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아버지나 삼신당 얘기는 옛날 고담(古談)마냥, 우리 여기서는 고담과 같애요.
태조대왕이 거기서(신도안 삼신당) 산제를 드리고 산신님한테 명령받기를,
산신님이 지시하기를 "여기를 삼신당이라구 이름을 져 놔라!"
옛날 바우구 아무 이름두 없구 이런 덴데 "삼신당이라구 이름을 져 놔라!"했는데
내가 생각건데, 지금와 생각해 보면, 이게 참 계룡산신님이 초(初)에 다 시작을 한거라구.
그랬는데 삼신당이라구 내려왔지.
내려왔는데 우리 할아버지를 불러다가 그 터를 지켜라 해서 인저 그렇게 지켰구.
우리 시아버님이 공부가 출중하니께 불러다가 또 삼신의 이유를 맞춰 법을 붙쳐서,
그 법이 그래 나온 거여.
신의 사업이라는 게 살곰살곰 엮어지는 게 이거드라구.
그러니께 여그다 역사를 지으신 산신님 말씀에 "백오십년은 내가 혼자 도를 닦고
백오십년은 사람을 의지해서 같이 하는데, 그 터를 지킬 사람을,
누가 지킬까하구 팔도강산을 다 더듬으니께 묘향산의 신선바위에다
천제를 드리구 기도하는 자가 있어서 잡어 왔다"는 겨.
그분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시할아버지, 白玉聲)유.
그러니께 그 묘향산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초하루 보름으루 제를 지냈는데,
어느날 계룡산신이 "계룡산에다 일간초당 초가삼간을 마련해 놓고
청룡백학이 춤을 추며 너를 오라 손짓하니 바삐가자 어서 가자"하면서
할아버지를 잡아 끌더랴.
그래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버릴 수가 없어서 "못가겠다"고 그랬더니,
산신님이 벌을 주시드래요. 3개월간을 아파가지고 움쩍달싹을 할 수 없게 맨들었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계룡산으로 왔는데 걸어서 3개월이 걸렸대유.
그라구선 와보니께 인가구 뭐구가 어딨어. 아무것두 없드래유.
그래 간신히 주막을 하나 찾아가지고 거기서 일단 거처를 의지했쥬.
근데 거기(묘향산)서도 좋은 거 다 버리고 올 적에는 神에 못이겨서
그 지시루다가 온거구 그 신도안이 다 비었을 적이니께 그걸 내꺼라면 다 내꺼인데도,
"계룡산신이 어디다가 초당, 초가삼간 집을 져 놓고 오라고 했나"하고 찾아 봤대유.
그래 찾으니께 못찾구서 산상봉에 올라가서 보니까 거(신도안 용동리 성도봉 만복암의 삼신당 자리) 주랭이 좋더래유.
그래 저 주랭이나 한번 내려가 보자구 내려가니께
일간 초당 초가삼칸 집이 거기 있더래유. 바우(바위)가 이거만한,
이거보다 더 크지, 바우굴이. 그래 거기다가 사람하나가 앉아 기도하고
공부할만치 해놓구 밑에다 가는 초가삼칸 집이 새막만한 것이 바시시 쓸어질라구 하드래유. 그래 이게 기로구나 인제 인정하구선, 주막 주인한테 가서 "내가 거기 가 살면 어떠냐?"
그러니까, "거기살면 살지, 뭐 누가 임자냐."구. 그래서 인제 살기 시작을 하셨거든.
그래 살다 보니께 참 고생두 많으셨다구 그래유.
그 산중에서 뭘 해먹구 살겠시유. 그래 한탄을 하면 산신님이 먹을 거를 갔다 주겠다고 해서 보면 우물가에 떡시루 같은 게 놓여 있었시유.
먹으라고 산신님이 놓구 간거유.
이래저래 살다가 묘향산에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오셨는데,
그 아들이 열다섯에 영양부족으로 죽드래. 죽구선 딸만 4형제를 나셔 가지고 그 딸들을 키우고 사시는데,
한번은 산신님이 그러드랴. 우리 할아버지는 산신님하구 통해서 산신님하구 말을 하구 사시니께. 말하자면 "닦고닦은 천사가 있다.
그 사람(시아버님, 정원강선생 -- 삼신당의 창건자) 오거든 사위를 삼어라.
사위를 삼으면 앞으로 아들 지지않게 좋을텐께 사우를 삼어라" 그러드랴 산신님이.
근데 우리 아버님(시아버님)이 그때 그지(거지)같이 하구 다니는 판이여.
명산대천을 돌아댕기시면서 공부를 하시는 분이니께 계룡산에도 들어가 공부를 하신거지.
