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요일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124위의 복자들은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이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 복자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 그가 속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하였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이날을 성대하게 지내며, 교구장의 재량에 따라 성 바오로 6세 교황 기념일도 선택하여 거행할 수 있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말씀의 초대
엘아자르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한다고 이야기하고는 바로 형틀로 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남기려고 합니다.>
▥ 마카베오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6,18.21.24-31
그 무렵 18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21 법에 어긋나는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로 데리고 가,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직접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24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25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28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형틀로 갔다.
29 조금 전까지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던 자들은
그가 한 말을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고 악의를 품었다.
30 그는 매를 맞아 죽어 가면서도 신음 중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31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죽음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고, 스스로도 수난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새로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밀알’은 사실 그저 곡식 낱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작은 씨앗일 뿐입니다. 그러나 땅속 깊은 어두움, 그 숨 막히는 공간에 자신을 맡기고 부서짐을 받아들이면 땅속의 양분들과 융합하여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게 됩니다. 씨앗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자신의 본모습을 꽃으로, 향기로, 열매로 온전히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두렵고 불안하며 불편한 시간을 받아들임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때로 놀라운 생명력을 낳는 은총의 여정이 되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만 집중하며 이를 집요하게 움켜쥐고 유지한다면, 자기 보호와 방어는 이루어지겠지만 그 어떤 창조의 힘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밴드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라는 노래에 “빛나는 열매를 보여 준다 했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을 막고 폐쇄적으로 남아 있다면 그 어떤 빛나는 열매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도전이 다가오면, 자신을 보호하려고 맹렬히 저항하기보다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이 진정한 생존의 지혜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주님을 섬기는 것을 어찌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4위 순교 복자 시복식이 거행된지 벌써 1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참 세월이 빠릅니다. 통상 바티칸 외에서 거행되는 시복식은 시성성 장관 추기경이 집전하는 것이 보통인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친히 방한하셔서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을 거행하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기념일에 다블뤼 주교님께서 쓰신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1759~1797) 대한 약전을 읽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현재 충남 금산군에 위치해 있는 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산은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 그곳에 가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진산성지(대전교구 관할)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가문은 여러 정관계 인사들을 배출한 명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예의바르고 총명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25세 되던 1783년 과거에 응시해서 진사(進士)를 취득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물론 가문의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런 윤지충 바오로가 1784년 겨울 경성에 머물렀을 때,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놀러갔다가 운명 같은 책을 두 권 발견합니다. 그 유명한 ‘천주실의’와 ‘칠극’입니다.
순식간에 두 권의 책을 읽은 윤지충 바오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두 권의 책을 사본으로 만들어 계속 탐독하였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시작된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갈증은 그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있는 여러 가톨릭 관련 서적들을 읽은 그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교리교사로부터 예비자 교리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가톨릭 관련 서적을 스스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한 윤지충 바오로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과 진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 자발성, 그 적극성 앞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의 하느님과 진리, 새로운 세계와의 달콤했던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조정은 조상제사 문제, 신주 문제를 이유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그는 즉시 관아로 자진 출두했습니다.
진산 군수와 윤지충 바오로 사이에 이루어진 심문 기록이 아직도 정확히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수: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윤지충 바오로: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진산 군수는 어떻게 해서라도 윤지충 바오로를 잘 설득해서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군수는 탄식을 터트리며 그를 전주 감영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전주 감영의 감사가 또 다시 묻습니다.
