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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羅州市(나주) 스크랩 제13회 목사고을 나주 전국국악경연대회
天風道人(羅州) 추천 0 조회 111 09.12.18 23: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국창(國唱)  김창환 선생의 소리얼 잇는

 

제13회 목사고을 나주 전국국악경연대회 '지화자~'

  

올해로 열 세돌을 맞은 목사고을 나주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지난 15일과 16일 이틀 동안 나주시민회관에서 펼쳐졌다.

 

나주시가 주최하고 한국국악협회 나주시지부(지부장 이한규)가 주최한 이번 대회는 판소리부문과 고법부문으로 나뉘어 치러진 가운데 전국에서 명창, 명고수를 꿈꾸는 소리꾼과 북꾼 126명이 참가했다.

 

이틀동안 펼쳐진 열전 끝에 종합대상인 국무총리상의 영예는 판소리 명창부문으로 참가한 윤화자 씨에게 돌아갔다.

 

아울러 문화관광체육부장관상은 판소리 일반부 대상인 김혜지 씨가 차지했다.

 

 

  ◇ 판소리 명창부 윤화자 씨와 지정고수 김형석 씨

 

목사고을 전국국악경연대회 ‘지화자~’

 

종합대상(국무총리상) 판소리 명창부 윤화자 씨

국창 김창환·정광수 소리얼 잇는 노력 보완돼야


올해로 열세 돌을 맞은 목사고을 나주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지난 15일과 16일 이틀 동안 나주시민회관에서 펼쳐졌다.

나주시가 주최하고 한국국악협회 나주시지부(지부장 이한규)가 주관한 이번 대회는 판소리부문과 고법부문으로 나뉘어 치러진 가운데 전국에서 명창, 명고수를 꿈꾸는 소리꾼과 북꾼 126명이 참가했다.

 

이틀 동안 펼쳐진 열전 끝에 종합대상인 국무총리상의 영예는 판소리 명창부문으로 참가한 윤화자(60·전주)씨에게 돌아갔다.

아울러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은 판소리 일반부 대상인 김혜지(21·목포)씨가 차지했다. 나주에서는 판소리 노인부에 참가한 김용례(80·동강면)씨가 우수상을 받았다.

 

고법부문에서는 명고부 김준영 씨, 일반부 양미선 씨. 노인부 양재현 씨, 신인부 양설화 씨가 각각 대상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 심사는 판소리부문(심사위원장 송순섭)과 고법부문(심사위원장 정홍수)으로 나뉘어 이뤄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인 송순섭 명창(광주시립국극단장)은 “전국적으로 판소리, 고법대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태에서 나주가 13회 대회를 개최한 것은 대단한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송 명창은 나주가 서편제의 비조(鼻祖) 박유전 선생으로부터 직접 소리를 전수받은 정창업, 김창환, 정광수로 이어지는 걸출한 소리꾼을 배출한 소리의 고장이면서도 그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안타까워했다.

 

송 명창은 “나주는 국창 김창환, 정광수 명창의 고향으로서 소리꾼들에게는 전설과 같은 소리의 고장인데 이를 대회와 연계시켜 발전시킨다면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독보적인 대회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대회를 주관한 나주시국악협회 이한규 지부장도 “상금을 놓고 비교할 때 나주와 비슷한 다른 지역의 경우 종합대상이 천만 원이 넘는데 비해 나주는 고작 3백만 원에 지나지 않아 여기에서부터 참가자들의 관심도가 차이가 난다”고 아쉬워했다.

 

이 지부장은 “정광수 명창이 생존해 계실 당시 여러 번 찾아뵙고 지역에서 의미있는 사업을 추진해보려고 했으나 여건이 안 돼 못했던 부분이 아쉽다”고 밝히며 “앞으로 나주국악대회가 이같은 명인명창, 12발 상모로 유명했던 이주완 선생의 고향이라는 점을 문화적인 에너지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한편, 국악계 안팎에서는 지난 2003년도에 타계한 고(故) 정광수 명창의 탄신 100주년인 올해 이에 따른 기념사업 하나 없이 넘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창 정창업의 친손자인 정 명창은 나주시 공산면 복용리 출신으로 김창환 국창에게 소리를 전수받아 64년 판소리계 최초로 인간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 보유자)로 지정된 판소리계의 거목이다.

