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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고협 외전 】───────────────
※전국 고교 일진협회 외전※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①
어느 평화롭고 따스한 봄날 오후.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림을 그린다.
우선 연필로 도화지에 잔디와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꽃밭을 만든다. 꽃밭 위로는 나비와 벌들이 날게 하고
하늘에는 맑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게 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단 둘만의 아기자기한 집을 짓는 것이다.
그렇게 그림에 사랑하는 이와 색을 입혀가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나의 소박한 꿈이었건만
나 같은 애한텐 그것도 사치였단 말인가!
모처럼 쉬는 오후, 문득 생각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도화지를 찾았지만 도화지는커녕 A4용지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은 결과 지금 테이블 위엔 얄팍한 화선지 한 장이 놓여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연필이 아닌 볼펜이다. 한줄한줄 선을 그릴 때마다 번져나는 잉크를 보자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 중이던 신이를 정원으로 불러내면서까지 그리고 있는 그림이니 중도 포기는 있을 수가 없다.
화선지 위로 번져난 잉크 때문에 울퉁불퉁해진 그림을 맞은편 의자에 앉은 신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하하, 그림이 좀 웃기게 됐네. 그치?”
“별로.”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신이에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것은 성의 없는 대답이다.
그래도 바쁜 사람 불러놓고 지금 뭐하는 짓이냐며 금방이라도 면박을 줄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조용한데다 표정까지 무덤덤하다.
삐죽 뾰족 어긋난 잔디와 검게 타버린 꽃잎, 지저분한 먹구름이지만 어찌됐건 간에 밑그림이 완성되었다.
새하얀 세상에 이젠 색을 입힐 차례이다. 난 빨리 끝내려는 마음으로 바탕부터 칠하기 위해 파란색 물감이 들어있는 통을
박스에서 꺼내들었다. 뚜껑을 연 뒤 물감 통 물을 조금 부었다. 그러자 내 행동에 대해 신이가 의문을 표시한다.
“지금 뭐하냐?”
“으응. 어차피 물을 섞어가며 해야 하잖아. 그래서 미리 한꺼번에 물을 섞어놓는 거야.”
“이상하네.”
난 물감 통에 붓을 넣고 물감을 찍었다. 그리고 붓을 꺼내려던 찰나에 그만 물감 통을 엎어버리고 만 것이다.
물에 희석된 물감이 통에서 흘러나와 화선지로 옮겨갔다. 그렇게 화선지는 물감에 젖어갔고 물감은 꽃도 나무도 잔디도,
그리고 집과 구름까지도 삼켜버리고 말았다. 화선지는 온통 파랗게 변해버렸다.
“윽‥짜증나. 이게 뭐야?”
괜히 짜증이 났고 서러움이 밀려왔다. 신이가 보고 있어서 창피하기까지 했다. 나는 덜렁이에 바보다.
조용히 보고만 있던 신이가 입술을 떼낸다.
“이제 완성된 거냐?”
비꼬는 걸까? 놀리는 걸까?
신이의 물음에 한마디 대답 없이 망가진 그림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신이의 손동작이 보였다.
파란그림을 지나 박스에서 물감 통 한 개를 집어 든다. 빨간색물감이다. 신이는 깨끗한 붓에 물을 묻힌 뒤 빨간색물감을 찍었다.
그런 다음 화선지 위쪽에 점을 찍는다. 이윽고 빨간 점이 종이에 퍼져 나간다. 하지만 사방으로 2cm가량만 퍼질 뿐이다.
난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신이를 응시했다.
“하늘이 이쁘지?”
신이의 말 한마디로 인해 내가 쏟아 부은 파란색물감은 하늘이 되었고 신이가 찍은 빨간색물감은 태양이 되었다.
그리고 녀석의 말에 내가 해준 대답은
“아빠랑 똑같아.”
였다. 어릴 적에도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실수로 그만 검은색물감을 도화지에 쏟아버려 울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검게 변한 도화지에 노란색물감으로 점을 찍으며
나에게 밤을 그린 거라고 상냥하게 말했었다. 신이는 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나를 달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신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늘은 회사에 안 가 봐도 되냐?”
예쁜 입술로 신이가 묻는다. 그러면 내가 물감이 빨리 마르도록 입 바람을 불며 대답한다.
“훅훅-, 응. 민규가 있으니까. 공부는 잘돼가?”
“그냥 그렇지 뭐. 열심히 하고는 있어.”
신이는 요즘 경영학에 관심이 많다. 23살, 때늦은 공부일지도 모르지만 내년엔 대학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신이가 공부를 함으로써 경영학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호텔을 맡기는 나로서는 더없이 믿음이 갈 것이다.
조직이 커지고 일을 확장해나갈수록 내가 소유하게 된 클럽과 빌딩, 호텔만 해도 여러 채가 넘는다.
또 얼마 전엔 서울의 한 고등학교까지 사들였으니 발이 손이 되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신아, 우리 벚꽃구경가자.”
“벚꽃? 지금은 많이 안 피었을 텐데?”
“지금 말고. 축제 때쯤에 가자고. 갈 거지?”
“벚꽃이라‥. 너랑은 왠지 안 어울린다.”
저 표정 너무 진지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거지? 새신, 실망이야.
“그럼 무슨 꽃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걸 묻는 나도 참 닭살이다. 하지만 신이의 대답이 너무 궁금하기만 하다.
“음‥너는 말이지. 으음‥.”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신이다. 신이는 지금 나를 보며 무슨 꽃을 떠올리는 것일까?
설마 장난친답시고 ‘할미꽃!’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래! 민들레. 그게 어울리네. 하하.”
“민들레? 길거리에 막 피어있는 거?”
“어. 노란 거.”
기분이 좋지 않다. 그건 아마도 평소에 내가 민들레를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가 떨떠름해하는 내 얼굴을 본다. 재밌다고 피식 웃는 녀석. 신이가 말한다.
“가자. 벚꽃 보러.”
가끔씩 날 놀리는 녀석이지만 이럴 땐 정말이지 받았던 열도 식어버리고 얼었던 마음도 녹아버린다.
이런 게 바로 사랑이라는 걸까? 으흐흐. 사랑이란 거‥나쁜 건 절대 아닌 것 같다.
“응. 약속했다?”
“그래. 내 전 재산 다 걸고 약속했어.”
그런데 신아, 약속 하나 하는 데에도 꼭 무언가를 걸어야 하는 거니?
그날 밤. 모처럼 휴식이라 생각했건만 지금 난 민규의 호출에 회사로 달려왔다.
손님이 왔대나 뭐래나. 그 손님은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소이켠. 구제파의 보스이다.
구제파와 우리 쓰래빠는 현재까지도 동맹지간이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소이켠을 완벽히 믿을 수가 없다.
1년 전 나에게 찾아와 왜 동맹을 맺자고 한건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때 그는 강호파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힘을 합치는 것이
좋다는 이유를 대었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닐 것이다. 그의 본심을 그의 속셈을 현재 나는 알 수가 없다.
“오셨습니까, 형님!”
내가 회사 안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곳곳에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힌다. 그들의 90도 허리인사는 이제 익숙해져버렸다.
아니, 당연시되었다고나 할까? 내 사무실 즉, 사장실이 있는 10층에 오르자 민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소사장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사장. 소씨라는 성 때문에 개그스러운 명칭이 되었다. 사장실 앞을 지키고 있던 부하들이 문을 열었다.
난 그들이 열어준 문안으로 위풍당당하게 들어갔다. 정말 소이켠이 부하 한명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각에 나오시게 해 죄송합니다.”
한 달 전 백발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소이켠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그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마실 수 있는 차 한 잔이 놓여있었다.
“아시니 다행이네요.”
난 도도한 말투로 말을 받아치곤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해 다리까지 꼬고서 말이다.
그에 치마선이 무릎 위로 살짝 올라갔다. 잠깐이었지만 다리로 향한 소이켠의 시선이 느껴졌다. 상관은 없다. 그가 자리에 앉았다.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꼭 이유가 있어야 찾아오나요? 그냥 얼굴을 뵌 지도 꽤 된 것 같아 지나는 길에 들린 것뿐입니다.”
내 기억으론 마지막으로 본 게 3일 전인 것 같은데, 꽤 된 것 같다고? 이상한 녀석이네.
“그런데 바지보다는 치마를 더 자주 입으시는 것 같네요. 갑자기 적이라도 나타나면 어쩌시려고.”
“별 걱정을 다 하시네요. 치마를 찢어서라도 내 몸 하난 지킬 수 있으니 염려마세요.”
“하하, 하긴 연사장님에게 덤벼드는 정신 나간 녀석이 있을 리도 없겠군요. 아, 그건 그렇고 요전에 럭셔리 호텔을 사들이셨다고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그 말 하려고 날 찾아온 거냐? 이거 괜히 나왔잖아? 그냥 신이랑 오붓한 시간이나 보낼 걸.
저 소이켠 녀석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축하는 무슨.”
“학교에, 빌딩에, 호텔까지 아마도 연사장님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쁘실 것 같네요.”
“소사장님도 발이 열개라도 모자랄 만큼 많은 땅을 보유하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요즘 소사장님의 아뵤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도 잘 나간다죠? 기쁘시겠군요.”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려니 이거 입이 타들어갈 지경이다. 내가 피노키오였다면 지금쯤 내 코는 건물 벽을 뚫고
북극의 빙산을 가격했을 터!(오버가 많이 심함.) 코가 근질근질하다.
***********
“밥 좀 사주시죠? 절 불러내셨으니 그 정돈 해주실 수 있겠죠?”
사무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30분가량을 나눈 이야기의 끝은 다름 아닌 밥이었다.
지루한 분위기와 쉴 새 없이 재잘 된 덕분에 내 배도 허기가 짐을 알아챘던 것이다. 소이켠은 내 요구에 흔쾌히 승낙을 했다.
단, 누구의 동행 없이 둘이서만 가자는 제안과 함께.
그리하여 이 곳은 스테이크 전문점.
물론, 소이켠과 나, 둘만이 테이블을 지키고 있다.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마시는 커피향은 부드럽기만 하다.
“많이 배고프셨나 봐요. 아까 보니 허겁지겁 드시던데.”
생글생글 웃으며 소이켠이 말했다. 난 대꾸 없이 커피를 들이켰다. 잔이 비었다.
“제 것도 드시겠어요?”
소이켠이 자신의 잔을 건넨다.
“그래도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것도 없죠."
흐음‥소사장, 꽤 매너 있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항상 존대를 썼었지? 내가 19살이었을 때도 이 사람만은 날 깔보지 않았어.
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이켠이다.
“왜 그러시죠? 제 얼굴에 뭐라도.”
“안 묻었어요. 그럼 커피는 고맙게 마실게요.”
“예예-.”
소이켠의 커피를 마시며 생각해보니, 그가 나를 배신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왜냐고?
그건‥그가 준 커피의 맛이 깊고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자고로 음식은 거짓말을 못하니까.(자신만의 사고가 뚜렷한 개소리였음.)
끼이익-.
늦은 저녁식사 후 난 소이켠의 차로 집에 도착하였다. 컴컴한 집 앞을 가로등과 자동차의 전조등이 밝혀주고 있다.
“오늘 밥 잘 먹었어요. 다음엔 제가 사드릴게요.”
“그 말 꼭 기억하겠습니다.”
“전 약속은 반드시 지켜요.”
“하하,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럼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차 안과 차 밖에서의 인사가 끝이 나고 소이켠은 내 눈에서 멀어져 갔다. 저 남자의 매너정도는 신이도 배우면 좋으련만.
신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간 또 펄쩍 뛰겠지? 아니, 딴 남자와 밥을 먹고 그 사람의 차까지 얻어 타고 온 건만 봐도
삐져서는 나랑 말도 안 할 거야. 심하면 방망이 들고 그 사람을 찾아갈지도 몰라.
난 민규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들며 대문 앞에 섰다.
그리고 열쇠로 대문을 열려는 순간 우측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에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러기도 전에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힌트가 들려왔다.
낯익은 목소리가 말이다.
“나는 다아-봤지롱!”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②
젠‥젠장. 우혁이다!
