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
일시 : 1995. 12. 3 - 12. 14
경유지 : 김포공항- 네델란드- 벨기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 김포공항
방법 : 국비 (부담금 60만원) 경북 유공교원
끝없는 초지를 보며 샤프까를 그리고
이 인 우
1. < 시계를 거꾸로 8시간 돌리고 >
여명의 아침, 대구공항으로 우리 일행은 어김없이 모였다.
교원해외연수단 24명, 설레임으로 혹은 불안함으로 여행사에서 주는 여권과 비자를 받아 들었다. 시키는 대로 큰 가방을 한 줄에 놓고 잠시 의자에 앉아 지금부터 시작되는 12박 13일의 긴 여정을 서로 궁금해했다. 총무와 단장이 나오고 여행사 인솔자가 한 마디씩 하고,
서울 김포국제 공항에 도착하자 우리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환전, 국제선 제 2 청사로 이동, 그리고 출국신고서, 거대한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고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고도 8840m, 네델란드 암스텔담까지 약 13시간이 걸립니다. 나는 저고리를 벗었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자. 지금 가는 길이 새로운 것을 위한 도전이라면 이것 또한 내 삶의 조각이 아닌가 ?
승객 속으로 우리와 얼굴이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들고 있는 책과 신문의 글씨가 한글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다른 나라말이 섞여서 들려 왔다. ‘전두한 전대통령 사전영장’이란 글귀가 박힌 신문이 통로에 나부낀다. 팔천미터 상공에서 나라를 걱정하다니, 장차 어떻게 될지 우리 같은 필부(匹夫)들이야 알 수 없지만 잘 되기 위한 발판으로 믿고 싶을 뿐이다. 떠나올 때 밝지 못한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학교 수업이 걱정되었다. 지금 이 시각이면 1교시는 시작했을 것이다.
기내식이라는 것도 처음 먹었다. 장난삼아 의자에 붙어있는 이어폰 채널을 만지작거렸다. 채널 1과 2는 안내 방송과 영화, 3은 크래식, 4는 우리 대중가요 그리고 10이라는 숫자까지 있다.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불안함을 잊으려고 눈을 깜았다. 지금까지 내가 지은 죄들이 모여 궐기를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내 옆으로부터 뒷좌석은 흡연석이다. 비어 있던 옆 좌석에는 앞에 있던 사람들이 흡연을 하기 위해 왔다. 피부색깔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담배를 물고 앉았다가 앞으로 갔다. 이번에는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예쁜 젊은 여자가 와서 앉았다. 담배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연거푸 몇 개를 피웠다. 가끔 나를 보기도 했지만 내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연신 담배를 피우더니 지쳤는지 책을 들고 벌렁 누워 버렸다.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MADE IN USA 여성을 보며 여기는 한국이 아님을 실감했다.
시계를 거꾸로 8시간 돌렸다. 우리나라와 네델란드의 시차이다.
점심을 먹고 몇 시간이 지나자 빈자리를 찾아 누웠다. 내 계산으로 하면 한국은 저녁이다.
떠오르는 상념들을 모두 적을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눈을 감았다가 떳다가 메모를 하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내 TV 에서 마지막 영화를 하고 있을 때까지 잠이 들고 말았다.
네델란드 스키포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하여 13시간을 왔는데 여기 오니 아직 오후 2시 였다. 거꾸로 돌린 8시간이 효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타고 온 우리나라 비행기는 승무원만 교체 한 채 스페인의 마드리드공항 까지 계속 간다고 했다.
네델란드 암스텔담은 기분 나쁠 정도로 흐린 날씨에다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공항에 내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낮선 풍경에 취해 쉴새없이 삿다를 눌렀다.
남한의 반 정도 인구 1500만, 인구밀도 세계 3-4 위, 인구가 제일 많은 곳 암스텔담 70만, 인구의 지방 분산 정책이 성공한 나라, 일년 중 9월에서 3월까지는 안개가 끼고 날씨가 맑은 날이 별로 없단다. 4월에서 5월까지는 그래도 맑은 날씨가 많고 꽃이 피고 아름답단다.
오후 5시 이후는 죽은 도시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없다. 시내가 너무 조용하다. 우리나라 같으면 퇴근시간이 조금 지났을 시간이다. 동료들과 모여 소주잔이라도 주고받을 시간인데 여기서는 구경할 수 없었다. 모두 가정적인 사람들만 모였다고 우리나라 가정주부들은 좋아 할런지 모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밤 문화가 없는 것은 날씨 탓이라고 했다. 추운 날씨, 우중충하고 흐린 날씨, 습기가 많고 일년 중 20일 정도 햇볕을 본단다. 햇볕만 나면 남녀 노소 없이 일광욕을 즐기는 나라, 88올림픽 때 윗옷을 벗고 응원하던 그들을 이해 할 것 만 같았다. 햇볕이 그리운 나라, 여기 비하면 우리나라는 얼마나 축복 받은 나라인가. TV 채널이 아주 많은 것도 밤이 되면 사람 구경을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주택은 5층 정도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지반이 약한 탓으로 고층은 곤란하단다. 그러나 주택이외에는 고층 건물도 많이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식물 가꾸는 것을 좋아하여 여유가 생기면 우리나라의 주말농장 같은 텃밭도 가꾼단다. 시골 곳곳에 텃밭과 그들이 사용하던 집과 농기구를 넣어 두는 창고들이 보였다.
네델란드에서 이틀 밤을 자고 벨기에까지 갔다가 3일 후면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로 가야 한다. 끝없는 초지를 보면서 마음은 벌써 러시아의 샤프까가 보고 싶어졌다.
초등학교는 8학년으로 4세부터 유치원에 들어간다. 특히 문자교육은 3학년부터 이고 그 전에는 공동생활과 예절 생활 습관 등을 익힌다.
2. < 물의 나라 운하의 나라 >
본역(중앙역) 앞으로 운하가 흐르는데 우리는 여기서 배를 탓다. 이곳은 물의 나라다. 흐르는 물이 아니고 고여 있는 물이다. 비가 계속 오고 흐리며 바다 보다 육지가 낮으니 물이 흐를 곳이 없다. 암스텔담은 운하의 도시다. 배를 타고 시내를 일주하며 네텔란드의 이국 풍경에 정신을 잃었다. 세계 3대 운하로 공주에 운하, 양조장 운하, 신사들에 운하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17, 18 세기에 지은 건축물이 운하 주위에 즐비하다. 돌로 지은 집들이 대부분인데 기울어진 집도 기울어 진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전통을 사랑하는 그들, 한번 지으면 허물어지지 않는 그런 단단한 건물, 외모의 조각들로 보아 그들은 건물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듯 정성을 다하는 것 같았다. 시가지에는 운하가 있어 배가 다니고 그 옆으로 차도가 있고 옛날의 건물과 현대 건물이 즐비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선상 주택도 생소한 것이다. 물위에 지은 집인데 성냥곽 처럼 세워 놓은 집이다. 그 집도 초라한 집은 아니었다. 오밀조밀하게 치장을 하고 살고 있었다.
지붕 위의 조각으로 자기의 지위를 알린다는 이들은 그 옛날부터 도르래를 이용하여 5층까지 물건을 운반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도르래로 가구와 무거운 짐들을 운반한단다. 무서우리 만큼 튼튼하고 완벽한 집들을 보니 힘없이 무너진 우리의 삼풍백화점이 생각났다.
집들은 우리나라로 보면 아파트 같기도 한대 보통 19평 정도의 크기로 4층 혹은 5층으로 모두 합하여 10가구 내외가 살 수 있는 집이다. 작은 연립 주택 정도로 보면 되겠다. 이런 집들이 수 백년 동안 같은 규모로 지어져 운하를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1층은 사무실로 공공장소로 은행으로도 쓴단다.
암스텔담, 노스텔담 의 담은 댐이다. 물의 나라 네델란드는 일찍부터 물을 지배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댐이 발달했단다.
시차 관계로 비행기에서 미리 잠을 자 두었지만 어제 충분히 자지 못해 이곳 시간으로 다섯시도 안 되었는데 졸음이 왔다. 우리시간으로 따지니 새벽 1시다. 졸음을 쫓아야 이곳 시차에 빨리 적응할 수 있다기에 억지로 참았다.
처음 먹어 보는 이곳 현지 식은 말로만 듣던 딱딱한 빵과 치즈 뿐이다. 아침은 더 먹기 곤란하다니 앞으로 식사가 걱정이다. 호텔에 들어오니 TV 채널이 18 가지나 되었다. 34에서 37까지는 위험 채널로 한번 보는데 14불이란다. 이런 채널을 버젓이 설치한 그들의 문화를 한국 토종인 내가 이해하기란 무척 힘이 들었다. 호텔에 들어오니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여기에 있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저 착잡하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로 머리가 복잡하다. 타국 만리에서도 마음은 한국에 있으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작은 생활인에 불과 하다.
3시간은 자고 3시간은 깨어있고, 업치락뒤치락 하다가 보니 5시가 넘어 있었다. 집에 전화를 넣었더니 한국은 오후 1시란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그리고 무척 피로하다. 집 나가면 고생이니 어디서나 잘먹고 잘 자라던 늙으신 어머니의 당부 말에 집착하고 싶다.
아침식사를 일찍 마치고 벨기에 브르셀을 향해 버스는 달렸다. 짧은 일정에 한나라라도 더 보려는 욕심에 계획에도 없던 나라를 한 사람 당 7만원을 내고 강행군을 하기로 했다.
벨기에는 버스로 국경을 넘는다. 차 안에서 네델란드에 대해 현지 가이더가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다.
아침 9시가 넘었는데 도로에 차들이 라이트를 켜고 질주하고 있다. 이들은 라이트를 켜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날씨가 흐리니 운전 시야를 넓히기 위함이었다.
일본은 여기서도 그들의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하고 그들의 얇은 속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오는 나비부인도 네델란드 사람이란다. 또 일본은 네델란드 사람들이 작은 것을 좋아하는 축소 지향적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그것도 배워 가서 지금 일본의 문화가 축소 지향문화라고 했다. 이 나라의 식물도 가져가 자기나라 식물인양 키워서 판다는 말을 들으니 일본은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문화유산만 탐닉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네델란드의 처녀 총각들은 결혼 전 동거 생활을 한단다. 우리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혼 전 1년 정도 동거 생활을 하고 서로 상대를 안 뒤 결혼을 결정한단다. 동거 생활 때는 식당에 들어가도 자기가 먹은 것만 자기가 계산하고 나온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평생 살 사람을 고르는데 잠시 선을 보고 결정하는 것도 문제려니와 결혼 전에 동거 생활 하는 것도 문제는 문제다.