 

이런 가운데 오는 28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정옥향 명창이 스승에게 헌정하는 ‘정광수제 수궁가’ 완창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심사위원들

                                               

국창 송순섭 선생이 판소리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인 송순섭 선생은

사)동편제판소리보존회 이사장, 광주광역시 시립국극단 단장,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를 출강하고 있으며, 지난 6일 제19회 동리대상을 수상했다.

송순섭 명창은 1936년생으로 전남 고흥군 점암면 신안리에서 태어났으며, 1957년부터 스승 박봉술에게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를 사사받았으며 현재 동편제(東便制) 판소리 유파 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1994년 6월 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며, 1999년 KBS 국악대상 판소리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송순섭 선생은 나주가 김창환, 정광수로 이어지는 걸출한 소리꾼을 배출한 소리의 고장이면서도 그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안타까워 했다.

 

무엇보다 지역민들의 관심과 욕심이 미흡하다는 게 나주가 소리의 고장으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는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나주와 같은 해에 시작된 고흥 국악대회의 경우 국무총리상의 상금이 천5백만원인데 비해 나주는 고작 3백만원이라는 점에서도 나주대회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초등부 대상 조신현(10,목포동초등)군

 

나주국악협회 이한규 회장

 

시상식을 위해 나주시 이영기 자치행정국장, 서상락 나주교육장,

김진호 나주예총회장, 이한규 나주국악협회장이 단상 위에(왼쪽부터)

 

 

 

 

 

 

서상락 나주교육장에게 대상 상장을 받는 조신현 군<좌>

제2의 유태평양이 기대되다.

중등부 대상 허수현 양<우>

 

 

 

판소리 고등부 대상 서설희 양<좌>

판소리 신인부 대상 서소희 양<우>

 

 

   

 

 

수상자 이름과 얼굴이 기억 속에서 뒤죽박죽

확인하는대로 올리겠습니다^.^ 

 

 

 

 

 

 

◇ 종합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은 판소리 명창부 윤화자 씨 

 

제13회 목사고을 나주 전국국악경연대회 수상자 명단


<판소리부문 수상자 명단>

초등부

대 상

조 신 현

  최우수상

선 지 향

  우수상

김 성 욱

  장려상

정 가 영

    장려상

박 지 연

중등부

대 상

허 수 현

최우수상

박 심 준

 우수상

정 진 성

장려상

김 향 희

고등부

대 상

서 설 희

최우수상

박 혜 정

우수상

임 주 연

신인부

대 상

서 소 희

 최우수상

조 윤 지

 우수상

정 일 랑

 장려상

김 맹 자

장려상

김 애 경

노인부

 대 상

장 풍 장

최우수상  

이 상 희

우수상

김 용 례

장려상

전 기 득

장려상

홍 옥 식

일반부

 대 상

김 혜 지

 최우수상 

류 민 희

 우수상

박 명 언

장려상

강 만 복

장려상

강 희 선

명창부

 대 상

윤 화 자

최우수상 

박 행 님

우수상

박 미 선

장려상

임 봉 금

 

  

<고수부문 수상자 명단>

신인부

 대 상

양 설 화

최우수상 

전 성 환

우수상

윤 영 민

  장려상

김 바 다

장려상

오 민 혁

노인부

 대 상

양 재 현

일반부

 대 상

양 미 선

최우수상    

김 고 을

우수상

허 덕 자

장려상

이 재 권

장려상

조 금 자

명고부

 대 상

김 준 영

최우수상 

함 재 권

우수상

손 주 현

장려상 

최 경 렬

 

 

나주소리의 뿌리 국창 김창환 선생과 판소리 명창 정광수 선생 연대기


  

나의 스승, 국창 김창환 선생님

(증언/정광수, 대담 및 정리/노재명)


나 정광수(丁珖秀)는 1909년 7월 28일(己酉生) 전남 나주군 공산면 복용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용훈(榕薰)이고 아호는 영암이다. 본적은 광주시 서구 사동 136번지이다. 현재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76번지 49호 4층 판소리 전수소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살고 있다.

  

서편제의 대가 정창업(丁昌業) 명창은 나의 조부이다. 정창업 명창은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나의 부친은 둘째 아들이다. 나의 부친은 국악을 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성함을 밝히고 싶지 않다. 나는 3형제 가운데 막내 아들이다.