하필이면, 왜 이 녀석이 여기에 있던 거야? 우혁이를 보는 순간 까만 밤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재수도 오지게 없지.
“형님, 지금 재수 없는 놈한테 걸렸다고 생각했지?”
입에서 담배를 떼 내며 말한다. 이우혁, 이젠 내 생각까지 읽는 구나? 조심해야겠다.
“아냐. 내가 뭐 죄졌니? 걸릴 게 있게.”
“바람 폈잖아.”
저 자식을 그냥. 야, 이우혁! 하늘이 무너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 바람이라니, 누가 바람을 펴?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미쳤냐?”
“그럼 아까 그 남자는 뭐야? 첨보는 얼굴이던데.”
“처음 보다니, 소이켠이야. 소이켠 몰라?”
“오호라, 소이켠이랑 바람난 거구나?”
같은 사람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왜일까? 저 녀석도 한국말을 쓰고 나도 한국말을 쓰는데.
난 일단 우혁이의 오해를 풀자는 생각에 상황설명을 대강 해주기로 했다.
“소이켠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일 때문에 우리 회사로 찾아 왔길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그만 차까지 얻어 타게 된 거라구.”
“그래? 그럼 내가 오해를 한 거였구나. 미안해, 형님아.”
의외로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 난 긴장을 슬그머니 풀고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때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우혁이가 아닌가.
“그런데 형님아. 그 말을 신이는 믿어줄까? 난 그게 참 궁금해. 형님은?”
나쁜 놈. 결국에는 네가 나를 우려먹을 작정인 게구나.
역시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녀석이다. 차라리 이 현장을 유인이에게 들켰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을
하필이면 악마 같은 이우혁에게 걸려서는. 우씨.
“원하는 게 뭔데?”
끝내 꼬리를 내린 나였다. 쭈그려 앉아 담배를 한 모금 태운 뒤 우혁이가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학교. 나 학교에 보내지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학교에 보내지 말라니. 정말 이해 할 수가 없는 소리다.
무슨 학교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에 보낼 생각도 없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난 마치 녀석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순순히 응하였다.
“좋아! 무조건 넌 안 보낼게.”
“그럼 나대신 누가 가는 거야?”
우혁이 대신? 음‥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얼어무리는 수밖에.
“너 대신‥아! 유인이 보낼게. 됐지?”
“유인이? 좋아. 어쨌든 나는 안 보내는 거다?”
“알았어. 너도 오늘 일 못 본 척 해.”
“오늘 일? 난 아무것도 못 봤는데?”
씨익-웃는 귀여운 녀석이다. 좋아. 이젠 이 일이 신이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겠어.
후우-,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 그런데 내가 왜 우혁이의 입을 막기 위해 흥정을 하고 마음을 졸여야 하는 걸까?
난 꺼리 낄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하아, 그래도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지?
특히나 신이 같은 경우엔 소유욕이 엄청나니까, 오해 살만한 일은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게 나을 거야.
“형님아, 들어가자.”
자신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약속 하나에 싱글벙글인 우혁이다. 바닥에 담배를 지져 끈 뒤 무릎을 펴고 일어선다.
“그런데 너 왜 나와 있었어?”
“응? 형님 기다린다고.”
이자식이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대문을 열고 들어온 정원. 찌글이는 제 집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는 유인이었다. 녀석은 깜찍한 잠옷차림이었다.
“안 자고 뭐하냐?”
내가 묻자 고개를 돌려 언제 왔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본다.
“보면 몰라?”
“하하, 우리 형님은 봐도 몰라.”
윽, 저것들이. 신유인, 이우혁. 조직 내에서 유일하게 나를 보스로 보지 않는 인간들이다. 아차, 호두랑 시백이도 있었군.
신이는? 그 녀석은 내 애인이므로 제외다.
“신이는 방에 있어?”
껄껄대는 우혁이를 무시하고 유인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다시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유인이가 귀찮다는 투로 대답을 던진다.
“방에서 공부해.”
지금 시각이 10시21분. 오늘은 또 몇 시까지 공부할 작정인지‥. 무리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둬야겠다.
신이의 방으로 가기 위해 2층 계단을 밟으려하자 우혁이의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친다.
“신이한테 가는 거야? 오-, 우리 신이 오늘 밤에 코피 좀 나겠는데?”
코피‥.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던지는 걸까? 우혁아, 그냥 공부 때문에 피곤해서 터진 코피로 알아들으마.
그렇게 난 우혁이의 짓궂은 장난을 받아주지 않으며 꿋꿋이 계단을 올라갔다.
**********
개소리가 2층으로 올라가자 장난에 푹 빠져있던 우혁이 tv에 퐁당 빠져있는 유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현재 우혁은 행복과 기쁨에 들떠있는 상태다. 이유는 개소리에게 받아낸 약속 때문이다.
오늘 오후 늦게 즈음 우혁은 민규에게서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우울해져 있었다.
얼마 전 개소리가 사들인 고등학교의 체육교사를 두 달간 맡으라는 임무를 받았기 때문.
지금까지 체육을 맡고 있던 교사가 교통사고를 당해 몇 달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혁은 민규에게 싫다며 반항도 하고 떼도 쓰고 부탁까지도 해보았지만 통하지가 않았다.
그 일로 답답함에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때 개소리가 운이 없게도 그의 포획망에 딱 걸렸던 것이다.
어쨌든 자신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아낸 우혁은 커다란 짐을 떨쳐내기라도 한 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혁이 유인의 옆에 앉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똑같은 학교라도 옛날 같지는 않을 거야. 이젠 위치부터가 달라졌잖아? 힘내, 친구야.”
딴에는 가엾은 유인을 위로하는 우혁이었지만 정작 위로를 받고 있는 당사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유인은 마음속으로 우혁을 실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
삐그덕.
방문을 열고 들어온 신이의 방. 어둡다. 하지만 책상만은 스탠드로 인해 환하다.
신이는 의자에 앉아있었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펼쳐진 책 위에서 곤히 잠이 든 신이를 바라본다.
난 이 아이가 공부를 할 줄이라곤 꿈에도 상상 못했다. 하지만 신이는 자신이 나를 먹여 살릴 거라며 공부를 시작했고 또 열심이었다.
모두들 일주일도 안돼 신이가 포기를 할 거라 호언장담했지만 신이가 책을 펼친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그렇게 신이는 변해가고 있었다. 장롱 안에서 얇은 담요를 꺼내어 신이의 어깨에 살포시 덮어주었다.
“머리 아프겠다.”
자세가 불편해보여 푹신한 쿠션을 베어주기 위해 신이의 얼굴을 살짝 들곤 쿠션을 책 대신에 두었다.
그런 다음엔 깨지 않게 슬며시 머리를 놓는데, 덥썩! 손목이 잡혀버렸다.
내 손목은 곧 신이의 큰 손에 묶여버렸고 숨죽이고 있던 내 심장은 덜컹 내려앉고야 말았다.
곧 신이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움직이게 만든다.
“개소리‥.”
나‥날 부르는 건가?
눈을 감고 있는 신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틀림없이 내 이름이었다.
개소리‥개소리‥. 내 이름이 분명하다.
난 잠꼬대로 나를 찾는 신이가 너무나도 예뻤고 귀여웠고 또 사랑스러웠다. 심지어 고맙기까지 했다. 아니, 했는데‥.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세상 모든 아름다움이 우르르쾅!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 마. 개소리 하지 말라고.‥염병할.”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③
다음날 아침.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는 내내 나의 시선은 신이에게로 향해져있다. 신이를 보자니 어젯밤의 그 충격이 다시금 떠오른다.
어떤 험악한 꿈을 꿨길래 그런 잠꼬대를 한 것일까? 설마 매일 밤마다 욕을 내뱉으며 잠꼬대를 하는 걸 아니겠지?
만약, 진짜 그렇다면 결혼해서도 밤마다 사람 놀래 킬 거 아니야? 아아-, 그건 좀 곤란한데.
음식에 집중하며 밥을 허겁지겁 먹는 세 사람(신이, 유인, 우혁)과는 달리 신이에게 집중한 체 밥을 깨작깨작 먹는 나였다.
난 용기를 내어 신이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저기 신아?”
“왜?”
대답은 했지만 신이의 시선은 여전히 밥공기로 향해져있다.
“너 어제 무슨 꿈꿨어?”
“20층 건물 위에서 뛰어내리는 꿈! 나 키 크려나봐.”
우혁이가 대답을 했다. 난 신이한테 물었는데 왜 자기가 대답을 하고 난리람?
그리고 23살이나 먹어가지고 무슨 키가 큰다고. 정말 엉뚱한 녀석이다. 난 우혁이를 무시하고 신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교복 입은 여자들한테 짓밟히는 꿈꿨는데. 진짜 아팠어.”
유인이까지 합세했다. 난 이번 역시 유인이의 말도 그냥 넘겨버렸다. 하지만 우혁이가 넘기지 않았다.
“여학생? 꿈인데 아팠단 말이야?”
“응. 피하다가 침대에서 떨어졌거든.”
“야. 그거 장담하는데 예지몽일 거야. 오백 원 걸게.”
후유. 신이 꿈 얘기를 들으려했다가 생각도 안한 두 녀석의 꿈 얘기까지 들어버렸다.
정작 진짜 궁금했던 신이의 이야긴 듣지도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안타까워하긴 아직 이른 것이었을까?
드디어 신이가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난‥. 후우. 아무 꿈도 안 꿨어.”
뭔가를 이야기하려다 그만 두었다. 여자의 직감 상 신이는 분명 어제 꿈을 꾸었던 것이 틀림없다.
“정말? 정말 아무 꿈도 안 꿨어?”
“‥아우씨, 꿨기는 꿨는데 그게 좀 이상한 꿈이라.”
“얘기해줘. 진짜 궁금해.”
재촉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신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꿈타령이냐?”
“어? 그냥. 네가 어제 이상한 잠꼬대를 하길래.”
“잠‥잠꼬대? 들었냐?”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는 지 당황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다. 저러니까 더 궁금하네.
우혁이와 유인이 또한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신이에게 집중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은 외계인들이‥.”
“외계인?”
우혁이가 말을 끊었다.
“응. 우주외계인들이 집으로 쳐들어와선 애들을 다 납치해간 거야.
그래서 내가 죽자 사자 사다리를 타고 우주로 올라가서는 그그‥후라시맨으로 변신해서 외계인들을 쳐부수고
애들을 구출해내는‥뭐 그런 유치한 꿈이었어.”
신이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럼 ‘개소리 하지 마’라고 한 건 왜‥.”
“그건 외계인들이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로 지껄이잖아. 그래서 짜증나서 그랬던 거야. 근데 내가 잠꼬대로 그런 말을 했냐?”
아아‥그랬던 거구나.
우와! 그런데 신이가 이렇게까지 순수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걸? 20대에 외계인과 후라시맨 꿈이라니.
신아, 넌 역시 다른 남자들과는 뭔가가 달라. 음, 그래야 내 남자친구지.(순수한 꿈 하나로 신이를 달리 보게 된 개소리였다.)
“으엑! 그게 뭐야? 완전 SF네.”
“나도 납치됐어?”
신이의 꿈을 무시하는 우혁이에 비해 유인이는 자신의 생존여부에 대해 매우 관심을 가졌다.
가만! 아침에 꿈 얘기를 하면 재수 없다던데. 에이, 괜찮을 거야. 왜? 모두 개꿈이니까.
보디빌딩10층. 사장실.
밀린 서류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있으니 노크를 하며 민규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내가 비서에게 시켰던 주스 한잔이 쥐어져 있었다.
“왜 네가 들고 오냐?”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제가 가져왔습니다.”
민규가 책상 위에 주스 잔을 조심히 내려놓는다.
“뭔데 그래?”
“형님께서 사들이신 춘자 고등학교에 현재 2학년 체육교사가 급히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걸 왜 나한테 찾아? 교육청에 알아보라고 해.”
요즘 학교는 별걸 다 이사장에게 말을 한다. 선생정도는 자기들이 알아서 할 수는 없나 모르겠다.