3. < 힘없는 민초들의 희생은 >
네델란드는 산이 없는 나라다. 가도 가도 초원 뿐 산이 없다.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닌 토지들이 겨울인데도 푸른 풀이 자라고 말과 양이 풀을 뜯고 있다. 초지는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초지 사이사이로 물길이 있고 물이 가득 차 있다. 물이 넘친 흔적은 없었다. 그냥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그 상태를 향상 유지하고 있다. 290일을 비가 오고 흐린 날씨이니 그럴 만도 했다. 스위스가 산과 싸우고 있다면 네델란드는 물과 싸우고 있다고 하면 정확한 표현 일 것 같았다.
도로에는 방풍벽이 설치되어 있다. 산이 없으니 인공적으로 바람을 막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필립스 면도기로 유명한 이 나라, 필립스는 사람 이름이며 면도기가 유명해지자 도시 이름도 필립스가 생기고 필립스 공장도 있단다. 마약을 자유로이 판매하는 나라, 남녀 평등을 부르짖으며 목욕탕을 혼탕으로 쓰는 나라, 매춘을 당당히 직업으로 인정하고 세금을 받고 있는 나라, 동성애를 법으로 허용하고, 교통순경도 없고, 고속도로는 6차선인데 중앙 분리대 면적이 도로 만큼이나 넓으면서 통행료를 받지 않는 나라, 어떻게 보면 질서도 법도 없는 나라 같은 데 국민들 스스로 자제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잘 산다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끝없이 펼쳐진 초지에는 양과 젖소 말들이 풀을 뜯고, 듬성듬성 보이는 주택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국경을 통과하기 전 휴식을 취할 겸 슈퍼마켓을 들렸더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물건들이 진열대 한가운데 버젓이 있는데 놀랐다. 포르노 잡지, 테이프 등이 그러 했다.
버스는 검열도 없이 국경을 단숨에 넘었다. 우리나라의 시 군 경계를 넘듯이 말이다. 네델란드와 벨기에의 다른 점은 도로에서 나타났다. 인공 위성에서 지구를 보면 사람이 만든 구조물 중에서 낮에는 중국의 만리장성이고 밤에는 벨기에의 가로등이란다.
20M 도 안되는 간격으로 가로등이 길 양 옆으로 꼿꼿이 늘어서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동서남북 어디를 가나 거처야 하는 나라 벨기에, 인구밀도가 세계 다섯 번째, 우리 교민 1200여명이 살고 있고, 두개의 민족이 공존하여 국어도 없단다. 네델란드어와 프랑스어가 있을 뿐이다. 민족도 달라서 교육도 신문도 방송도 두 가지인 나라, 결혼도 서로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한나라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명한 프란다스의 개가 있는 나라, 주산업은 중화학, 세계 제일의 무기산업 발달로 지금도 사냥총이 유명하다. 가도 가도 가로등 뿐 전신주는 보이지 않았다.
브르쉘 까지는 네델란드 국경에서 1시간 정도 걸렸다. 이곳에는 세계 제 1의 항구 안토오패가 있고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산업박람회(1958년) 가 열렸던 곳에 도착했다.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쓰고 있다. 40여년 전의 상징탑이 그대로 있다. 쫓기듯이 여름궁전과 겨울궁전이 있는 곳을 향하면서 어디서나 인간이 사는 모습을 동물의 세계에 비유하고 싶어졌다. 거기에는 조금 뛰어난 왕이 있고, 그를 도와 주는 무리가 있고, 힘없는 민초들의 희생이 있다. 지금도 왕궁에는 고압선이 흐르고 보초가 손을 호호 불며 서 있다.
노틀담은 스쳐만 지나갔다. 무척 아쉬웠다. 우리들의 연인 노틀담의 곱추가 종을 치는 모습이 보고 싶다. 사실 노틀담은 왕의 시신을 모시는 곳이라는 것을 듣고 이미지가 퇴색됨도 아쉬웠다.
오줌싸게 동상, 이 동상은 1619년에 세웠단다. 로랑팔라스가 세운 것으로 복잡한 골목 모퉁이에 조그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동상을 보기 위해 우리들도 온 것이다. 누구나 브르쉘을 찾으면 이 동상은 꼭 찾는 단다. 이 동상에는 이런 전설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 옛날 벨기에가 전쟁을 하고 있었다. 군사들이 적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한 소년이 벌판에 서서 평화롭게 오줌을 누고 있었다. 그 중에 대장이 소년의 오줌누는 모습을 보고 군사들을 잠시 쉬도록 했다. 이유는 아무리 시각을 다투는 전쟁이라 할지라도 저 소년의 평화스럽고 천진난만한 행동을 해치고 싶지 않는 인간애가 있었던 것 같다. 소년이 오줌을 다 누고 나자 전쟁을 하려고 하니 그 사이에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그 후 이 이야기가 군사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글랑 팔라스라는 조각가가 동상을 만들었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이 동상이 오줌을 누면 평화가 온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 후 나풀레옹이 이 동상을 빼앗아 갔는데 오랜 외교로 돌려 받게 되었다. 나풀레옹은 동상에다 귀족의 옷을 입혀 돌려주었다. 그 후 세계 각 국에서 이 동상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도 5공화국 시절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색동옷을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추석명절이 되면 이 오줌싸게 동상은 색동옷을 입고 우리의 명절을 축하한단다. 이제 이 동상은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계속 오줌을 싸고 있을 것이다.
4. 18세부터 독립하고
길드광장은 사방이 높은 건물로 싸여 있었다. 건물 꼭대기에는 금도금을 하여 번쩍번쩍 빛났다. 이곳은 그 옛날 장사꾼들이 묵었던 곳으로 수 백년이 지난 지금은 광장 곳곳에 난전이 서고 있었다. 길드광장에서 시장 골목으로 나오니 소녀 오줌싸게 동상이 앉아 있었다. 아마 소년동상에 대를 이루기 위해 소녀 동상을 만든 것 같았다. EC 본부건물은 스처 지나면서 겉모습만 보게 되었다. 16개국이 미국의 횡포를 막고자 만든 단체다. EC건물은 97년 부터 사용한다고 했다. 이들은 그들만의 돈으로 만들 계획인데 명칭을 ‘ 에꾸’로 했다니 대단한 결속이다.
독립 50주년 기념문,벨기에가 네델란드로부터 독립을 하고 50년이 지나서 세운 기념문이다. 벨기에,네델란드,룩셈부르크,는 원래 네델란드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형제 나라로 유럽을 이끌어 가고 있다. 특히 EC를 탄생 시키는데 주동적인 역활을 했다. 독립문의 규모는 우리의 독립기념관 보다 아주 큰 규모를 하고 있었는데 시간 관계로 내부를 구경하지 못해 아쉬웠으나 일제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는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아른 거려 그져 슬픔으로만 다가올 뿐이었다.
브르쉘에 있는 우리나라 기업의 선전탑을 보니 나도 모르는 작은 애국심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 갔다.
어스름이 질 무렵 우리는 다시 네델란드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면서 벨기에에서 남는 것은 오줌싸게 동상 뿐이라는데 불만을 터뜨렸다.
마쓰강은 네델란드와 벨기에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마쓰강의 저녁놀을 보며 국경을 넘었다. 아침에 벨기에를 갔다가 점심만 먹고 네델란드로 온 것이다. 국경을 넘으면서 우리도 하루 빨리 남북통일이 되어 버스로 기차로 자전거로 평양도 가고 신의주도 가기를 빌었다. 쭉벋은 고속도로를 따라 평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서울에 와서 저녁을 먹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
네델란드의 농촌구조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우리의 촌락은 산이 있고 양지바른 산밑에 옹기종기 정답게 집들이 모여 있는데 여기는 농토따라 띄엄띄엄 한 두집씩 흩어져 있다. 저녁에 마실 가려면 무척 힘들 것 같았다.
네델란드에서 두밤을 새운 오늘은 연수의 목적이였던 학교를 찾았다. 이곳의 중등학교는 별도의 명칭이 없다. 그저 어느 동네에 중학교 이며 담도 교문도 없다. 마음대로 드나들며 점심식사는 가까운 집에 가서 먹는 것이 보통이다.
16세까지 의무교육이다. 초등이 8학년 인데 4세부터 입학한다. 1.2학년은 유치원과정이다. 특히 문자교육은 3학년부터이고 그 전에는 공동생활에 필요한 예절,생활습관 등을 익힌다. 숙제는 거의 없으며 노는 방법을 가르친다. 특히 주말에는 숙제가 아주 없어 마음 놓고 즐기도록 한다. 그 후 학제는 4.5.6년제로 기술고등학교,전문대,대학가기 위한 과정이다. 4년제 대학을 가려면 초등 8년에다 중등 6년을 합하여 14년이 걸리는 셈이다. 대학은 소위 일류학교는 없고 일류과는 있다. 대학생도 용돈이 나오고 학비가 헐하다. 공부시간에 껌만 씹을 수 없고 누워서 엎드려서 자기 마음대로 공부를 할 수 있다. 아침 9시 부터 오후 4시 까지 이동식 수업을 하고 하교 한다. 보충수업도 자율학습도 없었다.
청소년들은 18세 이상 부터는 부모로부터 독립 한다. 정부에서 40만원의 용돈을 주지만 모자라는 형편이다. 그래서 대학생들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닌다. 그러는 것이 이곳이서는 정상이다. 고급 자가용을 타는 야타족은 있을 수 없다.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그들은 몸소 배우고 있었다.
전국토의 78% 가 정부의 땅이다. 부동산 투기는 있을 수 없다. 집은 영구 임대 주택으로 되어 있어 집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형편이 좋아지면 큰 주택에서 살면 된다. 그러나 큰 주택은 원하지 않는다 세금이 비싸기 때문이다. 은행은 이자가 없고 병원도 무료다. 실업수당이 나오고 대중교통도 정부에서 운영한다. 5년 전 까지 요금도 받지 않았는데 요즈음은 조금씩 받는단다. 그러나 개인은 많은 세금을 내어야 한다. 세금을 낸사람에 한해 모든 혜택이 주어진다. 아이는 태어 나자마자 돈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젊어서 실업수당을 타서 사는 사람은 늙어서 연금이 없다. 왜냐하면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어서도 실업수당을 무한정 주는 것은 아니다. 40세 까지만 주고 그 후는 포기 한다. 직장의 정년은 63세 까지이며 그 후는 연금으로 산다. 국민들은 자립심이 강하고 검소하여 덩치가 큰 사람들도 큰 차를 사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국민차 정도의 작은 차들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작은 사람 일수록 무슨 보상 심리가 작용 했는지 큰 차를 산다.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우리나라와 큰차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작은차가 힘이 없어 고개를 못 오르는 문제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다.
