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계(金壽繼. 자-익보. 몽탄면 청용리 사옥동. 광산인)
공은 몽탄면 사옥동의 입향조로 나주 회진에서 세거하다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공은 학문을 하되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세우며 일생을 보냈다. 하지만 주민들은 김 견이 사옥동 마을 광산김씨 입향조라 한다. 마을에 광산김씨 족보가 없어 더 이상 확인할 수는 없었다. 마을 뒤에 광산김씨 추모각이 있다.
김수정(金守渟. 자-자직, 호-직재. 1759 -?, 해제면 덕산리 사야. 광산인)
공은 김국광의 9세손이며 영암 금정면 연보리에서 대대로 살았으나 집안의 우화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해제면 사야 마을로 들어왔다. 자료에 의하면 ‘수정은 가난하지만 극진한 정성으로 부모님을 공양하며 살았다’고 한다.
김억창(金億昌. 자-자정. ?-1618. 해제면 양매리 매곡. 광산인)
공은 경기도 양천현(現-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나 무과로 한성부 주부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양천에서 돛단배로 피난을 나섰는데 풍랑을 만나 당시 함평현에 속했던 해제면 불무동(現-무안군 해제면 양매리)에 정착하여 살았다. 공은 해제면 광산김씨 입향조이며 후손들이 번창하여 양매리를 포함하여 천장리 양월리 등에 살고 있다.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1596년 9월 9일에 함평에 갈 때 동행하였으며 1597년 12월 5일에 공이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왜적을 막을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다. 또한 임치진에서 이순신 장군이 소집한 회의에 공이 참석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자의로 이순신 장군을 만나고 지원한 것을 보면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들은 병자호란 때 강화전투에서 순절한 매죽헌 충의공 김득남이다. 1628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김영두(金永斗. 호-야은. 1891-?. 해제면 덕산리 사야. 광산인)
공은 효자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골격이 준수했다.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도 함께 죽으려고 했다. 그러자 공이 ‘아버지도 안계시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신다면 저의 남매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하며 말리니 어머니도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 어머니마저 병석에 눕자 공은 갖은 정성을 다해 병구완에 나섰다. 백방으로 의사를 찾고 온 산을 뒤져서 좋은 약초를 구해 달여 드렸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그 애통함은 말할 수가 없었다.
김영한(호-취죽당. 숙종대. 운남면 내리 내동. 광산인)
내동마을의 입향조는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광산김씨 김영한이 조선 숙종 때인 1685년 광주(하백동)에서 살다가 세상사를 잊고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김영한은 호가 취죽당(翠竹堂-푸른 대나무)인데 孝友가 출륜하고 식견이 높아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니 사람들이 칭하기를 산민(山民-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을 피해 산속에 사는 사람)이라 했다. 공이 처음 내동 마을에 터를 잡을 때의 일이다. 생활하기에 편리한 곳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다가 망운면 송현리 현재의 원송현 마을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저녁에 입향조가 밖을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바다 건너 맞은편에 유난히 밝은 빛이 보인 곳이 있었다. 다음날 행장을 꾸리고 그곳에 가보니 과연 사람이 정착하는데 맞춤한 곳이라 여기고 터를 잡았는데 그곳이 현재 내동인 취엽 마을로 탄도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 마을은 반도형으로 댓잎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취죽당 김공 행장기’에 따르면 공은 터를 잡자 말자 주변에 대나무와 동백나무를 심고 스스로 임번의 낙을 취하려고 취죽으로 자호하고 율곡의 격명요결로서 과제를 삼았으며 그 정신으로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아름드리의 동백나무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고사되어 어른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김용(金勇. 자-용현. 호-후강. 1940-2001. 무안읍 용월리 상동. 광산인)
공은 6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자학자습으로 견문과 문리를 터득하고 마을 이장을 수년 동안 역임하였으며 재선의 무안농협 조합장으로서 무안의 특산물인 양파 소비촉진을 위해 최초로 軍納을 실시하였다. 또한 영암군 군서면에 유기질 비료공장 ‘정농비료’ 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문중 일에도 열심히 하여 광산김씨문숙공파 승선회 회장과 참봉공파 도유사를 역임하였다.
김용수(金鏞洙. 자-진성, 호-잠와. 1865-1940. 해제면 얌매리. 광산인)
공은 매죽헌 충의공 득남의 후손으로 당대의 학자 김동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학문이 넓고 심오해 물음에 막힘이 없었으며 타지에서도 배우러 왔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애국지사 김종성, 강희행, 윤석현, 윤상철, 김상형, 김채수, 노병선, 노병전 등이 있다. 경술국치 때는 단을 쌓고 나라 잃은 원통함에 통곡을 하였으며 무오년에는 탄식 교절 했다. 그리고 소악도에도 잠시 머물렀으며 1922년 해제중앙초등학교 설립 시 자신이 갖고 있는 부지를 희사하는 등 해제면 발전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이른바 해제 4선생 중 한분으로 추앙받았으며 잠와유고가 남아있다.
