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미술 작품이 작가의 사상, 생활, 감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한 나라의 미술은
그 민족의 민족성, 역사,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일찍부터 중국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문화를 이룩한 우리 민족은 자연 환경과의 조화 속에서 소박하고 창의성있는 미술세계를 이루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 미술은
우리 민족의 생활 정서와 감정이 솔직하고 수수하게 표현되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부드러움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담담하고 조용하여 다소곳한 미덕을 장점으로 하는 미술이다.
우리 나라의 미술은 선사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 현대 등으로 구분된다. 선사시대의 미술은 조형성(造形性), 구체성보다는 평면과 선에
의존하면서 추상주의적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선사시대에서 시작된 기하학적 무늬는
신라 토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래는 북방적 추상양식 전통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삼국시대로 들어가면서 우리 나라 미술은 자연주의 양식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자연에 대한 사랑, 자연에의 의존심에 뒷받침되어 우리 나라 미술 특유의
평화롭고 인간미 있고 인공의 가식이 없는 순수한 자연의 미를 나타내려는 한국적 미술양식을 형성해 나갔다. 이 보고서에서는 조선시대 미술의 시대적인 배경을 다루고
회화사를 다루려고 한다.
Ⅰ. 조선시대 미술의 시대적 배경
조선시대 미술의 사회적 배경으로, 회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유교를 통치 수단으로 삼은 것과 후기에 가면서 실학사상의 대두와 함께 일어난 의식의 변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1.유교사상
이조 개국 이후로 유교는 크게 진흥(振興)되어서 세종조(世宗朝)에는 집현전을 설치하고, 성삼문?신숙주 등으로 하여금 유학(儒學)을 전공케 하여 국가의 문교(文敎)로서
기초를 세우게 하였다. 다시 중종 때에는 서원제(書院制)로서 주자학(朱子學)중심의
유학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첫째, 유교는 시문(詩文)을 존중하였으므로 문인화의 발달을 촉진시켜 주었다.(윤희순; 조선미술사연구 1995, 이동주;한국회화사론 1987)
둘째, 이전에는 진채양식의 불화가 성행하던 것이 사대부 문인의 취미에 따라 수묵담채가 주류가 된다.(김종태;한국화론 1994, 윤희순;조선미술사연구 1995, 이동주;한국회화사론 1987) 서화일치사상(書畵一致思想)은 문인의 수묵화를 생성케 했다. 남종화론을 제창한 중국의 동기창(董其昌)과 남종화의 시조(始祖)로 떠받들린 왕유(王維)는
그의 저서《산수결(山水訣)》에서 말하기를
畵道, 以水墨爲上.
〔그림의 도에서는 수묵을 상으로 친다.〕
라고 하여 수묵화를 진채화보다 높게 쳐주었다. 그래서 수묵화는 대개 문인들이 좋아하게 되었다.
셋째, 과거법이 생기고 양반계급이 만들어지면서부터는 도화서의 화원은 문인 사대부
계급인 양반계급과는 전혀 대조적인 기술계급이 되었기 때문에, 문인들은 화원들을
화공 (畵工)이라고 하여 천대하게 되었다.(윤희순;조선미술사연구 1995, 김종태;한국화론 1994) 성리학적 유교사상은 文氣를 중시했으므로, 문인들도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들의 사의를 따짐으로써 단순한 화공의 기능과 구별을 두었다.
2.실학사상
조선후기의 실학은 붕괴되어 가던 봉건 질서의 재편성을 위한 적극적인 구조적 개혁의 시도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대담하게 비판한 학문이자 사상 체계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자기를 강하게 인식하는 민족적인 자기의식인 자주적(自主的)인 관점이다. 또한 한국의 새로운 가치관의 모색이며 설정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적인 고전이나 중국, 일본의 관계문헌을 통하여 한국적인 것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문화 가치를 정립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또한 현실 비판 정신으로 실증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실학이 영조와
정조를 거쳐 순조조(純祖朝)에 이르는 동안 극성하였는데, 이러한 실학의 대두는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意義)를 지닌다.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한
실학의 대두와 변천은 당시의 미술의 추이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이 시대의 회화는 대체적으로 일반과 보다 가까워지고 또 생활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여 한국적 회화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때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출현한 겸재(謙齋) 등에 의하여 일어난 진경(眞景)이 들어
있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또 인간 생활에 필요한 생활상을 그리는 풍속화(風俗畵) 뿐 아니라 서민 의식에 의하여 출현한 민화(民畵)는 이 시기에 나타난 가장 한국적이고도 서민적이며 또 새로운 시각으로 나타난 한국 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Ⅱ.조선시대 미술의 교육 방식
1.도화서 교육(화원의 교육)
화서는 회화를 맡아보는 정부소관의 일기관으로서 태조 원년(任申)에 창설된 것인데,
처음에는 도화원(圖畵院)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서(署)로 고쳤다. 도화서의 시험제를 보면, 인재 선발시에 여러 학생에 대해서, 네 계절의 첫달에 본조에서 제조와 함께
인재를 선발하는데, 제조가 없는 곳에서는 해당 조의 당상관이 인재를 선발한다.
