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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정리 : 새하
일제 패망 할 무렵, 여운형 등 선각자들은 ‘건국 동맹’을 조직한다.
건국동맹은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했고 곧이어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꾼다.
인민위원회는 대다수의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때문에 일제 패망과 동시에 한반도를 통치하러 온 미군정에게 탄압을 받는다.
또 미군정은 통치를 효율적으로 한다는 명분아래, 과거 일제 때 통치기관에서 일했던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다. 그래서 여전히 일제고문경찰이 해방조국의 경찰이 되었고, 공출을 독려했던 총독부 직원이 면직원이 되는 상황을 보게 된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보다 결속력이 강했다.
타 지역에 비해 친일세력이 약했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고행으로 돌아와 대부분 인민위원회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작농이 80% 이상으로 계급대립은 크지 않았기에 촌락공동체가 강한 제주도에 깊이 뿌리내린 자치조직이 될 수 있었다.
해방 후 20만 남짓이었던 제주도에서 6만인구가 갑자기 불어난다. 돈을 벌러 일본으로 건너갔던 갔던 사람들이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로 인해 심각한 일자리 부족이 뒤따르게 된다.
또한 미군정으로 인해 귀국할 때 일본에서 번 돈을 거의 가지고 오지 못하게 되고, 생활필수품도 더 이상 일본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되니 제주의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게다가 1946년 여름에 제주 콜레라 발생, 가뭄에 따른 흉년이 겹쳐 부족해진 식량, 관리들의 부정부패 등 제주 사람의 삶은 힘들어 진다.
1947년 3월 1일 흔히 제주 4.3사건의 도화선이라 부르는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난다.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외세 간섭 없이, 분열됨 없이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로 독립건국 하자는 뜻을 외친다.
해방이 되어도 좋은 세상이 오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외세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회가 끝난 뒤, 기미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발굽에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가는 기마대를 향해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한다.
이때 총성이 울리며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한다.
사람들은 전혀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사망자 대부분이 등에 총을 맞았기에 이 발포는 분명 과잉대응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끝까지 과잉대응이라 우기며 1947년 3월 10일에 시작하여 22일에는 제주도 전체의 총파업이 이어지자, 더 나아가 3.1절 집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이후 미군정의 지시를 받아 북을 고향으로 둔 ‘서북청년회’가 대거 들어오기 시작한다.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 토지 개혁과 청일청산 등 정치적인 변화에 내몰려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런 급료도 없이 제주도로 내려왔으니 그들은 생존을 위해 제주도민을 약탈 할 수밖에 없었기에 제주도민심은 더욱 더 흉흉해져 간다.
남쪽만의 단독 선거인 5.10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시점에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가습격당하고 14명이 사망한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고 선언했던 이들. 그들의 대의명분은 ‘서북청년단의 폭력을 막고, 남쪽만의 단독 선거로 인해 한반도가 둘로 쪼개지면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을 막는 것이었다.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은 성공적으로 4.3 평화 협상을 끝내게 된다.
72시간 동안 전투 중지와 검진적 무장해제 그리고 무장대에 대한 사실상의 신변보당이 합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협상을 깨는 방해공작이 5월 1일부터 시작된다.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에 무장대를 가장한 괴청년들이 몰려와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운 것.
미군정은 이 장면을 촬영했고 그 필름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선전용 기록영화가 되는 동시에 평화협상을 깨뜨리려는 술책이 된다.
그리고 평화 협정을 믿고 산에서 내려오던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 역시 미군정의 계산된 행동이었다.
5월 10일 3/8도선 남쪽의 한반도에서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치러진다.
하지만 남쪽만의 선거는 한반도 전체 정치 상황으로 볼 때 전쟁위험성이 있어 긍정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선거를 반대하고 거부한다.
이때 백범 김구 선생은 ‘38도 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분단 정부 수립하는 것에 협력할 수 없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제주도도 역시 5월 10일 선거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3명의 국회의원을 뽑는데 단지 1명만 뽑혔을 만큼 제주도 사람들은 깨어있는 이들이었다.
제주에서는 제헌의원을 뽑는 선거가 무산되었지만 한반도에서는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선거가 치러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탄생한다.