5. 죽어서 빛을 발하는 삶
일성 이준 열사의 묘가 있었던 헤이그, 이곳에는 지금도 행정 관료들이 많이 살고 있는 행정 도시다. 인구 65만의 작은 도시지만 인구 분산책으로 이정도 인구가 모인 도시도 드물었다. 35%가 국가 공무원이 살고 있는 도시다.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모스코바를 들려 이곳까지 온 이준 열사, 그는 을사보호조약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 했지만 회의에도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그 울분을 참지 못해 활복 자결을 한것이다. 일설은 활복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죽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 죽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 후 시신을 이곳에 묻었는데 박대통령 시절(1963) 에 서울로 이장하고 이곳에는 열사의 비와 묘터만 남아 있었다.
네델란드 헤이그, 이준 열사의 묘역에서 떨어진 낙엽과 얼어 붙은 물을 보며 나라 잃은 설음을 달래던 열사를 생각 했다. 때마침 택시 만한 연구차가 들어 왔다. 가족도 한두사람 뿐 슬피 우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이준 열사는 더 쓸쓸 했으리라. 살아서의 영화 보다 죽어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 하면서 차에 올랐다.
네델란드의 상징인 풍차마을 까지는 한시간이 걸렸다.
머리가 띵하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고 차 타고 내리고 사진 찍고 메모하고 아직 13일 중 10일 이나 남았는데 지쳐서 쓸어 질 것만 같다. 좋은 것과 나쁜것들이 공존하는 나라,88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암스텔담, 흐르지 않는 물, 나는 살며시 잠이 들었다.
풍차마을, 이제는 풍차도 흔하지 않아 우리의 민속 마을식으로 풍차마을을 지정하고 있었다. 전국에 남아 있는 풍차는 이제 600여개 뿐이란다. 기계화에 밀려난 셈이다.
우리의 민속촌과 같이 들어 가는데 입장료를 받았는데 2달러 50센트였다. 막 문을 들어 갈려는데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사진기 삿터를 정신 없이 누르고 있었다. 나올 때 사진이 마음에 들면 찾으라는 것이다. 내부에는 치즈공장이 있었다. 작은 선물도 팔았다. 우리의 국력이 이렿게 큰 줄은 몰랐다. 여기서도 간단한 우리 말이 통한다. 관광객이 많이 온 탓이라 하기엔 그들이 우리 말을 너무 잘 했다. 우리는 손을 호호 불며 사진 찍기에 바빳다. 흐르지 않는 물 주위로 풍차들이 열병을 하고 있었다. 간단히 사진만 찍고 차에 오르는데 사진 찍던 아가씨가 담배를 물고 사진을 보란다. 언제 현상을 했는지 추위와 피로에 지친 내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4달러를 주고 사진을 찾았다. 내 모습을 여기에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였다.
지금 버스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헤치며 왕궁을 향해 달리고 있다. 전국토가 해저인 나라 화장실도 돈을 주고, 물도 사먹어야 한다. 물의 나라에서 물을 사먹다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수도꼭지를 꽐꽐 틀어 물을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는 하늘의 은총을 입은 나라다.
흑인 동네에서 나오는 전동차에는 낙서 투성이었다. 여기서도 문화의 차이는 있고 잘살고 못사는 수준의 차이는 있었다. 영화 개인교수의 여주인공 실비아 크리스탈은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네델란드 출신의 여자다. 스피노자는 스페인 출생으로 네델란드에서 활동하다 죽었지만 그의 말은 영원히 남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 할지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 고호는 프랑스에서 활동 했지만 네델란드 사람이다. 이곳은 왕립 미술학교가 있다. 차를 다고 가면서 이나라에 관한 것들을 머리에 떠올렸으나 정리가 되지 않았다.
비둘기 광장으로 불리는 왕궁에 도착하자 시간이 너무 지체 되어 버스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임박 했기 때문이다. 버스로 스치면서 사진기의 삿다만 눌렀다. 나풀레옹에 의해 불타버린 왕궁으로 내부는 거의 비어 있단다. 수리를 한 곳은 시청사로 쓰고 있다는 말만 믿으며 공항으로 향했다.
스위스의 쥬리히에 도착한 것은 밤이었다. 예쁜 현지 가이더가 나와 반겼다. 스위스에는 바다가 없다. 림마트강이 쥬리히에 흐르고,대중교통수단은 전차와 전기 버스 뿐이다. 독일의 라인강은 스위스에서 시작한다. 쥬리히에서 30년 동안 운항하던 폐차 직전의 전차가 북한에 수출 된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26개 지방 자치국으로 형성 된 나라, 알프스와 유라산맥 사이에 위치한 도시가 스위스의 쥬리히다. 우리가 묵을 호텔 쉐라톤은 해발 500 M 에 위치하고 있다. 스위스는 독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진짜 독어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제주도 말과 서울말 차이 정도란다. 일상언어는 스위스 독일어를 사용한다.
현지 가이더의 빠른 말을 대강 적어 본 스위스의 소개다. 너무 피곤한 나는 호텔에 도착하자 그대로 뻗어 버렸다.
6. 눈쌓인 산은 등산열차를 감싸고
여행을 떠나 온지 4일 째가 되는 날이다. 네델란드와 벨기에를 거치면서 두밤을 지냈고 스위스에서 하룻밤을 샛으니 그러 했다. 이제 우리 일행들도 지쳤는지 감기 환자가 속출했다. 여행은 차라리 강도 높은 훈련 보다 더 고되었다. 바쁜 일정이 그렇게 만들었다. 한가지를 봐도 알차게 보고 싶었다. 여기는 30년 전 부터 쓰레기 분리 수거를 유럽에서 처음으로 실시 했단다.
꽃을 곶은 버스는 처음이었다. 관광지가 따로 없는 예쁜 나라다. 칸톤쭉의 민방위 본부 견학을 갔다. 산이 있고 계곡이 있는 쥬리히, 우리나라의 강원도 골짜기를 가는 기분이 들었다. 시냇물도 굽이쳐 흐르고 그러나 높고 낮은 곳의 초지 만큼은 달랐다. 국토의 70%가 산악이고 그의 70%가 알프스 산맥이다. 다년생 목초는 봄 여름 가을 까지 가축의 먹이가 된다. 국토의 25%가 숲이고 인공림이 대부분이다. 해발 2500 M 이상의 고산지대가 25%로 눈덮인 산이다. 호수가 3%이며 25%가 초지다. 그리고 국토의 25%가 거주가 가능하며 인구는 외국인 115만을 합하여 700만이다. 국민의 60%가 독일어권이고 30% 가 불어권,그리고 10%는 또다른 말을 사용하므로 국어로 인정하는 말이 무려 4가지다. 단일민족 단일어를 사용하는 우리나라가 정말 자랑스럽다. 산악지대인 스위스, 자원이 거의 없는 스위스 보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축복 받은 나라 인가. 우리가 찾으려던 민방위 본부에 도착했다.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여자들은 본인의 원에 따라 참여 한다. 중립국인 스위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민방위대를 한번 더 생각하게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의 긴장이 없어짐에 따라 민방위대원도 줄일 계획이라지만 이들의 나라 사랑은 우리가 배워야 할 과제였다. 민방위 교육장도 어마어마 했다. 전시에 정전을 대비한 자가 발전 시설을 비롯하여 몇 달을 지하에서 살수 있도록 지하요세를 만들어 놓았다. 민방위 본부건물 밖으로 잔디가 파란 축구장이 인상적이다.
우리 일행은 이제 리기산을 향하고 있다. 125년 전에 등산열차를 놓았다는 곳, 쭉의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곳, 사슴이 그려진 도로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동물 보호 사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스위스는 바다가 없어 해산물이 나지 않는단다. 맛있는 물고기 회를 모르고 해물잡탕을 모른다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 해발 4000 M 이상의 산이 48개나 있다는 나라, 등산열차를 타는 역은 루째른 호수 바로 곁에 있다. 호수 옆으로 관광도로가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주변으로 집들이 그림 같이 서 있다. 초지와 집과 호수가 어울려 카랜다 속의 그림을 현장에서 보는 느낌 그대로 였다. 기차를 타는 곳을 위치나워라 했다. 호수와 산 초지 나무 눈덮인 산 우리들은 삿다를 정신없이 눌렀다.
알프스의 필라투스봉은 해발 435 M 다. 여기서 부터 리기산은 시작 되었다. 해발 1752 M까지 오르는 데는 등산열차와 케이불카가 있었다. 호수 위로 펼쳐진 필리투스봉, 눈덮인 산 나는 분명 그림 속으로 가고 있다. 보통레일을 깔고 가운데 큰 톱니마퀴 레일을 깔아 톱니바퀴가 열차와 맞물려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었다. 기차는 톱니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호수와 초지 그리고 설경은 기차를 감싸고 있었다. 환호를 지르고 삿다를 누르고 자리에 앉지 못하는 철부지 아이가 되었다. 한달에 두번 본다는 화창한 날씨도 한몫을 했다. 한참을 오르니 RIGI STAFFEL (1603 M)이라는 역이 나왔다. 산중턱에 사는 사람들이 짐을 들고 내렸다. 짐과 우편물을 짐만 싣는 케이불카에 옮기더니 다시 차에 올랐다. 정상까지는 8개의 역이 있단다. 짐은 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 되는 짐이었다. 그들에게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등산열차다.
기차에서 내려 정상 까지 200여 M를 걸어서 올라갔다.
리기산은 알프스의 산맥 중 알프스산이 잘 보이는 산이다. 눈을 밟으며 리기산 정상을 오르다 보니 그 동안 쌓였던 피로도 풀리는것 같다. 정상은 눈의 바다,구름의 바다였다. 저 멀리서 호수가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눈을 뒤집어 쓴 사철나무들이 엎드려 있고 그림같은 집들이 산중턱에 숨어 있었다. 기차 타는 곳 까지 내려 오면서 우리 일행은 모두 아이가 되어 장난을 쳤다. 서먹서먹하던 사람들도 갑짜기 친하게 되었다.
눈 덮인 알프스 산맥, 알프스 산맥에는 리기산 같은 산이 수 없이 많단다. 그 중에 이 산이 가장 아름답다. 정상 바로 밑에는 산장이 있다. 추위에 손을 녹일 겸 산장에 들어 갔다. 이 산에는 이 산장 말고 산장 같은 가정집도 여러체 있었다.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엄마가 끌어 주는 평화스러운 풍경도 쉽게 볼수 있다. 지금 까지 침묵만 지키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한마디씩 했다. 아마 여기서 머물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모양이었다. 여자 가이더의 대부분은 여기에 왔다가 이 아름다움에 취하여 정착하게 된 사람이라고 하니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분위기에 약하다는 말을 실감하는 증거가 되었다. 남자인 나도 그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7. 상식적으로 살아서 바보소리 듣지 않는 나라
스위스 - 리기산 정상, 등산열차, 쥬리히 시내, 뉴니온 뱅크, 페스탈로찌 동상, 클라르부르 중등부 학교
리기산 정상까지 철도를 놓은 125년전의 스위스 사람들, 일찍 부터 산과 더불어 살아 온 그들, 그들은 이제 산을 정복하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여기와서 안 사실이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등산열차 역에다 우편함을 설치하고 스스로 찾아 간다. 우체부가 일일이 갈수 없고 사람들 또한 교통수단은 열차 밖에 없으니 어디를 가도 이 역을 통과 해야 하니 우편함도 집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역에다 설치 한것이다.