화원을 선발할 때, 대나무?산수?인물?영모?화초 중에서 두 가지를 시험하는데, 대나무가 일등이요, 산수가 이등이요, 인물?영모가 삼등이며, 화초가 사등이다. 이를테면
화초를 잘하면 2점을 주고 보통이면 1점을 준다. 인물?영모 이상은 등급에 따라 올라가 각기 그 점수만큼을 더한다.
대(竹)를 잘 그리는 것을 첫째로 치고, 산수(山水)를 그 다음으로 치는 것은 당시의 회화정신을 표징(表徵)한 것이니 시화일치'서화동체사상에서 발효(醱酵)된 문인수묵화의 용묵(用墨)'용필(用筆)을 기본으로 한 까닭이다. 문인화 기풍은 중국에서 파급되어
온 것이다. 이때의 문인화는 아직 원말 사대가류(四大家流) 의 남화(南畵)는 아니었다. 동기창이 말하는 남종화는 훨씬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문인화라 하여도 소위 북종적인 강경한 용필(用筆)로서 그러므로 가장 뚜렷하게 화법( 法)을 준용(準用)하고,
또 수절한 용필을 주로 하는 대(竹)를 최고표준으로 한 것이다 .산수는 인물에 비하면,
용묵 용필이 서법에 의준(依準)하는 품이 훨씬 농후(濃厚)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근 5백 년간을 계속하는 동안에 문인화는 크게 진흥된 대신에, 화원들이 사실탐구의
호기(好機)를 가지고도 충분히 실징대성(實徵大成)하지 못하고 항상 문기(文氣)와 타협하고 마는 결과를 만들어 주었다. 위와 같은 시험제도 이외에도, 화원 중의 연소총명한 인재를 택하여 매월 화제(畵題)를 내어 가지고 성적(成績)이 양호한 자에게는 녹(祿, 상(賞))을 주는 등의 방법으로 화원의 양성과 향상을 꾀하였다.화원들의 화업(畵業)은 첫째, 초상화 제작하는 것이고, 둘째, 국가편찬사업에 공헌하는 것이었다.
도화서의 유래와 관직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제조(提調) 1인과 선화(善畵) 1인은 종6품, 선회(善繪) 1인은 종 7품, 화사(畵史) 1인 종8품, 회사(繪史) 2인 종9품. 제조는 예조판서가 예에 따라 겸한다. 전자관(篆字官) 2인을 더 둔다. 화원 30인은 본조로부터 일 년에 네 번 추천장을 받아 본조에 보고하고 직첩(職牒)을 받았다. 별제(別提) 종6품 2인, 겸교수(兼敎授) 1인을 감하고, 종 6품을 더둔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공식적인 미술교육 기관으로 정확히 말하면 그림에 대한 업무를
관장하는 국가 기관으로 도화서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그안에서 정식 화원이 아닌 훈련생으로서의 생도가 존재하였고 그들의 교육이나 화원들의 정진 방법은 첫째,
화본을 통한 모사였고 둘째, 새, 풀, 나무, 짐승 들을 실물 사생하는 방법, 셋째, 실제의
산수를 들며 풍경을 직접 담아오던 풍경 사생의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외에도 의궤도 제작시 필요하였던 판각 작업도 이루어졌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Ⅲ.조선시대 회화사
건국 초부터 도화원(圖畵圓)이 설치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회화미술이 꽃피게 되었다.
