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론
우리나라 대중 음악의 역사
한국의 록음악의 역사는 신중현에서 비롯되었다.
신중현은 일본색 음악을 혐오하면서1960년대
미국에서 성해한 인종 차별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록 음악을 발빠르게 도입 했을 뿐 아니라 그 음악 정신적인 저앙과 자유의 저신도 흡수했다.
신중현이 서양의 록음악과 욷니가락을 적절하게 버무려 만든 대표곡은 1970년에 발표한(미인)이다.
김민기의 노래에는 1970년대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가 깊이 배여 있었다.
김민기의 음악은 서양에서1960년대에 유행한 반전.반체제 음악 포크였다.
김민기의 곡에는(아침이슬),(친구),(작은연못)등이 있다.
유신정권이 저항적 포크에 철퇴를 내린 뒤에는 송창식.윤형주.김세환 등 통키타 가수들이 대표하는 저항 요소를 배제한 순수 서정 포크가 등장했다.
트로트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민요를 대체하는 장르로 등장한 후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행가요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중반 부터 전성기를 되찾은 트로트 분야에서 최고 스타는 조용필이었다.
1990년대 야당에서 탈바꿈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정부는 초기에 공직자 재산 공개,금융 실명제 등 파격적인 정치 공세를 펼쳤다.
대중 음악계는 트로트와 성인층 노래가 주춤하고 랩을 주축으로 다양한 시도가 일어났으며 그 도화선은 단연"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 대중 음악에 일으킨 핵심은 힙합 문화였다.
서태지외 아이들 이 후 음반회사와 방송국은 수명이 긴 음악가를 기르는 전략에서 가장 짧은 기간안에 최대의 이윤을 뽑고 새로운 스타로 전환하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한편.보수적인 기성 질서와 주류 음악계의 지나친 상업 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제도권 무대 대신 좁은클럽에서 소수의 매니아를 상대로 음악 활동 을 하는 언더 그라운드 밴드들이있다.
♥본론
60년대 대중 음악
60년대 음악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좀 더 완숙한 체제로의 음악형태를 나타냈다.
그것은 수난기에서 돌출 되어온 히트곡들의 영향과 더블어 창작인들의 창작욕구를 한층 더 불러 일으켰고 특히.미8군의 방송과 함께 8군 쇼에서 활약한 가수들의 무대진입이 활발히 나타났시기였다.
1961년 한명수의'노란 샤쓰입은 사나이"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택시 운전기사들에게까지 유행이 번져 노란셔츠를 입고 운전하는 운전사들의 모습도 비쳐졌다.같은 해 김희준은"내 사랑 주리 안"과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인기를 구가했고 1963년에는 현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밤안개"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미8군 쇼1963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때 실녁있는 가수들이 이 무대를 거치며 활발한 활동을해 나갔다. 그러나 초기때는 개런티를 돈이 아닌 커피나 초콜릿.술. 빵 등으로 대치됐고 개런티는 약간의수고비 정도였다.
초기에는 미8 군 쇼에서 활약한 팀은 김시스터즈.김보이지.패티김. 이금희. 서수남.코리안 키튼즈의 윤복희.한명숙.임희숙.신중현 등이 이8군 쇼를 거쳐갔다.
8군에서 이들이 활동하는 반면 전통적인 트로트를 구사하는 가수들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트로트외 신민요 쪽에서 인기를 누렸던 가수들로는 한복남.박재랑.이해연.현인.명국환.권혜경 그리고 이미자였다.
이미자는 이미 1950년대 때"열아홉 순정"으로 인기를 누렸고 이후"동백 아가씨","섬마을 선생님"등으로 이미자의 전성시대를맞이했다.
1965년 남일해는"빨간 구두 아가씨"등의 곡을 발표했고1966년에 배호는"만나면 괴로워","안개낀 장충단 공원","마지막 잎새"등을 노래했다.