내려 올 때는 두역만 열차로 오고 나머지는 케이불카를 탓다. 케이불카를 타는 멋은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눈을 뒤집어 쓴 나무들 위로 우리는 내려가고 있었다.
스위스는 전 인구의 7% 만이 농업이다. 공업국가로 일찍 부터 바꾸어서 산 뿐인 국토에서도 초지를 조성하고 잘 살고 있었다. 스위스는 호수가 1000여개 있다. 특히 리기산 주위에는 4개의 호수가 있는데 이곳 쥬리히 호수가 3번째로 크단다. 길이가 40 KM 에 달하며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 145M 나 된다고 했다. 림마트강이 흐르는 쥬리히 호수, 호수 주변의 개발을 100여년 전 부터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람선이 있고 개인요트도 있다. 호수를 가로 지르는 다리는 없다. 이들은 다리를 놓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란다. 호수의 풍경을 헤칠까봐 그 먼 길을 돌아서 호수가 시작 되는 부분에 다리를 놓았다. 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속에서 살기를 일찍 부터 깨우친 것이었다. 호수 주변에 늘어서 있는 집들을 봐도 알수 있었다. 리기칼트발트 라는 자동차가 안다니는 휴양 마을도 있다니 더욱 그러 하다. 자연을 사랑하며 자기 방식 대로 사는 스위스인 무슨일을 하든 인생을 즐기며 사는 이들.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한 40대 라면 번듯한 집이 있어야 하고, 좋은 차가 있어야 하며 자식이 일류대학에 들어 가야 한다는데, 스위스 사람들의 척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와는 문화가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기는 해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들이 사는 방법도 조금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빵한조각으로 아침을 때웠다. 이들의 아침식사는 간단했다.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고기도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다.
스위스 쥬리히 시내를 관광 하다가 건물에 붙여진 숫자를 보았다. 그 숫자는 건물이 지어진 연대를 나타낸단다. 1325년에 지어진 건물이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보통 건물의 벽 두께가 1 M도 넘었으며 한번 지으면 허물지 않는 것 또한 특색이다. 쥬리히 시내에서 가장 예쁜 골목으로만 알려진 길을 가다보니 우리나라 높은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은행이 있었다 뉴니온 뱅크, 나라 안은 지금도 비자금 파문으로 연일 야단이라는 데 이 은행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건물 벽에 붙어 있는 시계의 지름 알아 맞히기를 했다. 지름이 8.7 M나 되는 시계가 건물에 걸려 있었다. 과연 시계의 나라였다.
PESTALOZZ (1746 - 1827) 교육대학에서,사범대학에서, 교육대학원에서 각종시험에서 이름만 외우던 그의 동상 앞에 나는 서 있다. 단순히 기념촬영만 하고 가야 될 것 같지 않아 묵념을 했다. 시내 중심지 도로옆 백여 평의 잔디 위에 아이의 손을 잡고 서있는 그의 동상은 그의 업적 만큼이나 내발과 마음을 묶었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중학교 방문을 위해 버스를 탓다. 시내를 흐르는 강물이 계곡물 보다 맑았다. 이들은 완전 정화된 물을 흘러 보내고 있단다. 이 강물에 여름에는 시민 수영 대회도 열린다니 부럽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쥬리히 호수에도 여름이면 수영을 할 수 있다. 낚시도 할 수 있는데 낚시세라는 것이 있기는 해도 형식적이다. 스위스는 상식적으로 살아서 바보소리 듣지 않는 나라이다. 국민성은 신중하여 느리다 싶을 정도다. 물건을 사고 거스름 돈을 주어도 한 몫에 주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금액의 돈 부터 차레로 하여 나중에 큰 돈을 준다. 끝까지 기다려 돈을 받지 않으면 낭패를 당한다.
클라트부르 마을의 중등부 학교를 방문했다. 스위스에도 네델란드와 같이 학교 이름이 별다르게 없다. 그저 어느 마을 중등부 학교다. 교문도 없고 학교이름을 써붙인 간판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건물이 몇개 보일 뿐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달랐다. 운동장에는 파란 잔디가 깔려 있고 농구장에는 우레탄이 깔렸다. 실내 체육관도 있다. 교실은 방이었다. 카펫트가 깔려 있고 교사 연구실이 교실 마다 붙어 있었다. 학교에는 교장, 교감이 없다. 학교 건물 배치도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이사회는 우리나라의 육성회 같다. 한반에 20명, 45분 수업을 하는데 주당 28시간 정도이다.
8. 예술에 대한 기대로 잠이 오지 않고
스위스 - 클라트부르 중등부 학교, 오스트리아 - 비엔나 국제공항,국립중앙 묘지
스위스는 의무교육이 9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들은 3년정도면 외국어를 마스타 한다. 화학실, 어학실, 가사실습실을 구경했다. 교사와 학생이 같이 앉아서 실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교사인지 모를 정도로 외부사람이 와도 실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음악실은 넓은 방에 책상이 스무개 정도 밖에 없었다. 여러 악기들이 고루 배치 되어 있었는데 이곳에는 학생들 뿐 아니라 마을어머니 합창단, 아버지 합창단도 수시로 와서 연습한다고 했다. 교사 휴게실도 무슨 레스토랑 같이 꾸며져 있었다.
민선으로 뽑힌 학교 책임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우리를 안내 하던 선생님은 특수반을 담당하는 분으로 이학교에서 경력이 가장 많은 분이었다. 학교 책임자는 명예직으로 연말 파티시 심부름 정도를 한다고 했다. 그는 이학교를 책임지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주 5일 수업등은 이분들이 모여 결정을 한다고 했다. 우리들의 질문도 그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문제 폭력 문제는 없다. 퇴학은 있을 수 있지만 아직은 없었다. 학교 건물 배치도 공격적 성격을 줄이도록 이사회에서 결정하여 배치 했다. 체벌은 금지되어 있다. 학생들은 스위스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는데 일정한 국가고사를 치고 들어 가지만 졸업이 문제다. 특히 김마즈음이라고 인문계 고등학교가 있는데 아주 우수한 학생들이 가는 곳도 있다. 여기는 학년 상관없이 입학시험을 칠 수 있다. 이곳 학교의 방학은 말 그대로 방학으로 숙제도 없이 쉰다. 중학교 교사의 봉급은 첫해가 10만프랑 약 9만불이다. 20년 경력자면 14만 프랑으로 연봉을 받는다. 교사는 강의 뿐으로 학습 준비는 각자가 알아서 준비하며 우리의 직원 회의와 같이 교사들이 모여 회의 하는것은 없다. 출근과 퇴근도 자유다. 교사 채용은 교사가 일정한 서류를 가지고 오면 이사회에서 결정 한다. 보통 6년 계약을 하지만 1년 계약도 있다. 교사 자격증은 김나즈음의 졸업시험 통과가 교사 자격증이다. 같은 자격증이면 이지방 출신 사람을 우선으로 채용 한다. 현재 실업계 중등반 교사가 200여명 부족 하다. 학교에 따라 남는 학교도 있다. 교사의 평가는 주민이 선출한 사람 3명이 모여 평가를 한다. 우리나라의 학교운영 위원회를 연상하게 했다. 교사가 20년 경력자면 교사 평가표도 20장이 그의 이력서에 붙는다.
칸톤쥬리히 이사회는 주민들이 선출 한다. 이들은 하는 일이 각기 다르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사람, 노동자 등이다. 이들은 일정한 시간을 학교를 위해 봉사 한다. 월급은 없지만 근무시간은 수당이 나온다. 오늘 이분도 이시간 만큼은 수당을 받는다. 스위스는 국회의원도 직업이 아니다. 직업은 별도로 있고 국회의 일을 본다.
교장은 바로 이사회 회장이며 주민들이 민선으로 뽑는다. 지역 주민 중에 학교를 가장 잘 관리하는 사람을 뽑는다. 체육대회도 소풍도 전체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반별로 한다. 학교 신문도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학교 선전용이 될 수가 없다. 중등부 3학년은 주 34시간인데 16시간은 수업이고 18시간은 선택을 하여 취미 생활을 하고 있다.
학교를 들어 갈 때는 울도 담도 없는 학교라고 비웃었는데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내부적으로 들어가 보니 모두가 형식이 없으면서 아주 능율적이라는 것.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음을 보았다. 무엇이 학생을 위하는 가를 알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흰눈이 우리를 반겼다. 천지는 백설로 덮혀 있었다. 비엔나는 독어로 빈이라고 한다. 비엔나의 3분의 1은 알프스 산맥이다. 그래서 스키학교가 있을 만큼 눈과 관계가 깊은 나라다.
6시에 일어났다. 예술에 대한 기대 였을까 잠이 오지않았다. 피로도 겹쳐 있었다. 입술이 마르는 것으로 보아 입덧이라도 날것만 같다. 어제 부터 우리 일행은 작은 회의가 소리없이 열리기 시작 했다. 헝가리를 갈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헝가리를 가려면 백불을 내야 하는데 대부분 찬성하지 않았다. 헝가리를 가는데 이왕 맞춘버스가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돈이 들일이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주장이다. 헝가리를 안가도 버스는 타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는데 간다고 더 들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여행사에서는 백불을 내란다. 벨기에 갈 때도 더 들것이 없는데도 우리는 7만원을 냈기에 돈의 쓰임을 알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기로 했다. 이런기회가 아니면 또 언재 헝가리를 갈것인가 ?
