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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모놀이 채굿 농악 중요무형문화재11호
농악(農樂)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서로 도우며 일할 때 연주하는 음악으로 , 넓은 의미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과 같은 악기를 치며 행진, 의식, 노동, 판놀음 등을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 매구, 풍장, 금고(金鼓), 취군 등으로도 불린다. 상고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남녀가 노래하고,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어 농악의 기원을 흔히 여기에 두고 있으며, 여러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농악을 공연하는 목적·계기·방법에 따라 당산굿, 마당밟기, 걸립굿, 두레굿, 판굿으로 나누며, 그 밖에도 기우제굿, 배굿 등이 있다. 농악에 쓰이는 악기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호적, 나발이 있으며, 주된 악기가 꽹과리이므로 농악장단을 흔히 꽹과리가락으로 나타낸다. 농악은 지역마다 특징이 있어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지역적 특징에 따라 분류하면 대개 경기농악·영동농악·호남우도농악·호남좌도농악·경남농악·경북농악으로 나눈다. 이들 중 진주삼천포농악·강릉농악·이리농악·평택농악·임실필봉농악 등 다섯 지방의 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자반뒤지기 진주 삼천포 농악 중요무형문화재11-1(가)호
진주 삼천포 농악(晋州三千浦農樂)은 진주 삼천포 지역에 전래되고 있는 농악으로 영남농악에 속한다. 진주삼천포농악에 쓰이는 악기에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법고가 있으며, 편성은 기수(旗手)와 쇠, 징, 북, 장구, 법고 그리고 양반과 포수로 되어 있다. 모두가 흰바지와 색깔있는 저고리의 농악복에 색띠를 두루고, 모자(상모)를 쓴 채 연주하는데 개인놀이가 비교적 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 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 군사놀이인 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 특이하다. 빠른 가락을 모는 경우가 많아 힘차고 가락이 다채로워 흥겹다. 진주삼천포농악은 판굿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어 예술적 가치가 높으며, 팔진법이라든가 버꾸놀이, 상쇠놀이, 무동놀이(사내아이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 등의 개인기가 뛰어나다. 현재 박염과 김선옥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상쇠 무동타기 평택 농악 중요무형문화재11-2(나)호
평택(平澤)은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하였고, 이는 평택농악(平澤農樂)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평택 근처의 청룡사(靑龍寺)는 일찍부터 사당패들의 근거지가 되어 조선 말기에는 그들의 농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래서 평택농악(平澤農樂)은 두레농악인 동시에 걸립패농악(중들이 꽹과리치면서 염불하고 동냥하는 일)의 성격을 갖는다. 농악에 사용되는 악기로는 꽹과리, 징, 북, 버꾸, 호적, 나팔이 있다. 편성은 영기수(令旗手), 농기수(農旗手), 나팔수, 호적수, 상쇠, 부쇠, 종쇠, 징수 1, 징수 2, 설장구, 부장구, 상장구, 북, 상버꾸, 부버꾸, 종버꾸, 꼬리버꾸, 상무동, 종무동, 삼무동, 칠무동, 중애(사미), 양반으로 되어있다. 농악수들은 옛날 군졸들이 입었던 의상을 입고 그 위에 색띠를 걸쳐 매며 머리에는 벙거지나 고깔을 쓴다. 악기에 있어서 징과 북이 타지역에 비하여 적으며 소고와 법고의 구별이 없다. 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하며 노래굿이 있는 것도 특이하다. 또한 길군악칠채는 경기농악에만 보이는 장단으로 평택농악의 길군악칠채는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 평택농악(平澤農樂)은 두레농악의 소박한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공연성이 뛰어난 남사당패 예인들의 전문적인 연희를 받아들여 복합적으로 구성한 수준높은 농악이며, 무동놀이(어른의 목말을 타고 아이가 춤추는 놀이)가 특히 발달하였다.
