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11장 강해설교
사 11:1~5, 메시야의 강림과 통치
본문은 쇠잔한 다윗 왕조의 후손 중에서 고목에 싹이 나듯, 한 신적 권세를 소유한 메시아가 출현하여 온 세계를 평화로 통치하실 것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1. 메시아의 출생 내력
1)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당시 앗수르 제국은 '백향목 산림'(호 14:5)처럼 그 세력이 창일했으며, 그에 비해 선민 유다의 다윗 왕조는 고목처럼 쇠퇴 일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앗수르의 압제 하에 있는 유다 백성들은 앗수르의 '빽빽한 산림'(사 10:34)을 베시리라는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을 요원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장차 쇠잔한 다윗 왕조의 후손 중에서 고목에 싹이 나듯(1절), 신적 권세를 소유한 한 메시아가 출현하여 유다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평화로 통치하실 것을 예언하며 선민들을 재차 격려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제국이 사탄의 죄악 권세를 의미한다면, 그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은 곧 '다윗의 후손으로' 불리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참조, 마 1:1 HYPERLINK "딤후2:8"딤후 2:8). 그분은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롬 1:3)에서 언약대로 출생하심으로써, 사멸했던 유다 왕조의 영광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세상의 어두운 권세에 패배하는 것처럼 느낄 때에도 두려워하거나 낙심치 말고,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롬 4:19)하고 언약을 향해 전진한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과 같은 신앙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2) 비천하게 오셨습니다.
메시아는 '한 싹… 한 가지'(1절)처럼 나실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세인들 보기에 보잘것없는 계급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① 약함으로 오셨지만 창대하게 됩니다.
한 싹이 나서 결실을 하듯, 주님께서는 겨자씨처럼 이 땅에 오셨으나, 후에 만국을 덮는 복음의 나무 그늘이 되셨습니다(참조, 마 13:31, 32).
② 멸시를 받는 존재로 오셨습니다.
'이새의 아들'이라는 말은 다윗을 경멸하던 사람들의 조롱이었습니다. 그리스도도 이 땅에 오셔서 '나사렛 사람', '목수의 아들', '미치광이' 혹은 '반역자'로 멸시와 매도를 당했던 것입니다.
③ 그러나 그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오셨습니다. 잘라진 그루터기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1절)하듯(참조, 단 4:15 HYPERLINK "렘23:5; "렘 23:5 HYPERLINK "슥6:12"슥 6:12), 그리스도는 출생의 내력부터 부활의 생명력이 충만하신 영생 그 자체로 오셨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들은 아무리 '불의하고 절망적인 역사의 영향력 안에 거한다 해도 슬픔과 좌절에 빠지는 삶을 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사야 당시의 진실한 선민들과 함께 오늘 우리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승리의 축배를 들 날이 기필코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2. 메시아의 권한
선지자는 이어서 '여호와의 신이… 그 위에 강림'(2절) 하심으로써 메시아는 신적인 권세와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사야의 시각으로 볼 때 비단 앗수르 왕조뿐만 아니라, 선민 유다의 지도자들까지도 '소돔의 관원'(참조, 사 1:10)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인생들에게 실현할 만한 지도자는 이 땅에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하나님께 인정받으신(참조, 눅 3:22)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서의 자격과 능력이 있음을 내다본 것입니다(참조, 요 1:23, 29-34).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왜 성육신하셔야만 했는지, 그분의 '길은 의도'를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불의하고 어두운 이 땅에서 우리 인생들의 기대감을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왕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과 사탄과 우리의 마음을 분별하시며 '모략과 재능'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또 성취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명과 진리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메시아의 통치성
1)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통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뜻 가운데서 인생들을 다스리십니다(참조, 마 4:4-10). 불의하고 패역한 앗수르나 유다 왕처럼 자신만의 사욕을 위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전리품화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정치적 목적은 오히려 자신을 백성들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참조, 마 20:28).
2) 약한 자와 진실한 자의 왕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변호해 주셨습니다. 불의한 지도자들처럼 강자의 뇌물을 받고 약자들을 울리신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약자와 의인들을 멸시하고 괴롭힌 불의한 권세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3) 변치 않는 왕입니다.
그분은 그 모든 뜻을 성실함으로 지키실 것입니다. 어떤 유혹, 어떤 환경도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11: 6~9, 메시야의 통치세계
본문의 말씀은 앞 절에서 언급한 메시아의 도래와 그 메시아의 성격에 관한 예언에 이어 메시아에 의하여 통치될 세계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메시아의 이상적인 통치 결과로 과연 세계는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지금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롬 13:14) 열렬히 사모하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메시아이신 주임의 통치는 분명히 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메시아의 통치로 말미암아 변화될 세계의 모습을 상고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1. 온전한 평화가 옵니다.