감사: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 “그렇다면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윤지충 바오로: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감사: “너는 죽게 되더라도 이 종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윤지충 바오로: “만약 제가 높으신 아버지를 부인하게 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견고한 가톨릭 신앙 때문에, 임금 앞에는 반역자, 부모 앞에는 불효자, 친구들 앞에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윤지충 바오로는 단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의연함을 드러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에 대한 사형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30대의 곤장을 맞고 난 그에게는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이 언도되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그는 33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5일에 ‘첫 영성체’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처음으로 모시는 아이들의 모습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새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맨 아이들의 모습은 천사 같았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이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아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강조이(아녜스), 강소희(스텔라), 김민준(다니엘), 김예성(미카엘라), 김재호(토마스 아퀴나스), 박서인 (헤론), 박수현(스텔라), 박세온(프렌시스), 엄율하(노엘라), 이영후(사비나), 임유빈(브루노), 장유주(로사), 전라희(벨라뎃다), 정서현(줄리아), 진도미닉(프란치스코), 릴리 지윤 페냐스(릴리아나), 아리얼 은윤 페냐스(아리얼), 홍재원(루크)” 미사 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파티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는 파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선물과 첫 영성체 증서를 주면서 파티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조금 늦은 나이인 1974년에 동생과 함께 첫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기억에 남은 것은 당시 찍었던 ‘첫 영성체’ 사진입니다. 기도문을 외우던 것도 기억납니다. 12개 기도문을 외워야 했습니다. 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첫 영성체를 하였던 저는 사제가 되었고, 동생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난 1984년에 저는 신학생이었습니다. 1984년 5월에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103위 시성식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여의도 광장에는 대형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시성식에 함께 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교우들이 여의도로 왔습니다. 당시 저는 질서유지를 위한 안내를 맡았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휴지 한 장 없이 행사가 잘 마무리 되었다고 보도 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난 1994년에 저는 보좌 신부로 용산 성당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2년 동안 본당 신부님을 3분이나 모시는 색다른 체험을 했습니다. 용산 성당은 ‘성직자 묘지’가 있는 성당입니다. 해마다 위령의 날이 되면 교구장님과 사제들이 ‘위령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난 2004년에 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에서 지냈습니다. 제가 명동의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사제로 일하게 된 것은 작은 사연이 있습니다. 2001년 저는 ‘사제 성화의 날’에 사목체험을 발표하였습니다. 저의 체험담이 바람을 타고 교구청이 있는 명동까지 전해졌고, 사목국장 신부님이 제가 있던 성당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저는 3년 동안 교육담당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난 2014년 저는 또 다시 교구청이 있는 명동에서 지냈습니다. 이번에는 성소국장의 소임을 맡았습니다. 2014년에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위한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시복식을 위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였습니다. 시복식은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습니다. 30년 전에 질서 유지를 위해서 안내하던 저는 ‘영성신심분과’를 맡아서 시복식 준비에 함께 하였습니다. 겸손하시고, 따뜻하신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에 저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첫 영성체’를 함께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첫 영성체를 보면서 저의 지난 50년을 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 영성이란 말은 흔히 순교 정신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곧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의 모든 신앙과 신념과 모범적 삶 모두를 총칭하는 것이다. 즉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생명까지도 포기하며 사는 삶,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순교 영성, 순교 정신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가장 긴밀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그분을 가장 가까이 따르는 길임을 깨닫고 그 길을 따랐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 길을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기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맹이 빠진 껍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그마한 일상에서 순교하는 삶,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 바로 오늘날의 순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할 때 그 옛날 우리의 순교자들이 목숨 바쳐 지킨 신앙을 우리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퇴색됨 없이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시련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기 때문입니다.
<복된 순교자들을 기리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에 제 낳으신 고운님 모셨기에
함께함이 삶이요 떨어짐이 죽음이라
제 목숨 빼앗길수록 영원생명 빛나네
너와 나 갈림 없이 님 안에서 하나로다
님 닮은 사람이라 모두 다 귀하기에
사람의 높낮이 매긴 냉혹 세상 부수네
님 품은 순간부터 평화의 사도이니
찢기고 억눌려도 온유함 가득하고
시퍼런 칼날아래서 찬미노래 부르네
님 따라 나선 길을 선혈로 물들이고
피 삼킨 어머니 땅에 하늘빛 드리우며
기나긴 어두움 뚫고 새하얀 새벽여네
앞서간 고운 넋들 간절히 손짓하니
두려움 떨쳐내고 한걸음에 따라가서
찬란한 새 하늘 새 땅 아낌없이 맛보리
오늘의 성인
복자 윤지충바오로와동료 순교자들
오늘은 지난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인 124위 순교 복자들의 기념일이다.
