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 유물의 실체를 밝히는 데 중요한 의미를 띤 제작연대 문제에서 일본 쪽은 명문에 있는 연호인 ‘태(泰)□4년’을 초기에는 중국 서진 태시(泰始) 4년으로 보고 268년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다시 동진 태화(泰和) 4년으로 판단해 369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해가 바로 왜군이 임나를 정벌했다는 해다. 이것은 이 유물의 ‘헌상’을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짜맞추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 출토된, 금은으로 상감한 칼은 모두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제작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또한 칠지도와 함께 ‘헌상’했다는 칠자경(언저리에 원이 7개 새겨진 청동거울)이 6세기 전반의 무령왕릉에서 처음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일본에 보낸 칠자경이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질 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칠지도를 369년에 만들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가정이다.
이러한 맹점과 더불어 〈일본서기〉가 전한 칠지도와 신궁에서 발견된 유물이 같은 물건인가 하는 데 대해서도 의혹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논란에서는 이 문제가 소외되어 왔다. 원래 스가가 신궁에서 발견할 때 물품목록에는 분명히 ‘육차모’, 곧 여섯 갈래(가지)의 창이라고 기재되어 있었으며, 그는 이 이름으로 메모하였다. 그리고 유물은 가장자리가 얇고 중심부가 두꺼워 칼보다는 창이나 검에 가깝다. 그뿐만 아니라, 일견하여 유물은 ‘7지’, 곧 일곱 가지(갈래)가 아니라 몸체에 붙은 여섯 가지가 엇갈려 배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모두들 몸체까지 합쳐서 ‘칠지’라고 하는데, 몸체가 어떻게 가지일 수가 있는가. 상식 밖의 얘기다. 그런데도 신궁 유물에는 ‘칠지도’란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720년께 편찬되었다가 임진왜란 직후 필사본으로 발견되어 고대 한국과의 관계를 많이 왜곡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일본서기〉의 조작기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누군가가 여섯 가지를 일곱 가지라고 우겨대면서 명문 중의 ‘육차모’를 ‘칠지도’로 변조했다고 지적한다면 이것이 과연 무리일까. 이 대목에서 거의 같은 시기(1884년)에 일본 육군 참모부가 나서서 ‘광개토대왕비’에 석회칠을 하고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왜도해파’(倭渡海破), 곧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했다’는 4글자를 위작했다는 신빙성있는 일설을 상기하고, 4년 전에 일본 구석기문화를 70만년 전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신의 손’이라는 한 ‘고고학자’가 가미타카모리 유적지에 ‘유물’을 몰래 파묻다가 들통이 난 사건에 유념하게 된다. 이제 ‘칠지도’는 그 위증을 접고, 대신 육차모가 나서서 역사의 실상을 실토해야 할 것이다.
정수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