  

정창업 명창은 고종 때 오위장 벼슬을 하셨다. 나의 큰아버지인 정학진(丁學鎭)씨 아들이 정창업 명창의 광무(光武, 1897~1909) 때 교지 5장을 현재 보관하고 있다. 정창업 명창은 김창환(金昌煥), 정정렬(丁貞烈)과 같은 명창들을 길러내셨다.

  

나는 조부 되시는 정창업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지 못했다. 내 나이 10세 무렵에 조부께서 작고하셨기 때문이다. 조부 정창업 명창은 70대 초반에 작고하셨다.

  

나는 9세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17세부터 22세까지 전남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 김창환 선생님 댁에서 판소리를 공부했다.

  

당시 김창환 선생님은 너무 연로하셔서 선생님에게는 많이 배우지 못했고 그 분 아들인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주로 배웠다. 사설을 먼저 외우고 나서 수업을 받았다. 선생님이 북으로 장단을 치며 가르쳐 주시면 따라 부르는 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졌다.

  

김봉학 명창은 그 부친 김창환 선생님 밑에서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고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서 원각사, 단성사 등에서 공연을 했으며 나라에서 주사 벼슬을 하사 받았다. 김봉학 명창은 나보다 26세 연상(甲申生)이다. 김봉학 명창의 부인은 남편과 동갑이라 사이좋게 산다며 자랑하곤 했다.

  

나는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춘향가는 2년 동안 초입부터 <어사 출도>까지, 흥보가는 1년 동안 전바탕을 배웠고 심청가는 1년 좀 못되는 기간 동안 초입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까지 배웠다. 학습 도중에 김봉학 명창이 타계했기 때문에 그 이상은 배우지 못했다. 김봉학 명창도 그 부친 되는 김창환 선생님에게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배우지는 못했다.

  

내가 김봉학 명창 문하에 처음 들어갔을 때 오수암(吳壽岩)씨, 성원목(成元睦)씨가 이미 김봉학 명창 밑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었다.

  

오수암씨는 사람들이 흔히 ‘오수바우’라 했으며 나보다 한 살 위였고(1908년 출생) 나주 반남면에서 태어났다. 오수암씨는 미남이었고 소리를 잘 했다. 큰 목은 아니었지만 구성지고 고운 소리로 관중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30대에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최막동씨가 한때 오수암씨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바 있다.

  

성창순씨의 부친 성원목씨는 전남 화순 동북 태생이며 나보다 7~8년 가량 선배이며 나보다 몇 달 먼저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성원목씨는 성음이 좋았고 춘향가를 잘했으나 나중에 목이 상해서 대성하지 못했다. 목이 나빠진 후에는 광주권번에서 소리 선생을 했고 창극단에서도 활동했다.

  

당시 강남중(姜南中)씨는 김창환 선생님 문하에서 흥보가를 배웠는데 <중타령>에서 ‘호호’ 하는 성음을 제대로 못내서 김창환 선생님으로부터 “저리 가버려” 하고 꾸중을 들은 바 있다.

  

내가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배우기 전에 이미 박지홍(朴枝洪)씨, 임옥돌(林玉乭)씨는 김창환 선생님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박지홍씨는 붓글씨를 잘 했는데 김봉학의 필체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했다.

  

임옥돌씨는 장성 사람으로서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잠깐 토막소리를 배웠다. 당시 임기창이라는 20세 가량 된 젊은 사람은 내가 김봉학 명창 문하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미 춘향가를 다 배운 상태였으나 그후 아깝게 요절했다.

  

김창환 선생님은 슬하에 4남 1~2녀를 두었다. 아들 이름은 차례로 봉이(鳳伊), 봉학(鳳鶴), 봉식(鳳植), 봉도(鳳道)이며 딸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들 4명 모두 각복(各腹)이다.

  

장남 봉이씨의 소리는 사람 소리가 아니라 귀신 소리다. 성음에 힘이 있고 소리를 기가 막히게 했으나 그 부친 김창환 선생님은 봉이씨가 서자라 하여 “배에 붙일 소리 등에 붙인다” 하면서 구박했고 봉학씨는 차남이지만 적자라고 무척 아꼈다. 봉이씨는 그 부친인 김창환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소리를 배웠다.