이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로,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부들 가운데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분들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997년 추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그 동안 각 교구별로 이루어지던 이들의 시복시성을 통합 추진하기로 하고, 2001년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준비를 해 왔다.
124위 복자 기념일 5월29일은 한국교회의 제안을 사도좌가 허락한 것이다.
기념일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천상 탄일로 지정되지만 사목적 이유 등으로 다른 적절한 날로 옮길 수 있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8일이지만, 이 날은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윤지충은 전주교구 순교자이므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29일로 정한 것이다.(매일미사 2015년 5월29일 전문)
복음: 요한 12,24-26: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져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려야, 즉 죽는 것과 같이 썩어야 새로운 생명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땅속에서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께서도 그러셨다. 그분은 혼자이셨고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 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을 겪으면서 영광을 받으셨고, 그 열매인 부활로 모든 이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자기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사랑을 추구하고 옳지 못한 사랑은 피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속에서 하느님을 거절하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서도 떠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고 하셨다.
우리 순교자들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갔다. 나 자신의 원의 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했으며,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욕심을 모두 거부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을 고집하였던 분들이다. 박해의 시간을 살면서 한 순간도 자신의 욕망보다는 하느님의 자녀로, 신앙으로 순교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결과였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어떻게 해 나가고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올바로 섬길 수 있으려면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자선을 할 때에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하기 위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마태 6,3 참조) 이러한 섬김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며, 마땅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체험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26절) 순교자들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섬김을 실천하며 그분만을 올바로 섬겼던 분들이었다. 우리도 그분들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그 영광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우리도 가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자
성 시지니오와 성 마르띠리오,성 알렉산델 순교자San Sisinnio, San Martirio, Sant’ Alessandro Protomartire trentino, St. sisinius, St. martyrius, St.alexander.
397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밀라노에 거주하던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까파도치아 태생들인 시지니오 그리고 마르띠리오와 알렉산델 형제들이 가장 유명하였다.
알렉산델은 ’인간의 옹호자’란 뜻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들을 트렌트의 주교, 성 비질리오에게 추천하여 설교 일을 맡기게 하였다.
시지니오는 부제로 그리고 마르띠리오 형제는 독서자로 선임되어, 이들 세 사람이 신자들이 별로 없던 알프스 건너편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전교 여행은 많은 성과를 내게 되어, 성당을 짓기까지 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성공을 달갑잖게 여기던 주민들이 새로 영세한 신자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몽둥이로 때려, 시니지오는 즉사하고 말았다.
마르띠리오는 정원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그 다음날 처형되었고, 알렉산델 역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보나(Bona)
신분: 순례자
활동지역: 피사(Pisa)
활동연도: 1156-12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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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보나는 1156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아트워터(Attwater)에게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기록에 의하면, 성녀 보나는 어린 시절부터 환시를 체험했고, 사도 성 대 야고보(Jacobus)의 축복을 받았다.
10살 때 그녀는 스스로 아우구스티노회 규칙에 따라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정하였고, 14살 때에는 예루살렘 근처에서 십자군으로 싸우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보기 위해 첫 번째 여행을 감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지중해에서 이슬람 해적에게 붙잡혀 상처를 입고 감옥에 갇혔다.피사의 동료들에 의해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다시금 여행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1천 마일에 이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사도 대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진 곳)까지의 여정이었다.이때부터 성녀 보나는 성 야고보 기사회의 후원 하에 이 유명한 순례여정의 공식적인 안내자의 일원이 되었다.그녀는 9번이나 순례를 안내했다.그녀는 넘치는 열정과 이타적인 마음을 지녔고, 아픈 이들도 그녀의 미소와 함께 기운을 되찾을 정도로 친절했다.