그러니께 우리 할아버지가 "여때와서 고생을 하구,
이렇게 해 놓구서는 -- 우리 시아버님하구 시어머님하구 20년 차이에요 --
20년 차인데 어디라구 그렇게 해유?"
아휴, 그지같이 암것도 없는 양반을 사우를 삼으라구 그러면 어떻해유.
가뜩이나 고생에 젖어 죽겄는데 우리 어머님은 얼마나 이뻤나 모른디야.
옛날 샥시는 머리가 길구 좀은 더 인물났어?
그래는디 괘씸맞게 딸을 키워논께 그런 그지사위를 보라구 그러느냐구.
그래서 저 마을에 밥술이나 먹는 부자집에 사주를 받아 놓으니께 멀쩡했던 딸이
느닷없이 연주창이 나더래. 옛날에 연주창이 나믄은 유전두되고 못고쳐.
못고치니까 그 집에서 사주를 퇴해 오드랴.
그래 할 수 없지 어뜩햐. 연두는 자꾸 성해가구.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지같은 사위를 봐야것다.'하구서는 "내가 딸을 줄테니
사우노릇을 헐랴"느냐구. "아구 내몸뚱이두 건사를 못하는데 어떻게 장가를 가느냐"구 싫다구 허시드랴. -- 우리 할머니가 얘기를 하시드라구 나한테,
내가 들은 소리여 -- "싫걸랑 그만두라!"구 내버려 두구선 우리 시아버님이
그라구 댕겨 가시니께 자꾸 산신님이 그러시드래.
"아구 이담에 오거들랑, 내가 어뜩해든지 또 불러올께.
불러오거든 사우를 삼어라, 삼어라" 그러시드래.
그럼 또 오시드래. 그 양반(산신님)이 불러왔는가 그래오면 "어서 사우를 삼어라, 삼어라." 자꾸 독촉을 한대.
그라면 할아버지가 하기가 싫어서 말을 안듣구 또 그냥 보내면은 막, 보냈다구
산신님이 야단치드랴. 그래서 인제 "또 불러올께 사위 삼어라."
이렇게 해서 몇번 씨름을 하다가 할 수 없이 '주는 복을 차리' 하구선 그러라구.
그래 인저 그 산골에서 동네가 뭐 있어. 찬물 떠놓고
예를 이룬다든지 그렇게 하구선 사시는데, 어딜가나 아버지가 간 곳이 없이 생전 안오시드랴.
그러더니 그 양반(시아버님)이 오시니게 이 양반(남편)을 그날 저녁에 나시드라네.
그래가지구 이름두 짓구 사주두 내주구 이러구 가시더니
또 기척없이 있다가 또 오시더니 아들 하나를 또 나셨어.
그냥 그렇게 하구 가면은 일년, 일년 반은 있다 오시드랴.
그러구그러구 하다가 아들을 삼형제를 나셨어.
근데 셋째를 낳구서는 가서 돌이 넘어서 세살이 되도록 안오시드라네.
그런데 인제 오시니까는 우리 할아버지가 약이 올라 가지구 "너희 식구는 네가 데려가라. 나 인제 고만 벌어 먹일란다."구. 애가 싯이 인자 일곱살, 다섯살, 세살 그러니까 곧잘 먹질 않것어.
파거리 장이라구 삼십리를 나와 나물 한금치에다 팔어서 쌀을 물어 가면은
그것을 투가리에다 요렇게 해서 고거만 냉기구 이 양반들은 감자, 밀, 고구마니 이런 것만 먹구 살구 그랬는데.
데려가라구 내쫗았대유.
내좋으니게 우리 거기(삼신당)서 공부하는 아들이 인제 두 양반이 와 계셨는데
-- 애기들까지 다섯식군데 느닷없이 암것두 없는 그지같은 양반이
다섯식구를 내쫓으면 어디루 가 -- 그러니까 이 양반들이 보구서 그러드래
"아구 저렇게 아무것두 몰르구 세상을 모르구 저런 양반을 식구를 딸려 보내면 어떻하냐"구. "내가 가서 우리집으루 식구를 데려가야 것다구.
" 유성(대전)사는 양반인데 그러드라네.
그라구 가더니 정말 식구를 데려다 자기네 집에다 두구 왔다구 왔드래.
그래서 할머니가 생각해보니 남의 집에다 하루이틀두 아니구
어떻게 두어두리 싶어서 할아버지한테 혼날까봐 말두 못하구
꽁하니 별르다가 할수 없이 말을 하셨대.
"아무 거시기가 자기네 집에다 식구를 데려다 놓구 왔다니 어떻하면 좋으냐?"구 하니께,
그래두 부애가 나서 한번 맛보라는 식으루 내쫗았지.
당신(시할아버님)두 사람인께 굶어 죽게 생기게 내쫓았으니 걱정이지, 안그래?
