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義城金氏)
시 조: 김 석(金 錫) (신라시대)
영주 입향조:김영균(金永鈞)1474년생~1548년생 (조선시대)
의성김씨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외손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의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 의하면 김석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등의 문헌과 《신라김씨 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고려 개국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瑀)의 대에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장자 김용비(金龍庇)가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영주의 의성김씨는 중종무렵(16세기 전기)풍기훈도를 지낸 김영균(金永鈞)이 예안 둠버리(지금 안동 녹전면 신평리)로 부터 영주 아치나리 (지금 영주 휴천동)에 옮겨 자리 잡음에서 비롯된다.
영주 의성김씨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이다.
혼인관계
김종호(金宗鎬)1901년(고종38)~1985년 자는 성삼(聖三,호는 석당(石堂) 황형하(黃炯夏)1854년~1907년11월8일 졸 자는 광여(光汝) 배 달성서씨의 사위 .
김종호는 선비 김재붕(金載鵬)의 아들이다.소우(小愚)강벽원(姜璧元)의 문하에서 서예와 한학을 배웠다.꾸준한 공력으로 왕희지(王羲之),구양순(歐陽詢)등의 법첩(法帖)으로 기초를 다져 해(楷),행(行),초(草),전(篆),예(隸)등의 각 채를 고루 익혔다.
약관에 이미 서예로 고장에 알려 졌으며 28세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등의 유명 사찰의 현판을 썼고 경주의 경순왕(敬順王)숭혜전(崇惠殿),불국사(佛國寺)불국강당(佛國講堂),계룡산 단군사(檀君祠)천진전(天眞殿),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부석사 안양루(安養樓)등의 현판을 써 서예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근대 중국의 대석학인 하영봉(夏靈峰)의 영봉정사(靈峰精舍)현판을 쓰기도 하였으며 1942년에는 일본
태동서예원(泰同書藝院)주최한 한,중,일,서도전에서 특선에 뽑히는 등 해외에서도 알려 졌다.글씨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인색함이 없었으며 사례는 술 한잔으로 족했다.
큰글씨에 능하였으며 가난을 달게 여기면서 생애를 필묵으로 자적했다.
참고:23세조 황형하의 배 달성서씨의 부(父) 서재기(徐在箕) .
석당 김종호의 친필 ( 부석사 물양수전 앞) 안양루 현판
근세 유명인
김창근(金昌槿)1930년~1991년 호는 우봉(友峰),안동시 녹전면 신평동 출생,영주농고졸업( 재학 중 민주학생연맹결성 회장으로 우익활동),서울대 문리대 정치과 졸업, 필리핀 국립행정대학원 졸업,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인,1963년 33세로 영주봉화 6대,7대,8대 국회의원 당선,초선에 공화당 원내 대변인,1967년 재선에 공화당 당무위원 부총무,1971년3선에 공화당 재정경제위원장,1971년 야당측이 제기한 내무부장관 오치성 해임 건의안 을 공화당의원으로 가세 하여 가결시켜 공화당 항명 파동으로 의원직 상실,1987년 10대국회의원 당선 (처음에 박정희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에게 공천을 주어 김계원이 영주,풍기에서 한달간 머물며 조직을 시도하였으나 철옹성같은 김창근 조직에 밀려 천하의 1인자 박정희도 어쩔수 없이 김창근에게 공천을 돌려 주고 김계원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박정희 시해 사건으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정치활동 정화법에 묶여 활동을 중단하였다가 후에 김영삼이 이끌던 민주화 추진협의회(민추협)부의장으로 서 야인으로 투쟁해 왔다.
초선 부터 영주,봉화지역 대졸자인 젊은 에리트 들을 경향 각지에 신설되는 정부기관및 투자기관에 수백여명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재선이후 부터 삼척철도국과 안동철도국을 통합하여 영주철도국으로 명명하여 신청사와 함께 이전 시키고 신규채용자는 행정직과 기능직을 100% 영주,봉화 지방 인근 지역 청년들로 취직 시킴,그수는 천여명에 달하였고 전매청 영주 연초제조창를 유치 650여명의 인원중 특수 인력을 제외한 전원을 지방사람으로 취업,대한석탄공사 산하 전국광산에 갱목조달하는 영주임무소에 250여명 직원과 경북,강원도 일부6개 시군을 관할 하는 산림청 남부지방 영주국유림관리소를 유치하였고 봉화세무서를 영주세무서와 통합하였으며 지역발전과 인재 양성에 큰족적을 남긴인물이다.
1987년 민족문제연구소장으로 다음해 민주당 정무위원을 지내다 노태우 정부1988년12월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990년 3월까지 재직하였으나 지병으로 사임하고 미국 윈체스터 메드컬센터에서 가료 중 1991년 8월1일 향년61세로 타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