9. 부귀와 영화는 끝이 없고
오스트리아 - 국립중앙 묘지, 예술가 묘역, 쉬엠부르 여름궁전,
오스트리아는 우리나라의 한겨울 같은 풍경이다. 눈이 20 CM 나 쌓이고 거리는 썰렁하다. 국립중앙묘지에 도착 했다. 이런 날씨에 묘지를 찾는다니 왠지 괴기스럽게만 느껴져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78만평의 묘지는 까마귀가 날고 있었으나 생각과 달랐다. 우리나라 묘지와 달리 오스트리아는 묘지도 예술이었다. 차라리 집을 짓고 있었다. 지위와 돈에 따라 묘역을 치장 했는데 대리석으로 금으로 묘역을 치장 했다. 수백년 전부터 내려 오는 묘역에는 온 가족이 묻힌 묘역도 있었다. 관 하나에 조상 대대로 뼈를 넣는다니 우리와는 무척 다른 풍습이었다. 이들은 가치관이 우리와 달랐다. 겉모양만 야단스러웠지 이승과 저승을 우리와 같이 인정하지 않았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 다는 그런 태도 였다. 그들의 가치관은 무엇일까? 예술가 묘역에 갔다. 베토벤과 모짜르트, 슈베르트, 브라암스가 나란히 뭍히어 있었다. 사실 모짜르트는 동상만 있었고 묘역은 다른데 있다고 가이더가 귀뜸을 해 주었다. 이들 예술가의 묘역을 보며 삵과 죽음과 예술을 생각하게 했다. 초등학교 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배우면서 무슨 뜻인지 모르고 지껄이기만 했는데 여기에 와 보니 그 뜻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특히 브라암스 묘역 옆에 있는 어느 건축가의 묘역을 보니 더욱 그러 했다. 이 건축가는 철도와 다리를 설계하고 나서 그 다리와 철도가 무너질까봐 기차가 움직이기 전에 자살을 했단다. 그는 진정한 예술가 인가. 아니면 양심적인 사람인가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시대에 그와 같이 자기일에 책임 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귀가 따갑도록 추위를 느끼며 성당 묘역을 찾았다. 초라한 대통령의 묘역을 보았다. 6명의 대통령이 차레로 묻히었는데 땅이 적어 관을 세워 묻었다. 우리나라의 동작동 국립묘지가 떠올랐다. 국립중앙묘지를 나오며 화려한 귀족 묘앞에 섰다. 죽어서까지 부와 명예를 누리려는 인간의부질 없는 욕망을 나타내는 표본으로 보인 것은 너무 추웠던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쉬엠부르 여름 궁전에 가는 길이다. 차창 밖으로 내다 본 풍경에는 높은 지붕위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자주 보였다. 그들은 눈을 치우지 않으면 건물이 위험해서가 아니란다. 지나가는 행인이 지붕에서 떨어지는 눈에 맞아도, 또 미끄러져도 건물 주인 책임이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볼 때는 배꼽을 쥐고 웃을 일이었다.
가이더의 설명이 중단되고 갑짜기 방송이 나왔다. 그것은 중요한 교통 정보를 라디오가 자동으로 켜져서 알리는 것이란다. 신속한 교통정보 제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쉬엠부르 여름 궁전은 1440개의 방 중에서 40개가 공개 되고 있었다. 이 궁전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지어진 것이다. 합수브르크 가(家)의 여름 별장이다. 18세기의 마리아 트레시 여왕이 살았던 곳, 엘리자베드 왕비가 아들 5명 딸 11명을 거느리고 살았던 곳이다. 금 1천KG이 도금된 별장이다. 요셉 1세는 68년간 재임 하면서 이곳을 이용 했다. 그의 증손자 펠터난도의 암살이 2차대전의 발발 요인이 되었고. 마리아트레시의 아들 요셉 2세는 음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몹쓸병에 걸려 자살을 했다. 나풀레옹도 기거 했으나 그의 아들은 23세 때 여기서 어지럼병으로 사망 했단다. 아버지가 성하면 아들은 망하는 것일까? 나풀레옹의 명성에 그의 아들은 짧은 생애에다 명성도 없었다. 천장의 그림, 벽난로의 금도금, 화려한 무도 회장, 수백년 전의 욕실과 침실 소파가 요즈음의 것과 너무나 흡사한대 놀랐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은 궁전, 절대군주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왕벌을 모시는 벌들의 세계, 우리나라 TV의 동물의 세계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지금도 무도회장은 국가원수들의 접견실로 쓰인다고 한다. 특히 엘리자베드 왕비의 침실에 있는 거울, 화려한 거울을 서로 맞보게하여 벽을 장식했다. 그 끝을 볼수 없도록 한 것은 예술이 극치였다.
지금은 개인에게 불하를 하여 관리하고 돈을 벌개 하는것으로 퇴색되 버린 궁전,공동묘지를 구경한 다음이여서 일까? 백성의 피와 땀을 요구하던 군주는 어디가고 이제는 구경거리로만 남아 있어 인간의 부귀와 영화는 끝이 없고 또한 일시적이란 것을 실감 하게 했다.
오스트리아는 전차와 자동차가 공존하고 있다. 사회복지제도의 문제점으로 사유제산은 인정하면서도 팔때 이익이 없어 집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전세 값이나 사는 값이나 비슷하지만 살 경우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또 입주자 보호가 잘 되어 굳이 살 필요가 없다. 한번 계약하면 죽을 때까지 큰 잘못이 없으면 계약 당시의 금액으로 살수 있다. 단 집을 고치면 금액을 올릴 수 있는데 그것도 전세를 사는 사람이 동의를 해야 한다. 그러나 입주자들이 잘 고치려 하지 않는다. 한집에 여러집이 산다면 입주자 전원이 찬성해야 한다. 건물 주인의 자식이 산다고 해도 다른 집을 얻어주고 아들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잘 사는 사람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기도 한다. 금은 개인소유가 금지 되어 있지만 14 K 까지는 관계 없지만 18 K 이상 순금은 안된단다.
10. 아리랑에 취하고 와인에 취하고
오스트리아 - 링거리, 선거벽보, 전통식당
한국의 명동, 캐른트너 링( RING ) 거리, 모든 집들의 번지가 1번지인 링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148 - 147 - 146... 등, 차들도 사람들도 집 찾기는 무척 수월해서 좋을 것 같았다. 링거리는 환상의 거리였다. 인종 전시장 이었다. 한국의 명동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바뿌게 또는 느리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음악의 나라 예술의 나라 답게 가는 곳 마다 아름다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외모만 거창하고 아름답게 꾸민것이 아니다. 영구적인 건물을 짓고 설계자가 책임을 지고 명예를 건다. 동상도 예술인 나라, 서있는 동상이 나의 상식인데 동상의 포즈도 앉아 있고 구부려 있고 말을 잡고 있고 타고 있고 너무나 다양하다.
팁이라는 문화가 있다. 아주 작은 금액으로 1불씩, 자고 나면 벼개 위에 놓는데, 이들은 벼개 위에 것만 청소하고 가져 간다. 같이 온 어떤 사람이 팁을 방안 탁자위에 놓았는데 가져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팁이 아니라 손님의 돈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이들은 정직이 몸에 배여 있었다. 이 정직성과 책임감을 배워야 할 것만 같다.
차를 타고 가다 보니 가로수 옆으로 대형사진이 자주 보였다. 그것은 우리나라로 보면 선거 벽보였다. 벽에 붙이거나 전봇대에 이름을 써서 크게 매다는 것이 아니라 가로수에 기대어 놓아 도시 미관을 크게 해치지 않아 좋았다.
수백년 전에 지은 건물들이 거리에 즐비했다. 그 사이로 4차선 도로에 자동차가 다니고, 전차길이 별도로 있어 전차가 다녔다. 수백년 전에 이렇게 큰길을 생각한 그들이 부러웠다.
공원이 많았다. 인생을 즐기며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즐기며 산다는 것 그것은 생활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동반하겠지만,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여름에는 거리에 사람 구경하기가 힘든다.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가치관의 혼돈이 왔다. 나는 과연 인생을 즐기며 살았던가를 자문자답 해 본다. 너무 살기에 바쁜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나는 가치관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지 않는가 ?
영화감독 신 모씨와 여배우 최모씨가 탈출 했다는 집을 지나고, 슈베르트가 테어난 집을 지나왔다. 베토벤은 80번 넘게 이사를 했단다. 본인은 귀가 멀어서 피아노 소리를 못 듣지만 이웃사람들은 그 소리가 싫었던 모양이다.
오스트리아의 전통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에 들어가는 길 부터 다른 분위기 였다. 우리나라의 민속 주점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구석진 방에 우리 일행은 앉았다. 빵과 고기 야체 그리고 고구마 튀김 같은 것도 나왔다. 오스트리아의 농부들이 먹던 음식이라고 했다. 진짜 이나라 토종 음식이다. 이 식당의 자랑은 와인 이었다. 몇년 묵은 와인인가가 가치의 척도가 된다. 식사 중 몇 병의 와인이 나왔다. 잠시후 바이올린과 아코디온을 든 악사 두사람이 나왔다. 오스트리아의 민요가 연주 되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다가 건성으로 박수를 쳤다. 악사들은 우리나라 민요를 연주 했다. 아리랑과 도라지를 연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여기서 듣는 우리의 민요는 새로운 맛이 있었다. 타국에 온지 며칠 되었다고 심한 향수를 느꼈다. 우리는 따라 불렀다. 민요에 취하고 와인에 취하여 흥겹게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쳤다. 예술을 사랑하는 민족, 전통 오스트리아 식당에서도 아리랑과 도라지에 취하여 향수를 달래 보는 우리는 역시 자랑스런 한국인 이였다.
오늘은 우리나라를 떠난지 7일째가 되는 날이다. 아리랑과 와인에 취했던 우리는 새로운 기분으로 헝가리로 향했다.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도 네델란드에서 벨기에를 가듯 버스로 갈 수 있었다. 침침한 날씨다. 눈이라도 올려는 날씨다.
안녕하세요의 오스트리아 말은 ‘굳보르겐’ 이다.굳보르겐하는 운전기사의 밝은 얼굴이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해 주었다. 새벽을 가르며 버스는 헝가리 국경을 향하여 달렸다. 만남이라는 노래가 차안에서 흘러 나왔다. 가이더의 배려 인것 같았다.
이곳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 까지는 280 KM 로 자그만치 4시간 정도가 걸린다. 국경까지는 40분 거리다.
국경에 도착 했다. 국경이라지만 별다른 것을 볼 수 없었다. 경찰이 몇 명 서있고 작은 슈퍼마켓이 있으며 환전하는 곳이 있을 뿐이다. 네델란드에서 벨기에를 갈때는 아무런 제재가 없었는데 여기는 달랐다. 차를 세우고 여권을 하나 하나 체크 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헝가리에서 쓸 돈을 환전하고 물을 한병 샀다. 유럽에는 스위스를 제외하고는 수돗물을 마실 수가 없다. 음료수는 반드시 사서 먹어야 한다.
11. 깨끗한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담아야
헝가리 - 부다페스트, 부다의 언덕, 왕궁, 도나와 강, 케틴부리키 다리, 어부의 성, 영웅의 광장, 가브리엘 탑, 훈디야 성
헝가리는 국토의 3분의 2가 구릉지대다. 유럽쪽에서 우리민족과 유사점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데 더 친밀감이 갔다. 김춘수의 시(詩)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으로 알려진 나라다. 언어도 아시아 계통의 언어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부다와 페스트 두 도시를 합하여 부르는 말이다. 부다는 셈이라는 뜻이고 페스트는 평원이라는 뜻이다. 이나라에도 4계절은 있다. 이들은 넓은 땅을 다 가꾸지 못한다. 초지도 아닌 땅들이 그대로 놀고 있다. 우리나라의 부지런한 농부들 같으면 비닐 하우스를 해도 한참을 할 아까운 땅들이 겨울이라고 놀고 있는 것이 아깝다. 헝가리는 아직 우리 보다 못산다.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생각 할 만한 여유도 없는 나라다. 그러나 지하철이 생긴지는 100년 (1896년)이 다 되었다. 토산품 가계에는 바구니와 마늘 고추 과일 주 등이 널려 있었다.