김익수(金益洙. 자-문옥, 호-절당, 1880-1920. 해제면 양매리. 광산인)
공은 원래 서울에 살았던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기상이 호협하고 의지가 굳어 강인한 성품이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뜻을 같이 하는 문종식 등 88인과 11월 同志會를 결의하여 의병활동을 하였으나 왜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1907년 봄 또다시 전북 익산에서 의병 수백 명이 결사대를 조직하고 항전하다가 완주군과 익산군의 어름에서 왜군에 붙잡혔지만 압송당할 때 왜군 2명을 살해하고 탈주하였다. 김구선생과 교류하며 활발히 투쟁을 하던 중 일본군에게 두 차례나 잡혔으나 모두 탈출하였다. 해제면 양매리 마을에는 1908년에 피신 겸 정착하기 위해 들어와 살던 중 1909년 일본군의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 때 이 지역의 의병들과 함께 싸우다 몽탄면 사창리에서 잡혀 9년간의 옥고를 치뤘다. 이후 이 마을에서 휴양하던 중 일본군의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에 별세하였다. 자주적이고 의로운 기운이 충만했던 공은 1906년 면암 선생이 정산에서 거병하였을 때 4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적극적으로 호응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여 군청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탈취한 무기로 의병들을 무장시켜 각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9월부터 10월 30일 사이에 일제가 전개한 이른바 '南韓大討伐' 작전 때 의병장 및 의병 13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는 일제가 한일병합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의병 대소탕 작전을 전개한 것으로 일군의 포악무도한 야만성이 그대로 드러난 작전이었다. 이때 공도 몽탄면에서 체포되었는데 그즈음 그의 부하는 50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 3년간 서대문 형무소와 공주 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른 후 숨어 살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표창(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인봉(1774 - ?. 해제면 창산리 매당. 광산인)
매당 마을 입향조는 이웃 마을 창산마을로 입향한 김하현의 손자인 김인봉이다. 공은 윗마을인 창산에서 조금 내려 와 1800년대를 전후해서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의 주변 환경을 보고 500여년은 살 수 있는 터라고 보고 후손들을 위한 훈육에 관심을 두는 한편 마을 주변에 방풍과 비보를 위해 당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후에 선산김씨 김해김씨 등이 들어왔다.
김재열(金在烈. 자-정일, 호-효산, 1891-1965. 무안읍 용월리 상동. 광산인)
공은 문숙공 주정의 후로 치량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유년시절에 오직 소학 1권을 스승 삼아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족형 장춘당에게 나아가 배울 때 장춘당은 ‘효산이 문중에 큰 재목이 될 것이다’며 공의 학습 능력을 높이 샀다. 낮에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책을 읽어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서당에서 문중의 자제와 향리의 소년들을 교육하되 궁행으로 실천하고 빠른 성공만을 바라지 말고 꾸준히 노력할 것을 가르쳤으며 한사코 ‘선생’의 호칭을 사양하였다. 이어 당대 고을에서 큰 학자로 이름난 민재 박임상 선생께 칠서를 공부하여 심성의기의 깊은 뜻을 해득하였다. 부모 상을 당하여서는 매일 죽을 먹으며 바닥에 거적을 깔고 새벽마다 참배 다니느라 오솔길이 큰길이 되었으며 늘 4대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배알하였다. 요순의 성훈과 공맹의 도학을 향리의 후진들에게 가르치고 전현의 성법인 관혼상제의 예절을 감히 추호도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사례물행하여 단식온포로 시서를 즐기며 임천에서 소요하였다. 공의 뒷일을 위하여 제자들이 계를 결성하자 공이 듣고는 즉시 만류하되 “나는 남에게 준 것이 없는데 누가 나에게 스승의 덕이 있다 하였는가?” 하며 적극 계의 결성을 저지 하였다. 천성이 아름답고 겸손한 덕을 지녔으며 학문은 깊었으되 세상과 서로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고집스러운 면이 있으나 숨은 덕이 있어 마치 비단옷을 입고 그 아름다움을 감추기 위해 겉옷을 걸쳐 입은 것과 같은 겸허한 선비였다. 1982년에 상동 마을 앞에 ‘김재열선생경모비’가 세워져 있다.
