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버와 심폐소생술
[서언]
필자는 자식과 아내에게 모이를 주어다 먹이기 위해서 의사생활을 하면서 나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서 다이빙을 하고 다이빙 교육을 하는 사람이다. 다이빙을 즐기는 우리 모두는 혹은 생활 현장에서 혹은 다이빙 현장에서, 드물기는 하고 또 드물어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긴급하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사고의 현장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 기회에 필자가 직접 겪은 사례를 소개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을 받을 것인가를 제안하고자 한다.
[사례]
1996년 6월로 기억되는 사고다.
경상북도 울진 군에서 다이빙 센터를 운영하고있는 같은 다이빙 교육 단체 소속 강사였던 권두용 강사가 다이빙 전용선을 물에 띄운다는 믿기 어려운 낭보를 접하고 늘 같이 다이빙을 즐기는 친구들과 함께 토요일 오후 대구를 출발하여 울진읍 후미진 곳에 위치한 당시 내가 근무하던 파티마 병원 연수원에서 밤을 보낸 후 이른 아침 울진잠수를 찾았다. 하늘은 맑게 개어있었고 바람도 없어 수면이 잠잠한 것이 다이빙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배가 뜬다는 소문을 듣고 온 건지 오다 보니 배가 뜬 것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 날은 엄청 많은 다이버가 울진 잠수를 찾았었다. 서울서 온 큰 다이빙 오퍼레이션(산호 수중으로 기억함)에서는 대형 버스 2대에 25명 가량의 다이버를 안내해 민박을 하고 있었고 그 외에도 삼삼오오 모여든 다이버들, 또 수중 사진을 하시는 이선명씨, 이성우씨, KBS 프로그램 제공자인 고태식씨 등이 큐젬초를 노려보면서(?) 다이빙 준비를 하고들 있었다
처음 물에 띄운다는 다이빙 보트는 사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위용을 자랑하면서 부두에 떠있었다. 휠하우스가 위로 높다랗게 자리잡고 있어 다이버를 관찰하기에 좋겠다 싶기도 했고 넓은 갑판도 신경을 쓴 흔적을 여기 저기 보여 주었다. 20여 명의 다이버가 배에 타고 있었다. 선장이신 권두용 사장이 머리 수를 세고 있는 것을 보았고 모두 몇 명인지 다이버들에게 물었고 다이버 하나가 “22명!”이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스물 네명 !”이라고 소리쳤다. (이때의 정확한 다이버의 수가 몇 명이었는지 난 지금까지도 궁금해 하고 있다.)
권두용 사장님은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고는 “마 됐다. 스물 셋으로 합의 끝 !”이라고 농을 던지고는 동해안 유일의 다이빙 전용선은 첫 손님을 22명 내지 24명을 싣고 푸른 바다로 첫 항해를 출발했다.
다이버들은 분주하게 입수준비를 해댔고 준비된 사람부터 혹은 혼자서 혹은 무더기로 입수를 시작했다. 난 김 선배와 권 사장과 함께 입수준비를 하고 입수하기 위해 난간으로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출수 후 배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한 철사다리가 갑판에 그냥 놓여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한 나는 뒤꿈치가 사다리에 걸리면서 중심을 잃고 넘어질 모양새가 되었는데 순간적으로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입수를 해야 할 것 같은 판단이 들었다. 사다리를 힘껏 밀면서 나는 수면을 향해 뛰었고 수면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수경이 벗겨져 나갔고 웨이트벨트가 풀려 나간 상태였다.
허탈했다.
대구서 네 시간을 차로 달려와 수련원에서 잠을 자고, 아침엔 직접 끓인 라면에 계란 푼 것으로 속 달래고 와서는 첫 출항하는 배에 겨우 자리 얻어 타고, 넘어질 지경이 되어 억지로 입수해보니 수경은 날아가고 없고 웨이트도 풀려져 달아나고 없었다. 김규일 선배와 권대상 사장이 바로 입수해 하강하여 찾으려 했지만 2-3분 만에 상승하더니 “못 찾겠다 꾀꼬리”만 두어 번 외고는 둘이서 다이빙을 시작해버렸다. 권두용 사장이 배로 올라오겠는가를 묻길래 입수 중이던 다른 다이버를 방해하기가 싫어 다들 입수하고 난 후 올라가겠다고 하고 물에 떠있었다.
