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달라져야 아이가 산다 |
‘아버지학교’ 등 좋은 아빠 되기 프로그램 활발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제 자신이 ‘가시나무’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직업군인 A(49·서울 서초구 방배동)씨는 2003년 10월의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당시 국방부 주관의 전군 기독 준·부사관 수련회에 참가한 그는 뜻하지 않게 ‘아버지학교’ 교육을 받게 됐다. 교육내용이 뭔지도 모르면서 얼떨결에 2박3일의 빠듯한 일정을 보내게 된 그때, 아버지학교 스태프들이 노래 한 곡을 들려줬다.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 순간 A씨의 머릿속엔 문득 자신의 분신(分身)이 떠올랐다. 그러곤 곧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바로 ‘가시나무’였구나!’
‘좋은 아버지’ 의욕만 갖고 되나 … 교육 통해 변화 바람
강압적인 양육방식에 반발해 고등학교 자퇴와 가출로 방황을 거듭하던 그의 아들(당시 20세). 아들에게 A씨는 절대복종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자기의 바람과 한 치라도 어긋나면 아들에게 군대식 얼차려까지 시키는 등 엄하게만 대하는 터였다. A씨에게 아들은 또 한 명의 ‘병사’였던 셈. ‘그동안 나는 허울뿐인 아버지였다. 아버지 역할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권위적인 가장이었다. 그러면서도 교회 안수집사로 활동해왔으니 이중인격자가 아닌가. 참으로 잘못 살아왔구나.’ 자성(自省)에 빠진 A씨에겐 이제 세상이 달리 보였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아들의 발을 씻겨주며 화해를 청했다. “아빠를 용서해다오.”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었던 아내도 꼭 안아주었다. 아버지의 진심은 통했다. 아들은 이내 방황을 접었고, 부자의 관계는 회복됐다. 이후 아들은 군복무를 마치고 검정고시를 거쳐 올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 아들이 군에 있던 2004년, A씨는 아들이 겪을 고생을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으로 이라크 파병을 자원해 무사히 임무를 마치기도 했다. “아들이 만 3세 때 한글을 완벽하게 깨치고 한자도 많이 아는 등 무척 영민했어요. 취학 후엔 모범생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기대가 매우 컸는데 중학교 때 전학을 가서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된 뒤론 고등학교 때부터 무단결석을 일삼더군요. 당시 아들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지금보다 더 좋았을 텐데….”(A씨) 아버지들이 달라지고 있다. 자상하고 친구 같은 ‘좋은 아버지’로의 대변신을 꿈꾸는 아버지들이 늘고 있는 것. 탈바꿈을 향한 노력이 가장 먼저 감지되는 곳은 아버지학교. 서울 온누리교회가 1995년 10월 신도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설한 ‘두란노아버지학교’(www. father.or.kr)의 경우 2007년 1월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캐나다, 일본, 러시아 등 세계 30개국 10만명의 아버지들이 거쳐갔다. 이 중 1000여 명의 외국 현지인들을 제외하곤 대다수가 한국인과 한국 동포다. 아버지학교의 국내 지부만도 70개. 지난 한 해에만 3만명의 수료자가 여기서 배출됐다. 아버지학교의 모태는 교회이지만 사회 속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서기 위해 2003년부터는 관공서, 교도소, 군부대, 학교 등으로까지 운신의 폭을 넓혀왔다. 아버지학교 수료자 중엔 탤런트 조형기 씨, 앵커 이인용 씨, 김영길 한동대 총장 같은 유명인사도 있고, 지금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지만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과거 암흑세계의 인물도 있다(그는 한사코 자신의 별칭과 본명, 사연이 소개되는 것을 꺼렸다). |
|
왜 아버지가 바뀌어야 하는가? 김성묵(58) 두란노아버지학교 국제운동본부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치·교육·문화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기본구조가 흔들리는 근저엔 가장 기초적 단위인 가정의 흔들림이 있다. 한 국가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가정이고, 그 가정의 수준을 결정하는 사람은 아버지다. 가정은 ‘올바른 가치관을 갖춘 양질의 사람을 만들어내는 공장’인 셈인데, 그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 따라서 이 땅의 아버지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기능에 대해 새롭게 학습하고 자기정체성을 되찾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이므로.”
