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생 동안 죽음에 대한 근심에서 떠날 수 없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내가 가르친 어린 학생 가운데 아무런 경고나 징후 없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갑자기 죽은 학생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의사가 몇 달이나 몇 주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선고한 후에도 10년 이상을 더 산 친구도 있다.
우리는 죽는 순간을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순간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는 것은 안다. 사실 그리스도교적 삶 전부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먼 준비와 가까운 준비를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의 죽음이든 친구나 가족의 죽음이든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안다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미리 해야 하는 최선의 준비는 아직 정신이 맑고 힘이 있을 때 바르고 철저하게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다.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깊이 뉘우치며 철저히 잘 준비한 고해성사보다 더 영혼에 평화를 안겨주는 것은 없다. 우리가 오랫동안 고해성사를 보지 않았다면, 또는 보았을지라도 위중한 병에 걸렸다면 자주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병에 걸리면 곧바로 병자성사를 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한다.(앞에서 설명한 ‘병자성사’ 참조) 또한 미사에 참례하거나 그럴 수 없을 때는 병원 원목사제나 본당에 알려 가능한 한 자주 성체를 받아 모시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연락은 우리 쪽에서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병원 직원은 사생활 보호법 때문에 환자가 명백히 요구하지 않으면 성직자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위급한 경우 사제를 불러주십시오.”라고 쓴 메달이나 카드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나는 그런 내용을 굵은 대문자로 사진 바로 밑에 인쇄한 가톨릭학교 학생증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물건이 그런 요청을 하는 데 필요한 법적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의사나 간호사가 서둘러 허락하도록 도울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신앙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행위이며 당연히 해야 할 마지막 행위다. 내 친구 아버지는 입원해 있는 동안 스카풀라 착용을 고집하고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병원 직원들이 자극을 받아 스카풀라를 착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종을 앞두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던 일을 잘 정리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으며 우리는 그 목적을 제때 달성하기를 바란다. 만일 우리가 임종을 준비하지 않고 주의를 다른 데로만 돌려 시간을 낭비한다면 결국 우리는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임종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계속 짓누르는데도 그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아 결국 참담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을 쫓아 ‘마지막 네 가지 일’. 곧 죽음·심판·천당·지옥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교회는 건강할 때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나 영원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라고 권고한다.
여러분은 수도자들이 작업대나 책상 위에 사람의 해골을 얹어 놓은 사진이나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도 침대 탁자 위에 해골을 놓아두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여행을 할 때는 목적지에 대한 생각이 분명할수록 여행이 순조롭고 신속하게 진행되는 법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드리는 기도 가운데 죽음에 대한 생각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울해하거나 침통해할 필요는 없다. 수도자들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뛰어난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평신도 변호사이자 대가족의 가장이었던 성 토마스 모어는 단두대에 올라갔을 때에도 사형집행인에게 농담을 건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 있다.
그리고 간호를 하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 웃음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는 한 남자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는데 날마다 집을 방문하는 간호사가 도착하기 전에 한시간 동안 웃는 연습을 했다. 그는 “그분은 하루 종일 많은 고통을 접해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 남자는 많은 희생을 했겠지만 결코 힘든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기분이 더 좋아졌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선고가 정상적인 삶의 일부이며, 우리의 무관심으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해도 괜찮다는 허락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유머를 지니도록 마음 써야 한다.
가톨릭 작가 뮤리엘 스파크는 죽음에 대한 그녀의 농담이 잔인하다고 자주 비판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가끔 죽음에 대해 매우 담담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말에는 도덕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고, 이 세상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것도 중요하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잘 정리해 놓으면 뒤에 남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을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일을 일상적인 노동을 봉헌할 때처럼 기도로 봉헌할 수 있다. 그 일은 우리를 열심히 살게 하는 동시에 우리의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것이다. 그 일은 다른 많은 인간다운 일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사랑의 행위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일을 잘 마치기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압박하지는 말아야 한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라!
우리를 돌보는 사람들이 우리 뜻을 알 수 있도록 적절한 설명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신앙이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살필 경우 특히 그러하다. 우리는 병원 치료에 대한 우리의 선택을 그들이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에게 ‘통상적’ 수단과 ‘예외적’ 수단의 차이에 대한 교리를 말해 주고, 환자가 고통을 겪더라도 고의적으로 죽음을 야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며, 인내로이 참아 받는 고통의 가치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 풀턴 신 주교는 병원 앞을 지날 때마다 참으로 많은 고통이 활요되지 못하고 낭비된다는 생각에 슬퍼졌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우리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합치시킬 수 있으며(콜로 1,24 참조), 그 결과 고통의 의미를 살릴 수 있고, 고통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의 고통과 불편함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두려움과 수치심을 구원할 수 있다. 풀턴 신 주교는 환자를 돌보는 이들과 의료진이 고통당하는 다른 친구들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기를 강력히 권고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가톨릭 신앙은 사후(死後)에 우리 육신이 도착할 곳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교회는 우리가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표지로 가톨릭 공동묘지를 택하기를 바란다. 우리 육신은 세례로 거룩해졌으며 영성체로 예수님의 육신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육신의 영면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가톨릭 공동묘지를 거룩한 땅, 신성한 공간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절대적 의무는 아니다. 만일 다른 묘지를 선택한다면 사제나 부제가 묘소를 축성하도록 주선해야 한다. 교회법은 이제 신자의 시신 화장을 허락하지만 교회 의식에 따라 매장과 영면이 이루어지도록 적절히 준비해야 한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하면 성당에 알려 마지막 성사인 노자성체(Viactcum : 나그네 또는 여행자의 음식을 뜻함)를 청해야 한다. 아름다운 이 의식은 임종하는 사람이 자기가 할 일에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교회는 이를 통해 임종자에게 마지막으로 죄를 통회하고 가톨릭 신앙을 고백할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시기에 영적 서적을 읽어주거나 임종하는 사람이 반복하거나 생각하기에 적당한 화살기도를 큰 소리로 바침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경우라면 미리 읽을 재료를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또한 죽기 직전까지 삶이 지닌 복음적·교리적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삶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지요 신비다.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가 되는 일은 흔히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아기들과 같다. 우리 얼굴은 어쩌면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삶에서 우리를 갈라놓는 얇은 막에 밀착되어 있다.
장례미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삶은 바뀔 뿐 끝나는 것이 아니다.’ 뉴먼 추기경이 내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해주신 말씀이기도 하다. 그 말씀은 많은 세월이 흐르고 또 많은 이별을 겪은 오늘날까지도 내게 커다란 위로로 남아 있다. ‘한번 살았던 사람은 모두 여전히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나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것 같지만 이렇게 우리는 살아 있다.(2코린 6,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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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새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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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전혀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고, 지금 살고 있거나 살아온 사람 하나하나가 마치 그 사람 외에는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 존재 자체로 전인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그 영혼들 하나하나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서로 다른 사고와 감정을 가졌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을 가졌었고, 자기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획득했으며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살고 있으며, 그들이 과거에 실제로 행한 것이 그들의 현재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오게 될 그 날을 위해 유보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그날을 위해!
- 존 헨리 뉴먼 추기경, 19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