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편소설 연재 ⑤
금 강
이 대 영
▣ 떠나는 사람들
금강 전투는 백강 전투와 우금치 전투 이래 최대의 접전이었다. 부여(夫餘)의 풍(豊)이 백강전투에 패해 400여 척의 배가 불타 오른 이후, 강물이 이렇게 붉게 물든 적은 없었다. 동학농민군의 함성도 이처럼 사람의 혼을 흔들어 놓지는 않았었다.
금강 전투에서 강 연안 마을의 피해는 컸다. 마을은 물론, 야산이 초토화 되었으며 피아의 공방으로 한창 물오르던 논밭은 쑥대밭이 되었다. 죽은 시체들의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온전한 몸으로 죽은 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팔 다리가 산산 조각이 났거나, 아예 불에 그슬려 까맣게 변색된 시체들이 즐비했다. 오동리, 대성리, 삼교리, 검상리, 태봉리 일대의 불탄 마을에는 형체만 남은 수 십대의 트럭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이 외에도 차령고개 아래에 자리한 정안면 사현리, 광정리, 석송리, 운궁리, 의당면 수촌리, 금강 북쪽의 전막과 관골, 반포면 도남리와 봉암리, 계룡면 봉명리 일대 등에도 시체가 즐비했다. 접전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금강교 폭파 직전 소개령을 듣고 산골로 피신하거나 남쪽으로 내려가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산성에 살며 장깃대나루의 뱃사공이었던 김흥술 노인은 피난 가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안방을 지키다 적의 공습에 숨을 거두었다. 또한 계룡면 봉명리 팔재산 아래에 살던 박말년 노인은 모깃불을 피우다가 미군 야크기의 공습에 유명을 달리하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공수원 6동 주민들은 전화(戰火)를 피할 수 있었다. 용봉리, 송암리, 봉현리, 보흥리 일대는 일종의 후방 보급기지의 역할을 했다. 수원에서 온양을 거쳐 남하하는 북한군 4사단 병력과 보급차량들은 예산, 유구를 거쳐 우성면사무소와 우성초등학교, 그리고 상서 분교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은 초등학교와 면사무소에 천막을 치고 동대리 마을 일대를 임시 숙소로 사용했다. 동대리 주민들은 국도에 위치하여 적군의 주요 진입로가 될 것을 예상하고, 미군들이 뿌린 전단지를 보거나 소개령에 의해 논산이나 영동을 거쳐 대구로 피난했다. 남아 있는 장애인이나 고령자들은 방흥리에 위치한 350고지 묵방산으로 숨어든 상태였다.
예산, 마곡사, 유구, 우성을 점령한 북한군은 우선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인민분주소를 설치했다. 좌익적 성향의 민주부락이었던 계룡면 금대리와 중장리, 의당면 율정리, 반포면 송곡리, 탄천면 화정리, 정안면 산학리와 은용리, 봉안리, 도계리, 우성면 방문리, 유구면 입석리 등의 마을은 비교적 순조롭게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 밖의 주민들은 대부분 남으로 피난을 떠났거나 입산하여 은신하고 있었다. 공수원 6동 사람들은 인민군이 유구를 지나 우성면사무소에 도착하던 날, 이미 미굴산, 사마산, 내칭이골, 독안이골로 들어가 산거를 시작했다. 벌뜸, 반곡 주민들은 사마산으로, 용신동 사람들은 미굴산으로, 장터, 신영골 주민들은 내칭이골로, 새말 주민들은 도장골로 숨어 들었다.
7월 13일, 금강연안에 미군의 포격과 이에 대응하는 적군의 중화기 사격이 본격화 되자 아랫집 남 서방네 내외, 우물 위쪽에 사는 과부 정산 댁, 그 아래 사는 황 서방, 노름꾼 광재, 헌병 출신 오 서방네 내외가 아침부터 이 행수 집으로 모여들었다. 미리, 세 아들과 딸, 그리고 부인을 조반 직후, 도장골로 떠나보낸 이 행수는 이들이 모여들자 난감했다. 다행히, 허 대장 일가는 예전에 살았던 독안이골로 떠났고, 양 씨 노인과 강 씨 노인 일가는 서울에서 살던 자식들이 집에 도착하자 바로 짐을 챙겨 대구로 떠나버렸다. 다만,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강 씨만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노라 했다. 큰 아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 노인은 그의 별명인 강 꼴통답게 대청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 맨 위에서 살고 있는 고 씨 노인은 폐병쟁이 아들을 간수하느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옥희 아버지는 등 굽은 허리로 달려와 이 행수에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리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내칭이골로 떠나겠다며 집으로 되돌아갔다. 양 서방은 옥희가 태어나기 전에 내칭이골에 살던 네 가구 중 한 집이었기에 이 행수는 그가 미리부터 피난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우왕좌왕 하는 사이 오전이 흘러갔다. 포성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사마산을 넘어 오고 있었다. 오 씨네 마누라는 목화솜을 귓구멍에 막고 있으면서도 포성이 들릴 때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서둘러 떠나야 할 일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별 일이야 있겠느냐며 “집에서 죽으나 산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피난하지 말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여차하면 도장골로 떠날 채비가 되어 있는 이 행수도 이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3시경에 우성 인민분주소 위원들이 소련제 오토바이를 타고 나와 확성기로 떠들어대자 생각들이 급변했다. 인민군들은 장터의 창고 앞마당으로 주민들이 모일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다행히 장터 사람들이 모두 피난하고 동네가 텅 빈 것을 안 분주소 사람들이 이내 돌아간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마도 부역에 동원할 인력을 차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외양간 환풍구를 통해 장터를 내려다보던 이 행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서둘러 떠나야 했다. 그러나 형수님과 아이들만 먼저 피난시켰다며 툴툴거리는 남 서방과 노름꾼 광재를 따돌리고 떠날 수는 없었다. 혹, 서둘러 떠난다 해도 남 서방만큼은 식솔들을 이끌고 도장골로 뒤따라 올 것이 분명했다.
