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이 정말 푸짐하게 열려있다. 나라의 곳간 나주평야 그 안동네인 봉황고을에 오니 옹색했던 가슴이 대번에 만경으로 풀어져 버린다.
금빛바다 흐벅지게 일렁인다. 토시락 토시락 나락 익는 소리 온 들판이 시끄럽다. 꼬스운 냄새 진동한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시간이다.
가을녘 봉황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다. 궁상배기 취객도 이곳에 오면 낙락한 한량이 된다.
귀하고 느긋한 `봉황' 이 된다.
`동백꽃이 곱다한들 미영꽃(목화)만 하리 미영꽃이 곱다한들 나락꽃만 하리' 하던 어머니 웅얼가락이 떠오른다. 그러리라. 우리 목숨을 채워주는 벼보다도 더 오달지고 고운 꽃이 다시 어디에 있으랴.
햇살마저 맑게 잘 익어서 온 세상을 행복하게 비추고 있다. 우리들은 이 순간 행복한 공범이 되어 행복한 여행을 즐기고 있다. 정송규 화백은 소녀처럼 상기되어서 마냥 행복해하며 고향 자랑에 여념이 없다.
“봉황은 그 이름처럼 나주에서도 제일 살기 좋은 땅이라고 해요. 벼는 물론 과수,채소 등 모든 작물이 잘 되고 인심도 순후해서 예로부터 보기드문 `낙토' 로 명성을 이어왔다고 하대요. 그 뿐인가요, 옛 문화유적이며 민속등도 많아서 대표적인 예향으로 꼽히기도 하지요.”
제 나고 자란 고향자랑에 그 누가 딴지를 놓으랴. 되레 맞장구 치며 응원을 하고 진지한 부러움을 표할지언정.
봉황사람들은 먼저 고을이름에 대해 큰 자긍을 갖고있는데 가장 상서로운 새인 봉황(鳳凰)이 깃든 땅이라는 뜻이니 뿌듯해할만도 하다. 또한 봉황처럼 늘 품위있고 고상하게 살아가리라는 다짐을 향민들끼리 나눠가질 계기도 되니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봉황이라는 이름은 면 한가운데 자리한 봉황산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봉황산은 황룡리라는 마을 앞에 있는 높이 55m짜리 야산인데 몸피는 비록 작지만 앉은 자리가 좋고 생김새가 준수해 옛적부터 신령한 산으로 받들어 왔다. 이 산에는 대대로 기우제를 지내온제단이 남아 있기도 하다.
봉황면에는 봉황산이 있고 봉황동이 있고 봉황천이 있다.
“저는 봉황면에서도 으뜸가는 마을인 철천리에서 나고 자랐어요. 철천리는 옛 철야현의 치소가 있던 큰 터랍니다. 봉황에서 제일 높은 덕룡산이 솟아있고 너른 벌판이 끝없이 펼쳐쳐 풍광도 좋고 물산도 풍부해 부러울 것이 없지요. 저는 어릴 적부터 그 큰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마냥 행복하게 뛰놀았지요.”
철천리(鐵川里) 들어가는 길목 또한 부요하기 짝이 없다. 멀리 덕룡산(德龍山)이 덕성스러운 등성이를 드러내며 서 있는 아래로 1백 50호가 넘는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정자며 사당들이 고색 창연한 기왓장을 빛내며 사이사이 끼어있고 아름드리 노거수들이 낙락하게 지붕들을 감싸고 있다.
첫 눈에 역사가 깊은 명촌(明村)임을 알겠다.
철천리는 신라 때 철야현(鐵冶縣)이 둥지를 틀었던 본거이다. 이름 그대로 철이 많이 나 야철을 했던 군사요충지였다. 조선 초에 철야는 폐현(廢縣)되어 남평현에 속했으므로 야철을 했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아직까지 마을 어른들은 철천보다는 철야라는 명칭에 더 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철천리는 수각(水閣).유촌(柳村).등내(等內).선동(船洞)의 네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정송규 화백은 수각리 출신이다. 수각리는 덕룡산 바로 아래 위치한 동네로 특히 산수가 빼어나고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다. 정화백은 이 마을의 넉넉한 과수원 집에서 진주정씨(晋州鄭氏) 후예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철천리는 유촌리의 이천서씨(利川徐氏)와 진주정씨가 주류를 이루고 자작일촌한 마을이다.