이미 병든 몸으로 그녀는 마지막 순례를 시도했으나 집에서 멀리 떠나지는 못했다.성녀 보나는 할 수 없이 피사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산 마르티노(San Marino) 성당 근처 그녀의 작은 방에서 1207년 5월 29일 선종하였다.1962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그녀를 이탈리아 여행 안내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성녀 보나는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7월 25일)와 함께 여행자들, 특별히 여행 안내자와 비행기 승무원 등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의 축일은 4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성 바오로 6세 (Paul VI)
신분 : 교황
활동지역 :
활동연도: 1897-1978년
같은이름 몬티니,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콘체시오(Concesio)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조르지오 몬티니(Giorgio Montini)는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Il Cittadino di Brescia)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어머니 주디타(Giuditta Alghisi)는 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다.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으나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1903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Cesare Arici Institute)에 들어가 1914년까지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rnaldo da Brescia)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 통학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그는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으며,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A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si)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11월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FUCI)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연맹과 대립하여 싸우기도 했다. 1931년 다시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1937년 12월 13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뇰로 임명되었다. 1939년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 선출된 후에는 새 국무원장 루이지 막리오네(Luigi Maglione) 추기경을 보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미국가톨릭복지협회(NCWC)와 교황청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 Migration Commission)의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Milano)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많은 성당을 신축 · 보수하고 사목방문에 힘쓰며,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사회교리를 설교하여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권했으며,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의 임원직을 맡아 공의회 제1회기(1962년)에 참석하였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성 요한 23세가 선종한 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를 교황명으로 택하고, 6월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발표했고, 제4회기까지 열린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막되었다. 제4회기(1965년) 때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이 착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1964년 1월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12월에는 세계 성체대회 참가를 위해 인도 뭄바이(Mumbai)를 방문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UN) 본부를 방문해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을 방문했다. 1968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콜롬비아를 찾아 보고타(Bogota) 세계 성체대회와 메데인(Medellin)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 참석했으며,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회일치사무국과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였다. 1970년에는 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필리핀 마닐라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대표 문헌으로는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재확인한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공동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제안한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부부 관계와 정결의 가치, 올바른 자녀 출산을 위한 부모와 의료인과 사목자의 역할을 설명한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현대 세계에 부응하는 선교의 방향을 논한 “현대의 복음 선교”(Evagelii Nuntiandi, 1976) 등이 있다.
공의회 이후 전통주의자들의 반발과 국제 정세의 불안 등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증진하고 허례허식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의회 제3차 회기를 앞둔 1964년에는 여성, 수도자, 평신도의 공의회 입회를 허용했고, 1970년에는 여성 최초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받았던 삼중관(tiara)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8년 8월 6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 별장에서 미사를 드리다 심장마비로 선종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인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까지 공의회를 이끌었으며, 공의회 문헌을 반포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해 나갔다. 1964년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해 정교회 수장이었던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만나 그리스도교 일치에 앞장섰고, 세계 성체대회 개최지인 인도를 방문하며 아시아 땅을 밟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196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제정했으며, 재임 기간 중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리고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2014년 10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성 요한 23세와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인 제262대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시복식은 바오로 6세 교황 재임 중 제정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폐막 미사 중에 이루어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은 그의 전구(intercession)로 일어난 기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5월 9일 승인함으로써 결정되었다. 본인과 태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낙태를 종용받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임신부가 한 이탈리아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 수녀가 바오로 6세 교황의 상본(holy card)과 제의 조각을 임신부의 배에 놓고 기도한 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2018년 10월 14일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가 열리는 중에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시복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미사에서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바오로 사도처럼 새로운 경계를 넘어서, 복음 선포에서나 대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외향적인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당신 스스로 지혜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셨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우리의 공동 소명, 곧 성덕을 향한 보편적인 소명을 살라고 오늘도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성덕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라고 그의 성덕을 칭송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시성으로 역대 교황 중 성인은 82명(대립교황 교부 히폴리투스 포함), 복자는 9명이 되었다. 20세기 교황 중에서 성인품에 오른 이는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와 더불어 총 4명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2월 6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을 통해 성 바오로 교황의 기념일을 제정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일반적 관례에 따르면 성인의 축일은 선종일로 지정하는데, 선종일인 8월 6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임을 고려해 5월 29일을 선택 기념일로 지정했다. 5월 29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20년 사제품을 받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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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 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편집장 안드레아 몬다는 41년 전 1978년 8월 6일 선종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을 소개했다. 그는 1900년대 ‘가톨릭 운동’ 역사의 참된 주인공이었다.
