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중화지구대를 찾아와 대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대간 종주의 큰 의미를 되새겨 본다 ○ 논두령, 밭두렁을 지나고 동내 이장의 방송소리, 라디오소리, 개짓는 소리, 차소리를 들으며 사람과 대간이 하나임을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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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 시
○ 화령재 - 윗왕실임도 : 2003. 06. 22(일) 08:40 - 19:00
○ 윗왕실임도 - 큰재 : 2003. 06. 29(일) 08:30 - 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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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날씨 |
○ 화령재 - 윗왕실임도 : 매우 맑고 더운 날씨로 무더위에 고생했음 |
○ 윗왕실 임도 - 큰재 : 더운 날씨에 바람이 제법 많이 불어 시원했으나 오후에는 더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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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함께한 산꾼 |
○ 화령재 - 윗왕실임도 : 이경숙, 박길화씨 등 20명 |
○ 윗왕실임도 - 큰재 : 권종훈(경주일요산악회), 정수문(비슬산악회)등 3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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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주 거리 : 33.8km |
○ 화령재 - 윗왕실임도 : 26.1km |
○ 윗왕실임도 - 큰재 : 7.7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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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주시간 : 13시간 20분 |
○ 화령재 - 윗왕실임도 : 10시간 20분 |
08:40 : 화령재 출발 |
09:30 : 윤지미산(538m, 예상밖에 매우 가파름) |
10:10 : 재령강씨 '제모' 의 묘 |
11:00 : 무지개산(444.1m) 삼거리(오른쪽 능선을 넘어 감) |
11:40 : 풍양 조씨 쌍묘 |
11;50 : 경주 김씨 쌍묘 |
12:20 : 신의터재(김준신선생 유적비, 신의터재 유래, 분수령표지판 등이 있음) |
13:05 : 논둑 길(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음) |
13:50 : 금은골(점심 30분, 대간길 오른쪽에 아늑한 집들 몇 채가 있음) |
14:35 : 지기재(왼쪽 큰 묘지, 낙동강과 금강 분수령, 포도밭) |
14:55 : 안심산(475m, 매우 가파름) |
15:25 : 임도(잠깐 가다 왼쪽 산길로 접어 듬) |
15:45 : 개머리재(포장을 하려는지 공사가 한창임) |
17:10 : 임도(오른쪽 좁은 개울에서 목욕 15분, 임도에서 왼쪽 산길로 접어들어 백학산 오름) |
18:00 : 백학산(615m, 정상 표지판, 주변 조망이 좋음) |
19:00 : 윗왕실임도(지하도를 만들어 "국토가 숨쉬는 곳, 여기는 백두대간"이란 빨간 글씨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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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왕실임도 - 큰재 : 3시간 |
08:30 : 윗왕실 임도 출발 |
08:40 : 묘지 |
09:30 : 개터재(깊은 계곡재임) |
10:00 : 회룡재(작은 계곡재임) |
10:45 : 이영도 목장입구(목장이 매우 큼, 소울음소리가 남. 목장진입로'씨멘트길'에서 독도주의) |
11:10 : 인성분교(폐교, 나의 종주 기념 파티가 있었음) |
11:30 : 큰재(인성분교 정문 앞) |
※ 다시 걷는 대간 : 큰재(11:30, 점심 30분) →13::30 국수봉 → 14:30용문산(헬기장) → 15:30기도터 바위 →16:10 작점고개 → |
17:00 사기점 고개 → 18:00, 502m봉 → 19:30 추풍령(11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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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산행 소감 |
【화령재 - 윗왕실임도】 |
가족이 인천 딸내집에 가고 없고 토요일(21일)은 기우회주최 바둑대회(3등)에 다녀와서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알람 소리에 잠이 깨 허둥지둥 밥하고 도시락 싸고 해서 광장코아로 나갔다. 김종주 회장님이 먼저 나와 계셨고 전에 몇 번 함께한 정사장님 일행이 있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있는데 금방 월드고속버스가 와서 탑승을 했다. 이번 차는 권중걸씨 차가 아니고 다른 분 차였다. 조금은 섭섭했다. 이번 구간에는 함께하든 조수미씨, 박창석씨, 김창경 김정희씨부부, 이희영씨, 안동열씨, 정옥배씨 등 많이 빠졌다. 인원이 적으니까 어쩐지 마음이 설렁했다. |
