나 흑백의 논쟁에 편당되지 않았다.
어느날 야대(夜對)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임금이 술을 권하고 <아로가(雅鷺歌)>를 지어 양원에게 화답(和答)을 청했다. <까마귀야 검지 말라, 백노야 희지 말라.(鴉兮莫黑鷺兮莫白)/ 흑백이 어지럽다. 수리야 너는 어찌 홀로 검지도 희지도 않느냐>하니 양원이 화답하기를, <주(朱)라 해도 내 아니요, 녹(綠)이라 하여도 내 아니라(謂朱非我兮謂綠非我),/ 주록(朱綠)이 현란함도 내 고움이 아니어늘(朱綠之眩晃兮又非我之娜也),/ 님은 어찌하여 날 몰라 보시고 물들었다 하시오(君胡爲平不我知謂我兮染夏)>하니 임금이 좌요에 편당됨이 없음을 알고 더욱 어질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한강(漢江)을 지키다가 해유치(蟹踰峙)에서 적군을 크게 대파한 후 영의정에 올랐던 양원은 의주(義州)에 피란 중이던 선조 임금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된 소식을 듣고 "국사를 가히 어찌 할 도리가 없다"하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겠다면서 절곡(絶穀) 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시경(蓍慶)은 임진왜란에 순절한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고 있는 동안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수를 갚는다고 아버지 영전에 맹세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전투에 참전하여 육신으로 적을 격살하고 물에 빠져 죽으니 시체도 못거두고 의관(衣冠)으로 장사를 지냈다.
군수(郡守) 극인(克仁)의 아들 홍주(弘胄)는 40년간 벼슬을 지내고 영의정(領義政)에 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 초막뿐이었고 한 뙈기 공원에는 대(竹)와 화초가 조촐하게 피어있었다고 하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문묘(文廟)의 중수비문을 남겼다.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의 후손에서는 수창부정(壽昌副正) 칭(稱)의 아들 헌국(憲國)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선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아들 효백(孝伯)은 이 복(李 復)·이 형(李 衡)과 더불어 당대에 활 잘 쏘는 <칠사종(七射宗)>으로 불리웠으며, 뛰어난 지감(知鑑)으로도 유명했다. <원교집(圓嶠集)>에 의하면, 그의 무덤이 광주(廣州) 도논리(道論里)에 있는데 그 터는 효백이 평소에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이다. 그는 항상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반드시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어느날 활줄이 갓끈에 퉁겨져서 갓끈에 달렸던 큰 구슬을 잃었는데 장사할 때 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는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으나 세종(世宗)의 현명함을 위해서 <창광자자(猖狂自恣)>하여 세자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방랑하였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는 불교를 깊이 믿었다. 그의 형인 양녕대군이 사냥개를 끌고 어깨에는 사냥매를 얹고서 그가 있는 절에 와서 마당에 사냥한 짐승을 늘어 놓고 자주 놀다가 갔는데,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효령대군이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하니, "이승에서는 임금의 형이요, 저승에서는 보살의 형이니 지옥에 갈 리가 있겠는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현손 중호(仲虎)는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의 이름난 학자로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대쪽으로 만든 계명(戒銘)에 <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며 이득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라>는 등의 구사(九思)와 <머리 모양은 곧게 하고 손가짐은 온순하게 하라>는 등의 구용(九容)을 빽빽하게 새겨서 허리띠에 차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함께 묻어 달라고 하였다.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직언(直彦: 효령대군의 5대손, 형의 아들)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 양의 손자 명(溟)은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 후 고갈된 재정을 맡아 국고(國庫)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물가를 안정시켜 한국 재정(財政) 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활을 잘 쏘아 장거리 사수로 이름을 떨쳤던 성녕대군(誠寧大君) 종의 후손에서는 <지봉유설(芝峰類說)>·<찬록군서(纂錄群書)>등 수십종의 명저(名著)를 저술하여 명망을 떨쳤던 수광과 억울한 사람을 너무 많이 구해주어서 지옥에서도 계속 영의정을 지내고 있으리라는 성구(聖求 : 지봉 수광의 아들)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특히 성구는 인조 때 기생(妓生) 제도를 폐하여 모두 고향에 돌려 보냈던 일로 이름을 떨쳤고, 이 계의 온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탄핵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나 양화강(楊花江) 위에 집을 짓고 살다가 집에 불이 났었다. 그는 밭뚝에 나와 태연히 앉아 있다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도 않고 "술독은 탈이 없느냐. 술을 따라 이웃 사람들에게 사죄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익녕군(益寧君) 치의 후손에서는 정은(貞恩)의 증손 원익(元翼: 합천 군수 억재의 아들)이 서민적(庶民的)인 인품으로서 <오리정승(梧里政丞)>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원익이 연로(年老)해서 퇴임을 청하니 인조(仁祖)는 술을 하사하여 전송하였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흰 이불과 흰 요를 주게하여 그의 검소한 덕을 표하며, "평생의 검소는 가히 경의를 표할 만하다."하고 승지를 보냈다.