레코드 회사 역시1950년대에 비해2~여개로 늘어났고 오아시스.대도.유니버샬.도미도.지구.아세아.성 음
등 유수의 레코드사가 생성됐다.
트로트 부흥뒤에도 젊은 청소년층의 노래 역시
확산
50년대 말 명동에 근거지를 둔"은하수;"명보다방."돌체"등은 젊은이들의 또 다른 배출구의 장소였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디쉐네","메트로",소보네"등도 자리 잡아갔다.
이 시기를 통하여 최동욱.이종환,김인권,박광희,원종관,종용호,이백천,이선권,박원웅 등이 디제이 활동을 벌였으며 후일 방송사가 생기면서 이들은 각각 프로튜서나 방송 DJ로 자리를 옮기는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신중현은1960년대 초 미8군쇼 무대에서 활약하며
주옥같은 곡을 많이 선보였다.9
63년에"빗속의 여인.커피한잔.") 발표했고 그레입스
에드4라는 그룹을 조직 서정길(보컬리듬)한영현(베이스기타),권순권(드럼)과 함께 이 그룹을 이끌어 갔다.
이때"키보이스의"활약도 두드러젔다.
신중현의 후반 작품들은 더욱 원숙미를 더해주고 있다."미인".떠오르는 태양.거짓 말이야.님은 먼 곳에.안개속의 여인.너를 사랑하네.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불려지는 명곡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저속하다는 이유로 그가 지은 3백 곡 중 13곡만이 방송금지로 묶이는 불운을 격기도 했다.
그룹 에드4 이후 신중현은 덩키스와"골드 그레입스"활동을 거치며 완숙한 음악을 보여 주었다.
..70년대 대중음악
70년대 대중 음악은 포크 음악의 출현과 트로트의 활성이두드러진 시기였다. 특히 이때는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의 음반간여가 심하게
부각된 때 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음반에는 건전가요가 수록되었고
새마을 노래와"예비군가"는 직장은 물론 학교.단체. 공공기관에 걸쳐 20여년 동안 우리의 귀와 뇌리를 자극했다."새마을 노래"는 90년대
초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70년대 초기에는 한대수.양희은.이필원.박인희
등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통키타 음악이 아닌 하남석.김정호.백영규 등으로 이어지는 크로스오버적인 장르의 가수 들을 배출해내는 동기부여도 됐다.
국내에서 활약한 본격적인 포크 가수는 한대수를 뽑는다.
미국 본토에서 포크 음악을접했던 한대수는68년11월드라마 센터에서 귀국 공연을 열어 많은 젊은층들에게 어필했고 이후"물좀주소",고무신"등을 발표했다.
그 뒤 서유석이 풍자적인 노래 로 대학가에서
활약했으며 김민기.양희은..이필원.박인희등이
대학가에서 활동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저항가요라는 미명하에 김민기 등이 독제 체제로부터 제제를 받기도 했다.
이후 한대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서유석은 노래를 잠정 그만두었고 양병집과 조동진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노래들도 많이 취입했다.
은희의"꽃반지 끼고"윤형주의"험한세상 다리가되어
트윈폴리오의"웨딩케익"
조영남과 최안순의"산 까치야"
4월과5월의"내가 싫어하는 여자"
에보이스의"물새의 노래"
양희은의"새노야"
학생들의 기타 교본으로 채택되기까지 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백구,"작은연못"등의 주옥 같은 노래들이 발표됐다.
70년대 중반이 되면서 트윈폴리오를 해체 한 송창식과 윤형주는 각각 솔로로 활동했고
이정선,어니언스,4월과5월,박인희,원플러스원,김세환 등이 포크 음악을 펼쳐 나갔다.
또,이장희,석찬,홍민,허림,둘 다섯,하남석,정종숙,김인순,등은 포크의 형식과는 다른 일반 유행 음악을 했다.
투 코리안즈의 "벽오동"은 민요 형식을 띠기도 했고. 이종용의"너"나 유심초의"사랑이여"는
포크 음악과는 다른 유형의 음악에서 접근했다.
