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9대 왕 숙종을 찾아가다.
문화재 분류 : 사적 제198호
능주 :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능역 : 서로릉역 명릉
방문일 : 2021년10월20일
누구와 : 처현과 처남, 그리고 우리부부
명릉(明陵) 능주의 가계도 및 치적, 사건.
능주 | 조선 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그리고 계비 원원왕후 | |
재위기간 | 45년10개월(1674년8월23일~1720년6월8일) | |
즉위 형태 | 현종의 외아들로 현종이 승하한 후 왕위를 이어 받음 | |
세자 및 빈 책봉 | 남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시기 희빈장씨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며 피바람이 불었다. | |
능역 및 묘호 | 서오릉역(고양시 용두동), 능호---명릉이며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릉으로, 인원왕후는 이강능 | |
능의 형태 | 동원이강릉 | |
가계도 | 부모 | 현종과 명성왕후 |
후궁 | 희빈 장씨, 숙빈최씨, 명빈박씨, 영빈김씨 | |
자식(남자) | 희빈장씨-경종(조선 제20대왕), 숙빈최씨-영조(조선 제21대왕), 명빈박씨-연령군 외 숙빈최씨2명, 희빈장씨1명 | |
자식(공주) | 정비인 인경왕후에게서 2명의 공주가 태어났으나 일찍 죽음. | |
자식 | ||
재위기간의 치적 | 대동법확대실시, 상평통보의 유통으로 경제와 상업의 발달. 국방 및 도성의 개축, 서육신과 소현세자복권. | |
재위기간의 사건 | 1680년 경신환국, 1689년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 3대 의적인 장길산사건, 중전폐서인 및 장희빈사약 | |
기 타 | 조선시대를 통털어 이 시대의 당파싸움이 제일 심했는데 무분별한 서원 사액이 문제였다. |
숙종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희빈장씨와 인현왕후의 중전 쟁탈전이다.
46년 국가를 통치하며 많은 사건이 있지만 사건의 시작과 끝이 장희빈에서 시작했고 장희빈에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이었던 1960년대 초에도 시골 가설극장에서 장희빈, 인현왕후에대한 영화를 상영했고, 이후 라디오 연속극이나 텔레비젼의 드라마로도 아주 여러번 방영되었으니 장희빈을 모르는 기성세대는 없을 것이다.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1661∼1720)은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로 이름은 순(焞)이다.
그는 1661년 8월 15일 지금의 경희궁인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 8월 23일 13세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한 후, 46년간 재위하고 1720년 6월 8일 숙종이 태어났던 경덕궁 융복전에서 생을 마감했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왕비를 두었으나 왕자를 얻지 못했고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에게서 각각 왕자를 보았으니 훗날 왕의 대를 이은 경종과 영조다.
숙종은 9살 때인 1670년 동갑내기 인경왕후와 결혼했는데 인경왕후사이에서는 아들은 없고 딸이 2명이 태어났으나 일찍 죽었고, 인경왕후는 결혼 10년차였던 19살에 천연두(홍역)으로 죽었다.
숙종은 인경왕후가 죽은 다음해인 1681년 6살이 아래인 인현왕후와 결혼을 하였는데 슬하에 자식은 없으며 이 당시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이며 숙종은 조선 최고의 미인 장옥정에게 미쳐있을 때다.
후궁인 장옥정은 얼마나 예뻤는지 숙종이 반했는데 인경왕후가 있을 때부터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므로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에 의해 1680년 궁밖으로쫓겨났다가 명성왕후가 1684년 죽자 2년이 지난 1686년 숙종이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고 장옥정은 2년뒤인 1688년 아들을 낳으며 희빈이라는 품계를 받으니 기고만장했고 당정은 완전히 남인에게로 넘어간다.
희빈장씨가 낳은 아들이 3개월만에 세자로 책봉되는데 이를 반대하던 서인들이 숙종의 미움을 사게되면서 정계는 피비린내가 나며 서인몰락, 남인등극의 기사환국을 맞게되는데 인형왕후는 결혼한 지 8년이 지난 1689년6월 폐서인이되어 창덕궁 경추문 위 00문으로 눈물을 흘리며 궁을 떠나게 된다.