“그게 춘자 고교 학생들이 워낙에 문제아들이라 벌써 3명이나 하루 만에 관뒀다고 합니다.”
얼마나 문제아들이기에 하루를 못 버티고 그만 두었다는 걸까? 내가 그 학교로 가보았을 땐 무척이나 조용해서 인상이 좋았었는데,
왠지 속은 기분이다.(그때는 일요일이라 학생들이 등교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저희 쪽 애를 두 달간 체육교사로 보내는 게 어떠할지‥.”
“교사자격증도 없는데 괜찮아?”
“예, 그건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하긴, 학교 내 선생들만 속이면 되는 거니까.‥가만, 그럼 어젯밤 우혁이가 했던 말이 혹시 이 일을 두고 한 얘기였어?
역시 재빠른 녀석이다.
“너 이거 우혁이한테 말했어?”
“예. 우혁이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미리 얘기해두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문제라‥일단 약속은 약속이니까.
“아니, 문제는 없는데. 우혁이는 놔두고 유인이를 보내도록 해.”
“유인이를요?”
“그래. 우혁이 그 자식은 가봤자 여자애들만 배려 놓을 거야. 신이는 공부중이고‥. 그러니 유인이가 적합하지 않겠어?”
“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혁이에게 꼬투리를 잡혔다고는 죽어도 말 못한다. 그런데 과연 유인이가 하려고 할까?
흐음, 민규가 시킨다면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하겠지만. 역시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든다.
그래도 봉급을 2배로 준다고 하면 녀석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오후에 패밀리들과의 미팅이 있습니다.”
“아, 오늘이 그날인가?”
패밀리들과의 미팅. 패밀리는 다들 알다시피 가족을 뜻한다.
가족. 즉, 우리 쓰래빠애들을 말하는 것이다. 미팅에서는 각 지역에 퍼져있는 대표들과 그간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이나
앞으로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토론을 한다.
미팅‥. 좀 있게 말하면 그것이지만 실지로는 채팅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한달에 한번씩 가지는 이 채팅은 우리 쓰래빠에게 있어선 아주 중요한 모임이다.
“이번엔 어느 장소에서 하기로 했지?”
여기서 장소라 함은 채팅을 할 싸이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드라마처럼 산다, 세시클럽입니다.”
“그래? 잘됐네. 저번에 했던 다흠이라는 곳은 어느 카페인지 몰라서 고생했었잖아. 거기라면 고생하지는 않겠군.”
몇 시간 뒤 회사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곤 다시 사장실로 돌아왔다. 지금 시각은 pm.2:20. 미팅은 2분 뒤에 시작된다.
사장실 안에서는 민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팅은?”
“방을 만들어놓았습니다.”
나는 민규가 빼내준 의자에 앉았다. 컴퓨터 LCD화면엔 허전한 채팅창이 떠있었다.
민규가 만들어놓은 채팅방은 방제가 [전국 고교 일진협회]로 [222]라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방이었다.
작업표시줄의 시계가 2시 22분이 되자 반가운 이름들이 속속들이 채팅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천]희웅’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부산]시백’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대구]호두’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광주]오노’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울산]히틀러’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대전]일성’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공주’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④
모두 모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들어온 저 공주라는 녀석은 누군지 모르겠다.
원래 미팅인원은 나까지 합해 총7명인데 지금 모인 인원수는 모두 8명이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터라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할 텐데‥. 설마 신이나 다른 아이들? 에이, 하지만 걔네들이 저런 대화명으로 들어올리는 더더욱 없다.
<font color=ff139>
공주 : <font color=black>여러분~하이루~방가방가!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쟤는 누구냐?
<font color=orange>
[대구]호두 : <font color=black>현아다. 지도 자꾸 하고 싶다카길래 데리고 왔다. 괘안체?
뭐야. 현아였잖아?
현아는 모두들 알다시피 호두의 애인이다. 어릴 적 나를 무척이나 따라다니던 그녀가 이제는 호두의 그녀가 된 것이다.
모두들 나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font color=brown>
[인천]희웅 : <font color=black>누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font color=blue>
[부산]시백 : <font color=black>내는 몸 건강한데, 니는?
<font color=orange>
[대구]호두 : <font color=black>개솔아~ 신이랑은 여전하제?
<font color=aaaa>
[광주]오노,[울산]히틀러,[대전]일성 : <font color=black>형님, 안녕하십니까!!!
시백이와 호두의 인사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녀석들 말하는 싸가지하고는.-_-
자판을 치는 내 손가락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너희들도 잘 지내지? 그럼 지금부터 미팅을 시작해볼까? 우선 인천은 어때?
<font color=brown>
[인천]희웅 : <font color=black>조용해요. 눈에 띨 만큼 성장하고 있는 조직도 없구요.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이번에 인천공항에서 마약을 들고 나가다 붙잡혔다던 그놈은 뭐야? 듣자하니, 땅파조직원이라면서?
<font color=brown>
[인천]희웅 : <font color=black>네. 하지만 땅파도 이제 거의 붕괴직전이라 문제될 건 없어요, 누님. 소문으론 현재 땅만 부지런히 파고 있다던데요.
우리나라에는 있지도 않을 석유를 찾는 대나 뭐래나.
세상엔 별 희귀한 인간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가벼이 여기면 안 될 것이다.
우리처럼 갑자기 성장해 뒤통수를 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요상한 녀석들이네. 좀 더 알아봐.
<font color=brown>
[인천]희웅 : <font color=black>네, 알겠어요. 누님.
<font color=ff139>
공주 : <font color=black>언니~ 들어오자마자 일이예요?
<font color=orange>
[대구]호두 : <font color=black>야야, 니는 좀 가만있어라. 지금 미팅 중이다 아니가.
<font color=ff139>
공주 : <font color=black>이게 무슨 미팅이야. 그냥 채팅이잖아.
<font color=black><b>
공주님께서 강제 퇴장되셨습니다.</b>
시끄러운 손님은 일찌감치 쫓아내는 게 상책이다. 현아가 강퇴를 당하자 잠시 채팅방 안이 조용해졌다.
뭐, 진짜 아주 잠시였지만 말이다. 곧 호두가 경악을 한다.
<font color=orange>
[대구]호두 : <font color=black>아악!! 현아야!!!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현아랑 따로 있냐?
<font color=blue>
[부산]시백 : <font color=black>rothflqkqh
<font color=orange>
[대구]호두 : <font color=black>아니. 옆에 있는데?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그런데 왜 오버하냐?
<font color=blue>
[부산]시백 : <font color=black>rothflahtsksdl
<font color=orange>
[대구]호두 : <font color=black>잼짜나.
저게 씨, 죽을라고. 도대체가 미팅진행이 잘 되지가 않는다.
게다가 시백이 저 녀석은 수전증이라도 생긴 건지 사람 성질을 더 돋우고 있다.
(개소리는 시백이가 영문으로 바꿔놓은 체 한글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야. 이시백!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가만히 좀 못 있냐??
<font color=blue>
[부산]시백 : <font color=black>어? 아. 미안.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개놈이 자판을 만졌다.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개놈? 그게 누구야?
<font color=blue>
[부산]시백 : <font color=black>내가 키우는 개.
후우. 자판을 치는 개라. 이시백, 내가 지금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잠시 먹고 자기만 하는 찌글이를 떠올린 개소리였다.)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알았으니까, 부산 상황이나 읊어봐.
<font color=blue>
[부산]시백 : <font color=black>부산은 항구도시답게 여전히 싱싱한 해산물들을 먹을 수가 있었다.
날씨도 따뜻해져서 관광객도 한 달 전보다 더 늘어났고 그래서 자갈치 시장은 언제나 장사진을 치른다.
<font color=brown>
[인천]희웅 : <font color=black>맛있겠네요.
<font color=teal>
[대장]개솔 : <font color=black>야.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조직 이야기를 해보라고!!
또다. 미팅 때만 되면 머리에 열이 나서 머리카락이 다 타버릴 지경이다.
이제 3개월째로 접어든 이 미팅은 아무래도 다음달까지 이어지지는 못할 것 같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 말을 안 들으면 한대씩 쥐어박으면서 이야기를 해야지만 끝이 나도 날 테니까.
어쨌든 1시간이면 충분할 이번 미팅도 2시간이 지나서야 결말이 났다. 서기를 담당하고 있던 민규도 마지막 정리를 마치고선
노트를 덮었다.
“형님, 차라도 내오라고 시킬까요?”
“응. 이왕이면 차가운 걸로.”
“알겠습니다.”
민규가 문을 닫고 나가자 사무실 안은 침묵으로 잠겼다.
물론, 민규가 있을 때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사람이 존재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차이라하면 아무래도 공기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에 잠긴 사무실 안을 바라보며 의자등받이에 등을 기대어본다.
끼익끼익. 좌우로 돌며 비서가 차를 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책상위에 놓인 전화기가 눈에 띠었다.
신이‥한테 전화나 해볼까?
라는 생각을 하던 나는 어느새 신이의 핸드폰 번호를 꾸욱꾸욱 누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귀에 가져다댄 수화기에서 연결 음이 들려온다. 그리고 잠시 뒤 신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보세요?”
“뭐해? 공부해? 난 회산데.”
오늘밤에 밖에서 저녁이나 먹자고 해볼까?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단 둘이 밥을 먹는 지도 꽤 된 것 같으니까.
“응. 공부해.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쉬어가면서 해.”
“응. 알아. 오늘은 몇 장만 더 본 다음에 일찍 자려고.”
일찍 자‥? 그럼 저녁 얘긴 꺼내지도 못하겠네. 아니야. 그래도 밥은 먹겠지?
“밥은? 아직 안 먹었지?”
“이따 먹을 거야. 유인이가 볶음밥 시켜놨거든. 너도 때 되면 챙겨먹어.”
김샜다.
이렇게 신이와의 데이트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이가 공부한다고 했을 때 말릴 걸 그랬나?
에이, 아니야. 겨우 밥 한번 못 먹은 것 가지고 실망하면 안 되지. 신이가 공부를 시작한 것도 다 나 때문이니까.
“그럼 밥 맛있게 먹어. 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갈 거야.”
“그래. 그럼 끊는다.”
“저기, 신아!”
뚜뚜뚜-.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이나 해볼까 했는데.
사랑해‥. 아니. 일찍 끊긴 게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닭살스러운 말을 생각 없이 하려고 했다니‥으으~.
하지만‥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지도 오래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 말을 했을 때가 언제였더라? 고‥3때였던가?
훗.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가 않는 시절이 되어버렸다.
그날 저녁. 7시가 되어 회사에서 나왔다. 우두머리인 나로서는 퇴근시간이 내 마음대로이지만 평소엔 9시가 되어야지만
모든 일이 끝난다. 그에 비하면 오늘은 꽤 일찍 마치는 것이다. 이런 날은 데이트하기에 딱인데.
배웅을 나온 부하직원들이 문을 사이에 두고 두 줄로 나란히 선 체 허리를 굽히고 있다. 빌딩 앞에 미리 대기 시켜놓은 벤츠가 보인다.
하지만 한대가 아닌, 두 대였다. 검정색과 흰색. 내 기억대로라면 검정색이 우리 것이다.
빵빵!
흰색벤츠에서 울린 클랙슨 소리였다. 서서히 차창이 내려가고 드디어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일찍 마치시는 군요. 마치신 거 맞죠?”
유난히 튀는 머리색. 소이켠이다. 저 사람은 또 왜 온 거지? 민규가 내 옆에 서서 그를 유심히 바라본다.
표정 없는 얼굴이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감정은 그리 좋지만은 못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소이켠은 생글생글 표정이 밝기만 하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어쩐 일은요. 사장님 얼굴이나 볼까 해서 온 거죠. 마치신 게 맞다면 댁까지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실 순 없겠습니까?”
닭살이다. 하지만 듣기 거북한 말투는 아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전 그냥 제 차로 갈게요.”
“지금. 꽤 심심하잖아요.”
정곡을 찌른 말에 순간 움찔하였다. 내 얼굴로 향한 민규의 시선이 느껴진다.