사대부와 화원들이 이 시대 회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나무, 산수, 인물, 화초 등 다양한 소재들이 다루어졌으나 감상을 위한 산수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초상화는 동양의 삼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인물의 정확한 묘사와 미묘한 정신 세계의 표출은 괄목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 회화는 화풍의 변천에 따라 초기(1392~약 1550), 중기(약 1550~약
1700), 후기(약 1700~약 1850), 말기(약 1850~1910)로 나누어지는데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1. 초기 - 도화서 출신 화가들의 활동
초기에는 고려시대 회화 및 그 시대에 전래되어 축적되었던 중국 역대의 화풍과 새로이 명으로부터 수용한 화풍등을 토대로 중국이나 일본의 회화와는 다른 양식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화풍상의 특징은 이 시대 작품들의 구도, 공간 개념, 필묵법, 준법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조의 안견(安堅), 사대부화가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세종대왕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며 최대의 중국화 소장자이자
안견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등이 활동하며 서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시기의 그림 중에서도 특히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 한국적인 특색이 진하게 배여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 도원을 여행하고 꿈에 본 바를 안견에 명하여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 4월에 제작한 것으로 조선시대 최대의 걸작이다. 일본 천리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몽유도원도」는 당시의 명사 20명이 찬문(撰文)을 자필로 쓴 작품으로서 시서화(詩書畵)가 함께 어우러져 당시의 문화적 경향과 역량을 드러내는 기념비적 업적이다. 또한 이 작품은 안견파 화풍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몇 개의 산군들이 모여 총체를 이루는 구도, 넓은 공간의 설정,
사선을 이루며 웅장암을 자아내는 구성, 그리고 환상적인 세계의 성공적인 구현등은
다른 나라나 전대의 한국회화와 두드러지게 다른 특색이다.
조선 초기에는 안견뿐만 아니라 사대부 화가로서 명대 절파화풍을 수용하여 대성한
강희안, 인물화의 최대 거장이었던 최경,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타고난 그림 재주 때문에 화원이 되었던 이상좌, 여성으로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여성적인 「초충도(草蟲圖)」를 비롯하여 다방면의 그림을 그렸던 신사임당, 왕손으로서 천진난만한 강아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이암, 「달마도(達磨圖)」를 그린 김명국 등이 관심을 끈다.
2. 중기 -문인화의 쇠퇴와 독자적인 화풍 이룩
조선 중기의 회화 역시 임진왜란, 병자호란등의 대란과 격렬한 당쟁이 계속되던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한편으로는 안견파 화풍, 절파화풍등 조선 초기 이래의 전통을 나름대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모나 화조화(花鳥畵), 묵죽(墨竹), 묵매(墨梅), 묵포도(墨葡萄)등에서 종래에 보기 드물었던
새로운 한국적 특징을 발전시켰다. 김제의「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김명국의「설중귀로도(雪中歸路圖)」, 이 정의 「묵죽도(墨竹圖)」등은 이 시대 회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적 화풍이 더욱 뚜렷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영조와 정조의 재위 연간을 전후하여 꽃피웠던 조선 후기의 회화는 정선에 의해 발전된 진경산수(眞景山水), 김홍도와 신윤복을 중심으로 유행된 풍속화에서 특히 한국적인 특색을 농도 짙게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남종 문인 화풍이 크게 유행하였고 또 청나라를 통해 서양화법이 전래되는 등 전과는 다른 경향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밖에 이 시대에는 서민들 사이에서 민화가 크게 풍미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금강전도」나「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등에서 보듯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있는 산천을 새로운 화풍으로 구사하여 그린 것으로 후대의 화원과 민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정선의 제자였던 심사정은 대담한 필선과 고아한 담채를 혼합한 우수한 기법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러한 정선파의 산수화들은 종전의
산수화와는 현저하게 다르며 또한 우리의 국토에 실재하는 산천을 묘사한 것이기에
특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시대에 두드러졌던 자아의식, 여행 붐, 지도 제작의 활성화등이 복합적으로 자극을 주어 진경산수화가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서민들의 생활의 전경을 주로 해학적으로 묘사한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 또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로 한량과 기녀등 남녀간의 로맨스를 예리하게 파헤친 신윤복은 「미인도」등으로 풍속화에 더욱 한국적인 멋과 특색이 넘쳐 흐른다. 이처럼 한국적인
화풍이 크게 발달하였던 조선 후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면, 추사 김정희와 그를 추종하던 화가들에 의해 남종문인화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고 후기의 토속적인 진경산수나 풍속화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김정희의 제자로서 호남화단의 기초를 다진 소치 허련과 함께 오원
장승업이 배출되어 개성이 강한 화풍을 형성하고 제자들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등을 통해 현대 화단으로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화풍이 중국적 성향을 강하게 띤 점은 아쉽게 생각된다
3.후기-새로운 미술경향, 민화의 등장
조선후기(약 1700년 이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들 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회화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은 사상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였다. 조선 성리학과 실학의 발달은 주체적인 자존의식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가 크게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화원(畵員)과 문인(文人)들은
