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봄! 엘루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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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그 아이의 말에 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기분? 기분은 글쎄..
그냥 몽롱해졌다.
이 녀석의 목소리가 마치 마법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듯이.
엘루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자 마자 그렇게 나에게는 순간적인
나른함이 찾아들었다.
"아, 엘루야. 이건 내가 꽂을게."
엘루가 들고 있던 만화책을 황급히 빼앗아, 책꽂이에 집에 넣었다.
그냥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 엘루.
내 손을 따라 움직이는 엘루의 시선이 거참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이유 없는 묘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그때였다.
급하게 가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가게로 뛰어들어온 건.
옷차림을 보니, 현담이와 엘루와 같은 학교인 명신 고등학교 교복인데...
뛰어온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걸 보아, 이거 왠지 느낌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출입구 앞에서 발이 묶여버린 채,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여자아이.
무엇인가를 찾는 듯, 조급해 보이던 표정이 금새 굳었다.
"저기.. 어떤 걸 찾으세요?"
".............."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으나,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이 여학생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이 여학생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히 찰 때 쯤,
여학생의 표정이 점점 울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대체 뭐지, 이 아인.
......
조심히 고개를 돌려 엘루를 쳐다보면,
엘루 역시나 이 여자앨 보며 범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둘이 아는 사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엘루야. 네가 아는 애야?"
엘루의 교복 소매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기고
최대한 친한 척을 하며 물었으나,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하는 엘루.
대체 이 여자애가 누구길래. 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거지?
아까 전화했던 그 앤가.
얼핏 들으니 이름이 채정인가 뭔가 했던 것 같은데...
"둘이 아는 사이인거 같은데,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내가 자리라도 피해줄까?"
솔직히 이 둘 사이가 너무나 궁금스러웠지만,
제 3자는 여기서 조심히 빠져주는 게 옳은 일인것 같아서
이 둘 사이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면,
뒷걸음질 치는 내 손목을 꽉 붙잡는 엘루였다.
"괜찮아, 누나."
"엘루야..."
"괜찮대도. 심각한 일 아니야."
표정은 심각. 심각.이라고 써져있는데?
넌 아닐지 몰라도 저 여자애 말이야.
곧 울 것 같이 생겨가지고,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잖아.
원망스러운 눈으로,
제발 나보고 나가달라는 눈으로 말이야.
......
엘루가 잡은 내 손에, 엘루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괜시리 이 여자애한테 미안해져서 엘루가 잡은 내 손을 슬쩍 빼냈다.
엘루도 당황했는지,
살짝 놀라더니만 어색하게 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강조하지만 꽤나 어색하게.
"......엘루야."
그 여자애는 잠기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엘루의 이름을 내뱉었다.
눈가에 아슬하게 맺힌 눈물이 결국 볼 위로 힘없이 흘러내렸다.
"........"
"대답해봐, 엘루야..."
그 여자애의 눈물을 본 엘루는,
어째선지 그 여자애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마주치지 않았다.
계속 바닥만 바라보면서 시선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 둘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
"너, 왜 여기로 왔어."
한참의 정적을 깨트린 엘루의 목소리.
간단하고도 명료한 물음이었다.
"당연하잖아. 미안하니까.. 너한테 미안하니까..."
"...넌, 너희 어머니 병원에 있어야 되잖아."
엘루의 대답에 힘없이 주저앉아 슬프게도 우는 아이.
엘루는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참 미묘한 분위기였다.
"....거기서 기다렸는데.. 왜 안 왔어."
"..........그냥."
"끝까지 안오더라, 너."
"내가 그렇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들켜버렸다, 그치."
"...넌 정말 독해. 이엘루."
흐르는 눈물을 교복 소매로 쓱쓱 닦고, 억지로 미소를 짓는 아이.
다시 한번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에 빠르게 눈물을 닦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너한테 정말 미안해..."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리고 정말 고마워, 엘루야.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방에서 무언갈 뒤적거리는 여자아이.
교과서 가운데에 꼬깃하게 접힌 편지 봉투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꺼내서 엘루에게 내민다.
"나, 이것만은 받을 수 없어."
"............윤채정."
윤채정. 윤채정.
좀 전에 통화하던 여자애 이름이 맞구나.
이 애였어, 그 여자애가.
"받아, 엘루야."