“심심하긴요.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그런 걸 느낄 겨를이야 있겠어요?”
“글쎄요. 얼굴은 영 아닌데요? 심심해. 놀고 싶어. 이렇게 일찍 끝마친 날엔 놀면 딱일 텐데. 그렇게 말하고 있네요. 얼굴이.”
날 꾀 뚫어 보는 듯한 소이켠의 눈빛에 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부하들은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또 한번 떨어졌다.
“마침 티켓이 2장인데 차에 탄 인원은 저 한 사람뿐이네요. 거기 아가씨, 제 차에 타지 않겠어요?”
나를 향해 쉴 새 없이 미소를 흘려보내는 저 남자. 그가 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난 생각해본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저 분은 나쁘게 대하실 것 같진 않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민규가 내뱉었다. 이런 일에 있어선 언제나 무관심했던 민규가 말이다.
“그치만‥.”
“신이에겐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는 즐겁게 노시다가 오십시오.”
어느새부터인가 태기의 몫까지 도맡아 해오던 민규가 허락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민규가 신이에겐 비밀로 하겠다는 말처럼 내가 소이켠의 제의에 선뜻 응하지 못했던 건 아마 신이 때문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민규가 생각하고 있을 듯이 소이켠과 나는 어떠한 감정으로 인해 만나는 것이 아닌지라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한번.
그래. 이번 한번만 노는 건 괜찮겠지.
“그럼 조금만 놀다가 올게.”
“예, 형님. 다녀오십시오.”
조수석 차문을 열고 검정색이 아닌 흰색 벤츠 안으로 들어갔다. 소이켠은 내가 안전벨트를 다 멜 때까지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벨트를 완전히 메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깥 백미러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규와 부하들이 보인다.
“연주회 좋아하세요?”
소이켠이 말한다. 연주회라‥. 흥미 없다.
“아니요. 따분할 뿐이예요.”
“진짜요? 그거 잘됐네요. 전 또 여자들은 그런 걸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요. 저도 연주회엔 관심이 없으니 이건 버리도록 하죠.”
차창을 열고선 티켓을 창밖으로 휙 던져버린다. 바람에 날아가는 값비싼 티켓을 보자니 기분이 시원해진다.
“그럼 콘서트나 보러 갈까요?”
“콘서트요?”
“설마 제가 잘 나가는 기획사의 대표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저희 회사 가수 중 진화라는 그룹이 오늘 콘서트를 열거든요.
지금쯤이면 시작했겠네요. 콘서트는 좋아하시죠?”
가수. 진화.
잘생긴 여섯 남자들로 이루어진 초 절정 꽃미남 그룹. 콘서트엔 관심 없지만 꽃미남이라면 큰 관심이 있지.
난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소이켠의 흰색 벤츠는 방향을 틀어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는 세종대왕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우리가 콘서트 장에 도착한 것은 콘서트 1부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우리는 뒤늦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소이켠의 직위를 이용해 특석에 앉았다. 무대 바로 앞에서 가수를 보고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좋은 자리에 앉아 좋은 가수를 볼 수는 있지만 좀처럼 기회가 나질 않았다.
더군다나 콘서트를 보러 온다는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고 말이다.
“꺄아악!! 옵빠-! 해성오빠!!”
“에뤽짱! 에뤽짱!!”
내 뒤쪽에 앉은 아이들은 신해성과 문에뤽의 팬으로 추정된다.
난 다 좋지만 왠지 김동안한테 조금 더 끌린다. 특히 저 근육에. 시백이보다 더 탄탄해 보인다.
**********
난 가수들의 댄스무대를 보며 환호하는 그들의 팬들에 동화되어 함께 소리를 지르고 노래도 따라 불렀다.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다. 지금까지 내가 보내온 학창시절이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하더라도
가수를 좋아하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고 군것질을 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그런 마음은 남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만약, 다시 10대로 돌아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난 어떻게 할까? 어떠한 삶을 살까?
이들처럼 학교에 다니며 친구를 사귀고 수업시간엔 졸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맑은 정신으로 밥을 먹고,
숙제를 해오지 않아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사먹고 집에서는 tv를 보고
컴퓨터를 하고 다음 날이 되면 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
후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건 마치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후회하는 꼴이다.
난 정말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아아악!! 주차장에 진화오빠들이 있대!!!”
세 시간 가량의 콘서트가 끝나고 많은 인파들을 뚫고 간신히 콘서트 장 밖으로 나온 우리는 또 한번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지하 주차장에 가수가 있다는 소식을 팬들이 접하게 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주위의 팬들이 일제히 주차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아-!!”
도대체 연약해 보이는 여자애들은 저 어마어마한 괴력을 어디에 숨기고 있는 것일까?
척 봐도 중, 고등학생인 여자애들은 한번만이라도 가까이에서 가수를 보기 위해 주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죽자 사자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그 현장은 과히 무섭기까지 했다.
타다다닥!!
“조심.”
그때 뒤에서 무섭게 달려오는 사람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나를 소이켠이 잡아주었다. 하마터면 심하게 부딪힐 뻔했다.
“괜찮아요?”
소이켠이 묻는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다. 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그의 손을 빼내었다.
“네. 고마워요.”
묘한 분위기다. 아니, 위험한 분위기다. 나를 응시하고 있는 소이켠의 눈빛이 이상하다.
저 눈빛은 신이가 나에게 고백을 하던 그 눈빛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난 그의 차가 있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붙잡아버리는 그가 아닌가! 위험하다, 상당히 위험하다.
그가 어떤 소리를 할지 몰라 차마 그의 얼굴을 보기가 심히 두렵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벙어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소이켠이 말했다.
............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⑤
“차는 그쪽이 아니라 저쪽에 있어요.”
소이켠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지하주차장을 가리키고 있다. 불안하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휴우, 고백 같은 게 아니었잖아?
그렇지만 아까의 그 눈빛은 정말 3년 전 신이의 눈빛과 동일했는 걸? 왠지 이쯤에서 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주차장은 좀 그렇죠? 앞 뒤 안 가리는 꼬마아가씨들한테 밟힐 지도 모르니까요.”
내 등을 떠밀며 내가 멋모르고 가려고 했던 방향(그쪽)으로 걸음을 돌리는 소이켠이었다.
이 사람, 차를 두고 어디로 가려는 걸까? 이런 내 의문을 눈치 채기라고 한 듯 그가 알려주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셨으니 배가 고프겠죠? 뭐 먹을까요? 이 근처에 스파게티를 맛있게 하는 곳이 있는데, 그리로 갈까요?”
밥? 안돼! 밥 먹으면 오래 마주 보고 있어야 되잖아. 난 두 발을 땅에 고정시키고 섰다.
“앗, 아니요! 전혀 배고프지 않아요!”
배‥많이 고프지만 어쩔 수가 없다. 밥은 집에 가서 먹는 수밖에.
“머리는 그렇게 말하나 보죠? 얼굴은 아닌데.”
“네?”
“얼굴은 ‘무지무지하게 배고파’라고 말하는 데요? 지금.”
이 사람, 회사 앞에서도 그런 소리를 하더니만. 이거 계속 들으니까 짜증나면서도 느끼해서 속이 매스껍잖아?
“진짜! 생각 없어요.”
난 거짓말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우겼다. 그에 소이켠이 자신의 의견을 조금은 굽히는 건가 싶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좋아요! 갑시다.”
“잠깐. 어디 가는 거예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나를 강제로 끌어당기며 걸어가는 그였다.
난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길을 걷고 횡단보도를 건너 내 발이 멈춘 곳은‥.
“편의점이예요.(씨-익)”
편의점이다.
소이켠은 컵라면 왕냄비 2개와 김밥 2줄, 포장 김치 1개를 사들고 테이블로 왔다.
편의점 안. 우리 두 사람은 바깥을 쳐다보며 라면을 삼켰다. 뭐, 마주 보는 것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비어있던 뱃속이 조금씩 차고 있으니까.
“얼굴이 말하더라구요. ‘스파게티는 싫어. 얼큰한 게 먹고 싶어!’라구요. 하핫.”
웃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투명한 창으로 길 건너 지하주차장에서 나오고 있는 학생들이 보인다. 그 중에는 울고 있는 아이들도 있고
바닥 위를 껑충껑충 뛰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똑같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고 저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감정에 휩싸인 아이들.
지금의 나는 희노애락 중 애(哀)에 속한다. 아아-, 울고 싶어라.
왜 갑자기 소이켠에게 부담을 느끼게 된 것일까?
“소문을 듣자하니 조직원이랑 연애 중이시라면서요?”
그래. 그건 이 남자가 애(愛)의 얼굴로 나를 대하기 때문이었지.
“그 말, 듣기에 좀 그렇군요.”
라면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소이켠은 다 먹은 건지 젓가락을 놓는다.
“아.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시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잠깐! 소이켠이 정말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면 신이와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말할 필요가 있어.
그럼 자기도 포기하겠지.(소이켠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아예 단정 지어버린 그녀였다.)
“됐어요. 그 소문 틀린 것도 아니니까.”
“그럼 역시 상대는 새신인가요?”
“네, 맞아요. 사귄지 3년이나 됐죠.”
그 기간 속엔 커다란 공백이 있었지만, 그냥 3년이라고 치자. 길면 길수록 자기도 들어올 자리는 없다고 깨닫게 될 거야.
“3년씩이나요? 그럼 새신이 강호에 있을 때도 계속 사겨왔다는 겁니까?”
윽. 찔리는 질문이다. 하지만‥그냥 그렇다고 치자.
“네! 물론이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구요.”
“흐음‥대단한 자신감이네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묻어났다. 저 미소의 의미는 뭐지? 도대체 뭐야? 괜히 기분 나쁘네.
“뭐라구요?”
“아니. 부럽다는 뜻이예요. 하하. 다 드셨으면 이만 나갈까요?”
쓰레기를 대강 처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로 걸어가는 소이켠이다.
편의점에서 보았던 그의 미소. 본인은 부럽다고 했지만 그 미소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콘서트 장 앞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눈빛과 편의점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미소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요즘에서 잘해주나요? 애인이.”
횡단보도 앞에선 그가 물었다. 그리고 내 입술은 대답을 하기 위해 떨어졌다. 아주 무겁게.
“‥그야, 당연하죠.”
“훗, 그렇겠군요. 3년씩이나 되는 못 볼 거 다 본 사이니.”
소이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파고든다. 3년이라지만 그 중의 2년은 신이와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고 지금은 서로의 일 때문에 집에서 얼굴을 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싸그라든 것은 아니다. 신이는 몰라도 나는 절대 아니다.
“녹색불이예요. 갑시다.”
가만히 서있는 나에게 한쪽 손을 내밀어 오는 그였다. 하지만 내가 그 손을 잡을 이유가 없다.
“아니요. 전 택시 타고 갈게요.”
난 그렇게 말하곤 때마침 오고 있던 택시를 붙잡았다.
“연사장님!”
난 소이켠이 잡을 새도 없이 택시에 올랐다. 부우웅-. 택시는 출발했고 그는 점점 멀어져갔다.
젠장. 저 사람 때문에 마음만 심란해졌다. 그리고 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난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마음속으로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설사 우리가 엣날 같지 않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만은 옛날과 다를 게 없어. 난 신이가 좋아. 신이가 좋아. 신이가 좋아.’
그래‥난 여전히 신이가 좋다.
다음날 아침.
벌컥! 욕실 문이 열렸다. 유인이가 들이닥쳤다.
“개소리, 그게 진짜야?”
문을 박찬 것에 비해 열심히 양치를 하고 있는 나에게 얌전히 묻는 유인이다. 난 입안에 든 거품을 세면기에 뱉어내었다.
“진짜라니, 뭐가?”
“학교!”
민규가 그 단세 이야기한 모양이다. 하긴, 내일부터 가야 할 테니까.
난 칫솔을 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너무해. 왜 내가 가야 돼? 우혁이도 있잖아. 공평치가 못해.”
우혁이한텐 캥기는 게 있어서 그럴 수가 없어. 미안하다, 유인아.
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가락 2개만 펼쳐 보였다. 2배. 월급을 따블로 준다는 뜻이다.