그래 걱정이든지 그 소리를 듣고는 반가와 하면서 "그럼 데려와야지."하며,
그 이튿날루 데려오드래. 그래 우리 어머님은 친정으로 도로 가서 애기 데리구 있는데 이 양반은 그러다 혼자 삼각산에 가서 또 바우굴 안에 가 들어 앉았었대.
들어 앉으면서 애국자들을 만난겨.
그 애국자들을 어떻게 만나느냐하면 그것두 도술로 만났어.
우리 시아버님이 여섯살에 부모를 잃구 유리객을 허구 돌아 대니시다가
저 곤륜산으로 소련으로 뭐 한국 명산이란 명산을 삼십 오세까진 그러구 돌아대녔는데,
무슨 공분가 이런 호흡하는 공부가 있어서
그걸 하면은 아침 저녁 그거를 하면 안잡숫고도 산대.
그리구 저 풀같은 거나 잔대 같은 거, 도라지 같은 거,
그러니께 그 양반은 정말 도인이라 그런지 도토리두 잡숫구, 밤두 잡숫구, 솔잎두 따서 잡숫구. 그런걸 잡숫구 사셨대유.
그렇게 하구선 호흡만 하구서 사셨대유.
그러니께 산신님이 팔도강산을 다 더듬어,
이(삼신당) 법을 붙이게 헐라구 찾어 보니께 닦고 닦은 천사가 있어서 붙들어 왔다구 그러지 않았어유?
그래 붙들어다가 "이 법을 붙여라!"해서 인제 우리 시아버님이 붙이는데 우연희두 그 인연들을 애국자들을 만난겨.
그러니께 그 애국자들이 산에 들어와서 숨어사는데 이 십종을 칠년을 알았대여,
여기서 썩어서 잉. 지금의 암이여, 그게. 옛날에 습종이 암이여.
옛날 그걸 습종이라고 그래. 안 낫으믄, 썩구 안낫으믄.
그래서 약초나 캐다 팔아서 용돈이나 쓰고 숨어살던 애국자들이 산을 돌아댕긴다구.
그러니께 바우굴을 어떻게다 보니께 그런 양반(시아버님)이 계셔서 만나가지구,
아구 이렇게 도를 닦구 공부가 장하시믄은 약을 알으시겄다구.
이것좀 낫으게 해주시라구. 이거를 칠년을 앓아두 이렇게 못낫구 썩으니 어떡하냐구.
그러니께 두말두 않구 -- 그래 여기(삼신당 교리책)다가 그 소리두 해 놨쟎아유 -- 솔잎 껍데기를 뚝뚝따서 그 소나무 노송을, 벌렁벌렁 자빠지는 거 있지,
그것 따주시면서 뭐 어떻다는 말두 않구 따주시면서 곱게 가루를 장만해서 거기다 얹구서 일주일만에 띠래유.
그래 일주일만에 가서 띠니께, 그냥 악혈이 떨어지구 새 살이 차 올랐드라는 겨.
그게 선약이여. 도술이 장하면 선약이, 있지 없는게 아니여.
그러니께 이 양반들이 탄복을 한거쥬.
그래 그 양반(시아버님0을 가 찾을라구 인제 가 찾아 뵈야지 하구 찾으러 가니께,
사흘 나흘을 댕기며 그 산을 다 헤매두 못 찾았대유.
그러니께 한 양반이 -- 주신 지혜같애, 내맘에는 다 주시는 지혜같애.
산신들을 통해 다 지혜를 줬었이니께 그렇지 또 어떻게 깨닫껏어 --
"이 좋은 어른을 만날라는데 우리가 삼각산 산신님한테 인사없이 어떻게 만내것냐? 재물을 차려다가 기도를 해야것다."
그러구 그래가지구 재물을 차려다가 기도를 하구 나니께 참말로 그렇게 도와줬는가,
뵈줬는가 저기 고 모퉁이에가 계시드라네유 -- 나는 다 들은 소리여,
옛날에 새댁 시절에 다 그 식구들한테 들은 소리여 -- 그래 그 모퉁이에 계시드래.
그렇게 찾어가지구,
"아구 선생님! 약을 주셔서 낫어서 이렇게 저기하다"구 치사를 허구 탄복을 했으니게
들러붙을 수 밖에 더 있껏시유? 자기네가 숨어살면서 왜정을 반대하구 살면서,
지금으룬 빨갱이마냥, 잡히면 죽는건데.
그때는 이름두 왜놈이 다 돼서 뭐 성두 이름두 전부 일본말로 불루구 일본말만 가르치구.
한국은 전부 저기가 다 없어져 가는 판국인데.