이천서씨는 13세기에 터를 잡았고 진주정씨는 16세기에 입향한 것으로 알려진다. 깊은 유서대로 인물들도 많이 나와 지령을 빛냈다.
마을 위풍을 드러내느라 동구에 웅장한 정자 한 채가 떡 버티고 있다. 낙락한 장송과 소담한 연당을 데불었는데 그 규모가 자그마치 다섯 량(樑). 열 여섯 동(棟). 열 다섯 간(間). 이 동네에 첫 걸음하는 외지인을 기죽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채이다.
이름하여 만호정(挽湖亭). 매곡(梅谷) 서몽희(徐夢曦)가 쓴 현판에 따르면 옛날 철야현 한쪽에 퇴락해서 있던 것을 선조34년(1601)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정자 이름도 처음에는 쾌심정(快心亭)이었다가 만호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기둥이며 대들보며 마룻장이 하나같이 크고 두꺼워 둘러볼수록 찬탄이 우러나오는 경물인데 제재가 모두 느티나무 한 속이란다. 여기에서 대대로 동계가 열리고 향약이 시행되고 독서 소요가 이루어졌다.
정자에 올라앉아 탁주 한잔으로 목을 축인다. 가을빛에 겨운 못물이 푸르다 못해 검게 검게 자지러지는데 그 어름에서 솔 그리매가 부르르 떤다. 과연 호수를 끌어올만한 정자의 아취이다.
전해오는 만호정 팔경(八景)이 있다. 덕룡산의 맑은 밤달(德龍霽月). 금성산의 저녁 안개(錦城晩霞).
응봉에 빛나는 아침 햇살(鷹峰朝暘). 숲쟁이에 부는 맑은 바람(藪亭淸風). 연포에 돌아가는 돛단배(燕浦歸帆). 옥등의 비파 소리(玉嶝彈琴). 웅사의 저녁 쇠북 소리(熊寺暮鐘).
그리고 누군가 이 정자에 앉아 지었을 `철야가(鐵冶歌)'가 있다.
태평양 파도치고 곤륜산 풍우 인다
덕룡산 운림석천(雲林石泉) 희고연월(熙皐烟月) 분명코나
아마도 요순건곤(堯舜乾坤)은 영평고읍(永平古邑) 여기로다
덕룡산 정기 품어 철야장춘(鐵冶長春) 꽃이 핀다
만호정 시주풍류(詩酒風流) 백대문화 천년사라
진실로 호남승지는 여기인가 하노라
용산아래 덕천 위에 팔을 베고 누웠으니
벽 위에 거문고요 예창(藝窓)밖에 명월이라
동자야 자하주(紫霞酒) 부어라 탄금취월(彈琴醉月)하리라
기개와 풍류가 함께 어우러지고 애향의 마음씨가 뚝뚝 듣는 정겨운 시조이다. 이런 멋진 고향노래를 가진 사람들은 부러움을 살만하다. 정 화백이 거듭 부럽다.
정화백은 이제 달콤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향 향취에 젖어들어 있다. 지금 저 표정이야말로 저 이가 예술을 꾸려나가는 자세 일 것이다.
그의 화면은 건강하고 자유롭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그는 여체를 많이 취급했는데 그의 여자들은 우선 건강미를 과시한다. 특별히 예쁘거나 세련되어 보이진 않지만 어딘지 웅숭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음습하고 퇴폐적인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건강성은 그의 화면에 독특한 명랑함과 생명력을 주어서 보는 이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준다. 정화백의 여자들하고는 편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사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서 이차적으로 배 나오는 정서가 자유로움인데 그는 거침없이 죽죽 단선으로 그어내리는 분방한 붓질로 그것을 표출해 낸다. 색칠조차도 `덤벙' 수법으로 활달하게 진행된다. 이 시원한 운필과 설채(設彩)는 그의 화면에 자유와 역동성을 부여한다.
삿된 의도와 간특한 도모가 없이 순수한 마음 그대로 곧장 예술 속에 자기를 던져버리는 자세가 아니고서는 좀체 얻어낼 수 없는 정서들이다.