눈덮힌 평원을 보며 쭉 벋은 도로를 달리고 있다. 자꾸만 떠오르는 일상사들 때문에 머리가 깨질것만 같다. 깨끗한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은 내 마음이 사악해서 일까 ?
사회주의가 남긴 헌건물들이 보였다. 그 옆으로 새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기술진들이 짓고 있는 것이다. 1989년 사회주의가 붕괴 되고 전환기에 있는 헝가리, 호텔 이름도 거리 이름도 바뀌고 있다.
식당 문화, 이들은 식사 때면 정장을 하고 떠들지 않는다. 식사시간도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그래서 단체 손님을 받는 식당은 망한다. 한국인은 빨리 먹고 나가기 때문에 이들은 좋아 한단다.
나는 지금 부다의 언덕 위에 있는 왕궁에서 도나와 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강을 건너는 케틴부리키 다리가 보이고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저 멀리 페스트시가 보인다.
도나와 강을 사이에 두고 부다와 페스트가 나누어져 있다. 도나와 강물은 흘러 말없이 흑해로 들어간다.이 왕궁은 13세기 부터 짓기 시작하여 짓다가 부수고 짓다가 부수고 하다가 마리아 테레시가 완공하였다. 수백년 세월 때문에 건물의 양식이 달랐다.1200년대에 시작하여 1955년에 완공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은 국립화랑으로 쓰이는 건물에선 우리나라 화가의 미전이 열리고 있었다. 또 역사 박물관 서적 박물관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밖에 나오니 헝가리를 구원한 유진장군의 동상이 외롭게 서 있었다.
왕궁 뒷문에는 한 여인의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이상한 동상이 있었다. 왕손 중의 한사람이 산속으로 사냥을 갔는데 길을 잃었다. 산속에 사는 여인과 사랑을 하고 혜어 졌는데, 그 여인은 그 남자가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인은 왕의 행차를 보게 되고 그 왕이 바로 자기가 기다리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자기와는 신분이 달라 만날 수 없음을 한탄하며 자살 했다고 한다. 동상에는 사냥하는 왕과 여인이 있고 사슴 토끼 들이 화살에 맞아 죽어 있는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왕궁을 내려 오니 어부의 성이 있다. 지금은 헝가리 여인들이 특산품인 보자기를 팔고 있지만 그 옛날에는 군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보초를 섰으리라. 부다에서 도나와 강을 건너 페스트로 가면서 케틴부리키 (혀 없는 사자상이 있는 다리)에서 엘리자베스(현수교)에 비치는 아름다운 석양을 보며 화려 했던 헝가리를 떠올렸다.
영웅의 광장에서 낙조를 맞았다. 오늘 하루도 바쁜 일정이었다. 뻥튀기 과자를 사서 아이들 같이 씹으며 광장으로 들어 갔다. 여기에 있는 가브리엘 탑은 1800년 말에 만들기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한 거대한 탑이다. 높이가 36 M나 되었다. 이탑은 만국박람회 대상 작품이기도 하다. 이곳에 유명한것은 온천수이다. 78도를 웃도는 온천수다. 이 높은 온도의 물은 식혀서 27도에서 38도를 유지하여 수영장같이 쓰고 있단다. 영웅의 광장 바로 옆에는 훈야디성이 있다. 1904년에 지어진 성으로 왕이 살았던 성이다. 지금은 농기구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었으나 건물은 무척 화려했다. 이 성은 헝가리의 유명 건물을 조금씩 본떠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영웅의 광장은 7부족상이 새겨진 거대한 문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광장 왼쪽에는 미술관 건물이 버티고 있었다. 영웅의 광장에서 로라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을 보며 불과 몇 년 전의 사회주의 시절을 그려 보았다. 사람도 별로 없는 광장, 앞뒤 옆에는 고풍스런 건물이 그 옛날의 영광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회주의가 붕괴 되던 해 1989년 부터 우리나라는 비자없이 들어 올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비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우리의 외교력과 크게 성장한 국력의 결과이다. 얼굴 표정이 딱딱하던 헝가리 사람들도 이제는 잘 웃는단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인에 대해 무척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니 반가웠다. 일본은 공업이 발달 했고 한국은 돈이 많은 나라로 통한단다. 한국이 과대 평가 된 느낌도 있었으나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12. 도나와 강의 물결
헝가리 - 부로드웨이 거리, 부다페스트의 야경, 오스트리아 - 도나와 강, 러시아 - 패테르부르그, 네바강, 데르미타시 박물관
헝가리의 부로드웨이 거리(극장과 음악당이 몰려 있음) 를 지나며 헝가리는 아직 가난이 문앞에 와 있다 (문만 열면 가난은 들어 온다)는 그들의 말이 되뇌어 졌다. 이들은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른다. 헝가리 방송국의 고풍스럽고 웅장한 건물을 보며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도나와 강에 섰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기 위함이다. 반짝이는 불빛, 다리위는 온통 불빛으로 장식 되어 한송이 꽃이었다. 특히 케틴부리켄 다리의 야경이 아름답게 보였다. 환상의 도시 동화의 나라 같다. 저 멀리 언덕에 자유의 여인상이 보이고 낮에 보았던 왕궁이 밤에는 불꽃으로 변해 있었다. 야경의 아름다움을 보며 우리는 다시 오스트리아로 차를 몰았다.
저녁 10시 넘어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녹초가 되었다. 내일은 러시아로 가야 한다.
러시아로 가기 위해 호텔에서 짐을 끌고 내려 왔다. 갈수록 짐의 크기가 불어 났다. 쇼핑하는 시간이 되면 선물 고르기에 정신이 없더니 모두 선물을 한아름씩 산 것이 분명 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도나와 강의 물결’ 이라는 음악을 들었다. 도나와 강은 두 줄기다. 강의 중간에 강 넓이 만한 작은 섬이 있고 그 섬 옆으로 두개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 색깔도 다르다. 여름에는 비엔나 시민들이 일광욕을 즐기기도 한다. 헝가리에서 보는 도나와 강과 오스트리라 에서 보는 도나와 강은 다른 느낌을 주었다. 도나와 강은 영어로 다뉴브강이다. 여름에는 온통 비엔나 시내가 수영복 입은 사람들로 메운다니 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젖줄이었다.
오스트리아 공항 면세점에서 남은 실링 동전을 처리 하기위해 슈퍼마켓이 들어 갔다. 한줌의 동전으로 껌하나를 겨우 삿다. 1실링은 70원 정도 인데 우리 돈으로 환산하여 250원 정도로 살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러시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계를 맞추었다. 한국과 10시간 차이에서 2시간이 줄어 8시간 차이가 난다. 차츰 우리나라와 가까워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은 비자가 필요한 나라, 공항 통관절차도 무척 복잡하다. 공항에 도착하자 현지 가이더는 주의 말을 잊지 않았다. 여기는 전쟁터와 같다. 항상 긴장하라. 귀중품을 조심하라. 무리 지어 있는 곳에 가지말고 날치기를 조심하라. 물건을 살때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지 말라. 특히 돈을 꺼낼 때 많은 돈을 남에게 보이지 말고 쇼핑하기 전에 쇼핑할 돈을 꺼내 다른 주머니에 보관 했다가 물건을 사라. 날치기 솜씨도 아직은 서툴지만 조심이 최고다. 한국의 어느 회사 사람들이 인질로 잡힌 사건이 있은 후 가이더들은 더욱 조심을 시키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지레 겁을 집어 먹었다.
패테르부르그(레닌그라드로 통한다), 화페가치가 너무 떨어져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환전이 안되는 러시아 돈은 루불이다. 1달러가 5000루불이다. 상점마다 물건값이 수만 수십만 루불이 보통이다. '낙옆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페' 라고 읊었던 시 구절이 떠오를 만큼 인풀레가 너무 심하다.
이곳 패테르부르그는 피터대제가 만든 도시다. 늪지대 였던 것을 1703년 부터 1712년 까지 도시 기반을 만들었는데 그후 200년간 러시아의 수도였다. 1917년 10월 혁명 후 모스코바로 수도를 옮겼다. 지금도 피터대제가 살았던 오막살이 집이 네바강이 흐르는 도시 가운데 숲으로 둘러 싸여 보존 되고 있었다. 2 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해 900일을 포위 당했던 도시. 2차 대전 승리의 탑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개선문을 지났다. 개선문은 10월 혁명을(1917년 레닌이 일르킴)기념하기 위한 문이다.
프랑스의 르불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인 데르미타시 박물관은 공휴일인 관계로 문이 닫혀 있었다. 전에는 제헌절 공휴일이 없었는데 엘친이 선거를 앞두고 선심을 쓰는 것으로 12월 11일 12일 양일간을 공휴일로 선포 해 버렸다. 2차대전 승리의 탑이 있는 네바강변에서 바라보는 데르미타시 박물관의 아름다운 야경으로 대신 할 수 밖에 없었다.
패테르부르그의 인구는 550만으로 모스코바의 1000만 보다 작았다. 우리나라 교민들도 여기에 2백명 정도 모스코바에 천명정도가 살고 있다. 폭설과 폭우가 없는 대신 수시로 내리는 눈 때문에 얼름이 녹을 날이 없는 도시다.
목각인형 ( 마뜨료씨까 )은 거리 어느 곳에서도 볼수 있다. 좌대를 펴고 목각인형과 털모자(샤프까)를 팔고 있다.
날이 어두워 호텔로 들어 갔다. 호텔 방은 미로를 찾아 가는 기분이다. 어떻게 보면 으시시한 느낌이 들 정도다.
아직 3일이 남아 있다는 지루함과 3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안타까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침 9:00 시가 지났는데도 어두움은 가시지 않고 호텔을 맴돌고 있다. 오늘은 시내 관광을 하고 모스코바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가방을 호텔에 둘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호텔에 큰가방은 두고 작은 가방만 메고 관광 하는 것이 보통이다. 큰 가방을 호텔에서 20M 정도 운반하여 버스까지 가는 데 포타(짐을 나르는 사람)를 쓰자고 난리다. 모두 지치고 게을러 진 탓도 있었지만 눈 때문에 미끄럽고 짐이 무거워진 탓도 있었다.
13. 배는 얼음에 갖혀 겨울잠을 자고
러시아 - 빼또르바오르 요새, 오로라 호, 꺼지지 않는 불꽃, 궁전관장, 스파스나 고로피 사원, 동물 박물관, 에카제리나 여제 동상, 랩스키 성당, 이삭 성당,
러시아는 눈 쓰는 일로 하루가 시작 된다. 호텔 주위에는 눈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일 눈을 쓸지 않으면 겨울 내내 쌓여 길이 높아지고 차도와 인도가 구분이 없을 정도 란다.