이리 농악 중요무형문화재11-3(다)호
이리농악(裡里農樂)은 익산(옛 이리)지방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호남우도농악에 속한다. 익산시 새실마을은 예로부터 마을농악이 왕성했고, 김제·정읍 등지에서 전문적인 농악을 배워온 사람들을 받아들여 오늘과 같은 높은 수준의 농악단을 배출할 수 있었다. 이리농악(裡里農樂)은 용기, 농기, 쇄납, 나팔, 사물(쇠4, 징2, 북2, 장고4), 법고(불교의식에서 쓰는 작은 북), 잡색(양반, 대포수, 조리중, 창부, 각시, 무동)으로 편성된다. 농악수들은 치배 또는 군총이라고도 하는데 흰 바지 저고리에 색동달린 반소매의 검은색 쇠옷이나 조끼를 입고 삼색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상모와 고깔을 쓴다. 쇠가락에는 일체, 이채, 삼채, 외마치질굿, 풍류굿, 오채질굿, 좌질굿, 양산도가락, 호호굿, 오방진가락 등이 있다. 판굿의 절차는 인사굿, 오체질굿(오른쪽으로 돈다 하여 우질굿), 좌질굿, 풍류굿, 양산도, 긴매도지(미지기 : 쇠와 장구가 마주보고 전진후퇴), 삼방진굿, 방울진굿, 호호굿, 달라치기, 짧은매도지, 짝드름, 일광놀이, 구정놀이(개인놀이), 기(旗)쓸기 순서이다. 상쇠의 부포놀이가 매우 다양하고 장구의 가락과 춤이 발달되어 있으며, 소고춤의 기법이나 진풀이가 많은 편이다. 비교적 느린 가락을 자주 쓰며, 가락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변형 연주되어 리듬이 다채롭다. 풍류굿, 덩덕궁이(삼채굿)에서는 악절마다 맺고 푸는 리듬기법을 쓰는 등 가락의 기교가 뛰어나다. 이리농악(裡里農樂)은 마을사회의 역사와 그 명맥을 함께 하는 민속예술로 농사의 고달픔을 잊고 서로의 화합과 마을의 단합을 도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영동농악의 강릉농악 (1985년12월1일 제11-4호) 이다.
강릉 농악 중요무형문화재11-4(라)호
강릉농악(江陵農樂)은 강원도 태백산맥 동쪽에 전승되어 오는 영동농악의 대표격으로 강릉시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을 가리킨다. 농사풀이농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농경생활을 흉내내어 재현하는 농사풀이가 있기 때문이다. 유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강릉농악(江陵農樂)은 농기, 쇄납(날라리),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 법고(불교의식 때 쓰는 작은북) 및 무동(사내아이)으로 편성된다. 연주자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홍·청·황의 삼색띠를 두르고 무동들은 여러 가지 색깔이 섞인 옷을 입는다. 강릉농악(江陵農樂)에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3∼4일간 농악대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농악과 고사를 나는 지신밟기, 마을의 공동 기금을 걷기 위해 걸립패로 꾸며 농악을 하는 걸립농악, 모심기와 김매기 등을 할 때 하는 김매기농악, 김매기가 끝난 후 질 먹을 때 하는 질먹기, 건립굿이나 봄철 화전놀이 때 큰 마당에서 벌이는 마당굿이 있다. 타지역에 없는 달맞이굿(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것), 횃불놀이, 놋다리밟기(젊은 여자들이 1명을 뽑아 자신들의 허리 위로 걸어가게 하는 놀이)가 있고, 두레농악이라 할 수 있는 김매기농악과 질먹기, 길놀이농악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강릉농악(江陵農樂)은 단체적인 놀이를 위주로 하여 농사의 고달픔을 잊고 서로의 화합과 마을의 단합을 도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임실 필봉 농악 중요무형문화재11-5(마)호