한 3-4분쯤 됐을까. 100여 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서 몇 명의 다이버가 솟구쳐 올라 오르는 것을 보았고 그 방향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을 살려달라는 소리로 들렸다. 선장이 그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표정이 순간적으로 참 재미있게 느껴졌다. 마치 “절마들 저그 와저카노---(표준말로는 “제들 왜 저래”가 되겠다)“ 하는듯한 표정으로 읽혔다.
선장은 재빨리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첫 출항한 배답게 쏜살같이 내달리더니 다이버가 올라가고 다이버가 내려가고 다이버가 소리 지르고, 다이버가 끌어올려지고 하는 것 같았다.
사고가 분명했다.
선장이 급히 보낸 작은 구명정에 올라타고 현장으로 달리는 나의 머리 속은 복잡했다. 입수한지 근 5분 여, 갑자기 들려 올라온 다이버, 사람 살리라는 소리, 그럼 죽었다는 소린데, 내가 의사라고 해도 사실 이런 다이빙 관련 응급상황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긴 한가? 등등-----
보트에서 내려 첫 출항한 동해 유일의 다이빙 전용선에 오르는데 선장이 나에게 목을 손가락으로 자르는 수신호를 보냈다. 아마 정말 죽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조난자는 슈트를 입고 누워있었고 주위에서 인분 냄새가 풍기는 것으로 보아 항문이 열린 상태로 보였다.
손목에 감아 두었던 알라딘 에어를 풀어 다이버가 앉는 의자 밑으로 밀었다. 그 와중에도 비싼 장비는 아끼고 싶었나 보았다. 다이버의 기도를 개방하기 위해 턱뼈 중간부위를 들어 올렸다. 선장에게 배를 부두로 대자고 했다. 어차피 망망대해에서 “119를 불러주세요” 혹은 연습할 때처럼 “피자 두 그릇 배달 !”을 외칠 수는 없었다. 호흡을 확인하기 위해 귀를 조난자의 코 가까이에 가갔다. 호흡음을 들을 수 없었고, 호흡 온기를 빰으로 느낄 수 없었고, 호흡하는 흉곽의 오르내림을 볼 수 없었다. 2회의 구조 호흡을 하기위해 입을 벌리자 입안에는 액체와 뭔지 모를 오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선 입안에 민물을 들어부었다. 그리고는 두 차례 입으로 힘차게 빨아서 밷았다.(아! - 입안의 오물은 국수인지 오징어 다린지 길고도 흉측스러웠다).
코를 잡고 두 번의 구조 호흡을 실시했다.
단 두 번의 느리고 큰 구조호흡을.
그 순간 조난자는 헉-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꿈틀했고 내가 경동맥의 맥박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조난자는 바로 자신의 호흡을 시작했다.
살아난 것이다.
아니 살아있었던 사람이었다.
토사물이 기도를 막아 기도가 막혀 호흡이 중단되어 있었고 이제 시간이 경과하면 심장 박동도 중단될 지경이었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 환자는 호흡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 심장은 박동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배를 부두에 대고 조난자의 슈트를 칼과 가위로 찢어내면서 가까운 후포로 내달렸다. 여전히 인분 냄새가 차 안을 진동하고 있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유-턴한 다이버는 호흡을 하고 있었다.
살아 있었고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후포 병원에서 당직을 하고 있던 의사선생님에게 간단하게 나 자신을 소개하고 산소 호흡과 수액의 공급을 부탁했다. 서울 강남병원과 부산 동아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전화를 넣어 챔버 사정을 확인하였다. 동료 다이버의 말을 들으니 서울서 오신 분들이었고 서울로 가길 희망하였다. 그로부터 약 2시간 후 긴급 환자 이송 차량에 대형 산소 탱크를 두개나 싣고 또 여분의 작은 산소 탱크까지 싣고는 서울로 이송을 하였다.