인현왕후가 출궁한지 딱 1년이되는 1690년6월 희빈 장씨는 바라고 바라던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그 중전의 자리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변덕이 심한 숙종은 중전 장씨에게 실증이 났는지, 아니면 정치적으로 서인에게 압박을 크게 받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중전 장씨가 너무 거만하게 숙종에게 대들었던지....... 암튼 숙종은 1694년 준전 장씨를 중전에서 폐하니 장씨는 중전으로 4년을 살다가 다시 희빈 장씨로 되돌아가게 되니 때가 1694년 갑술환국이었다.
그동안 맹위를 떨쳤던 남인들이 몰락하면서 중전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5년동안 궁밖에서 숙종의 부름을 기다리던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건강이 좋지 못했는지 복위7년이 지나 죽는데 역사는 인현왕후의 죽음 뒤에는 희빈장씨가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가 죽도록 굿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이를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는 숙종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잔머리를 굴린 수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물론 희빈장씨가 질투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질투는 칠거지억 중 하나로 엄히 다스리기는 했지만 세자의 생모인데 사약을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성종의 비이자 연산왕의 생모가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구실로 사약을 내려 훗낭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기록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숙종이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희빈장씨는 숙종의 정치적 희생으로 볼 수도 있다.
경신확국->기사환국->갑숙환국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숙종은 자기 자신을 돌보기 위해 인현왕후를 내쫓으면서까지 사랑했고, 세자를 낳은 희빈장씨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것이다.
우리가 티비에서 본 장옥정은 독살스럽고 못된 인간성을 지닌 여성으로 비춰졌지만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필자는 극중에서와 같이 못된 희빈이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암튼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던 장옥정은 중전에서 폐위된지 7년이 지난 1701년11월 42살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는데 죽는데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숙빈 최씨이다.
숙빈최씨는 궁궐 무수리 출신으로 잘알려져있으며 극중에는 아주 못생긴 여자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미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건 숙종이 여자에 대해서는 눈이 높은 편인데 못생긴 여자와 함께 밤을 같이한다는 것은 상상이 전혀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숙빈최씨는 누구인가?
숙빈최씨는 훗날 영조를 낳아 무수리에서 일약 숙빈이라는 작호를 받게 된다.
숙빈 최씨는 7살 때 침방나인으로 입궁했다고 하는데 인현왕후의 시중을 들던 궁녀로 인현왕후가 죽은 뒤 인현왕후의 기일을 잊지않고 몰래 제를 올리다가 숙종에게 발각되었다고 하며 이때 숙종에 의해 죽을것으로 생각했는데 기특하게 생각해서 데리고 잤다는 이야기가 극으로 묘사되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며 재미있게 묘사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인현왕후가 죽기 이전 숙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인현왕후가 복위하기전 이미 숙원이라는 품계를 받고 있었음이 증명한다.
착함, 선의 표상으로 여겨졌던 숙빈최씨가 희빈장씨가 취선당에서 굿을 벌려 인현왕후가 아팠다고 밀고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말 그랬을까? 이번에도 숙종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잔머리를 굴렸을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 있으며 또한 극 중 재미를 돋구기 위해 극작가가 역사를 왜곡했을 수도 있다.
숙빈최씨는 숙종보다 9살이 적고, 인현왕후보다는 3살이 적고, 희빈 장씨보다는 11살이 적은데 희빈장씨가 중전으로 있었던 1693년 23살의 나이에 숙원의 작호를 받았으며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하며 숙의로 영인군, 훗날 영조를 낳고 1669년에 1품인 숙빈의 작호를 받았다.
숙종은 첫번째 정비 인경왕후, 두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세번째 중전이었던 희빈장씨가 죽은 뒤 숙빈 최씨와 가깝게 지냈으나 중전은 아니었으므로 희빈 장씨가 죽은 지 1년이 지난 1702년 네번째 부인을 맞게되는데 숙종보다 26살 아래인 인원왕후로 숙종과 18년을 함께 살았지만 슬하에 자식은 없다.