유인이는 금세 알아들었다.
“하는 수 없지. 최선을 다할게.”
돈만 많이 주면 뭐든지 다 하는 녀석.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과연 유인이는 돈을 얼마나 모았을까?
어쨌든 월급 2배로 유인이를 설득시켰다. 유인이가 나가고 난 양치를 마무리 지었다.
어젯밤,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땐 역시나 신이는 자고 있었다. 다 씻은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 문 옆에 서있는 신이가 보인다. 신이는 컵을 들고 있었다. 요즘 내가 자주 마시는 생과일주스다.
“어제 과일장수가 집 앞에 왔길래 조금 사놓은 거야.”
신이가 건네는 컵을 받아들었다. 오렌지주스다.
“네가 직접 간 거야?”
“믹서기가 갈았어.”
신이가 만든 과일주스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역시나 맛이 묘하다.
“맛있어?”
“음‥어, 맛있네.”
“대답에 망설임이 느껴지는데. 뭐, 상관없어. 믹서기가 간 거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조금은 맘 상한 얼굴이다. 후훗, 귀여운 녀석. 난 묘한 맛이 나는 주스를 모두 마셔주었다.
“다시 보니깐, 꽤 먹을만 하네. 아니, 맛있어.”
“정말이야?”
뻥이다.
하지만 신이의 기분이 풀린 것 같으니 아무래도 좋다. 난 한번 웃어보이곤 컵을 가져다 놓기 위해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나를 향해 신이가 깜짝 발언을 했다.
“나 오늘부터 학원에 다닐 거야.”
정말 깜짝 발언이었다. 학원에 다닌다니‥. 고갤 돌려 신이를 보았다.
“학원?”
“응. 혼자 하니깐 역시 힘드네. 조금 오버인가?”
신이가 학원까지 다니면 얼굴 보기가 더 힘들어 질 텐데. 가지 말라고 할까? 말리는 게 좋겠지?
“오버는 무슨.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은데, 뭐.”
“다행이다. 난 또 네가 말리면 어쩌나 했거든.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역시 붙잡지 않는 게 좋겠다. 신이는 지금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
그래도 왠지 섭섭한데‥?
“공부한다는데 내가 왜 말리냐? 진작에 학교 다닐 때 열심히 하지. 그래도 늦게나마 공부에 흥미를 붙여서 다행이다.”
“흥미라‥. 하긴, 좋아서 하는 거니까 틀린 말도 아니네.”
혼자서 중얼거리는 신이다. 공부가 좋다는 거겠지?
3년 전엔 신이가 공부를 좋아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왠지 공부라는 녀석에게 질투가 난다.
공부야, 신이가 너보고 좋아한댄다. 쳇.
하지만 일요일까지 공부에게 신이를 뺏길 수는 없다.
“신아. 우리 이번 주 주말에 산에나 갈까? 운동 겸 말이야.”
“주말? 미안하지만 주말에도 학원에 있을 것 같은데.”
윽. 뺏겼다.
신이는 굉장히 미안한 얼굴을 해보였다. 부담을 줄 수는 없어. 난 검게 타는 속이랑은 다르게 겉으론 웃어보였다.
“그래? 괜찮아. 그럼 난 밀린 일이나 마저 해야겠다. 우리 둘 다 힘내자.”
“‥어. 그래.”
정말이지, 울고 싶다.ㅠ_ㅠ 꺼이꺼이-.
며칠 후 일요일.
한가한 일요일이다. 오늘 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로 나왔다. 집에 있어봐야 따분하기 때문이다.
민규는 오랜만에 부모님이 계시는 수원으로 갔다.
심심하다, 심심해.
이번에 개봉한 ‘마후라 휘날리며2’도 보고 싶고 베스킨로빈슨의 체리탱고도 먹고 싶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은 건 많은데‥문제는 혼자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난 괜찮지만 왠지 남들의 눈에 내가 처량해 보일까봐 그것이 싫다.
부하들이나 데려갈까? 아니야. 녀석들은 또 ‘형님, 형님!’하면서 날 곤란하게 만들 거야. 역시 이런 건 애인이랑 하는 게 딱이겠지?
‥그렇지만 신이는 학원에 있는 걸? 방해할 수는 없어. 그럼 가까이에 있는 유인이를? 그 녀석은 학교 일 때문에 피곤하다고
뻗어버려서 싫다고 할 거야. 하지만 우혁이는 한가하겠지?
핸드폰 폴더를 열고 우혁이의 번호를 눌렀다.
“형님, 왜?”
금방 받아버리는 우혁이다. 주위가 시끄럽다.
“너 어디냐?”
“여기? 커피숍! 형님아, 나 지금 중요한 미팅 중이거든? 나중에 통화하면 안 될까?”
“중요한 미팅?”
“응! 여자들이 장난 아냐. 예쁜 대다가 엄청 웃겨. 벌써 다 나한테 뻑간 것 같아.”
그 미팅이었구만.
우혁이도 이미 다른 곳에서 신나게 노는 중이었다. 난 녀석의 부탁대로 전화를 끊어주었다.
역시나 이럴 때 나와 놀아줄 이는 그 녀석밖에 없는 건가? 나는 무작정 떠오르는 번호를 차례차례 눌러대었다.
그리고 신호가 울렸다. 뚜르르르-. 달칵.
“여보세요?”
드디어 번호의 주인이 전화를 받았다. 난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태기야, 나다!”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⑥
전화 반대편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아‥나 좀 봐. 내가 지금 어디에 전화를 건 거야? 태기라니‥바보.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여보세요? 이상하네.”
뚜뚜뚜뚜-.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태기를 떠올렸고 그래서인지 태기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탁. 폴더를 닫고서 가만히 핸드폰을 응시했다.
“태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혼잣말로 중얼거려본다. 그래, 태기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심심하지는 않았을 거야.
난 의자를 뒤로 돌려 바깥을 보았다. 오늘도 하늘은 파랗다.
저 위에 태기가 있겠지? 비행기 타고 올라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변태 녀석, 넌 지금 뭐하고 있냐?
얼마나 심심하고 따분했으면 이런 잡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내 신세가 처량하다. 그냥 운동이나 하면서 땀이나 뺄까?
Rrrrr. 결국 남아도는 시간을 운동으로 때우려는 방향으로 생각을 몰고 있으니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소이켠이다.
요즘 들어 연락이 너무 자주 오는 것 같다. 통화해보면 중요한 용무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난 전화를 받았다.
“네. 연개소리입니다.”
“저 소이켠입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하핫.”
이번에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날씨는 어제도 좋았죠.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은요. 꼭 일이 있어야지만 전화를 거나요. 그냥 날씨가 좋다구요.”
이런 씨. 그건 나도 봐서 안다고! 사람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정말 짜증나는 인간이다.
“할말 없으면 끊을 게요.”
“아앗! 잠깐만요! 영화 볼래요??”
“영화‥요?”
“예. 마침 영화표 2장이 생겼거든요.”
“무슨 영환데요?”
“마후라 휘날리며2요. 보셨어요?”
마후라 휘날리며2.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다! 이거 대단히도 달콤쌉살한 유혹이다. 어쩌지? 보자고 말할까?
다시 한번 창밖 하늘을 올려다본다.
“보셨나보군요‥.”
“아니에요! 안 봤어요! 그 영화 정말 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요?”
에라이, 모르겠다. 주말에 그것도 이렇게 맑은 날씨에 ‘마후라 휘날리며2’까지 전혀 망설일 이유가 없다.
상대가 누구이던 간에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소이켠과 나는 1시간 뒤 영화관 앞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마후라 휘날리며2’가 상영하고 있는 영화관 안이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로 마후라를 목에 맨 주인공의 고달픈 일생을 그리고 있다.
“피융-. 피융-. 쿠아아앙!!!”
오오! 이 고막을 뒤흔드는 우렁찬 사운드. 그리고 잘생긴 남자배우의 격렬한 격투씬!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영화를 지금에서야 볼 수 있게 되다니. 하지만 바로 옆에서 직설적으로 보내오는 시선은 정말이지
신경에 거슬린다.
“영화 안 보세요?”
견디다 못해 소이켠에게 물었다. 그러자 싱긋 웃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시사회 때 봤어요.”
시사회?
쳇! 그럼 주인공인 장덩건도 봤겠군. 역시 기획사 대표는 다르다는 건가?
난 소이켠이 보던 말든 신경을 끄고 영화에 집중을 했다.
“내 마후라는 내꺼야! 그 누구의 것도 될 수가 없어!”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였다.
저 남자‥정말 멋지잖아?!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에서 나온 뒤에도 난 주인공의 멋진 외모에 흠뻑 취해있었다.
멋진 건 얼굴뿐만이 아니라, 배짱 또한 훌륭했었다. 위험한 순간에도 자신의 마후라를 지키기 위해 탱크 앞으로 뛰어들던
그 무모함까지도 멋있었던 것 같다.
“어땠어요? 영화에 완전 빠진 것 같던데.”
길을 걸으며 소이켠이 물었다. 난 두 말할 나위 없이 엄지손가락을 척 펼쳐보였다.
Wonderful!
“하하하. 다음엔 방송국에 데려가줄게요.”
“네? 정말요??”
“네. 정말요. 하하.”
젠장. 너무 고맙다.
돈이 있어도 방송국에 들어가긴 힘이 들던데. 물론, 시도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어쨌든 좋은 빽을 둔 것 같은 기분이다.‥엥? 빽? 소이켠이? 나도 참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힘이나 능력이나 뭐로 봐도 내가 월등한데. 하긴,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이젠 놀이공원에나 가볼까?
난 소이켠에게 놀이공원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에 그는 흔쾌히 응했다. 소이켠의 차를 타고 도착한 놀이공원.
휴일이라 그런지 인파가 꽤 많이 모였다.
“못 타는 거 없으시죠?”
“당연하죠! 설마 이런 애들 장난감을 타면서 겁을 내겠어요? 아하하!”
난 아주 크게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 결과는‥빌어먹게도 우스운 꼴이 되고야 말았다.
“끼아아악!! 내려줘!! 내려 달라고오-!!”
부메랑, 탑스핀, 번지드롭, 자유로드드롭, 스피디, 바이킹 등등.
놀이공원에 있는 놀이기구를 모두 탔기는 했지만 내 몸과 마음은 끝내 녹초가 되었다.
특히 바이킹을 탔을 땐 꼴에 그것도 배라고 멀미가 나서 호되게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베스킨로빈슨의 체리탱고를 먹음으로써 말끔히 해결되었다. 오늘 하루 꽤 즐거웠다.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비록 신이와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소이켠은 나에게 저녁까지 사준 뒤 집 앞까지 태워다주었다.
집 앞. 아무도 없다. 오늘은 우혁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달칵. 소이켠이 먼저 내린 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다음에는 제가 밥이라도 한 끼 사도록 할게요.”
차에서 내린 뒤 소이켠에게 말했다.
“고맙긴요. 다음에도 놀아줄 사람이 없으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하지만 그땐 편안한 오빠, 동생이 되었으면 하네요.”
오빠와 동생사이? 이 사람은 그러기를 원하고 있었구나.
그럼 뭐야? 내가 걱정하고 있었던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야? 하여튼 나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난 소이켠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는 게 좋겠네요. 하긴, 사장님과 사장님은 놀기엔 좀 그렇죠? 다음엔 오빠라고 부를게요.
나이도 2살 밖에 차이가 안 나니까요. 그럼 이제 소오빠, 아니 이켠오빠라고 해야 하는 건가요? 하하.”
..........
손이 무안하다. 왜 악수를 안 받아주는 거야? 자연스레 벌어지던 입술도 이제는 경직되어만 간다.
무안하다, 진짜 무안하다. 그냥 손을 내려버릴까?
그때 다행스럽게도 소이켠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게 좋겠군요. 소오빠는 좀 우습죠.”
“네? 그렇죠. 하하. 그럼 들어 가볼게요.”
난 손을 얼른 떼버리곤 대문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소이켠이 나를 부르는 이 시점에서‥.
“개소리씨.”