승지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그 거처의 현황을 물었다.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은 “정승 40년에 초가 두어칸 뿐이더냐"하면서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정침(正寢)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세종(世宗)의 아들 18형제 중 가장 명맥(名脈)을 이룬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5대손 수록(綏祿)은 광해군(光海君) 때 원익(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 물러가 살았으며, 그의 아들 경여(敬與)가 가난한 일생을 살면서 기국(器局)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경여의 손자 관명(觀命: 대제학 민서의 아들)은 아우 건명(健命)의 죄목에 연좌, 덕천(德川)에 유배되어 관노(官奴)살이를 하면서 패랭이(平凉子)를 쓰고, 새벽 일찍 관가의 마당을 쓸어놓고 군수가 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대령(待令)하는 일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관명의 아우 건명은 경종(景宗)이 병석에 누어 후사(後嗣)를 정하는데, 아우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자 세자(世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무고를 받아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당했다.
건명의 사촌이 숙종조(肅宗朝)의 상신 이명이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으며, 특히 청(淸)나라의 실학사조(實學思潮)에 관심이 깊었고,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하였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영조(英祖)의 대리청정을 실현케 했으나 소론(少論)의 반대로 결정이 철회되자 파직,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무고로 사사당했다. 임영대군(臨瀛大君) 구의 아들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졌던 준(浚)은 문무 겸비의 명신(名臣)으로 이름났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1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병권(兵權)을 쥐자, 종실(宗室)에게 병권이 쥐이면 혁명이 있다는 한계희(韓繼禧)의 논척으로 파직당했다.
중 보우(普雨)를 논척하다가 유배당했던 충작(忠綽)은 효행(孝行)이 뛰어났다.
부모의 복상(服喪)중에 너무 울어 눈이 멀었는데도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먼거리의 묘소(墓所) 참배를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임금이 그의 효행을 높이 치하하여 승지(承旨)로 임명하자 조정에서는 장님승지는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 일어났다. 이에 왕이 교지를 내리기를 <신들은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미워하지만 나는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사랑한다. 보고서 못된 일을 하는 눈보다 아예 못보는 눈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정치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외 전주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완원군(完原君) 수(성종의 다섯째 아들)의 증손 몽설(夢設)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보령(保寧)에 은거하여 향풍(鄕風)을 세웠고, 그의 아들 성(城)과 원은 학명을 떨쳤다.
진의 아들 상질(尙質)은 학문이 현달하여 <삼유신(三儒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그의 아들 훤은 언간(言諫)으로 절의(節義)를 세워, 대제학(大提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손자 조(肇)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순조(純祖) 때 우의정을 지내고 명문장가로 시명(詩名)이 높았던 서구(書九)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로 손꼽혔으며, 승지 득일(得一)의 아들 상황(相璜)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러, 헌종(憲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순조실록(純祖實錄)>을 편찬했던 지연(止淵), 철종(哲宗) 때 좌의정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던 헌구(憲球),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 철종 때 영의정 재원(載元),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大統領)을 지낸 승만(承晩)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