김 본부장 역시 1995년에 아버지학교를 1기로 수료했다. 그는 이혼 직전까지 갔던 ‘문제 가장’이었다. 1970~ 80년대 영업직으로 일할 당시 숱한 접대와 향응에 빠져든 그는 두 아들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돈만 벌어다 주면 가정은 저절로 꾸려질 줄로 알았다. 그런 상황 자체를 합리화하기도 여러 번. 하지만 1990년 즈음해 아버지학교 개설의 기초 작업을 맡게 되면서 김 본부장은 좋은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문제 가장·불량 아빠들 교육받고 180도 변신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5시간씩 5주 동안 실시되는 아버지학교의 교육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아버지, 아내, 자녀에게 편지 쓰기’ ‘자녀와 아내를 사랑하는 이유 20가지 쓰기’ 등 숙제가 많다. 그럼에도 지난해 11월 아내의 강권과 회유를 계기로 아버지학교 교육을 수료한 회사원 이모(39) 씨는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아버지학교 캐치프레이즈가 마음에 메아리친다고 말한다. 그의 경험담.
“토요일 황금시간을 빼앗겨야 하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다른 입교자들도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조(組)의 어떤 40대는 2시간을 못 버티고 사라졌다. 입교 사연은 각양각색이었다. 바람을 피워 가정해체 위기를 맞은 사람, 소원해진 자녀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 말 그대로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왔다는 사람…. 조 이름과 조 구호를 지어라, 조 포스터를 만들어라, 웬 주문이 그리도 많은지. 게다가 숙제까지 내줬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는 것과 집에 가서 자녀들과 아내를 허깅(hugging·포옹)하라는 것이었다. 황당, 어색, 부담 100배였다.”
그러나 이씨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원들 간의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고, 농담도 주고받게 됐다고 된다. 세 번째 만남에선 몇 개월 만난 사람들 같았다는 것. 일을 핑계로 집에만 오면 드러누워 TV를 끼고 살았다는 한 아버지의 고백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지기도 했다. 5주째 수료식에선 수료자 모두 순결서약을 했다. ‘나는 아버지로서 성적으로 순결하고, 영적으로 거룩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사랑하는 가족과 사회 앞에 서약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은 쉽지 않음이 틀림없다. 일정 부분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아버지학교 수료자 모두가 예전과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 몇 명만이라도 가정의 소중함과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실감했다면 좋은 아버지가 그만큼 늘어난 것 아니겠는가.”(이씨)
아버지학교뿐만이 아니다. 기업들도 ‘아버지 제자리 찾기’를 거들고 있다.
“오늘은 ‘육아데이’오니, 전 임직원은 정시에 퇴근하셔서 가족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매월 6일이면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타워의 GS칼텍스 본사 전 층에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잠시 후 오후 6시가 되면 일과를 마무리한 직원들이 앞다퉈 회사 문을 나선다. 여성가족부가 2005년 9월 시작한 ‘육아데이 캠페인’에 맞춰 어린 자녀를 둔 직원들이 정시 퇴근한 뒤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풍경이다.
GS칼텍스는 지난해 9월6일엔 육아데이 1주년을 기념, 김송이 연세대 교수(아동양육컨설팅 해피키즈연구소장)를 초빙해 ‘우리 아이 잘 키우는 법’이라는 제목의 직원 대상 강좌를 열기도 했다. 이날 참석한 40여 명의 아빠들은 ‘우리 아이를 알고 나를 알면 백 점짜리 엄마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김 교수의 말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GS칼텍스 인사기획팀의 최성묵(35) 대리는 “어떻게 해야 다섯 살배기 딸을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강연을 들으면서 아이 양육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기업들도 남성 직원 대상 아버지 강좌 개설 붐
한국IBM이 ‘일과 삶의 조화’라는 사내 정책에 따라 지난해 11월6일 연 ‘영유아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역할’ 강좌에도 100여 명의 남성 직원들이 몰려 아버지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반영했다. 유한킴벌리 역시 가족친화 경영 차원에서 지난해 대전공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가족과 함께 성공하기’라는 주제의 그룹 독서토론 프로그램을 마련, 도서를 통해 배운 내용을 팀장 그룹에서 직접 실천해보고 베스트 프랙티스를 12월18일에 공유함으로써 일, 가정, 친구, 봉사, 영혼 등의 균형이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기회를 가졌다.