우리의 버스는 항상 하는 것처럼 구마 - 경부 -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거쳐 상주- 화령재에 08:30경 도착하였다. 그 중간에 칠곡IC근 처에서 한상석씨와 구미IC근처에서 김중천씨가 합류했고 선산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 화령재에 내린 회원들은 지난번 내려왔을 때 사진을 못 찍은 사람들이 사진을 부지런히 찍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후덥지근한 날씨가 매우 덥다. 우리는 누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닌데 자동적으로 남쪽 대간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절개지에서 왼쪽으로 살짝 올라 작은 언덕 같은 작은 봉우리를 하나 넘어 임도를 지나고 묘지 3곳을 통과하면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왼쪽으로 서서히 돌아서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급격히 오르면 윤지미산(538m)이다. 정상에는 푸른 나무와 작은 바윗돌이 몇 군데 있고 왼쪽 아래는 도로와 냇가가 보인다. 또 나무에 "윤지미산 538m, 대전원진사람들"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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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씨에 첫 번째 오름이라 고생하며 올랐는데 백우는 "처음무터 많은 힘을 빼 놓은 윤지미산···"이라고 표현할 정도 그런 어려운 오름에서도 '윤지미산'을 '김지미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역시 김지미산은 오르기 힘든다" "송상태씨는 근래 김지미산을 두 번이나 올랐으니 힘이 얼마나 좋으냐?" " 다음은 나훈아 산이겠네" 등의 농담이 오갔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농담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대간꾼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윤지미산에서 437.7m봉쪽으로 서서히 돌아 내려가면 깨끗한 '재령 강씨 제모의 묘'라는 비석이 있는 묘지를 지나 천천히 내려가다가 다시 오르기 시작할 무렵 왼쪽에 무지개산을 끼고 똑바로 올라서면 무지개산 삼거리가 나타나고 무지개산 옆을 통과하여 잠깐 내려서면 풍양조씨 쌍묘가 있고 조금 더 내려서면 경주 김씨 쌍묘가 있다. 다시 무명 묘지를 세 개 지나면서 노루골 농로 근처에서 양옆(특히 오른쪽)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노루골 농로 근처에는 흐드러지게 핀 망초꽃밭이 두어군데 있다. 사진을 찍고 바쁘게 329.6m봉에 올라 설 무렵에는 오른쪽 저 아래 신의터재쪽에서 판곡저수지쪽으로 가는 길과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아늑해 보이고 동내에서 나는 노래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바짝 내려서면 신의터재다. |
신의터재에는 표석과 '義士 金俊臣 遺蹟碑"가 있고 길 건너에는 낙동강과 금강 분수령 표지판이 있는데 주변이 잔디와 꽃으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
※ 신의터재(280m) : 과거에는 어산재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5년 옛 이름을 되찾아 재설치하고 그 유래를 적어 놓았다 |
신의터재의 내력 : 임난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리었고 임난 때 의사 김준신(金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四월 二五일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는 후부 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때 민족 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로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五拾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저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 一九九六년 十二월 상주시장 |
○ 원래는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으나 12시 20분밖에 안됐다고 좀 더 가서 먹자고 하는 윤대장의 무전에 따라 다시 남쪽 대간을 들어선다. 들어서고 얼마 안 올라 큰 철탑을 지나 다시 쑥밭골 밭 옆을 통과하여 오르면 밤꽃 향기가 계속되는 구간으로 앞에 밤나무단지에 있는 밤꽃들이 희게 피어 있는 곳 옆을 통과하면 슬랩구간이다. 슬랩이나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그런 정도이고 약간 미끄러운 곳도 있기는 하나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되는 구간이다. 이 슬랩을 왼쪽으로 내려서면 오른쪽 아래에 민가 지붕이 보이고 동내 앞 길이 보이면서 밭길 옆을 통과하여 다시 작은 능선을 들어서야 하는데 여기서 송상태씨 일행과 한재호, 김순옥 부부가 점심을 먹고 있어서 나도 김중천씨, 이상운씨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하도 더워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송상태씨가 빈 물병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동내에 내려가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나누어주었다. 이에 대해 이상운씨는 " 항상 남을 위해서 희생하시는 분, 남을 배려하실 줄 아는 분, 그런 분이 있기에 알프스산악회가 더욱 정겹게 보이는 것이 아닐런지요?" 라고 표현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