그 꼬깃한 편지 봉투를 엘루에게 내민 채로,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다시한번 반대 편 소매로 닦는 채정이었다.
"싫어."
"받아. 난 괜찮으니까."
"싫어."
"자꾸 고집부릴래?
네가 이렇게까지 하면 나 우리 엄마 볼 면목이 없어질 것 같아."
약간의 실랑이 끝에 목소리가 높아진 채정.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나는 잠자코 지켜볼 수 밖에.
"......."
"나, 지금 너무 구차해. 그래서 화가 나."
그리고 더이상 말없는 엘루의 손에 편지 봉투를 쥐여준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는 채정.
편지 봉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묵묵히 서 있기만 하는 엘루의
얼굴엔 미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마음만으로도 우리 엄만 충분히 기뻐할거야."
"......."
"병원에서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니가 와야 말이지.
그럼... 난 갈게."
엘루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채정이라는 여자아이.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곤 나에게도 꾸벅 인사를 한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했어요, 정말."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까지 덩달아서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 여자앨 바라보았다.
나와 엘루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더니만, 황급히 가게를 나가는 채정.
......
엘루의 눈치를 살피면서 잠자코 있으니,
분위기를 눈치챈 엘루가 먼저 환하게 웃음지으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거봐. 내가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누나."
"응? 응..."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불어 채정이와는 무슨 사이인지도...
"아, 기분 찜찜하다~"
그러면서 모른 척 자꾸 화제를 돌리는 이 녀석.
아무래도 말을 안해주려는 모양인데,
물어보면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 나역시 신경쓰지 않는 척 한다는 것이
"너, 그 여자애 좋아하지?"
라는 허튼 소리를 해버리고야 말았다.
순간적으로 웃음이 굳은 엘루의 얼굴.
나 역시 장난스레 웃던 얼굴이 점차적으로 굳어가고.
또다른 변명거리를 찾는다는 것이,
"아니, 잘.. 잘 어울려 보여서!! 사귀는거 아닌가 하구."
"누나.."
딱딱한 석고처럼 굳어져서 풀릴 지 모르는 엘루의 표정.
괜히 내가 더 긴장되게 만드는 저녀석의 표정.
"이참에 한번 사귀어봐, 보니까 좋은 애 같던데..."
내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한 엘루.
좀 가까워진 듯 싶더니만
다시 나와 엘루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넘치듯 흘렀고,
그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건, 역시나 엘루 뿐이었다.
억지로라도 웃으며,
"........응."
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엘루 뿐이었다.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애한테,
너무한 말이 아닌가 싶었지만 뭐라고 딱히 할 말도 찾을 수가 없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더니,
"솔직히 궁금하지, 다 보여."
라는 엘루.
"뭐, 뭐!! 뭐가!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물론 궁금했지만.
예의상 대놓고 궁금해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떼었건만,
"솔직히 궁금하잖아, 채정이."
라며 물꼬를 여는 엘루였다.
뭐,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내가 할 말이 사라지지만...
"......"
"채정이 집안이 좀 어려워. 그래서 내가 도와주는 거 뿐이야.
사귀는 거 그런거 아니니까..."
"누가 뭐래? 사귀든 말든.."
"치. 누나도 이제 곧 날 좋아하게 될 걸?"
뭐래는거야, 얘가.
누나를 앞에두고 못할 소리가 없어.
고개를 홱 돌려서 녀석을 쳐다보면 무슨 생각인지 씨익 웃는 녀석이다.
민망해져서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벌써 50%는 나한테 넘어온 것 같고~"
"아니야, 그런거."
"그럼 뭔데? 누나 얼굴 빨개졌는데? 지금."
"......어, 어?"
.........
뭐지. 내 얼굴은 왜 빨개져, 갑자기......
창피하게시리.
"뭐야, 뭔데? 뭐 때문에 빨개져?"
정말 누구 말처럼 독하다, 독해. 이엘루.
정말 끈질겨.
뭐라고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괜히 바짓가랑이를 힘주어 쥐고, 엘루를 향해 외쳤다.
웅변 대회에서 이렇게 했으면 대상감일테지.
"그래! 넌 우리 아빠를 닮은 것 같애서 그래!"
라고.
미안해, 엘루야. 그건 거짓말이었어.