우뚝. 두 발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난 이렇게 부르면 되겠지?”
“네? 네‥그러세요.”
“하지만 역시‥오빠라는 호칭자체가 우스운 것 같아. 너도 나한테 이켠씨라고 불러줘.”
이‥이켠씨? 그건 왠지 좀 연애틱하지 않은가?
난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튀어나올 소이켠의 대사가 말이다. 그리고 착각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왠지 현실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네가 좋아. 너의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죽-너만 바라보고 살았어.”
“저‥저기.”
“대답은‥하지 말아요. 다음에 만나면 그때 해주세요.”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 뒤 그는 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소이켠은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고선 점점 멀어져 갔다.
역시‥역시 내 예감이 맞았다. 그때의 눈빛과 미소는 바로 이런 뜻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소이켠이 정말로 날 좋아하다니.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였다니. 이제 난 어떻게 해야 되지?
아니. 뭐라고 거절해야 좋지?
“그래서 대답은 OK냐?”
그때 어둠 속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가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면, NO냐?”
신이다.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⑦
딩동딩동.
신이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대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난 죄인마냥 그런 신이를 가만히 쳐다만 볼 뿐이다.
하필이면 그때 신이와 마주치다니, 이게 무슨 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내 대답이야 어떻든 간에 소이켠의 차를 타고 온 걸 봤으니 많이 화가 나있을 것이다.
“누구쇼?”
“나야.”
스피커를 통해 우혁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신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곧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신이가 안으로 들어간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일단 신이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 오해를 풀어줘야만 한다.
난 시간을 오래 끌수록 좋지 않다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해 신이를 붙잡았다.
“신아, 화난거야? 화내지마. 난 그 사람 조금도 마음에 없으니까. 응?”
“그럼 왜 싫다고 말 안했어? 그 자식은 너랑 나랑 사귀는 거 모른 대냐?”
내가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해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혼란스러워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오해 같은 건 하지 마.”
“오해? 그 자식이 너보고 좋아한다고 말 한 것도 오해냐?”
“‥‥‥.”
난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많이 흥분한 신이에겐 그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후‥아니다. 모처럼 쉬는 주말에 학원 핑계대고 놀아주지 못한 내가 잘못이지.
됐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신아!”
쾅!
현관문을 힘 있게 닫아버리며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치.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왜 화부터 내고 난리람. 속 좁은 녀석인지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그래도 오해는 풀어야 할 텐데‥.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꼬여버렸을까? 난 힘없이 한숨을 내쉬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는 유인이와 우혁이가 보인다. 신이는 2층으로 올라간 모양이다.
“형님, 다녀왔어? 낮에는 진짜 미안.”
그래. 우혁이 네가 나하고 놀아줬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그 누굴 탓하리오. 난 고개를 푹 숙인 체 내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신이도 그렇고 형님도 그렇고 둘 다 왜 저러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체 방으로 올라간 신이와
맥 빠진 모습으로 울상인 개소리의 얼굴을 본 우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에 그의 옆에서 사과 한 조각을 한 입 베어 물던 유인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 날인가?”
이는 한달에 한번 있는 여자들만의 의식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이도?”
“그것도 옮는다던데.”
“진짜? 넌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우리 학교 여학생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여학생은 현재 유인이 체육교사로 있는 춘자고교의 학생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유인은 막상 학교라는 단어를 꺼내고 나니 내일부터 시작될 악몽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숨을 내쉰다.
“후우-. 학교 가기 싫어.”
***********
아침.
가방을 메고 현관을 막 나서고 있는 신이가 보인다. 아침밥을 먹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신이.
아직도 어젯밤 일 때문에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난 신이가 나가버리기 전에 인사를 했다.
“학원 잘 다녀와!”
탕. 냉정하게 문을 닫아버리고 나가는 신이었다.
녀석,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왜 화를 내고 그러냐? 내가 그 남자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그 남자가 나한테 고백한 건데.
‥으-, 나도 알고 있다. 신이가 화가 난 것은 내가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당시엔 너무 혼란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당황스럽기만 했었다. 그리고 정신을 바로 잡았을 땐
이미 가버리고 없는 것을!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아침부터 속이 타들어간다.
아아악!! 고함 한번 크게 질렀음 좋으련만.
“신이랑 싸웠어?”
난 호텔로, 유인이는 학교로 출근을 하기 위해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열고 나오며 유인이가 물었다.
“안 싸웠어. 학교는 재밌어?”
그래. 싸웠다고 볼 순 없지. 신이가 일방적으로 삐진 거니까.
“하나도 재미없어. 선생님들도 짜증나고.”
“누가 들으면 네가 학생인 줄 알겠다? 학교 학생들은 어때?”
“남자들은 건방지고 여자들은 무서워.”
쯧쯧. 그 학교엔 문제아들이 많다더니만 사실이었나 보군. 난 힘내라는 의미로 유인이의 어깨를 토닥여주곤 차에 올랐다.
유인이 또한 부하가 모는 또 다른 승용차에 탔다. 이렇게 우리 둘은 각자의 길로 향했다.
럭셔리호텔 사장실.
오랜만에 호텔을 찾은 지라 내가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점심때가 될 때까지 처리한 서류는 얼마 되지가 않는다.
그만큼 신이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형님, 식사하러 가시죠.”
민규가 사장실로 들어와 나에게 말했다. 점심밥‥. 이대로라면 음식도 입에 들어오지가 않을 것 같다.
“아니. 너 혼자 가서 먹어. 난 별로 생각이 없네.”
“어디 편찮은 데라도 계십니까?”
“아냐. 그냥 배가 안 고파서 그래. 나가봐.”
“‥예. 알겠습니다, 형님.”
민규가 나가고 난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내가 누른 열한자리 숫자는 신이의 핸드폰 번호였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가 가고, 또 가고. 끝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버렸다.
이어 전화를 두 번이나 더 해보았지만 일부러 내 전화를 피하는 건지 수업중인지 신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만약, 첫 번째가 맞다면 신이는 좀팽이다. 탁! 답답함에 수화기를 내팽겨 쳤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난 어느새 일의 근원지인 소이켠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래. 느닷없이 그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딱 잘라 거절을 하고 신이의 오해를 풀어줘야만 한다. 여기까지 생각을 한 나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곤
소이켠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아주 짧게 울렸다. 소이켠이 금방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저 개소리예요. 어젯밤의 대답을 해드리려고요. 지금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 예, 물론이죠.”
소이켠은 호텔 앞으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 없이 호텔 앞에 있는 1층 커피숍으로 와달라고 했다.
그곳에서 난 그에게 내 의사를 똑똑히 전할 것이다. 그의 마음은 고맙지만 어쩔 수가 없다.
20분 뒤 소이켠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난 호텔에서 나와 커피숍으로 향했다.
럭셔리 커피숍은 건물 1층이었고 2층과 3층은 럭셔리 학원이라는 학원이었다.
커피숍으로 들어간 나는 쉽게 소이켠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엔 잘 주무셨어요?”
소이켠이 첫인사로 내게 건넨 말이었다. 덕분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샜어요.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네. 그럭저럭요.”
곧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왔다. 하지만 주문할 생각은 없다. 이곳에 오래 앉아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내 얘기를 듣는 소이켠의 얼굴에 긴장이 서려있다. 그도 어느 정도 내 대답을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전‥신이가 좋아요. 아니 사랑해요.
소이켠씨. 소사장님. 우리 앞으로는 사적으로 만나는 일 따윈 없었으면 좋겠네요. 어젯밤엔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전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니요. 전 신이가 아님 절대 행복해지지 못할 거예요. 제 대답은 이게 전부예요. 할 일이 많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럼‥.”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소이켠은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 팔을 잡아버리는 소이켠이다.
“어떻게 그리 쉽게 말씀하실 수가 있죠? 고작 하룻밤동안만 생각하신 거잖습니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세요!”
“이러지 마세요. 제 대답은 신이를 만난 3년 전부터 이미 정해져있었어요. 죄송합니다.”
“개소리씨! 개소리!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나야! 나라고!!”
나를 붙잡은 소이켠은 흥분할 대로 흥분해있었다. 커피숍 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난 주먹을 쥐었지만 날리지는 않았다. 그건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나를 대신해 소이켠을 날려버린 사람이 나타났다.
퍼억!! 쿠당탕!
소이켠은 소파를 밀어버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신‥신아?!”
그는 바로 신이었다. 신이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때 문득 커피숍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건물 간판이 떠올랐다. 2층과 3층은 다름 아닌 학원이었다.
그럼 신이가 이 건물 학원에 다닌다는 거야? 신이가 입술에 난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고 있는 소이켠에게 소리쳤다.
“너 이 기집애랑 키스해봤냐?”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⑧
에엑? 저 애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난데없이 그런 건 왜 묻는 거냐고.
신이의 엉뚱한 질문에 어벙벙해진 소이켠은 두 눈을 크게 뜬 체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대답 없는 그에게 신이가 또 한마디 했다.
“그럼 얘랑 포옹은 해봤냐?”
커피숍 안의 손님들이 시선을 모으고 있는 지금. 두 사람의 중간에 낀 자체가 민망하기만 하다.
소이켠은 두 번째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얘랑 바닥에 누워서 별 본 적은 있냐?”
이번 역시 고개를 흔든다.
“얘랑 남의 집 옥상에서 빨래 훔쳐 본 적은 있냐?”
“얘랑 등교는 해봤냐?”
“얘 업어 본 적은 있냐?”
.............
계속되는 신이의 질문은 한결같이 유치하기만 했다. 왜 그런 걸 묻는 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이켠은 그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말 대신 고갯짓으로 말이다.
신이는 소이켠이 단 한번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우며 질문의 마무리를 지었다.
“난 다 해봤어. 얘랑 키스도 해봤고 껴안아도 봤고 별도 봤고 같이 학교도 가봤고 비 오는 날 업어도 봤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아냐?”
소이켠은 일어서지도 않은 채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대답 없는 그에게 신이가 말했다.
“굴러온 돌과 박힌 돌의 차이라는 거다. 알겠냐?”
굴러온 돌이라 하면 소이켠을 뜻하는 것일 테고 박힌 돌이라 하면 신이 본인을 뜻하는 것일 거다.
신이의 해석을 들은 소이켠이 피식 웃어 보인다. 그를 본 신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가 우습냐? 내 말이 틀리다는 거야?”
소이켠은 말없이 재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들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이어서 라이터 뚜껑을 열고 불을 붙이는 그다.
담배를 피워대는 그를 향한 신이의 눈빛이 매섭다. 또 언제 날릴지 모르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말이다.
“후-, 굴러온 돌이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굴러온 거겠지.
그리고 제 구실도 못하는 박힌 돌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잖아. 안 그래?”
“이 자식이!”
소이켠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신이의 신경이 날카로워 졌다. 그래서 인지 언성을 높였고 불끈 쥔 주먹을 소이켠에게 뻗으려 했다.
하지만 또 한번 그를 때려서는 안 된다. 아무래도 내가 찬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소이켠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안돼! 그만둬!”
상대를 감싸는 나의 행동에 신이의 주먹이 눈앞에서 멈췄다. 신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금 뭐하는 거냐?”
“때리지 마. 내가 이 사람의 마음을 거절했으니깐 때릴 필요가 없잖아! 그만해.”
“비켜.”
나지막이 내뱉은 신이의 한마디였다. 하지만 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싫어.”
“비키라고!”
“싫다고 했잖아! 네가 깡패야?! 왜 자꾸 그‥아.”
이런‥말이 헛 나와 버렸다. 이게 아닌데‥. 그렇지만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미안.”
“잊었냐‥? 나 깡팬 거. 그런데 너랑 그 새끼는 언제부터 깡패에서 사업가가 됐냐?
‥쳇, 아니다. 그만 하자.”
“신아.”
나가버렸다.
커피숍을 빠져나가는 신이의 뒷모습이 아프게만 느껴졌다.
갑자기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 돼버린 거지? 설마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 온갖 불안들이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매스꺼운 담배 향이 내 코를 자극시킨다. 어느새 바닥에서 일어난 소이켠이었다. 난 뒤돌아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괜찮으세요? 대신 사과드릴게요.”