이때 자초지종을 듣고 계속 곁에 있으면서 많은 도움을 주신 후포의 손병욱강사에게 지금 다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환자를 실어보내고 울진 잠수에 돌아오니 많은 사람들이 혹은 떠나고 혹은 남아있으면서 하마평이 무성하였다. 그 중에서도 조난자의 조상이 나를 배위에서 넘어지게 했을 것이라는, 그래서 내가 급히 물로 뛰어들면서 수경과 웨이트를 잃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그럴사했다. 그때까지 난 단 한 번도 배위에서 넘어진 적이 없었고 급히 물로 뛰어든 적이 없었고, 수경과 웨이트를 잃고 수면에 떠서 몇 분 동안 기다려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동료 다이버들이 내 장비를 대충 추스려 두었는데 유독 배위에 벗어 둔 알라딘 에어만 없어졌었다. 그 와중에도 남의 컴퓨터를 가져 가는 x이 있다고 흥분하던 김선배에게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아마 배에서 흘러 바다로 빠졌을 것이라고 달래면서 나머지 장비를 챙기던 내 기분이 많이 떱떨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알라딘 에어는 일단계 뭉치하고 한 세트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냥 손목 콤퓨터로서의 기능 밖에 사용할 수 없는데---
그로부터 한달 정도 지났을까 서울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조난자였다. 강남병원에서 근 20회 가까이 쳄버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여 현재는 건강한 생활을 하고있다는 것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어 감사하다는 것과 내가 다이빙 컴퓨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고 나에게 손목 용 다이빙 컴퓨터를 하나 보내주셨다. 나는 지금도 그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사고의 경위]
같이 다이빙을 한 동료들과 나중에 본인의 기억을 더듬어 들려 준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은 경위를 추정할 수 있었다. (혹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직간접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다음 기회에 바로 잡겠습니다.)
세 명의 다이버가 팀을 이루어 하강하였고. 바닥에 도착한 후 서로 OK를 확인한 다음 방향을 정하여 킥을 시작하였는데. 조난자의 수경에 물이 계속 들어와 물 빼기를 하다가 아마도 기도에 물이 들어오면서 당황하여 수면으로 급하게 상승을 하면서 숨을 참았고 이 때 기절(Blackout)을 하고 가라앉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가던 두 다이버가 뒤를 확인하니 한 사람이 오질 않아 역 방향으로 되돌아가보니 조난자가 바닥에 쓰려져 있었고 그 상태로 바로 수면 상승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든 것이다.
[조난자에 대한 대처]
과연 의식을 잃고 침수된 지 얼마 만에 수면으로 끌려 올라오고 선상에 올라온 지 얼마 만에 구강 내 이물을 제거하고 첫 구조 호흡을 하였는지 정확한 시간적 수치를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당시 상황을 종합했을 때 침수로부터 첫 구조 호흡까지 5-6분 가량이 경과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침수된 사람은 절대 심폐소생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하겠다
환자의 상태를 일차적으로 확인한 후(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턱뼈를 위로 들어주어 기도를 유지한 후 호흡 여부를 보고 듣고 느낌으로서 확인한 다음, 구강을 채우고 있든 토사물을 제거하고(이 부분이 제일 싫은 부분이었음) 코를 막고 구강 대 구강 구조 호흡을 두 차례 실시하자 바로 자기 호흡이 회복되었고 이후 바로 병원으로 이송하여 수액과 산소 공급이 이루어 졌고 계속 산소를 공급하면서 서울까지 후송하여 상당 기간을 병원에서 쳄버를 포함한 치료를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였고 당시 전화 통화에서 “다시 다이빙 하셔야지요”라는 질문에 분명 “예 그래야지요”라고 대답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감압병을 경험한 다이버에게 다시 다이빙을 권할 것인지 여부는 다음 기회에 토의하고자 한다) 과연 지금도 다이빙 활동을 하고 계신지 궁금하다.(연락 한 번 주십시오)
[결론]
다이빙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의 변수가 발생할 수 있고 여러 가지의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고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혹 불가피하게 사고가 발생한 경우 각 다이빙 교육 단체에서 제공하고 있는 구조 다이버 과정과 심폐소생술 및 응급처치법 교육을 이수한다면 자신의 안전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그리고 다른 모든 다이버의 생명까지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예고]
다음 월 호에서는 비다이빙 상황에서 겪었던 사례와 심폐소생술의 개요 및 요령 그리고 2000년 이후 바뀐 심폐소생술의 기준 등에 관해 소개하겠다.
[사족]
혹 허락을 얻지 않고 실명이 거명된 분들에게 실례가 되었다면 사죄를 드립니다.
퍼 옴 : 다이브웹
글제목 : 다이빙과 응급처치법
글쓴이 : 강영천 2002-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