라고 변명을 해야할까 잠시동안 고민을 했지만, 오히려 크게 웃는 엘루.
그리고.
"누나네 아빠도 엄청 잘생겼겠네, 맞지?"
라고 오히려 박장대소를 한다.
나도 엘루를 따라서 웃으면, 엘루가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채정이 어머니가 몸이 많이 안 좋으시대,
그래서 이번에도 채정이 어머니 수술비 몰래 대주려다가 딱걸렸지, 뭐야."
".......정말?"
"아씨 쪽팔리게.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잖아,
그래서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려고 했는데..."
왠지 엘루가 대견해보였다. 나보다 어린데, 속은 더 깊은 것 같았다.
하는 것도 예쁘고, 생긴 것도 예쁘지만, 마음은 더 예쁜 천사표 엘루였다.
기특해서 엘루의 머리를 한번 헤집어주려는데,
엘루가 때마침 꺼낸 말 때문에, 손은 엘루의 머릿가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
"그냥, 내가 채정이한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나로 인해서 채정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것 때문에."
"......."
엘루야.....
너 역시 그 아이를 좋아하는거니..?
채정이라는 그 여자애, 좋아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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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짙어지는 의심의 그림자. (1)
......
역시 엘루가 채정이를 좋아하는 거 맞구나.
괜히 내가 가운데에 껴서 사이가 묘해지는 거 아닌지 몰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아니야. 진짜."
내 시선을 당황스러워 하던 엘루를 쇼파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치다가,
쇼파 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고,
그런 엘루를 걱정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왜 자꾸 쳐다봐.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러고는 당황스러웠는지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갔다.
빠져나갔다기보다는 뛰쳐나갔다는 편이 더 가깝겠지만.
보면 볼 수록 이상한 녀석이다, 저 녀석은.
아무튼 녀석이 나가고 난 뒤,
생긴 여유로움에 가게 청소나 할까 하고,
밀걸레를 빨아서 가게 바닥 곳곳을 닦았다.
책정리도 하고, 먼지털이로 먼지도 털고,
걸레를 빨아서 테이블도 닦고 하다보니까 벌써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다시 한번 걸레질에 열중했을 무렵,
가게 문이 열리더니, 이모부가 가게로 들어오셨다.
"어, 봄아. 오늘 힘들었지.
좀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터져서 마무리 좀 짓느라.."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늘 수고했어.
손님을 상대하는 일은 여간 까다롭지 않을텐데 말이야."
이모부는 내가 들고 있던 걸레를 받아가시더니만,
나를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셨다.
수고했다면서,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라고.
하지만, 쉬기 전에 인천 병원 앞 '정말 좋아 유치원'에 있는 세라를
집으로 데려오라는 것을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
덕분에 가게에서 쫓겨나듯 나와선,
죄없는 '이쁜 세라 비디오' 간판을 쓰윽 훑고는
간판 이름의 회의감에 다시한번 휩싸여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향했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현담이도 집에 왔겠지?
하면서 왠지 그녀석을 상대해야 하는 두려운 마음에 조마조마 하며,
문을 열었지만.
얼레?
"........"
없다.
저기에 앉아서 무관심하게 TV를 보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볼 아니꼬운 녀석이 없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고개를 휙휙.
현관문에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고개를 휙휙.
장현담. 그 자식이 있나 없나 이리저리 고개를 휙휙 살폈으나,
녀석은 집에 없는 듯 보이지 않았고, 집 안 역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다행이다 싶어서 안도를 하고,
뾰딱 구두를 벗어 던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세라야. 현담인 아직 안 왔니?"
"....."
돌아오지 않는 외침에, 그때서야.
아 맞다, 세라는 유치원에 있지.
데리러 가야 된다는 상황을 인식한 후에 다시 재빨리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인천 병원 앞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정말 좋아 유치원'이 어디있나,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려고 고개를 두리번 거릴 때,
"어? 누나?"
낯 익은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서 돌아보면,
인천 병원 난간에 기댄 채로, 바닥에 앉아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인천 병원복 차림..
누구겠는가. 당연, 이엘루.
"와 역시 남자의 직감이란 무서운거야.
이렇게 운명처럼 만났네?"
요구르트에 빨대를 꼽아 쪽쪽 빨고 있는 녀석의 손에는,
까만 비닐이 들려 있고,
그 안엔 요구르트 빈 병이 반이나 차 있었다.