이 양반(시아버님)은 그때 가만히 육체는 벗어놓구 靈은 신선이 되어 갈라는디
-- 식구들도 생각안하구 -- 그 애국자들이 자꾸 들러 붙어가지구
"선생님 우리 공부좀 시켜 주시라"구, "뭘 어떻게 하자구" 그러드라네.
그래서 싫다구 하니께, 삼각산 산신님이 "나가라!"구 그러드래.
'인간에 나가라'구. 그래서 이 양반이 안 나오실려다가 식구 생각도 있구 그 사람들이 애통도 부리구 그래서 나오셨다는 겨.
그래 그 애국자들이 우리 아버지한테 그러드랴.
"선생님 그렇게 고명하신데 우리 한국운수는 언제 어떻헜냐?"구.
그라니께 우리 어른 말씀이, "한국 운수가 비색해서,
다 그렇게 된 걸 어떻게 허느냐구,
하늘이 하시는 일인데. 하늘이 하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막느냐구,
못막지." 그래서, "그래 못막구 우리는 그럼 왜놈이 된다는 말이냐?"구.
왜놈이 다 됐었지, 내가 알기로는. 내가 그때 이십시절이니까 열다섯 열일곱시절 다 됐지.
나두 성 이름이 박인숙인데, 복구징 복구라구 이름두 갈어 호적에 올리구,
다했지. 그러니까 내 친구는 이순남인데 니진 교꾸라구,
나는 복구 징교구. 이름두 다 그렇게 바꿔서 그렇게 호적에 올려서 다 해 논거여.
그랬는데두 그래 이 애국자들이 참말로 애석하니께, "선생님 어떻허면 좋냐?"구.
그러니께 우리 아버님 말씀이 "글쎄, 우리는 하느님의,
세계 다 일체 자손인데 하느님 자손인데 어떻허느냐구.
일본이 운이 좋으니께 그러구 한국은 운이 없으니께, 그러니께 우리두 하느님에게 비는 수 밖에 없지." 그러셨대요.
그래서 어떻게 자본주들도 잡고해서
그때 돈에 30원, 40원 딜여가면서 한국 운수를 돌리는 기도를 했대요.
서울 삼각산하구 계룡산 삼신당에 천단(天檀)을 세우고.
지금 시가루 공무원 월급하구 맘먹지유. 그런 기도를 초하루 보름마다 하구 또, 춘하추동 사철 기도를 했대. 그렇게 십 몇 년을 그냥 월급을 줘가며 시키셨슈.
( 질문 : 그때 애국자라는 분들은 어떤 분들인지 아세요? )
응, 그 애국자들은 다는 몰르구 그냥 이선달이고만 하는 사람이 있어유.
이 분은 처자식은 없고 조카가 있는데 이강생이라구 하대요.
이선달, 그 분은 힘이 장사라구 해요.
무관출신이구. 서울 아현동 근처에다 땅굴을 파놓고
독립자금을 맨들려구 위조지폔가를 만들어서 옮기다가 순사에게 잡혀서 종신형을 받았대유. 그리구 신영학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딸이 신화순이라고 논산 두계에서 살아있다는데.
왜정때 그 분은 딸하고 부인하고 사형제에게 將軍旗를 들게 하구선
신도안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대요. 그라구선 단독으로 지서를 습격해서 순사도 때리구 그래 잡혀서 옥살이를 했어.
얼마 있다가 풀려났다는데 옥살이 때 고문을 많이 당해가지구 금방 돌아가셨대유.
그때 우리 삼신당 식구들도 고생을 했지유.
또 한분은 백완영이라는 사람인데 이 분은 집안에 몹쓸병이 있었나봐유.
그걸 우리 아버님이 기도로 도력(道力)으로 고치셨대유.
그래서 그분 당질되는 백낙원이라는 사람도 우리 아버님 제자가 됐시유.
그 백낙원이라는 사람은 그때 경성 태창방직 사장으로 돈이 좀 있었는가봐.
이 백완영이라는 분이 한국 운수 기도할 수 있게끔 삼신당을 맨드는데 도움을 많이 주셨나봐요.
그렇게 기도를 해 내려오다가 -- 내가 시집오고 나서도 한 5년이나 더 지냈지 --
같이 독립운동하던 애국자들 중에 어떤 분이 경상도 어디선가 인제 잽히셨어.
그래 그 여파로 우리 아버님도 발각이 났어. 그래가지구 왜정의 반역자로 붙잡혔슈. 그래서 그 모진 고문으로 그만 옥사를 하셨시유. 그래서 참 억울해 가지구 우리두 세상 사무치구.
"뭐 때문에 이 법을 붙여놓구 그렇게 하셨이까?" 하구 ….
( 질문 : 그럼 정운강 선생님에 대한 자료같은 거는 남아있는 게 있습니까? )
없지유.