숙종~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틈바구니에서 권세를 누리기도 하고 얍삭한 행동을 취하며 3번의 환국을 일으키도록 잔머리를 굴린 숙종은 오늘도 서오능 양지바른 곳에 묻혀 오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묻힌 능침에는 두번째 부인인 인현왕후가 있고 같은 능원안 150~200m떨어진 곳에는 네 번째 부인인 인원왕후를 두고 작은 능선을 하나 넘은 곳에는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가 있으며 숙종이 묻힌 명릉과 약1km떨어진 곳에는 살아가며 제일 사랑했던 희빈으로 강등된 중전 장씨가 원망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오늘도 숙종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숙종 대의 3환국
경신환국
경신환국(庚申換局)은 1680년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등용된 사건이었다.
남인은 현종이 승하한 때이자 숙종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1674년 정권을 장악했으며 나이가 어리고 힘이 약했던 숙종은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과 병판 김석주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즉위 6년이 되던해 영의정 허적의 집안에 큰 일이 있었는데 그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신하에게 허적에게 차양을 빌려주라고 지시했는데 이미 허적은 숙종에게 알리지 않고 차양을 가져간 것이었다.
이에 숙종이 대노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은 야사에는 나오지만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숙종은 장인을 중심으로한 서인에게 병권을 넘겼으며 영의정도 바꾸었고 대부분의 요직에 있던 남일들을 서인으로 바꾸고 인평대군의 아들과 허적의 아들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고 유배를 가며 남인을 축출시켰다.
숙종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불려 정치를 이어갔는데 이런 서인의 세상이 10년정도 이어졌다.
기사환국
기사환국은1689년의 일로 희빈 장씨의 등장과 서인이 축출되고 다시 남인의 집권을 한 사건이다.
숙종27살이 되도록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가 희빈장씨가 왕자를 낳자 마냥 기뻤다.
태어닌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세자책봉을 한다고 들떠있는데 요직을 맏고 있던 서인들이 세자책봉을 반대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한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아직 중전의 나이가 젊어 왕자를 낳을 수 있는데도 3개월 밖에 안 된 후궁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다고 숙종에게 정면으로 도전을 하였는데 송시열의 속마음은 희빈장씨가 남인들과 가까우므로 청치적인 계산부터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노한 숙종은 전격적이고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는데 바로 그날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고 서울 이외의 지방으로 쫓아버렸으며 다음 날은 그를 막말을 하는 송시열을 탄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정승과 대사헌 등을 남인으로 교체했다.
이 사건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요직에 임명되었는데 10년전 삭탈당했던 서인들은 죽은 후이지만 복위되었으며 많은 서인들이 처형을 당했으며 이로인해 인현왕후도 폐서인이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삼는데 이것이 불과 보름만에 이루어졌다.
갑술환국
갑술환국은 1694년 중전 장씨가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중전으로 복귀한 사건이다.
숙종은 환국에 재미를 붙인 듯 했다.
숙종에게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위상이 높아지겠지만 환국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연관도 없는 사람들도 억지로 죄를 뒤집어 쒸우며 파벌이 같다는 이유로 죽어야만 했으며 이로인해 충신은 없고 간신배만 주변에 널리게 된다.
갑술환국의 핵심적 요인도 궁중의 문제였다.
숙종은 영조의 생모인 최씨를 곁에 두면서 중전이었던 장씨를 멀리하게 되었는데 숙원의 작호를 받은 최씨사 숙종의 사랑을 받자 중전 장씨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 졌을 것이다.
1694년(숙종 20) 3월 29일 김인과 박귀근 등은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의 최씨(숙빈 최씨)를 독살하려고 했다고 고변하면서 부터다.
그 뒤의 과정과 결과는 기사환국을 그대로 뒤집은 것으로 처형 당했던 김익훈·김석주·송시열 등이 각 4월 3일과 6일에 복관되고 6월23일에는 이이·성혼은 다시 문묘에 종사되었고, 영의정 권대운을 비롯한 주요 남인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처벌되었다.
핵심적 문제였던 중전의 교체도 즉각 이뤄졌다.
중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는 중전으로 4월12일 복귀했다.
세월이 흐르고 1701년(숙종 27)8월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동안 희빈 장씨와 그 일가가 주술 등의 방법으로 왕후를 저주했다는 밀고가 있자 숙종은 인현왕후가 죽은 뒤 40일이 지난 후 함께 살았고 세자의 생모인 장씨를 사사했다.
첫댓글 역사공부 잘했습니다
그많은 자료를 어디서 다 구했는지 대단하시다는 말씀 올립니다
글짓기하러 다니던 곳으로 기억이 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