"어디가는 거야? 설마 나 보러 온거야?
또 이상한 표정 지으면 나 도망갈거야, 대신."
빙긋 웃고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엘루.
절뚝대는 녀석의 걸음이 썩 보기 좋지는 않을 법 했지만
뒤뚱뒤뚱. 귀여워 보였다, 저 녀석은.
"유치원에 있는 친척동생 데리러가는거야."
"아항."
"너는 여기서 뭐해?"
"말했잖아, 나. 주사 맞는거 엄청 싫어한다구.
지금쯤 병원 난리 났을걸? 나 주사 맞아야 되는데 사라졌다구."
실없이 웃으며 뒤에 있는 병원을 가리키는 엘루의 모습.
딱 세라와 붙여주면 잘 놀 법하다.
"그래도 빨리 나아서 학교가고 그래야지.
하루 종일 병원에 있으면 심심하잖아. 애들도 못 보고."
"그건 그래.
그래도 퇴원하면 학교 가니까 누나랑 많이 못 놀아."
"놀아줄게. 너 퇴원하면 영화도 보고, 노래방도 가고...
그러니까 얼른 병원으로 들어가, 누나는 동생 데리러 가볼게."
"진짜지?"
고개를 끄덕거렸더니만, 신나서 오예오예아싸거리는 엘루.
그.. 온전치 못한 몸으로 빙빙 돌고, 텝댄스를 춰 댄다.
"아싸라비야 콜롬비야."
뭐..? 뭐라고? 뭔 비야?
아무튼 이상한 주술인지 주문인지 같은 걸 신들린 듯 흥얼거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요구르트 하나를 쓰윽 내미는 엘루.
내가 받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자,
내 손에 억지로 요구르트 하나를 꼭 쥐어주는 엘루 녀석.
"나 그럼 주사 100대 맞고 올게."
라며 병원으로 뒤뚱뒤뚱 사라져버리는 엘루였다.
귀여운 녀석.
그 녀석이 쥐어준 요구르트만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며,
홀린 듯 한참을 서 있다가.
맞다!! 세라!
세라가 내 눈 앞에 왔다갔다 하면 그때서야 걸음을 재촉했다.
병원을 지나치자마자 알록달록 간판에
'정말 좋아 유치원' 이라고 귀엽게 써져 있었고,
뛰어서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면,
새초롬한 얼굴로 입술이 툭 튀어나온 세라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세라야!"
내 목소리에 나를 돌아보는 세라는,
더 심각한 얼굴로 굳어지더니
"시끄러워, 언니. 나 지금 심각한 거 안 보여?"
라면서 인상을 쓴다.
저 오만가지 인상이 과연 일곱살 짜리가 가능한 인상이란 말인가.
아직 일곱 살 밖에 안 된 게, 아주 싸가지가 바가지다.
장현담과 같이 지내더니, 세라가 저 모양이야.
장현담이 세라를 물들여놨니까 하여간 못된 놈.
"미안해, 세라야. 자. 요구르트 먹고."
세라의 앞에 요구르트를 내 놓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홱 잡아채간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 못난이 아줌마야!"
"미안해, 세라야..."
"지금이 몇시 인줄이나 알아? 여섯시가 넘었잖아, 맹구야."
슈가슈가룬이 그려져 있는 자신의 장난감 손목 시계를 바라보며,
시계 보는 척 소리 지르는 세라.
슈가슈가룬이 시작한 지 5분이나 되어버렸네, 어쩌네 하면서.
빨리 집에 가서 슈가슈가룬을 봐야 한다느니 하면서.
나 때문에 슈가슈가룬을 못봤다며,
오늘은 쇼콜라가 왕비가 되는 중요한 편이라고 하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 당기는 영악한 아이는
"나 요구르트 먹고 싶어, 빨대 꼽아줘."
내게 요구르트랑 빨대를 건네며 새침하게 말한다.
꽉 꼬집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가득 일었지만,
누차 강조하는 건.. 나는 예비 사회 복지사.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해주어야 하므로...
"그런건 니가 할 수 있잖아."
라고 하면, 고개를 들어 눈을 조그맣게 뜨고 나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난 어리니까 못 해."
어쭈.. 얘 봐라?