왜놈이 싹 가져갔시유. 우리 시아버님은 공부를 얼매나 많이 했는지 몰러유.
책도 이렇게 쌓여있고 뭔지는 몰라도 아버님이 뭔 책같은 거를 짓는 거 같앴는데,
왜놈이 싹 가져갔어유.
우리 삼대(三代)를 희생하면서까지 지킨 이 삼신당 법을 어떻게 세상에 알릴려구해도 아무런 증거가 없시유.
참 답답하고 …. 그 애국자들도 다 돌아가시고 후손들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구.
그때 우리 아버님 재판 기록인가를 찾아 볼래두 왜놈들이 싹 불태워 버려가지구 알 길이 없어유.
아버님이 돌아가실때 이 양반(남편) 나이가 열아홉이유.
밑으로 남자형제가 둘이 있었는데 이 양반(남편)이 장남이라고는 해두 워낙 곱게 자라다 보니까 뭐 세상돌아가는 거를 알것시유.
그래저래 고생고생 말도 못하는 고생을 했시유.
우리 아버님이 늘 "사람은 공부를 한다"고 그랬시유.
그런뜻도 모르고 법도 함껏도 몰랐기 때문에 답답하니 여지까지 이럭하고 있었지.
"모두가 자꾸 공부해야 산다"하시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셔도 그게 무슨 소린고 했는데, 지금와서는 그 공부가 그렇게 중요해요,
응? 우리가 공부를 해 깨달아서 아는게 있이므는 이 세상 다믄 험해도 살기 쉽구,
고생없이 또 살 수도 있구. 고생을 해도 맛을 알구하구 백사만사를 다 알게가 돼.
근데 우리 이거(삼신당 교리책)를 질라는데
도대체 인제 내가 초는 잡았지만 글씨를 알아듣도록 맨들지도 못하쟎어?
또 이렇게 허황하게 무식하게 신의 말만 가지고두 못하쟎어?
그래 이 사람(친동생)이 좀 밝거덩. "그래 이거 좀 해라."하니께,
"내가 국민학생거고 뭐고 암것도 모르는데 몰 하느냐"구 자꾸 "무속으로 진짜 神의 말,
鬼神의 말이라고 내가 그런걸 다 뭐, 실행을 해주랴."고 이 사람이 반대를 하는겨.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 "몰라 할라면 하고, 말라면 말아라.
산신님이 너를 시켜야지 너 안시키면 할 놈이 없다."고. 아무래도 시동생이지.
저 양반(정운강 선생)의 아들네, 조카가 지금 그렇구 그런데,
그래도 그 놈들이 못하게 생겼으니께 이 사람(동생)을 시키래.
그래서 너를 시키라구 꼭 그랬으니까 니가 복질라면 할꺼구,
복 안질라면 안할거구 그러셨어.
돌뿌리 차야 지 발뿌리만 아프다구 그러셨으니께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마라.
할수없지 어떡하냐 그랬더니 초본 잡은 거 놨두고 가랴.
가므는 내가 산신님이 그렇게 분명할 거 같으면 날 지혜를 주시겠지.
가라구 그라대. 그려. 널 지혜를 주셔서 하지,
그럼 니까짓 게 뭘 알아서 햐. 니가 지혜를 주면 니가 잘 받들어서 니가 그리구,
천상(天上) 영(靈)이라서 너를 시킬라구 그러니께 해여.
그래 동생이 자구나더니 새벽에 꿈을 이상한 꿈을 꿨다고 그러구.
"내가 어떻게 자구나니께 어떻게 해보믄 될상도 싶으니께 놔두구 가요. 그라믄 내가 연구를 해봐서 하께"
그러더니 이걸 허느냐구 인자 한 보름을 정말 시달림을 마쳐서
이렇게 말이 되게 하느라구 했대요.
그래서 인쇄소를 잘못 만나가지구 인쇄를 잘못해 가지구 많이 좀 잘못됐어.
인쇄소서도 좀 더러 이런 책을 한다구
그러믄 좀 틀린 건 고쳐서 맨들어 줘야 하는데 못맨들구 ….
그래서 산신님 말씀이 '이걸해서 정부에다 바쳐놓고 진정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은 안된다.' 그러고 이거(교리책)를 의지해 가지구
그거(삼신당)를 발전을 시키지 그렇지 않으면 못할텐께 하라구.
해서, 나는 부모 조상님 참 그 억울하게 돌아가신 거 흔적도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거를 내가 기를 쓰고 한거유.
백팔십을 들여서 했는데 인쇄소에서 잘못해 가지구 또 한번 다시 하느냐구 고생했시유.
