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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수목원 / 경기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 나무를 심고 거기에 표찰을 붙여서 일반에게 공개하는 장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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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면·영북면·일동면·화현면 일대에는 많은 온천이 개발되어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다. 포천동과 선단동을 지나는 43번 국도는 4차선으로 수도권과의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2003년 현재 보물 1점, 사적 1점의 국가지정문화재를 비롯해 유형문화재 4점, 무형문화재 1점, 문화재자료 2점, 기념물 8점 등 도지정문화재 15점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청흥군 이중로 정사공신교서(보물 1174)과 포천 반월성지(사적 403), 이항복(李恒福)선생묘(경기기념물 24), 채산사(경기기념물 30), 서성(徐敵)선생묘(경기기념물 35), 화산서원(花山書院:경기기념물 46), 용연서원(龍淵書院:경기유형문화재 70) 등이 있다.
또한 소흘읍 직동리에 있는 크낙새 서식지로 유명한 광릉수목원은 세계의 희귀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수목원으로서 광릉산림박물관과 광릉산림욕장이 있다.
또한, 화적연(禾積淵)·와룡암(臥龍岩)·선유담(仙遊潭)·금수정(金水亭)·백로주(白鷺洲)·창옥병(蒼玉屛)·청학동(靑鶴洞)·낙귀정지(樂歸亭址) 등 영평8경(永平八景)이 곳곳에 있으며, 현등산에 있는 홍폭(虹瀑)과 군 내에서 가장 큰 사찰인 흥룡사(興龍寺), 청성산(靑城山)의 반월성지(半月城址) 등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1925년 3월에 준공된 저수량 22만 7800t 규모의 산정호수(山井湖水)는 각종 위락시설과 온천·눈썰매장 등이 있어 사계절 관광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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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대학교 / 경기 포천시 선당동 산 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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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관으로는 2003년 현재 대진대학교·포천중문의과대학교·경복대학을 비롯해 초등학교 30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어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의료기관으로 종합병원 3개소, 의원 39개소, 치과병(의)원 16개소, 한방병(의)원 11개소, 보건소 1개소, 보건지소 12개소가 있다.
문화행사로는 각홀문화제와 반월문화제,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꽃축제가 해마다 열린다.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꽃축제는 매년 10월에 열리는 대표적인 행사로 산정호수 및 명성산 억새꽃 축제와 관련된 풍경사진 공모·전시를 비롯해 전통문화예술 공연, 향토 음식과 전통주 시음·판매, 놀이마당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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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포천'이란 지명은 조선 태조 13년(1413)에 생겨난 이름입니다. 포천은 원래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일 때 고구려에서는 마홀군(馬忽郡 一名 命旨郡)이라 불렀습니다. 신라의 진흥왕 때에 견성군(堅城郡)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때에 다시 청성(靑城)이라 불렀습니다. 고려초에 와서 포주(抱州)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다시 조선조에 포천(抱川)이라는 오늘의 땅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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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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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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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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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홀군(馬忽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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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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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진흥왕, 견성군(堅城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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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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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청성(靑城)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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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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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23년(940)포주, 성종14년(995)포천군, 고려8대 현종 양광도 양주군으로 이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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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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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제3대 태종왕(1413), 포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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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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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영평군이 포천군에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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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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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개편,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읍으로 분리, 12개면(1개출장소)87개리로 구획(대통령령 64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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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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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이 연천군으로 연천군 관인면이 포천군으로 편입, 행정구역은 13개(2읍 11면) 88개리로 구성(대통령령11002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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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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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복합시로 승격, 포천읍이 포천동과 선단동으로 분리 행정구역은 14개 읍?면?동(1읍, 11면, 2동)으로 구성(대통령령692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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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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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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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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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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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을 고구려 시대에는 마흘(馬忽)이라 하였는데 마흘에 대하여「삼지연(三地硏)」에서는 물골[水城] 즉 ‘물이 많은 골(谷)’이란 뜻의 ‘몰골’을 음차(音借)한 것이라고 하였다. 골 마(馬)는 물의 옛말 ‘물’ 또 이것의 옛말 ‘매’를 음차한 것이고, 흘(忽)은 ‘골’을 음차하여 썼다는 것이고, 견성(堅城)은 통일신라시대 때 성을 튼튼하게 수축하고 공수(攻守)의 거점으로 삼았다는 연유로 명명하였으며, 청화(淸化)라 한 것은 고려 성종이 정한 별호라고 한다. 지금의 포천이라는 명칭은 물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없고 외부로 흘러 나가기만 한다고 하여 안을 포(抱), 내 천(川)으로 이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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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흘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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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흘읍이라 한 것은 소(蘇)자는 풀이름으로 차조기 소, 나무 이름으로는 소나무 소로 풀이되고 흘(屹)은 산 우뚝할 흘 즉 산이 높다는 뜻이다. 주위에는 산이 많으며 나무와 풀이 무성하였던 이유로 소흘읍이라 부른 것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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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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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내면은 현 구읍리에 조선시대 포천현아(抱川縣衙)가 있어 현내면(縣內面)이라 부르던 곳으로, 1905년 포천군청이 현 포천읍으로 이전됨에 따라 면이름을 군내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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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촌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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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죽엽산 안쪽이 되므로 내동면(內洞面)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內洞)의 內자와 동촌(東村)의 村자를 따서 내촌면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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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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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花山)이 있으므로 화산면이라 하였다. 加山面이라 부르게 된 까닭은 청량면의 3개리를 화산면에 더하여(加)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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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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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면은 조선시대에는 포천현 내북면(內北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북면(外北面)을 통합하여 신북면이라 개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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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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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면이라는 명칭은 남면에 서면과 하리면을 병합하면서 영평천의 푸르고 맑은 물이 면의 중앙인 창옥병(蒼玉屛) 연안으로 흐른다고 하여 명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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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중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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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중면이란 명칭은 포천군에 병합될 때 영평군의 중앙에 위치하여 영중면이라 이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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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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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면은 조선시대 영평현에 소속되어 동면(東面)으로 불리어 오다가 1895년 (고종 32) 영평현이 포천군에 병합되면서 동면을 둘로 나누어 포천군 일동면으로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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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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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면은 조선시대 영평현에 소속되어 동면(東面)이라 부르던 곳으로 1895년(고종 32) 영평현이 포천군에 병합되면서 동면을 둘로 나누어 포천군 이동면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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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북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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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북이란 명칭은 영평현 북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북면이라 하였고 포천군에 편입하면서 영평군의 긴 도로를 지나 제일 북쪽에 있다는 복합적인 연유로 영북면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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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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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궁예의 학정에 못이겨 어진 관리들이 관직을 버리고 성밖인 이 지역에 모여 살았다고 하여 이 곳의 명칭이 관인면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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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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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현면은 조선시대 포천현의 동촌면(東村面)이라 부르던 곳으로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027호에 의하여 내촌면 화현출장소가 화현면으로 승격되고 화현, 지현, 명덕 3개 리를 관할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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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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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중엽에는 서면이라 칭하였으며 군청이 군내면 구읍리로부터 신읍리로 이전후 서면 사무소도 신읍리로 이주되었고 1937년 서면을 포천면이라 개칭되었다가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포천읍으로 승격되었고 2003년 10월 19일 포천시 승격으로 2개동으로 분리되면서 신읍리와 어룡리가 포천동으로 구획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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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단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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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읍에 속한 행정구역이 2003년 10월 19일 포천시 승격으로 포천읍이 2개동으로 분리되면서 자작리, 선단리, 설운리, 동교리가 선단동으로 구획되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