이 행수는 최소 1주일 동안 동굴에서 생활할 비품들을 일일이 열거했다. 생필품을 열거할 때마다 그들 모두는 귀를 열고 경청했다. 그리고 각 가구마다 가져올 물건들을 추가 배당했다. 남 서방은 무쇠 가마솥, 황 서방은 마른 장작 한 짐, 노름꾼 광재에게는 물을 저장할 단지,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집에서 사용하던 삽과 괭이, 도끼와 같은 농기구들을 들려 보내라 했다.
빗줄기가 오락가락 하며, 시커먼 구름을 몰아오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 사령부로 이양되었으며, 38선으로 북진하여 통일을 이룬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이 반복되고 있었다. 방송 말미에, 연 이틀 동안 큰 비가 내릴 것이라는 반갑지 않은 예보까지 딸려 나왔다.
이 행수는 외양간에 매어 있는 암소를 데리고 나왔다. 봄풀에 쌀겨를 섞어 먹였더니 둔부에 살이 도톰하게 올랐다. 이 행수는 쳇대를 들어 고리를 길마에 걸고 묶었다. 순간, 힘에 눌려 암소가 한 발짝 앞으로 움직였다. 길마 위에 있는 쇠고리에 무명옷을 길게 말아 만든 허리띠를 건 후, 소의 가슴 밑으로 넣어 반대편에 있는 쳇대고리에 고정시켰다. 소의 까만 눈이 오늘따라 순진하게 보였다. 이 행수가 소의 볼 살을 어루만지고 있는 동안 황 서방이 지게에 장작을 가득 지고 나타났다. 계집애들도 이제는 포성에 익숙해졌는지 우물가 도랑에 모여들어 지렁이를 건져내고 있었다. 사내 녀석들은 벌써 편을 갈라 강 씨 노인의 보리밭에 숨어 전쟁놀이를 하며 괴성을 질러댔다. 평소 같으면 강 씨 노인이 나와 일갈할 일이었지만 그는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황금보리밭 사이로 아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노린재와 진딧물, 개미, 무당벌레들이 불안한 듯 양 발로 보릿대를 부여잡고 있었다. 보리밭에서도 많은 생명들이 공생을 위해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이 행수는 황 서방을 길잡이로 내세워 아낙들과 아이들을 도장골로 먼저 떠나보냈다. 생필품을 양 손에 들고 길게 줄을 이어 언덕을 오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피난민의 행렬이었다. 다래끼와 바가지를 들거나 주발을 젓가락으로 두들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들 옆으로 동네 개들까지 설쳐대어 진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 행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모두가 자신의 식솔과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난 지 채 30분도 안 되어, 남 서방과 노름꾼 광재가 세간을 챙겨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에게 달구지에 짐을 실으라고 주문한 이 행수는 잠시 무엇을 잊고 있었다는 듯이 급하게 뒤뜰을 빠져나와 윗길로 접어들었다. 홀로 남아 있는 강 씨 어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강 씨 어른의 집에 이르자, 생각과는 다르게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대문은 높이 3m쯤 되어 보이는 쌍 문으로, 송판을 이어 만들어 부잣집다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안마당에 접어들자 담 밑에 매어 둔 누렁이가 짖기 시작했다. 때는 거르지 않고 먹이를 받아먹는 지 찌그러진 대야에는 먹다 남긴 밥이 볕에 쪼그라들고 있었다.
몇 번의 헛기침을 하자 강 씨 어른의 기척이 뒷마당에서 일었다. 목이 쉰 음성이었다. 제비 집을 훔친 귀제비가 산란을 했는지 조롱박을 엎어 놓은 듯한 굴집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났다. 굵은 콩알이 굴러가는 소리였다.
강 노인은 뒷마당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 우물은 뒷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연수라서 아무리 가뭄이 이어져도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또한, 집 안에 있는 우물이라서 강 씨 댁만이 사용하는 마을에서 가장 청결한 우물이기도 했다.
“강씨 어르신! 안녕하시지유?”
강 노인은 아주 천천히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후 몸을 돌렸다. 왜소한 체형에 여든을 넘긴 나이였지만 당당한 기품은 그대로였다.
“응! 이 행수구만, 어째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는가?”
“동네 사람들하고 이제 떠나려구유!”
“그려그려, 빨갱이들 오기 전에 어서들 떠나게나!”
“근디 강 씨 어르신은 안가실려구유?”
“나야 살 만큼 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늙은이를 삶아 먹겠는가, 죽 써 먹겠는가?”
“그래두, 저희 하고 내칭이골로 떠나시지요?”
“내칭이나 여기나 뭐가 달라? 어서 자네들이나 서둘러 떠나게나!”
“그래두 그게 아닌디…… 그럼 몸 성히 잘 계셔유, 끼니도 꼭 챙겨드시구유!”