  

봉식씨, 봉도씨는 국악을 하지 않았다. 봉학씨는 약 50세에 아편으로 세상을 떠났다. 봉이씨는 봉학씨가 작고한 후 얼마 안돼서 뒤따라 타계했다. 봉이씨, 봉학씨 모두 그 부친 김창환 선생님보다 앞서 작고했다. 김창환 선생님은 두 아들이 죽은 지 약 6년 후에 타계했다.

  

김봉학 명창은 명필이었다. 그 분이 춘향가 사설을 구식 궁체로 깨알같이 적어서 나에게 주었다. 나중에 임방울(林芳蔚)씨가 나에게서 그 소리책을 빌려 본 적이 있다. 얼마 뒤 그 소리책을 되돌려 받아 보관하던 중 나의 안사람이 모르고 그 책으로 도배하여 소실되었다.

  

임방울씨는 박영감이라 불리는 박재현(朴在賢)씨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다. 박재현씨는 북을 잘 쳤는데 어디서 전문적으로 소리를 배운 것은 아니고 명창들의 소리를 많이 들어서 자작으로 불렀다.

  

임방울씨는 나에게서 빌려 간 춘향가 창본에서 <쑥대머리> 사설을 따서 작곡하여 불렀다. 임방울씨는 유성기음반에 <쑥대머리>를 취입하여 유명해진 후 유성준(劉成俊)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서 판소리를 배웠다.

  

유성준 선생님과 비슷한 연배인 이선유(李善有) 명창은 본 적이 없다. 일제 때 『오가전집』이라는 소리책을 냈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 분은 제자가 거의 없었다. 이선유 명창의 수궁가에는 <새타령>이 있다고 하는데 유성준 선생님의 수궁가에는 그런 대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명창이 수궁가에서 <새타령>을 부르는 것 또한 본 적이 없다.

  

나는 22세 때 김봉학 명창의 문하에서 나와 목포권번에서 약 2년 동안 소리 선생을 했다. 목포권번은 본래 목포여기조합이었다. 여기조합 시절에 그 곳에 전군옥 명창이 소리 선생으로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소리를 잘했다.

  

나는 목포권번에서 막 나왔을 때 당시 장흥 유지였던 김명식 참사가 장흥군 부동면 보림사 위에 삼성암을 지었는데 내게 방 하나를 내주어 그 곳에서 2년 동안 독공을 했다. 독공 후에는 순천권번에서 약 2년 동안 소리 선생을 했다. 그 때 유성준 선생님이 순천군수 관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김연수(金演洙)씨가 소리를 배우면서 장단이 틀리다고 따지자 유성준 선생님이 화가 나서 그 곳을 떠났고 그래서 나는 그 분께 배울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 이듬해 정월 나는 진주권번에 소리 선생으로 초빙된 유성준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서 전세방을 얻어 살면서 약 1년 동안 동편제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유성준 선생님 문하에서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유지 서채호씨의 후원으로 전남 벌교 부용사에서 약 6개월 동안 독공을 했다. 그 뒤에 나는 정응민 명창 문하에 들어가서 심청가를 배웠다. 정응민 선생은 나보다 11살 연상이다.

  

나는 20대에 빅타 음반회사에서 나의 첫 음반을 취입했다. 나는 당시 장흥에 있는 삼성암에서 판소리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빅타 회사로부터 음반 취입 제의를 받고 서울로 갔다. 서울로 가는 길에 충청도에 있는 현암사에서 김연수씨를 만나 함께 음반을 취입하러 빅타 회사로 갔다.

  

빅타 회사에서는 나, 김연수씨, 김옥련씨에게 8장의 유성기음반에 입체창으로 수궁가를 취입해 달라고 하였다. 김연수씨는 8장에 수궁가를 담아내기가 힘들다며 거절하였고 그래서 입체창 수궁가 취입은 무산되었다. 빅타 회사에서는 내게 서울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 독집 음반이라도 취입하고 가라 하여 유성기음반 한 장을 취입했다. 김옥련씨는 김연수 명창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운 사람이다.

  

내가 빅타에서 취입한 것은 적벽가 중 <새타령>과 <오림 자룡 출현>이다.(Victor KJ-1351-A·B 赤壁歌 烏林에子龍나오는데上·下 丁珖秀 鼓韓成俊) 북반주는 한성준 선생님이 맡았다.