이와 별도로 지역단위 아버지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올해 1월부터 경기도 광명YMCA 생활협동조합의 간사로 일하고 있는 이홍태(43) 씨가 그런 경우다. 아들(11)과 딸(9) 하나씩을 둔 그는 2002년부터 광명YMCA 산하 동아리인 ‘좋은 아버지 모임’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1년간의 공기업 및 중소기업 직원 생활을 아예 청산했다. 이씨는 “아이들과의 지속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 아버지로서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아버지 모임 활동이 너무나도 편안하다”며 “항상 좋은 아빠일 수는 없지만, 언제나 좋은 아빠이고자 하는 회원들과 교류하는 것에 인생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들의 거듭나기’ 경향에 대해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성화되면서 양육이 더 이상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평생 직장’ 개념의 붕괴로 더 이상 직장이 자기와 동일시될 수 없는 존재라는 위기감이 가세하면서 아버지들의 자기정체성 찾기가 소소한 일상의 영역으로 자리이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전 교수는 “아버지 교육이 개인적 특성이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좋은 아버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특정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그 이념형을 따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상당수 아버지들에겐 자괴감이나 죄의식을 안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최근 30대 아버지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는 데 비해 40대 이상은 그렇지 못해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이들의 존재가 ‘거대한 다수’를 이루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 않겠느냐”면서도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언제든지 용도폐기될 수 있는 아버지들이 자기의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양육에 눈 돌리게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도모유키’ ‘능소화’ 등의 작품을 낸 소설가 조두진(40) 씨는 일곱 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은 바 있다.
“나무와 풀 이름을 익히려고 애씁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며 나무와 풀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름이 뭐야?’ 하고 묻는 어린 자식에게 ‘이것도 나무, 저것도 나무, 이건 큰 나무, 저건 작은 나무, 이건 보랏빛 꽃, 저건 빨간 꽃…’이라고 말하는 염치없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나무와 풀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좋은 아빠는 타고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끝)
아버지들이여 독재의 짐을 벗어라 |
집안의 ‘대장’ 아닌 ‘인생 선배’로서 자녀 대해야 |
이경식 작가·산문집 ‘나는 아버지다’ 저자 leeks8787@hanafos.com |
‘아버지 부재(不在)시대’에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돈 버는 기계? 당당한 위엄을 갖춘 아버지의 모습? 한 가정의 ‘껍데기’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0대 아들 둘을 키우는 한 40대 작가가 체험적 깨달음으로 제시하는 21세기형 아버지상(像). <편집자> |
첫아이를 가졌을 때 어떤 ‘선배 아빠’가 나에게 충고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두 아들의 아빠였던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예절교육을 엄하게 시켜야 한다. 요즘 아이들이 버릇없는 것은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결국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이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중추가 될 것이라고 상상하면 우리 사회가 문화적·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까지 얼마나 끔찍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적어도 우리 아이만큼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본예절을 갖춘 아이로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첫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녀석은 똘똘했고, 돌이 지난 뒤에는 말을 곧잘 알아듣고 자기 의사표시도 잘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아이를 훌륭한 아이로 키우는 것이야말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비장한 생각까지 하면서 녀석에게 예절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과자봉지나 휴지를 아무 데나 버리면 꼭 휴지통에 버리라고 말했다. 물론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는 매를 들고 벌을 세웠다. 돌이 갓 지난 녀석이었지만 몇 차례 혼난 뒤부터는 ‘규칙’을 잘 지켰다. 나는 녀석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했다. 녀석이 훌륭한 아이로 성장하고 있구나, 장차 이 사회에서 훌륭히 제 몫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첫돌 때부터 시킨 예절교육 ‘효과는 제로’
그런데 웬걸, 녀석이 더 커서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는 ‘규칙’을 거의 무시했다. 그때마다 지적했지만 녀석은 자기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나더러 왜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이 갓 지나면서부터 시킨 나의 예절교육은 녀석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