이 행수는 이만하면 인사치레는 했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몸을 돌렸다. 설령, 강 노인이 같이 길을 나선다고 해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대문 옆에 있는 닭장에는 예닐곱 마리의 토종닭이 열심히 모이를 먹고 있었다.
대문을 나서는 순간 이 행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지게에 하지감자를 가득 채워 대문으로 들어서는 오식이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는 강 노인의 행랑채에 살고 있는 상머슴이었다. 힘이 좋고 우직해서 강 노인은 그에게 쇠전도 후하게 쳐주며 가족처럼 대해주고 있었다. 성격이 다소 괴팍한 면이 있었으나 강 노인이 워낙 강단이 센지라 그에게는 눌려 지냈고, 그의 아버지대부터 강 노인의 집에 얹혀살아 머슴을 천직으로 알며 살아가고 있었다. 원래 이름은 삼시세끼 거르지 말고 챙겨먹으라는 의미로 그의 어미가 지어 준 ‘삼식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미가 죽은 후, 어느 때 부터인가 ‘오식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식탐이 많아 하루에 몇 번씩 먹어 대는 그를 강 씨 부인이 ‘오식이’라 불러 주변에서도 그리 부르게 된 것이다. 자기 이름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삼식이도 흔쾌히 오식이란 이름을 받아 들였다. 땀 냄새를 풍기며 마주친 삼식이도 등짐이 무거웠던지 획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분주했다. 생필품도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이 행수의 집에서 기다리던 남 서방이 달구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 행수에게 말을 던졌다.
“행수님! 공수원 장터로 나갔다가 포탄이 달구지라도 때리면 어쩐대유? 벌써 도로구 뭐고 몽땅 차단되었을 틴디!”
“맞아유! 이 난리에 군인이나 빨갱이나 달구지가 신작로로 가는 걸 그냥 내버려두겄슈? 재수 없게 분주소 빨갱이들한테 걸리면 끝짱이유, 끝짱!”
맞는 말이었다. 이 행수는 전쟁 통에 자신의 판단력마저 마비되었나 하는 우려가 들었다. 피난을 떠나며, 소도 함께 데리고 가자는 마음만 앞섰던 것이다. 그는 당장 길마에 묶인 고리를 풀고 짐을 내리게 했다. 여러 번 오고 가더라도 지게로 짐을 나를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밤이 되면 당장 유구를 거쳐 신풍으로 오거나 부여길로 접어 든 인민군 후발대에게 어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 한 끝에, 소는 그대로 외양간에 두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물을 넉넉히 넣어 주었다. 어차피 닭들에게도 모이를 주어야 하니 누군가는 하루에 한 번은 동네를 들러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소의 코뚜레와 고삐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굴레에 묶인 워낭을 떼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여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집을 인민군들이 워낭소리를 듣고 들리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닭장에는 여섯 마리의 암탉이 발정 난 수탉에 쫓겨 이리저리 난장을 만들고 있었다. 미리 처자식에게 잡아 먹이지 못한 것을 스스로 책망하며, 이 행수는 삼태기에 담긴 열무와 상추묶음을 닭장에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외양간 옆에 세워 놓은 지게를 가져다가 짐을 실었다. 사립문 밖은 여전히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가득 놓여 있었다.
일행이 도장골에 이르렀을 때, 해는 벌써 골골 소리를 내며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굴 밖으로 나와 마치 무슨 소풍이라도 온 듯, 흐르는 물에 다리를 담그고 종알거리고들 있었다. 다행히 금광 밖으로 내다버린 돌무더기가 있어 밖에서는 아이들의 노는 행태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장골 골짜기에도 아군과 미군이 뿌린 수천 장의 삐라가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미8군 사령부가 제작한 8000시리즈 삐라는 그 내용도 다양했다.
사각형의 종이 삐라에는 세 명의 북한군 병사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사진, 병원에서 의료진에게 치료받는 사진, 그리고 나란히 앉아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타원형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삐라에는 "우리는 전선에서 심대한 부상을 입고 유엔군 쪽으로 넘어왔소. 친절한 유엔군은 곧 우리를 도와주었소. 그리고 우리는 유엔군 포로병원에 입원해서 좋은 치료를 받고 이제 완쾌했소. 지금 우리는 음식도 잘 먹고 하로하로 화평하고 행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소"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담은 병사의 안면 부위를 검은 띠 형상으로 처리하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눈을 가림”이라는 자세한 설명도 곁들여 있어 실소를 머금게 했다.