아무튼 국가에서 맡아서 문화재루 아주 이 본 요대루 지켜서,
시설을 해서 요대루 지켜를 오든지 아니면 이 기도를 받어다가
우리 국가를 위한 기도를 성현을 들여보내 가지구 하든지, 두가지 중에 한가지 하라구 내가 국방부고 어디고 진정을 했는데. 어떻게 될라는가 몰라.
◇◇◇ 어느 사진사의 신도안 소감 ◇◇◇
제가 거기서 살적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재수할 땐데,
그 당시 삼신당이라는 데가 신도안 용동리 3구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꼭,
한 1년을 있었댔시요. 조용한 데 찾아들어 간다고 이제 절간같은 델 택하다 보니까
신도안의 삼신당에 들어갔드란 말야.
그 이후로 거기서 1년간 있으면서 삼신당 내에를 눈으로 듣고 보니까
그 당시 18살 때이니까 교인들이 -- 아까도 얘기했지만 제 자신이 교가 없으니까
다 눈에 보이는게 신기하고 새롭단 말야.
그 이후로 거기서 조금 봐 뒀던게 1년간 체험이고
그 다음에 군대갔다가 제대하면서 신도안에 다시 들어갔는데.
저희가 1·4 후퇴때 부자가 피난을 내려왔어요, 평양서.
39살 때였는데. 왜 저희 아버지 이름을 꺼내냐하면,
신도안이라는 데 …. 신도안보다 계룡산, 말하자면 정감록 있쟎소?
거기에 신봉하는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저는 어렸을 적부터 다 커서 여기서 고등학교(대전고등학교)를 나오구선
군대를 제대하구서도 아버님 혼자 계시니까
부모를 따라 갔다기보다 부모를 보호하는 입장에,
자식이 저 하난데 하면서 신도안에 다시 들어간 거야.
그러면서 사진관을 하다보니깐 본의아니게 사진일을 하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각 교파들은 많다고는 들었는데 그렇게 많은 줄은 제자신도 몰랐어요.
이렇게 저렇게 4·5년간 교를 다니다보니까 정상적이라고 할까,
뭐 그 사람들이 비정상적이라는 건 아니지만,
모든 일상생활이 틀리단 말야. 우리가 볼 적에는.
근데 '68년, '70년도까진 거기가 전깃불도 없었어요.
그담에 전화도 없고 이제 우체국에 찾아가서 전화하는 정도였지.
그런 가운데 외부와는 좀 동떨어졌죠.
그런데다 종교파들이 무수히 많은데 거기에서 생기는 여러가지 일상생활들이,
제가 눈으로 봐서는 신기하다고 할까?
뭔가 좀 저 사람네들이 신도안에서
일어나는 신앙생활들이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별 무관심적으로 보이긴 보이는데.
나름대로 저희 아버지도 일개 그 사람들과 같은 주류에 있다고 보면
같은 입장이 되는 것 같고.
제가 볼 적에도 어렸을 때 신도안에 따라 오기는 따라 왔지만
거기 있으면서 20대 30대를 넘기다 보니까
그 신앙에 대한 것이 제가 보는 판단력으로 봐서는
그 사람들이 모든 일을 정성스럽고 지극하게 자기 평생을 그냥 다 쏟다시피 말이죠.
그러는 것이 진솔하게 보인다고 할까, 진지하게 보이니까.
세상에 알려진 큰 종교 -- 제가 종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서 20년 있다보니까 --
기독교, 불교 이렇게 나눠져 있는 가운데서 신도안 내에서 크다고 볼 수 있는 건 이제 원불교, 초창기에 생긴 천진교(동학계통이예요)
그 나머지 기독교도 많은데 그 내막은 모르겠고.
거기에 새일수도원이라는 기독교의 한 파인가봐요.
그 다음에 천주교도 있고 각양각색이 다섯손가락 내지 열손가락 안에 드는 종교라면 좀 일관적 크게 보이는데
거기에 하도 많은 종교가 있어서. 78년돈가 지서에서 파악된 종교가 136개교로 제가 알아요.
근데 그 당시에 -- 그러니까 75년도에서 76년도 사이일꺼예요 --
정화사업이라고 해서 그린벨트 내에 유사종교를 철거하는 작업이 벌어졌어요.
이색종교라할까, 그 그린벨트안에 들은 종교는 무조건 철거를 당했어요.
그 하기 전에 제가 알기로는 중앙정보부로 아는데,
그 당시에 정보부에 관계된 사람이 와서 종교를 파악할 때 제가 사진으로 찍어주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157개굔가 이렇게 된 걸로 알았어요.
서울 경기도 어딘가보다 둘째 번 된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말하자면 유사종교가 많은데로 따져서.
그래서 종교가 150이 넘는다고만 알고 있죠.
실제로 제가 사진 찍어논 것도,
100여개 되는 교를 나름대로 행사든지 예식이든 뭣이든지 가서 찍었단 말야.