다시 무더운 대간길을 걷기 시작한다. 작은 등(지기재)을 하나 넘어 내려가면 왼쪽에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밑에 쉬고 있던 정사장 부부 등 일행 3명이 여기서 하산한다고 한다. 바로 내려서면 지기재(260m)인데 분수령 표지판이 있다. 지기재를 건너 포도밭과 과수원 옆길을 지날 때는 따가운 햇빛 때문에 짜증이 났다. 앞에 가는 송상태씨가 숲속을 들어가면서 "이제 살았다"고 할 정도로 더웠다. 이상운씨와 함께 뒤에 오는 이경숙 총무와 박길화씨를 기다려서 함께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로 들어서면 안부를 따라 왼쪽으로 계속간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을 즈음 가파른 능선을 오르기 시작한다. 매우 까다로운 능선을 오를 때는 모두 힘들어했다. 내가 힘이 든다고 하니까 이상운씨는 "윤지미산보다는 힘이 들 든다"고 했다. 안심산(423m)에 올라 이경숙 총무 일행이 오도록 좀 쉬었다. 안심산에서 내려서면 바로 선유동 농로가 나오고 농로에서 바로 왼쪽 산길로 들어서 한 번 올랐다가 묘를 두기 지나며 내려서면 소정 개머리재다. |
※ 개머리재(270m, 소정) : 지형이 개머리 형태를 닮았다고 하여 븥여진 이름이고, 모서면 소정리와 대포리 함박골을 연결하는 도로다. 권상수씨집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고 부근은 온통 밭으로 인삼, 포도, 담배 등이 심겨저 있어 여기가 과연 백두대간인가 의심이 날 정도다. |
○개머리재에는 도로를 정비하는지 도자가 열심히 도로를 파헤치고 있었고 나무 그늘이 없어 매우 더웠다. 도로를 건너 바로 앞에 있 |
는 포도밭옆 도로로 가면 오른쪽 담배밭 앞을 통과하여 계속 걸으면 오른쪽에 작은 농로가 하나 따라오고 좀 더 오르면 대포저수지 |
골짜기가 깊게 파여 있다. 그러나 길은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개머리재에서 대포임도 까지는 조금 지루할 정도로 멀다. 한 참을 가 |
면 개터재쪽에서 함박골(대포저수지쪽)로 이어지는 대포임도에 닿는다. |
대포임도에 내려오기 전에 밑에서 한재호씨가 "물이다. 물" 하는 바람에 힘이 났다. 내려가 보니 오른쪽 계곡에 맑은 물이 많이 내려 | ||||
왔다. 우선 머리와 얼굴을 씻고 수건을 빨고 하는 등 많이 식혀가면서 이경숙 총무 일행과 합류했다. 한재호씨는 " 계곡물이 없었으 | ||||
면 백학산에 오르지 못했을 것같이 열이 차올랐는데 시원하게 열을 식힐 수 있어 더더욱 고마운 계곡이었습니다"라고 했다. | ||||
다시 길을 나서 리본을 찾아 왼쪽 능선(숲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가파른 급경사가 계속이어진다. 힘도 빠지고 덥기도 하고 | ||||
해서 발걸음이 자꾸만 늦어진다. 중간에 잠깐 쉬면서 낮잠을 약 10분가량 즐겼다. 김중천씨 일행이 와서 가자고 한다. 힘겹게 올라 | ||||
백학산(615m)정상에 올랐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바람이 조금씩 불었다. 우리는 약 30분만 내려가면 된다고 하면서 윤상희 대 | ||||
장이 두고 간 물과 간식을 먹고 좀 여유를 부렸다. | ||||
※ 백학산(615m) : 세 개의 봉우리 중 첫째 봉우리가 정상이다. 1998. 5. 10. 상주시청산악회에서 표석을 세워놓았다. 정상에서 보 | ||||
는 주변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속리산 천황봉, 백화산, 구병산, 청개산, 봉황산 등이 모두 조망된다. 백학산은 백골봉이라고도 | ||||
부른다. 골이 깊어 한 번 들어가면 백골이 되어서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자봉이라고도 한다. 정상주변에는 참나무 | ||||
군락지임 | ||||
그러나 내려가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묘지를 하나 지나 가다가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임도려니 생각했으나 몇 개의 봉을 더 넘고서야 | ||||
왕실임도가 나타났고 왕실임도는 위에 동물통로를 만든 모범적인 임도로 되어 있었다. 대간길은 어느 곳 하나 만만하게 생각하면 큰 | ||||
코 다친다는 점이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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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임도:공성면 효곡리 윗왕실과 외남면 소상리 좀실마을 연결한다. 왕실임도에는 '국토가 숨쉬는 곳! 여기는 백두대간' 이라는 | ||||||||||||||||||||||||||||||||||||||||||||||||||||||||||||||||||||||||||||||||||||||||||||||||||||||||||||||||||||||||||||||||||||||||||||||||||||||||||||||||||||||||||||||||||||||||||||||||||||||||||||||||||||||||||||||||||
빨간색 문구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 ||||||||||||||||||||||||||||||||||||||||||||||||||||||||||||||||||||||||||||||||||||||||||||||||||||||||||||||||||||||||||||||||||||||||||||||||||||||||||||||||||||||||||||||||||||||||||||||||||||||||||||||||||||||||||||||||||
♤왕실(旺室) : 양편이 산으로 둘러싸여 그 모양이 마치 임금님이 계시는 왕궁과 같이 생겼다하여 왕실(王室)이라 불렀으나 관청에 | ||||||||||||||||||||||||||||||||||||||||||||||||||||||||||||||||||||||||||||||||||||||||||||||||||||||||||||||||||||||||||||||||||||||||||||||||||||||||||||||||||||||||||||||||||||||||||||||||||||||||||||||||||||||||||||||||||