메시아의 이상적인 통치 결과로 말미암아 도래할 세계는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메시아가 통치하는 세계의 특징은 온전한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1) 조화와 일치의 세계
6절 이하의 본문에서 보면 온전한 평화의 한 구체적인 실증으로서 맹수와 순한 짐승들 사이의 조화나 일치, 그리고 맹수와 독사, 그리고 어린 아이 사이의 조화나 일치를 그림처럼 표현하였습니다.
메시아가 통치하는 세계의 평화는 죄로 말미암아 조화될 수 없었던 이 세계의 모든 부류들이 조화를 이룹니다.
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합니다.
②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습니다.
③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있으며 어린아이에게 끌립니다.
④ 암소와 곰이 함께 먹습니다.
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⑥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손을 넣고 장난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평화의 세계, 곧 조화의 세계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다스리실 때 이처럼 조화 있는 평화가 깃듦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영원한 안전의 세계
메시아께서 통치하시는 세계는 안전합니다. 위대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직접 돌보시기에 누구도 서로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의 통치 세계에서는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심령을 이룬 성도가 이 땅에서 열심히 선을 행할 때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노라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참조, 벧전 3:13).
그리스도께 온전히 다스림을 받은 바울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라고 확신에 찬 고백을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주님이 통치하시는 세계의 특징은 영원한 안전에 있습니다.
2. 그러면 온전한 평화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1) 각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데서 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충만하면 할수록 인간의 마음이 평화에 이르는 길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성숙되고 고양되면 될수록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참조, 요일 4:8).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의 형사에 가까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충만한 사람들이 많이 일어날수록 인간의 격노와 증오는 사라지고 평화가 깃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 낸 기만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의 왕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말씀 속에 있음
하나님을 가장 깊이, 그리고 가장 분명히 아는 길은 그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첫째로 창조자요, 자존자이십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둘째로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대상 29:11).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셋째로 하나님은 위대한 성품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보면 '영존하시는 자'(시 90:2), '천지에 충만하신 자'(렘 23:24), '전능하신 자'(렘 32:27), '불변하시는 자'(약 1:17), '전지하신 자'(요일 3:30) 등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시 95:1).
다섯째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신 분이십니다(참조, 요 3:16).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해 어쩌면 무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말씀에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충만히 알 때 이 땅 위에는 참된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참된 평화는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세계의 특징입니다.
사11:10~14. 그날을 기다리며
본문은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기호를 정점으로 선민들을 영화롭게 하시며, 흩어진 자기 백성들은 물론 모든 인류를 그 아래로 모을 것과 선민들의 골육상쟁의 전쟁들이 종식될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시 모든 교회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통일되는 날을(참조, 롬 11:25-27 HYPERLINK "엡2:11-19; "엡 2:11-19 HYPERLINK "골3:11"골 3:11) 조망한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날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선민들의 영화로움
1) 이새의 뿌리의 새싹
당시 유다 다윗 왕조의 옛 영화는 시들어 버렸고, 그 사기는 땅에 떨어졌으며, 앗수르로 인한 북 왕조의 멸망으로 '베임 당한 그루터기'(사 6:13)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에 반해 원수 된 앗수르의 세력은 '장대한 나무와 빽빽한 삼림'(사 10:33, 34)처럼 기세가 충천한 서아시아의 대제국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 왕조는 패배주의의 깊은 안개 속에서 혼란과 불투명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고목 같은 '이새의 뿌리에서 한 쌍이'(10절) 다시 나오듯 나라의 영화가 부활 될 것을 예언했던 것입니다(1-6절).
과연 얼마 후에 앗수르의 대군은 유다를 침공해 왔으나 하나님의 사자들로 인하여 멸절되고(참조, 사 10:28-34; 37:36-38), 유다 왕조는 평화와 옛 영화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나름대로 화해와 공존을 모색하여 갈등과 다툼을 해소하고자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시도해 오고는 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와 인류의 본질적인 타락성으로 인해서 평화의 나무는 시들어 가고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참조, 롬 15:12) 두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즉 인류의 참되고 영원한 통일과 화해는 오직 다윗의 뿌리이신(참조, 사 53:2 HYPERLINK "계5:5; 22:16"계 5:5; 22:16)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주시는 날에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만민의 기호가 됨
그리스도는 '만민의 기호'로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천군들이 앗수르 대군을 격파하고 유다가 승리를 얻게 되자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10절)왔으며, 히스기야 왕에게 신흥 바벨론 제국도 사신들을 보내 아부할 정도로 옛 영화를 되찾았습니다(참조, 왕하 20:12).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한 믿음과 인내로서 추종하는 사람들을 행복과 승리의 삶으로 인도해 주는 이정표요 구원의 기호입니다. 바울은 '이 푯대를 향하여… 좇아'(참조, 빌 3:14)간다고 자기 삶의 목표를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같은 믿음을 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할 새 예루살렘을 대망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 그날의 귀향자들
1) 피난하여 이산한 자들
북조 이스라엘이 앗수르 산헤립 왕의 사마리아 함락으로 멸망당해 버리자 허다한 거민들이 주위의 나라들과 먼 바다의 섬들로 피신했지만 앗수르의 멸망으로 인해서 다시 본국으로 귀향할 것을 뜻합니다. 경건한 성도들에게 이 세속 사회는 고적한 이방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참조, 히 11:38).