80년도 초반 거의 53년도부터 꼭 80년도까지 혼자 사진을 하니까
아무튼 사진사 대접을 받긴 받았는데,
요즈음처럼 아무나 카메라를 갖고있는 시절이 아니었다구.
그러니까 장비는 비록 초라했지만 무슨 행사만 있으면 사진을 찍으러 가야하는 일이 있었어. 그렇게 왔다갔다 하면서
그 사람들의 생활이나 종교관이나 그런 것들을 자꾸 보게된단 말야.
그런데 남들은 계룡산이 무속이라도 알려지고 유사종교라고 신문에도 나고
그 다음엔 좀 안된 얘기지만 계룡산하면
음담패설이 도는 무슨 교로 또 얘기한단말야.
이건 신문에도 났데. 그렇지만 내가 그 고장에서 사진업을 하면서
각 교파마다의 모습을 봤을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돈벌이나 하기 위해서라든지, 물론 호구지책이라는 게 있긴 있을테지만,
허무맹랑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드라구요.
그리고 외부에서 그런 얘기하면 싫어하고.
저 같은 사람은 사진이나 찍으면서 부업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면서
그런 일들을 20여년 겪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
나는 지금 얘기하지만 글재주가 없단 말야.
신앙에 대한 거를 내 나름대로 철학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언제인가 종교인과의 만남이 있을 적에 --
되도록이면 종교에 대해서 판단력이 있는 전문적인 종교인 --
신도안이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거니까,
제가 20여년 있었다지만 확실히는 모르지만 50년간 내지 100년간은 무속세계라고 할까,
나름대로 종교가 뿌리가 오래 박힌 곳인데
'그걸 뭔가 종합·정리할 사람이 없었을까?'하는 거를 염두에 두었다구.
그러나 하루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고.
저는 20년동안 직업상 일단 한번 상날맹이든 등쟁이든지 암자를 오가면서
하나하나 봐 둔 기억력과 사진을 하나하나 찍어놨다가
'제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면 여기에 대한 책자도 가망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을 군데군데 찍어놨어요.
지금 신도안에 정부에서 필요로 해서 육본이 들어와 있는데 거기서 살 적에는
신도안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사실은 살았어요.
여기를 83년 12월달에 나와서 지금 8년째 되는데
그 신도안이라는 거를 거기 있을 적에는 생각 안했는데 나와 있으면서 보니까
도심에는 매연관계도 있지만은, 지금 어느 시골을 봐도 신도안만한 시골이 없어.
눈에 차질 않아. 일이 있어서 옛날 신도안 사람들을 방문하면 거기서 하는 얘기도 그렇지.
그러는 가운데 '신도안이 참 아름답구나!'하는 거를 느꼈고,
또 지금 육본이 들어서면서 신도안이 과거에 상상하던 거보다도 발전되고 있고 계룡시가 발족을 하고 있고.
저희 아버지가 80인데 또 아버님이 홀로 계시니까 저희집에 사랑방이랑 방이 몇개 있어서 이제 노인 양반들이 많이 모이시곤 했다고.
그 노인 양반들이 제가 볼 적엔 학문이나 많이 하신 분들 같은데
그분네들이 내가 나이 20대 되든 해부터 쭉 해 온 얘기가 신도안이 서울된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믿고 서울이 됩니까?"하고 서서히 말을 물어본단 말야.
그럼 그 양반들이 다 자기도 나처럼 어렸을 적부터 크면서 어른들한테 들었다 이거야.
그리고 그런 나름대로 또 한학을 연구한 사람들인데
"틀림없이 서광이 비친다."고 하고, "신도안에 운세가 돌아온다.
" 이런 말을 꺼낸단 말야.
그러니까 제가 종교인은 아니지만 거기 있으면서 자꾸 노냥 듣는 소린데.
그래 그 노인양반들 보구선 "그럼 이 신도안이 말씀하시기는
현재 서울보다는 크다는데 어떻게 크다고 증명이 되요?" 그러니까,
"지금 눈으로 봐도 크지 않느냐!" 이거야.
그래서 "제가 봐서는 이해가 안가는데요."
그러니까, 한 노인양반이 얘기하기를 "내가 어려서 남산에 가 봤을 적에 신도안 푼수도 안됐다." 이거야.
그 양반들 중에 지금 돌아가신 분이 대부분인데,
그러니까 한 15년전에 그 양반들이 80이 되셨을 땐데 그 양반들이 서울에 갔을 적에 신도안보다 넓지 않았다 이거야.
그런데 그렇게 말을 듣고서 산에 오르내리면서 주위환경을 볼 적에는
'과연 서울보단 이게(신도안) 클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요즈음 지도 펴 놓구선 지리학상으로 보면 서울보다야 작죠.