사실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해보면,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예절교육이라니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런 이야기를 예전의 그 선배에게 했더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예절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말을 내가 했다고?” “그럼요. 증인도 있는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을 믿었단 말이야? 그래봐야 그때는 나도 초보 아빠였는데…. 초등학생밖에 안 된 아들의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았겠니? 애들이 장가갈 나이가 된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거참, 이제 와서 따질 수도 없고, 따진다고 될 일도 아니고…. 돌 지나자마자 가혹한 예절교육을 받느라 고생한 우리 큰아이에게 미안할 뿐이다. 녀석의 무의식 속에 나를 향한 증오의 감정이 있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금의 청소년들은, 전체 인구 가운데 3차산업 종사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시대에 성장한 그들의 30, 40대 아버지들과는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어떻게 보면 ‘인종’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을 상대로 우리가 스스로를 ‘가정의 대장’으로 생각하면서 녀석들을 다스리고 때로 군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헛기침 하나만으로도 온 집안을 다스리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농경사회에서 아버지는 아들보다 더 경험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식에게 가르칠 게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의 경쟁력은 자식에게 소용이 없어졌다. 그러니 권위는 껍데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 껍데기 권위를 휘두르고자 할 때 그 모습은 너무도 추하다. 큰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녀석도 이제 충분히 컸으니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또 그 판단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휴대전화 때문에 기어코 말썽이 생겼다. 큰아이의 휴대전화로 시도 때도 없이 문자가 날아왔고 녀석은 그때마다 답장을 보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대화를 나눌 때도 그랬다. 그래서 그것을 타박했는데 녀석은 내 타박에 삐딱하게 대꾸했고, 그 뒤로 몇 차례 되넘김이 이어졌다. 결정적으로 내가 녀석의 휴대전화를 낚아챈 뒤 부숴버렸다. 그러자 녀석은 험악한 인상으로 돌변해 거세게 대들었다. 무리를 지배하던 기존 수컷의 권위에 도전하는 또 한 마리 젊은 수컷의 모습이었다. 녀석의 그런 동물적인 모습에 나 역시 동물적 본능으로 대응했다. 권위에 도전하는 또 다른 수컷의 도전을 가차없이 물리치는 것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의무사항이 아니던가.
대드는 아들에 손찌검했다 ‘후회막급’
잠시 이성을 잃고 동물이 된 나는 녀석에게 그만 일격을 날렸다. 한때 무술을 연마했던 나의 손은 나도 모르게 실전을 치를 때처럼 녀석의 급소를 찌르고 말았다. 녀석은 나무토막처럼 풀썩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녀석의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내가 도대체 아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녀석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빌었다. 다행히 녀석은 곧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녀석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녀석은 덜덜 떨면서 잘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공포 때문에 그 자리를 모면하고자 한 말이었다. 다시 한 번 참담했다. 그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적절한 상황이 아니었다. 동물행동학자인 아이블 아이베스펠트는 “독재자는 테러라는 방법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면 나는 야수와 같은 독재자였다. 설령 우리 아이들이 우리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 수컷으로 볼지라도 우리는 녀석들을 사랑스러운 자식으로 바라보아야 마땅한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대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가장’의 개념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지도력도 아니다. 그저 늘 함께 생활하는 인생의 선배로, 인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와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심성을 가르치고 북돋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 아닐까 싶다. 사실 이것만 잘해도 그게 어딘데…. 그리고 솔직히, 우리 역할을 이렇게 규정하면 우리도 더 편하지 않겠는가? (끝) |
TV·컴퓨터 끄고 자녀와 ‘놀이’를 |
좋은 아빠는 친구 같으면서도 때론 엄격해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아빠는 돈 버는 기계, 엄마는 잔소리하는 기계, 아이는 공부하는 로봇.” 자녀양육 전문가 권오진(48) 씨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가정의 자화상이다. 저서 ‘아빠의 놀이혁명’(2005년), ‘아빠의 습관혁명’(2006년)을 통해 ‘아버지 개조론’을 주창한 주인공이자 SBS TV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전문 자문위원(아빠놀이 분야)으로 활동 중인 그는 ‘좋은 아빠’의 개념을 ‘친구 같으면서도 엄격해야 할 때는 엄격할 줄 아는 아빠’로 정의한다. 현대사회의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대하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보아도 좋은 친구처럼 푸근한 관심과 사랑을 보내는 한편,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태도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권씨 스스로 좋은 아빠의 전범(典範)이라 할 만하다. 올해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그의 딸은 그림에 일가견이 있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들은 아마바둑 1단이지만, 요즘 그 또래라면 누구나 빠져드는 컴퓨터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는 언제나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그들의 창의력은 키우지만, 중독성이 강해 ‘마약’과도 같은 컴퓨터 게임을 단호하게 금했던 덕이다. 권씨는 오후 8시면 TV 전원을 끈다. 대신 가족이 책을 읽게 한다. 아이들의 취침 시각도 밤 12시 이전으로 제한하고 있다.