신이가 한대 때린 것에 대한 사과였다. 소이켠이 신이에게 맞았던 왼쪽 뺨을 만진다.
“아, 이거요? 아프지도 않은 걸요, 뭐.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여자친구에게 그렇게 심한 소릴 하다니. 남자로써의 자격미달이군요.”
“네‥? 그게 무슨‥.”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여자친구에게 깡패가 뭡니까?”
신이가 나가기 전 나에게 했던 말을 가리키나 보다. 하지만 당사자인 난 전혀 아무렇지가 않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할 뿐이다.
“아니에요. 제가 먼저 그런 소릴 한 걸요. 잘못은 제가 했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개소리씨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난 소이켠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를 향한 이 사람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렇지만‥나또한 신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 호칭.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우린 앞으로도 계속 사업상 필요한 동료일 뿐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조직 간의 동맹이 깨지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사람 만나셨으면 해요.”
나는 간단히 목례를 한 뒤 그를 놔두고 커피숍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신이가 있지 않을까 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시 학원으로 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학원에도 가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해도 신이는 받지 않았다. 화가 많이 났겠지. 그 순간 다른 이의 편을 들고 나섰으니까.
나는 신이가 답장을 해줄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보내기로 하였다.
[미안해‥. 하지만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
여기까지 문자를 누른 나는 마지막 한마디에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할까 말까‥한참을 고민한 나는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그 말을 하기로‥.
[미안해‥. 하지만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 사랑해‥.]
이윽고 전송하기를 눌렀다.
호텔로 돌아가 남은 일을 끝마치는 데에 하루가 꼬박 걸렸다.
끼이익-. 집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외출을 하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 했다. 조용한 거실. 불을 켜고 2층으로 올라갔다.
신이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달칵. 문을 열자 신이의 향기가 내 콧속으로 들어온다. 그의 향기만으로도 이렇게 설레는데‥.
난 역시 신이가 없으면 안 될 것만 같다. 방안에서 신이를 기다릴 작정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책꽂이와 책상 위에는 수많은 책들이 놓여있었다. 신이와 나를 이렇게까지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어쩌면 이 책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얄밉기 짝이 없는 문건들이지만, 난 그것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왜냐하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신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까.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책들을 깔끔히 정리한 뒤 책상에 엎드렸다. 눈을 감자 피곤함이 몰려온다.
자면 안 되는데. 신이를 기다려야 하는데‥.
*******
달칵.
새벽. 바깥에서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신이는 흠칫 놀래었다. 캄캄한 자신의 방에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개소리였다.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자 방안이 금세 환해졌다.
신이는 개소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책상에 엎드린 채 고이 잠이 든 그녀를 가만히 응시한다.
그렇게 신이는 제자리에 서서 10분 동안 한사람만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옛날, 개소리와 함께 해왔던 수많은 시간들을‥추억들을 그는 떠올렸다. 살며시 개소리의 뺨을 어루만져 본다.
오늘 그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생각해보면 자기가 먼저 해줘야 될 말이었지만 그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내가 미안하다.”
신이는 나지막이 속삭이고선 개소리를 안아 올려 침대 위에 눕혔다. 살며시 이불을 덮어준다.
다행이도 개소리는 깊이 잠이 든 건지 깨지 않았다. 신이는 사랑하는 개소리를 위해 책상 앞에 섰다.
지금까지 그는 그녀를 위해 책을 펼쳤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위해 책을 덮는다.
********
“으음‥.”
핫!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방안은 깜깜하고 신이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만 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방문으로 향했고,
그때 이상한 생각에 잠시 발을 멈추었다. 침대 위에서 일어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엥? 내가 언제 침대에서 잠이 든 거지? 난 침대에 누운 적도 없었는데. 무심결에 뒤를 돌아 책상을 보았다.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신이의 가방이 보인다. 그리고‥썰렁한 책꽂이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형광등 스위치를 눌러 방을 밝게 했다.
“왜 책이 하나도 없지?”
정말 책꽂이에 책이 하나도 없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책에 당황한 나는 순간 신이가 생각났다.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다. 그때 거실 창으로 정원에서 불빛이 나는 게 보였다.
‘설마‥.’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벌컥!
신이가 있다. 그리고 신이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보고 있다. 신이의 옆에 놓인 몇 안 되는 책들과 함께‥.
“신아! 지금 뭐하는 거야?”
그는 지금 책들을 태우고 있었다.
(외전1. 신발의♡개소리) - ⑨
불길은 두꺼운 책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남아있는 책은 육안으로도 셀 수 있을 숫자다.
나는 신이의 곁에서 검게 타버린 책들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신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신아‥어째서.”
“추워서.”
신이의 목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든다.
단지, 추워서라고? 그런 농담으로 대답을 얼렁뚱땅 넘기게 할 수는 없다.
“그게 말이 돼? 혹시 나 때문이니?”
신이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빨간 불꽃뿐이다. 그렇게 신이는 불길만을 응시했다.
“아니. 나 때문이야. 오늘 내 자신을 되돌아보니까 추워서 떨고 있더라고. 마음이 추워서 말이야.
널 기쁘게 해주려고 시작했던 공부가 오히려 너를 울게 만들었더라. 그런 공부라면 그만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바보같이 이제야 깨달은 거지. 널 웃게 만들 수 있는 건 공부가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걸.”
신이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난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신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신이의 시선은 이제 나를 향해 있다.
“왜 우냐?”
내 눈물을 훔쳐 주는 신이의 따뜻한 손길은 내 눈물샘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흑, 흐흑‥.”
미안해서‥너무 고마워서‥그리고 기뻐서 눈물이 흐른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신이가 이제는 가만히 지켜만 본다.
옆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은 우리 두 사람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신이의 손길이 눈 밑에서 뺨으로 이어졌다.
내 얼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신이. 곧 우리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아직은 차가운 3월의 밤은 이상하게도 따뜻하기만 하다. 이 키스로 하여금 우리의 애정전선에 다시 햇살이 내려 비쳤다.
철컹.
대문이 열렸다. 하지만 나와 신이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의 이 시간은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하기만 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키스하고 있는데요?”
“나도 알아.”
사람들의 대화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이와 나는 입술을 떼어내며 대문을 바라보았다.
유인이와 웬 여자아이가 대문 앞에 서있었다. 여자아이는 교복차림이었고 그것은 춘자고교의 학생복이었다.
“오빠,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오빠 아니고 선생님.”
“에이, 아무렴 어때요.”
“너네 집에 가.”
“아, 알았어요, 선생님! 됐죠?”
유인이 녀석, 왜 학생을 데려 온 거야?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입장이 아니었다.
일단은 너무 창피했으니까. 하지만 마치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우리 옆을 지나가는 유인이었고
“하던 거, 마저 하세요.”
라며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춘자고 학생이었다. 저‥저 애는 진짜 왜 데려 온 거야?
“쟤 뭐냐?”
신이도 의문을 표시한다.
“글쎄‥유인이 제자 같은데?”
“제자? 별 희한한 걸, 달고 다니네.”
그렇게 우리들은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멍하게 서있었다.
다음날 아침. 어제 늦게 잠들어서 인지 오늘은 늦잠을 잤다.
오전 9시. 나갈 채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오니 우혁이와 신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우혁이 녀석, 외박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일어났냐?”
“응. 근데 유인이는?”
신이가 건네준 과일주스를 받아들었다. 오늘은 딸기주스다.
“시간이 몇 신데. 벌써 가고 없지.”
“여자애도?”
사실은 이게 궁금했던 것이었다.
“응. 같이 나가던데?”
이번엔 우혁이가 대답을 해주었다. 우혁이는 뭔가 알고 있으려나?
“걔 누구니?”
“응?”
“유인이랑 무슨 사이냐구.”
“스승과 제자가 아닐까?”
우혁이도 자세히는 모르나 보다. 스승과 제자라‥.
그것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사이 같았는데‥. 이때 우혁이가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여자애가 유인이한테 꽂힌 것 같아. 으아, 좋겠다! 누구는 영계가 따라붙고.”
흐응, 신이도 부러워하고 있을런가? 난 힐끔 신이를 보았다. tv에 정신이 팔려 있다.
다행이도 신이는 우혁이와 같은 속물은 아닌 듯싶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우혁이가 안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형님, 오늘은 회사 안 나가?”
“안 나가긴, 지금 가야지.”
“그럼 나도 같이 가.”
신이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자니‥. 그럼 학원에도 안 나갈 생각인 걸까?
“학원은?”
“안 가. 갈 필요도 없어. 이젠 너한테만 신경 쓸 거야.”
이거‥기분은 좋은데 왠지 내가 죄를 지은 느낌이다. 이리하여 신이는 나를 따라나섰다.
회사로 가는 차안. 부하 한명이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가운데 뒷좌석에 앉은 나와 신이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조금 늦은 출근이라 그런지 도로는 크게 막히지 않았다.
“다음주에 시간 되지?”
조용한 가운데 신이가 침묵을 깨고 나에게 물었다.
“다음주? 왜?”
“4월이잖아. 곧 벚꽃축제가 열릴 거야.”
벚꽃축제? 신이는 얼마 전에 나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신이와 함께라면 시간을 내서라도 갈 것이다.
“시간 안돼?”
“아니! 돼! 시간 많아! 하하하.”
주체되지 않을 정도로 입이 벌어진다.
“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하하하. 다음주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 그치?”
“야야, 체통 좀 지켜라.”
운전대를 잡은 부하 녀석이 룸미러를 통해 나를 본다. 뭐, 보던 말든 그건 중요치가 않다.
지금 난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좋으니까.
보디빌딩 10층.
“사장님, 소사장님께서 와계십니다.”
10층에 도착하니 여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소이켠이 와있다니. 하필이면 신이가 있을 때 올 게 뭐람? 이런 걱정처럼 여비서의 말에 발끈하는 신이었다.
“그 새끼가 왜?”
“예? 그, 글쎄요. 사업상 중요한 일 때문이라는 것밖엔 저도‥.”
신이가 언성을 높이자 당황해하는 여비서였다.
“사업상 중요한 일 좋아하시네.”
신이는 자기가 먼저 사장실로 향했다. 신이가 회사에 나타나자 많은 부하들이 긴장을 했다.
쾅! 문을 열고 사장실로 들어가는 신이다. 난 짧게 한숨을 내쉬곤 뒤를 따랐다.
여비서의 말대로 소이켠이 와있었다. 그는 부하 2명과 함께였다.
“밤새 편히 주무셨습니까?”
“잘 못 잤어. 둘이 자기엔 침대가 너무 좁았거든. 안 글냐?”
소이켠의 인사에 신이가 딴지를 걸며 자리에 앉는다.
둘이 자기에 침대가 좁았다니. 분명 어젯밤 분위기는 좋았지만 같이 잔 기억은 없는데.
하지만 신이 나름대로 소이켠에게 자신과 나와의 관계를 알리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는 걸 나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냥 아무 말 않기로 했다.
“어쩐 일이시죠?”
사장자리에 앉으며 소이켠에게 물었다. 신이를 보니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쭉 뻗고 있다. 녀석도 참‥.
“하하. 오늘은 그저 일 때문에 온 것이니 걱정 마세요.”
“그럼 내일은 사적인 일로 찾아올 거라는 거야, 뭐야?”
또 한번 시비를 거는 신이다. 그에 소이켠보다는 그의 부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발리에 있는 도신 카지노라고 아시죠? 그 카지노 뒤편에 165만평 부지의 골프장을 만들까하고 생각 중입니다.”
소이켠은 신이를 무시하는 듯 했다. 상대를 말자는 것이겠지. 그를 알아챈 신이가 상당히 기분 나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런데요?”
“카지노도 잘 되는 편이라, 골프장이 생긴다면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같이 해보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신이를 보았다. 동업을 하면 금방이라도 잡아먹겠다는 얼굴이다.
발리에 골프장이라‥꽤 솔깃한 이야기인데. 흐음‥.
“무슨 놈의 회사에 찐득이가 이렇게 많아? 여기저기 다 달라붙네.”