기존의 중국 산수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재 경관을 대상으로 하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발달시켰으며, 곧이어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풍속화가 순수 감상화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해갔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농업 생산력과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은 회화의 제작 수 요층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 이전까지 회화의 수요층은 주로 왕공 사대부와 문인들로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기존의 양반층 이외에 중인(中人)계층이 경제적으로 부상해 갔으며 서민들 중에서도 농업과 상공업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이들이 서구의 부르조아지처럼 근대사회의 주체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재력 정도에 따라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갔으 며 그에 따라 회화의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순수 감상용 회화보다 장식용 그림을 통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초(年初)에 집안에 붙였던 세화(歲畵)를 비롯하여 요지연도(瑤池宴圖), 문자도, 책거리, 화조도 같은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 그림들이 왕공 사대부가에서부터 일반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발달해갔다. 한양의 광통교(현재 광교 부근)에서는 이들의 매매가 이루어졌으며, 19세기 문헌에는 일반 서민들이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림을 집에 붙인다는 사실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저변으로 확산되어간 장식 그림들은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는 새로운 시각적 통로가 되었다. 왕공사대부가의 장식 그림이 지니고 있던 전형들이 파괴되고 보다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일반 서민들의 미적 취향이 반영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민화란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민간으로 확산되어 갔던 장식그림으로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그림을 가리킨다. 민화는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미숙한 기량이나 끊임없는 모방의 습성으로 인한 '작품의
질적 저하'이며, 다른 하나는 다양한 변형을 통한 '새로운 형식의 창출'이다.
전자는 회화의 수요가 저변화될 때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후자는 봉건사회해체기라는 조선후기의 사회가 지닌 시대적 특수성이다. 민화의 특징은 이 두가지 성격의 충돌과 결합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것은 바로 중국, 혹은 조선의 왕공 사대부가에서 향유되던 장식 그림의 전형이 민화에서 과감하게 변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낡고 고정된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전이되었고, 왕공 사대부나 문인들의 고사(故事)가 담겨있던 그림 속으로 민간 설화나 민간 신앙에 관련된 내용들이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왜곡과 과장, 삽입과 생략에 의한 자유로운 형식 변형을 통해 민화는 당대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과감히 표현해 냈던 것이다. 민화가 조선후기 회화사에서 진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18-19세기의 회화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수묵화의 한계를 극복한 사실적 묘사력과 채색화법의 발전이다. 이시기에 서민층에까지 확산되는 이 생활 장식화에서는 표현형식상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일부 새로이 성장한 중소 부민층이나 일정한 경제력을 지닌 서민 사회에 소비되어 감상되었을 장식 그림은 사대부와 부민층에 수용된 회화 내용을 따르고 있으나 형식은 사실주의적 수법을 무시한 파격미를 보여준다.
세화나 민화를 그린 사람들은 양반 화가가 아니라 신분이 낮은 계층 출신이 많았던 화원이라든가 그 낙오자 또는 무명의 화가들이었다.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닌 일상 공간을
장식하는 실용성이 많은 생활화를 양반 화가들이 그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특히 민화는 그림의 크기, 화폭의 모양 모두 제멋대로이다. 장지에도 그리고 창호지에도 그렸다. 중국에서 온 화선지로부터 양지로 불리는 크라프트지, 모조지, 삼베, 모시,
양사, 비단, 광목, 나무 판자 닥치는 대로 그렸고 바탕도 가지각색으로 물들여 바탕색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았다. 은물감, 금물감으로 그리기 위해 마련한 붉은 색, 검정색,
청색, 남색, 녹색, 황색의 비단 또는 삼베로도 바탕을 만들었다. 정통화나 원화, 불화처럼 특수하게 처리된 광물성의 물감들로부터 화공들이 손수 만든 것으로 보이는 식물성 물감, 서양화에서 사용되는 유화용 물감, 그리고 페인트로 그린 그림까지 있다.
붓으로도 그렸으나 손가락으로도 그리고, 가죽붓, 버드나무 가지, 불에 달군 인두 등
멋대로 그렸다. 즉 재료나 소재 표현 방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였으며
또한 그처럼 많은 민화를 제작하였어도 절대로 똑같은 2개를 만들지 않았다. 그만큼
자유로왔던 것이다.
Ⅳ. 끝마치면서
이와같이 조선초기 중국화풍의 영향을 받던 조선의 미술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고 자기 나름의 세계관과 가치를 지녔던 것으로 보여진다. 진경산수화의 정선에서 이름모를 조선 후기의 민화들에서 보여지는 소박하고 파격적인 그림은 조선조의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평민들의 욕구가 분출되기 시작하던 시대적인 정신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출처 : http://cafe.daum.net/hankook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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