그리하여 그의 화면은 화려함으로 빛난다.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어 만드는 장식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날것으로 보여줌으로써 불러 일으키는 원초적인 화려함이다.
건강하고 발랄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정화백의 여자들은 서울 전시를 비롯한 여러 전시회를 통해 무릇 애호가들을 매료시켰다. 정송규의 여자들은 애잔한 포즈로 `가을을 이고 가는 아낙'(작품 제목)까지도 기이한 명랑함으로 빛나고 있다. 심사의 어둡고 환함을 떠나 삶에 겸허한 경외감이야 늘 잃지 않고있는 우리네 여인들의 본마음이 거기에 표출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점에 끌려 정화백의 그림 앞에서 오래 도취해 있는 것이다.
1996년 봄 서울 공평아트홀에서 열린 전시회 때 미술평론가 박용숙씨는 이렇게 느낌을 적었다. “정송규씨는 다양한 계층의 여체를 주제로 하면서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삶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휴머니스트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정화백과 대화를 해 본 사람은 그의 화면 속 여인들이 정화백의 분신들이 아닐까 하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 여인들에게서 받았던 순수 명랑 건강 자유 의 쾌감들을 정화백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들이 내내 그는 고향 자랑에 신바람 나고 가을 풍경에 탄성지르고 그림 이야기에 도취하는 명랑 소녀의 발랄함으로 동행을 기쁘게 해주었다.
` 사람이 곧 그림' 이라는 말은 허사(虛辭)가 아닌가 보았다.
만호정을 떠나 수각리 정화백의 옛집으로 가본다. 덕룡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개울이 발 끝을 시리게 한다. 산골답게 온갖 나무들이 우거져 푸르름을 더하는데 그의 옛집은 허름한 기와를 이고 곧 쓰러져 가고 있었다.
집터에 친척되는 이가 새 집을 달아내 살고 있고 옛 뜰이며 채마전은 잡초가 우거져 쑥대밭이 되었다. 정화백은 “추억이 어린 터이니만큼 작업실로 개조해 사용할 생각” 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화심(畵心)을 기른 뒤 광주에 진학해 본격 미술수업을 했는데 광주여고 때는 오승우 선생에게서, 조선대 시절에는 임직순 화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63년 대학교 1학년때 제1회 목우회전에 입선했고 이어 3학년때는 국전에 입선했다. 그림 공부에 대한 열성이 남달랐던 그는 1987년 늦깎이로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학교를 수료했고 그 이듬해 그동안의 성과물을 모아 광주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 후 지금까지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해외초대전·단체전등에 부지런히 작품을 선보여 좋은 평가를 얻어냈다. 이제 일가를 형성해 낸 연륜에 서 있지만 그는 늘 자기 예술 세계의 원형은 고향에 있다고 여긴다.
“고향에서 어렸을 적부터 마주치던 순박한 아낙네들이 내 인물그림의 정신적 모티브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치장은 없지만 생명력으로 빛나던 우리네 여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봐요.”
정화백은 이번 나들이 길에 고향의 유명한 불교유적인 `철천리 석불입상'을 형상화 했다.
덕룡산 자락에 있는 이 불상은 5m가 넘는 마애석불로 보물 제46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옛적부터 이 고을 여인들이 아들 낳기를 빌었던 경배물이었다.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식이 뚜렷하고 규모가 커 희귀성이 크다.
정화백은 옛 여인들의 비나리 의식을 연상시키는 현란한 장식을 곁들여 불상의 토속성을 노련하게 부각해 냈다. 석불 입상 옆에는 역시 보물 제461호인 칠불석상이 있는데 90cm짜리 석불이 돌에 원형을 그리며 일곱개나 조성되어 있어 매우 이채롭다.
봉황산에 석양이 내린다. 물안개가 바람에 쓸린다. 벌판은 포근한 어둠에 잠기고 우리들 풍요로운 들마을은 따뜻한 등불을 내걸고 단잠을 청해야 한다. 들에서 난 쌀로 먹이를 짓는 연기가 긴 머리채를 끌며 다시 들녘 한켠으로 되돌아간다.
따뜻하다. 밥을 도울 된장국 냄새 구수하게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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