‘밥상머리 교육’ 끊긴 지금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부분 필요
좋은 아빠의 존재는 왜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한 걸까. 권씨는 “진정한 아버지의 탄생은 그들 스스로 아버지의 기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비록 과거의 아버지들은 자주 놀아주지는 못했지만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자녀들과 너끈히 소통했다. 아침저녁으로 온 식구가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때로 그 마음을 수용하면서 수용 결과를 아내의 입을 빌려 다시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이른바 ‘스리쿠션’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양육의 한 방식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아이→어머니→아버지’로 이어지는 역(逆)방식의 간접대화도 유용하게 통용됐다. 새 운동화나 장난감을 사달라는 아이들의 부탁과 그에 대한 아버지의 의사가 어머니를 거쳐 전달되곤 하던 것이 그런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최소한 초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받았던 오늘날의 아버지 세대는 자녀들에게 표면적으로는 더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주고 있다. 하지만 ‘밥상머리 교육’이 더 이상 원활하지 못한 지금, 주중엔 끊겼다가 주말에야 복원되곤 하는 아버지와 자식 간의 교감을 무엇으로 이어줘야 한단 말인가. 자연히 아버지들의 부담감은 사명감에 비례해 커질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면피’라도 한다면 ‘괜찮은 아빠’로 비칠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끊임없이 함께 놀아주길 원한다. 반면 아버지들은 ‘휴일엔 아빠도 좀 쉬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자녀들에게 인지시키는 대화법에 서툴다. 여기서 아버지들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아이들과 교감을 이뤄낼 것인가? 권씨가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놀이’다. 놀이 방식은 어떤 것이든 좋다. 아이가 6~8세라면 ‘발바닥으로 힘자랑하기’도 괜찮고, 9~11세에 해당한다면 ‘동화책으로 탁구공 오래 치기’나 ‘베개싸움’도 좋다. 단 1분이면 된다. 권씨는 연령대에 맞는 각종 놀이 450여 가지를 고안해 그중 150여 가지를 자신의 홈페이지인 ‘아빠와 추억 만들기’(www.swdad.com)에 올려놓고 있다. 여기에 가입한 회원은 3500여 가족이나 된다. |
권씨는 “쉽게 몰입할 수 있고 창의력과 집중력을 길러주며 TV·컴퓨터 중독을 예방하는 등 놀이가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가 매우 많다”며 “하루에 1분씩이라도 꾸준히 아이와 놀아준다면 어느 순간 좋은 아빠가 돼 있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놀이야말로 아버지가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서 ‘왕따’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들어야 할 일종의 ‘보험’이라고 표현한다.
당신은 ‘좋은 아빠’인가, ‘불량 아빠’인가? 좋은 아버지이고 싶은 건 모든 아버지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자신이 어떤 아버지 유형에 해당하는지 알고 싶다면 권씨가 만든 ‘좋은 아빠 진단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명심할 것 한 가지. 아버지가 1% 바뀌면 아이는 10% 이상 바뀐다는 사실.