  

녹음한 곳은 서울에 있던 빅타 음반회사의 녹음실이었다. 난생 처음 음반을 취입하다 보니 긴장하여 <새타령> 끝부분을 부르다가 사설을 더듬어서 <새타령>을 다시 취입하였다. 한성준 선생님은 처음 취입된 <새타령>이 좋았는데 아깝게 됐다고 하였다.

  

빅타 회사에서 취입한 나의 첫 독집 음반은 소리가 설익어서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러웠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할 당시 빅타 문예부장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유 부장’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취입한 적벽가는 유성준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다. 나는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하고 다시 장흥으로 가서 판소리 공부에 주력했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하긴 했지만 음반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못보았다.

  

동편제 적벽가에는 <삼고초려>가 없다. 그래서 나는 30세 무렵에 강장원(姜章沅)씨와 함께 경기도 포천에 있는 장대감의 재각에서 여름 한 철 동안 이동백(李東伯) 선생님을 모시고 <삼고초려> 등을 배웠다. 강장원씨는 나와 동갑이라 친하게 지냈으며 목이 좋았고 소리를 잘했다.

  

나는 30대 초반에 라디오에 출연하여 유성준 선생님 문하에서 배운 수궁가와 이동백 선생님 문하에서 배운 <삼고초려>를 방송한 바 있다. 그리고 나는 30대 초반에 동일창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 창극단에는 임방울, 강남중, 조상선, 김준섭, 박초월, 한애순, 강남월, 임준옥씨 등이 있었다. 나는 광복 때까지 이 단체에서 활동했다.

  

일제 때 활동한 국악인 가운데 김종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두 명이 있는데 한 사람은 1910년 무렵에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가야금산조, 병창 명인이고 또 한 사람은 김수악의 숙부로서 전북에서 태어난 거문고산조, 가야금산조 명인이다.

  

광복 후 나는 광주로 가서 판소리 학원을 내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국악 동인 30여명과 함께 광주국악원을 만들어 그 곳에서 판소리를 가르쳤다. 그 후에는 민속예술학원, 삼남국악원을 차려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64년에 나는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처음에는 춘향가로, 현재는 수궁가로 지정되어 있다. 1986년에 나는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한 바 있다.

  

내가 가르친 제자로는 안숙선, 김영자, 윤충일, 정순임, 정춘실, 정옥향, 김성권, 방성춘, 신영자, 박홍출, 송갑철, 김종만, 임향림, 안은정, 조진경, 최해윤, 박정자, 정미옥, 한송희 등이 있다. 나의 둘째딸 의진이는 예전에 나와 박록주씨에게서 판소리를 배웠으나 지금은 평범한 가정 주부로 지내고 있다.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소리를 되도록 고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부르려고 노력한다. 제자들에게도 그 점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나는 수궁가 전바탕을 두 차례 녹음하여 음반으로 낸 일이 있고(문화재관리국, 뿌리깊은나무) 적벽가는 빅타 유성기음반에 취입한 <새타령>과 <오림 자룡 출현> 외에도 릴 테입에 전바탕을 녹음한 바 있으며(1978년 11월, 문예진흥원 AT-0874) 심청가와 흥보가는 거의 녹음한 바 없다. 앞으로 나는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를 음반에 남기고 싶다. 특히 김창환 선생님 제인 춘향가와 흥보가를 음반에 넣어 보존하고 싶다.

  

노재명(盧載明)씨가 나의 이런 사정에 대해 쓴 글을 읽은 바 있다.(“판소리 5명창과 다섯 바탕 눈대목”『월간 클래식피플 1995년 12월호』 116~123쪽)

  