그러자 북쪽에서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를 수립한 후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하루빨리 제거하려고 했다.
남쪽만의 선거 반대를 외쳤던 제주도가 이승만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새 정부를 수립하는 유엔의 절차가 그해 12월에 예정되어 있어 그 승인을 위해 어떻게든 12월 이전에 국내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조금함도 있었다.
1948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떠나기로 예정되었던 미군정도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군대 철수 이전에 한반도 상황을 정리하려했고, 그들이 선택한건 평화가 아니라 완전 섬멸이었다.
1948년 10월 17일부터 ‘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겠다’라는 포고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강력 토벌이 시작된다.
이것은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발표이며, 적국과의 전쟁 중에서도 포로와 일반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전투행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는 자는 보호를 받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며, 인도적인 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규정한 제네바 협약에도 위반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군경이 파악했던 무장대는 불과 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무려 3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 과정에서 온갖 잔인한 행위들이 동원되었고 더불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무절제한 약탈을 했다
제주도에 가면 어느 지역,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4.3에 대한 얘기가 다르다고 한다.
당시 미군정과 서북청년회의 횡포,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인한 분단에 반대했다는 점에서는 당연한 항쟁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면 경찰가족이나 군인가족, 또는 시국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생업에 바빴던 사람들이 피해를 받고 가족이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게 4.3의 이름을 쉽게 정할 수 없는 이유다.
4.3은 10년 전쟁이었다 할 정도로 4.3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 많은 이들이 ‘예비 검속’을 통해 죽어나갔다.
오랜 기간 동안 제주4.3사건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사건이었지만, 1989년 4월 3일 제주시민회관에서 공개적으로 41주기 4.3추모제 행사를 처음 가지게 된다.
또 나아가 2003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된다.
나무날
북촌마을 너븐숭이 4.3기념관
북촌리는 4.3당시 450여명의 주민이 학살된 제주도에서 가장 피해가 큰 마을이었다.
북촌 마을 너븐숭이 우물
4.3때 학살되었던 이들은 우물에서 물 떠 먹고, 물터에서 목욕하고 빨래 하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순이 삼촌 문학 기념비
제주 4.3 배경인 소설 순이삼촌.
작가 헌기영은 단순히 책을 써낸 것이 아니라
4.3사건을 잊으라는 국가폭력 속에서 용기 있게 대항한 것 같았다.
애기무덤
마을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 살아있는 게 미안해서 이 무덤들을 보지 않는 다는 얘기가 안타까웠다.
어떻게 살아있는 게 미안하다는 이유가 된 걸까.
쇠날
헛묘
4.3희생자 중에는 바다에 던져 죽이는 수장처럼 흔적을 없애버린 경우도 있고,
시신 수습을 못해 그대로 방치되어 훼손된 경우도 많았기에
이 봉분 안에는 망자가 입었던 옷가지밖에 없다.
사라진 마을 무등이 왓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큰넓궤
크고 넓은 굴이라는 뜻으로 4.3 당시 최대 120명이 2개월 동안 은신생활을 했던 장소.
섯알오름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게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던 장소.
알뜨르비행장
백조일손지지묘(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 묻힌 무덤)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시신들이 이 무덤의 주인들이다.
학살당시 군에서 수습을 금지했기에 사건 발생 5년 9개월 만에 겨우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6년 가까이 되는 시간은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없어
정상적인 무덤 조성을 불가능하게 했기에 공동묘역으로 만들었다.
흙날
한라산
토벌대를 피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쳐 올 수 밖에 없었고,
산에서 싸울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산행 시작했다.
열심히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기도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힘들다는 마음뿐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라산에서 백록담 보기 어렵다는데, 날씨도 맑아 정상에서 백록담을 잘 볼 수 있어 좋았다.
4.3 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
눈앞에 펼쳐진 표석을 보며, 이렇겐 많을거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날 기도회와 함께 내린 비는 어쩌면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달날
강정마을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을 만났다.
신부님께서는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생각이 나온다고 하셨고 자신은 이제 건강하지 못하다고 하셨지만
글쎄, 내가 본 신부님의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젊고 건강하고 열정적이셨다.