또한,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항복하면 후한 음식과 치료를, 대항하면 폭격과 포격을”이라는 내용의 삐라는 항복과 대항했을 때의 상황을 좌우로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농민의 고혈을 짜는 공산당!”, “공산학정은 북한인민을 귀머거리로 만든다”, “자유를 빼앗는 공산주의 마수”, “이번 공격에 나는 왜 죽엄의 길을 가야 하나!” 등 그 내용도 다양했다. 그 중 노름꾼 광재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삐라는 인민군들에게도 단연 인기 있는 것이었으며, 인민군 장교나 사병할 것 없이 몸 속 깊이 넣고 다닌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그것은 바로 한글과 영어, 한문을 공용어로 제작한 ‘안전보장증명서’였다. 맥아더 명의로 작성된 이 삐라에는 “대한민국병사들에게. 이 증명서는 북한군 귀순병에게 인도적 대우를 할 것을 보증한다. 이 귀순병을 곧 상관에게 인도할 것과 명예포로로 대우할 것을 명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광재는 다른 여러 장의 안전보장증명서도 지니고 있었는데, 특히 앞면에는 민주조선, 백 원이라고 적힌 1947년 북한 발행 100원짜리 화폐가, 그리고 뒷면에는 한글과 영어, 한문으로 “이 유엔안전보장증명서는 제군의 생명의 안전을 보장한다.”로 시작되는 문구를 담은 삐라를 그는 좋아했다. 혹여 어린 병사나 마음에 드는 여자 인민군을 만나면 적극 권해보겠노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괜찮은 여자 인민군을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의 조광지처는 노름에 미쳐 떠돌아다니는 광재를 포기하고, 이미 몇 년 전에 사내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마을 사람들은 광재가 먼 훗날 아들들에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거라고 그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들을 했다. 그럴 때마다 광재는 딸을 낳을 것을 잘못했다며 히죽 웃어 마을 사람들을 즐겁게 하곤 했다.
국군은 금강방어선을 구축하며 B-29와 B-26 폭격기를 이용해 북한군 진지를 사격하는 것은 물론, 적의 심리를 교란하기 위해 F-51전투기와 C-46수송기를 이용하여 삐라를 마구 뿌려대고 있었다. 이미 전쟁 발발 사흘 후인 6월 28일부터 미 공군은 수송기를 이용하여 “미국이 국제연합에 전쟁 개입과 원조를 요구했으므로 그동안 참고 저항하라”는 내용의 삐라를 1,200만 장이나 제작하여 남한 전역에 쏟아 붓고 있었다. 북한 역시 소년병을 시켜 배낭에 담긴 삐라를 뿌리고 다닌다고 했다. 북한군이 뿌린 삐라는 대개 포스터 형식으로 섬찍한 내용이 많았는데, 주로 미군이 서민들을 살해하거나 민가를 방화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불에 달군 인두로 민간인을 고문하거나, 도끼로 머리에 못을 박고, 톱으로 머리를 자르는 등의 내용은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연 이틀 쏟아 붓던 비는 멈추었지만, 먹구름은 여전히 하늘을 덮고 있었다. 동굴 안은 먼저 도착한 황 서방이 서너 군데에 멍석을 깔아 쉴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굴 안은 비교적 시원했으나 습기가 많았으며 굴 안쪽에는 박쥐들이 천정에 달라붙어 있어 입구 가까이에 살림도구들을 쌓아 놓았다. 공주와 대평리에서 여전히 포성이 들려옴에도 아이들은 무감각한 듯 돌 사이를 오가며 금돌을 찾기에 부산했다.
남 서방은 주변 묘지 아래에 있는 콩밭을 둘러본다고 나갔으며, 광재는 어느새 아이들 틈에 끼여 자기가 무슨 보석감정사라도 된 듯 금광석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강연에 대한 답례로 박수를 치게 한 뒤 금석을 찾아오도록 충동질 했다.
이 행수가 첫째 아들이 묻혔던 곳을 응시하는 동안, 황 서방과 오 씨 내외는 바깥 돌무더기 한 편에 솥을 걸고 저녁준비에 들어갔다. 이 행수는 굴곡진 소로를 따라 비탈밭으로 향했다. 지난달에 심어 놓은 고구마가 어제 내린 빗물을 머금고 힘차게 줄기를 뻗고 있었다. 아직은 씨알이 실리지 않아 아이들의 간식은 당분간 감자와 옥수수를 주어야 할 것이었다. 고구마 줄기 사이로 삐져나온 잡풀들도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왕바랭이, 여귀 어린순, 쇠별꽃, 서나물 등이 전쟁을 피해 꼭꼭 숨어 있었다. 이 행수는 풀포기를 당기면서 짠한 감정이 들었다. 이것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잡초를 뽑으면서도 안쓰러운 생각을 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며 이 행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큰 딸 옥분이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금광굴로 향했다.
굴 안에는 이미 피난 온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 등 세 무리로 나누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동네를 통째로 옮긴 듯한 기분도 들었다. 산모나 임산부, 갓난아이가 없는 것이 그 중 다행이었다. 상추와 열무겉절이, 된장과 깻잎, 풋고추, 감자조림 등 대부분 밭에서 직접 수확한 것들로 만든 반찬이었지만, 마치 일을 하다 새참을 먹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멸치국물에 고추장을 풀어 얼큰하게 끓인 감자국은 어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오 씨 마누라의 음식솜씨가 이곳에서도 발휘되고 있었다. 국물을 후루루 마시던 노름꾼 광재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일어서더니 봇짐 속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나왔다. 소주였다. 충남양조공업사에서 출품한 ‘보화소주’였다. 술 이름에 ‘꽃 화’ 자가 들어가야 제 맛이라면서 그는 이 행수에게 먼저 술을 권했다.
“성님! 성님은 이 전쟁이 언제쯤 끝날 것 갔수?”
“글씨, 내가 하나님이냐, 부처님이냐, 나랏님도 아니고 어찌 내가 알겄는가?”
“성님이 그래도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하니께 물어보는 거잖아유! 이승만 대통령은 어디로 줄행랑을 쳤대유? 벌써 미국으로 날릉거 아뉴?”
“방송으로는 북진통일을 한다고 큰소리치구 있으니께, 그렇게 하겄지 뭐……”
“아이구 성님두, 북진한다는데 왜 빨갱이가 우리 동네 앞을 지나간대유? 남북의 방향이 바뀐 거 아녀유?”