빼또르바오르 요세로 가는 길이다. 이 요세는 1780년에 완성된 요세다. 이 요세는 네바강변에 있어 반체제 문학가의 감옥으로도 쓰였던 곳이다. 피터대제의 뒤를 이어 이 도시를 만든 빼째르 대제의 흉상이 있었다. 그는 키가 2M 가 넘는 거구 였다. 요세에 들어 가면서 네바강을 보니 지금은 얼어 붙고 배는 얼음에 갖혀 겨울잠을 자고 있다. 얼음이 부풀어 솜처럼 보였다. 반체제 문학가들이 울분을 달랬을 네바강, 그들의 갈등 그들의 분노를 이 강은 알고 있는 듯 했다. 바람도 없는 날씨인데 피부가 따가워 견딜 수 없는 추위가 엄습해 왔다.
오로라호로 가는 길에 러시아 말을 한두마디 배웠다. 안녕하세요(도브로에 뿌뜨로), 낮인사(도브르 젬),저녁인사(도브르 왜체르), 무난하게 하는 인사(프리벳), 좋다(하라쇼), 안녕(빠까).
오로라호는 군함이다. 볼세비키 혁명의 발발을 알리는 첫포를 쏘았다는 배로 강기슭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러시아 병사가 지키고 있다. 공휴일이라 내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병사와 사진한장 찍고 돌아 서야 했다.
러시아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이것은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꺼지지 않고 타는 불꽃이다. 주요도시, 주요장소 마다 설치하여 행사 때는 헌화를 하여 무명용사의 넋을 달래는 불꽃이다.
궁전광장(겨울궁전) 앞마당에 와서 알렉산드리 1세 원기둥을 보고 있다. 황제권위를 실추한 두가지 사건이 있었던 광장이다. 하나는 피의 일요일이다. 집회를 한다고 신고를 했는데 부하들이 황제에게 알리지 않아 발포를 해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었던 사건이고, 다른하나는 볼세비키 혁명 당시 요인 체포 과정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스파스나 고로피 사원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폭사 당한곳이다.피의 구원의 성당도 있었다.
광장 앞에서 물건을 파는 이곳 사람들의 언손을 보며, 고풍스런 건물을 보며 화려 했던 옛 쏘련을 생각한다. 식당에 까지 찾아와 물건 사기를 권하는 그들, 이젠 자본주의 체질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있는 그들을 본다.
동물박물관, 수많은 동물 곤충들이 박제가 되어 있었다. 학생들의 교육장으로 어린이들이 많았다. 생물교사가 아니 더라도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구경시켜주고 싶다. 지금 우리학교 학생들은 자고 있을 것이다. 불현듯 학생들이 그리워 졌다. 며칠을 두고 구경해도 다 하지 못할 많은 박제들을 시간에 쫒기어 건성으로 구경하고 사진만 몇장 찍었다.
아래층현관(교실 다섯칸은 되어 보임)을 온통 매운 공룡의 뼈를 보며 맘모스의 박제를 모며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인간 보다 더 진화된 동물이 이 지구를 지배 하게 된다면 인간도 그들에 의해 암놈 숫놈을 구분하여 박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그 동물들은 인간을 사육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십만점의 박제된 동물,없어져 가는 동물의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들의 위대함 보다 박제가 된 인간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시내 관광을 하면서 에카제리나 여제의 동상앞에 섰다. 그는 남편을 독살하고 왕이 된 여인이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크다. 그에게 1년이상 버티는 남자는 없었단다. 그러나 그도 러시아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기에 동상으로 남아 있었다.
랩스키 대로에는 랩스키 성당이 있다. 성당에 들어 가는 길목에는 사과 괘짝 같은 좌대를 놓고 동전 한입을 구걸하는 걸인들이 줄을 서 있다. 주로 늙은이 들이지만 젊은 사람, 어린아이도 있다. 추운 눈위에 좌대를 놓고 손을 벌리는 그들, 노인들은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있어도 부모를 돌보지 않는 자식들이란다. 어떤 걸인은 좋은 옷을 버졌이 입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성당과 추위와 걸인이 크로즈업 되어 자꾸만 사라지지 않는다. 먹고 살기에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다는데, 빈부의 격차는 심했다. 동전을 던져 주는 우리 일행을 보며 이국 멀리에 와서도 어려운 사람에게 적선을 하는 모습은 보기에 싫지는 않았다.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눈위에서 구걸하는 그들, 작은 좌대에 목각인형 몇개를 놓고 싸다고 외치는 러시아 인들이 마치 20년 전의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삭성당에 도착했다. 패테르부르그에는 오래 된 건물 중 성당이 많다. 이삭성당 내부의 화려함에 한참동안 정신을 잃었다. 높이 100M 의 천장 현란한 조각과 그림, 과연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웅장함과 화려함이다.
14.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러시아 - 문학카페, 지하철 ,빼째르부르그 고항, 모스코바, 샤프까
문학카페는 그냥 지나쳤다. 200년이나 된 카페, 푸시킨도 이곳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었단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말라'고 외치던 그 푸시킨이다. 그는 아프리카 혼혈아 였다. 무척 예쁜 부인을 두었는데 그 부인 때문에 죽었다.
푸시킨의 부인을 평소 사모하던 못된 관리가 있었다. 하루는 푸시킨과 결투를 하기로 했는데 결투 중에는 실제 총알을 쏠수 없음에도 그 관리는 푸시킨을 실제 총알로 쏘아 버렸다. 푸시킨이 죽기전 아침을 먹었다하여 이 카페는 문을 닫았는데, 그 후 1980년에 다시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단다. 지금도 유명인사가 오면 이 카페를 들린다고 한다.
러시아 상인에게는 엄청난 에누리가 통한다. 한국인들이 자주가는 관광지에서는 한국말 한두 마디는 할 줄 안다. 주로 ‘싸다, 사라’ 였는데 ‘사라’고 하다가 내가 다시 ‘뭐 사라’ 하고 반문하자 그들은‘ 사세요’ 하고 존대말로 바꾸어 쓸 줄도 알았다. 여기에는 털모자 같이 생긴 ‘샤프까’가 유명하다. 남녀 노소 없이 모두 쓰고 다닌다. 추운 날씨 때문이다. 내가 샤프까를 사려고 하니 20달러를 달라고 했다. 너무 비싸다고 했더니 18달러에 하란다. 그래도 안한다고 했더니 차에 까지 따라 오면서 15달러에 사란다. 차에서 내려 다시 흥정을 하니 12달러에 가져 가란다. 샤프까는 여러종류가 있다. 털의 종류에 따라 무척 비싼것도 있다. 여기서 잠깐! 상인들이 차에 까지 올라 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흥정을 하는체 차에 올라와서 태러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돌발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돌발적이 아니더라도 관광객 차에 올라 올수있는 방법 중에는 물건을 흥정하면서 올라 오는 것이 가장 쉽다.
지하철 관광을 했다. 지하철 역 이름이 특이하다. 출발역 이름을 따는 것이 아니라 도착역 이름을 붙인다. 안동에서 서울 간다면 안동역이라 하지않고 서울역이라 한다. 지하철 내부는 무척화려했다. 크리스탈로 된 내부 장식, 현란한 불빛이 우리를 유혹 했다. 대리석으로 치장한 바닥과 기둥, 이들은 지하철도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1회에 800 루불, 무척 빠른 속도로 운행 했다. 이곳 패테르부르그에는 다섯개의 지하철 노선이 있다.
빼째르부르그 공항에서 모스코바로 가는 수속을 밟는데 3시간 이상이 걸렸다. 같은 나라를 가는데 무엇이 그리 복잡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모스코바까지는 1시간 45분이 걸렸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가도 40분이면 가는데 국토가 넓음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기내에서 스튜어디스들은 판매원으로 전략 했다. 물건을 파는 러시아 아가씨와 물건을 사는 우리 일행이 시장 바닥 보다 더 크게 떠들며 물건 흥정을 했다 누구 하나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모스코바에 우리가 묵을 호텔은 반쪽 올림픽으로 끝났던 선수촌 호텔이다. 침대도 보통 호텔 보다 반정도 좁았다. 야전 침대 같다. 침대를 보며 공산주의 80년의 냄세를 느꼈다.
물! 여기에서도 먹는 물은 구하기 어려웠다. 식당에서 조차 물을 팔고 있었다. 물 한병 (2홉 소주병정도)에 3달러나 했다. 물을 별도로 사지 않으면 쥬스만 나온다. 물의 나라 네델란드에서도 물을 사먹어야 했고,물을 지배 했다고 큰소리 치는 오스트리아도 계곡물이라지만 수돗물을 먹을 수는 없었다. 헝가리도 마찬가지였다. 스위스 만이 수돗물을 먹을 수 있었는데 러시아 특히 모스코바의 식수 사정은 더욱 심했다. 현지 가이더도 물을 구하기 위하여 물병을 들고 다녔다.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으면 붉은 색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물은 아직 얼마나 깨끗한가. 우리 물, 수돗물을 마음 대로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 세계는 바야흐로 식수의 전쟁인것 같다. 유럽에 와 보면 먹는 물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샤프까를 쓰고,....
우리의 털모자 같은 모자를 러시아 말로 샤프까라고 한다. 샤프까에는 내 아버지의 한맺힌 사연이 있다. 2차 대전 때 일본 놈들에게 끌려 간 보국대, 아버지는 중국 만주로 갔다. 그들이 시키는 것은 군수 물자를 나르는 일과 농사일이었다. 아무리 추워도 내의가 없었던 시절, 귀가 얼어 터져도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일만 시켰다. 그 때 아버지의 소원이 샤프까를 한번 써 보는 것이었다. 소련에서 들어 오는 고급 털모자 샤프까를 써보고 싶었던 아버지, 나는 지금 샤프까의 원조인 소련에 와서 50년 동안 맺힌 아버지의 한을 풀고자 샤프까를 샀다. 그리고 크레물린 궁전에 가서 한번 써 볼 계획이다.
모스코바의 코스모스 호텔 앞에서는 인공위성 기념탑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 했던 소련, 그 영향으로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과학 교육과정이 180도로 수정 되었다.
우리는 지금 크레물린 궁으로 가고 있다. 레일 없는 전동차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다. 지하절 역을 표시하는‘ M ’ 자가 가끔 눈에 들어 왔다. 모스코바에 스탈린 양식의 건물은 7개 뿐이란다.