|
“막무가내 왕간섭 이런 아빠 짱나요” |
초·중·고 자녀들이 말하는 ‘아빠가 싫어질 때’ |
정리·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
아버지들은 설령 마음은 있더라도 정작 자녀의 진심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때가 많다. ‘주간동아’는 초·중·고생 90명을 대상으로 ‘아버지가 정말 싫어질 때는 언제인가’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 내용은 연령대별로 각기 다르지만 음주, 잔소리, 약속 깨기, 주말 골프(낚시), 부부싸움 등 중복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90명의 응답 내용 가운데 대표성을 지녔거나 특징적인 것들을 골라 가감 없이 실었다. 조사대상자 대부분이 실명 게재에 동의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혹은 프라이버시를 해칠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내용에 한해 가명으로 처리했다. <편집자> |
초등학생 - 서민우 (10·3학년·경기도 구리시)
- 한정혜 (12·여·5학년·서울)
- 김나연 (13·여·6학년·서울) |
- 정인용 (12·5학년·서울)
- 김예진 (13·여·6학년·인천)
- 이혜인 (12·여·5학년·서울)
- 박예진 (12·여·5학년·서울)
- 김성희 (가명·9·여·3학년·경기도 고양시) 장용욱 (9·3학년·서울) “저랑 같이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빠는 주말에도 일하러 가곤 해요. 퇴근해서 5분 정도 놀아주고는 또 일해요. 일만 하는 아빠가 싫어요. 가족과 함께 여행도 가고 싶은데 일벌레처럼 일만 해요.”
중학생
- 소나무 (14·1학년·경기도 성남시)
- 신동훈 (14·1학년·부산) |
- 박수진 (15·여·3학년·광주)
- 박소영 (16·여·3학년·서울) 정혜리 (15·여·2학년·부산) “틈만 나면 저를 끌어안고 뽀뽀를 해요. 사랑한다면서 안고 뒹굴기도 하고요.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빽 지르면 ‘아빠가 딸을 사랑해서 그러는데 왜 불만이냐’며 화내곤 해요. 저도 사춘기 소녀예요. 아빠가 제게 애정표현을 좀더 많이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싫어요. 아빠의 생각이 옳으니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명령하는 것도 싫고요. 제 의견은 묻지도 않는다니까요.”
- 안예은 (15·여·3학년·경기도 성남시)
- 김동현 (가명·15·3학년·강원도 원주시)
- 남성우 (가명·15·2학년·서울) |
- 김성은 (가명·15·여·3학년·서울)
- 류재민 (가명·15·3학년·광주)
고등학생
- 박소희 (17·여·1학년·전남 강진군)
- 박지현 (18·여·2학년·경북 울릉군)
- 이재규 (17·1학년·대전)
- 김진영 (18·2학년·강원도 속초시)
- 원영섭 (18·2학년·서울)
김태현 (18·2학년·강원도 속초시) |
- 안용선 (17·2학년·서울)
아빠가 충고를 해주실 때 저한테는 단지 화내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아요. 공부가 가장 쉬운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저는 공부도 만만치 않은 거라고 생각해요. 아빠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공부 이야기만 하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요.”
- 정연수 (가명·18·여·2학년·경북 김천시)
“아빠가 회식에서 술 드시고 귀가한 뒤 바로 주무시지 않고 노래를 부를 때 창피해요. 집이 아파트인데도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혼자 기분이 좋다면서 노래를 불러요. 그러면 다른 집에서 인터폰을 통해 항의하는데, 이걸 제가 혼자서 처리해야 해요. 어떤 때는 회식자리에 제가 따라갔는데, 바로 빠져나오기는커녕 절 내버려두고 친구분들과 또 다른 곳으로 술 드시러 가더라고요. 그런 날은 정말 아빠가 걱정돼서 잠을 못 이룰 지경이라니까요.”
- 류아라 (18·여·2학년·광주)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인정해주지 않거나 세대차이를 느끼게 할 때.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큰 소리 치실 때. 너무 권위적이라고 느껴질 때. 통금시간을 너무 이른 시간으로 정할 때.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둥 말 속에 남녀차별에 관한 내용이 들어갈 때. 그럴 때마다 아빠가 싫어요.”
- 최재원 (18·1학년·경기도 수원시)
“어떤 때 아빠가 싫어지느냐고요? 음, 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보실 때랑 집 안을 어지럽힐 때, 제 옷에서 아빠 담배냄새 날 때가 그렇죠. 참, 하나 더 있어요. 차 몰고 가시다가 길 잃을 때.”
<고등학생 설문조사 협조 : 종로학원 광주캠퍼스(경기도 광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