옆에서 아이들 밥을 떠먹이던 오 씨 마누라가 때맞춰 줄 방구를 뀌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따, 정치하는 놈들이 그짓말을 밥 먹듯 하닌께 하는 말 아니유?”
“한 잔 더 받어 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광재에게 남 서방이 술을 따랐다.
“빨갱이가 오면 진짜 우리를 죽일란가? 죄 없는 우리를 죽이기야 허겄슈 성님? 그치유?”
“다들 몸 챙기게,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게 전쟁이여?”
광재의 손이 무심결에 목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두 땡 볕에 일 안하고 여기 며칠 쉬었으면 좋겠슈!”
“마져! 애들하고 꼭 천렵 온 기분이어유!”
황 서방의 말을 받아 오 서방이 맞장구를 쳤다. 광재는 아껴먹어야 한다고 궁시렁대며 소주를 더 가지러 갔다.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에도 이미 익숙해진 듯,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연신 떠들어대며 공기놀이와 쎄쎄쎄 놀이에 열중이었다.
여자들은 굴 한가운데로 흐르는 물에 설거지를 하며 “쉽상!”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해댔다. 애들 오줌을 누이기도 쉽다며 긍정적인 해석을 더해갔다. 병사들도 휴전을 하고 밥을 먹는 중인지 포성이 잠시 주춤해졌다. 그러자 개구리 우는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에 고라니 울음이 섞이며 적막감을 더해갔다.
여자들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남자들은 굴 밖으로 나와 돌무더기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늘은 흐려 별 하나 나와 있지 않았다. 이 행수가 ‘공작’ 담배를 빼어 물자 광재가 다가와 한 개 피를 달라고 했다. 이를 본 오 씨가 담배가 있으면서도 달라고 한다고 핀잔을 주자, 자기 것은 ‘무궁화’라고 했다. 50원짜리 무궁화 보다는 60원짜리 공작이 훨씬 쓴맛이 덜했다.
멀리 장깃대 마루에 조명탄이 피어오르더니 다시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두만리나 중장리에 살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벌뜸과 방곡 사람들은 미련하게도 가까운 사마산으로 피난하여 가까이에서 들리는 포성에 어지간히 떨고 있을 터였다. 모두들 잠이 들었는지 굴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별 하나 비치지 않는 칠흑의 어둠이었다. 잠시 후면 애장터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의 울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할 것이었다. 이 행수는 두어 번 길게 호흡을 한 뒤, 붉게 물든 얼굴을 어둠에 씻으며 굴속으로 들어갔다. 가족을 찾아 동굴로 귀환하는 한 마리 박쥐와도 같았다.
▣ 마달령에 떨어진 별
포성은 여전했다. 콩 볶는 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리는가 싶다가 지축을 흔드는 폭음이 밤새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밤, 딘 소장은 적군은 이길 수 있어도 졸음은 어쩔 수 없다는 패자의식으로 잠시 선잠이 들었다.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해 달라는 워커 사령관의 목소리가 귀에서 새벽까지 윙윙거렸다. 포항에 상륙중인 미 제1기병사단을 영동으로 투입시키기 위해, 7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를 위해 이미 영동에 배치했던 19연대 2대대와 금산에 있던 사단수색중대는 화력지원을 위해 대전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러나 갑천을 건너려는 적군의 야포 공격은 19일 새벽부터 가일층 거세지고 있었다.
딘 소장을 깨워 일으킨 것은 영동 상공을 날아 와 대전비행장에 폭격을 가한 야크기 4대에 의해서였다. 다행히 제26 대공포대의 사격과 대구와 포항의 미 F-51 공군기의 발진으로 퇴각하기는 했지만 적은 점점 진지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북한군 3사단과 4사단에게 공주와 대평리를 내어 준 미 제 24사단 19연대와 21연대 병력은 사선을 벗어나 도깨비 같이 아군 진지로 찾아들고 있었다. 부대 간의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죽지 않고 귀환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모두 훈장 깜이었다.
전투력을 상실한 이들을 곧장 갑천전투에 투입할 수 없었던 딘 소장은 급한 대로 사흘 동안이나마 정비를 마친 34연대를 갑천에 전진 배치했다. 그러나 7월 14일에 공주를, 15일에 논산을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 이권무 소장은 5연대장 최인덕 대좌로 하여금 3사단과 합류하여 유성을 점령하게 하고, 도솔산을 향해 집중포격을 하며 도하를 독려하고 있었다. 또한, 16연대장 박승희 대좌는 논산을 거쳐 가수원으로, 18연대장 김희준 대좌는 논산에서 금산으로 우회하며 낭월리를 거쳐 34연대 3대대의 후방을 공략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들 보병의 선두에는 제 105전차사단장 유경수 소장이 이끄는 T34 전차가 병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에 34연대 1대대는 갈마동에 대대본부를 두고 갑천이 내려다보이는 도솔산 동쪽 138고지와 193고지 정상에 병력을 배치하여 유성에서 대전으로의 북한군 진입을 차단했다. 3대대는 탄방동 남선봉에 예비대대로 배치했으며, 청주 가도는 읍내동 육교에서, 논산에서의 진입은 가수원에서 각각 1개 소대가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평택, 안성지구와 금강 전투에서 패한 34연대 로버트 웨들링턴 (Robert L. Wadlington) 중령은 1개 대대 병력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갑천을 방어하고 있었다.