김종남(현경면 마산리 마산. 광산인)
공은 전국시조경창대회 명인부 금상을 획득하는 등 시조창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분이다. 예전에는 시조를 지도하기도 했는데 틈틈이 피리나 대금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고 배우러 오는 사람에겐 제작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는데 몇 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
김종성(金宗成. 1906-1977. 해제면 매곡. 광산인)
공은 기운과 용맹이 뛰어났고 재주가 비범하여 어려서부터 어른스럽다 하더니 나이 29세 때에, 일본사람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이렇게 창피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한탄하며 살았다. 일제의 탄압과 착취를 극복하고 독립을 쟁취 하기위해서는 일왕을 주살를 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목표를 삼았다. 1929년 6월 4일 때마침 일본 대판을 순시 하던 일왕 유인(裕仁)이 다리를 통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천황을 죽이기 위하여 단도를 품고 통과 예상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아쉽게도 거사 직전 일본경찰에 검문으로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1935년 6월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6년 여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다.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의 신문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에 1929년 6월 21일자 22일자에 보도 되었다.
김중남(金重南. 1634 - ?, 자-성순, 호-죽헌. 현경면 수양리 석북. 광산인)
석북마을 광산김씨 입향조는 김중남이다. 공은 나주 문평에 살다가 몸과 마음을 닦을 겸 약초를 찾으러 이 마을에 들렀다가 지형을 보고 살기 좋은 곳이라 여겨 정착하였다.
김추정(1777 -1837. 현경면 외반리 조암. 광산인)
조암 마을의 입향조는 효봉 김추정이다.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가 누구인지 그리고 광산김씨가 먼저 들어왔는지 김해김씨가 먼저 들어왔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무안의 입향조를 기록해 온 무안지망집에는 현경면 조암동 입향조로 광산 김씨 김추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무안지망집에 나와 있는 김추정의 생몰 연대가 잘못 기록되어 있어(숙종 을미년 생, 경종 정유년 졸) 광산김씨의 족보를 보고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은 나주 서문 외촌에서 태어나 자품이 순수하고 재기가 초범하며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시국이 불안하며 가세가 빈한하여 호구지책으로 어머니와 함께 1778년 이곳 현경면 반룡동으로 이거하였다. 이곳에서 성장한 효봉은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날마다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니 무릎이 닿는 곳엔 구덩이가 이뤄졌고 눈물이 흘러내린 곳엔 풀이 말라 있었다고 한다. 鄕里가 모두 그 효를 칭찬하고 천양하여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입향조의 이러한 효성은 마을의 전통이 되어 주변 마을에서 지어준 ‘孝里’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으며 두고두고 효자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김태열(자 - 열지, 1738 - 1776. 해제면 만풍리 신풍. 광산인)
처음 신풍 마을에 처음 들어와 자리 잡은 성씨는 남양 홍씨이나 지금은 한 세대도 없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 홍씨들의 흔적인 묘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 없다. 이후에 들어온 성씨가 아래덤은 함평 대동에서 온 광산김씨 김태열이 들어왔다.
김하현(자-치서, 호-매호, 1669 - ?. 해제면 창매리 창산. 광산인)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蒼馬라 했으나 언제 현재의 창산으로 마을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마을 입향조는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원래 수원 白씨가 자리 잡았다’고 하나 언제 들어왔는지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마을 뒤에 있는 묘지에 백씨 묘로 불리는 봉분이 몇 기가 있어 백씨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이후에 입향한 성씨가 광산김씨로 17세기 후반에 31세손 김하현이 양매리에서 살다가 산이 좋고 물이 많은 이곳이 500년 이상 안주할 터 자리라 판단되어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김헌문(金憲文. 자-공칙, 호-지당. 1555-1592. 운남면 성내리 남촌. 광산인)
운남면 성내리 남촌 마을 광산김씨의 입향조인 金憲文은 충숙공 심의 후예로 참봉이다. 임진왜란 때 김건재와 함께 창의하고 대가를 호위하기도 하였으며 김천일 장군 막하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건재공이 애석히 여기며 애도사를 지었다.
김호일(金號一. 호-海軒. 숙종 代. 해제면 양월리 명양. 광산인)
명양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담양 전씨와 장수 황씨나 지금은 한가구도 없다 이후 광산 김씨의 동족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의 광산김씨 입향조는 김호일로 임진왜란의 의병대장 충장공 김덕령[金德齡, 1567 - 1596] 장군의 후손이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권율과 곽재우 등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모함을 받아 역적의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죽은 충신이다. 충장공의 후손이었던 공은 역적의 누명을 쓴 선조 때문에 왕조의 눈을 피해 숨어살다가 1600년대 후반에 이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이 마을에는 담양 전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정착하여 살면서 광산김씨 동족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공은 성품이 온화하여 주변 사람과 화합을 잘 하며 특히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전해 온다.
김효수(金孝洙. 1943-2001. 무안읍 성남리 만창. 광산인)
공은 지역사회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무안농협조합장을 역임하면서 농산물 그중에서도 무안의 특산물인 양파 값 안정에 노력 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무안교육문화센타’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지역사회의 교육문제와 노인문제 해결에 앞장 서 고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