그리고 신부님을 통해 열정과 나이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불날
제주 4.3 평화 기념관
시간이 없어 아주 잠깐 둘러본 게 아쉬울 정도로 기념관은 많은걸 담고 있었다.
4.3의 기록, 4.3의 배경과 역사, 관련 예술작품들 보며
제주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정리가 된 것 같다.
눈으로 대략 훑은 오늘과 다르게, 기회가 된다면 한번 더 와서 꼭 꼼꼼히 보고 싶다.
제주 4.3 후기 _새하
‘4.3이란 제주에서 여러 사람이 죽었던 사건’이라 가볍게 알고 한번도 깊게 알아보지 않았던 나에게 이번 제주 기도 순례에서 참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4.3에 대해 배우며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간 유태인들의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데…… 같은 나라 사람인 내가 제주에서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이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싶었다.
또 제주 4.3사건을 알리려는 이들이 예상보다 많아서, 4.3의 흔적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그동안 제주도를 여행하기 좋은 곳으로만 알고 무관심했던 나의 모습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료집을 통해 알았던 4.3과 현장에서 직접 겪은 이들을 통해 마주한 4.3은 너무 달랐다.
책을 통해 읽었던 4.3은 단순히 글자 속에 역사였다면 직접 마주한 4.3은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끔찍한 학살이며 동시에 지금도 남아있는 상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북촌 너븐숭이 우물과, 사라진 무등이왓 마을에 대나무가 자란 빈 집터처럼. 그런 삶의 흔적을 보니 희생된 사람들 모두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이들이라 외치는 것 같아 더 안타까웠다.
그리고 단순히 제주도민이란 이유로 또 자기 신념을 지키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그렇게 깨어있다는 이유로 당한 폭력이 얼마나 무자비 했는지 생생하게 마주 할 수 있어 슬프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던 마을 뺏겨야 했던 그 아픔을 가슴에 묻고 지냈던 이들.
그걸로 모자라 그냥 잊으라는 국가의 폭력을 아무 말도 못하고 듣고 있어야 했던 이들,
지금도 그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모두 잊지 말고 싶다.
기도 순례 일정의 반은 4.3을 공부했다면 나머지 반절의 하루는 한라산 등반을 했다.
굉장히 어렸을 때 진달래대피소까지만 올랐던 이후로는 한라산은 처음이었다.
또 예전에 올랐을 때 내린 폭설과 추위로 한라산은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었기에 걱정이 됐다.
뿐만 아니라 여태 올랐던 산행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체했어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 보단 온통 ‘체하면 안 돼!’ ‘여기서 아프면 안 돼!’ 하는 걱정과 긴장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버렸다.
그렇게 온통 부담을 잔뜩 짊어지고 시작한 산행이었지만 늘 힘들어하며 일행에서 뒤쳐졌던 내가 선두로 쭉쭉 산에 올랐고,(옆에서 나를 보고 인간승리라 했을 정도였다!)
구름하나 없이 맑은 날이어서 백록담도 실컷 볼 수 있었고, 또 따듯한 햇살 덕에 산에서 밥을 먹어도 체하지 않았던 경험을 오랜만에 할 수 있었다.
내려올 때 돌이 너무 많아 발이 좀 아팠지만, 몸 상태도 처음부터 끝까지 좋았고, 밥도 맛있게 먹었고, 오르기도 열심히 올랐던 정말이지 완벽한 산행이 된 것 같다!
한라산 다음날에는 기도회를 했다.
그날 오후부터 내리는 비와 바람에 야외에서 한 기도회가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 덕에 무지개를 볼 수 있어 좋았다.(비록 우리가 섰던 자리에서는 안 보이는 방향에 떠서 아쉬웠지만.)
그리고 돌이켜보면, 다들 말했던 것처럼 그날 내린 비는 정말 희생자분들의 눈물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날 우리가 다함께 불렀던 노래가 4.3희생자 분들, 남아있는 유족들, 강정마을에서 싸우시는 분들까지.
모두에게 치유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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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꼼꼼한 정리로 학생들 일정을 볼 수 있네요. 고맙습니다.
한라산 등반할 때 새하 모습이 정말 힘차고 개운해 보였는데, 그게 원래 새하의 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