19일 오후 2시, 북한군 5연대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1대대장은 딘 소장에게 저녁에 철수할 것을 건의했으나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그의 시야가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유성의 들판 위로 소나기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갑천도 여전히 흙탕물을 정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천은 금산군 진산면 소재의 대둔산에서 발원하여 계룡산에서 흘러내리는 두계천(豆溪川)과 합류 한 후, 대전천으로 내려와 신탄진 부근에서 금강 본류로 흘러든다. 그러기에 공주지역에서 금강이 자연 방어진지가 되듯 대전에서는 갑천이 전방 기지가 되고 있었다. 유성과 대전을 잇는 대교인 만년교는 이미 미군의 폭격에 의해 절단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에 콘크리트로 준공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비록 50여 미터 폭의 하천에 불과했지만 193고지 도솔산 정상에 서면 계룡산으로부터 전개되는 3km의 개활지가 있어 너른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좌측으로는 논산에서 진입하는 적군을 가수원교에서, 우측으로는 만년교에서 방어할 수 있어 대전의 전초기지이며 최후 방어선이라 할 수 있었다. 만일 이곳이 돌파되면 보문산과 계족산으로 밀리며 결국, 대전, 옥천 경계지인 식장산에서 집결하여 옥천, 영동으로의 퇴로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갑천 방어 부대는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고 있었다.
7월 20일, 새벽 3시가 되자 1대대는 더 이상 138 진지를 사수하지 못하고 월평동으로, 그리고 보문산 457고지로 또 다시 밀렸으며, 새벽 4시경에는 이미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병사들이 계룡로를 따라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영동에서 이동하여 논산에서 진입하는 북한군 제 4사단 방어에 긴급 투입되었던 미19연대 2대대마저 북쪽 천변의 주진지에서 도솔산 정상 189고지로 밀리다 결국, 보문산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탄방동의 3대대는 예비대대의 역할은커녕 적의 선발대와 저격수들에 의해 남선봉 진지를 사수하기도 버거웠다. 갑천변에서 보문산으로 일제히 병력이 후퇴하는 동안, 북한군은 전술대로 금산과 옥천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고 제 3사단과 4사단 병력을 시내로 진입시키고 있었다. 유엔의 공군과 해군이 북한군의 집결부대 및 보급시설을 폭격하고 동해안의 군사시설을 집중 폭격하고 있다는 정보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남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딘 소장이 아더 M. 클라크 중위로부터 시내에 T34 전차가 출몰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오전 6시 30분경이었다. 도솔산 전초기지가 와해되고 비행장이 북한군에 고립된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는 딘 소장은 적전차를 잡아야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오산전투에서 R. 마틴 중령을 잃은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T-34전차를 잡아야 했다.
딘 소장은 클라크 중위와 통역관 지미 김을 대동하고 본부진지를 빠져나와 서대전 사거리 방향으로 지프를 몰았다. 이번에는 사단 연락 장교인 로랜드 대위와 공병장교를 포함하여 파괴조를 편성했다. 본부로부터 800m 전방에 괴물 같은 전차가 드디어 시야에 포착되었다. 붉은 천으로 만들어진 북한기를 달고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었다. 딘 소장과 일행은 건물을 은폐물로 이용하며 전차에 접근했다. T-34전차의 호위 보병들이 귀신같이 이를 알고 집중 사격을 가해와 딘 소장은 더 이상 목표물에 근접할 수 없었다. 사격을 피해 논을 지나 함석지붕의 민가로 이동하다보니 전차의 반대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작은 규모의 방으로 들어가자 뜻밖에도 전차의 동체가 통풍구를 통해 보였다. 포신은 발정 난 성기마냥 뜨겁게 달구어져 거대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딘 소장은 바주카포 사수에게 목표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사수가 앞으로 나서 환풍구에 포신을 얹고 방아쇠를 당겼다. 3.5인치 M20 바주카포의 굉음과 후폭풍으로, 건물 벽은 물론 천정까지 무너지며 고막을 흔들었다. 부사수와 함께 딘 소장이 고막을 막았던 손을 떼자 전차로부터 무자비한 비명소리가 튕겨져 나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사수는 포탄의 꽁지 부분을 수건으로 북북 문질러 재장전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발탄이 되기 쉽다는 것을 딘 소장도 잘 알고 있었다. 사수가 두 발을 연이어 더 퍼 부은 후에야 전차는 조용해졌다. 확실히 새로 투입된 3.5인치 바주카포가 2.36인치 로켓포보다 위력이 있었다. 전차가 파괴되자 호위 보병들도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딘 소장은 클라크 중위와 함께 전차로 다가갔다. 헤치는 열려 있고 전차 바퀴는 뱀허물처럼 늘어져 있었다. 병사 중 한 명이 흰색 락카 스프레이를 이용하여 전차에 무언가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KNOCKED OUT 20 JULY 50 UNDER THE SUPER RUISION OF. MAJGEN W. F. DEAN"이라고 썼다. 그리고는 딘 소장을 바라보며 씩 웃어보였다. 딘 소장도 미소를 지었다. 