그렇지만 초창기 서울이 수도가 됐을 때와 비교하면 여기가 좁은 데가 아니다,
그리고 또 거기에 이태조가 신도안에다 도읍을 정할려고 했던 흔적도 있고.
그런 말이 삼신당에서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고.
원불교 교회가 있는 부남리 2구 장터에 보면 대궐터라고 해서 당시에 대궐을 지으려고 했던 주초석, 주춧돌이 널려져 있었다구.
그것이 한 10년 전만해도 행정당국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거로 값어치 없는 거로 여겼지만,
널려져 있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 우리가 봤을 때는
그 주춧돌이 상당히 의미가 크다고. 그 돌을 다듬은 흔적도 있고
경주나 어디 유물들이 나타나면 떠들썩한대도 신도안 꺼는 500년 전 것인데도 왜 등한시 하는지 …. 그래 나는 나 혼자 생각으로 의심스러운 데가 있어.
그런 거 저런 거를 사진으로 찍고나서 이번에 앨범을 낸 거를 행정직이나 육본,
계룡시(市)에서 보드만 자료를 상당히 귀하게 여기드라구.
지금 육본이 들어서면서 정돈된 상태, 지금 말로하면 개간이라고 할까,
웬만한 건 다 허물어 버린단 말야. 그런데 내 개인적으론 꼭 필요하다고 하면
잘 보존할 건 보존해 가면서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 이번에 앨범을 발간한 거를 행정당국에서 보고서는 수긍이 가는가 봐요.
지금까진 그저 신도안에 대해서, 제가 알기로는 '83년 전에는 신도안이 지도에도 없었어요. 육본이 들어서면서 그리고 계룡시(市)가 발족하면서 지도에도 나오지만요.
( 질문 : 그러면 육본이 들어갈만한 입지조건에 대해서는 어떤 거라고 …,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
그거야 뭐 정부에서 하는 거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정부가 육본 입지를 정할 적에는 모든걸 다,
여건상 합당하니까 그랬을 꺼란 말야.
여기저기서 듣기로는 통신체제가 안성맞춤일 것이다라는 얘기는 들었댔어요.
그리고 저희같은 사람들이 볼 적에는 과거부텀 학문적으로야 체계적인 뭐가 없었겠지만
신도안이 도읍지가 된다고 구두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고.
신도안이라는 글자 자체가 새로운 新짜, 도읍 都란 말야. 나는 그게 그렇게 가능성 있게 될러는지 믿어보지 않은 거고.
지금은 육본이 들어와 있으니까 그걸로 이해하고 있지만 과거같으면
감히 생각도 못했던 거죠. 거기서 20여년을 생활하면서 그 노인양반들이
'크게된다, 크게된다.'했지만 그 시골구석에 그런 큰 건물들이 들어설 줄 알았나.
현실적으로 달라지긴 달라졌단 말야. 그러니가 입지조건이야 어떤건지 …,
그거야 나라에서 하는 거니까 전문적으로 따른 방도가 있겠지.
여기 종교인들이 얘기할 적에는 허무맹랑하지만 신도안 사람들이 '신도'라는 '새수도'가 된다는 소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할 정도니까. 그나저나, 많이 발전하고 있다는 거를 이제야 눈으로 직접 보니까 실감나드라고.
제가 보는 견지에서는 이래요.
외부에서는 신도안의 교, 신흥종교라고 그래가지고 매도하는 수가 있단 말야.
그런데 그 교주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 자기가 영감을 받고 들어왔다느니,
신의 계시를 받고 인도되어 왔다고 한단 말야. 그러니가 그 나름대로 자기가 하는 종교에 대해서 자긍심이라고 할까, 그런게 아주 강해요.
제가 듣기로는 육본에서 하는 건지는 몰라도 계룡시에서도
문화보존이나 유물관계에 대해서 감안하고 있는 거 같애요.
이 신도안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거도 아니고 과거부텀 있으면서 또 신앙적인 소재도 있었고 건설적인 면에서 있다고 가정을 해야 돼요.
지금 문헌이 있는지 없는지 제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민비도 신원사로 피난을 했었다는 얘기도 있고 과거에 이 계룡산을 명산으로 알고 중국에서나 심지어는 미국 사람들도 그걸 달리 봤다는 거야.
그 사람들도 그런데 하물며 글로해서 도를 통한다고 할까.
종교에 대한 신앙을 갖는 입장이라면 신도안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단 말야.
계룡시에서도 나름대로 뭔가 생각이 있는 거 같은데, 잘은 모르겠지만 ….
아무튼, 저같은 경우 월남한지 40여년이 되니까
고향생각을 할라치면 고향이 아른거리고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지.
그리고 신도안에서 오래 살다보니까
그곳이 내 고향같고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