Andrea Monda / 번역 이창욱
1978년 8월 6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세속명: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의 ‘천상 탄일(dies natalis)’이다. 1900년대의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 백성 안팎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과의 영적인 가까움을 전혀 숨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6년 재임기간 동안에는 그 이해가 더욱 증폭됐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선임자인 성 요한 23세 교황의 선종 이후 중단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무사히 재개했고,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을 반포했으며, 최초의 해외 사도적 순방과 교회 일치 운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주(州) 콘체시오에서 태어나 냉전과 같은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됐던 그 끔찍한 해에 선종함으로써 20세기의 3분의 2를 거쳐간 그의 삶은 풍성한 모자이크화처럼 수많은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정치적 차원
그 다양한 측면 가운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말년 생애에서 필자는 그의 정치적 차원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 5월 22일부터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실린 사회학자 주세페 데 리타(Giuseppe De Rita)와의 인터뷰 시리즈를 통해서다. 여기엔 이탈리아와 유럽의 위기, 서양 사회에 대한 커다란 난관의 순간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역할에 관한 대화가 담겼다. 데 리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성 바오로 6세 교황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25-1933년 이탈리아 가톨릭 대학 연맹(Federazione Universitarià Cattolica Italiana, 이하 FUCI)의 전국 지도신부를 맡았던 순간부터 1900년대 정치에서 가톨릭 운동사의 참된 주역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 토론에 발제자로 참여한 약 25명의 학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특히 사회 투자 연구원(Centro Studi Investimenti Sociali, CENSIS)의 설립자 주세페 데 리타는 이탈리아 정치가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가 이끈 기독 민주당(partito della Democrazia cristiana)의 출범을 통해 전쟁의 비극에서 이탈리아가 벗어나는 데 있어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활동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강조했다. 이 견해는 이탈리아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긴 역동의 시기에서 또 한 명의 중심인물은 알도 모로(Aldo Moro)였다. FUCI에서 활동하던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몇 년 동안 알도 모로를 알았고, 끝까지 그와 함께했다. 5월 13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도 기념비적인 언급을 통해 그를 기억했다. “주님께서는 이 착하고, 온유하며, 지혜롭고, 무고하며, 친구였던, 알도 모로의 안전을 위한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새로운 욥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3개월 전인 1978년 비극적인 봄에 일어난,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악(알도 모로의 암살)에 대해 하느님께서 갚아달라고 탄원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인터뷰 시리즈는 오늘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 괄티에로 바세티(Gualtiero Bassetti) 추기경의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세 번째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바세티 추기경은 다른 대담자들에 의해 부각된 예언이라는 주제에 관한 몇 가지 실마리를 얻으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위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활동적인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면서도 혁신가들입니다. 신앙과 절제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온유해야 합니다. 혁신이란 세상(세속)의 정신, 곧 이기주의, 허무주의, 소비주의와 외국인 혐오주의를 반대하며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언적인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탈리아 주교회의(CEI) 의장이기도 한 바세티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정치가) 조르조 라 피라(Giorgio La Pira)를 언급했지만, (그 인물에 대한) 묘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천상 탄일을 기억한다. 지난 1978년 8월 6일 고령의 교황은 삼종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훈화를 마무리했다. “그 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영예롭게 했거나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책임인 말과 행동으로 논리적인 결과에 맞게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그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을 이미 맛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교회 전체도 그렇게 확신한다.