임실 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은 필봉리에 전승되고 있는 농악으로 호남좌도농악에 속한다. 필봉마을에는 예로부터 당산굿·마당밟기 정도의 단순한 농악이 전승되어 왔는데, 오늘날과 같은 높은 수준이 된 것은 1920년경에 상쇠(패의 지도자 격으로 꽹과리를 가장 잘 치는 사람) 박학삼을 마을로 초빙하여 그의 농악을 배우면서부터라고 한다. 필봉농악의 농악수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남색조끼를 입고 삼색띠를 두르는데, 쇠잡이(꽹과리나 징을 치는 사람)만 상모(털이나 줄이 달린 농악에서 쓰는 모자)를 쓰며 나머지는 고깔을 쓴다. 농기, 용기(그릇), 영기(깃발), 긴 쇠나발, 사물(꽹과리, 징, 북, 장구), 법고(불교의식 때 쓰는 작은 북), 잡색(대포수, 창부<남자광대>, 양반, 조리중<삼태기를 맨 중>, 쇠채만 든 농구, 각시, 화동과 무동<사내아이>)으로 편성된다. 농악의 종류에는 섣달 그믐의 매굿, 정초의 마당밟기(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도는 것), 당산제굿(당산에서 마을을 위해 제사지낼 때 농악을 치며 노는 것), 보름굿과 징검다리에서 치는 노디굿, 걸궁굿, 문굿, 농사철의 두레굿, 기굿과 판굿이 있다. 이 중에서 판굿은 가장 예술성이 뛰어나다. 뒷굿에 편성되는 영산가락은 가진영산, 다드래기영산(상쇠가 부포시범을 보임), 미지기영산, 재넘기영산(상쇠가 쇠시범을 보임) 및 군영놀이영산(개인놀이와 비슷함)으로 매우 세분화되어 있고 느린 편이다. 임실 필봉농악은 쇠가락(농악의 대표격인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 씩씩하며, 개개인의 기교보다 단체의 화합과 단결을 중시한다. 예능보유자로 박형래가 인정되어 보전하고 있다.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 명승11호
주왕산(周王山, 721m)은 태백산맥의 남단에 위치하며 그 주위에는 600m가 넘는 고봉이 12개나 솟아 있다. 암벽으로 둘러 싸인 산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석병산이라고도 하며, 산세가 웅장하고 4계절의 경관이 수려하다. 주왕산 일원의 지질은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백악기 유천층군의 중성 내지 산성 화산암류로 되어 있다. 연꽃 모양을 한 연화봉과 만화봉, 주왕이 무기를 감추었다고 하는 무장굴(하식동), 신선이 놀았다고 하는 신선대와 선녀탕 그리고 제1, 제2, 제3 폭포 등은 경승지로서의 가치가 뛰어나다. 주왕산이란 이름은 신라시대에 주원왕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수도하였다는 전설에서 호칭되었다고도 하고, 중국의 진나라에서 피신하여 온 주왕이 이 곳에 웅거하였다고 해서 불리워졌다고 하며, 산봉우리, 암굴마다 주왕의 전설이 얽혀 있다. 주왕산은 심산구곡을 이루고 있어 동·식물도 다종 다양하게 분포한다. 포유동물 46종, 조류 35종, 곤충 474종이고 식물이 393종이다. 특히 수단화, 회양목, 송이버섯, 천연이끼 등은 주왕산의 특산식물로 유명하다. 또한 청송지방에는 여러 산지에 산철쭉이 분포하고 있으나 주왕산의 것을 특별히 수달래(수단화)(水丹化))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옛날 주왕이 이곳에서 신라군사와 싸우다 힘이 다해 마장군 형제의 화살에 맞아 잡히자 그의 피가 주왕굴에서 냇물에 섞여 계곡을 따라 붉게 흘러 내렸는데 그 이듬해부터 이 주왕산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꽃이 계곡과 내를 따라 피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꽃을 주왕의 피가 꽃이 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전설에 기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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