특히 박인희는 청아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시 낭송을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포크음악 이 외에도 70년대는 록과 중창,트로트의 전성기가 있었다.
중앙에서는.버블검,쉐그린,뜨아에 므와,
라나에 로스포,현경과 영애, 투 코리언즈,서수남과하청일,원 플라스 원,어니언스, 산이슬,금과은,하사와 병장,물레방아,버들피리,등
중창단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70년대 일대 트로트의 발흥을 일으킨 가수는
김태희의"소양강 처녀"였다.
이때부터 패티김,김추자,김상희,김세레나가 맹추격을했고 특히 이때 남진과 나훈아의 맞대결은 남자 트로트의 양대 산맥을 그을만큼
매우 위력적으로 작용 됐다.
이때 리사이틀이란 단어가 많이 쓰였고 펜 클럽도
조성이 된 시기였다.
당시 남진의"님과 함께"는 아이들에게 조차 애창 됐으며, 나훈아는 남다른 창법으로"고향역"
"감나무골"등을 히트 시켰다.
방주연의"기다리게 해 놓고"
김부자의"사랑이 머물다 간 자리"
박우철의"잊지마오" 등이 주된 히트곡이었다.
한편으로는 요들송을 하는 김홍철,
샹송 분야의 이미배.
칸쵸네 스타일의 이용복.
재즈 분야에서의 김준,장우, 임희숙의 활약도
이어졌다.
~80년대 대중음악
80년대는 발라드가 강세를 보인 반면 트로트의 약세를 몰고 왔다. 그러나 트로트는 지난60년대
이후 새로운 차세대 트로트 가수들을 양산해냈으며,좀 더 다원화된 음악들도 선보였다.
80년대에는 정태춘.배따라기. 신형원.해바라기. 유익종. 이태원 등이 활약했다.
신형원은 서희덕에게 발탁.
불씨. 유리벽 등 젊은 청소년층의 노래를 불러
잔잔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신형원은 얼굴 없는 가수란 닉 네임을 가지고
작곡가 한돌과 함께"개똥벌레", "터" 등 서민적인
노래를 많이 불렀다.
83년 이주호가 이끄는 해바라기는"모두가 사랑이예요"등으로 1년여 정상을 차지했고"내 마음의 보석상자", ;사랑으로" 등 구미ㄴ들의 많은 지지를 얻는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이때 이탄원의"솔개"가 아주 재치있는 가사로 받아들여졌고,배따라기는"아빠와 키레파스","그댄 봄비를 좋아 하나요"등 새로운 창법을 선보였다.
또 한, 이진관의"인생은 미완성"
1980년대 광주민주화 운동의 아픔을 노래한"바위섬"
88년에 대뷔한 수와진은 길거리 가수로"파초"
"새벽아침"등 참신한 노래를 불렀다.
80년대는 그룹의 활동도 두티러졌다.
옥슨80의"불놀이야"의 기폭제로 신중현의 불후의명작"아름다운 강산"
록이 가미된 들국화의"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다섯 손가락의"새벽 기차" 가 신선감을 주었다.
이때. 특히 가수들간의 듀엣곡도 성행했는데
이정석,조갑경의"사랑의 대화"
홍서범 조갑경의"내 사랑 투유"
이문세와 고은희의"입널 이야기"
윤수일과 최진희가"찻잔의 이별" 들을 발표했다.
81년 민혜경의"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발라드의 포귀를 열었다.
이후.정수라의"사라히었나"
85년 이광조의"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심"
이선희의"j에게 "아! 옛날이여."알고 싶어요"를
발표했고 조용필,이문세,최성수,정수라,조하문,김범룡,이선희,유열,이정석 등이 발라드 음악을 불렀다.
특히. 발라드의 확산은 변진섭의 등장으로 더욱 확산됐다.