허물어진 적 전차에 기록된 내용을 보고 아군들이 용기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딘 소장이 연대본부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34연대 예하부대 및 지원부대는 대전이 이미 방어불능의 상황에 근접했음을 알고 철수를 위해 지휘소로 집결하고 있었다. 통신이 두절된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 그리고 34연대 3대대에게 전령을 보냈지만 도솔산의 2개 대대는 이미 보문산으로 후퇴하고 있었으므로 철수명령이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탄방동 남선봉 공원의 3대대와 상소동의 수색중대 3소대만이 전령을 수령하여 복귀하고 있었다. 미 제24사단의 3개 연대 병력과 포대를 비롯한 지원병력은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서둘러 대전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철수로가 확보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34연대 로버트 웨들링턴(Robert L. Wadlington) 중령이 옥천의 21연대로 직접 달려가 5대의 전차와 60명의 병력을 지원받아 판암동 일대를 점령한 북한군을 2시간 동안 공략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는 퇴로를 스스로 확보하여 적진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시내로 들어 온 저격병을 제거하는 동시에 전투장비는 물론 보급품까지 이동시켜야 했다. 딘 소장은 레이먼드 D. 헤필드 대위로 하여금 기관차를 이용하여 보급품을 이동시키도록 지시했다. 이마저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다행히 때를 맞춰, 제 1기갑사단으로부터 여덟 대의 전차가 도착했다. 34연대 1중대와 13포병대대 B포대, 63포병대대 B포대를 선발대로 편성하고 트럭을 일렬종대로 세워 병력을 승차시켰다. 마치 지옥을 벗어나는 듯한 안도감이 병사들의 얼굴 위로 번지고 있었다. 병사들에게는 ‘36’이라는 숫자가 절실해 보였다. 미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36점이 필요했다. 최전선 전투부대는 한 달에 4점, 연대본부와 전선 사이는 3점, 후방배치는 2점, 일본에서의 근무는 1점이었기 때문에 전투부대에서만 복무할 경우 9개월이면 귀국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당장, 내일이 없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계는 1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로는 이미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옥천가도가 유일했다. 죽음의 도로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병력은 전차를 선두로 하여 뿌연 먼지를 날리며 본부를 빠져나갔다. 지휘는 연대장 찰스 보삼프 대령이 맡았다. 선발대는 불에 탄 차량과 넘어진 전신주 등으로 막힌 도로를 치우느라 애를 먹었다. 용두동과 서대전 사거리에서 34연대 3대대가 엄호를 하고 있음에도 차량이 이르는 곳곳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적의 사격이 쏟아졌다. 북한군 저격병들에 의한 공격이었다. 선발대는 적과의 접전으로 두 개의 병력으로 분산되어 이동하게 되었다.
딘 소장은 남은 병력을 대동하고 이들을 뒤쫓았다. 시내의 상가 및 민가는 성한 곳이 없었다. 미군과 북한군의 시체가 도로 위에 뒤엉켜져 있기까지 했다. 아군이나 적군 모두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딘 소장은 판암동을 거쳐 세천과 증약터널을 통과해 옥천으로 퇴로를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군은 이미 대전역을 장악하고 세천터널과 판암동 진입로마저 차단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선발대는 원동사거리에서 대전여고 운동장으로 길을 잘못 들어 대동의 뒷산으로 뿔뿔이 탈출하고 있었다. 원동사거리에서 3시 방향으로 접어들어 금산방향으로 가야 할 것을 1시 방향으로 잘못 진입하여 전진로가 막혀버린 것이었다. 좁은 비탈길에 50여 대의 차량이 몰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적군의 사격까지 받은 미군은 차량을 버리고 각자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동 뒷산으로 올라 꽃산과 식장산 줄기를 타고 옥천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본대도 시련을 겪기는 매한가지였다. 도로 양측 건물에 배치된 북한군의 사격으로 트럭에서 비명을 지르며 미군들이 도로로 떨어져 뒹굴었다. 그래도 무작정 앞 차량의 꽁무니를 보고 내달려야 했다. 낙오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다보니 대전 길에 익숙하지 않은 운전병들은 옥천과 금산의 진입로를 혼동하여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 공군비행장, 그리고 도청사에 있던 사단사령부, 그리고 연대본부로부터 시가지를 벗어나 옥천길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대부분 원동과 대동을 통과해야만 했다. 선발대는 대동 교차로에서 문제가 발생했지만 본대는 신흥동의 야트막한 언덕을 지나면서 야기되었다. 차량이 언덕을 내려서면서 좌회전을 해야 옥천길로 접어들 수 있는 지형이었다. 그러나 언덕에는 이미 북한군이 초소를 구축하고 사격을 가해와 대응사격을 하며 차량은 사거리를 전속력으로 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을 지나친 딘 소장은 다음 사거리인 인동에서 좌회전을 하면서 금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전방에는 개활지인 산내와 머들령이 있는 만인산 537고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기봉과 만인봉에는 옛 봉화터가 있었지만 아군이나 삼남으로 보내는 어떠한 봉화도 피어오르지 않고 있었다.