정치적으로 극단적 이데올로기 사이에 끼어 '수정주의 자'라고 매도되고, 사회적으로는 '이상론자들'이라며, 이웃과 단체들로부터 소외되기 일쑤입니다.
노아, 롯, 그리고 주님과 사도들 모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로 자처했으나, '이같이 말함은 본향 찾는 것'(참조, 히 11:14)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귀향하기 위해서는 잠시 고독하더라도 세상 죄악의 세력에서 멀리 피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2) 남은 백성들
남은 자들이란 곧 앗수르의 압제로 인한 환난과 고통 중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킨 진실한 선민들을 가리킵니다. 이 용서는 '찌꺼기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만물의 찌꺼기'(참조, 고전 4:13) 같다고 했는데, 신앙 세계는 물론이고 일반 사회에서도 참된 길을 갈려는 사람들은 늘 남은 자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탄의 유혹과 압제에 야합치 않고 굴종치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께로 삶의 주소를 정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3. 그날에는 모든 다툼이 종식됨
1) 동족간의 화해
'에브라임은 유다를…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13절) 것이라고 한 바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호 아래서 모든 교파, 모든 계급, 모든 논쟁과 이유들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참조, 엡 2:11-19).
2) 갈등의 영원한 종식
선민들을 괴롭히던 모든 외세들이 앗수르를 제압한 유다의 권세에 굴복하듯, 성도들의 원수인 사탄과 그 하수인들의 사악한 세력들은 사멸될 것입니다(참조, 계 20:10).
사11:15~16, 화해의 하나님
이 본문 말씀에서는 앗수르로 잡혀갔던 나은 백성들이 귀환할 때에 하나님이 권능으로 역사하시어 순탄하게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을 옛 출애굽 사건을 비유로 들어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출애굽 때에 홍해를 말리사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것처럼 앗수르에 역사하사 남은 백성을 아무런 방해 없이 쉽게 돌아오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와 화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우리의 모든 과오와 죄에서 화해하시길 원하시고 모든 불편하고 거리끼는 관계에서 원만한 관계가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화해하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화해해야 할 이유
1) 막힌 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장 깊고 넓게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죄입니다. 죄는 화목함 속에 불화를 만들고 평화 속에 분쟁을 만들며, 만족 속에 불만을 만들어 양편의 사이를 점점 벌어지게 만듭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하고 교통할 수 없도록 담을 쌓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 곁에 가까이 갈 수 없었음은 물론 자신들끼리도 서로 몸을 감추고 부끄러워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바로 이처럼 부자연스럽고 서먹서먹한 관계에서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나와 이웃 사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 담은 바로 죄의 담입니다.
2)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영어로 understand입니다. 이는 under, 즉 '밑에', '아래에'라는 단어와 stand, 즉 '서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해는 전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마음에서 가능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화해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 불화의 상태에 있다면 내 쪽에서 먼저 상대편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화해의 조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그러한 겸허함을 사람 앞이나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합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이해는 모든 불화와 불신을 깨뜨리고 화해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2. 화해의 결과
1)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되면 우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은 것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화해하지 못한, 즉 영생을 얻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지옥 불에 거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멸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불화의 담을 헐어버리고 그와 화목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2) 모든 어려운 상황들이 예전의 상황으로 회복됩니다.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는 그 동산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낙원을 언제까지 그대로 비워두실 수 없기 때문에 제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 낙원이 다시 인간들에게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가장 급선무는 예수 그리스도와 화해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본향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가능해진 것은 먼저 화해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실현된 곳이 골고다입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인간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3) 매사에 축복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음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앗수르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 역시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일단 화해하게 되면, 그 이후의 삶은 축복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가장 절실하고도 간절히 원하는 현실적인 소원까지도 응답 받습니다. 앗수르에 포로로 남아 있던 자들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고국에 돌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부분부터 모든 부수적인 것까지도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우리 성도들은 화해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며, 사회와 국가, 그리고 전 인류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