얄미워서 머리를 콩 쥐어 박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꾹꾹 눌러 참고서.
요구르트에 빨대를 꼽아서 건네면,
냉큼 잡아채 가서는 입으로 쏙 넣는다.
그렇게 슈가슈가룬을 봐야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일곱살 짜리 꼬맹이와 집으로 가는 길.
장현담이 없는 집이라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지만,
혹시나 해서 세라에게 물었다.
"현담이가 오늘 아침에 무슨 말 안했어?"
"무슨 말?"
"아, 안 했구나."
그렇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나한테 되묻는 걸 보니 말이야.
"근데, 오늘 친구들이랑 놀다가 온다고는 했어."
"그래?"
"쫌 늦을지도 모른대."
"그렇구나."
"찾지 말래."
"...응.."
"올때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온다고 했어.."
고 녀석 세라한테는 단단히 말해두고 갔구나.
뭐, 그럼 어때. 언제는 우리가 친했나.
오늘은 장현담 녀석도 없겠다,
세라 말을 들어보면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을 생각인거 같은데,
나만 살판 난거지. 할렐루야.
세라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가는 길이 구름 위를 걷는 듯 즐겁고, 가벼워서 걸음을 재촉하자
"근데 왕자님은 왜 물어봐?"
"응?"
걸음을 멈추어 서는 세라.
하여튼 쪼끄만게 의심만 많아가지구..
"우리 왕자님 좋아해?"
"응?!"
"난 왕자님이랑 결혼 할 사람이니까, 언닌 우리 왕자님 포기해."
당돌한 그 아이 때문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참을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라.
그리고 그 때,
내 주머니 속에 넣어놨던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고,
세라의 무서운 시선을 피해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야. 나 장현담인데 급하니까
지금 당장 학교 앞 씽씽 노래방으로 튀어와라.]
아침에 전해 준 내 핸드폰 번호를 잘 간직하고 있었는지
이런 문자를 보내는 장현담.
무슨 일인지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현담이가 나한테 친한 척을 한 것에 대한 기쁨이 온 몸을 휘감았다.
드디어 얘가 나한테 마음을 여는구나, 하고.
...
씨익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덮으려는데,
다시금 느껴지는 세라의 묘한 시선에, 결국엔.
"세라야, 현담이 보고 싶지? 현담이 보러 갈래?"
라고 협상을 시도했고,
금새 "응! 세라 왕자님 보러갈래!" 라며, 신나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 분명 일곱살 어린 애인데 말이지..
"빨리 왕자님 보러 가자!"
..
할 수 없이 세라와 함께 장현담이 말해준 학교 앞 씽씽 노래방을 향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세라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앞서 걷던 세라가 나를 돌아보고는 걸음이 느리다며, 빨리 좀 오라며,
재촉했기에 조금 더 걸음을 빨리 했다.
하여간, 얘는 이모 딸이긴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장현담을 꼭 닮은 게, 마치 장현담 축소판을 보는 것 같다....
명신 고등학교가 보이고,
학교 앞 노래방이 어디 있나 고개를 돌려 살필 때 쯤.
내 눈에 들어온 익숙한 여학생.
........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채..채정? 그래, 채정. 윤채정이라고 했지.
학교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로 보이는 아이.
근데, 이 아이가 왜 여기있지?
...
아까 엘루와 하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던 애가 왜 여기 있는거지?..
왠지 모를 의심에 휩싸여서 그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언니, 왕자님 보러 안 갈거야?"
"........."
내 손을 잡아 흔들며 나를 재촉하는 세라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채정이라는 여자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리고,
채정이 무심코 이 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드디어 피할 수도,
어쩔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느끼건데,
분명. 맞닥뜨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 있는가 하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상황 그게 맞는 것 같다.
나와 눈이 마주친 윤채정이 내게로 한걸음 씩 다가오는 걸 보면 말이다.
이거 왠지 모를 두려움 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럴 수록 채정에 대한 짙어지는 의심의 그림자는
나의 발걸음을 이 자리에 옴짝달싹 못하게 꽁꽁 묶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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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봄! 엘루를 부탁해. 07 08
리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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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15 19:2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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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ㅋㅋ 나 또 정주행중이야 ㅋㅋ 재밌썽~
ㅎㅎ 재밌어여 요번엔 두편 연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