차량은 간헐적으로 사격을 받으며 대전천을 따라 머들령으로 내달렸다. 그의 뒤에는 참모진의 호송차량이 뒤따랐다. 차량이 바갓말을 지날 때 쯤, 그들은 길가에 전복된 트럭을 발견했다. 차량 안에 쓰러져 있는 운전병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트럭의 차량은 모두 깨져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딘 소장은 차량을 멈추게 하고 운전병에게 다가가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딘 소장은 트럭 밑에 숨어 있던 부상병을 부축하고 클라크 중위와 함께 자기 차량에 먼저 태워 보냈다. 딘 소장은 후미 차량에 탑승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뒤따라 온 야포 견인차에는 짐과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더 이상 승차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철모에 붙은 인식표 덕분에 간신히 올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딘 소장의 차량은 얼마가지 않아 또 다시 멈춰 섰다. 먼저 출발했던 두 대의 지프차가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산말을 지나 점말로 접어드는 S자 지형의 지점이었다. 병사들은 대전천 위에 걸린 월계교를 지나야 마달령을 넘어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길목을 차단한 적군은 교량 앞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딘 소장은 망원경으로 적황을 살폈다. 적군은 점말 입구 야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소총부대와 기관총까지 배치해 놓은 상황이었다. 딘 소장은 클라크 중위에게 명하여 지도를 펼치게 했다. 등고선은 계족산에서 병풍을 치듯 뻗어 내려 식장산, 만인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전방의 도로를 개척하지 않는 한, 적군을 뚫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온 길로 돌아간다 한들, 옥천길이 차단당한 상황이었다. 오직 전진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어차피 차량은 전진하는데 까지 엄폐물로 사용하고, 일정 지점을 지나서 각개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딘 소장은 현 상황을 참모와 병사들에게 설명하고 만인산을 살아서 넘어올 것을 당부했다. 순간, 병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딘 소장은 공격대열을 형성하여 천천히 차량을 뒤따라 이동했다. 차량에는 머리를 운전대에 바짝 붙인 운전병만 승차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전방으로부터 집중 사격이 가해졌다. 서너 명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적들이 도로변에 배치되어 퇴로를 개척할 수 없었다. 날은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어둠을 이용할 수밖에 없음을 모든 병사들이 깨달아가고 있었다.
딘 소장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대전천의 뚝방으로 달라붙었다. 모두 17명이었다. 부상병이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소총을 지니지 않고 있었다. 혁대에 탄창과 물통조차도 없는 병사가 있었다. 실은, 딘 소장이나 클라크 중위도 소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한심한 전력이었다. 딘 소장은 둑의 제일 낮은 지점에 내려서서 병사들에게 몇 가지를 주지시켰다. 먼저, 어두워지면 두세 명씩 조를 이루어 탈출을 시도한다는 것, 가급적 종으로 긴 대열을 형성하되 이탈하여 낙오되지 않도록 할 것, 이동로는 가급적 대전천 뚝방을 엄폐 삼아 만인산을 크게 우회할 것, 수통이 있는 병사들은 하천에서 물을 가득 채우고 전우애를 발휘할 것, 탈출하여 금산에서 아군을 만나지 못할 때는 김천, 대구 방향으로 길을 잡을 것 등등이었다. 수통을 이야기 하는 동안 딘 소장의 눈은 클라크 중위의 혁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수통은 없었다. 심지어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 그의 어깨는 관통상을 입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딘 소장이 클라크 중위에게 다가가자 그는 권총을 내밀었다. 그 스스로 권총을 조준할만한 어깨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위가 어두워지기까지 그들에게는 무한한 인내력이 필요했다. 다행히 북한군도 아군을 공격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어쩌면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굳이 무리하여 사상전을 전개할 이유도 없었다.
전초기지에 있던 데이비드 하사가 적이 저녁을 먹고 있으니 이동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전했다. 딘 소장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개천길을 따라 만인산고지로 향했다. 문제는 부상병들이었다. 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딘 소장과 클라크 중위, 데이비드 하사가 주축이 되어 거동이 어려운 두 명의 병사를 부축하며 이동했다. 둘 다 몸이 뚱뚱하고 출혈이 심해 이동거리가 짧았으며, 부상병들은 수시로 물을 요청했다. 그러나 대전천을 벗어나 산으로 올라서면서 물은 바닥나고 말았다. 고지 정상부근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부상병을 응급 처치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퇴로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딘 소장은 클라크 중위로 하여금 이동로를 개척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는 사이 부상병이 연거푸 물을 찾았다. 주변에서 물을 구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계곡으로 내려가야 했다. 딘 소장은 수통을 건네받아 조심스럽게 아래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혹여 적의 매복조라도 만날까 봐 허리에 찬 권총을 자주 만지며 천천히 움직였다. 이따금씩 들리는 야포 소리와 고라니 울음이 섞여 묘한 화음을 만들고 있었다. 땀 냄새를 맡은 모기들이 노출된 피부를 괴롭혀댔다. 다행인 것은 침엽수림이 주종을 이루고 갈참나무가 산목을 형성하고 있어 험산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산짐승의 통로인지, 아니면 나무꾼들의 통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소로를 따라 6부 능선 쯤 내려갔을 때, 기적과도 같이 물소리가 귀에 잡혔다. 봉수레미골에서 발원하여 백암리, 신대리를 거쳐 유등천으로 흘러들어 가는 계곡물이었다. 봉수레미골은 만인산의 동쪽 계곡에 위치하여 달맞이나 큰 재앙이 있을 때 정상으로 봉화를 올리던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멀리 금산방향에서 불빛이 번쩍이었다. 딘 소장이 급한 마음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몸이 휘청했다. 바위턱에 걸린 것이다. 그는 산 아래로 구르면서 몸이 심하게 부딪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바다를 건너 온 별이 마달령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늘에도 검은 구름에 가려 별 하나 떠 있질 않았다. 삼남으로 점화 될 봉화 역시 여전히 피어오를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