88년"홀로 된 다는 것"
"너에게로 또 다시"
"희망사항" 등 좋은 반응을 얻었고
89년 김민우의"사랑일뿐야", "입영열차 안에서"
"휴식같은 친구"를 히트시켰다.
이승철은 89년 솔로로 전향"안녕이라고 말하지마"를 발표했고. 이상우는"슬픈 그림가ㅌ은 사랑"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다.
후반부에는 소방차의ㅓ인기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트로트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임종임.인순이.방실이.현철.현숙.나미.주현미.문희옥.ㅁ벌운도.태진아.김국환.송대관.등의 전성기가 있었다.
현숙은"정말로"라는 노래로 일대 트로트의 댄스 바람을 가져다 주었고 모울 창법을 인용한
윤시내는"열애", "DJ에게" "공부 합시다"등을 발표했다. 이은하의"봄비"
한울타리의"사랑의 미로",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등을 불렀다.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의"날 보러와요"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어 주 현미의 시대가80년대 트로트를 풍미하게 했다.
약사 출신인 그녀는 84년"쌍쌍파티"로시작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등 주옥같은 히트곡을 냈다.
특히 주현미와같은 시기에 문희옥 역시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설운도와 현철 역시 대기 만성형으로 설운도는"마음이 울적해서"
현철은"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으로 10여년의 무명선월을 씻었다.
또한 송대관과 태진아 역시 기 뒤를 이어 농런의 히트곡을 계속 내면서 남자4인방 시대를 열었다.
또한."당신"을 애절하게 부른 김정수,
김국환의"타타타" 등으로 발라드와 트로트의 활성이 두티러졌던 때 였다.
80년대의 또 다린 불세출이 가수를 뽑는다면 단연
조용필이다.
75년"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대마초 사건으로인해 심한 굴곡의 역경으로 살았다.
그 후 80년"창 밖의 여자"
"촛불","미워미워미워"
"모서살겠다 꾀꼬리""미지의 세계" 그ㅓ유명한"허공"등 수십곡의 히트곡을 연달아 내 보였다.
이외에도 남화용의"회상",가버린 추억"홀로가는 길
소리새의"그대 그리고 나"
김상배의"나이팅게일" 몇미터 앞에 두고"와
김종찬의"사랑이 저 만치가네"
"토요일은 밤이 ㅁ좋아"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태호의"미스고"도 팬들의ㅓ사랑을 받았다.
80년대의 대중 음악은 이렇듯 다양한 장르가
한 시기에 어우러져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우행가요를 양산해 냈다.
~90년대 대중음악(1990~97)
발라드의 강세를 뒤로하며
김국환의"타타타"는 대중음악계의 무대를 휩쓸었다.
김수현의 드라마"사랑이 뭐 길래"에서 드라마에 삽입된 이 노래는 김국환의 처기음악"꽃순이"
동요"은하철도999"에 이은 대작이었다.
특히나 여성인권 문제가 심홰되고 있을 무렵 이 노래는 많은 지지도를 얻었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은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초기 때였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와 금융 실명제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치 공세를 펴 나갔다.
전반적인 대중음악계는. 발라드는 상승세를 타는 반면,트로트와 성인층의 노래는 주춤하고 대중음악의 새로운 형태인 랩을 주축으로 레게,ㅇ바우스 테크노,마이애미,갱스터,데스,모던 록
까지 다양한 음악시도를 한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외국 가수들의 내한공연이 자주 이어졌고 케이블TV의 개국과 각종 레코드 및 서적이 유입되면서 청소년들의 복장과 악세사리 등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댄스음악을 주축으로 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펜 클럽의 힘이 거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통신의 발달로DC통신이 발굴한 스타들도 소수 발굴됐다.
89년 나미의"인디안 인형처럼" 이 후 댄스음악의 활로가 분주해졌다.
92년에 이르러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랩그룹이 탄생되면서 음반 시장의 수요 확산은
이들에게 엄청난 부른 축적케 해 주었다.