내가 보유한 김창환 선생님 제 춘향가와 흥보가가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흔적 조차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글을 읽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앞으로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유성준 선생님 제 수궁가뿐 아니라 김창환 선생님 제 춘향가와 흥보가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녹음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1995년 12월 13일 서울두레극장에서 한승호, 한애순, 박동진씨와 함께 공연할 때도 나는 김창환 선생님 제 흥보가를 부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창환 선생님의 소리는 법도가 엄중하고 통이 큰 데가 있다. 특히 우조, 엄성에 그 분의 엄격하고 무서운 면이 있다. 김창환 선생님의 춘향가에서 <긴 사랑가>는 ‘만첩청산’으로 시작되는데 ‘어헝’ 하는 호랑이 성음이 매우 특이하고 좋다. <이별가>에서는 경드름이 약간 쓰인다. 김창환 선생님의 춘향가에는 <돈타령>이 없다. <과거장>은 자진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짜여져 있다. <박석티>는 진양조 장단에 반드시 우조로 불러야 한다. ‘흑운 박차고’ 하는 흥보 <제비 노정기>를 혹 중중모리로 부르는 사람이 있으나 김창환 선생님은 반드시 자진모리로 불렀다. <박타령>에서는 흥보 마누라가 좋아하는 발림이 재미있으면서도 멋이 있다. 예전에 그 대목에서 김창환 선생님의 발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일제 때 무대에서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부르는데 ‘만리 조선국을 나가는데’라고 했다가 경찰서에 끌려 가서 죽다 살아났다. 나는 그런 시절 속에서도 선생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소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려 노력했다. 어렵게 공부하고 힘겹게 소리를 지켜 나갔던 그 때를 회상하며 나는 이런 글을 지었다.

  

“찬 눈 속에 한고를 견디고 이기어 지나온 매화 향기는 절개가 특이하다.”(雪後梅花節特長, 1976년 정광수 명창이 지은 한시 중에서)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0325

1995년 9월 14일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정광수 명창의 모습. 노재명 촬영.

 

 

판소리 첫 인간문화재 정광수씨 별세

동편제 고봉 ‘하늘무대로 떠나다’

 
판소리계의 최고 어른으로 존경받았던 동편제의 큰 봉우리 정광수씨가 2003년 11월 2일 밤 11시25분 노환으로 필동 중앙대 부속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4.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인 정씨는 1909년 전남 나주 공산면 복용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조부가 국창 정창업이었다. 그는 열여섯살 무렵 대명창 김창환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20살에는 집을 떠나 전라도 장흥과 순천, 남원을 돌며 소리를 익혔다.
특히 28살에는 순천에서 동편제의 명창 유성준을 만난 뒤, 진주 함양을 돌며 그에게서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그가 익혔던 동편제는 섬진강을 기준해서 동쪽 지역의 소리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소리를 목으로 모아서 내기 때문에 풍부한 성량을 필요로 한다. 그는 이후 정응민한테 <심청가>를, 이동백한테 <적벽가> 중 삼고초려 대목을 배웠다.
일제 시기 대동가극단과 동일창극단에서 창극 운동에 참여한 그는 해방 이후 광주에 거주하면서 삼남국악원 등을 창설해 제자 양성에 주력했으며 1964년 <춘향가>로 첫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됐다. 8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았고 86년에는 판소리 다섯 바탕의 이론과 실제를 담은 <전통문화 오가사집>이란 책도 펴냈다.
나이 들어서도 무대를 고집했던 그는 여든살 때 창극 <홍범도 장군>에서 소리를 했고, 여든둘에는 <수궁가> 완창 음반을 냈다. 지난해에는 명창 안숙선씨 등이 이사로 참여해, 그의 아호를 딴 ‘양암 원형 판소리 보존 연구원’을 만들었다.
지난달 29일에도 공연이 예정됐으나 건강악화로 딸인 정의진씨가 대신 무대에 올랐다. 평생 판소리 다섯마당을 불러 온 그에게 판소리는 사서삼경이나 윤리 교과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형제의 우의와 화목(흥보가), 붕우유신(적벽가), 효(심청가), 충과 신의(수궁가), 열녀(춘향가)의 정신을 판소리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큰 자부심이었다. 변강쇠타령이나 꿩타령 같은 노래에 손을 저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또 판소리의 ‘판’이 도박판이나 노름판을 떠오르게 한다면서 판소리 대신 ‘창’이나 ‘창악’이란 단어를 쓰자고 주장했다. 그의 제자이자 국립창극단 단원인 박성환씨는 “선생님은 조선후기 5명창한테 직접 판소리를 전수받은 유일한 생존 국악인이었다”면서 “전통적인 판소리의 어법을 그대로 보유한 데다 굉장히 웅장하고 통이 큰 소리를 구사해 판소리계의 마지막 남은 거목으로 추앙받았다”고 회고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은석씨 등 1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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