15. 경제적으로 가난해도 음악회는 가고
러시아 - 크레물린 궁, 궁전극장, 붉은 광장, 굼백화점, 승리공원, 모스코바 대학, 알랙산드르 앙상불
연주회,
크레물린 궁, 크레물린의 뜻은 성벽이다. 이 사원을 짓기 시작한것은 12세기였다. 그때는 목재를 사용했는데 14세기에 와서 돌로 재건축을 했다. 그리고 15세기에 와서 현재의 붉은 벽돌로 지었다. 크레물린 궁은 일반에게 공개를 했다. 지금의 옐친도 여기서 집무를 보는데 공개를 하는 곳은 극히 일부분이다. 크레물린궁에 들어가는 데는 러시아 공항의 검색보다 몇 배나 더 엄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문을 들어 설 때 마다 무장 경찰이 검문을 했다. 라이타가 주머니에 있어도 ‘삐’ 소리가 났다. 우리는 모두 불안해 했다. 레닌의 집무실은 저 멀리서 겉모습만 보여 주었다. 옐친의 집무실은 저기 어디라는 말만으로 족해야 했다. 일반에게 공개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원 3개와 종각, 종각은 높이가 81 M 였다. 그 이상의 높이는 짓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옛날의 궁전과 궁전극장이 있다. 왕실의 전용 가족교회, 그리고 깨어진 큰 종이었다. 크레물린 궁전은 화려 하다. 밖에서 보기에는 우리나라의 학교 건물 같은데 내부는 이삭성당의 몇배나 화려 하단다. 그외에는 경비 군인의 호각소리에 놀라 한발짝도 들어 갈 수가 없었다.
붉은 광장, 자주 신문에 오르내리는 광장이다. 사실 붉은 광장은 붉은 색으로 된것이 아니었다. 붉다는 뜻은 아름답다는 뜻으로 붉은 광장은 아름다운 광장이다. 광장 저멀리에 지붕이 화려한 성당이 보이고 옆으로 옛날 건물들이 있었는데 크레물린 궁전 바로 옆에 있다. 성당 바로 옆에는 죄인들을 공개 재판하여 처형하던 처형대가 있었는데, 어느 관광객들이 동전을 수없이 던져 놓았다. 아마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한인 듯 싶었다.
크레물린 궁전에서 붉은 광장으로, 굼백화점으로 옮겨 가며 구경을 했다. 굼백화점은 무척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 옛날 부터 백화점을 했던 건물로 점심 때 였는데 상인들은 이제 좌대를 펴고 혹은 삿다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크레물린 궁전과 붉은 광장에서 아버님께 드리려고 산 샤프까를 꺼내 쓰고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도 아버님께 드리고 싶다.
러시아의 여인들은 예쁜사람이 많다. 작은 얼굴, 파랗고 큰 눈, 흰피부, 큰키 ..., 날씨는 은근히 죽이는 날씨다. 코끝과 손끝, 뺨이 따가워 견딜 수 없다.
승리공원이다. 전승기념관, 전승공원이라고도 한다. 2차 대전 승리의 기념으로 1995년에 완공한 공원이다. 준공식에는 옐친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클린턴, 콜수상 등 세계 열강의 지도자 들이 참석 했단다. 기념관 내부에 들어가니 2차 대전 당시의 모습을 실물과 사진을 합성하여 만든, 전시실 하나를 다 차지하는 대형 전시실이 여러개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 갈 때는 웃옷을 벗어야 하고 큰소리도 치지 못하게 했다. 그 외에 당시의 기록 사진과 실물이 전시 되어 있다. 전시된 사진 중에 전쟁에 나오라는 선전문의 큰 글자 ‘조국 어머니가 너를 부른다’ 가 한눈에 들어 왔다. 중앙현관은 천정의 높이가 70 M나 되는 대형 현관으로 당시에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은 용사들의 이름이 동(銅) 으로 새겨져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연합군과 싸웠고 다음에는 독일군과 다음에는 일본군과 싸웠단다. 밖에 나오니 142 M 의 높고 웅장한 탑이 있는데 탑에는 당시의 전쟁 모습을 조각해 두었다. 우리의 독립기념관과 비슷한 구조의 기념관이었지만 크기로는 무척 커 보인다.
모스코바 대학은 버스를 타고 한바퀴 돌았다. 모스코바 대학에 들어 가면서 가로수에 걸린 석양을 본다. 세계의 인제들이 공부하는 곳 , 250년 역사를 가진 대학이다. 한국인 학생도 본과에 400명 정도 있는데 주로 전공은 러시아어나 러시아 문학이며 법학, 경영학, 자연과학도 있다. 우리나라 학생이 그렇게 많다는데 놀랐다. 대학의 정문에는 설립자인 로마노소프의 동상이 석양의 빛을 받고 있었다.
레닌 언덕은 모스코바 대학이 보이는 곳에 있다. 모스코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 왔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면 신혼여행을 가기전에 가는 곳이 3군데가 있다. 첫번째는 꺼지지 않는 불꽃, 두번째는 푸시킨 동상, 세번째는 레닌의 언덕이다. 정말 멋을 아는 사람들이다.
어두워 지는 레닌의 언덕을 뒤로 한체 우리는 크레물린 궁전 안에 있는 크레물린 궁전극장으로 갔다. 알랙산드르 앙상불 연주회를 보기 위해서다. 연주회장 밖에서는 오늘 연주될 팜플렛을 팔고 있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모두들 지처서 1부만 보고 가지고 했다. 그런데 연주회가 시작 되자 숨을 죽이고 관람을 했다. 러시아 전통 군복을 입은 오케스트라 연주자들, 합창단, 큰 극장 안을 가득 메우는 관중들 러시아 인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너무 높았다. 경제적으로 가난해도 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그들, 빵이 없어도 의복이 남루해도 우리돈 10만원이 넘는 음악회는 가는 그들이다. 합창과 독창 어린이들의 무용과 노래, 노래와 춤의 멋진 어우러짐, 우리는 넋을 잃고 3부가 끝날 때 까지 꼼짝도 않고 있었다.
16. 안개에 쌓인 김포공항
러시아 - 269번 학교, 모스코바 공항, 김포공항.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12박 13일의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날이다.
러시아를 떠나기전 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러시아의 학제는 1학년에서 11학년 까지 있다. 그러니까 국민학교는 1 - 5 학년, 중학교 과정은 6 - 8 학년, 고등학교 과정은 9 - 11 학년 까지다.
9학년이 넘으면 실업계 인문계로 구분 되는데 인문계는 대학이 목표다. 대학 입학시험은 주관식이다. 시험은 주로 ‘ 시 ’ 를 외우고 쓰는 것이 보통이다. 이곳에는 운전기사도 시 한 두 편을 쉽게 외운다. 대학은 학사 4년, 석사 2년, 박사 3년 인데 그 후는 독터 과정이라 하여 30대 후반 부터 50대 초반 까지 수학한다. 독터 과정은 기본적으로 3년인데 그후는 일정기간 저작과 강의를 하고 논문을 쓰고 국가 시험을 쳐서 통과 하는 과정이다.
러시아에도 스위스와 같이 학교 이름이 별도로 없다. 우리가 방문한 학교는 모스코바에 있는 269번 학교이다. 여기는 교장이 있다. 55학급인데 11학년까지 있다. 한 학년이 A B C D E 까지 있다. 교사가 80명인데 모두 여선생이고 단 4명만 남자 였는데 교련과 문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교장은 한사람, 여자 였고 교감은 4명이다. 교감은 1명은 1 - 4 학년을 담당하고, 2명은 중학교 과정의 교무업무를 담당하고, 1명은 교외 봉사 활동을 담당 한다. 교사들은 18시간 수업을 하는데 봉급은 시간당으로 책정 된다. 주 18시간 기준으로 두배 수업을 하면 두배의 봉급을 받는다. 초봉이 20만 루불( 4만원 ) 25년 정도 근무하면 연금이 나온다. 그후 계속 근무를 원하면 계속 할 수 있다. 한 학교에 원하는 만큼 있을 수 있다. 교사의 직제는 평교사, 책임교사(주임교사), 교감, 교장 으로 이어지는데 연수 연구등 실적으로 진급을 한다. 현재의 여자 교장은 이학교에 40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주당 수업은 수학이 6시간, 러시아 문학이 9시간 인데 일반수업과 실습으로 나눈다. 외국어와 독일어 영어 컴퓨터 기술 등이 있고, 1학년은 40분 수업으로 5시간을 한다.
교장실은 무척 검소 했다. 교실 반 만한 크기에 둘러 앉을 수 있는 책상과 작은 책장 작은 소파가 전부 였다. 교실 환경은 사진 몇 장만 걸려 있었는데, 복도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가 퍽 인상적이었다. 사회주의 잔재 같이 보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도서실 복도면 책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넓은 식당도 있었는데 학생들은 식당에서 무료 급식을 받는다고 했다.
러시아의 학교는 스위스와 조금 달랐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은 교원편제 였으나 학생들의 자유 분방함은 우리와 달랐다. 우리나라와 스위스 학교의 중간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것 같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외국인을 보고 웃는다. 이유는 문화 민족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들은 문화민족이라는데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사는것 같았다.
모스코바 공항에 도착 했다. 모두들 마지막 쇼핑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첩에 적어온 사람들의 선물이 빠졌을까 봐 수첩을 꺼내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물을 산다는 것은 물질적인 면보다 정신적으로 무척 부담이 되었다.
모스코바 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무사히 집까지 가기를 빌었다. 출발 할 때의 불안감,긴장은 가고 그 동안 있었던 많은 변화와 보람에 가슴은 벅차 있었다. 눈을 깜고 잠을 청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여행을 출발하면서 가까운 친지들을 찾아 다니며 극성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러는 나를 보고 아내는 죽으려 가느냐고 핀잔을 줬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포기 할려고 해도 이런 기회가 또 올 것 같지 않아 포기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메모지를 준비 했다. 내가 죽으면서 마지막 남긴다는 각오로 열심히 메모를 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생전 처음 외국을 간다는 불안감이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김포공항 상공에 도착했다. 반갑게 맞아 줄줄 알았던 조국은 나를 거부 했다. 외국에서 국위를 선양하지 못한 사람이 와서 일까? 보지 못할 것을 보고 온 탓일까?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도 한점 부끄러운 일은 없건만 고국이 볼 때는 그런 것 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며칠째 안개가 끼여 오전 내내 비행기 이, 착륙이 안되었단다. 김포 상공을 걷돌던 우리가 탄 비행기도 어쩔수 없이 제주공항에 내려야 했다. 비행기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김포에 안개가 걷히기만 기다렸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조국은 나를 맞아 주었다. 김포 공항에는 발이 묶였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대구가는 표를 구하고 3시간을 기다려도 출발 소식은 없었다.
대구공항에 도착하니 어스름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네델란드, 벨기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를 너무 숨가쁘게 다녔다는 느낌과 함께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시계를 제자리로 돌렸다.
* 1996년 경북 '북부신문' 1년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