특히. 가수들의 초상권 및 팬시용품을 전제로 한 이미지 캐릭터 사업도 거대한 시장으로 발돔음케했다. 또한.신디사이저와 컴푸터 미디음악 등을 소수 작곡가들과 미디 프로그래머들의 출현으로 연주자,즉,세션맨들과 악단들의 퇴보가 이어졌고 휴머니즘 요소 보다는 막강한 자본과 무제한적인 이이디어로근대 대중음악의 틀을 깨트리는 소위 노래만을 위한 가창활동이 아닌 프로튜서 개념의"연출음악"이 생성된것이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의 방한 이후 랩뮤직과 강한 멜로디에 춤이 겸비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커다란 발전을가져다주었다.
이미 이 시기에는 시퀸서를 다룰 줄 아는 윤상,손무현, 등이청소년들의 또 다른 감성을 파고들어 나름대로의 색깔을 갖춰 나가기도 한 때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태지ㅓ역시 가창만을 하는 가수가 아닌 프로듀서,엔지니어,편곡.자자콕.ㅜ연주에 이르기까지 연출자의 몫을 감당해냈다.
94년 가요계에는 대 지각변동이 있었다.
7월경 서태지와 아이들,뮤,룰라,코코,1과2분의1
등이 강세를 보였던 반면 발라드곡 및클래식한 곡들이 대거 진입. 가요계의 또 다른 이변을 낳았다.
당시 상승 곡선을 탔던 가수는 신승훈이었다.
매년 가을 때 마다 발라드의 회오리를 일으킨 그는
그해1백만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곡은"미소속에 비친 그대"
"가을빛 추억" 이플잎작가가 쓴"소녀에게" 로미오" 등 이었다.
4/4분기 초기에는서태지와 방송 프로듀서간의 마찰.악마찹양설 등으로 서태지의 음반 판매고가 다소 뒤뗠어졌다.
코코 역시 인기프로의 사회자를 그만두고 인기 몰이에 나섰으나 10위권에 머물렀다.
라인음향에 같이소속됐던 김건모는 영화 촬영 문제로신승훈의 인기를 따라 잡지 못했다.
신승훈과 거이ㅐ 비슷한 시기에 변진섭은 예술성이 짙은"니가 오는 날"로 맹추격을 벌였으나 노래가 잔잔하고 작품성에만 읨존, 발라드 부문에서는 다소 역부족이었다. 뒤늦게 인기바람을 몰고온 신인 및중고신인도 대거 등용됐던"마법의 성"은 인기가요 차트엠더 연속3위를 치지했다.
잔잔한 선윤과 다소 여성스러운 중성의 목소리가 주 매력으로 작용한 이 곡은 한동준1집때 작곡을한 김광진의 곡으로 노래도 직접 불러 팬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다.
93년 MBC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자인 전람회는 신ㄷ믕훈을 이은 그룹으로 클레식한 멜로디와 화음으로 오디오 매니아들에게 많은 사랑을 얻었다.
젊은층의 가수들 이외에도 중견급 가수들의 활약은 서민들에게도 많은 지지와 박수를 받았다.
조영남을 비롯해 나훈아.조용필.이선희. 등 국내에서 내노라하는 가수들이 나와 무게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장외에서는 라이브에 강한 콘서트도 이어졌다."아침이슬"백구"등 무수히 많은 히트곡을 낸 양희은은 처음으로 기ㅗㄴ서트를 가졌고
10,20 궁정동의 2인중 한 사람인 심수봉은
연강 홀에서 코러스 가수 장필순은 학전 소극장에서 각각 콘서트를 가졌다.
특히. 캐롤송도 반짝하는 음반시장의 성격으로 간간히 취입됐는데 깊이 있는 음반은 되지 못했고 몇몇 개그맨들과 코미디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했다.
95년도 대중음악계는 미국의 경우처럼 절대적인 시장경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발전적 인물의 등장과 상업주의의 팽창이 한데 오우러졌던 시기였다.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