탕탕.
테이블과 탁자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신이가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한다.
윽‥역시 거절하는 게 좋겠지?-_- 내 해석이 맞다면 찐득이는 소이켠을 가리키는 것일 테니까.
(외전. 신발의♡개소리) - 끝.
4월. 벚꽃이 곳곳에 만발한 아름다운 봄의 풍경이 마음을 따사롭게 만든다.
드디어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렸던 신이와의 벚꽃 데이트 날이다.
벚꽃 데이트. 내가 지어낸 오늘의 데이트 이름이다.
머리에 벚꽃을 꽂고 벚꽃을 바라보며 벚꽃 길을 걷고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벚꽃, 벚꽃, 벚꽃!
오늘은 그야말로 벚꽃의 날, 곧 나의 날이다.
끼이익-. 신이가 운전대를 잡은 승용차가 유료 주차장 안에 무사히 정지하였다.
오후1시. 여러 종의 차량들이 넓은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만큼 이곳 벚꽃축제를 보러온 관광객들이 많다는 뜻이 된다.
관리인에게 주차대금을 지불한 뒤 주차장에서 나오자 우람한 벚꽃나무 네그루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 향도 신이의 향기만큼이나 매혹적이다.
“예쁘다! 그치?”
“네가 더 예뻐.”
“뭐라구?”
“아니. 이쁘다고.”
방금 신이가 무척이나 낯 뜨거운 소리를 한 것 같았는데. 흐음‥아무렴 어때!
여기까지 온 이상 데이트를 즐겨 보드라고! 난 신이의 손을 덥썩 잡았다.
“신아, 우리 저 위로 올라가보자!”
벚꽃나무들이 질서 있게 이어져 있는 오르막길을 향해 달렸다.
처음엔 내가 무작정 잡아끈지라 신이가 나에게 끌려오는 듯 했지만 곧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길을 올랐다.
길가의 가로수는 죄다 벚꽃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벚꽃을 실물로 직접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많은 숫자만큼이나 벚꽃의 향이 피부에 벌써 배인 것만 같다.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내 머리칼을 스친다.
“‥아름답다.”
“그래.”
사람들의 머리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봄이 뿌리는 하얀 눈.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들은 그야말로 봄의 흰눈과도 같았다.
겨울에 내리는 차가운 눈과는 다른 따뜻한 눈. 그것을 본 사람들은 이 순간만큼은 모두들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신아, 너랑 벚꽃을 보게 될 줄이야‥정말 믿기지가 않아. 처음에 네가 약속을 했을 땐 그냥 흐지부지하게 지나갈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일주일 전에 차안에서 네가 벚꽃축제에 가자는 말을 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모르지? 아하하‥.”
“야!”
“어? 왜‥왜?”
갑자기 고함을 치는 신이었다. 순간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신이가 부른 ‘야’는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앞에 보이는 꼬마들에게 느닷없이 걸어가는 신이.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꼬마들은 나무 위로 올라가 벚꽃가지를 꺾으려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신이의 외침에 깜짝 놀란 듯 하다.
“누가 꺾으래?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든? 요즘 초딩들은 어떻게 된 게 자연보호도 몰라?”
“신‥신아. 왜 그래?”
“넌 가만히 좀 있어봐. 이런 것들은 따끔하게 혼쭐을 내줘야 돼. 너희들 몇 살이야? 엉? 몇 살 먹었어?”
신이는 진정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이들을 야단치는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하다.
“아‥아침밖에 안 먹었는데요?”
두 꼬마 중 화려한 공주 풍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말투로 보니 1,2학년인 듯싶다. 내가 보기엔 참으로 귀여운 꼬마인데 신이의 눈엔 그게 아닌가 보다.
“뭐? 아침밖에 안 먹어? 누가 언제 너더러 몇 공기 먹었는지 물었냐? 너 지금 나한테 개기는 거지? 앙?!”
여덟, 아홉 먹은 꼬마를 무슨 열여덟, 열아홉 먹은 청소년으로 대하는 신이었다. 으윽‥이러다 애 울리겠네.
“무슨 일이예요?”
“엄마아-!”
이윽고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애들 엄마가 등장하신 것이다. 꼬맹이들은 구세주라도 만난 것 마냥
엄마의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신이는 애엄마의 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들을 쏘아보았다.
“우리 애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왜 남의 집 귀한 애들을 야단치고 그래요?”
“허! 아줌마가 저 초딩들 엄마요? 그럼 애들 교육 좀 잘 시켜요!”
“어머머. 이 사람 봐. 우리 애들이 어때서?!”
“함부로 꽃을 꺾잖습니까! 그렇게 가르쳤어요?”
신아‥이제 그만 좀 하지 그러니? 네가 언제부터 자연보호에 앞장섰다고 그러는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술 먹고 집 앞 골목에서 노상방뇨를 하던 네가 아니니?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정말이지, 울고 싶다.
“그것 좀 꺾었다고 애들한테 소리를 질러요? 이 사람, 웃기는 남자네?”
잠깐! 이 아줌마가 지금 누구더러 웃기다는 거야? 난 이 부분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머머! 아줌마 지금 얘보고 뭐라고 그러셨어요? 웃기다뇨! 얘가 무슨 개그맨인 줄 아세요?”
“허참. 당신은 뭔데 참견이야?”
“나? 얘 마누라예요! 왜요? 제 신랑한테 막말하지 마세요. 누가 먼저 잘못했는데?
그쪽 애들의 잘못을 지적해준 게 그게 그리 큰 잘못이에요?”
후아후아-, 진짜 열 받는다. 애엄마를 상대로 힘을 발휘할 수도 없고.
난 씩씩-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애엄마를 노려보았다. 그때 내 한쪽 팔을 붙잡는 신이었다.
“야, 그만해. 난 괜찮아. 아줌마,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야야, 됐어. 그만 가자.”
난 신이의 손에 붙들린 체 아줌마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끌려갔다. 신이도 참, 내가 편을 들어주는데 왜 거기다 찬물을 끼얹는 거야?
이건 마치 처음부터 그 아줌마와 다툰 사람이 나고 신이는 그걸 말린 사람이 돼버렸다.
“왜 말리는 거야? 그런 아줌마는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구.”
“됐어, 마누라. 안 그래도 돼.”
“뭐? 마누라? 내가 왜 네 마누라야?”
“이것 보게. 지금 시치미 떼는 거냐? 아까 분명 네 입으로 내 마누라라며? 우리 사이에 쑥스러워할 거 없어.”
내‥내가 그렇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했단 말이야?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게 졌다.
창피함에 신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속도를 붙여서 걸었다. 그렇게 신이와의 거리가 멀어졌다싶었는데
신이가 곧장 따라붙는 바람에 거리가 다시금 좁혀져버렸다.
“같이 가. 왜 혼자 가고 그래?”
내가 또 혼자 가버릴 새라 내 손을 꼬옥 붙잡는다. 그렇게 우리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체 아름다운 꽃길을 걸었다.
맑은 날씨만큼이나 기분이 좋다. 이렇게 신이와 단 둘이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흐음, 그러면 다리가 너무 아프겠지?
후후.
“배고프지 않냐?”
1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신이가 배가 고픈 모양이다.
“조금. 아까 보니까 입구 쪽에 보양탕 집이 있던데, 우리 그거 먹을까?”
“뭐어?”
나를 혐오스럽게 쳐다본다. 아무래도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다.
역시 보양탕(보신탕)은 좀 그런가‥?
“너 개도 먹을 줄 아냐?”
“어엉?”
먹을 줄 알면 안돼는 건가‥?(삐질.)
“아니. 먹을 줄 몰라. 개‥개를 어떻게 먹냐? 하하‥왜‥?”
“그런데 왜 보양탕 집에 가자고 그런 건데?”
“엉?‥보양탕이 뭔데?”
“후우, 난 또. 그럼 너 보양탕이 뭔지도 모르고 한 소리였어? 그거 보신탕이잖아.”
“하하. 그래? 나는 그런 줄도 몰랐네. 그럼 당연히 안 되지. 개를 어떻게 먹어? 하하하‥.”
썩을‥.
신이가 보신탕 혐오주의자일 줄이야. 3년 동안 전혀 몰랐다. 하지만 지금에라도 알았으니 천만다행이다.
“그럼 뭘 먹지?”
“걱정 마. 내가 다 준비해왔으니까.”
신이가 어깨에 메고 있던 크로스빽을 연다. 가방이 두툼해서 뭐가 들었나했는데 이제야 궁금증이 풀릴 것 같다.
“짜잔-!”
가방 안에서 튀어나온 물건은 다름 아닌 2인용 돗자리와 도시락이었다.
이때 갑자기 돗자리를 길 한가운데에 펴기 시작하는 신이다. 서‥설마?
“뭐해? 안 앉고. 밥 먹자!”
“여기서?”
“그럼? 힘들게 걸어왔는데 다시 내려가자는 소리냐?”
돗자리 위에 앉아있는 신이는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사람들이 꽃놀이를 즐기고 있는 장소에서 보란 듯이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열다니‥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외면했다가는‥.
“야, 뭐하냐? 서서 제사라도 지내냐?”
신이에게 노여움을 살게 분명하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돗자리에 앉았다.
“안에 들어와 앉아. 자리 많아. 사람들 지나다니기 불편하게 왜 그렇게 앉냐?”
남들 보기에 부끄러워 돗자리 가장자리에 앉았더니 곧바로 충고를 가하는 신이었다.
신아, 길 한복판에 자리를 까는 것부터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걸 정녕 넌 모르는 거니?
............
신이가 알 턱이 없다.
이런 애가 어떻게 그 어려운 경영학을 공부했다니. 미스테리할 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러나 저러나 내 남자친구인 것을.
“맛있지? 이거 내가 직접 사온 거야.”
김밥 한 개를 입에 넣고 씹고 있는 나에게 신이가 물었다. 아니 자기 자신을 대견스러워했다.
네가 직접 싼 게 아니라 그냥 사온 거라고? 이것 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푸훗~.”
그래도 우습기는 우습다. 엉뚱한 남자 같으니.
“왜 웃냐?”
“아냐. 그냥. 하하하!”
“아악! 야, 드럽게 다 튀잖아! 저쪽 보고 웃어!”
“깔깔깔~!”
바람에 지는 벚꽃과 함께 그렇게 우리 둘의 행복한 봄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끝이냐고? 오우~ 천만에!
봄이 끝나면 신나는 여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름이 끝나면, 또 가을이 찾아올 것이고 가을도 지나면 겨울이 있다.
나는 신이와 또 약속을 했다. 이번 겨울엔 눈꽃을 보러 오자고.
“눈꽃? 그런 꽃도 있었냐?”
“엉? 응. 있어.”
“어떻게 생긴 건데? 나무에서 피는 거야?”
“어? 하, 하여튼 있어. 보러 갈 거지?”
“그래. 가지 뭐.”
눈꽃.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는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약속을 했다.
아차! 그리고 한 가지 더. 신이는 벚꽃을 보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에게 또 한번 감동을 안겨다주었다.
“넌 꼭 내가 행복하게 해줄 거야. 거짓말 아냐. 진짜야. 진짜로 행복하게 해줄 거야.”
바보‥너한테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해.
라고 말해주려 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그때 말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있다.
왜냐고? 왜냐하면, 신이가 또 다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날 행복하게 해주려면 자기가 유식해져야 된다나 뭐라나.
으휴, 우리 신이를 누가 말려? 뭐, 아무래도 좋다. 신이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니까!
“너도 쟤처럼 뒤늦게 공부하지 말고 지금 열심히 하란 말이야. 자꾸 우리 집에 놀러오지 말고.”
“에이~오빠, 왜 자꾸 구박하고 그래요?”
“오빠 아니고 선생님.”
“알았어요, 선생님. 근데 밥 없어요?”
“없어! 너 니네 집에 가!”
그런데 오늘도 찾아온 유인이의 손님. 도대체 저 여아애는 누구야?
※외전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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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다른이야기 * ]
전국 고교 일진협회 [외전-개소리와 신이의 ♡스토리]
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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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0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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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