서 王자를 못쓰게 하여 旺으로 고쳐 부른다고 한다. | ||||||||||||||||||||||||||||||||||||||||||||||||||||||||||||||||||||||||||||||||||||||||||||||||||||||||||||||||||||||||||||||||||||||||||||||||||||||||||||||||||||||||||||||||||||||||||||||||||||||||||||||||||||||||||||||||||
♤ 孝谷 :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열녀와 효자가 나와 효자각이 세워지면서 효골이라 불리어 졌다한다. | ||||||||||||||||||||||||||||||||||||||||||||||||||||||||||||||||||||||||||||||||||||||||||||||||||||||||||||||||||||||||||||||||||||||||||||||||||||||||||||||||||||||||||||||||||||||||||||||||||||||||||||||||||||||||||||||||||
왕실임도에서 윤상희 대장과 송상태씨가 정담을 나누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사진을 찍고 하는 사이에 이경숙, 박길화, 김중천 | ||||||||||||||||||||||||||||||||||||||||||||||||||||||||||||||||||||||||||||||||||||||||||||||||||||||||||||||||||||||||||||||||||||||||||||||||||||||||||||||||||||||||||||||||||||||||||||||||||||||||||||||||||||||||||||||||||
씨가 와서 함께 윗왕실마을(공성면 효곡2리)로 내려와 선두팀과 합류했다. | ||||||||||||||||||||||||||||||||||||||||||||||||||||||||||||||||||||||||||||||||||||||||||||||||||||||||||||||||||||||||||||||||||||||||||||||||||||||||||||||||||||||||||||||||||||||||||||||||||||||||||||||||||||||||||||||||||
왕실임도 위에 동물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비단 강원도의 구룡령처럼 잘 된 것은 아니지만 동물통로를 만든다는 자체가 중요하다는 | ||||||||||||||||||||||||||||||||||||||||||||||||||||||||||||||||||||||||||||||||||||||||||||||||||||||||||||||||||||||||||||||||||||||||||||||||||||||||||||||||||||||||||||||||||||||||||||||||||||||||||||||||||||||||||||||||||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이화령, 죽령, 부항령터널 등 요사이는 터널로 만드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
2001. 2.8(목)자 조선일보에는 '백두대간 8km마다 토막' 제하의 기사에서 30개 도로를 제시하고 있다.(별첨 남기고 싶은 말 참조) | ||||||||||||||||||||||||||||||||||||||||||||||||||||||||||||||||||||||||||||||||||||||||||||||||||||||||||||||||||||||||||||||||||||||||||||||||||||||||||||||||||||||||||||||||||||||||||||||||||||||||||||||||||||||||||||||||||
가까운 농가(노인 한 분이 집을 지키고 있었음)에 가서 목말을 하는 등 씻고 버스에 올라 대구로 왔다. 기꺼이 목욕 등을 허락해 준 | ||||||||||||||||||||||||||||||||||||||||||||||||||||||||||||||||||||||||||||||||||||||||||||||||||||||||||||||||||||||||||||||||||||||||||||||||||||||||||||||||||||||||||||||||||||||||||||||||||||||||||||||||||||||||||||||||||
노인의 장수만복을 빈다. | ||||||||||||||||||||||||||||||||||||||||||||||||||||||||||||||||||||||||||||||||||||||||||||||||||||||||||||||||||||||||||||||||||||||||||||||||||||||||||||||||||||||||||||||||||||||||||||||||||||||||||||||||||||||||||||||||||
○ 대구로 오는 중 | ||||||||||||||||||||||||||||||||||||||||||||||||||||||||||||||||||||||||||||||||||||||||||||||||||||||||||||||||||||||||||||||||||||||||||||||||||||||||||||||||||||||||||||||||||||||||||||||||||||||||||||||||||||||||||||||||||
· 이번 산행에는 윤상희 대장이 가이드를 잘했다. 이 때까지 보다 훨씬 잘했다. 등의 이야기와 | ||||||||||||||||||||||||||||||||||||||||||||||||||||||||||||||||||||||||||||||||||||||||||||||||||||||||||||||||||||||||||||||||||||||||||||||||||||||||||||||||||||||||||||||||||||||||||||||||||||||||||||||||||||||||||||||||||
· 다음 산행 때는 이희영씨와 나의 대간 종주 기념 파티를 하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침에 축 처진 어깨들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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